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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기 천도교와 3.1혁명-근대를 관통한 천도교의 ‘독립정신’(1)
기사입력 2025.05.13 09:47 조회수 37,007 댓글수 0
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1. 문제의 제기
한국 근대의 시작점을 무엇으로, 혹은 어느 시기로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제다. 근대를 어떤 기준으로 이해하는지에 따라 당시 한국사회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게 인식될 수밖에 없고, 인과적 결과물인 오늘날의 사회적 성격 역시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구자에 따라 근대라는 사회의 질적 변화를 내부의 주체적 동력이나 주관적 요소에서 찾을 수도 있고, 서구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나 정치제도 등 타율적으로 강제되거나 이식된 외부적 요소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본고는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는 주체적인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으면 한국의 근대와 그 성격을 올바르게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한국의 근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한국의 근대, 한국적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서구에 대한 내적 대응이 사상적으로 정리되고, 운동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1860년대에 주목해야만 한다.
기존의 주류사학이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은 개항과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지만,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외부의 기계적 작용과 계기만을 주목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근대를 설명하는 것으로 한국의 근대는 절대 설명될 수 없다. 반드시 내재적이고 주체적인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하고, 그 변화가 내부를 질적으로 바꾸는 질적인 변화라는 것이 명징하게 설명되어야만 홖도한 근대의 시작점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한국의 연구자 다수가 1876년에 주목한 것은 서구사회를 모델로 제시한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론’을 교조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동양 및 한국사회에 적용한 결과다. 단지 일본과 체결한 조약 하나가 한국사회 내부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인식은 역사적 사실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교조적 인식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강화도조약’ 때문에 조선에 갑자기 서구의 자본주의가 들어오지 않았고, 조선의 신분질서가 무너지지 않았으며, 정치, 사회제도 등의 급격한 변화가 찾아오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엇보다 ‘강화도조약’ 자체가 조선 민중의 의식이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구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세계질서는 1876년 개항 이전에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을 통해 이미 1860년대에 조선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고, 이 충격파는 중국이 이미 서구의 식민지로 몰락해가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공포와 함께 배가되었다. 한국사회 내부는 이 충격파로 인해 근본적인 성격의 변화, 즉 변증법이 설명하는 사회의 질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본고는 이 질적 변화를 따라 한국의 근대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특히, 지나치게 과소평가된 동학의 근대적 의미와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사회 근대 초기의 궤적을 쫓아가 보고자 한다. 동학이 주도한 이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동학의 자주·평등사상의 전파로 한국의 근대가 시작되었고, 이 자주·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한반도 최초의 근대 혁명인 동학혁명이 폭발하여 조선 민중의 의식을 근대로 견인하였으며, 이 근대의 흐름이 대동단결과 평등·평화라는 한국적 근대의 가치를 표방하며 근대민족으로서 한민족이 탄생한 3.1혁명으로 귀결되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동학이 주도한 한국적 근대의 여정
1) 한국적 근대의 태동-동학의 창시
1860년대 조선은 본격적인 충돌의 방식으로 서구와 대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사회가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서구 열강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정해진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단지 시기가 문제였을 뿐이다. 조선의 성리학적 신분질서와 정치제도, 특히 60여 년 지속된 세도정치는 조선의 근간인 농민들의 삶을 근본까지 파괴하고 있었고, 기득권에 집착하던 집권세력과 양반, 유생들은 성릭학적 질서를 유지하자는 위정척사론의 선동에 경도되어 혁명적 내적 변화와 개혁에 쓰여야 할 귀중하고 긴박한 시간을 허송세월로 낭비하고 있었다.
1860년대 서구의 충격파에 대한 조선사회의 내적 대응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양반, 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위정척사론의 논의와 그것을 실천하는 사회적 운동으로서 위정척사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평등을 지향하는 종교 사상이자 혁명 사상인 동학이 창시되어 민중들에게 급속히 전파되면서 한국사회에 강력한 파장을 미치기 시작하였고, 점차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위정척사론은 풍양조씨 일가가 서구세력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공격함으로써 집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활용한 정치적 전술이었다. 집권세력이 된 풍양조씨 가문의 선동에 호응한 유생들은 이미 1930년대부터 위정척사사상에 강하게 경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노사학파’를 이끌며 위정척사 논의를 주도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1839년에 두 편의 시를 통해 서구를 배척하고 춘추대의를 밝혀야 한다고 노래하였다. (「乙亥冬以洋胡邪說肆行 命致祭儒賢諸院 金平澤在晉執事華陽斐然有述 遙步原韻二首」.)
기정진은 서구의 문물과 종교는 성리학자가 지켜야 할 춘추대의를 훼손하는 사악한 것으로 마땅히 파괴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성리학적 가치는 세상의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가치였고, 조선 사회 유생 대다수가 이러한 가치관에 경도되어 있었다.
기정진은 천주교뿐 아니라 불교와 노장사상 역시 이단으로 배척하였다는 점에서 단지 서구나 외세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배척하는 유교 원리주의자이자, 중화적 가치에 함몰된 광신도였다. 조선의 성리학이 ‘존화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정척사사상이 자주적이거나 반 외세을 표방한 사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위정척사사상은 단지 집권세력인 풍양조씨나 대원군 등이 유생들과 함께 부당한 권력과 성리학적 신분질서가 가져다주는 이익을 나누기 위해 결합한 이익공동체였을 뿐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첫째, 외부적으로 서구열강의 침략을 막아내고, 둘째, 내부적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혁파하고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천지가 개벽할만한 개혁을 수행해야만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일어난 일본의 메이지쿠데타 * 이 사건을 ‘메이지 유신’으로 부르는 것은 옳은 관점이라 할 수 없다. 초슈와 사쓰만의 하급무사들에 의해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일왕이던 고메이(孝明)은 근왕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들 하급무사들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에도 막부를 무력으로 전복시켰으므로 쿠데타로 보는 것이 정확한 관점이다. 이들 하급 무사들은 집권 이후에도 군벌로서 세력을 유지하였고, 이 세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장우순의 「근대국가 일본의 형성과정과 그 구조 - 전통에서 소환한 근대 -」(『동아시아고대학』 53, 동아시아고대학회, 2019.)를 참조). 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가 내부의 혁명적 변화 없이 서구에 맞설 역량을 키운다는 것 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혁명적 개혁 없이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지 못할 것이고,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한다면 식민지로 전락하여 혁명적 개혁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두 과제는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과제이면서 상호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는 거대한 하나의 전략적 과제였다. 위정척사사상 역시 이러한 과제에 대한 조선사회 내부의 대응이었다. 위정척사사상을 기반으로 한 위정척사운동은 1866년 기정진이 ‘병인소’를 올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기정진은 이 시기 지속적으로 관직을 제수받으며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유림을 회유하고 대원군의 정책을 지원할 것을 요구받았다.
병인양요를 경과하면서 ‘병인소’는 당시의 많은 유생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화서학파 *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의 유생들을 일컫는다.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 역시 화서학파의 문인이었다. 의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당시 유생들의 위정척사은 서양을 과소평가하였을 뿐 아니라 서양의 영향으로 급변하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현실 역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협소한 시각이었지만,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 아래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이 보여줄 수 있는 당연한 인식으로 신분질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척왜양이(斥倭攘夷)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역량이 필요했지만, 조선의 역사가 줄곧 그러했듯이 유생들은 중국마저 저버린 중화의 가치에 목숨을 건 채 입으로만 어양(禦洋)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양을 위해서는 민력과 국력을 급속하게 신장시키는 혁명적 개혁이 필요했다. 일본을 능가하는 혁명적인 개혁을 통해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할 책무가 있었던 조선의 여론 선도층 유생이 개혁에 앞장서기보다 개혁을 저지하고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위정척사론을 주창한 것은 나라와 민중을 멸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중대한 시대적 착오였다.
위정척사운동은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1873년 이후 사실상 지속될 동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유생들에게 위정척사사상은 매우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미쳤고, 유생들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대응하여 일으킨 을미의병, 을사조약, 정미7조약에 대응하여 일으킨 1905년의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 등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의병의 활동과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을미의병(전기의병)→을사의병(중기의병)→정미의병(후기의병)으로 변모하면서 초기에 매우 강력하게 표방되었던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지키기 위한 ‘기득권 수호’라는 집단이기적인 성격이 점차 옅어지고, 점차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성격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이 ‘보국안민’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일제에 결사 항전하였던 정신으로부터 일부나마 영향을 받은 결과로 실제로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에는 평민 출신의 의병장들이 활동하였고, 의병조직에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던 농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860년 서구의 침략에 대해 양반, 유생들이 위정척사사상에 근거하여 운동을 전개하였다면, 평민들 사이에서는 천지개벽에 가까운 혁명적 사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시천주(侍天主)사상’과 한울님을 경배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종교사상이었지만, 그 자체로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를 거부하는 혁명적, 사회적 사상이었고,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여 ‘보국안민’을 우선한 실천적 구국 사상이기도 하였다. 시천주(侍天主)는 모든 사람이 그 내부에 이미 천주를 모시고 있음을 천명한 사상으로 이후 2대 교주인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한국적 근대의 전략적 가치인 평등 평화의 이념으로 정착하였고, 최종적으로 3.1혁명을 통해 한민족의 근대적 가치와 전망인 ‘독립정신’으로 체계화되었다.
시천주 사상이 근대적 평등을 지향한 혁명사상이라는 사실은 조선의 전통사상인 유교와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理)와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인 기(氣)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학문적 정진을 통해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해야만 했고, 때문에 학업을 업으로 삼은 양반, 유생 외에는 이러한 이기론에 접근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유교가 출세와 권력이 보장된 집단의 전유물인 이상 평민과 천민, 여성들은 절대로 평등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었고, 차별과 불평등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마디로 유교와 성리학은 반상, 남녀, 노소의 차별을 근간으로 성립된 차별의 사상이자 학문이었던 것이다. 반면, 동학의 시천주 사상은 평민뿐 아니라 천민이나 여성들까지 누구라도 입교하여 수행하면 도인(道人)이 될 수 있었고. 이러한 수월성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민중들의 근대적 자각으로 매우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최제우는 「포덕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10년을 공부해서 道成道立 되게되면 속성이라 하지마는 무극한 이내 도는 3년 불성이면 그아니 헛말인가.……입도한 세상 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 아닌가.” * 신일철, 「최수운의 동학사상」, 『사상』 9, 사회과학원, 1991, 267쪽에서 재인용.
누구라도 입도한 후 3년 이내에 도를 이룰 수 있고,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양반들이 누려온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관점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선언과 진배없는 이러한 발언은 급속하게 민중들에게 확산, 수용되었고, 조정과 양반층에는 커다란 경각심과 위기의식을 조성하였다. 조정이 1860년에 창시하고 1861년부터 포교를 시작한 동학에 깜짝 놀라 1863년 최제우를 체포하고, 1864년에 처형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동학은 짧은 포교 시간에도 불구하고 매우 급속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확산은 동학이 당시 민중의 근대를 향한 요구와 이해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최제우는 ‘보국안민’을 시대적 방책으로 제시하였고, 선천시대가 가고 봉건적 신분질서로부터 해방된 모든 인간이 평등한 후천개벽의 호시절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동학이 조선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인간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개창하기 위해 창시된 혁명적 세계관을 가진 사상임을 천명한 것이다.
조선의 근대는 수운 최제우가 ‘시천주 사상’을 통해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고, 이러한 사상에 반응한 민중들에 의해 근대 의식으로서 평등의 이념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내적 변화는 서구의 근대와 그 결과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하는 혁명적이고, 질적인 수준의 변화였고, 이러한 질적 변화는 한국적 근대가 동학사상을 통해 이미 1860년대에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리학적 봉건질서의 수호 획책하며 역사의 퇴행을 기도한 수구적이며 반동적인 사장인 위정척사사상 역시 동학과 동학혁명의 영향, 그리고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을 통해 점차 한국적 근대의 가치 안으로 수렴될 수 있었다.
서구에서 자본의 이익과 승리를 위해 발명된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내부의 선언적 평등을 주장하며 성립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수미균평’의 전통적 평등개념이 이미 존재하였고, * “……又神誌祕詞曰如秤錘極器秤幹扶踈樑錘者五德地極器百牙岡朝降七十國賴德護神精首尾均平位興邦保太平…”, 「金謂磾傳條」, 『高麗史』 卷 一二二. 삼균주의를 정립하여 임시정부의 이념을 선도한 조소항은 그가 제창한 평등사상의 근원에 이러한 한민족 전통의 평등사상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평등사상은 서구에서 발명된 ‘민족’의 제한적이고 선언적인 평등개념을 초월하는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평등를 지향하였다. 최제우는 이러한 전통에서 추출한 근본적, 절대적 평등사상을 제창함으로써 한국적 근대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였고, 봉건질서를 뒤집는 후천개벽의 혁명사상으로 전파시켰다. 따라서 최제우는 한국적 근대의 창시자로, 최초로 한국적 ‘민족’의 개념을 제시한 사상가였다.
(계속)
글, 장우순(성균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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