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포덕166년 2025.12.06 (토)
대신사께서 신유년(辛酉年, 1862년) 6월 용담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을 향해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대신사로부터 배움을 받기 위해 용담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문을 열고 맞이하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開門納客 其數其然].’ 또 일 년이 지난 후에 먼 곳 혹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았다고 한다.
당시의 이러한 풍경을 대신사의 수양딸이 회상하는 기록이 있다. 대신사의 수양딸은 1920년대 후반까지 살았는데, 그때 이미 나이가 팔순이 되었다. 이 수양딸을 천도교의 이론가인 김기전(金起田)이 인터뷰한 기록이 있다.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신유년 포덕 당시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신사께 예물로 곶감을 많이 가지고 왔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용담정 부근에 버려진 곶감꽂이만을 짊어지고 가도 인근 마을 사람들의 땔나무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너무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손님들 조석(朝夕) 준비에 수양딸과 부인 박씨 부인은 나날이 바쁘고 힘이 들었으며, 특히 날이 저물어 저 많은 사람이 어디에서 다 잠을 자나 하고, 아직 어렸던 수양딸은 혼자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용담으로 들어가는 작은 산길은 마치 장터마냥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小春, 「大神師 收養女인 八十老人과의 問答」, 『新人間』 통권 16호, 1927. 9.)
이렇듯 많은 사람이 용담으로 모여들고 동학을 공부하니 유생(儒生)들과 관이 관심을 두게 되고, 마침내는 탄압을 하게 된다. 이에 대신사는 용담을 떠나 전북 남원으로 가게 된다.
용담을 떠난 대신사는 먼저 울산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러 도인을 만나고, 며칠을 머문 후 부산으로 간다. 부산에는 누이동생이 살았다고 한다. 표영삼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 대신동에 누이동생이 대신사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산당(山堂)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부
산에서 배를 타고 오늘의 진해시(鎭海市)에 속한 웅천(熊川)이라는 마을에 가서 유숙하게 된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나 승주(升州)를 지나며 충무공(忠武公)의 사당에 배알하고, 충무공이 남겨 놓은 보국(輔國)의 정신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 보기도 한다. 이어서 전라도 무주(茂州)에서 잠시 머문 뒤에 다시 길을 떠나 남원(南原) 땅에 이르게 된다.
대신사는 이렇듯 며칠을 걷고 걸어 남원에 이르게 되고, 남원 광한루(廣寒樓) 근처에 살고 있는 서형칠(徐亨七)의 집을 찾아가게 된다. 다른 기록에는 서공서(徐公瑞)라는 사람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가 12월 중순 무렵으로 추정된다. 길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난 뒤이다.
서형칠은 한약방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신사의 제자 중 최자원(崔子元) 등 약종상을 하는 사람이 있어, 이들 제자들의 알선으로 남원의 한약상인 서형칠의 집을 찾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형칠의 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서형칠의 생질(甥姪)되는 공창윤(孔昌允)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열흘 가까이 머물게 된다. 이곳에 머물며 대신사는 서형칠, 공창윤, 양형숙(梁亨淑), 양국삼(梁國三),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을 포덕하기에 이른다.
남원에 도착한 지 10여 일이 지난 12월 그믐쯤 대신사는 이들의 안내를 받아 남원 교외의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을 찾아가게 되고, 이곳에서 산속으로 조금 떨어진 덕밀암(德密庵)이라는 작은 암자로 가게 된다. 이곳에 머물면서 수운 대신사는 자신이 스스로 이곳에서 ‘자취를 감춘다’라는 뜻의 은적암(隱跡菴)으로 그 암자의 방 하나를 이름하고, 1862년 3월까지 머물고 나서 경주로 돌아온다.
은적암이 있는 덕밀암은 전북 남원 동편, 교룡산성(蛟龍山城) 속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에 딸려 있던 작은 암자이다. 이 산성은 원래 백제 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성은 조선 시대에 쌓은 것이다. 이곳은 국방상 매우 중요한 요새지로서 남으로부
터 침략하는 왜구를 견제하기 위하여 산성을 구축했다. 당시는 남원부(南原府)의 관리를 받아왔고, 남원부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 일대와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을 수비하던 전략 요새의 외성(外城)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성 입구에는 이 산성을 지키고 수비하던 비장(碑將)들의 비석이 줄줄이 서 있어, 험난했던 지난 역사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은적암을 품에 안듯이 둘려 있는 교룡산성 뒤쪽으로 솟아 있는 산을 황룡산(黃龍山)이라고 부른다. 산등선이 그리 높지는 않아도, 산의 정상으로는 제법 기암괴석이 작은 병풍마냥 펼쳐져 있다.
이 산의 골짜기마다 어느 시대에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아흔아홉 개의 우물이 돌무덤으로 만들어져 있다. 산성의 이름이 교룡(蛟龍)이듯이, 백 개의 우물을 만들면 용이 승천을 한다는 전설에 따라 아흔아홉 개의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교룡이라는 산성의 이름처럼 아직
은 용이 되지 못한, 그러므로 이무기의 슬픔과 잠재적 가능성이 꿈틀거리듯 자리하고 있는 산성. 이 산성의 이름은 이곳 지형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곳에 은거한 대신사는 달이 뜨는 밤이면 능선에 올라 「처사가(處士歌)」를 부르기도 하고,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하는, 상원갑(上元甲)의 새로운 전기를 이룰 때가 왔음을 암시적으로 노래한 「검결」을 부르며, 목검을 잡고 검무를 추기도 하였
다. 대신사께서 제세(濟世)를 위한 열망과 심신을 아울러 단련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 은적암에 머물면서 대신사는 앞의 『도원기서』 인용문에서 말하듯이 동학의 중요한 경편인 「논학문」과 「도수사」, 「권학가」를 짓는다. 은적암은 대신사께서 새로운 계획을 세운 곳이자 동학의 중요한 경전이 저술된 곳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자리에는 다만 천도교서울교구 동덕들이 세운 표지판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1989년 대신사 탄신 165돌을 기념하여 서울교구에서 7일간 특별수련회를 개최하고 마지막 날인 10월 29일(시일) 은적암으로 서울교구 교인 226명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은적암 터’ 성지 표지판을 세웠다.
저자도 표지판을 세울 때 청년회 부회장으로 참여하여 표지판과 시멘트, 모래, 자갈, 물통 등을 등에 지고 산 중턱에 올라 표지판을 세우고 나서 대신사의 당시 상황을 그리며 남원 시내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렇듯 작은 표지판이라도 세운 까닭에 은적암을 세상에 알리고 이곳을 성역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듯이 동학의 유적지 발굴을 비롯한 표지석 또는 표지판을 세우는 사업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다음호 예고 : 흥해 손봉조의 집 '수운 대신사, 최초로 접주제를 시행하다'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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