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 644
검곡은 해월 신사께서 살던 곳이다. 부모를 모두 잃고 가진 것조차 없이 친척 집을 전전하며, 아직 어린 나이에 해월 신사는 떠돌이와 같이 살아갔다. 나이 열일곱 살 때는 제지소(製紙所)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기도 했다. 성년의 나이에 이르러 밀양 손씨를 부인으로 맞아 혼인했다. 결혼 후에도 흥해 일대 터일 마을 안쪽 음금당 마을이나 마복동(馬伏洞) 등지를 옮겨 다니며 10년 가까운 시간을 살아갔다.
이렇듯 가정을 이룬 후에도 한 장소에서 안정되게 거주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던 해월 신사는 서른세 살이 되는 해인 1859년, 오랫동안 살았던 마복동 일대를 떠나 그 마을 안쪽 산간에 자리한 작은 마을인 금등골, 즉 검곡(劍谷)으로 이주했다. 검곡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 안쪽 산속에 있는 지역이다. 예전에는 몇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그저 산속일 뿐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살며 농사를 지었다. 마을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옛날에는 4가구 정도가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마북리에서 이 지역을 바라보면, 첩첩이 겹쳐진 산들만 보일 뿐 이런 오지에 마을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비 오는 여름날이면 비와 함께 산골짜기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무로 인하여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산속일 뿐이다.
마북리 마을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서자 포항 상수원 댐(상수원 보호구역)이 조성되어 있어 부득불 마을 이장님과 주민이 동행했다. 검곡(劍谷)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주 깊은 산골짜기이다. 돌밭(너덜지대)과 계곡을 지나 깔닥 언덕을 올라가니, 옛 집터와 축대, 허물어진 담, 감나무 몇 그루, 작은 대나무밭 등이 남아 있었다.
“인적은 간 데 없고, 옛터는 무심히 세월 속에 묻혀가고 감나무에 남은 까치밥만 반겨주네.”
허물어진 담 앞에 서자 입에서 문장이 절로 흘러나왔다.
실상 검곡은 정상적인 마을과는 동떨어진, 화전민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산 중턱에는 화전을 일구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해월 신사는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화전민으로 살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검곡에서 용담까지는 70리 길이다. 산과 산으로 이어지는 길일 것이다. 해월 신사는 70리 길을 걸어 용담에 가서 수운 대신사께 가르침을 받고는 다시 돌아와 가르침과 똑같이 행하며 수련을 했다.
수운 대신사께서 임술년 3월 남원 은적암에서 돌아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박대길의 집에 머물 때, 해월 신사께서 찾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는 그간 어떻게 공부를 하였는가를 놓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에 관한 기록을 『도원기서』에서 찾아본다.
慶翔問曰 生其間所工 不實 然有如此之異 何爲其然也 先生曰 且言之 慶翔跪告曰 以油半宗子
達夜二十一日 其故何也 先生曰 此則造化之大驗 君等心獨喜自負也 慶翔又問曰 自後布德乎
曰布德也
경상(慶翔)이 묻기를,
“제가 그간 공부가 독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상한 일이 생기니, 어찌해서 그렇
게 되는 것입니까?”
선생께서 말하기를,
“계속 말을 해보라.”
경상이 꿇어앉아 고(告)하기를,
“반 종지의 기름으로 스무하루의 밤을 밝혔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선생께서 말하기를,
경상이 또 묻기를,
“이후부터 포덕을 할까요?”
“포덕하도록 하여라.”
- 『도원기서(道源記書)』
대신사께서 남원에 가 있고, 안 계실 때 행했던 수행과 공부에 관하여 해월 신사께서 대신사께 말씀을 드린다. 특히 수행하던 중 일어났던 이적(異蹟)에 관해 말씀을 드리자 대신사는 “그것은 조화(造化)의 커다란 효험이다.”라고 대답한다.
‘조화’란 무엇인가. 주문을 해의하는 자리에서 대신사는 ‘조화자 무위이화의(造化者 無爲而化矣)’라고 말씀하고 있다. 조화란 다름 아닌 한울님의 작용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해월 신사께서 한울님의 작용, 곧 한울님의 힘을 얻었다는 말씀이 된다.
그러고는 바로 ‘포덕’을 명한다. 포덕이란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펴는 것이다.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펴기 위해서는 먼저 한울님의 덕을 깨달아야 한다. 해월 신사께서 한울님의 덕을, 한울님의 작용을 회복하였기 때문에 포덕을 명한 것이다.
이러함이 이후 대신사로 하여금 해월 신사께 도통을 물려주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된다. 도통 전수의 장면이 『도원기서』에 나온다. 이 부분을 보기로 하자.
特爲執筆 以受命二字書 告而受訣曰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 授之曰 此詩 爲君將來
後之事 而降訣之詩也 永爲不忘也
특히 붓을 잡아 ‘수명(受命)’ 두 자를 써서 주었다. 한울님께 고(告)하여 결(訣)을 받아 ‘용담의 물
이 흘러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고, 검악(劍岳)에 사람이 있어 한 조각 굳은 마음이다(龍潭水流
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 등의 시를 써서, 이를 경상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 시(詩)는 그대의 장래 일을 위하여 내린 강결(降訣)의 시이다.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라.”
- 『도원기서(道源記書)』
해월 신사는 이곳 검곡에 살면서 신유년(1861년) 6월 동학에 입도한다. 이후 수운 대신사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으면 집에 돌아와서 그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였다고 한다. 해월 신사께서 대신사를 처음 뵙고 가르침을 받은 감동의 말씀이 『해월신사 법설』 「독공」에 나온다.
余少時自思 上古聖賢 意有別樣異標矣 一見大先生主心學以後 始知非別異人也 只在心之定不
定矣 行堯舜之事 用孔孟之心 孰非堯舜 孰非孔孟 諸君體吾此言 自强不息其可矣哉 吾雖未貫
唯望諸君之先通大道也
내가 젊었을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부터는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정
하고 정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인 줄 알았노라. 요순의 일을 행하고 공맹의 마음을 쓰면 누가 요
순이 아니며 누가 공맹이 아니겠느냐. 여러분은 내 이 말을 터득하여 스스로 굳세게 하여 쉬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나는 비록 통하지 못했으나 여러분은 먼저 대도를 통하기 바라노라.
- 『해월신사 법설』 「독공」
이러한 감동과 함께 해월 신사는 자신과 같은 하층민의 사람도 성현(聖賢)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이에 대신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며 수련에 정진한다. 추운 겨울에도 계곡의 찬물에서 목욕하고, 주문 수련을 하여 마침내는 기름 반 종지로 열다섯 날을 보내는 경험, 천어(天語)를 듣는다는 심오한 종교적 체험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검곡은 해월 신사께서 단지 살던 곳만이 아니라, 대신사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깊은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그 결과 해월 신사는 대신사로부터 무극대도를 전수받는, 도통(道統)의 대임(大任)을 물려받는다.
검곡에 올라가기 위해 마복동 신광온천 마당에 먼저 모인다. 신광온천 마당 한편에는 「해월 신사 어록비」가 큼지막하게 서 있다. 어록비의 내용은 『해월신사 법설』 중 「대인접물」의 일부이다. 글씨는 이 비를 세울 당시 이곳 신광중학교에 다니는 이향미 학생이 썼다(1998년 9월 20일). 천도교 동덕들이 힘을 들여세운 비이다. 특히 박노진 동덕이 큰 노력을 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게시물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