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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관광장관, ‘2030년까지 인적교류 4000만명 달성’ 협력한·중·일 3국 간 인적교류를 현재 3000만 명 수준에서 2030년까지 4000만 명으로 늘리겠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선언문이 채택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유인촌 장관과 일본 국토교통성 사이토 테츠오 대신, 중국 문화여유부 장정 부부장 등 한·중·일 3국 대표가 지난 10일과 11일 일본 고베에서 열린 ‘제10회 한·중·일 관광장관회의’에 참석했다고 11일 밝혔다. 한·중·일 3국 관광장관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지난 2019년 8월 인천에서 열린 제9회 한·중·일 관광장관회의 이후 5년 만으로, 그동안 코로나19 등의 이유로 관광장관회의가 연기된 바 있다. 이번 회의에서 3국 관광장관은 2030년까지 연간 인적교류 4000만 명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논의하고 3국 관광산업이 균형적이고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 함께 협력하자고 약속했다. 이번 회의에서 ▲코로나19 이후 3국 관광 교류의 조속한 회복 ▲지속 가능한 관광의 중요성 ▲지역관광 활성화 등 관광 교류의 질적 향상 등 3가지 분야에서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특히 2030년까지 3국 간 4000만 명 달성하고자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협력을 다짐했다. ‘3국 인적교류 4000만’ 목표는 지난 5월 서울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리창 중국 총리가 만나 채택한 제9차 한·중·일 정상회의 공동선언에도 담긴 내용으로, 이번 관광장관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협력방안을 모색했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이번 관광장관회의는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주춤했던 3국 관광 협력의 체제를 복원하면서, 향후 실질적인 협력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분기점을 마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역내 교류 확대를 위한 출입국 편의, 미래세대 교류 확대에 대한 논의는 물론, 질적인 측면에서 일본 정부와는 양국 간 관광 교류의 균형적인 성장을, 중국 정부와는 저가 상품 단속을 위한 공조를 협의하는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3000만 명 수준인 교류 규모를 2030년까지 4000만 명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비전과 함께, 역외 관광객 유치 협력도 강화하기로 했다”며 “3국 밖의 장거리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중·일 공동 관광상품을 홍보하기 위해 3국이 상담회, 세미나 등 협력사업을 시행한다는 내용을 공동선언문에 구체적으로 담은 것은 고무적”이라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공동선언문에는 다변화되고 있는 관광수요를 고려해 지역 고유의 자연과 문화, 역사적 자원 등 지역이 가진 잠재력을 활용한 관광 콘텐츠를 마련하고 고부가가치화를 지원해 지방의 관광객 유치 촉진과 관광산업의 질적 발전을 도모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유 장관은 기조연설에서 “3국 모두 저출생과 지역소멸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고 이러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3국은 지역관광을 활성화하는 데 총력을 다해야 한다”며 “앞으로 지방 도시 간 교류 확대, 체험 콘텐츠와 관광 동선의 다변화를 통해 특정 도시로의 집중을 해소하고 균형적인 성장을 모색할 때”라고 강조했다. 한편 유 장관은 이번 본회의에 앞서 지난 10일 한일 관광장관 양자회의 참석에 이어 오는 12일 한중 문화·관광장관 양자 회의도 참석한다. 한일 관광장관 양자회의에서는 한일 양국은 한국인의 방일 규모와 일본인의 방한 규모 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양국 간 정책 협력을 논의한 바 있다. 이와 함께 ▲2025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공동 사업 추진, 교육 여행 등 양국 미래세대 간 교류 활성화 ▲구·미주의 장거리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3국 공동관광상품 홍보방안 등도 논의했다. 12일 교토에서 열리는 한중 문화·관광장관 양자회의에서는 한중 양국은 상호 인적교류 촉진을 위한 관광객 편의 제고 방안과 양국 여행업계 협력 확대, 저가상품 단속 공조를 위한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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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축제' 첫 개최, 시대의 물음에 인문으로 답하다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이하 문체부)는 9월 20일(금)부터 22일(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아르코꿈밭극장 등에서 ‘시대가 묻고 인문이 답하다’를 주제로 ‘제1회 인문문화축제’를 개최한다. 문체부는 초연결 시대 속에서 느끼는 일상의 외로움,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경험하는 내면의 공허함, 급변하는 환경에서 날로 찾기 어려워지는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의 해법을 문화와 예술에서 모색하고자 올해 처음으로 ‘인문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인문 강연과 공연, 전시 등으로 우리의 안녕을 묻고, 마음을 채우고, 진정한 삶의 방향을 생각하는 축제 이번 축제에서는 ▴초연결의 시대, 고독·단절은 왜 심화되는가(우리의 안녕), ▴풍요로운 시대, 우리의 마음은 풍요로운가(마음 채우기), ▴진정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삶의 나침반)라는 3가지 소주제를 중심으로 주제별 특색에 맞는 인문 강연과 공연, 전시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축제의 시작은 9월 20일 오후 2시, 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 남측광장 앞의 주무대에서 멜랑콜리 댄스컴퍼니의 공연 <초인>으로 알린다. <초인>은 철학자 니체가 언급한 ‘초인(Übermensch)’을 현대인의 삶에 빗대어 무용으로 표현한 공연으로 불안과 고뇌가 가득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현대인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이와 함께 ▴오은 시인의 ‘내가 만드는 풍요’, ▴이슬아 작가의 ‘사랑과 글쓰기’, ▴정재찬 교수의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배움에 관하여’, ▴정호승 시인의 ‘노래가 있는 정호승의 시 이야기’, ▴유기쁨 작가의 ‘일상에서 만나는 생태학: 생명세계에서 살아가는 삼각’, ▴고명환 개그맨의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한 한 가지를 고른다면?’ 등의 강연이 이어진다. 9월 21일에는 ▴강창래 작가의 ‘초연결의 시대 진정한 연결, 즐겁고 행복한 글쓰기’, ▴나민애 교수의 ‘책이 깃든 삶, 나를 위한 삶’, ▴문정희 시인(국립한국문학관장)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이지현 널 위한 문화예술 대표의 ‘소통하는 미술의 힘: 인간사 저변의 변화를 이끄는 동력’, ▴장강명 소설가의 ‘스낵 정보의 시대’, ▴조전환 목수의 ‘집과 집 사이, 건축물과 인간의 공존’, ▴조현 기자의 ‘타인은 지옥인가’, ▴최준영 (사)인문공동체 책고집 대표의 ‘인문학에서 소통과 희망을 찾는 사람들’ 등의 강연이 열린다. 권수영 교수와 김중혁 작가, 박상미 교수, 송길영 작가는 ‘지금 새로워진 우리, 안녕하신가요’라는 주제로 토론을 진행한다. 9월 22일에는 ▴고영직 평론가의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 김새섬 대표의 ‘나를 살린 함께 읽기’, ▴김용택 시인의 ‘자연이 말해주는 것을 받아쓰다’, ▴박준 시인의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송주원 안무가의 ‘도시공간무용프로젝트 풍정.각’, ▴이정임 작가의 ‘무용한 것들의 연대’ 등의 강연을 만나볼 수 있다. 축제의 마지막은 신영준 예술감독이 연출한 공연 <부엔 카미노(Buen Camino)>로 장식한다. ‘부엔 카미노’는 스페인어로 ‘좋은 길’을 의미하며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질 때 자주 사용되는 인사말이다. 이 작품은 코로나19 시기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던 신영준 안무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존재의 무게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깊은 성찰을 풀어내며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성찰의 필요성을 전한다. ‘예술×인문’, 행사장 곳곳에서 야외 공연, 체험관 등 다채로운 인문학 경험 선사 이번 축제에서는 예술과 함께 쉽고 재미있게 인문적인 경험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행사도 마련했다. 박찬영 첼로 연주자와 조홍신 피아노 연주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청년브라스밴드가 다채로운 음악 공연을 선사하고 이치훈 케렌시아 대표는 ‘명상 수업’을 선보인다. 9월 독서의 달을 맞이해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도서’ 500여 권도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행사장에 비치할 예정이다. ▴50대 중장년들이 멘토로 참여하는 ‘인생나눔멘토링’, ▴일상 속 문제를 인문적 관점에서 탐색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보는 ‘청년인문실험’ 프로그램, ▴인문 가치를 일상에 공유하는 ‘길 위의 인문학’ 등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체험관도 준비했다. 어린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인문을 경험하도록 ‘나만의 일기장 만들기(커스텀 북바인딩)’, ‘팝아트 인문학’ 등을 진행하는 ‘어린이 인문관’도 운영한다. 대학로 아르코꿈밭극장에서는 9월 21일에는 박완서 작가 동화 원작 <자전거 도둑>이, 9월 22일에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우리는 모두 자연과 이어져 있다는 깨달음을 선사하는 <숲 이야기>가 낭독극으로 무대에 오른다. ‘말랑한 인문관’에서는 권수영 교수 등과 함께 고립, 단절이 가속화되는 시대에 사회적 관계의 회복으로 새로워질 우리를 주제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소통한다. 민간 공익재단 등 참여, 서울과 울산에서 수준 높은 인문 프로그램 운영 이번 축제에는 민간 공익재단도 참여해 서울과 울산 등지에서 수준 높은 인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우재단은 ‘칸초니에레: 페트라르카의 사랑과 삶의 노래’와 ‘과학기술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한다. ▴아모레퍼시픽재단은 ‘인공지능(AI)과 인류의 미래’라는 주제로 ‘장원(粧源) 특강’을 개최하고, ‘우주리뷰상 서평공모전’을 후원한다. ▴아모레퍼시픽공감재단은 ‘룩앳미(Look at ME) 청년 마음 전시 <랜덤 다이버시티 2024 : 더 레터〉’를 선보인다. ▴포니정재단은 인공지능(AI)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위한 ‘인문학 가을 학교’와 ‘포니정 인문학 학술대회’를, ▴플라톤아카데미는 울산에 소재한 지관서가와 지역 인문공간에서 인문활동 프로그램과 대중 인문강연 프로그램을 개최한다. ▴한국정신문화재단은 ‘인간다움, 사회적 관계의 회복’을 주제로 토론과 고독·단절 등에 활력을 처방하는 체험행사를 운영한다. 아울러 축제장에서는 환경부의 후원으로 투명 페트병을 별도로 배출하고 활용하는 등 친환경 축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노력도 기울인다. 이번 축제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과 다양한 인문 강연 신청 방법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www.arko.or.kr)와 인문360 누리집(inmun360.culture.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인촌 장관은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해 전 세계가 긴밀히 연결된 초연결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개인의 고독과 사회적 단절은 심화하고 있다.”라며 “이번 인문문화축제는 인문학적 성찰과 지혜를 통해 우리가 마주한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답을 모색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다양한 문화와 예술적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방향을 고민해 보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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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마음으로 짓는 농사, 도상록 동덕을 만나다"저는 제 존재의 가치를 한울님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한울님이 내려주신 거지 스스로 이룬 것이 없습니다." 충남 서산 가림다영농조합에서 홍삼을 생산하여 유통하고 있는 도상록 동덕을 만났다. 도상록 동덕은 맨몸으로 홍삼액 가공에 뛰어든지 20년이 넘었다. 서산은 토질이 황토 찰흙으로 유기물이 풍부해 인삼의 유효성분을 높여줄 뿐 아니라 서리가 내리는 기간이 짧아 인삼 생육기간이 길고, 여름에는 서늘한 서해 갯바람이 불어와 한여름 고온 피해를 줄일 수 있어 인삼 재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라고 한다. 한울마음으로 짓는 농사는 어떻게 다를까? 도상록 동덕에게 물어보았다. 물질은 풍요롭고 이제 소비자들의 선택에는 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먹거리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제품을 만드는가, 이 농사를 짓는가, 내가 식탁에서 먹는 이 농산물을 생산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만나 뵙는 동덕님의 이야기가 더 궁금합니다. 현재 인삼을 재배하고 유통하고 계신데, 농사를 지으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한살림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한살림에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한살림의 근본적인 취지가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 인데요, 제가 그 취지에 동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한살림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매듭을 짓는 것은 귀농이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저농약, 무농약, 유기재배 농사 등 친환경 농사가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친환경 농산물을 단순히 자신들의 건강만을 위해서 필요로 하고, 생산자들은 값비싸게 팔 수 있다는 논리로 규정해 버리면 친환경 농사도 상업적인 범주에 갇혀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관행농법과 다르지 않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우를 범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지속가능한 농사를 실현하고 싶어서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한살림의 기본 취지가 해월 선생님의 “밥 한 그릇을 제대로 아는 것이 모든 세상 이치를 아는 것이다”라는 말씀에 충분히 저하고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천도교를 믿었는데, 저의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연결돼 있더라고요. 한살림에서 일하실 때와 농업 현장은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농사에 있어서 동덕님의 특별한 철학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한살림 취지에 맞게 농사를 지어야 하기도 하고요. 좀 거창하지만, 내가 짓는 이 농사는 천지만물을 살리는 농사여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단순히 우리가 어떤 농작물을 재배해가지고 상품으로 팔아가지고 밥을 먹는다는 그런 단순한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굉장히 소중해요. 그렇지만 땅을 죽이는 농사를 지으면 또 안 되잖아요. 그래서 땅을 살리는 농사, 땅을 살릴 수 있는 농사를 짓는 것에 저는 가장 큰 의미를 두고 해왔습니다. 살아있는 땅에서 생산된 인삼이야말로 사람을 또 살릴 수 있는 약재가 되는 것 아닙니까. 특히 인삼은 사람들이 약으로 많이 먹잖아요.그래서 그런 부분에서는 좀 더 마음을 쓰면서, “땅 보기를 어머님 살같이 하라”는 해월 선생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품고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저는 천도교인으로서는 그런 농사를 짓지 않으면 제대로 된 농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삼을 직접 재배하시고, 또 홍삼 제품으로 제조하고 계신데, 선생님이 만드신 제품을 드시고 건강이 좀 회복됐다는 말씀 들으시면 보람도 크시겠어요. 우리 인삼은 역사적으로 약 중에 상약이고 그런 꾸준한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유행을 타지 않는 건강식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홍삼을 믿고 이용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또 생활습관, 개인의 특성이 잘 맞아야 효과를 볼 수 있겠죠. 그런 부분들이 각자 개개인의 체질과 잘 맞으면 중증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한 사례는 분명히 있죠.선생님, 특별히 인삼 농사를 하시게 된 계기도 있을 것 같은데,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일단 고려인삼은 우리 한반도가 고유한 원산지로 보시면 돼요. 고려인삼은 한반도를 품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끼친 영향이 너무나 큰 민족문화유산 입니다. 여기서 일일이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고려인삼은 우리민족의 운명과 그 궤를 함께했다고 확신합니다. 그 부분은 저의 학위논문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고려인삼을 재배해 온 거죠. 우리가 동학이냐 서학이냐, 했을 때 내가 동쪽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동을 서라 하며 서로 동으로 하겠느냐 그런 이치죠.일단 그래서 저는 우리 한반도에서 나는 인삼을 가지고 어떤 질병으로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고 충분히 그걸로 보람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려인삼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예방을 했기 때문에 저는 그 맥을 잇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남북이 또 분단돼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어서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인삼은 서늘한 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 남쪽에는 인삼을 심을 수 있는 땅이 점점 고갈돼 가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는 기후위기를 불러왔고 기후위기의 가장 취약한 부분의 하나가 농사 입니다. 사과를 비롯한 과일값이 갑자기 폭등한 이유는 우리나라 농산물의 유통구조도 한몫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후위기 입니다. 연구자들의 견해에 따르먼 2090년 쯤에는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고려인삼 재배할 수 있는 땅이 현재와 비교해서 5% 밖에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려인삼의 재배지는 위도가 높은 북쪽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부터라도 북쪽과 자연럽게 교류하면서 고려인삼의 재배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고려인삼을 계기로 남북이 교류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선한 마음이 향하는 선한 일들이 결국은 세상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로 만들어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사람과 땅과 사람과 자연을 함께 살리는 농사가 되어야 하죠. 어느 한 부분만 보고 농사를 짓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저는 보기 때문에 이제 하늘, 땅, 사람을 조화롭게 보아야 겠죠.천지인이 다 이롭게 할 수 있는 농사, 그래서 그런 부분이 저의 보람으로 나타난다면 굉장히 소중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 농장과 공장을 돌아보며 선생님이 홍삼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담는 마음과 함께 작업을 같이 하시는 동료분들과도 굉장히 끈끈한 연대, 팀웍이 돋보이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우리가 일을 함에 있어 추구하는 가치가 각기 다르면 일이 잘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분들이 공감하고 동감해주기 때문에 같이 일을 저는 할 수 있다고 보고 서로가 동감하는 순간 확실한 상승작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단순히 그냥 밥벌이를 하는 것이 아니다, 땅과 사람과 하늘, 자연을 살리는 그런 일을 한다는 가슴 뿌듯함이 우리 내부에서 함께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올해가 대신사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며 홍삼 판매 수익의 일정부분을 성금으로 돌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교인분들게 큰 울림을 주고 계신데 천도교 신앙의 힘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어 운이 좋습니다. 천도교나 동학을 몰랐다면, 천도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저는 사람과 땅을 이해하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끈끈한 연대에도 한없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해월 선생님의 ‘밥 한 그릇 사상’, 이 부분이 저한테는 절대적이었고 그런 마음이 결국은 지금 저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고 내가 그 부분을 현실에 맞게 키워나가느냐, 이 부분에서는 당연히 저는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수익금의 일부를 대신사님 출세 200주년 행사에 조금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저는 제 존재의 가치를 한울님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한울님이 내려주신 거지 스스로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신앙의 힘으로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가슴에 품고 계시는 스승님의 말씀이 있다면 어떤 말씀이 있을까요? 조금 전에도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해월신사님께서 성(誠)경(敬)신(信)편에서 하신 말씀인데요,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는 구절입니다. 땅이 살면 사람이 살고 땅이 죽으면 사람도 살지 못합니다. 해월 신사님께서 ‘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디 땅 뿐이겠습니까? 천지 만물을 아끼고 존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동덕님께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공해서 유통하는 과정에 스승님 말씀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겠어요 그렇죠 일단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저 스스로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저는 한울사람으로서 한울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저의 존재가치를 한울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봐요. 그래서 그 한울 일이라는 것이 나를 살리고 남들도 살려내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재물을 갖게 된다면 그것도 사람을 살리고 나도 살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요.본래 내 것은 전혀 없잖아요. 다 한울님이 내려주신 어떤 재물에다가 나의 일 노동이 합쳐져서 비로소 재화가 되는 거잖아요. 동덕님이 재배하신 인삼으로 만든 홍삼을 드시는 얼굴도 모르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도 모르는 분들, 오직 선생님의 홍삼을 통해 선생님과 만나고 계시는 분들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말씀 해주세요. 그리고 가림다 영농조합에서 생산되는 홍삼제품의 특성을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이 사실 전달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이심전심이라는 말을 믿어요. 그건 제가 얼마큼 정성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봅니다.우리 사회 시스템이 단절돼 있고 눈에 잘 안 보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정성을 들이면 분명, 받아보시는 분들께서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희 들은 인삼을 생산할 때 기본적인 약속을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첫째,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농사을 짓다보면 풀과 굉장한 갈등을 해야합니다. 적당하게 타협을 해야 하는데 농촌의 일손 부족으로 그냥 제초제를 사용하여 말끔하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농사방법입니다. 이것은 땅을 죽이는 행위이고 결국 사람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저희들은 사람의 손으로 뽑습니다. 둘째,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화학비료는 식물 에게는 정크식품입니다. 그런 화학비료를 사용하여 재배한 작물은 사람에게도 좋을 리가 없겠지요. 셋째, 토양살충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농법은 뿌리를 주로 이용하는 작물이기에 굼벵이나 거세미같은 땅속 벌레들이 인삼의 생육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미리 예방을 하는차원에서 땅속에댜 농약을 사용합니다. 벌레들이 살지 못하는 땅에 서 재배된 작물이 사람에게 도움을 줄수는 없겠지요. 넷째, 가축의 분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축 사료는 98% 이상 수입에 의존하는데, 수입 사료의 원료가 되는 곡물은 유전자 조작된 작물이 대부분 입니다. 그런 곡물을 먹고 배설한 분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거름을 사용합니까? 저희 들은 인삼을 심을 밭의 땅심을 돋우기 위해 2년동안 밭에 수단그라스, 호밀, 보리 등을 심어 자라게 한 다음 갈아엎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땅심을 돋우고 마지막에 볏짚을 충분히 넣어 받을 만든 다음 인삼을 심습니다. 따라서 퇴비나 축분 등 별도의 거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덧 붙힌다면 저희들은 홍삼을 만들어 3년 간저온 숙성시킵니다. 그러한 원료로 홍삼액을 추출하기 때문에 홍삼 추출액이 부드럽고 풍미가 좋아집니다. 홍삼 달이면서 이것을 드시는 분들이 건강하시면 좋겠다고 저는 거기서 그렇게 기도를 해요. 스테인리스 추출기 속에 들어있는 거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과 정성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어떤 것이 있을 까요? 두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려인삼이 남과 북에서 각기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무형문화재라고 하고 북쪽은 비물질 문화유산이라고 합니다. 저는 고려인삼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로 남과북이 힘을 합쳐 공동등재를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두번째는 고려인삼을 남과북이 공동브랜드로 만들어 고려인삼의 세계화를 이루어냈으면 합니다. 이것의 의의는 한민족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려내는 문화적인 측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등 앞으로 예견되는 셰계 적인 감염병을 예방하는 차원으로서 고려인삼을 이용한 신약개발이 남과북이 그간 축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인류에게 도움이 되도록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남과 북이 서로 미워하지 말고 혐오하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소통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입문의)https://smartstore.naver.com/garimda 리플렛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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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일기념 특강 "해월 최시형의 밥상" 강사 목암 전희식제161주년 지일기념을 맞이하여 "해월 최시형의 밥상"이라는 주제로 특강이 있었다. 일시 : 포덕165(2024)년 8월 11일 13:00 장소 : 천도교 남해 중앙교당(경남 남해읍 북변리 279-7) 강사 : 전희식 주최 : 천도교 고현 · 남해 · 선구 · 포상교구 · 남해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후원 : 천도교중앙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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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청년회, '청년, 통일을 잇다' 간담회 참석9월 5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는 「청년, 통일을 잇다」라는 주제로, 청년미래위원회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간담회에서는 청년평화통일 단체에서 진행하고 있는 평화통일 활동의 주요 성과를 공유하는 시간을 갖고, 개선 방향과 제언을 통해 평화통일 운동의 방향과 역할을 새롭게 모색하는 논의를 하였다. 이 행사에는 이재선 천도교 청년회장과 조영은 천도교 청년회 사무국장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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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을기 깃발을 들고, 907기후정의행진궁을기 깃발이 907기후정의행진 대열에 펄럭였다. 서울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2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기후위기 대응 집회가 열린 가운데 천도교 서울교구, 천도교 한울연대에서는 많은 교인들이 참가하여 발걸음에 힘을 보탰다. 참가자들은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는 슬로건으로 기후 불평등과 부정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615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907 기후정의행진'은 7일 오후 3시부터 서울 강남역에서 집회를 열고 "기업의 이익과 경제 성장이 자연과 생명보다 우선인 세상이 자리잡았다"고 주장했다. 이날 강남 교보사거리부터 강남역 11번 출구까지 대로가 집회 참가자들로 꽉 찼다. 미취학 아동부터 80대 어르신까지 성별과 나이, 국적 상관 없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참가자들은 오후 5시부터 강남역에서 테헤란로를 따라 삼성역 방향으로 행진했다. 경찰은 교통을 통제하고 행진 대열 인근에 경비를 섰다. '기후 재난 못 참겠다', '핵폭주를 중단하라', '개발을 멈추고 세상을 바꾸자' 등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던 이들은 바닥에 모두 죽은 듯 잠시 드러눕는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기후재난에 사라져 간 생명을 애도하는 의미다. 907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는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강남역 일대에서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를 슬로건으로 ‘기후정의행진’을 개최했다. 전 세계에서는 매해 9월 유엔총회를 앞두고 다양한 이들이 참여하는 기후행진이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인 2020·2021년을 제외하고 올해 네번째 행진이 열렸다. 천도교 서울교구와 한울연대는 3시 본 집회에 앞서 2시에 종교환경회의(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환경단체)와 함께 탈핵기도회에 참여한 후 본 집회에 참여하였다. 탈핵활동을 하는 지방의 여러 단체들이 함께 한 기도회에서는 천도교 부산대남교구 임우남교구장이 기도문을 발표하였다. 아래는 천도교한울연대에서 발표한 기도문 전문이다. 기도문 아, 기후정의를 목놓아 외쳐대는 지금 어찌하여 너와 나의 삶의 격차가 이리도 벌어졌다는 말인가 자본과 탐욕으로 팽팽히 움켜진 구심에 밀려 허덕이다 뜨거워진 지구밖으로 동댕이쳐진 생명들이여 그 가련하고 처참함을 어찌 말로 다하리 청명한 원심력을 향한 믿음이 산산조각났는가 내 몸하나 중심잡기도 어렵도다 더 촘촘히 손을 잡자 맑게 깨어 있는 마음 가진 자들이여 더 촘촘히 어깨를 붙여 밀착하자 우리의 속도로 흰눈을 만들고 얼음을 만들자 우리들 마음이 천지의 공기라 저 높은 산은 높은대로 흐르는 구름은 흐르는대로 놓아두자 다져진 삶의 기술과 믿음은 우리 궤도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 맑게 깨어 있는 마음 가진 자들이여 아무리 억압과 차별과 핍박이 난무해도 너와 나 우리들의 참된 정신은 어느새 씨줄날줄 엮어들어 걸러낼 터이니 거룩하다 우리들의 존귀함이여 우리들의 참된 정신이여 무지와탐욕의 핵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분해되지않도록 더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더 이상 타들어가지 않도록 한울님 천지부모님 기도하나이다 2024907 기후정의행진 천도교한울연대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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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여성회본부, 이웃종교 화합행사 참여지난 9월 6일부터 7일까지 한국사회평화협의회(대표회장 김회인)가 주최하는 ‘이웃종교 화합행사’에 천도교여성회본부 박징재회장 외 실무진과 회원 10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번 행사에서 각 종교의 교인과 신도 70여 명은 천도교의 전주 동학혁명기념관과 유교의 전주향교, 원불교의 만덕산 초선지, 증산법종교본을 방문하며 상생과 평화를 위해 서로 다름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참가자들이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을 방문하였을 때, 이윤영(천도교 직접도훈)기념관장은 자세하고 해박한 해설로 동학 · 천도교의 교리와 역사를 설명해 주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번 ‘이웃종교 화합행사’는 ‘종교화합의 밤’ 프로그램을 끝으로 1박 2일의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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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7) - 본래 생명 회복하기참회와 반성은 내존재와 삶을 가능하게 해준 성령, 한울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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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공경하며 살아가기어떤 사람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편한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 화를 잘 안 내는 사람, 말이 무겁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 배려심 있는 사람, 양보하며 베풀기를 잘하는 사람 등을 꼽는다. 그런 사람은 남을 공경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누구나 그런 사람을 좋아하리라. 나는 매일 새벽 수련을 하는 사람들과 같이 읽는 ‘오늘의 말씀’이 있다. 오늘 말씀에는 자기 자신과 남들을 공경하라는 취지의 말이 있었다. 공경하며 사는 게 쉬울까 어려울까? ‘오늘의 말씀’에서는 많은 사람이 힘들게 산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비통함과 한 맺힌 생각에 기반한 행동을 하는지를 알면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했다. 근데 그게 좀 어렵다. 또 의문이 든다. 어떻게 하면 늘 사람들의 비통함과 맺힌 한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말이다. 최근에 우리 마을 주민 대상으로 서명을 받을 일이 있었다. 실수로 감옥에 간 마을 사람이 있어서 탄원서를 내려는 것이었다. 탄원서나 진정서, 소장이나 준비서면, 진술서 등을 많이 써 봤기에 무난하면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탄원서를 써 들고 집집을 다니며 서명을 받는데 반응이 정말 흥미로웠다. 첫째는 거절하는 사람이다. 자기 이름 석 자를 쓰지 않겠다는 사람이다. 너무 놀랐다. 자기 이름을 저렇게나 고귀하게 간직하려고 하는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그 이유로 감옥에 가 있는 사람과의 이런저런 꼬인 일화들을 꺼내 들었다. 대단한 소신파다. 둘째는 “서명을 하기는 하는데요.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감옥 갔지요”라며 훈계를 하는 사람이다. 셋째는 무조건 파다. “나오고 봐야지요. 날도 더운데 감옥소에서 무슨 고생이람.”이라는 사람이다. 아주 시원시원하다. “서명하면 나온 뎌? 그라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하지 뭐”라고 덧붙인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사람 됐어.”라고도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니 무조건 서명하는 사람이다. 이 세 번째 사람에 주목해 보자. 자기 잘못으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비난하거나 훈계하기에 앞서 그런 그의 (잘못된) 선택마저도 공경하며 서명을 하는 사람. 자초지종은 나중에 들어도 된다는 듯 서둘러 서명하는 이 사람. 앞뒤 가리지 않고 남을 공경함으로써 스스로 ‘공경하는 사람’이 되었다. 욕을 하면 욕하는 사람이고 흉을 보면 흉보는 사람인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의 마을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 일단 건져놓고 본다는 식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니까 일단 서명을 해버리는 사람이다. 서명을 한 어느 사람은 감옥에 있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라고까지 했다. 뚜렷한 이유도 없다. 자기가 서명한 사람이니 좋은 사람이라는 식이다. 서명을 안 하고서 “그 사람 좋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절대. 절대로. 물에 빠진 사람에게 보이는 다섯 가지 반응이 있다고 한다. 1. 물에 뛰어들어 건지는 사람. 2. (수영을 못하므로) 소리를 질러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태를 알리는 사람. 3. 왜 빠졌대? 물은 깊어? 한가하게 원인을 따지는 사람. 4. 수영도 못하면서 물엔 왜 들어갔어. 바보 아냐?라며 물 빠진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유형은 이렇다고 한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공경이라는 것이 실천을 말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눈 감고 하는 기도는 섬세하며 직접 연결되는 기도이긴 하다. 효력 역시 섬세하고 은근하다. 이런 기도는 높은 정성과 집중력, 특별한 기도 빨 없이는 어림도 없는 기도 방식이다. 실천(기도)은 좀 거친 면은 있으나 강력한 효과를 낸다. 말과 글의 실천보다 몸뚱이 실천이 더 그렇다.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반듯한 사람이 아닌, 그냥 보통에도 못 미치는 이를 공경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높은 공경하는 삶으로 도약하는 디딤돌이라 하겠다. 공경하며 살면 더 공경을 베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유형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진리다. 그러니 오늘 우리 공경하며 살자. 아니 내일도 모레도.. 목암 전희식(진주교구. 한울연대 공동대표/ 마음치유 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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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동시 - 박씨부인박씨 부인 몰락한 양반의 아내로서 말못할 지질한 고생을 겪어온 박씨 부인 하지만 남편인 수운 최제우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게 세상 사람 같지 않고 처자한테 참으로 지극하게 하는 걸 봐서 한울님이 있다면 좋은 운수를 회복할 줄 알았다 뒤에 수운이 무극대도를 얻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을 때 수많은 사람들 걷어 먹인 건 박씨 부인과 수양딸이었다 이 때가, 힘들었지만 가장 살맛났던 때가 아니었을까 * 4월 5일은 수운 선생이 득도하여 한울님을 만난 날. 천도교에선 천일기념일로 지낸다. 올해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탄생 200주년이다. 이상우(서울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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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 『동아일보』 1920년 4월 2일“천도교주가 한번 독립선언서를 세상에 뿌린 후로 별별 가지 파란이 뒤를 이어 일어나 일시는 자못 위태한 지경에 이르겠다는 소문까지 들리던 천도교중앙총부에서 돌아오는 초닷샛날 아침부터 성대한 천일기념 예식을 집행할 터이므로 각 지방에서 이 예식에 참례코자 올라오는 교도가 자못 연락 부절된다는데, 보실보실 내리는 봄비에 몸 적시며 송현동에 있는 중앙총부 방문한즉 마침 가옥을 수리하노라 벽들이 2층 주위에는 높이 비계를 매고 푸른 옷을 입은 5, 6인이 꿈틀거리고 있더라. 2층으로 올라가 감옥에 가지 아니한 사람으로는 그 교의 최고 간부 중에 첫째인 현기관장 오상준 씨에게 천도교의 근황을 물었더니, 씨는 자못 감개무량한 낯으로 서서히 입을 열며 세상에서는 손병희 씨가 우리 교회의 두목이니까 손병희 씨의 모든 행동을 우리의 교 본지에서 나오기만한 줄로 오해하여 요전 만세사건만 하여도 독립선언은 결코 천도교 주인 손병희가 한 것이 아니라 손병희 개인으로 한 것이거늘, 일부 세상에서는 천도교 전체를 독립당으로 보는 것은 좀 모호한 일이라 하겠으며, 만세를 부르던 한참 통에는 과연 전도 모든 교구가 한 가지 소란하기는 하였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안온하게 된 것은 다툴 수 없는 사실인 것이며, 손병희 씨가 감옥에 들어간 후로는 천도교 교세가 미미하게 쇠약하여졌다고 말하는 어느 일본 신문도 보았으나 사실 통계로 보면 작년보다 교도가 훨씬 많아진 것을 보면 천도교가 결코 쇠약해 가지 않는 것은 명확한 일이라 할 것이라. 잠깐 가까운 실예를 들어 말하더라도 지난 정월 보름날부터 각 지방에 있는 청년 교도들을 소집하여 교리연구회(敎理硏究會)를 약 60일 동안이나 열었는데 강습생이 거의 250인에 이르는 큰 성황이었으며, 전에 성실치 못하던 교도들도 요사이는 어찌된 일인지 하루 두 숟갈의 성미(誠米)는 자기는 굶어도 받치겠다 장담한다는 각 지방 교구장의 기쁜 보고가 자주 들리는 바이며, 해마다 기념제 때이면 적어도 2천 명씩은 지방 교도가 상경하였는데 금년에도 인수가 늘면 늘었지 줄 이유는 없을 터이며, 여러 가지 형편상 재미없는 일이 많을까 싶어 금년에는 특히 아무쪼록 각 굑구에서 몇몇 사람씩만 의논하여 올라오도록 주의를 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벌써 상경한 이가 수백 인에 달한 모양이며, 작년 10월부터 기공한 교동 새 교당은 약 2백 평가량에 벽돌 2층으로 예산 15만 원이었으나 그동안 물가가 심히 고등하였졌으므로 다소간 예산에 증가가 있을 줄로 생각하노라. 이상은 천도교회의 최근 상황을 대강 말한 것이어니와 대개 이제까지 위험케 여기던 천도교회는 알고 보면 뜻밖에 청정한 처지에 있으며, 세상에서 위태해 보던 천도교회의 지반은 새교당의 낙성함을 따라 만세영겁에 흔들지 않고 기초를 튼튼히 세울 것은 의심치 못할 사실인가 하노라. ※※※※※ 위의 기사는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에서 천도교의 동향을 취재한 것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최대 관심은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자는 3·1운동 후 처음으로 맞는 천일기념일을 앞두고 송현동에 있는 2층 양옥의 천도교중앙총부를 취재하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의하면, 3·1운동 직후 지방에서는 천도교를 배척하거나 탈교하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매일신보』의 기사는 천도교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천도교는 흔들림 없이 여전히 한국사회의 중심에서 그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3·1운동은 교단 전체가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의암성사가 개인적 차원에서 주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일제는 천도교를 유사종교로 취급하여 강력하게 감시와 탄압을 하는 상황에서 교단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천도교는 교단적 차원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음을 많은 연구와 자료로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부득이한 것이었다. 둘째는 교인이 증가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사회에서는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하고 많은 교인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천도교는 ‘독립당’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천도교가 크게 쇠미해졌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천도교는 1919년 9월 2일 조직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60일 동안 개최한 교리연구회에 전국에서 250여 명이 참여하여 성황리에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방교구에서는 자신은 굶더라도 성미는 반드시 납부하겠다는 교인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4월 5일 천일기념일에 지방 교인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각종 기념일에는 2천여 명의 교인들이 참여하였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는 새 교당 즉 중앙대교당을 건립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원래는 1919년 초에 중앙대교당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3·1운동의 여파로 인해 연기되었다가 1919년 10월에 기공식을 가졌다. 새로 건립되는 중앙대교당은 2층 양옥으로 약 2백 평 규모이고 예산은 15만 원이었지만 물가의 오름에 따라 추가될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 기사는 결론적으로 천도교는 과격하거나 위험하지 않으며 청정한 상황이며, 위태하지 않고 새 교당을 낙성하면 만세영겁의 흔들리지 않는 교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에는 당시 2층 양옥의 중앙총부 건물과 근무하는 임직원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해설 : 희암 성주현(신인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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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부산 동학의 길 순례를 다녀와서포덕 165년 06월 08일 오전, 산제당을 찾는 길이 숨이 차다. 헉헉대며 오른다 봉래산 할망을 노하게 하면 불이익 온다는 속설은 들었지만, 찾아보기는 처음이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여동생이 머물렀다는 유래를 알아보려고 동학 순례길에 열세분의 동덕들이 찾아왔다. 팻말을 살펴보니 말에 얽힌 설화로 탐라국과 절영로의 무사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적혀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신사님 여동생의 발자취를 찾고자 왔다. 혜허당의 정돈된 부연 설명이 말한다. 빗방울이 든다. 비옷을 챙겨입고 흰여울길로 들어섰다. 아랫길은 정비를 해서 갈 수가 없다. 윗길에서 보는 바다 풍광이 눈길을 붙든다. 정박한 배들의 한가로움을 보니 마음이 편하다. 시인의 기대는 엇박자를 만들었다. 봉래산 트레킹은 물거품되고 절영로 걷기도 무산이다. 포항물회로 아쉬움을 달래고 이어지는 탐방은 중앙동에 위치한 옛 일본이사청 자리에 놓여진 덩그런한 두 개의 팻말이 을씨년스럽다. 자성대에 들러 빗속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더듬었다. 국립일제동원역사관에 모셔진 나인협장군 흉상을 찾았다. 간단한 심고로 예를 갖추었다. 징집된 징용군의 선발과정과 정신대에 끌려간 씁쓰레한 과거사가 켜켜히 계단으로 표현되었는지 유난스레 계단이 많다. 촉촉히 내리는 비를 헤치며 살펴 본 순례길에서 많은 의미를 품고 왔다. 최제우 대신사님의 자취를 봉래산에서 찾았고 나인협 선생의 흉상을 역사관에서 뵈었다. 허채봉 동학농민혁명부산기념사업회 대표의 발빠른 동학사 발굴은 무지한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게했다. 예산만 된다면 이런 답사길을 자주 만들어 천도교의 발전에 이바지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열세분의 동덕님들이 빗줄기 속에서 마음을 모아 주심에 감사드린다. 뜨끈한 칼국수로 후줄근한 몸과 마음을 데워준 허채봉 대표의 배려가 하루를 개운하게 마무리했다. 대신사님의 환한 미소가 달려 온 듯 남편이 차로 마중을 나온다. 사진, 글_선혜당 선영숙(수필가. 대동교구) 동학농민혁명부산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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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이에 1년 앞서 어린이날이 제정된 1922년 5월 1일을 기억하자. 102주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과거의 오늘,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이날을 선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19년 3·1혁명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받고 1주일만에 석방된 방정환 선생은 1920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한 선생은 어린이들의 인권신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한 선생은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다. 소춘 김기전 선생은 1921년 4월부터 천도교 청년회 소년부를 특설해 5월에는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총재를 역임하며 박내홍, 방정환 등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22년 어린이날 제정, 세계 최초의 어린이헌장인 '소년운동의 기초사항'을 선포하였다. 옛 기사로 보는 오늘 1922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이 제정된 날이다. 이날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의 날' 취지와 선전문, 거리 행렬과 자동차 선전대, 저녁의 축하기념식과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1년 5월 1일 창립된 천도교소년회 1주년을 기념해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였다. 천도교 청년들은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는 「십년 후 조선을 려慮하라」, 「조선 초유의 소년일」, 「가로로 취지 선전」, 「조선에서 처음 듣는 어린이의 날」 등의 기사와 선전지를 소개하였다.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조선 소년 운동의 시작으로 금일 천도교 소년회의 활동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는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오직 장래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조선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무엇을 가졌는가. 설령 지난 일과 당장 눈앞의 일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우리는 다만 내일과 내년의 화려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따라서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도 장래를 위하여 사는 것이오, 장래가 곧 우리가 춤출 때라는 것은 누구나 바라고 믿는 바이다. 한 나라 한 사회나 한 집안의 장래를 맡은 사람은 누구인가. 곧 그 집안이나 그 사회나 그 나라의 아들과 손자일 것이다. 장래에 희망을 두고 어린이에게 장래를 맡기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찌 어린이의 일을 등한시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에서는 과연 아들과 손자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옛날 일은 지나간 일이라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수년 동안 우리의 학부형은 그 자손을 위하여 이전에는 없던 애를 써왔다. 다시 말하면 그 자제를 가르치기에 열심히 하며 여러 가지로 자손을 인도하는 데 노력한 것은 근래의 교육열과 향학열이 증명하는 바다. 이는 실로 경하할 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학부형 가운데에는 배우고자 하는 자식을 막아서 한강에 빠져 죽게 만드는 완고한 일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일을 볼 때 뜻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한숨을 쉬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 이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를 위한 부모의 도움이 더욱 두터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을 기회로 삼아 ‘어린이의 날’이라고 이름하고 “항상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쓴 네 가지의 인쇄물을 시내에 배포하며 소년회원이 거리마다 늘어서서 취지를 선전했다. 이러한 일은 조선 소년 운동의 처음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사회에서도 많이 응원하여 “조선사람의 10년 후의 일”을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1일, 「10년 후 조선을 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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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생명관: 대생명(大生命) (2)(지난 호에 이어) III 해월이 ‘갓난아기의 마음(赤子之心)’이라고 한 이 마음이 바로 내 안으로 두번째 내려온 ‘신령(神靈)’이다. 외유기화에 의하여 마련된 유기체적 몸에 신령이 내려온 것이 바로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본래 영이라 할 수 있다. 즉, 마음이란 내 몸에 내려온 신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월은 ‘심령(心靈)’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의암은 ‘성령(性靈)’이라는 표현을 애용하였다.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영은 오직 하나의 영일 뿐이다. ‘신령’, ‘심령’, ‘성령’으로 표현되는 영성은 근대철학에서는 종교영역에서나 다루는 낯선 개념이었다.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현대문명에서 영(靈)은 더욱 생경한 개념일 수 있다. 시대정신에 투철한 현대인을 위하여 영성이 무엇인지 조금 풀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천도교에는 영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개념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풀어서 이해해 보자. “천령(天靈)이 강림하였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가?”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수운은 “무왕불복의 이치를 받은 것”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무왕불복은 수운의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역학(易學)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다”고 해석되는데 이에 대한 적지 않은 기존 논의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거울의 비유로 대신하고자 한다. 신령이란 그 앞에 오는 것을 하나도 예외없이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이 영성의 거울은 어디 특별히 머무는 곳이 없다(無所住). 특정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곳이나 있지만 상주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역설적 표현으로 들리는 것은 성령 자체의 특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수운은 도는 ‘보려하나 볼 수 없고 들으려 하나 들을 수 없다(視之不見 廳之不聞)’고 하였고, 의암도 성심본체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고, 물으려 해도 물을 곳이 없고, 잡으려 해도 잡을 곳이 없다’고 표현하였다. 해월은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않는데 이르러야 가히 도를 이루었다 할 것이요(視之不見 聽之不聞 可謂成道也)”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을 근거로 하여 ‘무극대도’, ‘천도’, ‘성심본체’, ‘영성’은 세상과 사물과 인간을 떠난 초월성으로 이해되지만 ‘적자지심’으로 불리우는 ‘본래의 나’의 마음으로 내려와 임재(臨在)한다. 그러므로 해월은 “한울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 안에 계신다”고 하였으며, 의암은 성령은 “전부 세간과 합치된 것이요, 세간에 나타난 것(全然合世間的出世間的)”이라고 표현하였다. 수운 또한 ‘여세동귀(與世同歸)’라는 표현으로 천도와 천운은 세상과 더불어 함께 함을 강조하였다. ‘중첩’으로 번역되는 양자역학의 Superposition 개념은 양자뿐만 아니라 영성을 묘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즉 영성은 특정 위상(位相)을 넘어서지만 세상과 만물 그리고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한가운데 중첩되어 있으면서도 보려하나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도 없는 무형계라 할 수 있다. 도가의 무(無)나 허(虛), 불가의 공(空) 개념들도 세상과 만물 그리고 사람을 떠난 초월적 절대영역이 따로 있지 아니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나 오히려 니힐리즘처럼 오해되곤 한다. 영성은 ‘새는 하늘을 날지만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도인은 강을 건너지만 물에 젖지 아니한다’라는 비유로 묘사되기도 한다. 천도교사에는 수운이 억수로 오는 빗속에 부친 성묘를 다녀왔지만 갓과 도포가 젖지 아니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해월은 ‘땅을 어머님 살처럼 공경하게 되면 빗속에 진흙길을 걸어도 버선이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생기심(應無所住生其心)”은 부처의 마음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소명해주는 유명한 구절이다. 비어 없는 이 경지에 응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 바로 부처의 집착없는 마음 씀씀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중생은 비고, 고요하고, 없는 마음에 조응(照應)하여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물욕, 감정, 집착, 편협함에 사로잡힌 마음을 쓰는 것이 차이점이다. 의암은 [후경2]에서 나의 성품과 나의 마음을 묘사하는 가운데서 ‘항상 머물러 있는 곳도 없다(常無住處)’는 표현을 하였다. 위상과 시간에 매이지 않으므로 해탈의 마음이 되고 자유로운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의암은 [무체법경]에서 “한울님이 반드시 바르게 보이고 바르게 듣는다(天必正示正聞)”고 하였다. 바르게 보인다는 것은 거울처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바르게 듣는다는 것은 ‘한울님은 높으시나 낮은 소리도 다 듣는다는 천고청비(天高廳卑)’의 뜻이라 하겠다. 보이지도 않는 빈 거울이지만 그 앞에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정확하게 비추어주는 성령을 이렇게 말하였다. 의암은 ‘정시정문’을 누구나 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마음이 흰 것을 구하고자 하면 흰 것으로 보이고, 붉은 것을 구하면 붉은 것으로 보이고, 푸른 것을 구하면 푸른 것으로 보이고, 노란 것을 구하면 노란 것으로 보이고, 검은 것을 구하면 검은 것으로 보이느니라.” 그러므로 아득한 고대로부터 성령을 거울에 비유하였다. 성령은 구하는 그대로 주기 때문에 ‘말없고 소리없는 한울님이 가장 무섭다’고 해월은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성령은 특별히 머무는 곳이 없이 어떻게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며 분명하게 들려주는 것일까? 우주를 ‘혼원일기’로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해월은 동양의 전통에서 말하는 ‘귀신, 기운, 음양, 조화는 오직 하나의 기운(一氣)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주는 한 기운의 소사요, 한 신의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만유는 오직 하나의 신, 하나의 기운, 하나의 이치로 꿰뚫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기운, 하나의 이치, 하나의 몸이므로 어떤 것이 가면 반드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가더라도 되돌아올 수 없다. 길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되돌아 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생각이든 기운이든 행동이든 일단 촉발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상대성 우주론이라면 증대되거나 감소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상대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몸과 마음에게는 모든 것들이 상대적일 뿐이다. 중첩과 얽힘이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인 것처럼 정시정문도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개념일 뿐이다. 우주가 하나라는 것은 영의 세계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신령(神靈)은 오직 하나(唯一無二)이기에 신령이 곧 내 마음의 영이자 내 성품의 영이다. 타자성과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性靈)’과 ‘심령(心靈)’은 ‘성령(聖靈)’과 다르다. 성령(聖靈)은 개별적 존재이지만 천도교에서 말하는 신령, 심령, 성령은 오직 유일무이하다. 다시 말하자면 한울님의 성령과 수운의 성령, 해월의 성령, 의암의 성령, 역대 조상들의 성령, 인류전체의 성령이 나의 성령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논의는 [성령출세설]에서 아주 상세하게 개진되어 있다. 의암은 “대신사는 이미 성령으로 출세하셨으니 일체의 물건마다 마음마다 다 이 성령의 출세한 표현이 아님이 없는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만유와 만인을 오직 하나의 성령이 관통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나의 본래의 마음을 신령(神靈)의 강림, 제2의 강령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강령이 되지 않은 마음에게는 심령이나 성령(性靈)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첫 호흡을 할 때 예외없이 신령(神靈)이 내려와 내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심령(心靈)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심령을 믿지 아니하고 키우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심령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해월은 “오직 한울을 양(養)한 사람에게 한울이 있고, 양치 않는 사람에게는 한울이 없다”고 하였다. 수도를 하여 한울님을 키우는 제3의 강령인 ‘각지불이(各知不移)’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 가장 순수한 영을 타고났지만 우주간의 모든 생명체도 모두 다 이 ‘무량광대’하고 ‘청정무구’한 신령계로부터 마음을 받았다. 수운이 [불연기연]에서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갓난아기가 어머니를 알아보는데 어찌된 일인지, 가난해도 돌아오는 제비는 주인을 알아보아서 그렇게 하는지, 부모를 되먹이는 까마귀가 효도를 알아서 그러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수운은 [불연기연]의 마지막 구절에서 “조물자에 붙여보면 그렇고 그렇고 그러한 이치”라고 대답하고 있다. 조물자가 곧 성령임을 이해하면 이러한 질문들에 쉽게 답할 수 있다. 갓난아기가 되었던, 제비가 되었던, 아니면 까마귀가 되었던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성령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면 갓난아기가 방금까지 한 몸이었던 어머니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제비가 자기 집을 찾는 일도 당연한 일이며, 까마귀가 어미를 먹이는 것도 다 큰 자기가(새끼) 쇠약해진 자기를(어미) 먹이는 것이므로 그렇고 그렇고 그러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신령을 잊거나 잃어버렸다면 이와 같은 앎은 있을 수 없다. 성령이 아직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자기가 자기를 아는 일에 불과하므로 그렇고 그렇게 알 수 있고 할 수 있게 된다. IV 외유기화라는 제1강령을 통하여 생명체는 우주의 한 기운에 접하여 잉태하여 유기체를 이루고 내유신령이라는 제2강령을 통하여 생명체는 청정무구한 성령의 마음을 온전하게 받는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날 때부터 우주기운에 통한 존재이므로 그 우주적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무량광대’하고 ‘청정무구’한 오직 하나의 영성을 자기 마음으로 받았으므로 이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본래의 길이다. 우주적 혼원일기와 본래청정의 영성을 회복하는 길이기에 수운은 ‘천도’라 하였고 내 마음을 통하여 회복하기에 ‘심학(心學)’이라 하였다. 이 본래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는 다음을 기약한다. (끝) *본 글은 2023년 5월 12일/대화아카데미 바람과물연구소, 생명애콜로키움 [종교와 생태문제] 에서 발표하였으며 저자(오문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글_오문환(정치학박사, 선도사, 영등포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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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생명관: 대생명(大生命) (1)Ⅰ 「동학의 생명평화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논의한 적이 있기에 논의범위를 좀 더 종교철학적으로 심화시키고자 한다. 수운 최제우는 한울님과의 대화에서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아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았다고 한다. 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21자인데 그 가운데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해월의 해석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생명관을 논하고자 한다. 수운은 모실시(侍)를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로 풀이하였고 해월은 다음처럼 구체화하였다.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할 때에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룬 것이니라. 그러므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과 「지기금지 원위대강」이라 한 것이 이것이니라.” (“經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內有神靈者 落地初赤子之心也 外有氣化者 胞胎時 理氣應質而成體也 故「外有接靈之氣內有降話之敎」「至氣今至願爲大降」是也,” 해월, [영부주문]) 이를 근거로 천도교는 생명체는 두 번의 강령으로 잉태되고 마음을 받아 태어나고 주문수행에 의하여 세 번째 강령으로 영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본다. 첫째 강령인 ‘외유기화’에 의하여 포태되고, 둘째 강령인 ‘내유신령’으로 갓난아기가 처음으로 호흡할 때 영이 ‘적자지심’으로 내려온다. 셋째 강령인 ‘각지불이’는 주문수련으로 내 몸과 마음이 영성을 깨달아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다. 이 세 번의 강령이 이루어지게 되면 사람은 비로소 천주를 자신 안에 온전하게 모신 ‘시천주’ 인간이 된다. 이렇게 한울님을 모신 사람을 천도교에서는 신선(神仙), 신인간(新人間), 신인(神人)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과정으로 대생명이 된다. 이 글은 첫 번째 강령인 ‘외유기화’와 두 번째 강령인 ‘내유신령’을 통하여 천도교의 생명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생명의 포태가 영(靈)의 강림(降臨)으로 이루어진다는 해월의 설명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이해되는 의학과는 다른 설명방식이다. 이기(理氣)와 기운(氣運)이 바탕이 되는 질료(質)를 만나서 포태가 된다는 종교철학적 설명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생명의 탄생은 천리(天理)와 천기(天氣)라는 우주적 기운과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만 분명히 하면 될 듯하다. ‘외유기화’는 ‘외유접령지기(外有接靈之氣)’로도 표현되는데 밖으로 영에 접하는 기운이 있다는 뜻이다. ‘밖에 있다(外有)’는 표현 때문에 영(靈) 또는 지기(至氣)가 마치 시공간적 타자로 보이지만 영과 지기에 열려(開闢) 우주기운이 곧 나의 기운으로 되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지기(至氣)’ 또는 ‘혼원일기(混元一氣)’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음양오행과 같은 기운과 달리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과 접함으로써 생명이 잉태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수운은 ‘음양합덕으로 수백천만물이 화해난다’고도 하지만 ‘외유기화’는 한울님의 기운이 유기적 생명체로 나타나는 것을 서술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잉태는 다 한울님 기운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수운의 [불연기연]에 나타나는 우주만유의 알 수 없는 불연에 대한 대답도 외유기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 더 나아가 자연사물까지 모두 다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과 하나로 통해져 잉태되었다는 실상을 통찰한다면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우주생명의 신묘함을 그렇고 그렇게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불연기연]은 황하수가 어찌 성인의 탄생을 알아서 천년에 한번 물이 맑아질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그렇지만 황하수도 하나의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산물이고 성인의 마음의 탄생도 똑같은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소산이라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성인의 청정무구한 마음기운도 황하수의 진흙탕 물도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으로 통해져 있으므로 두 기운이 통하여 같아져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량수의 생명체들은 오직 하나의 기운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되면 해월의 표현대로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한 동포이고(人吾同胞) 만물과 내가 또한 한 동포(物吾同胞)’라는 점도 스스로 자명해진다. 천리와 천기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초월적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과 내 마음에 내려와 있다고 본다면 왜 해월이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시행하였는지도 쉽게 이해된다. 신위(神位)를 마주보는 벽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여 설치하는 이유는 천지정신과 천지기운이 모두 내게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혼원일기, 우주정신, 신령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영의 강림(降臨)이라고 표현하지만 초월적 영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잉태 순간에 지극한 한울님 기운과 접하여 자신 안에 모시게 된 것이다. 신위를 자신을 향하여 돌릴 수 있는 것은 물론 한울님 모심을(侍天主) 스스로 깨달은 사람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성령출세설]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신사께서 사람이 곧 한울인 심법을 받으시고 향아설위의 제법을 정하시니 이것은 우주의 정신이 곧 억조의 정신인 것을 표명하심과 아울러, 다시 억조의 정신이 곧 내 한 개체의 정신인 것을 밝게 정하신 것이니라.” 조금 넓혀 표현하자면 개체정신이 곧 우주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 정신은 나의 정신이면서 동시에 ‘천만년 전 사람이나 천만년 후 사람의 정신과 같은 정신’이라고도 말한다. 한울님의 정신기운이 잉태의 순간에 영으로 이미 내 안에 모셔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근본적 동일성령이 천차만별의 인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생명위기를 실감하는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생명의 우주적 연계성 또는 인드라망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의식이 열렸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천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 생명의 그물망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해월의 언행보다 더 좋은 전범(典範)은 없어 보인다. 해월은 베짜는 며느리를 보고 한울님이 베를 짠다고 하였으며,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때리지 말라고 하였으며, 동식물도 다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였으며, 새소리도 한울님의 소리이며, 나뭇가지도 함부로 꺽지 말라고 하였으며, 어린아이가 나막신을 끌고 가니 가슴에 통증을 느꼈으며, 땅을 어머님 살처럼 여겨 침을 뱉거나 물을 멀리 뿌리지 말라고 하였다. 세상으로 눈을 잠시라도 돌려 보면 현대문명이 어느 곳을 향하여 전력질주하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방향전환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점을 동학·천도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월은 “궁을이 문명을 돌이킨다(弓乙回文明)”라고 하였다. 궁을은 수운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영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영부는 말 그대로 신령(神靈)에 그대로 부합하는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운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종이 위에 뚜렷한 형상을 그려내어 불에 타서 먹어보니 온갖 질병이 나았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니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도덕을 따르는 사람은 매번 적중하였다고 하였다. 즉 받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해월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이라고 하여 “영부심(靈符心)”이라고 하였다. 즉, 병을 치유하는 것은 천령에 부합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이 문명을 대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을 얻는 마음공부가 된다. 놀라운 점은 사람은 태어날 때 이 궁을마음을 타고났다는 사실이다. (계속) *본 글은 2023년 5월 12일/대화아카데미 바람과물연구소, 생명애콜로키움 [종교와 생태문제] 에서 발표하였으며 저자(오문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글_오문환(정치학박사, 선도사, 영등포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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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일이다105년 전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함성소리는 매해 3월이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고동치게 한다. 3.1만세운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평화로운 항거였으며 3.1정신은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3월이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공적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 있다. 바로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자금을 준비하였던 의암 손병희선생이다. 천도교 제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우리나라가 강제로 강탈당하게 되자 10년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가게 된다. 우이동에 땅을 구입해 수련도장인 봉황각을 짓고 전국에 있는 유능한 지도자들을 모아서 독립의지를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하여 심신훈련을 하게 한다. 3년에 걸쳐 7차례 483명이 봉황각 연성수련을 통해서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3.1운동때 전국 각 지역에서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부구총회를 통하여 결의하고 교호당 10원이상씩 건축성금을 내도록 하였다. 이 자금은 후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가 적자경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끝까지 폐쇄하지 않고 훗날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 37개 대교구로 하여금 등사기를 1대씩 구입하도록 하여 훗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의암 손병희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49일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 아홉 곳에 대표 기도처를 정하고 각 기도처마다 4명씩 대표를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게 하면서 3.1독립운동을 위한 전국 교단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그리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대연합으로 33인 민족대표를 결성하기에 이르른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전국 조직망을 정비하고 독립자금까지 전담하는 등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지도해 나갔지만 매년 3.1절이 되면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은 미미하게 들리는 듯 마는 듯하다. 또한 천도교의 3.1운동에 대한 역할 또한 알려지기도 전에 잊혀져 가기만 한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해야만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역사는 사라지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잘못이며 이대로 가다가는 사라지고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떠들썩 하도록 매해 기억하고 기록하고 또 기념해야 할 것이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방법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자.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틀에 박힌 상징과 형식이 아닌, 권위적이지도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은 형식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참회하며 가장 예술적으로 역사를 작품속에 표현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살아있는 곳으로 피터 아이젠먼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1998~2005)는 홀로코스트(Holocaust)로 희생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고 있다. 다음은 나치의 분서사건 60주년을 즈음하여 독일 베벨광장에 세워진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을 보자. 베벨광장 중심부에 가로120센티미터, 세로120센티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투명유리창이 있고 그 지하에 텅빈 직방체 공간이 있다. 이스라엘 예술가 미하 울만의 「도서관」작품이다. 책들의 화형식이 있었던 그 장소의 지하에 설치된 경고의 기념조형물이다. 이처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방법으로 문화예술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문화예술공간은 시민들의 삶속에 스며들고 있으며 그들은 생활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보고 느끼면서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_숙현당 정정숙(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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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반역사적인 ‘이승만 띄우기’ 시도요즘 독재자와 학살자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승만 대통령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접하게 된다. 뜬금없이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여 독재자를 기리겠다고 한다거나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짚으려고 한다.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기술한 우리나라 헌법전문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런 준동에 분노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현재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말살과 부정부패를 저질러 4.19혁명으로 쫒겨난 그의 말로를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판에, 독재자 이승만을 두고 다시 논쟁하는 자체가 소모적이다. 이승만의 악행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8ㆍ15해방 이후에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면서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이 100만명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이승만을 국가보훈부가 지난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고, 국방부는 그를 혜안을 지닌 지도자로 미화하는 교재를 발간하기도 했다. ‘홍범도 지우기’로 국민의 공분을 산 집권 세력이 ‘이승만 국부 만들기’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 북한·중국·러시아가 공산화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그를 칭송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농지개혁·교육개혁·정치개혁이란 3개 개혁으로 대한민국의 토대를 닦았다.”며 이승만을 한껏 찬양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격동의 해방 공간에서 그가 내린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역사적 사실도 그들의 눈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편다. 진실을 덮고 거짓을 호도하려는 영화 한 편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인 것만 같아 정말 씁쓸하다. 정권은 유한하고 역사의 흐름은 도도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이런 시도가 성공하겠는가. 말 그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으로 국회에 상정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하고자 하는 법률안이 아직도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145명을 서훈하면서도,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 띄우기’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를 거스르는 세력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역사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 이승만을 구국의 민족지도자로 받들려는 기도를 절대 묵과할 수 없다. 국민 공감대도 없이 진행되는 시대착오적 ‘이승만 띄우기’는 성공할 수도 없고 결국 이념전쟁으로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것으로 끝날 것이 뻔하다. ‘이승만 국부 만들기’에 주력해온 뉴라이트 역사관에 따른 반역사적인 악행을 당장 멈추기를 요구한다. 글_윤여진(시인,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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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다올해는 3.1운동 105주년이다. 모든 언론이 3·1운동 105주년이라고 쓰고 있다. 오랫동안 사용해 화석화된 잘못된 용어이다. 105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 인근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갔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경성 거리의 민중들을 바라보며 끌려가던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혁명의 최후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1900년대 초의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언론과 교육, 출판 운동 등으로 민도를 높이는 개혁을 전개하다가 1913년부터 전국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차례로 불러 특별 연성 수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장차 국가를 위해서 쓰일 인재를 미리 양성해 놓고자 한 지도자의 혜안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종결되고 민족자결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유행되자 의암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시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드디어 1919년 천도교는 전체 인구 1,800만 명에 300만 명의 신도 수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단이 되었다. 천도교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할 충분한 인원과 조직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도들만이 참여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손병희는 거대한 민족운동을 천도교만의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3.1의거는 제2의 동학혁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국외에서의 독립선언과 의문스러운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민중의 분노가 치솟자 손병희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비밀리에 각계의 지도층에게 함께 할 것을 제의했지만 대부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무시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목사 등은 이미 개신교의 독단으로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종단이 비밀리에 접촉했고 함께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교단과 함께한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임을 고려할 때 이들 종단 지도자들의 결단은 돋보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불교계의 큰 스님인 용성 스님과 만해가 함께 하니 비로소 종교연합으로 민족대표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독립선언에 동참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들 지도자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적 정신이 바로 3.1의거의 출발점이었고, 그들의 고뇌 어린 결단이 있었기에 3.1의거는 추진될 수 있었다. 의거의 중심인 천도교는 과거 실패했던 동학혁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자세로 준비했다. 손병희는 최남선을 시켜 작성된 독립선언서를 자체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게 비밀리에 인쇄할 것을 지시했다. 인쇄 중 종로경찰서의 악질 조선인 순사에게 발각되기도 하고, 완성된 선언서를 옮기는 과정에 파출소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등 곡절 끝에 3만 5천 장의 선언서를 종교 조직을 이용해 전국에 퍼트리는 데 성공하였다. 만세 시위는 당일 오후 2시 경성 등 전국 6개 도시를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당황한 일본은 민족대표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전국의 시위에는 강력한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밟으면 밟을수록 일어서는 우리 민족이었다. 특히 경기도의 시위가 가장 격렬했다. 수원 화성 지역은 장날마다 시위가 일어났으며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은 대표적인 피해 사건이 되었다. 3월부터 3달 동안에만 시위에 나선 이가 전국적으로 210만 명에 이르고 체포·투옥된 수도 4만6,948명, 부상자 5만 명 이상이었으며 사망자도 7,5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운동이란다. ‘쓰리 포인트 원 스포츠’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단 말인가? 3·1운동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가. 해방 이후 헌법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의 헌법전문 초안에도 분명 3·1혁명이었다. 그러나 국회로 넘어가 심의 중에 바꾸었는데 일설에는 대통령에 유력한 이승만의 온화한(?) 이미지와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첨꾼들이 권했고 이승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헌법전문에 운동으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사용하던 3·1혁명을 버린 것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3.1운동이 아닌 3·1혁명, 3·1대혁명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과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에도 명백히 3·1혁명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지난 3·1혁명 100주년 당시 정명(正名)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명 되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된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 혁명이었는데. 이제 우리부터라도 제대로 된 명칭을 사용하자. 3.1혁명이라고.◎ 글 임형진(년암, 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