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3.12.08 18:17
TODAY : 포덕164년 2023.12.09 (토)
최진립 장군 묘소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글을 남겼다. “우리 선조 험천 땅에 공덕비를 높이 세워 만고유전 하여보세. 송백 같은 이내 절개 금석으로 세울 줄을 세상 사람 뉘가 알꼬.”, “선조의 충의와 절개는 용산에 남아 있네. 해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우리 임금님 성덕을 다시 돌아보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언급한 ‘선조’는 잠와 최진립 장군으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7대조이다. ‘용산’은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용산서원을 말한다. 유림에서는 최진립 장...
고된 삶이었다. 험난한 삶이었다. 의로운 삶이었다. 외로운 삶이었다. 찬란한 삶이었다. 101년 전, 의암 손병희 선생이 눈을 감았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의 주축이 되어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를 보낸 충북 청주에는 생가터가 복원되어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6인이 충북 출신인만큼 청주 삼일공원에는 선생을 비롯한 권동진, 권병덕...
나동환 교장 임명장 동학의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신사는1884년부터 교장,교수,도집,집강,대정,중정의 육임제를 실시하였는데,이는 오늘날 천도교의 교역자 제도의 효시이다. 1885년부터는 각 지방에서도 육임제를 확장하면서 동학의 교세가 크게 늘어났다.교장은‘자질이 알차고 덕망이 두터운 사람’에게 수여된 직책이었고,교수는‘성심으로 수도하여 가히 교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대정은‘공평하며 부지런하고 중후한 사람’에게 수여된 직책이었다. 위 세계기록유산은 위 육임제의 직책...
혁명가요, 종교개혁가이자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그는 옥중에서 받은 고문 등으로 100년 전 숨을 거두었다. 백범 김구가 해방 후 환국해서 처음으로 한 공식행사는 임정의 요인들과 함께 서울 우의동에 있는 손병희의 무덤을 찾아뵙고 귀국 보고를 드리는 것이었다. 동학혁명 당시 김구는 해주의 접주로 손병희의 부하였다. 서울지역의 의암 손병희 선생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손병희 선생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가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대업을 펼쳐 나갔던 흔적을 만나본다. 의암 손병희 ...
2022년 TV 인기드라마였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예상 외의 좋은 반응으로 각종 매체에서 많은 조명을 받은 바 있다. 이 드라마가 우리 사회에 던져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지금으로부터 129전 전(前) 1894년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이하 동학혁명) 당시 동학이 내세웠던 첫 번째 실천이념이자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가 보국안민(輔國安...
서울 서소문역사공원에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당시 동학의 지도자 안교선, 성재식, 최재호, 안승관, 김내현 등이 처형당하고 효시되었던 곳이다. 김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