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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각 49일 특별기도’를 중심으로 본 천도교의 3·1운동 준비과정(2)

기사입력 2025.08.28 18:34 조회수 7,520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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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지난 호에 이어)

     

     

    이상으로 대표적인 지역 일부의 사례를 통해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가한 인물들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이들은 각 해당 지역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군중, 나아가 기독교 등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이들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19년 3월 1일부터 전개된 3·1운동은 이해 6월까지 전국적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사례는 <표 2>와 같다. 

     

    표2.png

     

    <표 2>에 의하면, 천도교인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사례는 136개 교구에 이른다. 그런데 이들 만세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지역 교구에서 전달받았으며, 이를 관내 지역 교구에 다시 배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주대교구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주교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로, 비교적 일찍 전달되었다. 그렇다면 전주에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전주를 포함한 호남지역은 인종익이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인종익은 신문조서에서 호남지역 독립선언서 전달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월 28일 오전 7시경 보성사의 출판계장 이종일이 나에게 손병희 이하 33명의 조선민족을 대표한 독립선언서를 전주와 청주의 2개소에 가지고 가라고 말하고 (『인종익 및 신문조서』(1919년 3월 11일))



    2월 28일 오전 11시 남대문발 남행 혼합열차를 타고 대전에 이르러 그곳에서 호남선 연결상의 형편으로 1박하였으며, 다음 3월 1일 오전 6시 대전발 호남선 제1번 차에 탑승하여 이리에 이르러, 오전 11시 그 역에서 전주행 경편철도를 갈아타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였으며 (『인종익 신문조서(제1회)』(1919년 3월 4일))



    인종익은 2월 28일 오전 7시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전주교구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립선언서 2천 매를 받은 인종익은 오전 11시 남대문을 출발하여 대전에서 하루를 묵은 후 3월 1일 새벽 6시 호남선을 열차를 타고 이리에서 오전 11시 경편철도를 이용하여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였다. 

    인종익은 전주 도착 즉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기 위해 전주역 앞 고사정(현 고사동)에 있는 천도교 전주대교구 인종익의 신문조서에 의하면, 천도교 전주교구는 당시 전주역으로부터 전주읍 입구에 있다고 진술하였다.

    로 갔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교구장 김봉년(2회 참가)이 자리를 비움에 따라 금융원 김진옥에게 독립선언서 1천 8백 매 인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진옥은 2천 매가 아닌 3천 매였다고 하였다.(『김진옥 신문조서』) 

    를 전달하였다.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김진옥은 신문조서에서 2월 27일 오후 3시경에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인종익은 독립선언서를 3월 2일까지 배포하고 3월 3일까지는 골고루 보급하라고 전달하였다. 『인종익 및 신문조서』(1919년 3월 11일); 『인종익 신문조서(제2회)』(1919년 3월 6일)

     


    인종익이 손병희 외 32명 연명의 조선독립선언서 약 3천 매를 가지고 와서 3월 2일 밤까지 전주교구 관할 하 각 교구에 나누어 보내 3월 2일 밤에 사람 통행이 많은 거리에 살포하라고 하므로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전주대교구는 대교구 관할 구역인 임실을 비롯하여 진안, 장수, 김제, 고산 등지의 천도교 교구에 전달하였다. 교구장 김봉년은 인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기로 하였지만, 고종 국장 참가와 서울에서 전개되는 만세시위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 출타 중이었다. 이에 앞서 김봉년은 부득이 자리를 비웠지만 구창근(1차 참가), 김진옥과 독립선언서 배포와 관련한 사전 협의하였고, (「인종익 심문조서(제2회)」(1919년 3월 6일))

     김진옥은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관할 교구에 다시 배포하였다. 

    김진옥은 독립선언서 2백 매를 휴대하고 천도교 임실교구로 가서 교구장 한영태에게 전달하고, 3월 2일 밤중에 배포하라고 인종익의 지시 사항을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측에도 전달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 삼일운동사 하편』,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494쪽.)

       

    전주대교구가 관할하고 있는 각 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후 전주교구는 전주 시내와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받았던 김진옥은 민영진, 조성덕, 김성문, 김영홍 등에게 3월 2일 밤중까지는 배포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진옥 신문조서』(1919년 7월 2일).)

     전주교구는 시내뿐만 아니라 상관면, 소양면 등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계획을 세우고 지역별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민영진은 3월 2일 12시 서호순에게 독립선언서 4매를 주고 상관면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서호순은 진영섭에게 1매를 전달하고 구장 이경운, 최년태, 박인숙의 문가에 살포하였다. 『서호순 판결문』. 판결문 중 제2회 신문조서에는 “상관면 신리주재소 부근에 산포하였다”고 진술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서호순은 4매보다 많은 독립선언서를 받았다고 불 수 있다.

     민영진으로부터 9매의 독립선언서를 받은 김태경은 우선 3월 2일 저녁 7시 유원에게 4매를 교부하였고, 나머지 5매는 김태경이 한광진, 정문명, 채춘만, 유선일 등에게 배포하고 “다수 공동으로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선동하였다. (『김태경 판결문』.)

     유원은 소양면 신교리의 이달수, 유명선, 양영화, 그리고 용진면 공덕리 이완옥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유원 판결문』.)

     유선태 역시 민영진으로부터 독립선언서 5매를 받아 시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배포하였다. (『유선태 판결문』.)

     

    이상에서 살펴본 천도교 전주교구에 전달된 독립선언서의 전주지역 배포 상황을 정리하면 하면 다음 <표 3>과 같다.

     

    표3.png

     

    이처럼 독립선언서가 전주대교구에 전달되자, 전주대교구는 관할하는 관내 교구에 이를 전달하는 한편 전주 시내와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한편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3월 2일 늦은 밤을 이용하여 전주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일제 측에서 수집한 정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3월 3 일 오전 시중에서 독립선언서 1매를 발견하고 수사 중” (김정명,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原書房, 1967, 316쪽.)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지방의 3·1운동을 확산하는 데 있어서 우이동 봉황각 특별기도 참여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이동 봉황각과 3․1운동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이동 봉황각의 건립은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천도교와 함께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의암 손병희는 삼각산의 정기가 살아있는 우이동 일대를 매입한 것은 ‘종교적 감화’를 위한 수련 도장을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장차 민족의 동량을 양성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둘째, 우이동 봉황각은 천도교의 민족운동 지도자를 양성한 특별교육장이었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 강점 이후 독립이라는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종교적 수련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면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지방의 중요 교역자를 불러 49일 특별기도를 통해 민족의식을 강화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의암 손병희는 ‘이신환성’의 법설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셋째,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인물들이 지방의 3·1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일곱 차례에 걸쳐 특별수련에 483명이 참여한 이들은 3·1운동의 민족대표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는 비록 3·1운동 이전에 실시되었지만, 참여자들은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교구’라는 조직을 충실하게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이동 봉황각 49일 기도 중 의암 손병희의 ‘이신환성’이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끝>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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