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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이에 1년 앞서 어린이날이 제정된 1922년 5월 1일을 기억하자. 102주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과거의 오늘,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이날을 선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19년 3·1혁명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받고 1주일만에 석방된 방정환 선생은 1920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한 선생은 어린이들의 인권신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한 선생은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다. 소춘 김기전 선생은 1921년 4월부터 천도교 청년회 소년부를 특설해 5월에는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총재를 역임하며 박내홍, 방정환 등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22년 어린이날 제정, 세계 최초의 어린이헌장인 '소년운동의 기초사항'을 선포하였다. 옛 기사로 보는 오늘 1922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이 제정된 날이다. 이날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의 날' 취지와 선전문, 거리 행렬과 자동차 선전대, 저녁의 축하기념식과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1년 5월 1일 창립된 천도교소년회 1주년을 기념해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였다. 천도교 청년들은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는 「십년 후 조선을 려慮하라」, 「조선 초유의 소년일」, 「가로로 취지 선전」, 「조선에서 처음 듣는 어린이의 날」 등의 기사와 선전지를 소개하였다.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조선 소년 운동의 시작으로 금일 천도교 소년회의 활동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는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오직 장래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조선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무엇을 가졌는가. 설령 지난 일과 당장 눈앞의 일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우리는 다만 내일과 내년의 화려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따라서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도 장래를 위하여 사는 것이오, 장래가 곧 우리가 춤출 때라는 것은 누구나 바라고 믿는 바이다. 한 나라 한 사회나 한 집안의 장래를 맡은 사람은 누구인가. 곧 그 집안이나 그 사회나 그 나라의 아들과 손자일 것이다. 장래에 희망을 두고 어린이에게 장래를 맡기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찌 어린이의 일을 등한시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에서는 과연 아들과 손자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옛날 일은 지나간 일이라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수년 동안 우리의 학부형은 그 자손을 위하여 이전에는 없던 애를 써왔다. 다시 말하면 그 자제를 가르치기에 열심히 하며 여러 가지로 자손을 인도하는 데 노력한 것은 근래의 교육열과 향학열이 증명하는 바다. 이는 실로 경하할 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학부형 가운데에는 배우고자 하는 자식을 막아서 한강에 빠져 죽게 만드는 완고한 일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일을 볼 때 뜻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한숨을 쉬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 이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를 위한 부모의 도움이 더욱 두터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을 기회로 삼아 ‘어린이의 날’이라고 이름하고 “항상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쓴 네 가지의 인쇄물을 시내에 배포하며 소년회원이 거리마다 늘어서서 취지를 선전했다. 이러한 일은 조선 소년 운동의 처음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사회에서도 많이 응원하여 “조선사람의 10년 후의 일”을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1일, 「10년 후 조선을 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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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주년 천도교서울교구여성회 결성기념식지난 4월 28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제56주년 천도교서울교구여성회 결성 기념식이 봉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기념식, 기념촬영, 점심식사 등이 이어졌으며 30여 명의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경신당 박태량 여성회장의 기념사, 휘암 윤태원 서울교구장의 격려사, 여성회본부 성수장 박징재 여성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경신당 박태량 여성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서울교구여성회는 반세기가 넘는 56년 동안 천도교여성회 서울시지부로써, 또는 서울교구의 부문단체로서 천도교여성회의 목적 달성과 3대 강령 실현을 위해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명실상부한 천도교여성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여 왔습니다. (중략) 여성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회원 여러분께서 함께 해주신다면 새로운 각오로 여성회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진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제56주년 결성기념식을 맞아 자랑스러운 서울교구여성회의 회원으로서 보다 많은 애착과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여 힘차게 전진할 것을 다짐합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제56주년을 맞이하는 서울교구 여성회는 오랫동안 지속해 온 학자금 마련을 위한 윷놀이 대회, 유적지 순례, 이웃돕기의 기부활동, 추계바자회 행사 등이 중단되는 등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각오로 여성회 활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포부를 갖고 있다. 포덕 109년 3월 25일 천도교 부인회 서울시지부를 결성하여, 이듬해 12월 명칭을 천도교여성회 서울시지부로 명칭을 변경, 포덕 113년에는 서울교구가 중앙총부의 직할교구로 변경됨에 따라 여성회서울시지부도 여성회 본부로 통합되었다가 포덕 124년 5월 1일 서울교구 소속의 여성회본부 회원 73명이 서울교구 여성회를 재결성하여 다시 서울교구여성회로 활동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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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포 야외시일 봉행천도교 연원회 통일포(도정 김산) 교인들은 4월 28일, 해월신사께서 향야설위 제례법을 반포한 경기도 이천 앵산동에서 야외 합동시일을 봉행하였다. 이날 야외시일은 통일포 관내 마포교구, 의정부교구, 아산시교구에서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원일 도훈의 집례로 의례에 따라 방임현 의정부교구장의 경전봉독(「성령출세설」), 천덕송합창(권학기 기1), 김산 도정의 설교, 천덕송합창(우리의 길)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식후 성주현 신인간 주필의 ‘해월신사와 이천 앵산동’이라는 주제로 간단한 강의가 있었다. 시일식을 마친 후에는 수산1리 마을회관 앞에 위치한, 중앙총부에서 건립한 <향아설위 제례법 반포지>와 마을 주민들이 건립한 <해월 최시형 선생> 표지석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였다. 중식을 마친 후에는 여주 신륵사와 세종대왕릉인 영릉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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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포인트로 경주 사적지 관람 할인…국세청·경주시 협약내달부터 세금포인트를 사용하면 경주에 있는 사적지 관람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국세청과 경주시는 26일 경주시청 대외협력실에서 성실납세 문화 확산과 지역경제 활성화 및 문화유산 가치 제고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업무협약은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보고이자 연간 방문객 수가 4000만 명이 넘는 관광도시인 경주시와 협력해 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한 납세자에게 다양한 세금포인트 혜택을 제공하고자 추진된 것으로 국세청과 지자체가 손을 맞잡은 첫 협업 사례다. 세금포인트는 개인이 자진납부한 소득세액과 법인(중소기업)이 자진납부한 법인세액 10만 원당 1점을 부여한다. 업무협약 체결에 따라 연간 관람객 수가 100만 명이 넘는 관광명소인 동궁과 월지, 천마총(대릉원 내)을 비롯해 경주시에 있는 유료 사적지 등 10곳에서 세금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각 장소에서 1인당 1000원의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경주시는 할인 혜택을 적용할 수 있도록 관련 조례의 개정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달 조례 개정안 심의·의결을 거쳐 다음 달 공포해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세청은 경주시 사적지 등에서 세금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 모바일 쿠폰을 모바일 손택스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다음 달 말부터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세금포인트 모바일 쿠폰 사용처를 16곳으로 확대한다. 또 향후 경주시를 비롯해 세금포인트 사용처를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가기 위해 지자체 등 여러 기관과 협력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윤종건 대구지방국세청장은 “역사와 문화의 도시인 경주시와 업무협약을 통해 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한 국민이 세금포인트 혜택을 체감할 수 있는 기회가 한층 더 확대했다”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경주시의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경주시가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국세청 세금포인트 제도를 도입해 성실납세 문화 확산에 동참할 수 있게 된 점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세금포인트를 이용한 관람료 감면 홍보로 경주를 찾는 관광객 증가에 따른 경주시 관광산업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문의 : 국세청 납세자보호관실 납세자보호담당관실(044-204-2712), 정보화관리관실 정보화운영담당관실(044-204-2482)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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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 고 티탈렙타 네덜란드 용사 유해 봉환6·25전쟁 당시 네덜란드군으로 참전해 대한민국을 지킨 유엔 참전용사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다. 국가보훈부는 26일 고 페르디난트 티탈렙타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유해 봉환식을 오는 29일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A)에서 거행한다고 밝혔다. 고 페르디난트 티탈렙타 참전용사는 1953년 4월 3일 네덜란드군 반호이츠 부대 소속 이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1954년 4월 23일까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고인은 21살의 나이에 자원해 6·25전쟁 참전을 결심했고 참전 일주일만에 오른쪽 엉덩이와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으나 다시 전장으로 복귀했다. 정전 하루 전날인 1953년 7월 26일 전개된 묵곡리 전투(340고지 전투)에서 여러 명의 전우를 잃은 아픔도 겪었다. 그는 6·25전쟁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984년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정부 훈장을 받았고, 은퇴 후에는 반호이츠 부대 역사박물관에서 20년간 봉사하며 네덜란드군의 6·25전쟁 참전의 역사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고 페르디난트 티탈렙타 참전용사의 배우자 마리아나 티탈렙타(74세)씨는 “남편이 생전에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기를 희망했고 남편의 유언대로 유엔기념공원에 안장하게 되어 기쁘다”고 유해 봉환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유해 봉환식은 29일 오후 4시 40분경 유해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면 5시 30분부터 ‘여기서부터 대한민국이 모시겠습니다’라는 주제로 거행한다. 유해 봉환식에는 강정애 보훈부 장관, 페이터 반 더 플리트 주한네덜란드 대사, 고인의 배우자, 손녀 등이 참석해 국방부 의장대가 도열한 가운데 고인의 유골함을 향해 예를 표하고 추모사 후 봉송 차량까지 모시는 간결한 의식으로 진행한다. 추모사는 강정애 장관과 페이터 반 더 플리트 대사, 고인의 배우자가 차례로 낭독할 예정이다. 봉환식을 마치면 유해는 5월 1일까지 국립서울현충원에 임시 안치되며, 안장식은 유족과의 협의에 따라 2일 오후 2시부터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주한네덜란드대사관 주관으로 거행된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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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거리예술축제2024’ 참가작 공모… 올가을 시청광장 가득 채울 예술작품 찾습니다서울--(뉴스와이어)--서울문화재단(대표이사 이창기)은 오는 9월 16일(월)부터 3일 동안 이어지는 추석 연휴에 도심 곳곳에서 펼쳐지는 서울시 대표 축제 ‘서울거리예술축제2024’에 참여할 국내외 작품을 모집한다. 해외 작품은 4월 29일(월)부터 지원 신청이 가능하며, 국내 참가작의 경우 5월 13일(월)부터 접수를 시작해 22일(수)까지 지원할 수 있다. 서울거리예술축제 누리집: http://www.ssaf.or.kr서울거리예술축제 인스타그램: http://instagram.com/ssaf.official 웹사이트: http://www.sfa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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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합니다”…순직의무군경의 날 기념식 26일 첫 거행의무복무 중 직무 수행이나 교육 훈련 중 순직한 사병을 기리는 순직의무군경의 날 기념식이 처음 열린다. 국가보훈부는 오는 26일 오전 10시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광장에서 병역의무를 이행하다 순직한 젊은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제1회 순직의무군경의 날 기념식을 거행한다고 25일 밝혔다. 순직의무군경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무복무를 하는 과정에서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순직한 사병들로, 현재 1만 6419 명이다. 그동안 순직의무군경의 날 제정에 대한 법률 제·개정안 발의와 국회 논의 등 기념일 지정 필요성이 계속 제기돼 왔다. 이에 지난해 11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개정으로 해마다 4월 넷째 금요일을 국가기념일인 순직의무군경의 날로 지정, 오는 26일 보훈부 주관으로 정부 기념행사가 처음으로 열린다. 특히 4월 넷째 금요일의 기념일 지정은 가정의 달인 5월을 앞두고 순직의무군경의 희생을 기리는 동시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보훈부는 설명했다. ‘첫 번째 봄, 영원히 푸르른 당신을 기억합니다’를 주제로 거행되는 올해 기념식은 순직의무군경 유족과 정부 주요 인사, 각계 대표 등 1300여 명이 참석해 여는 영상, 국민의례, 기념공연(1), 기념사, 잇는 영상, 기념공연(2), 순직의무군경의 날 노래 제창의 순으로 37분 동안 진행된다. 먼저, 여는 영상에서는 기념일 지정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집에 남겨진 아들의 흔적들을 살펴보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순직의무군경의 날 기념식 참석을 위해 집을 나서는 모습을 소개하며 문을 연다. 기념공연(1)은 고 전새한 이병(1991 사망)이 복무 중 부모님께 남긴 편지 내용을 영상으로 전한 뒤 고 전 이병의 아버지 전태웅 씨가 무대 위에서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편지를 낭독하며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한다. 기념사에 이은 잇는 영상에서는 평범한 꿈을 꾸었을 순직의무군경을 함께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어 기념공연(2)에서 소중한 가족을 잃은 뒤 살아갈 길을 잃어버린 듯한 깊은 아픔 속에서 지냈을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 ‘미아’를 가수 박정현의 목소리로 듣는다. 끝으로, 올해 처음 정부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새롭게 제작한 순직의무군경의 날 노래를 순직의무군경 기억합창단 40명의 선도로 참석자 모두가 제창하며 기념식을 마무리한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순직의무군경의 날을 맞아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꽃다운 나이에 생을 달리한 청춘들의 넋을 기리고,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분들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보훈부는 순직의무군경들의 숭고한 희생을 국민이 함께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기념행사를 거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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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주기 전봉준 장군 추모제4월 24일 오전 11시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전봉준 장군 동상 앞에서 제129주기 전봉준장군 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추모제는 사단법인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였으며 천도교, 재단법인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성균관,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유교신문사의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이날 식전행사로는 문화공연이 준비되었으며 전해철 사단법인 전봉준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내빈소개와 함께 시작된 행사는 개회사-국민의례-전봉준장군 행적소개-추념사-추모사-추모공연-헌화 및 분향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전 이사장은 추념사를 통해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전봉준 장군은 국가로부터 서훈받지 못하고 순국하신지 129년이 지나도록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장군님의 영혼은 구천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전봉준 장군의 서훈문제와 시신을 찾는 데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주용덕 교령대행은 이날 추모식에 참석하여 추모사를 통해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외침으로 녹두장군은 탐관오리의 학정과 나라를 빼앗으려는 외세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후손들에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 서로 공경하며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자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고된 삶을 사는 민초들에게 자유와 평등과 민족자주가 실현되는 나라를 꿈꾸게 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민족운동이자 민중항쟁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껏 누리는 지금의 민주주의는 전봉준 장군과 같은 많은 선열들의 희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순국 129주기를 맞는 이 추모식은 사회적 부정부패와 불의를 걷어내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전봉준 장군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영채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은 추모사를 통해 “전봉준 장군께서 39세인 1894년 1월에 동학의 도소에서 사발통문에 서명한 동학도인들을 이끌고 최초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셨습니다. 동학민초들의 염원과 분노는 25년 동안 응축되었다가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운동으로 폭발했고, 그 3.1운동은 10년 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 4.19 혁명도, 5.18 민주화 운동도, 6월항쟁도, 동학농민혁명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2016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던 촛불혁명도 잘못된 권력을 백성이 바로잡는다는 동학농민혁명정신의 표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이해서 전국에 1만 3천여 명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을 대표해서 우리의 민주 민족 자주의식과 역량을 일깨우고 길러준 동학농민혁명이 정당하게 평가되어서 대한민국 국회와 보훈처에서 전봉준 장군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제를 마치고 이어진 추모공연에서는 판소리 고법 보존회 김판순 지회장이 작사, 작창한 전봉준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 살풀이 춤 등이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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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주년 맞은 서울교구, 창립 기념식 및 축하 행사서울교구 창립 114주년을 맞는 '서울교구의 날' 행사가 포덕 165년 4월 21일 시일식 직후 중앙대교당과 대교당 앞마당에서 각각 펼쳐졌다. 이날 행사에는 윤태원 교구장을 비롯한 서울 교구 원로 교인, 교회 원로, 서울교구 및 인근 교구 교인 등 120여 명이 참석하여 유서 깊은 서울교구의 창립 기념일을 축하했다. 한편 이날 참석한 주용덕 교령대행은 격려사를 통해 "서울교구가 천도교단 을 대표하는 중심 교구로서 급변하는 세상 흐름에 부응하는 신앙 체계를 이루어 천도교의 보 편적 가치를 잃지 않고, 시천주의 참뜻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데 앞장서는 주역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서울교구는 포덕 51년 4월 21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한성교구실을 설치하고 교인 모집을 시작한 이래 변화하는 천도교단의 중심에서 독립운동, 문화운동, 교육운동, 어린이운동 등 교 단의 핵심 사업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해왔다. 또한 초창기부터 중앙총부의 직할교구로서 역할을 해왔으며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이날 창립 기념식에 앞서 중앙대교당에서는 서울교구 삼경합창단의 축하 공연이 펼쳐졌다. 2팀으로 구성된 여성 중창단이 서정적인 우리 가곡을 선보인 가운데 마지막 순서로 합창단 전 원이 나와 조화로운 하모니를 뽐내 참석자들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창립기념식은 교회 의식에 이어 교구 연혁 소개, 기념사, 격려사, 공로패 및 감사패 수여의 순으로 진행됐다. 윤태원 교구장은 기념사에서 "현재의 서울교구가 있기까지는 수많은 선배 동덕들의 피와 땀, 눈물로 이룩된 굳은 신앙심과 희생이 있었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헌신과 봉사로 신앙에 성력을 다한 숙덕 어르신들과 교인들의 정성이 있었다."고 서두를 열고 "서울 교구의 오늘 이 자리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서울교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서 박화자 동덕은 포덕 127년부터 38년간 13명의 교회 어르신을 수시로 순회 방문하여 돌본 공로로 공로패를 받았다. 또 자녀인 김범진 작가의 재능을 발견하여 한결같은 신뢰와 지지로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제시한 황진오 동덕, 타고난 재능과 부단한 노력으로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펼쳐온 화가 김범진 동덕이 감사패를 받았다. 기념식 후 대교당 앞마당에는 서울교구 여성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점심 식사와 갖가지 음식 이 마련된 가운데 참석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뜻깊은 이날을 축하하며 여흥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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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꽃 한마당, 경주 용담정에서 어린이날 맞이 행사오는 5월 1일 경주 용담정에서 2024동학어린이날 행사 <동심꽃 한마당>을 개최한다. 사단법인 경주동학역사문화사업회, 방정환배움공동체 구름달, 한살림경주의 공동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어린이날 행사는 1922년 첫 어린이날을 선포한 5월 1일에 거행하여 더 큰 의미가 있다. 또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날의 참의미, 새 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날임을 공유하고 공명하는 행사이다. 어른도 다시 어린이가 되어 동심꽃으로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동학의 사상이 싹튼 동학의 성지 경주 용담정 일대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삼삼오오 산책(달달콩 먹기, 삼행시 짓기, 돌멩이에 얼굴 그리기 등), 마음팔찌 만들기, 자연물로 표현하기, 샌드위치 만들기, 간단한 먹거리 판매 등의 체험행사와 함께 공연으로 빛그림의 '4월 그믐날 밤, 시골쥐의 서울구경, 우창수와 개똥이의 노래공연 등의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된다. 추첨을 통해 12,000원 상당의 어린이 홍삼액을 증정하기도 한다. 본 행사는 5월 1일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열린다. 많은 어린이 동덕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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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이에 1년 앞서 어린이날이 제정된 1922년 5월 1일을 기억하자. 102주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과거의 오늘,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이날을 선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19년 3·1혁명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받고 1주일만에 석방된 방정환 선생은 1920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한 선생은 어린이들의 인권신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한 선생은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다. 소춘 김기전 선생은 1921년 4월부터 천도교 청년회 소년부를 특설해 5월에는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총재를 역임하며 박내홍, 방정환 등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22년 어린이날 제정, 세계 최초의 어린이헌장인 '소년운동의 기초사항'을 선포하였다. 옛 기사로 보는 오늘 1922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이 제정된 날이다. 이날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의 날' 취지와 선전문, 거리 행렬과 자동차 선전대, 저녁의 축하기념식과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1년 5월 1일 창립된 천도교소년회 1주년을 기념해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였다. 천도교 청년들은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는 「십년 후 조선을 려慮하라」, 「조선 초유의 소년일」, 「가로로 취지 선전」, 「조선에서 처음 듣는 어린이의 날」 등의 기사와 선전지를 소개하였다.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조선 소년 운동의 시작으로 금일 천도교 소년회의 활동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는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오직 장래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조선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무엇을 가졌는가. 설령 지난 일과 당장 눈앞의 일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우리는 다만 내일과 내년의 화려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따라서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도 장래를 위하여 사는 것이오, 장래가 곧 우리가 춤출 때라는 것은 누구나 바라고 믿는 바이다. 한 나라 한 사회나 한 집안의 장래를 맡은 사람은 누구인가. 곧 그 집안이나 그 사회나 그 나라의 아들과 손자일 것이다. 장래에 희망을 두고 어린이에게 장래를 맡기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찌 어린이의 일을 등한시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에서는 과연 아들과 손자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옛날 일은 지나간 일이라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수년 동안 우리의 학부형은 그 자손을 위하여 이전에는 없던 애를 써왔다. 다시 말하면 그 자제를 가르치기에 열심히 하며 여러 가지로 자손을 인도하는 데 노력한 것은 근래의 교육열과 향학열이 증명하는 바다. 이는 실로 경하할 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학부형 가운데에는 배우고자 하는 자식을 막아서 한강에 빠져 죽게 만드는 완고한 일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일을 볼 때 뜻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한숨을 쉬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 이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를 위한 부모의 도움이 더욱 두터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을 기회로 삼아 ‘어린이의 날’이라고 이름하고 “항상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쓴 네 가지의 인쇄물을 시내에 배포하며 소년회원이 거리마다 늘어서서 취지를 선전했다. 이러한 일은 조선 소년 운동의 처음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사회에서도 많이 응원하여 “조선사람의 10년 후의 일”을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1일, 「10년 후 조선을 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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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생명관: 대생명(大生命) (2)(지난 호에 이어) III 해월이 ‘갓난아기의 마음(赤子之心)’이라고 한 이 마음이 바로 내 안으로 두번째 내려온 ‘신령(神靈)’이다. 외유기화에 의하여 마련된 유기체적 몸에 신령이 내려온 것이 바로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본래 영이라 할 수 있다. 즉, 마음이란 내 몸에 내려온 신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월은 ‘심령(心靈)’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의암은 ‘성령(性靈)’이라는 표현을 애용하였다.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영은 오직 하나의 영일 뿐이다. ‘신령’, ‘심령’, ‘성령’으로 표현되는 영성은 근대철학에서는 종교영역에서나 다루는 낯선 개념이었다.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현대문명에서 영(靈)은 더욱 생경한 개념일 수 있다. 시대정신에 투철한 현대인을 위하여 영성이 무엇인지 조금 풀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천도교에는 영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개념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풀어서 이해해 보자. “천령(天靈)이 강림하였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가?”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수운은 “무왕불복의 이치를 받은 것”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무왕불복은 수운의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역학(易學)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다”고 해석되는데 이에 대한 적지 않은 기존 논의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거울의 비유로 대신하고자 한다. 신령이란 그 앞에 오는 것을 하나도 예외없이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이 영성의 거울은 어디 특별히 머무는 곳이 없다(無所住). 특정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곳이나 있지만 상주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역설적 표현으로 들리는 것은 성령 자체의 특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수운은 도는 ‘보려하나 볼 수 없고 들으려 하나 들을 수 없다(視之不見 廳之不聞)’고 하였고, 의암도 성심본체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고, 물으려 해도 물을 곳이 없고, 잡으려 해도 잡을 곳이 없다’고 표현하였다. 해월은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않는데 이르러야 가히 도를 이루었다 할 것이요(視之不見 聽之不聞 可謂成道也)”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을 근거로 하여 ‘무극대도’, ‘천도’, ‘성심본체’, ‘영성’은 세상과 사물과 인간을 떠난 초월성으로 이해되지만 ‘적자지심’으로 불리우는 ‘본래의 나’의 마음으로 내려와 임재(臨在)한다. 그러므로 해월은 “한울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 안에 계신다”고 하였으며, 의암은 성령은 “전부 세간과 합치된 것이요, 세간에 나타난 것(全然合世間的出世間的)”이라고 표현하였다. 수운 또한 ‘여세동귀(與世同歸)’라는 표현으로 천도와 천운은 세상과 더불어 함께 함을 강조하였다. ‘중첩’으로 번역되는 양자역학의 Superposition 개념은 양자뿐만 아니라 영성을 묘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즉 영성은 특정 위상(位相)을 넘어서지만 세상과 만물 그리고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한가운데 중첩되어 있으면서도 보려하나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도 없는 무형계라 할 수 있다. 도가의 무(無)나 허(虛), 불가의 공(空) 개념들도 세상과 만물 그리고 사람을 떠난 초월적 절대영역이 따로 있지 아니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나 오히려 니힐리즘처럼 오해되곤 한다. 영성은 ‘새는 하늘을 날지만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도인은 강을 건너지만 물에 젖지 아니한다’라는 비유로 묘사되기도 한다. 천도교사에는 수운이 억수로 오는 빗속에 부친 성묘를 다녀왔지만 갓과 도포가 젖지 아니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해월은 ‘땅을 어머님 살처럼 공경하게 되면 빗속에 진흙길을 걸어도 버선이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생기심(應無所住生其心)”은 부처의 마음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소명해주는 유명한 구절이다. 비어 없는 이 경지에 응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 바로 부처의 집착없는 마음 씀씀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중생은 비고, 고요하고, 없는 마음에 조응(照應)하여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물욕, 감정, 집착, 편협함에 사로잡힌 마음을 쓰는 것이 차이점이다. 의암은 [후경2]에서 나의 성품과 나의 마음을 묘사하는 가운데서 ‘항상 머물러 있는 곳도 없다(常無住處)’는 표현을 하였다. 위상과 시간에 매이지 않으므로 해탈의 마음이 되고 자유로운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의암은 [무체법경]에서 “한울님이 반드시 바르게 보이고 바르게 듣는다(天必正示正聞)”고 하였다. 바르게 보인다는 것은 거울처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바르게 듣는다는 것은 ‘한울님은 높으시나 낮은 소리도 다 듣는다는 천고청비(天高廳卑)’의 뜻이라 하겠다. 보이지도 않는 빈 거울이지만 그 앞에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정확하게 비추어주는 성령을 이렇게 말하였다. 의암은 ‘정시정문’을 누구나 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마음이 흰 것을 구하고자 하면 흰 것으로 보이고, 붉은 것을 구하면 붉은 것으로 보이고, 푸른 것을 구하면 푸른 것으로 보이고, 노란 것을 구하면 노란 것으로 보이고, 검은 것을 구하면 검은 것으로 보이느니라.” 그러므로 아득한 고대로부터 성령을 거울에 비유하였다. 성령은 구하는 그대로 주기 때문에 ‘말없고 소리없는 한울님이 가장 무섭다’고 해월은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성령은 특별히 머무는 곳이 없이 어떻게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며 분명하게 들려주는 것일까? 우주를 ‘혼원일기’로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해월은 동양의 전통에서 말하는 ‘귀신, 기운, 음양, 조화는 오직 하나의 기운(一氣)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주는 한 기운의 소사요, 한 신의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만유는 오직 하나의 신, 하나의 기운, 하나의 이치로 꿰뚫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기운, 하나의 이치, 하나의 몸이므로 어떤 것이 가면 반드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가더라도 되돌아올 수 없다. 길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되돌아 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생각이든 기운이든 행동이든 일단 촉발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상대성 우주론이라면 증대되거나 감소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상대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몸과 마음에게는 모든 것들이 상대적일 뿐이다. 중첩과 얽힘이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인 것처럼 정시정문도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개념일 뿐이다. 우주가 하나라는 것은 영의 세계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신령(神靈)은 오직 하나(唯一無二)이기에 신령이 곧 내 마음의 영이자 내 성품의 영이다. 타자성과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性靈)’과 ‘심령(心靈)’은 ‘성령(聖靈)’과 다르다. 성령(聖靈)은 개별적 존재이지만 천도교에서 말하는 신령, 심령, 성령은 오직 유일무이하다. 다시 말하자면 한울님의 성령과 수운의 성령, 해월의 성령, 의암의 성령, 역대 조상들의 성령, 인류전체의 성령이 나의 성령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논의는 [성령출세설]에서 아주 상세하게 개진되어 있다. 의암은 “대신사는 이미 성령으로 출세하셨으니 일체의 물건마다 마음마다 다 이 성령의 출세한 표현이 아님이 없는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만유와 만인을 오직 하나의 성령이 관통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나의 본래의 마음을 신령(神靈)의 강림, 제2의 강령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강령이 되지 않은 마음에게는 심령이나 성령(性靈)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첫 호흡을 할 때 예외없이 신령(神靈)이 내려와 내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심령(心靈)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심령을 믿지 아니하고 키우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심령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해월은 “오직 한울을 양(養)한 사람에게 한울이 있고, 양치 않는 사람에게는 한울이 없다”고 하였다. 수도를 하여 한울님을 키우는 제3의 강령인 ‘각지불이(各知不移)’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 가장 순수한 영을 타고났지만 우주간의 모든 생명체도 모두 다 이 ‘무량광대’하고 ‘청정무구’한 신령계로부터 마음을 받았다. 수운이 [불연기연]에서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갓난아기가 어머니를 알아보는데 어찌된 일인지, 가난해도 돌아오는 제비는 주인을 알아보아서 그렇게 하는지, 부모를 되먹이는 까마귀가 효도를 알아서 그러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수운은 [불연기연]의 마지막 구절에서 “조물자에 붙여보면 그렇고 그렇고 그러한 이치”라고 대답하고 있다. 조물자가 곧 성령임을 이해하면 이러한 질문들에 쉽게 답할 수 있다. 갓난아기가 되었던, 제비가 되었던, 아니면 까마귀가 되었던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성령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면 갓난아기가 방금까지 한 몸이었던 어머니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제비가 자기 집을 찾는 일도 당연한 일이며, 까마귀가 어미를 먹이는 것도 다 큰 자기가(새끼) 쇠약해진 자기를(어미) 먹이는 것이므로 그렇고 그렇고 그러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신령을 잊거나 잃어버렸다면 이와 같은 앎은 있을 수 없다. 성령이 아직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자기가 자기를 아는 일에 불과하므로 그렇고 그렇게 알 수 있고 할 수 있게 된다. IV 외유기화라는 제1강령을 통하여 생명체는 우주의 한 기운에 접하여 잉태하여 유기체를 이루고 내유신령이라는 제2강령을 통하여 생명체는 청정무구한 성령의 마음을 온전하게 받는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날 때부터 우주기운에 통한 존재이므로 그 우주적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무량광대’하고 ‘청정무구’한 오직 하나의 영성을 자기 마음으로 받았으므로 이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본래의 길이다. 우주적 혼원일기와 본래청정의 영성을 회복하는 길이기에 수운은 ‘천도’라 하였고 내 마음을 통하여 회복하기에 ‘심학(心學)’이라 하였다. 이 본래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는 다음을 기약한다. (끝) *본 글은 2023년 5월 12일/대화아카데미 바람과물연구소, 생명애콜로키움 [종교와 생태문제] 에서 발표하였으며 저자(오문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글_오문환(정치학박사, 선도사, 영등포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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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생명관: 대생명(大生命) (1)Ⅰ 「동학의 생명평화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논의한 적이 있기에 논의범위를 좀 더 종교철학적으로 심화시키고자 한다. 수운 최제우는 한울님과의 대화에서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아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았다고 한다. 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21자인데 그 가운데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해월의 해석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생명관을 논하고자 한다. 수운은 모실시(侍)를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로 풀이하였고 해월은 다음처럼 구체화하였다.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할 때에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룬 것이니라. 그러므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과 「지기금지 원위대강」이라 한 것이 이것이니라.” (“經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內有神靈者 落地初赤子之心也 外有氣化者 胞胎時 理氣應質而成體也 故「外有接靈之氣內有降話之敎」「至氣今至願爲大降」是也,” 해월, [영부주문]) 이를 근거로 천도교는 생명체는 두 번의 강령으로 잉태되고 마음을 받아 태어나고 주문수행에 의하여 세 번째 강령으로 영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본다. 첫째 강령인 ‘외유기화’에 의하여 포태되고, 둘째 강령인 ‘내유신령’으로 갓난아기가 처음으로 호흡할 때 영이 ‘적자지심’으로 내려온다. 셋째 강령인 ‘각지불이’는 주문수련으로 내 몸과 마음이 영성을 깨달아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다. 이 세 번의 강령이 이루어지게 되면 사람은 비로소 천주를 자신 안에 온전하게 모신 ‘시천주’ 인간이 된다. 이렇게 한울님을 모신 사람을 천도교에서는 신선(神仙), 신인간(新人間), 신인(神人)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과정으로 대생명이 된다. 이 글은 첫 번째 강령인 ‘외유기화’와 두 번째 강령인 ‘내유신령’을 통하여 천도교의 생명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생명의 포태가 영(靈)의 강림(降臨)으로 이루어진다는 해월의 설명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이해되는 의학과는 다른 설명방식이다. 이기(理氣)와 기운(氣運)이 바탕이 되는 질료(質)를 만나서 포태가 된다는 종교철학적 설명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생명의 탄생은 천리(天理)와 천기(天氣)라는 우주적 기운과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만 분명히 하면 될 듯하다. ‘외유기화’는 ‘외유접령지기(外有接靈之氣)’로도 표현되는데 밖으로 영에 접하는 기운이 있다는 뜻이다. ‘밖에 있다(外有)’는 표현 때문에 영(靈) 또는 지기(至氣)가 마치 시공간적 타자로 보이지만 영과 지기에 열려(開闢) 우주기운이 곧 나의 기운으로 되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지기(至氣)’ 또는 ‘혼원일기(混元一氣)’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음양오행과 같은 기운과 달리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과 접함으로써 생명이 잉태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수운은 ‘음양합덕으로 수백천만물이 화해난다’고도 하지만 ‘외유기화’는 한울님의 기운이 유기적 생명체로 나타나는 것을 서술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잉태는 다 한울님 기운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수운의 [불연기연]에 나타나는 우주만유의 알 수 없는 불연에 대한 대답도 외유기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 더 나아가 자연사물까지 모두 다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과 하나로 통해져 잉태되었다는 실상을 통찰한다면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우주생명의 신묘함을 그렇고 그렇게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불연기연]은 황하수가 어찌 성인의 탄생을 알아서 천년에 한번 물이 맑아질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그렇지만 황하수도 하나의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산물이고 성인의 마음의 탄생도 똑같은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소산이라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성인의 청정무구한 마음기운도 황하수의 진흙탕 물도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으로 통해져 있으므로 두 기운이 통하여 같아져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량수의 생명체들은 오직 하나의 기운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되면 해월의 표현대로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한 동포이고(人吾同胞) 만물과 내가 또한 한 동포(物吾同胞)’라는 점도 스스로 자명해진다. 천리와 천기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초월적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과 내 마음에 내려와 있다고 본다면 왜 해월이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시행하였는지도 쉽게 이해된다. 신위(神位)를 마주보는 벽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여 설치하는 이유는 천지정신과 천지기운이 모두 내게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혼원일기, 우주정신, 신령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영의 강림(降臨)이라고 표현하지만 초월적 영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잉태 순간에 지극한 한울님 기운과 접하여 자신 안에 모시게 된 것이다. 신위를 자신을 향하여 돌릴 수 있는 것은 물론 한울님 모심을(侍天主) 스스로 깨달은 사람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성령출세설]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신사께서 사람이 곧 한울인 심법을 받으시고 향아설위의 제법을 정하시니 이것은 우주의 정신이 곧 억조의 정신인 것을 표명하심과 아울러, 다시 억조의 정신이 곧 내 한 개체의 정신인 것을 밝게 정하신 것이니라.” 조금 넓혀 표현하자면 개체정신이 곧 우주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 정신은 나의 정신이면서 동시에 ‘천만년 전 사람이나 천만년 후 사람의 정신과 같은 정신’이라고도 말한다. 한울님의 정신기운이 잉태의 순간에 영으로 이미 내 안에 모셔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근본적 동일성령이 천차만별의 인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생명위기를 실감하는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생명의 우주적 연계성 또는 인드라망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의식이 열렸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천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 생명의 그물망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해월의 언행보다 더 좋은 전범(典範)은 없어 보인다. 해월은 베짜는 며느리를 보고 한울님이 베를 짠다고 하였으며,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때리지 말라고 하였으며, 동식물도 다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였으며, 새소리도 한울님의 소리이며, 나뭇가지도 함부로 꺽지 말라고 하였으며, 어린아이가 나막신을 끌고 가니 가슴에 통증을 느꼈으며, 땅을 어머님 살처럼 여겨 침을 뱉거나 물을 멀리 뿌리지 말라고 하였다. 세상으로 눈을 잠시라도 돌려 보면 현대문명이 어느 곳을 향하여 전력질주하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방향전환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점을 동학·천도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월은 “궁을이 문명을 돌이킨다(弓乙回文明)”라고 하였다. 궁을은 수운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영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영부는 말 그대로 신령(神靈)에 그대로 부합하는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운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종이 위에 뚜렷한 형상을 그려내어 불에 타서 먹어보니 온갖 질병이 나았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니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도덕을 따르는 사람은 매번 적중하였다고 하였다. 즉 받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해월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이라고 하여 “영부심(靈符心)”이라고 하였다. 즉, 병을 치유하는 것은 천령에 부합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이 문명을 대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을 얻는 마음공부가 된다. 놀라운 점은 사람은 태어날 때 이 궁을마음을 타고났다는 사실이다. (계속) *본 글은 2023년 5월 12일/대화아카데미 바람과물연구소, 생명애콜로키움 [종교와 생태문제] 에서 발표하였으며 저자(오문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글_오문환(정치학박사, 선도사, 영등포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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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일이다105년 전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함성소리는 매해 3월이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고동치게 한다. 3.1만세운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평화로운 항거였으며 3.1정신은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3월이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공적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 있다. 바로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자금을 준비하였던 의암 손병희선생이다. 천도교 제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우리나라가 강제로 강탈당하게 되자 10년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가게 된다. 우이동에 땅을 구입해 수련도장인 봉황각을 짓고 전국에 있는 유능한 지도자들을 모아서 독립의지를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하여 심신훈련을 하게 한다. 3년에 걸쳐 7차례 483명이 봉황각 연성수련을 통해서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3.1운동때 전국 각 지역에서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부구총회를 통하여 결의하고 교호당 10원이상씩 건축성금을 내도록 하였다. 이 자금은 후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가 적자경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끝까지 폐쇄하지 않고 훗날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 37개 대교구로 하여금 등사기를 1대씩 구입하도록 하여 훗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의암 손병희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49일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 아홉 곳에 대표 기도처를 정하고 각 기도처마다 4명씩 대표를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게 하면서 3.1독립운동을 위한 전국 교단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그리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대연합으로 33인 민족대표를 결성하기에 이르른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전국 조직망을 정비하고 독립자금까지 전담하는 등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지도해 나갔지만 매년 3.1절이 되면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은 미미하게 들리는 듯 마는 듯하다. 또한 천도교의 3.1운동에 대한 역할 또한 알려지기도 전에 잊혀져 가기만 한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해야만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역사는 사라지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잘못이며 이대로 가다가는 사라지고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떠들썩 하도록 매해 기억하고 기록하고 또 기념해야 할 것이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방법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자.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틀에 박힌 상징과 형식이 아닌, 권위적이지도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은 형식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참회하며 가장 예술적으로 역사를 작품속에 표현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살아있는 곳으로 피터 아이젠먼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1998~2005)는 홀로코스트(Holocaust)로 희생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고 있다. 다음은 나치의 분서사건 60주년을 즈음하여 독일 베벨광장에 세워진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을 보자. 베벨광장 중심부에 가로120센티미터, 세로120센티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투명유리창이 있고 그 지하에 텅빈 직방체 공간이 있다. 이스라엘 예술가 미하 울만의 「도서관」작품이다. 책들의 화형식이 있었던 그 장소의 지하에 설치된 경고의 기념조형물이다. 이처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방법으로 문화예술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문화예술공간은 시민들의 삶속에 스며들고 있으며 그들은 생활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보고 느끼면서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_숙현당 정정숙(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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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반역사적인 ‘이승만 띄우기’ 시도요즘 독재자와 학살자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승만 대통령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접하게 된다. 뜬금없이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여 독재자를 기리겠다고 한다거나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짚으려고 한다.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기술한 우리나라 헌법전문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런 준동에 분노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현재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말살과 부정부패를 저질러 4.19혁명으로 쫒겨난 그의 말로를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판에, 독재자 이승만을 두고 다시 논쟁하는 자체가 소모적이다. 이승만의 악행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8ㆍ15해방 이후에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면서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이 100만명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이승만을 국가보훈부가 지난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고, 국방부는 그를 혜안을 지닌 지도자로 미화하는 교재를 발간하기도 했다. ‘홍범도 지우기’로 국민의 공분을 산 집권 세력이 ‘이승만 국부 만들기’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 북한·중국·러시아가 공산화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그를 칭송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농지개혁·교육개혁·정치개혁이란 3개 개혁으로 대한민국의 토대를 닦았다.”며 이승만을 한껏 찬양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격동의 해방 공간에서 그가 내린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역사적 사실도 그들의 눈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편다. 진실을 덮고 거짓을 호도하려는 영화 한 편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인 것만 같아 정말 씁쓸하다. 정권은 유한하고 역사의 흐름은 도도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이런 시도가 성공하겠는가. 말 그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으로 국회에 상정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하고자 하는 법률안이 아직도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145명을 서훈하면서도,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 띄우기’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를 거스르는 세력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역사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 이승만을 구국의 민족지도자로 받들려는 기도를 절대 묵과할 수 없다. 국민 공감대도 없이 진행되는 시대착오적 ‘이승만 띄우기’는 성공할 수도 없고 결국 이념전쟁으로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것으로 끝날 것이 뻔하다. ‘이승만 국부 만들기’에 주력해온 뉴라이트 역사관에 따른 반역사적인 악행을 당장 멈추기를 요구한다. 글_윤여진(시인,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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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다올해는 3.1운동 105주년이다. 모든 언론이 3·1운동 105주년이라고 쓰고 있다. 오랫동안 사용해 화석화된 잘못된 용어이다. 105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 인근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갔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경성 거리의 민중들을 바라보며 끌려가던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혁명의 최후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1900년대 초의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언론과 교육, 출판 운동 등으로 민도를 높이는 개혁을 전개하다가 1913년부터 전국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차례로 불러 특별 연성 수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장차 국가를 위해서 쓰일 인재를 미리 양성해 놓고자 한 지도자의 혜안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종결되고 민족자결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유행되자 의암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시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드디어 1919년 천도교는 전체 인구 1,800만 명에 300만 명의 신도 수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단이 되었다. 천도교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할 충분한 인원과 조직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도들만이 참여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손병희는 거대한 민족운동을 천도교만의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3.1의거는 제2의 동학혁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국외에서의 독립선언과 의문스러운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민중의 분노가 치솟자 손병희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비밀리에 각계의 지도층에게 함께 할 것을 제의했지만 대부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무시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목사 등은 이미 개신교의 독단으로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종단이 비밀리에 접촉했고 함께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교단과 함께한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임을 고려할 때 이들 종단 지도자들의 결단은 돋보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불교계의 큰 스님인 용성 스님과 만해가 함께 하니 비로소 종교연합으로 민족대표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독립선언에 동참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들 지도자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적 정신이 바로 3.1의거의 출발점이었고, 그들의 고뇌 어린 결단이 있었기에 3.1의거는 추진될 수 있었다. 의거의 중심인 천도교는 과거 실패했던 동학혁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자세로 준비했다. 손병희는 최남선을 시켜 작성된 독립선언서를 자체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게 비밀리에 인쇄할 것을 지시했다. 인쇄 중 종로경찰서의 악질 조선인 순사에게 발각되기도 하고, 완성된 선언서를 옮기는 과정에 파출소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등 곡절 끝에 3만 5천 장의 선언서를 종교 조직을 이용해 전국에 퍼트리는 데 성공하였다. 만세 시위는 당일 오후 2시 경성 등 전국 6개 도시를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당황한 일본은 민족대표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전국의 시위에는 강력한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밟으면 밟을수록 일어서는 우리 민족이었다. 특히 경기도의 시위가 가장 격렬했다. 수원 화성 지역은 장날마다 시위가 일어났으며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은 대표적인 피해 사건이 되었다. 3월부터 3달 동안에만 시위에 나선 이가 전국적으로 210만 명에 이르고 체포·투옥된 수도 4만6,948명, 부상자 5만 명 이상이었으며 사망자도 7,5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운동이란다. ‘쓰리 포인트 원 스포츠’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단 말인가? 3·1운동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가. 해방 이후 헌법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의 헌법전문 초안에도 분명 3·1혁명이었다. 그러나 국회로 넘어가 심의 중에 바꾸었는데 일설에는 대통령에 유력한 이승만의 온화한(?) 이미지와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첨꾼들이 권했고 이승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헌법전문에 운동으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사용하던 3·1혁명을 버린 것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3.1운동이 아닌 3·1혁명, 3·1대혁명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과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에도 명백히 3·1혁명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지난 3·1혁명 100주년 당시 정명(正名)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명 되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된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 혁명이었는데. 이제 우리부터라도 제대로 된 명칭을 사용하자. 3.1혁명이라고.◎ 글 임형진(년암, 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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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 년 전 천도교인처럼지금부터 백 년 전인 1923년 8월 10일 지금의 천도교중앙총부 전신인 천도교중앙종리원의 직원회에서는 중대한 결정 하나를 내렸다. 그것은 천도교 교조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대신사출세백년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을 조직한 결정이었다.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는 1824년 10월 28일 태어났다. 1924년이 수운대신사가 탄신한지 꼭 백 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이를 교단적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기념사업회는 5일 후인 8월 15일 결성되었고, 위원장은 춘암상사가 맡았다. 기념사업회는 기념사업의 방향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했다. 하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장래를 서로 전망하고, 다른 하나는 수운대신사를 본받고 법으로 삼아 천도교인을 독려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는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 기념이 단순히 후천의 성인인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사실을 축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들이 수운대신사와 같은 사람으로 거듭나 수운대신사가 목적한 바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다지자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줄이면 과거를 기념하여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기념사업을 하자는 방향이었다. 사업의 방향에 맞춰 기념사업은 크게 세 가지로 준비하였다. 첫째는 과거를 기념하는 행사로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잇는 특별기도 봉행이었다.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은 포덕과 광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뜻을 계승하기 위해 천도교인 전체가 참여하는 특별기도를 하기로 했다. 천도교단에서는 교회나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 전 교인들이 일정 기간의 특별기도를 봉행해 정신 통일과 행동 통일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특별기도가 3·1운동 직전의 49일 특별기도였다. 기념사업회는 특별기도 기간을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달인 1924년 10월 1일부터 10월 21일까지의 21일간으로 정했다. 수운대신사가 태어난 달에 전 교인들이 몸과 마음을 일치해 포덕천하와 광제창생의 대원을 실현하는 천도교인으로 무장할 것을 기원하기로 했다. 기도 시간은 낮 12시로 정했다. 기도 시간을 하루의 중심인 낮 12시로 정한 것은 수운대신사의 득도가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는 의미를 담았다. 기도의 방식은 봉청수(지금의 청수봉전), 묵념기도(지금의 심고), 본주문 105회 묵송, 묵념기도의 순서로 했다. 특별기도를 통해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둘째는 현재의 천도교를 담는 행사로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의 활동을 보여주는 기념행사였다. 기념행사는 이틀에 걸처 진행되었다. 10월 27일 저녁 7시부터 중앙대교당에서 당대 천도교를 대표하는 연사인 이돈화, 이종린, 방정환 세 사람이 수운대신사 탄신의 의미를 돌아보는 강연회를 열었다. 탄신일인 10월 28일에는 11시 반부터 새로 지어진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에서 탄신 백주년 기념식을 열어 수운대신사 창도 정신을 기렸다. 이어서 청년당 대회를 열어 추모사 낭독과 대신사와 청년당에 관한 연설, 선언문 낭독 등을 진행하였다. 청년당 대회 폐회 후에는 여흥이 진행되었는데 동덕여학교 학생의 축하 공연, 김문필 일행의 기마술과 무도, 청년당의 가장행렬과 광대 줄타기, 경성악대의 주악 등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기념행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저녁 7시부터 청년당, 내수단(여성회), 학생회, 소년회 등 7개 부문 단체에서 준비한 공연이 밤 12시까지 진행되었다. 기념관 뜰에는 전등을 달고 만국기를 내걸어 화려하게 장식해 기념행사 분위기를 높였으며, 기념관 안에는 7개 부문단체에서 만든 각종 모형물이 찿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전국에서 4천 명이 참여해 일대의 교통이 혼잡할 정도였다. 셋째,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으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의 건립이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수운대신사 탄신 백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아 천도교인 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사업으로 기념관을 건립해 일반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독실 교인 3만 5천 집을 선정하여 이들이 1원씩 성금을 낸 3만 5천 원으로 대공회장을 건립하기로 했다. 기념관은 6월 25일 착공해서 탄신일인 10월 28일 기념식을 겸해 낙성식을 가졌다. 총공사비는 약 5만 원이었다고 알려졌다. 기념관은 앞은 2층, 뒤는 1층으로 연건평 160평으로 1천 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대공회장이었다. 이 기념관에 대해 “기념관의 넓이는 9칸이요. 길이는 12칸인데, 동 기념관은 일반 집회에 제공할 터이요, 활동사진(영화), 강연, 연극 등 어떠한 것을 사용하더라도 편리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데, 조선인의 손으로도 집회 장소를 건축한 것은 이곳이 효시라 할 수 있다.”라고 당시 언론에서 기념관 건립의 의미를 설명했다. 수운대신사의 정신을 담은 기념관은 서울에서 제일 큰 공연장으로 시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민족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념관을 우리의 힘으로 만든 것은 수운대신사의 창도의 정신을 세상에 펴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이었다. 이처럼 백 년 전 천도교인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후천의 성인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열과 성을 다해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성과를 내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전 천도교인들이 단결해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 년이 갖는 의미를 새기고 이를 세상에 전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인들이 특성을 모아 국내 최고의 대공연장을 건축해 세상을 위해 내어놓았다. 이 소식에 민족 구성원들은 가슴이 들떴다. 백 년 전 천도교는 민족의 한 가운데에서 희망이 되었다. 이제 다시 백 년이 지났다. 올해가 수운대신사 탄신 2백주년이다. 천도교에서 대신사 탄신 2백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번에는 어떤 기념물이 만들어져 수운대신사의 탄신의 의미를 새기고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백 년 전 우려했던 것처럼 그냥 행사를 위한 행사, 해마다 지내는 제사와 같은 무의미한 행사를 준비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다못해 천도교박물관을 건립해 세상 사람들에게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알리는 공간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한다. 백 년전 천도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그때와 같이 세상의 희망으로 천도교가 우뚝서기를 기대한다. 글, 덕암 성강현(흥신포 직접도훈,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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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티브이 없었으면 어떡할 뻔하셨어요?” 라고 내가 묻자 준비한 것처럼 촌각의 틈도 없이 돌아온 대답이었다.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 마을(노인)회관에 옹기종기 앉아서 티브이만 보고 있는 어르신들. 거의 혼자 사시는 분들이라 체온도 그립고 난방비도 겁나니 노쇠한 몸 하나 의지하기엔 마을회관이 좋다. 종일 티브이 장면을 따라가며 얘기 보따리를 끌렀다 싸맸다 하시는 노인들. 그러다 심드렁해지면 묵은 기억 들추다가 말다툼도 벌이지만 다시 티브이 따라 깔깔 웃는다. ‘되는대로 산다’라는 말은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지 않고 뭐든 수용한다는 말이다. 《놓아버림》의 데이비드 호킨스나 《당신이 플라시보다》의 조 디스펜자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이는 어르신들의 몸에 밴 삶의 지혜다. 일단 수용한 다음에 한발 더 나아갈지 여부를 궁리하는 생활 태도. 한울 모심의 태도다. 티브이 없어도 얼마든지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잘 보내실 어르신들이다. 하지만 마을회관에 모이긴 해도 늘 벽에 기댄 등은 더 구부정해지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지라 약을 한 주먹씩 먹는다. 움직이지 않으니 식욕도 별로 없어서 면사무소에서 나온 쌀과 부식은 옆방에 쌓여있다. 옛날과 달리 요즘 먹거리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맛을 내느라 섞어 놓은 첨가물들이 얼마나 몸을 망치는지 모른다. 멸치와 쥐포조차 인공조미료가 듬뿍 스며있다는 내 말에 깜짝 놀란다. 특별한 날에 즐겨 드시는 회도 모두 양식한 것이고 정전이 되면 물고기가 폐사하는 게 강제로 산소를 공급하다가 전기가 끊기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니 입을 쩍 벌린다. 작년부터 어쩌다 내가 공식 노인이 되었고, 올해 처음으로 노인 일자리 가서 목격한 우리 마을 노인들 모습이었다. 좋은 먹거리가 뭔지를 말하기보다 믹스커피 통 옆에 아몬드와 쌍화탕 분말 차를 한 통씩 사 놓았더니 잘 드신다. 이 역시 가공식품이지만 자연 식재료는 노인들 일거리라 어쩔 수 없기도 하다. 내가 시간 나는 두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은 건강 체조를 해 봤다. 손뼉치기와 발끝 부딪치기. 팔을 뻗어서 가 닿는 곳 모두를 토닥토닥 두드리기. 손 비비기와 얼굴 비비기를 앉은 채로 했다.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해서다. 서로 왼손으로 악수하게 해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팔과 왼 어깨를 골고루 두드려주는 놀이도 했다. 목덜미와 등짝까지 두드리다 보면 자연스레 포옹을 하게 된다. 순간순간 깔깔 웃는다. 쇠똥 구르는 것만 봐도 웃어댄다는 소녀들처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내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핫스팟을 설정하고 에이치디엠아이(HDMI) 케이블을 티브이에 연결해서 유튜브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비록 오래된 프로지만 웃음보따리인 에스비에스(SBS)의 《고향에서 온 편지》도 보고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치매예방 영상도 봤다.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발 마사지였다. 발바닥과 발등의 혈 자리 이미지를 칼라로 인쇄하여 나눠 준 다음에 반사구니 서혜부니 하는 원리를 쉽게 설명하고서 내가 쓰던 호호바 오일과 코코넛 오일에 오렌지 에센셜 오일이나 라벤더 오일을 브랜딩 해서 발라 드렸다. 증상에 따른 혈자리를 누르게 하다가 그냥 막 “되는대로 눌러도 된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도 노인들과 노는 이 놀이를 되는대로 계속할 생각이다. “되는대로”. 글, 목암 전희식('밥은 하늘입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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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SG 경영의 근본이 천도교에 있다최근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의 시작은 1970년대 UN에서 논의된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에서 시작되었는데 UNSDGs에 의하면 인류의 보편문제와 지구 환경문제 및 경제 사회문제를 2030년 까지 17가지 주목표와 169가지 세부 목표를 정해 국제적 공동 목표를 세웠다. 우리나라 역시 이 분야에 큰 관심과 함께 향후 계획 및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업은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은 생산품을 만들어 이익을 많이 내면 되었지만 향후는 생산품을 만드는 과정과 더불어 비재무적인 요소(환경(E), 사회(S), 지배구조(G))까지도 평가를 하여 투자자들이 투자를 결정할 때 고려하도록 하였다. ESG 경영 평가단은 사용하는 제품이 원자재의 생산부터 건전하고 합법적인 과정을 거쳤는지를 확인하고 평가를 한다. 이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 전 분야에도 이러한 개념이 바탕이 되어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종교계에서도 이러한 ESG 경영이론을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천도교에서는 ESG와 관련된 내용들이 이미 경전 속에 많이 들어 있다. 환경(Environmental)은 기후 변화 및 탄소 배출, 에너지 사용, 수질, 폐기물, 토양 오염, 소음, 진동, 환경 친화 등의 환경 측면에서 위험 사고를 바탕으로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환경 활동이며, 해월신사님의 생태 존중 말씀은 탄소제로시대에 새겨야 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땅을 어머니 살처럼 여기면 온갖 만물이 그 위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Social)는 노동, 인권, 안전, 보건, 성 평등, 지역사회 기여 등의 사회적 책임 활동이며, 천도교의 시천주 진리로서 인내천 세상이 된다면 사회적 책임 활동에 앞장 설 수 있다.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종교인들의 노력이 필요하며, 특히 천도교는 다른 어느 종단보다 인권을 존중한다. 마음속으로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이상 소중한 인권과 사회적 책임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지배구조(Governance)는 기업의 투명성, 윤리적 경영, 이사회의 역할과 책임을 다함으로서 기업의 장기적 이익과 지속 가능한 경영 활동인데, 천도교의 임사실천십개조를 보면 ‘윤리를 밝히라’ 그리고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지배구조의 바탕이 되는 말씀이다. 윤리를 바로 세워 책재원수가 되지 않도록 건실한 천도교의 지배구조가 필요하다. 침체된 교단에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다. 천도교도 높은 도덕성과 함께 훌륭한 경영마인드를 갖춘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전 세계 선진국들은 지금 ESG의 경영전략에 올인하고 있다. 2050년 탄소제로 사회구현을 목표로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장서서 이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천도교단에서도 급변하는 ESG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교단차원의 ESG위원회가 구성되고 전문가들이 모여서 교단 발전을 의논하였으면 한다. 향후 기후 변화는 이대로 가면 지구의 큰 이변으로 삶, 즉 생존 자체를 위협당할 수 있다. 온 세계가 함께 기후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사회적 가치 창출과 투명한 윤리 경영에 노력해야 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온실가스 즉 탄소배출이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었다.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 지속가능한 해법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겨 가고 있다. 종교계 역시 탄소 제로 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동참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더욱이 천도교가 앞장서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ESG 경영의 확대 측면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 간의 상호 작용으로 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보호 및 사회적 공헌 등으로 종합적 삶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글, 울산교구 이암 정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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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수운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개벽을 생각해본다올해 갑진년(포덕165, 2024년)은 대신사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이하,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이다. 다시 말해 100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또한 동학혁명 130주년, 갑진개화혁신운동 120주년, 천도교여성회 창립 100주년으로서 천도교단에는 경사가 겹치는 해이기도 하다. 먼저 본 글에서는 대신사 탄신 2백주년에 초점을 맞춰 논하고자 한다.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며, 어떤 기념비적 사업을 진행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국내는 물론 대신사 탄신에 대한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연구 및 국제학술대회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기념사업과 계승사업을 통해 동학·천도교의 3대 목적인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지(之) 대도(大道)의 실천사업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이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이 원고의 한계도 있고 해서 여기서는 대신사 탄신에 대한 의미와 우리의 자세를 중점적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1. 대신사의 탄생은 개벽을 잉태하고 있었다. 천도교(동학) 제1세 교조 수운 대신사(이하, 대신사)께서는 1824년 10월 28일(음력)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향은 경주, 아명(兒名)은 복술(福述)이며, 본래 이름은 제선(濟宣), 자(字)는 도언(道彦)이었다. 후일 구도 과정에서 이름은 제우(濟愚)로 자는 성묵(性默)으로 바꾸었고, 호는 수운(水雲)으로 했다. 대신사는 신라 말기의 석학 고운 최치원의 25세손이며, 정무공 잠와 최진립 장군이 7대조이시다. 그리고 대신사 아버지는 근암 최옥(이하, 근암공)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근암공은 벼슬을 하지 않은 산림처사로써, 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킨 영남 유학의 거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설의 한 갈래를 계승한 선비로서 경상도 일대에 그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이러한 근암공의 학문과 덕망을 온전히 계승한 사람이 바로 근암공 아들 대신사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대신사 어머님 한씨(韓氏)께서 재가녀(再嫁女) 신분이었다는 것이 대신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조선은 성종 때에 왕조의 근본을 이루는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면서 예전(禮典)에 밝히기를, 재가녀 자손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재가녀 자손을 마치 서자(庶子)와 같이 신분차별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분차별이 없었다면 대신사께서는 아마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적당한 벼슬을 하였거나, 아니면 근암공 아버지처럼 사림처사로서 서당 훈장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당시 시대의 불평등한 현실 속에, 대신사는 당시 학문을 모두 통달한 선비였지만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며 큰 방황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봇짐장사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크게 변혁시키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입산수도는 물론 조선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인심풍속을 살피곤 하였다. 다시 말해 대신사의 득도(得道) 즉 동학창도는 대신사 아버님이자 스승님이신 근암공의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근암공의 셋째 부인이 되신 대신사의 어버님 한씨부인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출발한다. 한씨부인은 한 번 결혼했다 남편과 사별한 청상과부의 신분으로 근암공 셋째 부인이 되신 것이다. 이처럼 대신사께서 신분에 대한 고민과 방황 그리고 사회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등 당시 불평등했던 시대상황은 바로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시천주(侍天主)·인즉천(人卽天)·사인여천(事人如天) 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는데 원인 제공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대신사의 탄생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잉태(孕胎)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천도(天道)이다. 일찍이 민족시인 신동엽은 대서사시 「금강」에서 대신사님을 석가, 예수님과 더불어 세계적인 성인으로 조명한 바 있다. 국내외에서도 유명한 철학자 김용옥과 시인 김지하도 강연과 저술을 통해 대신사를 공자와 예수에 버금가는 위대한 성자라고 하였다. 또한, 동방사상 및 동학사상에 조예가 탁월했던 범부 김정설은, “최제우는 천계를 받아, 흩어져 무질서한 천년의 적막을 깨트리고 역사적 대강령을 이루었다. 동시에 신도성시 정신의 기적적 부활이며, 국풍재생의 경이로운 사태로서 어마어마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고 강조하여, 수운 선생의 득도와 동학 창도는 시대의 혁명을 넘어 새로 운 개벽의 세상을 열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대신사의 일생과 동학·천도교의 역사를 접하고 지극정성으로 수도(修道)를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이 되고, 소인(小人)이 대인(大人)이 될 수 있다.’는 교훈과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대신사께서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진인(眞人)이자 신인(神人)의 경지에 오른 대성인(大聖人)이 되신 분이다. 대신사님의 제자들은 대신사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대신사님을 닮아가고 대신사님처럼 되는 것이 제자들의 도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 대신사님처럼 실천하는 것이 곧 동학도유(東學道儒)이고, 천도교인(天道敎人)이자 무극대도인(無極大道人)이 되는 것이다. 3. 천도교(동학)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자.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수운 최제우 스승님의 탄생의 의미를 짚어보고 또한 우리의 자세도 점검해보자. 대신사 탄신은 바로 동학(천도교) 창도로 이어지고, 동학창도는 바로 대신사 순도(殉道, 순교)로 이어진다. 대신사 순도는 바로 1871년 대신사 순도 7주기에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이어지고, 영해신원운동은 1892~1893년 공주, 삼례, 광화문, 보은, 원평 교조신원운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교조신원운동은 1894년 1차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고,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은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으로 계승된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은 3.1독립혁명으로 계승되고, 해방 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동학·천도교 정신은 남북평화통일 달성이라는 또 다른 시대적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하며, 지구환경과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급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이러한 막중한 임무와 시기에 우리 천도교단이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이다. 현재 우리 교세가 대신사 순도 때와 같은 숫자이다. 교인수가 한때는 3백만 명을 웃돌았으나, 현재는 현저한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이러한 쇠운을 극복하고 성운을 맞이하려면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겠으나, 우선 천도교인들의 각자위심(各自爲心)을 퇴출하고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지향하는 것으로 기본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승님과 선열님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못다 이루신 꿈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 다시개벽의 새로운 세상을 향해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천도교(동학)의 새로운 문화를 하나 창출했으면 한다. 바로 대신사 출생지(出生址)에서 순도지(殉道址)까지 성지순례를 매년 정례화 하였으면 한다. ‘대신사, 탄신지에서 순도지까지의 성지순례’는 대신사 탄신일(10.28), 대신사 순도일(3.10), 대신사 득도일(4.5, 천일기념일) 중에서 가장 적합한 날을 선택하여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성지순례는 신앙심 고취는 물론 대중적인 문화창달 즉 포덕천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끝) 글 이윤영 (천도교 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