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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임 천도교대전교구 교구장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신청
박노임 천도교대전교구 교구장은 지난 달 정읍에서 개최된 동학농민혁명 131주년 기념식에서 증조부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동학농민군이었던 박영진(朴永鎭, 1855~1928) 선생의 명부를 발견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등록 신청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명부 확인과 함께 선생의 초상화가 확인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이 초상화는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유명한 채용신(蔡龍臣) 화백의 작품으로, 동학농민군 인물의 모습을 정식으로 그린 유일한 초상화로 평가된다.
박영진 선생은 1919년 3월 2일, 전라북도 여산에서 정대원(丁大元, 1862~1929) 선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을 전개한 주역들로 기록되며, 특히 익산은 호남 최초로 만세운동이 시작된 지역이다.
당시 박영진 선생은 천도교 황화면 교구장으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이에 앞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공주 우금치 전투에 정대원 선생과 함께 참전한 기록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남아 있다. 선생의 출생연도에 대해 『디지털익산문화대전』에는 1882년으로 되어 있으나, 1919년 재판 판결문에는 당시 64세, 즉 1855년생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어, 동학농민군 활동 역시 사실로 확인된다.
또한 천도교인명사전에 따르면 박영진 선생은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여산 집강소에서 활동했고, 이후 천도교의 교직을 차례로 거쳐 여산·익산 교구장, 전제원, 강도원 등을 역임하며 일생을 민족종교와 독립운동에 바쳤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천도교와 기독교 간의 연대를 이끌어 여산과 황하면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체포되어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은 뒤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에도 교구 봉훈, 포덕원 운영 등 천도교 재건에 힘쓰다 1928년 11월 25일, 73세의 나이로 환원하였다. 1992년에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이번 명부의 발견은 후손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박영진 선생의 증손자인 박노임 대전교구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정읍에서 열린 동학혁명 131주년 기념식에서 우연히 받은 팸플릿을 넘기다 증조부의 성함을 발견했고, 며칠 동안 그 이름이 잊히지 않아 기념재단에 문의했더니 바로 증조부님이셨습니다. 검색을 통해 초상화까지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러웠습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박 교구장은 “그 초상화는 당시 황소 한 마리 값이었다고 합니다. 명망 높은 채용신 화백에게 초상을 의뢰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독립운동으로 집안 재산을 모두 바친 뒤 감옥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가족들이 전해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초상화와 함께 증조부님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나오는 일이 감동이고 자랑입니다”라고 전했다.
박영진 선생의 초상화는 한 인물의 얼굴을 넘어, 동학과 천도교, 독립운동을 잇는 민족사의 연결 고리로서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채용신의 작품 중에서도 동학농민군 출신 인물을 그린 유일한 사례로, 향후 동학과 항일운동사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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