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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교구, 제120주년 현도기념식 봉행부산시교구는 포덕 166년(2025) 제120주년 현도기념식을 교구 교당에서 봉행하였다. 이날 기념식은 예암 고봉섭 교화부장의 집례로 시작되었으며, 성지당 허봉이 여성회장이 의암성사의 법설 ‘권도문’을 경전봉독하였다. 이어 정신당 박차귀 교구장이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를 대독하였다. 기념사에서는 의암성사님께서 대고천하를 선포하신 역사적 의미를 상기하며, 오늘의 교단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제2의 현도’의 길을 깊이 성찰하는 메시지가 전해졌다. 참석한 교인들은 천덕송 제13장 기념송을 1절부터 3절까지 합창하며 기념의 뜻을 모았고, 이어 포덕행진곡을 합창하며 의암성사의 현도 정신을 가슴 깊이 새겼다. 이번 기념식은 부산시교구의 많은 교인들이 함께한 가운데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봉행되었으며, 행사를 마친 뒤에는 점심식사와 도담을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부산시교구는 “현도의 참된 뜻을 다시 새기고, 지역 교화와 교단 발전을 위해 더욱 정성을 모아가겠다”고 밝혔다. 사진 및 자료제공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 -
화풀이 장단에 몸이 축나다『홀로 피어 꽃이 되는 사람』 천도교신문에서는 시인이자 숲 해설가인 이시백 동덕의 생활 명상 글과 라명재 송탄교구장이 엄선한 동학 경전 구절을 함께 엮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학의 지혜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일상의 삶 속에서 꽃피우는 동학의 길을 함께 사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화풀이 장단에 몸이 축나다 어릴 때 길을 걷다가, 먼 산 보고 걷다가 돌뿌리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네. 홧김에 돌을 발로 팍~ 아이고, 발가락까지 아파서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릎까지 까여 쓰리고 피가 나니 우는 소리가 더 커졌던가? 거기까지 기억나진 않는다. 경솔하고 급작스러워 인내가 어려워지고 경솔하여 상충되는 일이 많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마음을 쓰고 힘을 뜨는 데 나를 순히 하여 나를 처신하면 쉽고 나를 거슬려 나를 처신하면 어려우니라. <해월법설 : 대인접물>: 어릴 때 왜 그리 성격이 급했던고. 즉흥적으로 행할 때가 많았다. 조급하고 침착하지 못한 성격이 지금도 튀어 나온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속담을 잘 지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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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중앙교당에서 현도의 뜻이 울려 퍼지다제120주년 현도 기념식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교구에서 봉행되었다. 포덕 166년(2025) 12월 1일(월), 남해읍 중앙교당에서 봉행한 현도기념식은 의암성사님의 천도교 현도의 뜻을 기리고 교단의 정체성과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다지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송암 박철 선구교구장의 집례, 청수봉전은 덕성당 이정희 선도사, 경전봉독은 인신당 신동엽 선도사(권도문, p.686)가 맡았다. 이어진 천덕송과 기념송은 현도의 의미를 더했다. 여유범 남해교역자운영위원장(남해교구 도원포 도정)이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를 대독하여 교령의 메시지를 교인들에게 전달했다. 이후 포덕행진곡을 합창하며 기념식의 뜻이 울려 퍼졌다. 기념식 진행 안내는 훈암 여성훈 남해교구장이 맡았으며, 전체 식순은 중앙총부 현도기념식순에 따라 봉행하였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특별 순서로 건암 김대부 동덕(선구교구, 천도교남해교역자 운영위원회 사무국장)이 당시 제국신문 등에 실렸던 ‘현도 광고문안’의 핵심 내용을 직접 소개하였다. 김대부 동덕은 광고문안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의암성사님이 천도교 현도를 선포하며 담아냈던 사상적 의의,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현도기념일의 신앙적 취지를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게 설명하여 참석한 동덕들의 큰 공감을 이끌어냈다. 의암성사께서 포덕 46년 12월 1일(을사 1905)을 기하여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세상에 널리 선포하셨으니 이것이 곧 천도교의 대고천하인 것이다. 동학을 천도교라고 이름하신 것은 대신사께서 논학문에서 道則天道 學則東學(도는 곧 천도요 학은 곧 동학)이라고 하신데서 연유하여 현대적 종교로 등장시키기 위하여 敎자를 붙이신 것이다. 이로 인해서 40여 년간 받아오던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을 하게 되었다. 당시 현도에 대한 광고문은 광무 9년 12월 1일 금요일자 제국신문 제8권 제274호 첫머리에 게재된 것을 비롯해서 15회나 반복 게재되었다. 광고 무릇 우리 교는 천도의 큰 근본일세 그 이름을 천도라고 하니라. 우리 교가 창명된 지 이제 46년이 지나는 가운데 신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널리 있으며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이 많은 데 교당을 건축하지 못한 것은 유감되기 다시 말할 것이 없고, 지금 세계는 인류 문화가 드러나고 열려서 각 종교의 자유로 신앙하는 것이 만국의 공예가 되었고 그 교당을 자유로 건축하는 것도 또한 전례가 되어 있으니 우리 교회의 교당도 날아갈듯이 크게 짓는 것도 또한 천시에 응하고 사람이 순히 따르는 일대 표준인 것이다. 우리 동포 모든 분들이여 이와 같이 믿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당 건축공사 시작은 명년 2월로 시작할 것입니다. 천도교 대도주 손병희 고백 해월신사법설 吾道之運 편에 우리 도의 이름과 주의를 멀지 아니하여 세계에 펴 날리고, 서울 장안에 크게 교당을 세우고, 주문 외우는 소리가 한울에 사무치리니, 이 때를 지나야 현도라고 이르느니라 라고 하셨다. 해월신사께서 대신사의 유훈을 받들어 무극대도를 지키시고 경전을 간행하셨으며, 의암성사께서는 해월신사의 유훈을 받들어 대 교당을 세우시고 은도의 시대로부터 벗어나 현도를 하신 것이다. 한편 남해교당에서는 12월 한 달 동안 이웃돕기 성금 마련을 위한 캘리그라피 전시가 함께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남해동학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참여하는 동호회 ‘수수한 남해’의 작품들로 구성되었으며, 판매대금 전액은 남해군 지역 복지기관에 기부될 예정이다. 신앙과 예술, 나눔이 어우러진 이번 전시는 지역사회에 따뜻한 울림을 전하고 있다. 자료 및 사진 제공 정효종 고현교구장 -
민족자주·평화 실천을 위한 ‘범시민대토론회’ 12월 12일 개최천도교중앙총부, 사단법인 독립유공자유족회, 한국독립당이 후원하고 사단법인 동학민족통일회,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가 주최한 민족자주 평화실현 '범시민대토론회’가 오는 포덕 166년(2025) 12월 12일(금) 오후 2시, 천도교수운회관 907호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는 독립운동가 후손, 평화운동가, 학계 전문가, 종교‧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자주’와 ‘평화 실천’의 현실적 과제를 논의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번 범시민대토론회는 임남희 동학민족통일회 공동대표의 사회로 개회식과 1부를 진행하며 주선원 사단법인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의 개회사와 박인준 교령을 비롯한 정동영 통일부장관, 김삼열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김동원 3통실현 범국민원탁회의 의장의 축사를 비롯하여 이우재 원탁회의 상임고문, 평화민족통일 공동의장 진관스님의 격려사와 함께 강민조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회 회장(강경대 열사 부친)의 기조연설이 이어진다. 2부에서는 정치‧평화‧시민사회 전문가들의 주제 발표가 이어지며, 3부에서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학계·종교계·시민사회 인사들이 참여하는 종합토론을 진행하는 구성으로 마련되었다. “시민이 만드는 평화” 강조 주최 측은 “정치·이념을 넘어 시민이 주체가 되는 평화운동의 길을 열기 위한 자리”라며 “독립·민주·평화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오늘의 평화 의제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토론회는 관심 있는 시민 누구나 참석할 수 있으며 문의는 동학민족통일회(02-6488-6841)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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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6년 종의원 2차 예결산소위원회 열려천도교 종의원은 포덕 166년 12월 3일(수) 오후 2시, 수운회관 907호에서 ‘포덕 166년 종의원 2차 예결산소위원회’를 개최하고 내년도 주요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논의했다. 이번 회의는 김재훈 사무장이 집례한 가운데 개회–청수봉전–심고–주문 3회 병송–인사말씀–보고–안건심의–심고–폐회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안건이 상정되어 검토됐다. ▲1호 안건 : 포덕 167년도 중앙총부 사업계획안 및 예산안 심의 ▲ 2호 안건 : 포덕 167년도 유지재단 사업계획안 및 예산안 심의 ▲ 3호 안건 : 포덕 167년도 특별회계 사업계획안 및 예산안 심의 ▲ 4호 안건 : 기타 종의원은 이날 회의에서 6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올해 주요 업무 보고가 이어졌다. ▲1·2차 운영위원회 개최 ▲예결산소위원회 1·2차 회의 진행 ▲포덕 167년도 예산안 제출 ▲목적 성금 및 특별회계 합의 ▲신인간 100주년 기념광고 검토 ▲현도기념일 봉행 등 주요 업무를 수행 등을 보고했다. 천도교 종의원은 이번 심의를 통해 내년도 사업 추진의 기틀을 마련하고, 중앙총부와 유지재단, 특별회계 전반에 대한 재정 운용의 투명성과 효율성 확보를 다짐했다. -
박인준 교령, “제2의 현도를 천명할 때”포덕 166년(2025) 12월 1일(월) 오전 11시, 제120주년 현도기념식이 영등포교구 교당에서 봉행되었다. 의암성사의 대고천하 12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현도 120주년을 맞은 이날 기념식에는 의암성사의 유지를 되새기며 준암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와 함께 천덕송 합창, '샘'연합합창단의 공연 등이 함께했다.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기 념 사 공경하는 동덕 여러분! 오늘은 의암성사님께서 포덕 46(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신 지 120주년이 되는 뜻깊은 현도기념일입니다. 의암성사님의 천도교 현도는 동학혁명과 갑진개화운동이 잇달아 좌절되고 청일(淸日)전쟁과 러일(露日)전쟁을 계기로 전 세계의 열강들이 동아시아의 세력 재편에 달려들어 각축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위기에 처한 동학 교단을 일거에 새로운 궤도에 올려놓는 대전환 선언이었습니다. 의암성사님은 해월신사님으로부터 도통을 전수 받은 때로부터 선천 운과 후천 운이 갈마드는 세계 곳곳을 몸소 순방하고 체험함으로써 새로운 비전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에 체류하는 5년 동안 세계 대세를 조망하고, 종교의 자유와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변화를 체감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천도교를 대고천하 하는 광고문을 살펴보면 현도의 근본정신은 단지 동학의 종교화를 알리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세계 문명의 표준을 마련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정신을 선도하고 인심을 교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도의 핵심이 되는 천도교라는 이름은 학즉동학(學則東學) 도즉천도(道則天道)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말하지만, 그 근본정신은 수운대신사의 다시 개벽을 이은 제2의 다시 개벽, 해월신사의 고비원주(高飛遠走) 사명을 이은 제2의 고비원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천도교단은 포덕 46년(1905) 당시와 유사한 전환의 시대에 서 있습니다. 탈종교 시대라는 사회적 환경과 기후 위기와 자연재해가 점증하는 인류세의 위기, 그리고 인공지능의 가속화로 인해 인류 사회의 정치·사회·경제 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대격변의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현도’의 본뜻을 되새기며, 제2의 현도를 세상에 널리 알려 나가야 할 때입니다. 공경하는 동덕 여러분! 저는 이제 ‘제2의 현도’를 통해 다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하여, 새로운 각오를 다짐과 함께, 실천 가능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신앙심 확립입니다. 신입 교인과 미래세대 교육과 수도연성을 지원하고 포덕의 생활화를 통해 모든 교인이 ‘살아있는 신앙인’으로 설 수 있도록 해나가야 합니다. 둘째, 건실한 교단 재정 실현입니다. 의암성사님이 현도를 결단그때 전국의 교인들이 헌신적으로 성미 납부를 하였듯이, 제2의 현도는 재정의 건전화를 위한 중앙총부와 교구, 교인의 삼위일체된 정성으로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셋째, 교구 중심 시대의 개척입니다. 의암성사께서 중앙총부를 정점으로 전국에 대교구와 수백 개의 교구와 전교실을 조직하셨던 기본정신을 되살려, 교구가 중심이 되는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찾아가는 설교’와 ‘작은 교구 살리기’를 통해 신앙이 생활로, 생활이 신앙으로 이어지는 현장 신앙의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직시하고 남북한 형제들이 장벽을 허물고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통일 세상을 위해 시천주 사상을 남북한 방방곡곡에 전파하고, 아울러 기후 환경 위기를 극복하고 지구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섬으로써 진정한 포덕천하를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이 밖에도,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교화사업을 펼치고, 문예와 학술 등을 통해 천도교의 세계화를 꾀하며, 동학혁명 참여자의 국가유공자 서훈 사업, 천도교 성지 순례길 조성 등을 통해 현도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나가야 합니다. 스승님 가르침대로 한울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을 믿는 일이며,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한울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이 단순하지만 위대한 신앙의 진리를 오늘의 행동으로 되살려 실천하는 것이 바로 다시 개벽입니다. 이제 우리 교단은 신앙 회복과 참신앙 활동을 통해 다시 세상과 만나야 합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이 극에 달하고, 인간의 영성까지 넘보는 이 시대에 인간과 만물이 한울님과 이어져 있음을 재확인하고 재조명하는 일이야말로,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최고의 포덕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한울님의 이름으로 천도교는 다시, 이 시대의 희망 신앙으로 꿋꿋이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공경하는 동덕 여러분! 현도는 지나간 사건이 아닙니다. 한울님을 향한 믿음이 다시 세상을 향해 열리는, 그때가 곧 현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천도교인의 삶의 현장이, 곧 천도의 현장이요, 다시 개벽의 출발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한울님께서 우리 모두의 정성과 공경과 믿음에 감응하시어, 다가올 새해는 천도교단과 천도교인 모두, 나도 성공 너도 득의(得意)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모든 동덕이 함께해 주시기를 당부드리며 기념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 166(2025)년 12월 1일 천도교 교령 박 인 준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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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7년(2026) 천도교 달력 제작천도교중앙총부는 ‘한울님 도의 길, 한 해의 여정’을 주제로 한 포덕 167년(2026) 달력을 제작하고, 이를 전국 교구에 배포하였다. 이번 달력은 천도교(동학)를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생애와 사상을 따라가는 구성으로 마련되어, 한 해의 흐름 속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근본 정신을 일상적으로 되새길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달력은 수운 대신사의 탄생과 득도, 교화와 순도에 이르는 생애의 주요 순간들을 사진과 해설과 함께 재구성했다. 각 월의 이미지는 수운의 사상적 전개와 발자취를 상징적으로 담아내어, 동덕과 교인들이 새해를 보내며 도가 깨어나는 길을 성찰할 수 있는 도력의 기록물로 완성됐다. 수운의 정신을 담아낸 ‘수운 천도체’ 적용 달력의 모든 사진 제목에는 천도교가 복원한 전용 서체 ‘수운 천도체’가 적용됐다. ‘수운 천도체’는 『용담유사』 목판본 활자를 바탕으로 복원한 글꼴로,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 삼경(三敬)의 정신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자음과 모음의 조화, 여백의 품격, 필획의 생명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전통과 실용성을 아우른 것이 특징이다. 이 서체는 천도교 홈페이지(chondogyo.or.kr) 내 ‘동학천도교아카이브’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으며, OTF와 TIF 두 가지 포맷으로 제공된다. 인쇄물, 교재, 영상 콘텐츠 등 다양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 활용도가 높다. -
중앙총부, 겨울맞이 이웃돕기 종로구청에 후원품 전달중앙총부는 2025년 12월 2일(화) 오후 2시, 종로구청장실에서 겨울철 취약계층을 위한 ‘이웃돕기 후원품 전달식’을 열고 지역사회 나눔문화 확산에 기여했다. 이번 전달식에는 강병로 종무원장,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등 관계자 12명과 구청장 및 복지교육국장이 참석했다. 이날 천도교 중앙총부는 라면 300박스와 김장김치(10kg) 300박스 등 총 600박스의 후원품을 전달했다. 후원품은 동절기를 맞아 지역 내 취약계층의 겨울나기 지원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구청장은 전달식 후 기념촬영을 진행하며 “지역을 위해 지속적인 나눔을 실천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번 후원은 천도교 중앙총부가 매년 실시해 온 ‘따뜻한 겨울나기 취약계층 지원’ 활동의 일환이다. 2024년에도 쌀·라면 등 환가액 약 2,860만 원 상당의 물품을 후원하는 등 꾸준한 사회공헌을 이어오고 있다. 후원기관을 대표한 박인준 교령은 “동학의 인내천 정신을 실천하는 길은 곧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있다”며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나눔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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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늘의 대고천하-천지부모지난 11월 30일은 제가 전주교구에서 120주년 현도기념 특강을 한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대고천하 – 천지부모>라는 제목이었습니다. 120년 전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것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고민과 갈등과 혼란 속에서 선택한 비장한 결정이기에 오늘 2025년에 우리는 대중 앞에 뭘 선포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정한 제목입니다. 우리 천도교가 연례행사로 치르는 기념식이 수도 없이 많은데 그중 하나로 현도기념일을 안일하게 다뤄도 될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점 줄어드는 이름뿐인 교구들과 늘어가는 시일식 빈 의자들을 보면서 우리가 서둘러 선언해야 할 긴급한 과업이 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년여 만에 다시 전주교구로 와서 보니 참석자들이 많이 줄어있었습니다. 제가 고향 쪽인 경남 진주교구로 가기 전에만 해도 시일식에 20명 이상이 참석했고 지하에는 전용 식당도 있었는데 와서 보니 딱 8명이 참석했고 지하 식당은 없고 다른 단체가 입주해 있었습니다. 피아노 반주자도 없고 음향기기로 반주와 노래가 나왔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포덕일까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할 대고천하가 포덕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인 이 멋진 장소의 전주교구에 사람들이 가득 차는 것일까요? 아닙니다”라고도 했습니다. 120년 전 당시를 떠올리면 그렇습니다. 서기 1905년 11월은 대고천하 한 달 전입니다. 조선의 외교권이 빼앗기고 주한 외국 공사관도 모두 폐쇄된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습니다. 일본의 조선 지배 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고 있었는데 동학은 사도난적이니, 동학비적이니, 동학 것들, 동학당, 시천도, 활인도, 사술지무 등으로 불리며 탄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손병희 선생이 진보회를 만들어 근대화 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을 벌였으나 동학에서 뛰쳐나간 이들이 친일파와 손잡고 일진회를 만들어 노골적인 방해 활동을 벌이던 때입니다. 기가 막히지요. 더 심각한 것은 일진회가 “나 친일파요”라고 하지 않고 손병희가 벌이던 갑진개혁운동인 단발과 의복 개량 운동도 했다는 것입니다. 서양을 물리치기 위해 동양끼리 뭉치자면서 일본과 손잡자고 그럴듯하게 백성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혁과 근대화도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서 전광훈 등의 태극기부대가 “우리는 친일이고 미국 숭배주의자요”라고 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러니 손병희의 고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동학 지도부는 다 처형당해 없지, 몇 년 가서 살아 보니 눈이 돌아갈 정도로 일본은 발전하고 있지, 대한제국이라고 이름표는 달았지만 조선 조정은 꼴이 말이 아니지, 동학한다고 어디 내놓고 말할 수가 있나. 동학 내부는 사분오열 일보 직전이지.. “당시 상황은 피가 마르고 숨이 막히는 시절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가하게 요즘 식으로 세미나도 하고 포럼도 열면서 천도교로 개칭을 하니 마니 할 겨를이 없었고 마른침도 없어 입술이 터지고 눈에 핏발이 서는 순간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박정희나 전두환의 파쇼정권 때 수배되고 투옥되고 했던 사람들은 압니다. 야밤에 삐걱대는 대문 소리나 두런거리는 남정네 목소리만 들려도 맨발로 뒷담을 넘어 튀어야 했던 사람들은 압니다. 동지들은 의문사를 당해 시체도 못 찾고 날이면 날마다 투신과 분신이 일어나던 때를 숨죽여 살아 본 사람들은 압니다. 대고천하 당시 손병희의 처지와 심정이 어땠을지를. 당시에 사도난적으로 몰리는 거나 요즘 비정규직 문제나 보안법 폐지 또는 성소수자나 양심적 병역거부 주장을 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거나 똑같은 맥락입니다. 손병희는 동학을 부흥하자, 동학교도를 늘이자. 암자나 동학교도 집에서 만나지 말고 번듯한 건물을 하나 지어보자 등의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식 종교단체로 과감히 변신하면서 조직과 교리를 정비하고 수련과 민족운동을 새로이 펼쳐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정말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백척간두 진일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특강에서 지금 이 순간 ‘천지부모’를 선포하자고 말했습니다. ‘천지는 곧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니, 천지부모는 일체니라’를 떠올리며 “이종진은 곧 전주교구요 전주교구는 곧 이종진이다. 이재선도 그러하니 이종진은 곧 이재선이니라”라고 읊었습니다. 하나 됨의 천지부모 사상은 우리 천도교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라는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천지부모의 삶을 회복하자는 말은 무시무시한 선언입니다. 오늘날 개발과 발전과 효율과 편안함과 돈벌이에 중독된 세상 사람은 남을 경쟁 상대로 봅니다.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고 압니다. 남보다 앞서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두 내 편리를 위한 소모품입니다. 이런 마당에 모든 생물과 물건을 다 내 부모님처럼 여기고 산다는 것은 천지개벽 그 자체입니다. 동물권, 식물권, 자연기본권(Plant Rights) 흐름의 완결판이자 기후 위기 해결, 탄소발자국 제로 운동의 종결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준비해 간 <주식회사 에코샵홀씨>에서 산 고급 손수건을 참석자들에게 선물로 나눠드렸습니다. 전주교구로 돌아온 기념 선물이기도 합니다. 손수건은 화장실에서 일회용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식당에 가서 미세플라스틱으로 된 물티슈나 일회용 냅킨도 쓰지 말자는 것으로 천도교한울연대에서 하던 활동이기도 합니다. 저는 천지부모 개념을 웰다잉 운동으로 선포하자고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죽음은 정말 구질구질합니다. 그 어떤 포유류나 영장류, 고등동물들도 인간처럼 지저분하게 죽지 않습니다. 평생 의료비의 반을 죽기 몇 년에 따 쓰고 자기 팔다리 마음대로 못 움직이고 자기 배변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 앞에 가랑이 벌리고 기저귀 갈아 차는 인생의 말로는 천지부모의 삶을 살지 못한 인간들의 자업자득입니다. 치명적인 문명병입니다. 노인요양원과 치매와 알츠하이머는 인간 외 어떤 동물도 없습니다. 인간이 손대지 않으면 동물과 식물에 병은 없습니다. ‘삼매사(사마지마라니)’나 ‘살레카나’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락사나 조력사는 들어봤겠습니다. 그것이 합법화된 캐나다에서는 제법 고상하게 ‘죽음에 대한 의료지원 (Medical assistance in dying)’이라고 부릅니다. 자이나교의 ‘살레카나’는 우리의 ‘성령출세설’과 닮아있습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있으면서 맑은 정신 상태로 담담하게 (명상적)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껍데기인 몸을 벗고(성령출세) 본래의 영적 자리(잠겨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천지부모의 자연순환 이치에 고즈넉이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등바등 소리 지르고 링거줄 붙잡고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긴 여행을 마친 순례자가 지친 몸을 누일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저녁 노을빛 같은 모습입니다. 영이 적극적으로 드러나 형체 있는 삶을 살다가 영이 조용히 작용하는 섭리인 형체 없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두려움도 슬픔도 아쉬움도 아닙니다. 그런 임종을 우리 동덕님들이 맞을 수 있게 하는 방책과 수련을 마련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는 효과적인 포덕 활동이고 신앙심 확립이며 교구의 건실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호주의 원주민 아보리진족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스스로 깨닫는다고 합니다. 조용히 물병도 가지지 않고 사막 가운데로 가서 꼿꼿하게 앉아서 임종을 한다고 합니다.(좌탈입망). 천지부모의 삶을 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지지난달에 제가 아는 분도 스위스로 안락사하러 갔습니다. 가기 전에 조촐한 이별식을 했습니다. 4,5천 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대고천하 두 갑자를 맞는 오늘, 천도교에 신 대고천하 추진팀이라도 만들어야 할까요? 글, 목암 전희식(전주교구) -
여주·이천 동학유적지 정비 및 기념관 건립 학술토론회 열려경기도 여주·이천 지역의 동학유적지 정비와 기념관 건립 방향을 모색하는 학술토론회가 11월 27일 여주도서관 여강홀에서 열렸다. 천도교 중앙본부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이번 행사에는 120여명이 참석했으며, 여주시 주록리 주민 34명(이대성 이장 외)이 참여해 지역의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개회식은 김갑곤 경기동학민회 사무총장의 사회로 국민의례와 경과보고가 진행되었다. 박인준 천도교 교령은 서면 축사를 통해 “뜻깊은 학술토론회를 정성껏 준비해주신 공동주관 단체와 행사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주와 이천은 동학의 중요한 유적지이자 역사적 현장이 있는 곳이며, 오늘 논의가 경기도 동학유적의 재조명과 기념관 건립의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시형 경기동학민회 상임대표는 인사말에서 “여주·이천 유적지 정비는 지역사와 민중사 복원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대성 주록리장이 지역 주민을 대표해 축사를 전했다. 기조강연에서는 임형진 경희대 교수가 ‘경기도 동학사와 기념 방향’을 발표하며 동학의 지역적 확산과 역사적 의의를 짚었다. 주제발표 1에서는 장주식 전 여강길 공동대표가 여주·이천 동학유적지의 현황과 정비 방향을 제시했고, 최용근·안동회·이동준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주제발표 2에서는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이 경기도 동학기념관 건립 방안을 제안했으며, 구분만·이혜영이 토론을 맡았다. 이번 학술토론회는 여주·이천 지역에 산재한 동학 유적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향후 정비와 기념관 건립을 위한 실질적 방향을 제시한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동학의 정신과 지역사 복원의 중요성에 뜻을 모으며, 경기도 동학사 연구와 유적지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와 기관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이번 논의를 계기로 여주·이천 동학유적 보존 사업이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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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 대서사 『모두가 하늘이었다』 펴내이윤영 저, <모두가 하늘이었다>표지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이 동학 166년의 사상과 역사를 하나의 인간 개벽 서사로 재구성한 신간 『모두가 하늘이었다』를 출간했다. 저자는 40여 년간 동학과 민중운동사를 취재·연구하며 축적해 온 방대한 기록을 토대로, 수운의 깨달음에서 동학농민혁명·의병전쟁, 그리고 오늘날 시민사회에 이르는 정신사적 흐름을 한 권에 담아냈다. 이번 책은 동학의 탄생과 실천·혁명·항쟁·계승의 전 과정을 ‘한 인간의 깨달음이 사회적 변화로 확장되는 과정’이라는 큰 줄기로 처음 엮어낸 대중서로 평가된다. 수운의 구도에서 시작된 “인내천의 탄생” 이윤영 저자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생애를 ‘한 인간이 절망 속에서 길을 찾는 역사적 구도기’로 새롭게 조명한다. 여시바윗골의 체험, 천성산의 49일 수행, 용담정의 실존적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인간학이 탄생하는 순간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했다. 책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수운대신사의 심경을 생생하게 전한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그러나 기쁨 뒤에는 반드시 굴곡이 온다는 ‘무왕불복’의 가르침은 고난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스승의 각오였다. (p.133) 또한 을묘천서 설화를 수운대신사의 실제 기록과 비교하며 인간과 하늘의 만남이 어떤 체험에서 비롯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잠을 깨어 살펴보니 그곳에 아무도 없더라.” 이는 을묘천서를 낳은 체험의 흔적을 짐작케 한다. (p.60) 해월 최시형 신사, 깨달음을 생활로 구현한 ‘삶의 철학자’ 해월신사의 마당포덕, 대인접물(待人接物) 중심의 윤리 정립, 지도 체계 재건은 동학을 사상에서 공동체 실천으로 옮겨 놓은 결정적 활동이었다. 저자는 해월신사를 “스승의 깨달음을 민중의 삶 속에서 구체적 질서로 만든 실천의 지도자”로 규정한다. 동학농민혁명·동학의병전쟁 — “모두가 하늘이었다”의 역사적 실천 전봉준이 이끈 고부기포·백산대회·황토현 전투는 인간 존엄의 회복이라는 동학의 철학이 ‘실천적 혁명’으로 구현된 장면이었다. 저자는 특히 수운대신사 순도 30년 후인 1894년 혁명의 본격적 봉기가 모두 3월에 일어난 사실에 주목한다. “순도한 3월, 30년 뒤 백산대회 역시 3월에 기포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역사의 깊은 연속성이다.” (p.233) 또한 갑오년 동학의병전쟁이 일본군에 예속된 조선 관군의 체제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고 고독한 항쟁이었는지를 역사 자료와 함께 상세히 분석한다. 또한 혁명군의 집강소 통치가 한국 민주주의의 원형이라는 저자의 해석도 주목된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철학은 ‘모두가 하늘이었다’로 실천된다. 인간 존엄의 원리는 공화정과 민주주의의 시원이다.” (p.417) 저자 이윤영, 동학 현장과 기록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온 연구자 1958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이윤영 관장은 1989~2024년까지 《전북일보》, 《전북도민일보》, 《오마이뉴스》, 《천도교신문》 등에 칼럼·논단·기고 100여 편을 집필하며 동학과 근현대사 기록에 헌신해 온 현장 중심의 연구자이자 언론인이었다. 특히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과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은 2024년, 『모두가 하늘이었다』의 원고를 《오마이뉴스》에 74화로 연재하여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 공로로 2025 동학·천도교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이윤영 관장은 동학혁명연구소 소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등 동학 관련 기관에서 폭넓은 활동을 펼쳐 왔다. 저서로는 『만고풍상 겪은 손』(신인간사, 2014), 장편소설 『혁명』(모시는사람들, 2018), 『동학농민혁명 이야기』(거름, 2019) 등이 있다. 동학 166년을 ‘하나의 이야기’로 복원한 최초의 작업 출판사 리뷰는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수운에서 해월, 전봉준, 의병장들, 그리고 3·1운동과 현대 시민사회까지 한 인간의 깨달음이 공동체의 실천이 되고, 혁명이 되고, 국가적 항쟁이 되고, 결국 한 시대의 정신으로 남는 흐름을 하나의 선으로 복원한 최초의 서사다.” 『모두가 하늘이었다』는 동학의 역사적 장면들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존엄한가?” 라는 질문으로 꿰어낸 21세기 개벽의 기록이자, 오늘날 독자에게 던지는 시대적 메시지로 남는다. -
동학이랑 천도교랑 같은 건가요?희암 성주현 상주선도사의 답변 : 동학과 천도교는 같습니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창명하였으며, 천도교는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를 제1세 교조로 받들고 있습니다. 동학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고 하였으며, 이를 ‘대고천하(大告天下)’라고 합니다. 의암 손병희 성사 천도교(天道敎)의 대고천하(大告天下) 의암성사께서는 드디어 동학(東學)의 현도(顯道)를 결심하고 이 해 (포덕46년1905) 12월 1일을 기하여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라 이름하고 천하(天下)에 광포(廣布)하였으니 이것이 곧 천도교(天道敎)의 대고천하(大告天下)이다. 동학을 천도교라 이름하게 된 것은 대신사께서 논학문(論學文)에서 ‘도즉천도 학즉동학 ( 道則天道 學則東學) 이라고 한 데서 연유한 것인데 이로써 40여 년 동안 염원하던 현도(縣道)가 획기적(劃期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현도에 대한 광고문(廣告文)은 광무9년(1905)12월 1일(금요일)자 제국(帝國)신문 제8권 제274호 첫머리에 게재(揭載) 된 것을 비롯해서 15회나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廣告(광고) (원문)-夫吾敎는 天道之大原일세 曰 天道라 吾敎之刱明이 及今四十六年에 信奉之人이 如是其廣하며 如是其多하되 敎堂之不遑建築은 其爲遺憾이 不容提設이요 現今人文이 천개하야 各敎之自由信仰이 爲萬國之公禮요 其敎堂之自由建築도 亦係成例니 吾敎會堂之翼然大立이 亦應天順人之一大表準也라 惟我同胞諸君은 亮悉함 敎會堂建築開工은 明年2월로 爲始事 天道敎大道主 孫秉熙 고백 (교서 ‘천도교백년약사(상)’에서 옮김) (원문해설) - 무릇 우리 교는 천도의 큰 근원일세. 그 이름을 천도라고 하니라. 우리 교가 창명된 지 이제 46년이 지나는 가운데 신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널리 있으며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이 많은데, 교당을 건축하지 못한 것은 유감 되기 다시 말할 것이 없고, 지금 세계는 인류 문화가 드러나고 열려서 각 종교의 자유로 신앙하는 것이 만국의 공예가 되었고 그 교당을 자유로 건축하는 것도 또한 전례가 되어 있으니, 우리 교회의 교당도 날아갈 듯이 크게 짓는 것도 또한 천시에 응하고 사람이 순히 따르는 일대 표준인 것이다. 우리 동포 모든 분들이여 이와 같이 믿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당 건축공사 시작은 명년 2월로 시작할 것입니다. 천도교대도주 손병희 고백 (원문해설: 경암 이영노) -
검등골, 돌과 바람 사이검등골, 돌과 바람 사이 2002년 태풍 루사, 2003년 태풍 매미 골짜기를 휘몰아간 날 부드럽고 아름다웠던 계곡 돌 속에 묻히고 사람의 길 조그만 논밭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돌과 풀 사이 시간 속 골짜기 너머 한 숨결이 남아 있다 해월 최시형 검등골에서 도를 받고 세상에 알린 자리 평등 존경 바람과 물 속에도 묵묵히 흐른다 돌 속에도 풀 속에도 평등과 존경의 숨결 여전히 살아 검등골을 지키며 시간 위를 흐른다 그리고 돌과 풀, 바람과 물 그 모든 것 속에서 골짜기는 조용히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세상과 세상 사이 흐르는 도의 숨결 군암 박남문(포항교구) -
대구 감영과 관덕당동학이라는 가르침이 맹위를 떨치며 퍼져간다는 소문이 조선의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선전관(宣傳官)을 임명하고 무예별감 두 사람과 군관 한 사람, 그리고 하인 한 사람을 딸려 동학의 진원지인 경주로 급파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의하면, 선전관에 정운구(鄭雲龜)를 선임하고, 수행원에는 무예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豊)과 장한익(張漢翼), 좌변포도군관(左邊捕盜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이 임명되었다. 이 밖에 정운구의 종자인 고영준(高英晙)까지 합하여, 일행은 모두 다섯 명이 된다. 宣傳官鄭雲龜書啓 臣於十一月十二日 敬奉傳敎 率武藝別監梁有豊張漢翼 左邊捕盜廳軍官李 殷植等 以慶尙道慶州等地 東學魁首詳探捉上次 忙出城外 藏蹤秘跡 星夜馳往 선전관 정운구가 서계를 올리니다. 신은 11월 12일에 전교를 받들어 무예별감 양유풍 장한익 좌 변포도청군관 이은식 등을 인솔하여 경상도 경주 등지에서 동학 괴수를 자세히 탐지하여 체포 하고자 성문을 나서 남모르게 밤길을 도와 달려왔습니다. - 『고종실록(高宗實錄)』 원년 12월 24일 임진(元年 十二月 二十日 壬辰) 그날로 서울에서 출발하여, 남대문을 나선 일행은 어명을 개봉하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임을 확인한 다음 며칠을 머문 뒤, 11월 22일 길을 떠나 밤낮으로 목적지인 경주로 향하였다. 문경 새재를 넘어서면서 이들은 동학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탐문하기 시작하였다. 새재를 넘어 영남지방에 이르자 각 주(州) 군(郡)마다 밤이면 동학의 주문이 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이 심각하게 많이 퍼졌음을 이들은 실감하게 된다. 이들은 경주부에 들어가 명을 받고 왔음을 신고하고 경주부의 지원을 받아 경주와 용담 일원의 시장이나 절간 등을 중심으로 탐문을 하였다. 탐문이 끝난 12월 9일 양유풍과 종자 고영준을 직접 용담에 보내 상황을 조사토록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용담으로 들어가는 동구 근처에 있는 장(張) 모라는 사람을 통해 용담정으로 들어가 대신사를 만나 입도하러 왔다고 거짓을 말하고는 접근을 하며, 내방하는 사람들의 동정과 대신사의 언동, 용담의 지형 등을 자세히 살핀 다음, 피곤하다는 핑계를 꾸며대고는 다시 용담을 빠져나온다. 관덕정 터(위아래), 연립주택 자리가 관 덕정이 있던 터이다. 12월 10일 새벽 급습하여 용담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여 경주부 감옥에 넣는다. 다음 날에 신상 파기를 한 이후 대신사를 비롯한 몇 사람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올라가는데, 문경 새재에 동학도들이 집결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돌려 상주 화령을 거쳐 보은으로 압송 길을 다시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과천에 이르러 죄인을 서울로 압송할 것을 조정에 품의하니, 당시 철종(哲宗)이 승하를 하였기에, 국상(國喪)이 났으니 죄인을 본부 감영으로 다시 돌려보내라는 명을 받고는 본부 감영이 있는 대구(大邱)로 발길을 돌린다. 이리하여 추운 겨울 서울로 압송되던 대신사 는 다시 길을 돌려 대구를 향하여 압송되었다. 대신사 일행은 다시 길을 돌려 충주를 지나 새재를 넘어 초곡(草谷)을 지나 유곡리(幽谷里)에서 과세를 하고 대구에 이르러 감영에 수감되었다. 당시 대구 감영에서의 대신사 계신 상황과 문초 과정 등이 『도원기서』에 실려 있다 대구현대백화점, 대신사께서 참형을 당하신 관덕당이 대구현대백화점과 그 맞은편 일대에 있었다. 관덕당 훈련장이 있던 자리이자 수운대신사께서 참형을 당한 장소인 동아백화점은 철거되고 없다. 수운대신사 동상 1964년 수운대신사 순도 100주기를 맞아 대구 달성공원내에 건립했다. 대구 감사가 주관하여 대신사를 문초하고, 사형이라는 엄형을 내리고자, 당시 막 등극한 어린 임금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던 조대비(趙大妃)에게 장계(狀啓)를 올려 대신사를 사형 집행하였다. 달성공원에서 멀지 않은 반월당사거리 현대백화점과 그 맞은편 일대가 대신사께서 참형을 당하신 관덕당(觀德堂)이 있던 곳이다. 현대백화점 앞에 대구시교구가 중심이 되어 세운 대신사 순도비가 자리하고 있고, 길 건너편에는 천주교 순교 기념관이 서 있다. 이 지역은 당시 아미산이라고 불렀는데, 잡범들은 이곳 아미산에서 처형을 했다. 천주교 신도들은 잡범으로 분류되어 아미산에서 사형을 당하였기 때문에 천주교 순교 기념관이 이곳에 들어선 것이다. 현대백화점 뒤에서 종로초등학교에 이르는 넓은 부지가 대구 감영이 있던 곳이고, 대신사께서는 참형 직전까지 그곳에 구금되어 계셨다. 종로초등학교 마당에 ‘최제우 나무’라고 명명된 큰 회화나무가 서 있는데, 수령이 400여 년에 이른다. 대신사께서 감옥에 있으면서 내다본 나무라고 하여 이 나무를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곳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달성공원에는 1964년 3월 31일 대신사 순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신사순도백주년기념동상건립위원회’가 주최가 되어 건립한 대신사 동상이 있다. 함께 돌아보면 어떨까 한다. 수운대신사 순도비, 2017년 5월 26일 천도교 수운 최제우 선생 순도비 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대신사께서 대구 감영에 갇혀 있을 때 해월 신사께서 옥리의 하인으로 분장하고 들어와 진지상을 올렸다. 이때 해월 신사에게 시를 한 편 내리고 또 멀리 달아나라는 ‘고비원주(高飛遠 走)’의 글을 내렸다고 한다.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등불이 밝아 물 위로는 아무러한 혐의의 틈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 『동경대전』 최제우 나무 현대백화점 뒤편 종로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회화나무. 이곳에 있던 대구 감영에 구금된 대신사께서 감옥에서 내다본 나무라고 하여 ‘최제우 나무’라고 부른다. 경상감영공원 표지석 공덕비 경상감영공원내에 있는 관찰사 공덕비 윤석산 교수의 풀이에 의하면 등불의 빛이 물 위로 퍼져, 환하게 모든 것을 비추어 주듯이 자신은 아무런 혐의가, 또 아무런 잘못된 틈이 없다는, 자신의 무혐의와 결백을 노래한 시이다. 그런가 하면, 한울님의 도란 바로 물 위에 비추어 조금의 틈도 없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저 등불과 같이 세상의 모든 곳을 밝혀주는, 바로 그러한 참된 진리라는 의미가 이중(二重)으로 담겨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세상의 잘못된 제도에 의하여 죽게 되어도, 그래서 자신이 펼친 무극대도가 지금은 죽은 나무와 같이 보이나, 그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라 후일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울 것이라는, 그래서 자신의 도가 이내 올바르게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시이다. 대신사의 거룩한 피는 대구 관덕당에 뿌려졌지만, 무극대도는 이어져 해월 신사의 지도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갑오년 동학혁명의 뜨거운 불길로 번졌다. 의암 성사에 의해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도 300만 교인들이 힘을 합쳐 3·1혁명 만세 소리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대신사 순도의 피는 지금도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어 흐르고 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고성산 추모의 길에서제131주년 고성산 동학혁명군 위령식 ©허채봉 초록 무성한 잎 울긋불긋 말라 후더덕 떨어져 앙상한 자리, 붉은 감 홍시 찬연히 자태를 뽐내는 늦가을. 이곳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고성산 정상에, 1894 동학농민혁명 영호도회군들은 일본군에 쫓기고 쫓겨 절벽까지 내몰려 쫓기고 쫓기고 또 쫓기었다. 방금 전까지 함께 했던 동지들의 주검 위로 차곡차곡, 오갈 데 없는 단말마 외마디 비명이 넘었고, 그리운 이들의 엇갈린 생사로 산천의 서슬은 바위 절벽 꽁꽁 언 골짜기 바람으로 남아 131년이 지난 오늘도 휘휘 돌아 비바람에 고시랑거리는 초목으로 스며들었다. 목숨을 다 바쳐 산화하신 하동 고성산 동학혁명군 추모위령식을 돌아보면, 1988년 전적지 보존 추진위가 발족한 이후 1989년 보존회 결성, 1992년 부지 확보와 첫 위령제, 1994년 국가 기념물 지정, 1995년 위령탑 제막식, 그리고 그 뒤로도 이어진 진입로 정비와 매년의 추모식까지… 37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의 손길이 멈추지 않았기에 오늘의 위령식이 있었다. 들밥을 나눠먹는 참가자들의 모습 ©허채봉 박홍규 작가의 작품이 현장에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허채봉 하동 고성산 위령탑으로 가는 길목의 표지판 오랜 세월 만고풍상 겪은 동학혁명 위령의 길 위에 선 오늘. 모든 설움과 굴욕을 너머 함께하는 동학도인들의 모습에도 길고 긴 세월의 서리가 소리 없이 깊은 감응으로 다가왔다. 131년 전 전라에서 충청, 경기·강원, 경상, 북쪽에서… 또 그 이전 154년 전 영해에서 붉디붉은 꽃으로 산화하신 동학혁명군들의 성령과 함께 오늘의 시간이 하얗게 빛이 되어 빛났다. 눈부신 가을빛, 코발트 청명한 남빛 하늘바다. 노랗게, 선홍 감빛으로 물든 꽃보다 예쁜 단풍. 겨울마중의 길목에서 깊은 샘물처럼 솟는 천어(天語)를 되뇌인다. “이제, 대한민국은 동학의 성지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지역에 국한된 한정적인 기억 공간이 아닌, 대한민국이 동학의 기억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세계인들이 경외하는 대한민국, K-민주주의의 원형은 바로 동학민주주의가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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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목서가 환히 피어났습니다삼천포교당 앞마당에 은목서가 환히 피어났습니다. 맑은 바람에 실려오는 은은한 향이 가을의 깊이를 더하고, 고요히 교당을 감싸 안습니다. 저희만 보기 아까워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진, 글 삼천포교구 최희수 교구장 제공 -
흥해 손봉조의 집손봉조 집터_최초 동학 접주제를 실행한 곳 남원 은적암에서 돌아온 이후 대신사는 각 처로 다니며 가르침을 폈다. 이러한 결과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도 나날이 늘어나고, 또 그 지역도 넓어져 다만 경상도 일원만이 아니라 충청도에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인원을 보다 조직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하나로 떠오른 것이 ‘접(接)’을 조직하는 것이다. 본래 접이라는 이름은 유생들이 쓰던 용어이다. 그러나 대신사께서 만든 접은 이와는 다르다. 흥해 매곡동(현재는 매산리) 손봉조의 집에서 행한 접주제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포항시 흥해 손봉조의 집은 매우 중요하다. 동학 교도가 늘어나자 대신사는 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접(接)을 구성하였다. 그래서 각 처의 지도자들을 이곳으로 오게 하여 접주를 정해 주었다. 이때가 임술년(1862년) 12월 말이다. 본래 ‘접(接)’이라는 용어는 우리 전통 사회에서 쓰던 말이다. ‘접’은 예전에 글방 학생이나 과거를 보는 유생의 동아리를 이르던 말이었다. 또 보부상(褓負商)의 동아리를 이르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사께서 구성한 ‘접’은 이러한 개념과는 다르다. 접은 철저한 속인제(屬人制)에 의한 구성이다. 내가 한 사람을 포덕하면, 그 사람은 나의 접이 된다. 일컫는바 점조직과도 매우 유사하다. 한 사람이 잡혀도 그 사람을 포덕한 사람만 알 뿐, 그다음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경주 본부의 접주로 임명된 이내겸(李乃謙)은 본래 영천(永川)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듯 경주 본부의 접주로 임명이 된 것은 동학이 본래 속지제(屬地制)를 따르지 않고 속인제(屬人制)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전도자(傳道者)와 도를 받는 사람 사이에 인적 유대를 중요시 여긴 까닭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의 전수(傳受)는 ‘정신의 전수’라는 면이 강조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접 제도는 오늘까지 천도교에서 연원제(淵源制)로 전승되고 있다. 대신사는 이러한 접 조직을 통하여 갑자기 늘어난 동학 도인들을 조직하고 관리하였다. 그래서 손봉조라는 제자의 집에서 각처의 지도자들을 오게 하여 각 접의 접주(接主)를 정해 주었던 것이다. 각 접주가 마치 지역별로 정해진 듯하지만,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이사를 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죽을 때까지 몇 대를 이어가며 살았다. 그래서 비록 속인제이지만, 속지제와 같이 지역을 중심으로 접주를 정해 준 것이다. 접주를 정해 준 뒤에 새해인 계해년(1863년) 1월 1일 아침 대신사는 이에 대한 시를 쓴다. 訣 問道今日何所知 意在新元癸亥年 成功幾時又作時 莫爲恨晩其爲然 時有其時恨奈何 新朝唱韻待好風 去歲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 春來消息應有知 地上神仙聞爲近 此日此時靈友會 大道其中不知心 도를 묻는 오늘, 아는 바가 무엇인가. 뜻은 새해 계해년에 있도다. 공을 이룬 것이 언제인데, 또 때를 만나겠는가. 늦는다고 한하지 마라. 그렇게 되는 것을. 때는 그 때가 있나니, 한탄한들 무엇 하리. 새해 새 아침에 운을 불러 좋은 때를 기다린다. 지난 해 서쪽, 북쪽에서 좋은 벗들이 찾아옴이여, 훗날 알리라. 우리의 이 집에서의 그날 그 기약을. 봄이 오고 있음을 마음으로부터 응하여 알 수 있으니, 지상신선의 소식 가까워지네. 이날 이때 신령한 벗들의 모임이여, 헤아릴 수 없는 마음, 그 가운데 자리한 대도(大道)여. - 『동경대전』 “지난해 서쪽, 북쪽에서 좋은 벗들이 찾아옴이여, 훗날 알리라. 우리의 이 집에서의 그날 그 기약을 [去歲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이라는 이 구절이 바로 흥해 손봉조의 집에서 접주를 정한 사실이다. 지난해는 접주제를 행한 임술년(1862년)이다. 그해 말에 서쪽 북쪽에서 온 영우(靈友)들이란 다름 아닌 접주들을 일컫는 것이다. 이러한 접주제는 훗날 동학혁명을 보다 조직적으로 이끈 중요한 바탕이 된다. 매곡동 마을 정자나무와 마을 일원 안내 표지판 앞에 선 감수자 윤석산 교수와 필자 최초 동학 조직 안내 표지판을 설치한 후 기념촬영하는 답사단 손봉조가 살았다는 흥해 매산리의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훗날 지은 집이 서 있다. 손봉조의 집 앞으로는 제법 큰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 건너편에는 마을 사람들이 쉬고 노는 정자와 당수나무인 팽나무가 서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인 이곳에는 그간 표지판 하나 없었다. 다행히도 필자가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동학역사문화선양회와 (사)동대해문화연구소가 2022년 11월 18일, 팽나무 부근에 ‘최초 동학 조직 안내 표지판’을 설치했다. 또한 포항시에서도 동학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발굴하고 이곳을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 시설로 홍보하는 것과 동시에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장소로 개발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의 변화가 기대된다. ✦ 다음 회 예고 : 대구 감영과 관덕당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설교의 목적과 방법설교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한 번은 심도 있게 논의해 보고 싶었다. 설교, 수련, 천덕송 보급, 교리의 체계화, 천도교 용어사전 편찬, 각주 경전 편찬, 어린이 강재 보급, 자선사업, 봉사활동 등이 모두 포덕․교화의 한 방편이 되겠지만, 이 중 설교가 포덕․교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이다. 한울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정성, 공경으로 한울님의 성령이 충만한 설교자의 말씀은 육체적․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병을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신적 평화와 안정감을, 사업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성공에 대한 확신을, 사랑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는 영적 에너지가 있다. 이처럼 설교는 복잡한 현대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울님에 대한 좀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하고 인생의 온갖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좌표를 제시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나와 가정, 나아가서 사회 및 국가에 대해 폭넓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한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분명한 목적을 세우고 노력할 때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듯이, 설교에서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게 되면, 이에 맞게 계획을 수립하고 노력하여 설교 원고를 만들고 몇 번의 연습을 통해 본래 계획한 의도를 성취할 수 있다. 또 설교를 한 뒤에는 무엇이 잘못 되었나 스스로 반성해 보는 교역자의 자세가 될 때, 우리 교회의 장래는 그만큼 더 밝아질 것이다. 천도교에서의 설교 목적은 대신사님의 『동경대전』<포덕문〉에 밝혀놓으신 것처럼, 첫째 동덕들이 주문 수련을 통해 ‘영부(靈簿)’를 받아 세상 사람들의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건지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 동덕들이 주문수련을 통해 한울님의 은덕을 깨닫고 ‘시천주’ 한울님의 진리를 온 세상에 밝히며, 한울님의 진리에 맞게 올바른 생활과 실천을 할 수 있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선 천도교 내의 설교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각 교당에 설교를 할 만한 신앙의 실력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며, 게다가 대부분 충분히 준비된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적인 내용 위주라는 점이고, 둘째, 동덕들의 일용행사와 가정문제, 사회문제를 도외시한 ‘자아완성’, ‘이신환성’, ‘보국안민’, ‘남북통일’, ‘포덕천하’와 같은 너무나도 크고 이상적인 목적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경전내용을 고지식하게 인용, 열거하는 식으로 실생활이나 시대조류와 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현행 설교의 문제점 등을 고려해 형식적 ․ 내용적 측면에서 설교의 올바른 방향과 설교의 단계를 한 번 정립해보자. 먼저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형식적 조건으로 첫째, 설교에 임하는 사람은 설교를 명(命) 받은 그 주에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한다. 둘째, 고저장단에 따라 물 흐르듯 어조 및 성량을 조절해야 하며, 설교 내용에 알맞게 감정이입이 되어야 한다. 셋째, 설교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교중에서 시간 문제가 가끔 거론되는 경우를 듣게 된다. 설교시간은 기왕이면 짧으면 좋다는 견해, 1시간을 다 채워야 한다는 견해 등이 있지만, 규모일치를 위해 설교시간도 의절에 분명히 명시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청중의 수준 또한 고려해야 한다. 즉 노년층, 장년층, 청년층, 유소년 층이냐에 따라 그 수준에 알맞은 언어 선택과 설명 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 청중의 수준에 맞는 언어를 선택할 때 더욱 많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내적 조건으로, 첫째 설교 내용은 수련을 통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수련하면서 깨달은 보편적인 생각은 누구에게나 가슴 속 깊이 심금을 울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경전은 이의역지[(以意逆志) : 읽는 이의 생각으로 스승님의 생각을 거슬러 구하는 방법]로 공부해서 반영한 내용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스승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설교 내용에는 시대에 맞는 시사 내용이나 스승님 또는 선인들의 예화를 적절히 인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흥미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폭넓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진리의 말씀을 보강하거나, 증명하는 논거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불교계의 성철 스님도 그러한 분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의 인연설, 윤회 사상 등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영적 세계를 공부한 학자들의 책을 인용했고, 사후세계를 증명하기 위해 영혼사진을 예로 들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물리학까지 섭렵해 불교사상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 또한 프랑스의 미셸 노스트라다무스, 조선조 명종 때 철인 격암 남사고,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루스 몽고메리 등의 예언가 말들을 인용하면서 후천 개벽의 운수를 설파하여 비판이 되기도 한 증산도의 『이것이 개벽이다(안경전 편저)』란 책도 이런 아류에 들지 않나 싶다. 그런데 우리 종단은 어떠한가? 우리 도의 가장 근본인 수련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더구나 경전과 교사를 연구하는 사람도 극소수이며, 나아가 폭넓은 독서와 연구로 천도교의 진리를 좀더 시대에 맞게 체계화하고 증명하여 널리 알리려는 도인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음으로 설교의 단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설교의 단계는 편의상 원고 설교, 메모 설교, 강화(降話) 설교로 나눌 수 있는데, 초보자 입장에서는 원고 설교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원고를 써서 설교를 하다가 메모를 해서 설교한 뒤, 차원 높은 경지에 가면 강화 설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제는 시대의 변천과 함께 설교도 다양하게 바꿔져야 한다. 일용행사를 다루는 설교, 개인의 삶과 가족 문제를 다루는 설교, 사회문제, 국가문제를 다루는 설교 등 다양한 설교가 필요한 때이다. 이상 수련의 목적과 방법 및 설교의 단계에 대해 지극히 단편적이고 수박 겉핥기 식의 논의를 해 보았다. 동학은 여느 종교와는 달리 믿음의 종교요, 깨달음의 종교이기에 무극대도에 신명을 바칠 수운 학도는 정성, 공경, 믿음으로 공부와 수련에 능한 자가 되어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진정한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깨달음은 로고스(이성)의 분석력과 파토스(감성)의 직관력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불이 붙는다. 이럴 때, 우리는 황홀감을 느끼고 영대(靈臺)가 환하게 열린다. 부디 훌륭한 설교자들이 많이 나와 동덕님들에게 이런 경지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글 운암 오제운( 신태인교구장, 동귀일체 고문) -
적조암에서 하늘을 훔치다적조암에서 하늘을 훔치다 함백산 그늘 깊은 곳, 눈 쌓인 적조암의 토굴에 관솔불이 흔들렸다. 그곳에 해월이 오시니 하늘과 땅이 한 호흡으로 고요해지고, 도접주 유시헌은 그 뒤를 따랐다. 세상은 어지럽고, 사람의 길은 잿빛으로 흐르던 때, 그들은 오직 기도로 길을 찾으려 했다. “하늘은 사람 안에 계시니 스스로 한울을 모시라.” 해월의 음성이 바위 틈새로 스며들자 산조차 숨을 죽였다. 유시헌은 무릎을 꿇고 세상과의 인연을 내려놓았다. 그의 이마 위로 내리는 눈발이 참회의 눈물인 양 흩날렸다. 새벽마다 향을 사르고 49일의 숨결을 쌓아 올릴 때, 기도는 바람이 되고 바람은 빛이 되었다. 전세인, 젊은 사서가 붓을 들었다. 그는 말보다 조용히, 그러나 떨리는 손끝으로 그들의 말씀을 적어 내려갔다. 그 글줄마다 하늘과 사람이 만나는 자취가 깃들었으니, 견봉날인 훗날 세상은 그것을 최선생 도원기서라 불렀다. 사십구일째 되는 날, 태백산맥의 줄기 함백산의 하늘이 열리고 여덟 마리 봉황이 내려와각기 빛을 품었다. 그 빛이 사람의 심장을 스치자 기도하던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하늘의 색으로 번졌다. 해월은 말했다. “하늘의 뜻은 나뉘지 않는다. 사람마다 그 빛을 품을 뿐이니, 그대 또한 한울의 사람이로다.” 유시헌은 그 자리에서 고개 숙이고 “삶으로 도를 행하겠습니다.” 그 말이 눈발 속에 사라질 때 적조암의 종이 울렸다. 눈꽃이 천의봉을 덮고 은빛 고요가 산을 감싸며 세상의 소리가 잠들었다. 해월은 조용히 읊조렸다. “도는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의 마음속이 곧 하늘이니라.” 그 말씀에 전세인의 붓이 멈추었다. 그는 눈물로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하늘은 사람 안에 있고, 그 뜻은 사랑으로 흘러나온다.’ 세월이 지나 산은 그대로이되 적조암의 돌벽에는 그날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다. 전세인은 노년의 손으로 말했다. “그 기도는 세상을 위한 등불이었고, 그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적조암의 새벽, 누군가 종을 울리면 봉황의 노래가 다시 들린다. 어두운 마음에 빛을 밝히라 그곳에 하늘이 열리리라. 글쓴이 성진 고종호 정선문화원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정선의 정신을 동학에서 찾아야겠다고 자각하고 정선동학선양회를 조직했다. 유시헌의 증손, 동학난중기 등을 개발하며 정선동학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정선문화원 사무국장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동학에의 열정을 살려 동학아리랑을 새로이 개발, 제작하고 있다. 이 시는 해월 최시형과 도접주 유시헌이 정암사 적조암 토굴에서 드린 49일 기도를 기록한 사서 전세인의 『최선생도원기서』를 바탕으로 적조암을 세 차례 답사한 후 썼다. -
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22일1883년 개장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장 내부. 수천 석의 관객석과 화려한 장식, 웅장한 음향 시설로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로 꼽힌다. ○ 188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개장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가 이날 개장했다. 개장 공연은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였으며, 3,800석 규모의 화려한 인테리어와 최첨단 무대 장비로 뉴욕 문화예술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메트(The Met)’라 불리며 전 세계 성악가와 음악 애호가들이 꿈꾸는 무대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도 매 시즌 세계 각국의 명작 오페라와 신작이 무대에 오르며, 인류 문화유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 1962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 쿠바 해상 봉쇄 명령 1962년 10월 22일,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제거하기 위해 해상 봉쇄를 명령했다. 일명 ‘쿠바 미사일 위기’로 불리는 이 사건은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이후 양국은 극적인 타협을 통해 전면전은 피했으나, 세계는 핵무기의 공포 속에서 평화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 해병대의 작전 모습. 벼농사 지역을 횡단하며 작전을 수행 중인 병사들의 모습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열악한 전투 환경이 엿보인다. ○ 1967년, 워싱턴에서 대규모 베트남전 반대 시위 1967년 10월 22일, 미국 수도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앞에는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모여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전쟁은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국방부 앞까지 행진했다. 일부 시위대와 군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683명이 체포되었다. 이 시위는 전 세계로 확산되어 일본과 서유럽에서도 동시다발적인 반전 집회가 이어졌다. 이후 고엽제 살포와 민간인 학살 등 베트남전의 참상이 드러나면서 반전 여론은 더욱 커졌다. 특히 1969년 10월 15일 ‘베트남 반전의 날’에는 미국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평화의 외침을 이어갔다. 1987년 산악인 허영호는 한국인 최초로 해발 8,163m에 이르는 히말라야의 마나슬루봉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 사진은 히말라야의 또 다른 봉우리는 에베레스트. ○ 1987년, 산악인 허영호, 히말라야 마나슬루봉 단독 등정 성공 1987년 10월 22일, 한국의 산악인 허영호가 히말라야 마나슬루봉(8,163m)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 이로써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를 단독으로 오른 인물이 되었다. 극한의 추위와 고립 속에서도 그는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교감의 대상”이라 말하며, 도전과 성찰의 철학을 남겼다. 그의 등정은 이후 한국 산악계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고려시대 불화 「수월관음도」. 바위 위에 앉은 관세음보살이 물 위의 달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자비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섬세한 선묘와 은은한 색채가 고려 불화의 미감을 보여준다. ○ 1989년, 뉴욕 소더비에서 「수월관음도」 경매되다 이날 뉴욕의 미술품 경매 회사 소더비(Sotheby’s)에서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가 경매에 부쳐졌다. 정교한 필치와 은은한 채색이 돋보이는 이 불화는 고려시대 불교 미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경매가 100만 달러를 넘어서는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 이후 「수월관음도」는 동서양을 잇는 문화교류의 상징으로 주목받으며, 고려 불화의 예술성과 세계사적 가치를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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