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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기 천도교와 3.1혁명-근대를 관통한 천도교의 ‘독립정신’(2)

기사입력 2025.05.22 15:57 조회수 38,900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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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지난 호에 이어)

     

     2) 동학농민혁명이 표방한 근대적 평등사상


        1864년 최제우가 처형된 후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었다.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에 의해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더욱 진보하였고, 교세는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더욱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사인여천은 말 그대로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고 존중하라는 의미로 시천주 사상보다 더욱 구체적, 적극적으로 인간의 평등을 강조한 사상이다. 종교적 성격이 강한 동학의 평등관이 보다 근대적이고 세속적 의미의 평등관으로 진보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사인여천의 평등관을 공유한 동학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었다. 

        동학사상의 근대적 성격은 전주화약에서 제기되었던 ‘폐정개혁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군이 천명한 폐정개혁안의 조목들이다.


    1. 전운소(轉運所)를 폐지할 것

    2. 국결(國結)을 하지 말 것  

    3. 보부상들의 작폐를 금할 것

    4. 도내 환전은 옛 감사가 거두어갔으니 다시 징수하지 말 것

    5. 대동미 상납 전에 각 포구 잠상의 미곡무역을 금할 것

    6. 동포전은 각 집마다 봄, 가을 2냥씩으로 정할 것

    7. 탐관오리들을 파면, 축출할 것

    8. 임금을 둘러싸고 관직을 팔아 국권을 조롱하는 자들을 모두 내쫓을 것

    9. 관장이 된 자는 해당 경내에 입장(入葬)할 수 없으며, .또한 논을 거래하지 말 것

    10. 전세는 전례에 따를 것

    11. 연호(烟戶)의 잡역을 줄일 것

    12. 포구의 어염세를 혁파할 것

    13. 보세(洑稅)와 관답(官畓)은 시행하지 말 것

    14. 각 고을에 원이 내려와 백성의 산지에 늑표(勒標)하고 윤장(倫葬)하지 말 것

    15. 균전어사를 혁파할 것

    16. 각 읍 시정 물건들에 대한 분전수세(分錢收稅)와 도가명색(都賈名色)을 모두 혁파할 것

    17. 백지 징세와 사전 진결을 거두지 말 것

    18. 대원군을 국정에 간여토록 하여 민심이 바라는 대로 할 것

    19. 진결(賑結 )을 혁파할 것

    20. 전보국이 민간에 대한 피해가 크니 혁파할 것

    21. 각 읍 관아에서 필요한 물건은 시가대로 사서 쓸 것

    22. 각 읍 아전을 임명할 때 돈을 받고 하지 말고 쓸만한 사람을 택하여 쓸 것

    23. 각 읍 이속들이 천금을 축냈으면 그 자만 처형하고 친족에게 징수하지 말 것

    24. 묵은 사채를 관장을 끼고 억지로 거두는 일을 금할 것

    25. 동학교도를 무고히 살육하지 말며 동학과 관련하여 가둔 이를 모두 신원할 것

    26. 京營邸吏料米는 과거의 예에 따라 삭감할 것

    27. 포구에서 장사하는 각국 상인들의 동성 시장 출입을 금하고 아무 곳에서나 마음대로 행상하지 못하게 할 것  

    (1-14조는 「전봉준판결선고서원본」(『동학관련 판결문집』,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1994), 15-27조는 정창열의 「갑오농민전쟁 연구」(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1, 170-171쪽) 참조. 25-27조는 정창열이 다른 폐정개혁안들을 분석하여 추가한 것임. )


        이들 조항은 세제나 탐관오리의 횡포에 대한 개혁을 주된 내용으로 하며, 심지어 국정의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조항에는 보국안민, 축멸양왜 등 농민군이 봉기하면서 내세운 핵심 가치가 온전히 반영되지 않았다. 주로 ‘안민’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확인될 뿐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봉기하였던 2차 봉기의 성격 및 구호가 반영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조항은 정부군과 교전하여 전주화약을 맺을 당시 농민군 지도부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차 봉기 시에는 갑오개혁의 영향과 반일, 반외세에 대한 내용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어야만 한다.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였으므로 이들 폐정개혁안은 농민군의 봉기과정을 따라 점차 완성적인 모양을 갖추어 갔을 것이다. 2차 봉기를 앞둔 상황, 즉 갑오개혁의 영향을 받고, 일제의 침략에 분노하던 시기 동학 집강소의 ‘폐정개혁안’에는 당연히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나 근대적 개혁의 요소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으로 볼 때 오지영의 『동학사』 (오지영, 『동학사』, 민학사, 1975.)에서 기록된 폐정개혁안 12개조는 반외세와 갑오개혁의 내용이 대폭 반영되어 있으므로 2차 봉기 당시 개정된 폐정개혁안일 가능성이 있다. 이 폐정개혁안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인물이 직접 기록한 것이므로 충분히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조항에는 2차 봉기에서 목적으로 천명한 척왜에 대한 태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고, 갑오개혁의 영향을 받은 듯한 신분 개혁 등의 조항도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동학사』의 폐정개혁안 12개조의 내용이다.  


    1. 도인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배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칠반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와 간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등이다. 

    (이 12개 조의 폐정개혁안은 오지영이 『동학사』에서 가공적으로 만들어 내 신뢰할 수 없다는 일부 주장이 있으나, 대체로 폐정개혁안 자체는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12개 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된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가 집약,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영섭(「『(역사소설) 동학사』의 12개조 폐정개혁안 문제」, 『시대정신』 68, 2015, 136-147쪽), 박종근(「갑오농민전쟁(동학란)에 있어서의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 『역사논평』 1962년 4월호(일본)), 한우근(「동학군의 폐정개혁안검토」(『역사학보』 23, 역사학히, 1964, 55-69쪽) 등이 사료성을 부정하는 연구를 발표하였지만, 12개 조항에는 보국안민, 반외세라는 이들의 봉기 목적에 그대로 부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가 충분하게 반영되지 못하였다.)


        앞서 살펴본 27개조 보다 상당히 정돈이 되었고, 일제에 대한 태도와 갑오개혁의 내용이 일부 반영된 점으로 보아 여러 폐정개혁안 중에서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평등을 일관되게 표방하였던 동학의 핵심사상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이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들 폐정개혁안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혁명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가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혁파하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구현하는 근대적 가치의 사회였음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동학혁명은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건의 하나로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과 평등관이 근대적 형식을 갖추고 근대성을 확보하는 결적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의 전통사상 속에는 이미 근대의 핵심 가치인 평등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였고, 수운 최제우는 전통사상 속에서 이러한 평등의 가치를 추출하여 주창함으로써 한국이 가야 할 근대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동학의 평등사상이 전국의 민중들에게 급속하게 전파되는 통로가 되었고, 이러한 평등사상의 전파는 유교적 봉건사회의 낡은 신분질서를 급속하게 해체하고 근대민족으로서 한민족의 출현을 촉진하는 교량 혹은 징검다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한국사회의 근대적 성격은 더욱 심화되었고, 동학혁명이 제시한 근대적 개혁의ㅣ 의제는 이후의 2, 3차 갑오개혁이나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 반영되면서 한국적 근대를 전망하고, 견인하는 핵심 기준과 요소들로 작용하였다.

     

    (계속)

     

    글, 장우순(성균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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