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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8) "독립선언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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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8) "독립선언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

  • 이창번
  • 등록 2025.09.10 10:40
  • 조회수 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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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시위과정과 천도교

  만세시위는 3월 11일에 영남 쪽 상업소도시 남시(南市)에서 최초로 일어났고 다음은 3월 18일에 영북 쪽 소도시시인 신시(新市)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1차 봉기라고 할 수 있으며 3백 명 정도의 소규모 운동이었다. 그러나 3월 31일과 4월 1일의 운동은 영남북이 같이 일어났으며 읍내와 신시에서는 4월 1일까지 연속적으로 과격한 시위를 벌였다. 이것은 2차 봉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1차 봉기는 3백 명 정도로 그치고 2차 봉기는 수천여명이 모여 시위를 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다. 필자는 1차 봉기의 주체는 기독교 계통이고 2차 봉기의 주체는 천도교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는 ‘3월 11일 오후 2시경에 천도교 주동으로 남시에서 약 4백 명이 회합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이 운동은 천도교가 주동이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주동으로 보인다. 이 남시에는 교회당이 있었으며 기독교인이 어느 정도 있었다.

 

  1919년 6월에 조선헌병대사령부가 경무부장 회의 석상에서 보고한 ‘조선소요사건상황’에 의하면 “구성에 있어서는 3월 31일 이전의 소요는 주로 기독교의 선동으로 배태되었고, 그 후는 천도교도의 선동에 의한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3월 18일에 신시의 시위운동은 분명 기독교가 주동이 되었다. 이 신시에도 선천과 가깝기 때문에 기독교가 일찍 들어와 있었다. 3월 11일의 남시 시위운동과 3월 18일의 신시 시위운동은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1차 시위운동은 기독교의 주도라 단정된다. 

 

  2차 시위운동은 물론 천도교가 주도했다. 3월 31일과 4월 1일의 시위운동은 연속적인 시위운동이다. 당시 천도교에서는 3월 3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구성면·서산면·동산면·노봉면 일부 등 4개면에서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영북 신시에는 사기면·천마면·관서면 등 3개면 교도들이 모이게 했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31일의 시위 때는 남시에 5천명이 모였고, 읍에는 3천 명이 모였으며 신시에는 8백 명이 모였다(3·1운동 재판기록). 이 두 곳의 시위운동에는 일본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다.

  우석 전의찬 선생이 1928년 기록에 의하면 천도교인으로서 이때 순도한 사람과 일반인의 순국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崔順瑞 張巖翰 吳尙涉 金贊株 全文行 許龍雲 朴聖瑞 高仲日 등 諸氏,  平人死者는 張德彬 宋行範 白洛水 許佃 尹洛斗 등 諸氏

 

또한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약사』에는 순국자가 다음과 같다. 

許佃 金洛龜 高斗一 白義景 張鳳宙 張鳳奎 金燦斗 吳尙涉 宋連根 崔聖世    崔順世 朴監察 宋信興의 아들 등 10여명

 

 이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 빠진 사람은 고두일·백의경·장봉주·장봉규·김찬두·박감찰·송신흥 등 7명이다. 결국 총순국자는 21명인 셈이다. 

 

 그리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분도 많았다.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옥고를 치룬 사람은 다음과 같다.

 

  金景贊 朴元植 政贊祚 許堵 金應道 金應典 元利尙 朴永化 孫熙雲 獨孤雲    金仁國 元賢天 金洛勇 許尙玉 張海達 張萬永 張義壽 金泰用 金贊極 李時興 金有聲 등 21인

 

그리고 최덕화 등의 판결문(대정 8년 형상 제431호)에 의하면 신시에서 시위하다 체포되어 복역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최덕화(37세), 손희운(40), 원이상(58), 박문구(28), 허상옥(25), 강익홍((21), 박영화(47), 김응주(55), 독고실(40), 김응전(40), 이영근(28), 이시흥(66), 김군직(39) 등 13명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서 누락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최덕화·박문구·강익홍·김응주·독고실·이영근·김군직 등 7명

  

옥살이를 하다 나온 사람은 모두 28명인 셈이다.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에는 구성군내 총동원 연인원수를 6천 5백 명이라고 했다. 일본기록과 재판기록을 합치면 총동원 연인원은 무려 1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순국자가 21명이요, 옥살이를 치룬 사람이 28명에 이른다. 이밖에 부상자는 2~30명이 넘을 것이다. 이상으로 보아 구성군의 3·1만세운동은 매우 격렬했음을 말해준다.


  맺음말

  구성군의 대표적인 도회지라 할 수 있는 읍내와 남시, 신시에서 1만 명에 달하는 민중들이 함성을 올리자 이에 놀란 일제와 그 앞잡이들은 4월 1일에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보복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임시보고서에 의하면 구성에서 자경단을 조직하여 탄압 보복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성군내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하고 소요단 또는 만세를 고창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원이 일제히 이를 저지하고 퇴를 협박함과 동시에 천도교도 등에 접근함을 혐기(嫌忌)하며 그 사이에 상호 소격(疏隔)을 생(生)케 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주로 천도교도들과 민중을 이간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총독부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평안북도 구성군 지방에서는 먼저 천도교도의 선동에 의하여 소요를 야기한 결과 귀중한 인명이 살상되고 산업 상에 있어서도 또한 다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으므로 군민들이 천도교에 대한 반감을 품은 자가 점차 많아 군민은 천도교를 절멸하고 교도도 살해할 것이라고 칭하여 동교도와 교제하는 자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운운…”

  

이것으로 미루어 일제가 평화적인 시위자들에게 발포 살상하고 그것을 천도교에 뒤집어씌우려 얼마나 광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민중을 천도교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온갖 발악을 총동원했음을 입증해주기도 한다.

 

천도교도들이 얼마나 열렬했기에 이처럼 그들은 천도교를 말살하기 위해 광분했을까. 재판기록에도 천도교인들이 굽힐 줄 모르는 애국심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 대표적인 항변의 사례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919년 8월19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 판결문 중에서)

 

  * 김군직(관서면 대우동)·박영화(천마면 정관동) : “조선민족으로서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되며, 이번 사건에 조선 민족인 2천만을 모두 벌 줄 수 있을까. 또 이와 같이 일시적인 고역을 당한다 하여도 결코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반감만이 증가하고 장래 피차간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탄식이 생겨서 동양평화에 큰 불행을 초래할 것은 명백하므로 재판장은 통촉한 다음 타당하게 처결하여 장래 서청(筮晴)의 탄이 없게 하기를 바란다.”

  * 허상옥(천마면 신음동) : “궁곡에서 생활하는 우부우부와 어린 아이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른데 관해서 본인도 양심에 분발심이 생겨서 천여 명 군중 가운데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일 죄가 있다면 파리강화회의에 있다고 생각 키우며, 가령 보안법위반이라고 한다면 온 민족이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누구에게 죄가 있다고 한 것인가.…”

  

구성군 서산면 염잠동에 사는 뇌암 김태용도 일제에 대한 독립정신이 투철했다. 3월 31일 구성군 읍내에 들어가 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분이다. 49세의 나이로 재판을 받을 때 “내 나라를 찾겠다는 만세운동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 일본사람은 우리들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항변했다.

  이현면 원창동에 사는 진암 전경찬도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는데 재판장에서 당당히 항변했다. 신문과정에서 석방하면 다시 만세를 부르겠는가 라고 묻자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계속 만세를 부르겠다”고 하였다. 22세의 혈기로 항변하자 신문관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정정당당하고 굽힐 줄 모르는 애국심인가. 산간에서 겨우 옥수수나 조농사를 지으며 사는 천도교인들이지만 보국안민 정신은 이처럼 투철하여 구성군의 3·1운동을 피 끓게 했다. 

 

 

 제4장 3·1운동에 대한 사회적 통념의 오류 … <참고 : 김응조 자료>

   

어느덧 3・1운동 90주년을 맞이했다. 3・1운동은 우리 국민이라면 예외 없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민족사의 정화(精華)요 청사에 빛나는 민족혼의 표상(表象)이라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랑스러운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했다는데 대해 교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한편 이 성스러운 3・1운동에 대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사례가 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3・1운동 당시 국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며, 더욱이 후세들의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3・1운동에 대한 철저한 국민적 교육이 절실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3・1운동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 몇 가지를 들어 그 진위(眞僞)를 밝혀보려 한다. 


  1. 독립선언서 공약3장에 대한 진실

  3・1운동 당시의 독립선언서 말미에는 공약3장이 명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公 約 三 章 

  ㅡ.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이니, 오직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ㅡ. 最後의 一人,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ㅡ.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여,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이 공약 3장에 대해서 사회 일각에서는 당시 불교 측 민족대표인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이 기초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그 진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만해의 기초설은 명백한 오류다. 이에 대해 지면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그 진실을 간략하게나마 밝혀보기로 한다.

  만해의 공약3장 기초설(起草說) 내지 윤문설(潤文說)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만해의 제자인 김법린(金法麟)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신천지(新天地)」 1946년 3월호에 ‘3・1운동과 불교’라는 글을 게재하고 만해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이라면서 이렇게 썼다.

 

  “…宣言書의 作成에 관한 것인데 起草委員으로 崔麟, 崔南善 및 나 三人이었는데, 崔南善씨는 宣言書에 서명치 않고 草案만을 執筆하고 나는 그것을 수정키로 하고 崔麟씨는 起草責任者로 정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초위원’이란 용어와 만해가 독립선언서를 수정했다는 내용은 다른 자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위의 글이 나왔던 1946년은 해방 다음해로서 최남선처럼 친일행위를 한 변절자에게 혹독한 비판이 가해지던 시기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만해와 같은 지조 있는 독립투사에게는 역사적 진실과 관계없이 과장하거나 찬양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처럼 만해의 윤문설이 검증되지 않은 채 사실로 굳어져가는 상황에서 1960년 박노준(朴魯埻)・인권환(印權煥)의 공저(共著)로 저술된 『한용운연구(韓龍雲硏究)』(通文館 발행)에서 근거 없이 공약 3장을 만해가 수정하고 기초했다고 기술함으로써 결정적인 오류를 제공하는 단초가 되었다. 여기서 그 저술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일단 성안(成案)된 선언서를 보매 반드시 수정을 가하여야 될 곳이 몇 군데 있어서 그는 이를 고쳐서 인쇄에 부치기로 하였다는 사실은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의 공약3장은 순전히 그가 창안 첨기(添記)하였던 것으로 이것도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숨은 사실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아무런 근거 제시도 없이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라든가 ‘이것도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숨은 사실’이라는 소설 같은 표현을 함으로써 이를 와전(訛傳)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이와 관련된 민족대표의 심문조서를 살펴보기로 한다. 만해는 공소공판에서 “그 서류를 보고 독립에 찬성하였나?”라는 판사의 질문에 “그것을 보고 찬성한 것이 아니라 다소 나의 의견과 다른 부분이 있어 내가 개정한 일까지 있소”라고 답했다. 아마도 이 부분이 만해가 수정했다는 윤문설의 근원이 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개정한 초고는 독립선언서의 초고가 아니라 그 이외의 초고임을 다음 최린의 심문조서(1919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확인된다.

 

  판사가 최린에게 “한용운은 이제 보인 세통의 원고를 가지고 있었을 뿐 선언서의 원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최린은 “그 선언서 초고는 인쇄하기 위하여 최남선에게 돌리고 한용운에게는 맡기지 않았다”고 하여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맡기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만해 자신도 3월 11일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의 검사 취조에서 이런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이때 검사가 압수한 증거물 6, 7, 8호를 보이면서 “이것은 피고가 가지고 있던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만해는 “그것 중 6호는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이고, 7호는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어 독립승인을 얻으려는 서면이며, 8호는 일본정부와 동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통고문의 안(案)이다. 또 그 외에 독립선언서의 안문(案文) 1통이 있는데 그것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여기서 만해가 갖고 있던 것이 독립선언서가 아닌 미국대통령, 각국 대표, 일본 정부와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초안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당시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서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정부와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청원서를 초안 작성하였는데, 3・1운동 전날 최린은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제외한 다른 문건을 내어주면서 정서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해는 바빠서 정서하지 못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였다. 이상으로 만해가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접하지도 못하였을 뿐더러 더구나 개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독립선언서의 작성과정을 보면 의암성사가 3・1운동을 결심한 후 최린・권동진・오세창 3인을 참모로 하여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을 먼저 정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는 이종일이 쓰겠다고 자청했으나 그의 성격상 과격한 표현으로 선언서가 작성될 가능성이 있어 최남선에게 선언서 작성을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의암성사와 참모 3인이 독립선언서에 들어갈 대의(大義)를 협의한 후 이를 최남선이 최린의 부탁을 받고 그 대의에 준해서 독립선언서를 작성케 되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사회 일각에서 유포되고 있는 독립선언서에 대한 만해 한용운의 윤문설과 공약3장 기초설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거니와, 만해의 윤문설과 기초설 모두가 근거 없는 낭설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황당한 것은 박노준・인권환의 『한용운연구』에 의암성사를 직설적으로 모욕하는 근거 없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 내용부터 보기로 한다.


 

“최린의 소개로 천도교의 성사 손병희와 대면한 그는 사태의 중대함을 소상히 설명하고 우리 민족이 독립선언을 하고 자주민임을 전 세계에 공포하기에는 이때처럼 좋은 시기는 없다고 갈파, 천도교 측의 호응을 요구한즉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즉석에서 거부함에 만해는 재차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여전히 응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는 그 이상 간청하여보았자 별무신통할 것을 인지하고 의암을 향하여 ‘이미 사건의 비밀은 타인의 귀에 들어갔으니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운동이 사전에 탄로가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목숨이 살아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의암도 그의 열렬한 민족주의사상과 투철한 민족의식에 감탄하여 조건부로 응낙하니, 그 조건이라 함은 의암 자신이 독립운동의 대표자로 되고 또 선언서에도 두서(頭書)하여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논평할 가치조차 없지만, 경술국치 이후 조국독립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계속 준비해온 의암성사에 대해 이런 허무맹랑한 날조를 하는 것은 소위 대학 강단에 서 있는 지성인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몰지각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 만해의 협박에 못 이겨 의암성사가 3・1운동을 마지못해 그것도 조건부로 응낙하였다니 앙천대소(仰天大笑)를 금할 수 없다. 이 기사는 전후가 맞지도 않을 뿐더러 만해 자신이 최린의 권유로 민족대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이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극치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날조로 인해서 3・1운동의 전개과정을 모르는 일반 대중들이 현혹되어 날조가 더욱 증폭되고, 심지어 3・1운동의 역사적 진실까지 왜곡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계속)

 

KakaoTalk_20250414_150311481.jpg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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