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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의 이야기입니다. 가을의 향기가 그윽한 날, 뒷마당 한가운데에 자라나는 이름 모를 야생화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가을에 야생화라니, 생명의 신비로움에 감탄하면서 그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하얀색과 보라색이 조화를 이루어 꽃봉우리를 활짝 드러낸 자태는 필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한참을 야생화에 시선을 두며 곱디고운 형과 색과 미감에 젖어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순간, 마음의 한구석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아름다운 야생화를 필자의 시선이 잘 들어오는 화단에 옮기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된 것은 꽃이 예쁜 탓도 있었지만, 사람이 왕래하는 사잇길 가운데 턱 하니 자리하여 통행에 불편을 초래한 부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사람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 자라고 있다고 하더라도 꽃을 옮기는 것은 그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보아야 한다는 선행의 다짐을 하면서도 “뭐 어떠려고,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생각이 앞을 가립니다. 하지만, 이미 사심이 앞을 가린 탓에 그들이 느낄 비애감을 절감하면서도 감성이 이성을 앞질렀기에 신속하게 옮겨 심고 흙을 다듬으며 물을 주었습니다.
옮기고 심는 과정에서 마음에 갈등이 있어 손놀림이 그리 자유롭지 못하였지만, 어쨌든 주변을 정리하면서 화단에 옮기는 작업을 마무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안도도 잠시 정말 뜻하지 않은 일로 망연자실하고 말았습니다. 옮겨 심은 야생화는 당연히 살 것이라고 짐작을 하였지만, 옮겨 심은 후엔 잎을 축 늘어트린 후 금방 시들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흙도 똑같은 흙이고 위치만 바로 옆으로 옮겼을 뿐인데 뿌리 하나라도 손상됨이 없이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 이렇게 시들어지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던 야생화가 일순간 생명이 지고 마는 정말 아찔한 순간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애당초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유달리 자연 애찬을 기리며 그들의 생명력과 순환의 질서를 탐구하던 터라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 이게 참 무언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은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그 생생하던 야생화의 아름다움은 온대 간데없이 사라지고 축 늘어진 모습에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였습니다.
내가 한 생명을 지우고 말았다라는 자괴감이 앞을 가리어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은 생명 나름의 원소가 있고 마음이 있고 특유의 메커니즘인 지기(至氣)의 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의식과 무의식, 순수의식을 보장하는 생체의 고운 리듬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生으로 보면 최초 생명의 시원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씨앗의 대물림이 있었을 것이고 대지의 진동과 에너지와 해와 달 그리고 별의 순연한 은총을 받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가운데에서도 꽃이나 열매를 맺기 위한 기다림으로 희망의 근기를 펼치고도 있었을 것입니다. 계절 따라 바뀌는 기온과 습도, 이슬과 바람, 공기의 흐름에 유의하며 미생물과 교감하는 능력으로 생의 기쁨을 만끽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있는 그 자리에서 일체 생명과 교감하며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심전심의 해법으로 소통과 공존감도 익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태 감각을 필자의 무지로 망가트렸으니 그가 있던 곳에서 낯선 자리로 이동했을 때 느꼈을 막막함에 몸서리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조금 더 차분한 마음으로 꽃의 최초 씨앗이 발현되면서 전체가 융화하는 생명의 모체로서 길이 이어질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헤아려야 했습니다. 사람의 육감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더 숭고한 질서가 내포된 것을 욕망의 잣대로 가름한 것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한울의 작용은 이렇듯 섬세한 데 지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가 한시라도 빨리 소생하기를 기도하는 일 뿐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합니다.

글, 송암 박철(선구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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