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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9)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

기사입력 2025.09.17 03:44 조회수 19,601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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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2.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된 설(說)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하나는 3・1운동 당시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만해 한용운이 낭독하였다는 설이다. 그런데 이 역시 두 가지 설이 모두 와전된 것이며 진실이 아님을 밝혀둔다. 

      우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왜 모였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3・1운동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된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은 결코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러한 주장은 민족대표들의 심문조서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언급이 없는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맹점을 이용해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만해가 낭독하였다고 무책임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주장보다 한술 더 뜬 진실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왜곡 사실에 대한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묵암비망록(黙菴備忘錄)『에 확연히 그 진실이 드러나 있다. 『묵암비망록』은 천도교 측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묵암 이종일(黙菴 李鍾一)이 작성한 것이다.

      묵암은 어느 누구보다 독립의지가 강하고 성격이 매우 강직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된 당일의 『묵암비망록』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


      “12시 전까지 집에 남겨두었던 선언서는 거의 다 배포하였다. 식사도 거의 못하고 서둘러 태화관(泰和館)으로 갔다. 4명이 불참한 가운데 오후 2시경 긴장 속에 독립선언서를 다시 (민족대표들에게-필자 주) 배포해주었다. 의암(義菴)이 나에게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하였으니 크게 낭독하라기에 오자(誤字)를 고치고 그렇게 따랐다.”(묵암비망록, 1919년 3월 1일자)  


      이것이 위의 두 낭설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다. 민족대표들은 전날 독립선언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장소를 바꾼 것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흥분된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로 인해 일본경찰에게 무자비한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래서 태화관에서는 오후 2시 기독교 측 민족대표 4명이 불참한 가운데 묵암이 참석한 민족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의암성사의 지시에 따라 선언서를 낭독했던 것이다. 다만 그 자리에서 만해는 일동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다고 『묵암비망록』은 밝히고 있다.

      사실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특정인물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불경(不敬)이 될 뿐 아니라 민족대표 전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유관순과 3・1운동

      3・1운동에서의 유관순의 활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논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3・1운동이 마치 유관순의 주도로 이루진 것과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광경이지마는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을 누가 했는가” 하고 물으면 열 사람에 7, 8명은 “유관순이 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청소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지성인라는 사람조차 맹목적으로 그렇게 추종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작년 3・1절에 MBC TV는 ‘아우내 장터의 3・1운동’ 재현행사를 중계하면서 “1919년 3월 1일 유관순 열사가 이끌며 전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운운하면서 마치 기미년 3・1운동이 유관순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처럼 방송했다.

      그래서 올해 3・1절에도 이런 잘못된 방송이 나갈 우려가 있어서 지난 2월 9일 중앙총부의 종무원장과 교화관장, 그리고 33인유족회 라영의 회장이 MBC를 방문하여 작년의 왜곡보도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이에 대한 정정보도와 함께 재발방지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가장 정확하고 공정해야 할 방송에서조차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니 일반 민중들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물론 MBC가 고의로 그런 방송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조차도 유관순의 만세운동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얻어들은 풍월을 가지고 방송에 임한데서 이런 착오가 빚어졌다고 생각된다. 

      바로 여기에서 3・1운동에 대한 국민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유관순의 유관단체에서 의도적으로 과대 선전하는데도 하나의 원인이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참고적으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 간략히 기술해보기로 하겠다.

      유관순은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는데,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에 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도 참여했다가 유관순과 학생들이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요구로 학생들은 풀려났다. 

      그 후 3월 10일을 기해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유관순은 병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니며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거사일 하루 전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리는 것을 신호로 인근 여러 산에서 불길이 솟아올랐고, 드디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쳐 총격을 가해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결국 유관순은 재판에 회부되어 3년 징역 언도를 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 된 후에도 계속 항거하자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악화되어 1920년 1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유관순이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4월 1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유관순이 처음부터 3・1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와전됨으로써 특히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의 진실이 왜곡 전파되어 잘못 인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청소년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객관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3・1운동과 관련하여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이 허다하다. 이러한 일은 3・1운동이 극비리에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도 일단의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자파이기주의에 치우쳐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곡필(曲筆)에 더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사초(史草)를 기술함에 있어서 선열과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는 집필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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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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