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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20일

기사입력 2025.10.20 18:49 조회수 7,736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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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정]청산리전적지.jpg
    중국 길림성 화룡현 일대에 세워진 청산리 항일전적지 표석과 참배객들. 1920년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이끈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대첩의 현장이다.

     

    ○ 1920년, 청산리대첩, 독립군 대승

    1920년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간도 지역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청산리대첩은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였다. 김좌진, 서일, 이범석, 홍범도 등이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 정규군 수만 명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 1,200여 명이 전사하고 3,000여 명이 부상당한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150명 남짓에 불과했다. 청산리대첩은 무장독립운동의 사기를 드높였을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식민지 민족이 제국주의 군대를 상대로 이룬 보기 드문 승리로 평가된다.

     

    ○ 1936년,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 준비그룹 조직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룬 경성트로이카가 해체된 뒤, 그 정신을 이어받은 이재유 중심의 인물들이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였다. 경성준비그룹은 정식 당 조직에 앞서 노동자와 농민의 의식을 고양하고, 계급 해방을 위한 대중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예비 조직이었다. 이들은 일제의 경제 수탈로 인한 경기침체와 사회 불평등에 맞서며, 일본 내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서도 사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경성콤그룹으로 이어지는 조직적 계보를 형성하며, 훗날 박헌영 등 해방 이후 좌익 세력 형성에도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 1950년, 6·25 전쟁 발발 4개월 만에 대한민국 국군 평양 수복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북진을 개시한 결과, 1950년 10월 19일 평양이 탈환되었다. 다음 날인 10월 20일, 대한민국 국군은 평양 시내에 입성하여 태극기를 게양했다. 불과 4개월 전 북한군에 의해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던 상황을 뒤집은 상징적 사건이었으나, 곧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급변하게 된다.

     

    [은정]난민캠프어린이.jpg
    전쟁과 가난으로 고향을 잃은 난민촌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 유엔이 1959년 세계아동인권선언을 채택한 뜻처럼, 모든 어린이가 인종과 국적, 출신을 넘어 존엄과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 1959년, 유엔총회, 세계아동인권선언 채택

    제14차 유엔총회에서 ‘세계아동인권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the Child)’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선언은 “모든 아동은 어떠한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후 1989년 ‘유엔아동권리협약’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전 세계 아동 보호와 복지의 기본이 되는 국제 규범의 출발점이 되었다.

     

    [은정]안나푸르나.jpg
    해발 8,000m급 설산들이 장엄하게 솟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2011년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던 중 실종된 현장으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의 상징이자 ‘영원한 산’으로 남았다. 

     

    ○ 2011년, 산악인 박영석,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에베레스트-로체-로체샤르 3연봉 등정 등으로 명성을 얻은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2011년 10월 20일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 중 실종되었다. 그는 동료 강기석, 신동민과 함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던 중 악천후로 연락이 두절됐다.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영원한 산의 사람’으로 남았다. 그의 도전정신은 지금도 한국 산악계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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