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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20) "천도교의 결정적인 역할"

기사입력 2025.09.24 14:53 조회수 14,598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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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제 5 장    3.1운동 관련  논문


                        1,  3.1운동과 천도교  (참고 표영삼 자료)

     머리말

    포덕 60년(1919) 3월 1일 일어났던 3.1운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나와 있다. 긍정적인 평가도 나와 있거니와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부정적인 평가이든  긍정적인 평가이든 제각기 보는 입장이 있어 일리가 있다. 역사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교단으로서는 3.1운동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  3.1운동과 교단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근년에 이르러 일부 진보적 사학자 중에는 천도교의 역할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동학혁명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눈으로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 3.1절을 맞아 교단의 입장에서 몇 가지를 추려 그 의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천도교의 선도적 역할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규명은 천도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 역할은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준비단계에서는 천도교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운동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 대중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첫째, 3.1운동의 기본 방침을 천도교에서 1월 하순경에 결정했다. 모든 사회운동에는 그 운동 원칙을 정하고 전개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기본원칙은 바로 운동주체가 정하게 마련이다.

     당시 의암성사 밑에서 참모로 주역을 담당했던 여암(如菴 崔麟)의 수기에 의하면 기본원칙은 천도교에서 단독으로 결정했다.

     여암이 의암성사를 찾아갔을 때 의암성사는 “장차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우리들이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무위무능하게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이미 정한바 있으니 제군은 십분 분발하여 대사를 그르침이 없이하라” 고 부탁했다 한다.

     의암성사의 이 말씀은 3.1운동의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 때는 기미년 1월하순경인 듯 하여 대단히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은 3대 운동 원칙을 세웠다.

     1) 독립운동은 대중화하여야 할 것.

     2) 독립운동은 일원화 하여야 할 것.

     3)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 

     이 3대 원칙의 결정은 물론 의암성사와 권동진·오세창과 같이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3.1운동은 천도교가 단독으로 정한 원칙에 의해 전개되었던 것이다.

     둘째,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은 전체 천도교인 단독으로 마련했으며 또한 지출되었다.  3.1운동 1년 전인 포덕 59년(1918) 4월에 부구(部區) 총회를 열고 신 교당을 건축키로 경정하였다.  

     모금운동은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천도교인들은 단순히 대 교당을 짓는다하여 성금을 각출한 것이 아니라 성사께서 어떤 중대한 일을 거사하게 될 것이므로 앞장서서 자금을 마련해야겠다는 애국애교의 심정에서 각출했던 것이다.

     천도교인들은 가난한 농민들이었으므로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논밭과 소를 팔았던 것이다.  즉 생활 수단을 팔아 나라위한 큰일에 바쳤던 것이다.  기미년 1월에 각출한 성금은 상당액에 이르렀다,  이 때 일제 총독부 당국이 이 사실을 알고 돌려주라는 압력이 있었다, 할 수 없이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방교구장들과 상의한 결과 각 교구는 되돌려 받은 것처럼 영수증만 쓰고 당초 목적한 대로 운동자금으로 사용키로 하였다.

     이때 약 500만 원 가까이 모금되었는데 대교당 건축과 중앙총부 사무실 건축에 필요한 27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운동자금으로 쓰게 되었다.

    은행에 약 6만 원 예치했다가 당국에 의해 동결되었고 그 나머지는 수시로 비밀히 사용할 수 있게끔 춘암상사에게 맡겨놓았다.   이 자금으로 준비단계의 각종 비용을 충당했으며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에 필요한 여비 등에도 사용했다.   

    심지어 기독교 측의 요청으로 5000원을 주었으며 독립선언서 인쇄 사실이 탄로 나자 종로경찰소 신형사의 입을 막기 위해 역시 5000원의 거금을 주기도 했다. 

     어떤 운동을 막론하고 운동자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천도교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금을 주도적으로 마련 차질 없이 진행하게 하였다.   

    이런 자금마련은 운동주체로서의 천도교가 해야 할일을 완수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즉 운동의 주체자로서 전체 교인이 참여하여 논밭팔고 소 팔고 심지어 여자들의 머리치장에 필요한 다리까지 팔아 마련한 것이다.

     셋째,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시종 천도교에서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쇄와 배포도 천도교가 주관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육당 최남선이 집필하였다. 그를 선정하였던 것이 바로 천도교였으며 2월 15일에 초안이 완성되어 가져왔던 것을 검토하고 보관 한 것도 천도교였다.  그리고 인쇄에 있어서도 천도교에서 전적으로 맡아 하였다, 조판기술 관계로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에서 판을 짜가지고 2월 27일에 넘겨받아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인쇄하였다. 인쇄 총책임자는 33인의 한 분이었던 천도교 간부(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었다.

     독립선언서의 배포 책임도 천도교에서 전담하였는데 이종일의 책임하에 인쇄를 마친 후 신 교당 건축 장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가 배포했다.  서울지역의 배포는 학생들이 담당하였고 지방에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자기 종교 계통에 따라 배포하였다.

     천도교는 독립선언서의 작성에서부터 인쇄 배포에 이르기 까지 준비단계에서 거의 단독으로 담당하였다.


    운동의 일원화에 앞장서다

     

    넷째, 3.1운동을 일원화 하는데 있어서도 천도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기독교 측의 노력도 높이 평가하지만 전민족의 운동이 되게 하기 위해 천도교 측의 노력이 대단했다.  여암 자서전의 일부를 보면 처음에는 윤용구·한규설·박영효 윤치호 등과 접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으로 기독교 측과 불교 측을 만나 공동으로 운동을 벌이자고 합의하였다.

     윤용구·한규설·박영효·윤치호 등 4인이었다. 윤용구는 구한말 대신으로 국변 후에 일본의 작위를 고사하였고 그 성품이 고결한 사람이었으며 한규설은 을사늑약 때 참정대신 즉 총리대신으로 그 조약을 한사코 반대한 사람이었고 박영효는 소위 개화당 영수로서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일인의 침략을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귀양살이까지 한 저명한 귀족 혁명가이다. 윤치호는 과거 광무년 간에 독립협회장으로서 특히 미국인 간에 신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규설만이 일이 중대하니 심중히 고려해 보자는 약속이었고 그 밖에 박영효·윤용구·윤치호는 모두 회피하여 면회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한 인물들이다. 독립운동은 민족적 제전이다. 신성한 제수에는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좋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제물이 되면 어떠냐, 구시대의 인물들과의 제휴가 실패되자 다음에는 기독교와 불교 유교 측에 교섭해 보기로 하였다.

     이승훈은 그간 자기가 경과한 모든 사유를 말하고 다음에 작일 기독교 측 여러 사람이 회합한 내용을 “기독교 측에서 독자적으로 운동을 진행할 방침”이란 것을 말하였다. 도대체 일국의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대사업이다. 독립운동이 만일 분산적으로 된다면 그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민족적 불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니 절대로 통일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승훈은 곧 이어서 말하기를 “작일 회의에서 가장 곤란한 문제는 비용에 관한 문제였는데 분담해서 변통해 보자고 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한즉 천도교에서 우선 5000원만 돌려주었으면 만사여의할 듯싶다. 만일 5000원이 못된다면 3000원가량이라도 우선 급한 비용이 될듯하니 기어이 돌려주기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동대문 밖 상춘원에 가서 의암성사를 뵙고 그동안 경과 사항을 보고하고 이승훈이 청구한 금액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선생님 말씀이 5000원 청구하였으니 그 액수대로 융통해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다음날 22일에 5000원을 가지고 소격동 이승훈 숙소에 가서 직접 교부하였다.

    결국 5000원을 마련해줌으로써 기독교 측과 제휴는 성공하였다. 다음은 불교 측과 제휴하는 일이 남았다.  24일 밤에 평소부터 친교가 있는 강원도 양양군 통천면 신흥사 승려 한용운(韓龍雲)을 생각하고 그의 주택 재동 43번지를 탐방하였다. 나는 그의 의사를 간파하고 그간의 경과 사실을 피력하였더니 불교 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널리 통지하지 못한 채 한용운 백용성 2인만 참가하였으나 그들은 족히 불교를 대표할만한 인물이었다. 결국 천도교 기독교(장로교, 감리교) 불교 등 세 종교 단체가 하나가 되었으며 또한 학생들이 가담되어 운동을 거족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유감스러운 점은 유교 측 대표와 천주교 대표가 빠졌다는 점이다.

     끝으로 남은 일은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는 일이다. 2월 27일에 이승훈·이필주·함태영·한용운·최남선 등이 모여 의론한 결과 의암성사를 첫머리에 쓰고 감리교, 불교 순으로 대표자의 이름을 쓰고 나머지 29명은 가나다순으로 정했다. 육당이 중간에 서서 인물로 보나 거사동기로 보나 손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수위를 쓰는 것이 어떠냐고 기독교 측에 권고했다. 이승훈은 그러면 두 번째로 기독교를 대표하여 길선주 목사를 쓰자고 타협론을 제출했다.  그러나 길선주는 장로교파로서 기독교 전체를 대표할 수 없은즉 감리교를 대표하여 이필주 목사를 세 번째로 쓰자고 했다, 그 말에 따라 한용운은 제 4위는 백용성을 쓰는 것이 옳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의암성사를 첫머리에 쓴 것은 천도교대표자로 기명한 것이 아니라 육당이 “손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수위에 쓰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는 점과 이 육당의 제안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의암성사는 영도자로서 수위에 기록한 것이며 당시 일반 사회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대표 중에 대표가 된 것이다.


    교단의 3.1운동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역사를 보는 눈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면 그 이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3.1운동을 남다르게 보는 대표적인 사례는 북한의 3.1운동관이다.

    그들은 첫째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 중에서 러시아 혁명을 개입시키고 있다.

    러시아 혁명에 자극되어 3.1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둘째, 3.1운동의 주체는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33인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타협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관으로 보면 사회 구조는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체제로 바뀌게 마련이므로 그 동기는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에 뿌리를 대지 않을 수 없으며, 3.1운동의 주체는, 특히 선봉적 역할은 노동자로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데 자극받아 일어났다고 하면 그들의 이론에 맞지 않을뿐더러 사회사적으로 분수령을 형성하는 3.1운동에서 소외되게 될 것이다.

     그들의 3.1운동관은 종교 단체의 역할을 철저히 배격하고 자기들의 역사관에 부합되는 이론으로 재해석하려는데 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정연한 설명이 가능하더라도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서는 이론 자체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천도교에서는 다른 역사관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즉 부정적으로 평가하든지간에 우리 나름대로의 역사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3.1운동은 낡은 문화가 물러가고 새 문화가 다시 개벽되는 종교적 역사관에 입각한 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사에서 전 근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구별을 신분제도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듯이 낡은 문화와 새 문화의 차이는 인간의 존엄성에서 벗어나는 질서와 향상시키는 질서의 차이로 구분된다.  전근대적인 사회체제는 신분제도를 근간으로 한다면 근대적 사회체제는 신분제도가 타파되고 평등성을 확보하는 사회체제의 차이에 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낡은 문화 (병든 문화)는 인간존엄성을 무시한 문화라면 새 문화(다시 개벽)는 인간존엄성을 향상시키는 문화이다.

     대신사는 그 분기점을 스스로의 세계관에 대한 해답의 체계(無極大道)를 얻은 포덕 원년(1860)을 분기점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우리의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향상시키는 역사로 흘러왔다는 것이다.  동학혁명운동도 3.1운동도 정치 경제제도의 현상들을 제거하면 이런 쪽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이 천도교의 종교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추상적일 수 있으나 종교적인 역사관이므로 그런 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존엄성의 실험을 위한 역사적 과제로 제기한 것이 다름 아닌 보국안민이다. 보국은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배제하고 국제간에 정의를 확립하고 민주적 완전자주독립을 확립하자는 것이요, 안민은 자유 평등 정의 민주 번영의 가치들이 실현되는 인간존엄성을 토대로 한 사회제도를 확립 물질적 정신적으로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3.1운동을 천도교의 역사관으로 볼 때 새 문화 창조 과정에서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국제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보다 나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보국안민운동의 하나였다라고 할 수 있다.

     둘째 3.1운동은 천도교라는 이념집단이 선도하여 국제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도교는 교정일치(敎政一致)라는 설명체제로 역사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사회변동은 인간의 의식(敎)이 변해야 사회구조를 개혁할 수 있다.  동시에 사회구조는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상호 교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변동에는 그를 주도할 수 있는 이념체계와 집단이 중요하다. 아무리 사회적 모순이 성숙되었다하더라도 그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이념체제가 있어야 하고 그 이념체제를 실천하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자연발생적으로 폭발 저항할 수도 있으나 이념집단이 형성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저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이념집단이 형성되면 기층민중이 그 조직에 직결 저력을 발휘 사회적 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조직적으로 사회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다.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운동의 경우를 들어보면 동학이란 이념체제를 가진 집단이 없었으면 혁명운동은 불가능 했다. 농민문제가 아무리 모순관계를 가졌더라도 이를 이끌고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이 없으면 안 된다. 

     이념집단이 없어도 혁명운동이 가능하다고 하면 1894년에 동학 아닌 다른 집단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났어야 한다. 그 당시 실학 계통이나 그리스도 계통의 사상적 종교적 집단이 있었으나 그 곳에는 기층민중들이 모여들지 않았으며 혁명을 주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학에 대해서 기층민중은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었으며 그 힘으로 혁명을 집행했다. 이것은 동학이 갖는 이념체제가 기층민중의 이해와 일치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화할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운동은 동학이란 이념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학·천도교는 바로 새 문화 창조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이념집단이며 동학혁명과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3.1운동은 일시적으로 일본제국주의 통치에 항거한 운동이 아니라 자유 평등 민주 번영을 실현시키기 위한 이념운동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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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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