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포덕166년 2025.12.06 (토)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1운동의 준비
포덕 60년(1919) 당시의 교구장은 이종수(李種秀)였다. 구성교구는 태천교구와 합하여 구성대교구로 되어 있었다. 대교구장은 태천의 이정점 어른이었으나 구성교구장은 이종수 어른이 맡았다. 교구의 중요 직책은 전제원(典制員)에 백응구, 공선원(共宣員)에 전중록, 금융원(金融員)에 박응준, 서기에 원명준이었다.
각 전교실의 전교사는 모두 20명이었으며 다음과 같다.(포덕 60년)
구성면 김정상, 동산면 김관화, 오봉면 김상련, 방현면 임찬흡, 이현면 강만영, 노동면 배윤직, 운계동 허희경, 깅상동 이치언, 서산면 최봉호, 백운동 김낙용, 송수동 이천길, 대성동 최광한, 신음동 전학수, 관서면 이대화, 사기면 윤태화, 왕당동 김용연, 조악동 이시영, 이 밖에도 중방동·청용동 였다, 장동 전교실이 있었는데 전교사는 정기환·노인화 였다.
교회건물은 구성면 우부동에 4동(38間), 서산면 남평동에 2동(6間), 백운동에 1동(4間), 동산면 덕화동에 2동(9間), 방현면 하단동에 1동(5間), 청룡면에 2동(8間), 처나면 탑동에 2동(7間), 사기면 송백동에 1동(3間), 신시에 1동(5間)이 있었다.
연원은 이종수·백웅구 계통과 원치영·김정삼 계통이 주가 되었고 선천의 김상열(月鳳 金商悅) 계통이 약간 있었다.
3·1운동 준비는 연원계통으로부터 착수되었다. 제1차 준비사업은 자금조달이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3·1운동 거사자금으로 포덕 59년(1918) 11월부터 본격적인 모금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의 문헌인 ‘천도교일반’이란 글에 보면 “동년 12월 28일 이미 약 9만원의 건축비를 신도로부터 연사(捐捨)케 하고 그 중에는 전혀 신도의 임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므로 반환해주도록 명한 바…”라고 하였다. 총독부는 천도교가 교당건축비라는 명목으로 모종의 자금을 모은데 대해 의심을 갖고 강제로 반환조치토록 하였던 것이다. 각 교구는 11월 초부터 모금에 착수, 1인당 5원 내지 10원씩을 목표로 약 50만 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구성에서도 약 1천호 정도가 모금에 응했으므로 그 금액은 5천 원이 넘는다. 포덕 52년(1911) 1년간에 납부한 월성미 총액이 8백9십7원(포덕 52년도 금융관 금전출납표)이었으므로 6배에 가까운 자금을 모아 올렸던 것이다. 다른 군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상한 각오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다는 절실한 심정으로 논밭을 팔고 소도 팔아 바쳤던 것이다. 이 자금 각출을 간과하고 3·1운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일제 총독이 강제로 돌려주라고 하여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돌려준 것처럼 영수증만 발행하였다. 이런 사실이 후일에 발각되어 강계교구에서는 간부들이 기소되어 처벌받은 사실도 있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1918년 12월 1일 경운동 현 교당 기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모금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어 1월 말에 목표 액수가 완료되었다. 한편 총부는 정신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즉 중앙총부는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에 걸쳐 매일 하오 9시에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염원하는 기도를 봉행토록 하였다. 중앙총부는 이 기도를 각별히 진행시키기 위해 경성·해주·의주·길주·원주·경주·서산·전주·평강 등 9개 처에 대표기도소를 특설하고 주요간부를 파견하여 지도하였다. 각군 교구에서도 주요 간부들이 날마다 교당에 모여 기도식을 봉행하면서 장차 어떤 큰 일을 치르기 위한 마음다짐을 굳혀나갔다.
3·1만세운동의 본격적인 준비는 선천의 김상열(勉菴 金商悅)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월봉 선생은 선천에서 사기면으로 독립선언서를 보냈으며 이것을 다시 구성군에 비밀히 송달했다”고 사기면 허철 )선생이 증언하고 있다. 구성군교구에서는 선언서를 등사기로 비밀리에 더 많이 복사하여 각 면에 배포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운동 전개
연원과 지역관계로 운동은 3개소에서 각각 추진되었다. 즉 영북지방(사기면·천마면·관서면)은 신시(사기면 소재지)에서, 영남지방은 구성읍과 남시(방현면 소재지)에서 추진되었다. 구성읍은 구성면·서산면·동산면 등 3개면이 합쳐 준비하였고, 남시에서는 방현면·노동면·이현면 일부, 오봉면 등 4개면이 합쳐 준비하였다.
일본 총독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3월 10일(확인 곤란함)과 3월 11일에 구성읍과 남시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한국독립운동사 1』에는 다음과 같이 일제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五) 철산·구성군 : …다음 구성군내의 운동은 읍내와 신시에서 주목을 끌 운동이 일어났다. 읍내운동은 3월 11일에 발생하여 3월 20일과 4월 1일에 각기 1천명 내지 3천명의 군중이 회집, 일 군경의 발포제지를 무릅쓰고 몇 차례씩 시위를 전개하였다. 신시에서는 3월 31일과 4월 1일의 양일간에 걸쳐서 약 1천 명 내지 1천 5백 명의 군중이 회집, 시위를 벌였으며 양일 다 살상자가 적지 아니 발생하였다.” (360면) (3월 10일과 20일의 시위운동은 확인하기 어려움)
평북도 장관이 정무총감에게 3월 31일자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四) 구성군 관내 : 동군 방현면 남시에서는 3월 11일 오후 2시 폭민 약 3백명이 일단이 되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하여 특히 헌병주재소에 쇄도코자 하였으나 미리 경계중인 구성 분견 소장이 해산시키고 주모자 15명을 체포하였음.”(760면)
三. 구성군 관내 : “3월 18일 오후 2시 사기면 신시의 장날에 편승, 야소교도 등을 중심으로 하는 폭민 약 3백 명이 독립기를 날리며 만세를 고창하고 헌병주재소에 밀려왔으나 즉시 퇴산시켰으며 주모자 10명을 검거하였음.”(762면)
“본일(3월 11일) 삭주군 읍내에서 약 2천명, 구성군 읍내에서 약 3백...의 군중이 소요하여...”(764면)
“三, 구성군 관내 : 읍내에서 31일 약 3백 명이 폭동을 일으켜 일단 해산되었으나 재기하여 수(遂)히 사상(死傷) 3명을 내었으며 의하여 파병을 하였음. 동군 남시에서도 동일(3월 31일) 폭민 5천명 이상이 집합하고 주재소를 파괴하였음. 또한 동군 신시에서도 동일 폭동이 일어났으므로 선주수비대에서 15명의 파병을 하였음.”(766면)
“二. 구성군 관내 : 4월 1일 약 3천명의 폭민이 읍내에 습래(襲來), 사방의 문에서 진입코자 함을 발포 해산시켰으나 계속 불응하여 평양에서 소위이하 병정 4명의 응원을 받아 엄중 경계중임.”(769면)
이상의 평북 도지사가 총독부 정무총감 앞으로 보고된 보고서에 의하면 구성군 읍내에서 두 번(31일, 4월 1일), 방현면 남시에서 두 번(3월 11일, 31일), 사기면 신시에서 세 번(3월 18일, 31일, 4월 1일)씩 모두 7차례의 시위가 있었다.(3월 10일의 만세시위는 확인이 안됨).
이밖에 자료로써 주목할 만한 것은 이병헌(李炳憲)의『3·1운동비사』가 있고, 이용락(李龍洛)의 『3·1운동실록』이 있으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3·1운동)』가 있다. 세 가지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
(十二) 구성군 의거 : 3월 11일 오후 2시 경에 천도교 주동으로 남시에서 약 4백명이 회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헌병의 총칼에 사상자 3명을 내고 주모자 15명이 체포되었고, 그 후 3월 30일에는 읍내와 남시에서 다수의 군중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적의 총칼에 사상자가 10명이나 되었다. (3월 30일은 31일의 잘못인 것 같음)
이용락의 『3·1운동실록』
구성 : 3월 11일 오후 2시경 남시에서 약 4백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사상자 3인을 내고 해산을 당하였다.“3월 30일 읍내와 남시에 2만 여명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10여인이 총살을 당하였고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3월 30일은 31일의 오기인 것 같음)
『독립운동사』
제9절 구성군 : 3월 11일 하오 2시경 군내 남시에서 군중 4백여 명이 시위투쟁을 벌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로 몰려들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피검자 15명을 내었다.
3월 30일(31일의 오기인 것 같음)에는 오전과 정오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3백 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벌여 읍내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헌병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여기서 군중은 경찰과 충돌, 사상자 수명을 내고 해산했다.
3월 31일은 남시 장날이었다. 이날 정오를 기하여 5천여 명의 군중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일본 기록에는 이날 군중은 낫과 도끼를 들고 헌병주재소를 포위, 헌병들에게 폭행하였다고 했으나 이는 자기네들 발포의 구실을 삼기 위한 과장 보고이려니와 이날의 투쟁이 심상치 않았던 양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 7명과 피검자 5명을 내었다. 같은 날 31일에 신시에서도 일어났다. 즉 이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벌였다가 헌병주재소로 몰려드니 헌병이 발포하여 부상자 1명을 내었다.
4월 1일에는 읍내와 남시와 신시 세 곳에서 일어났다. 읍내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 9백 명 가량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일본측은 헌병과 군대가 연합하여 이를 제지 해산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들은 끈덕지게 투쟁을 계속, 하오 5시에 이르러서야 부상자 3명을 내고 해산하였다. 남시에서는 전날의 투쟁을 이날에 재개하였다가 강제 해산되었으며, 신시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에 전날보다도 더 많은 1천 5백명 이상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재개하였다가 경찰의 발포로 군중측에 부상자 5명, 피검자 30명과 일본 측 부상자 4명을 내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확실한 것만 추려보면 구성군에서의 3·1만세시위는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즉 3월 11일에는 남시에서, 3월 18일에는 신시에서, 3월 31일에는 읍내와 남시 및 신시 등 세 곳에서, 4월 1일은 읍내와 신시에서 시위운동이 벌어졌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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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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