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포덕166년 2025.12.07 (일)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삼천포교구 선우당 김명숙입니다.
지난 4.12~13일 양일간 경주용담 동학교육수련원에서 율암 신명식 도정님의 주재하에 순원포 동덕들의 워크숍을 계기로 영등포, 수원, 성남, 부산시, 대동, 사천, 삼천포교구의 동덕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토론회를 주관한 도암 선도사께서 각자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교단 발전과 연원 발전을 위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시간을 갖자면서 남성 동덕 한 분, 여성동덕 한 분 이런 순으로 발언토록 진행해 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교단의 현실을 걱정하고 후손들이 신앙을 기피하려는 사회 풍조와 맞물려 걱정하면서 어린이 시일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발전방안을 꾸밈없이 제시해 주셨습니다. 저의 차례가 되어 남편(운암 최도수)을 만나게 되면서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었고 용담으로 신혼여행을 오게된 것을 털어 놓으면서 저의 발언이 길어졌습니다.
저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도 없으며 또한 도력높은 숙덕 어르신들처럼 공부를 많이 하여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나는 신앙생활을 착실히 하고 있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한울님을 제 마음속에 모시고 생활한다는 확신만은 항상 갖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지요.
이제부터 썩 대단하지도 못한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할아버님을 비롯하여 아버님, 그리고 시아주버님들까지 대대로 뿌리 깊은 천도교 집안 자손인 운암 최도수 동덕을 만났던 38년 전은 벚꽃이 만발하고 온 세상이 꽃 천지였던 봄날이었습니다.
저는 경남 고성이란 작은 지역에서 태어나 여중, 여고를 나왔고 대구대학교를 거쳐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무렵 남편의 고향인 삼천포에 처음으로 종합병원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1987년 여름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온 남편을 만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만나면서 대화도중 천도교 사상과 1대 2대 3대 교조이신 스승님들의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그때까지 사실 저는 무신론자에 불과했으므로 솔직히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 먼 나라 이야기로만 여겨졌습니다.
3년여 동안 만나오면서 첫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밤잠을 설쳤으나 그때 저를 데리고 간 곳이 경주 용담정이었습니다. 조그만 트럭을 타고 몇 시간을 달려 겨우 찾아갔던 그곳, 용담정에서 처음으로 이 사람을 계속 만나고 또 미래를 설계한다면 나는 천도교 집안의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다지 가볍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무게감과 저를 짓누르는 뭔가를 느끼며 고민도 많이 했지만, 어느 순간 천도교인으로 살아가는 방법, 신앙생활의 첫걸음과 어떤 공부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답니다.
그렇게 포덕131년(1990) 10월 28일 수운대신사님 탄신일에 맞추어 지금은 환원하신 현암 최영윤 선도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주례사 내용 중 딱 한 가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념일만 되면 생각나는 쩌렁쩌렁하게 힘주어 말씀하셨던 그 내용! 어머님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때 세 양동이의 피를 흘릴 만큼 큰 산고 속에서 너희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부모님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는 것 같이 봉양하라시던 그 말씀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결혼식 후 창녕 부곡 하와이로 신혼여행지를 정했다는 애길 듣고 그나마 기대를 했건만 결국 또 저의 신혼여행지는 경주 용담정이 되었습니다. 샛노란 한복을 차려입고 꽃고무신을 신고 비탈진 길을 둘이서 오를 때 쪽 길옆 산에서 반겨준 건 그나마 날다람쥐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딸 아이가 태어나 두 돌이 지날 무렵 화악산이란 곳으로 수련하러 같이 가자는 큰댁 형님이신 박둘덕 봉신당님의 애길 듣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굽 높은 신발까지 신고 성큼 따라나섰습니다. 그때 아마 총부에서 주최하는 여성회 수련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삼천포교구에서는 윤상선 정미당님을 필두로 다섯 분 정도 참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새벽부터 출발하여 오후 늦게 화악산 밑 민들레 슈퍼 앞에 도착했을 땐 강행군에 이미 지쳐 있을 때였지요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름이라 신발을 벗고 계곡물을 건너서 늦은 저녁이 다 되어야 수도원에 도착했으니까요. 일주일이 일 년처럼 느껴졌던 고행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조언과 아낌없는 격려로 우리 일행을 이끌어 주셨던 정미당 윤상선 내수도님과 봉신당 박둘덕 큰형님의 은덕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첫걸음마를 내딛게 해주신 희생정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화악산 수도원 수련을 기점으로 살아가면서 삶에 지치고 어려운 난간에 봉착했을 때 경주 용담수도원, 가리산수도원, 명동산 수도원 등으로 저의 마음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올해로 12년째가 되는가 봅니다. 남편의 하던 일마저 큰 어려움 속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저 또한 3교대 근무에 온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딸이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 뜻을 가지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보겠다는 이야길 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새벽길을 가방 하나만 챙겨서 나섰습니다. 20여 년 전 한 번 가봤던 길을 묻고 물어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쯤에서야 화악산 입구 민들레 슈퍼 앞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 혼자의 몸으로 어둠 속 깊은 산을 오른다는 공포와 무서움이 먼저 앞서더군요. 마음을 다잡고 소리 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간절한 심고를 드리고 주문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깜깜한 밤, 엎어지고 미끄러지면서 오르길 반복했을 무렵,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궁을기가 보였습니다. 저의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그 깃발을 보는 순간 안도의 눈물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그렇게 오르고 또 오르면서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우면 혹시 산짐승이라도 나올까 봐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워가며 도착한 화악산 수도원. 그렇게 반갑고 고마워서 수도원에 계신 분들 앞에서 소리 내 울어 버렸습니다. 당시 영등포교구 소속 여성회에서 수련 오신 몇 분들과 같이 일주일간의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련 4일째 되던 날 새벽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도 이젠 떳떳한 천도교인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토록 끝도 없고 수도 없이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쏟아지던 폭포수를 처음 보았으며 온몸과 머릿속이 하얗고 저에게 끊임없이 내려와서 안기던 궁을기와 일심이란 글자를 어떻게 글로 표현을 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심(一心)이란 글자를 흰 종이 위에 수도 없이 썼었던 그때 그 감동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숙덕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서 수도원 옆 샘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대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앞날까지 몸살 기운이 있었던 제가 샘물을 다 퍼내고 파랗게 끼 이끼를 씻어내면서 흘렸던 눈물은 분명히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일주일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마지막 날 내려오는 그 산길은 올라갈 때와는 정반대로 뛰어서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울 고시원에서 공부하던 딸의 베개 속에 고이 간직해온 영부 한 장을 정성스럽게 넣어두고 심고를 드린 후 조용히 내려왔고 딸은 첫 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11년 차 시청에 근무 중입니다. 저는 누가 뭐라 해도 분명히 한울님의 은덕이며 조화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이 조금 넉넉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저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한울님이란 든든한 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매년 그러하듯 5월이 왔습니다. 양가 부모님 모두가 환원하셨지만, 그 성령은 항상 저희와 함께하고 계심을 믿기에 5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그 흔하디흔한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한울님 스승님 양가 부모님 모두 사랑합니다.
끝으로 지난 겨울 천도교여성회 동계수련에 남편 운암 최도수 동덕과 참가하여 둘이서 용담정을 오르면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운암, 만약 먼 훗날 어느 한쪽이 먼저 육신이 떠나게 된다고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지금처럼 혼자 용담정을 찾아오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그 옆에는 서로가 함께하고 있다고 믿읍시다. 그리고 가능한 지금처럼 함께 손잡고 육신이 떠나는 날까지 오래오래 천도교인으로서 한울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갑시다."
워크숍을 마치면서 동학 교육수련원이 하루속히 우리 천도교에서 운영해야 주문 수련, 새벽기도 등 자유롭게 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있었고 앞으로 동덕들이 꾸밈없이 토론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자주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주신 용담수도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두서없는 글을 올리게 되어 많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이 또한 한울님의 은덕으로 여기며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나가는 천도교인으로 남겠습니다. 동덕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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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삼천포교구 선우당 김명숙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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