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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6) "천도교인들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분견대로 돌진"

기사입력 2025.08.28 17:08 조회수 11,707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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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월 5일의 독립만세

      3월 5일 새벽 5시에 예정했던 대로 사방에서 군중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6시경에 이르자 약 5백여 명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8십리, 1백리 밖에서 밤새도록 걸어왔다. 모두들 지쳤으며 식사를 못했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그러나 준비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헌병대에 붙들려 갔으니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다. 상석리 소목다리는 작은 마을이므로 김치와 소주를 동원하여 식사를 대신할 수 있었다. 빈속에 아침술을 마신 관계로 다소 흥분하는 기분도 들었다. (곽훈의 증언) 

      이윽고 이영화 교구장의 큰 아들인 이학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하석리 구읍 헌병대가 있는 곳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달려갔다. 이 대목을 『3·1운동비사』와 『독립운동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1운동비사』 : “상오 5~6시경에 각 면, 각 리의 천도교인만이 수천명 양덕읍 부근에 집회하여 일변 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태산이 무너질 듯이 부르며 행진하였다.”

     『독립운동사』 : “재 밤중부터 사방 길목에 잠복하여 밤을 새우며 각처에서 모여드는 교인들과 일반 장꾼들을 모으니 그 수가 수천 명을 넘게 되었다. 이들 대중은 상석리 천도교구당 앞에서 이학근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헌병대 우편국 등이 있는 하석리 방면으로 시위행진을 개시했다.”

      교구가 있는 상석리 소목다리는 동양구읍에서 들어가자면 큰 다리를 둘이나 건너 산모롱이를 돌아 들어가야 한다. 읍내로 들어갈 때에는 장꾼들이 있었을 뿐 아무런 장애사항이 없었다. 시간은 오전 9시경이었다. 만세소리에 놀란 일본헌병과 한국인 헌병보조원들은 시위군중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밀려오는 기세에 눌려 후퇴하여 헌병대에 들어갔다. 노도와 같은 군중들은 헌병대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러자 저들은 발포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계속 전진했다. 순식간에 40여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이 살상되어 피바다가 되었다. 『독립운동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급보에 의하여 헌병대가 출동, 군중 측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군중은 헌병대의 방어벽을 헤치고 조수와 같이 밀려들자 저들은 마침내 군중에게 실탄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물러서지 않고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사람이 나가고 하여 사망자 20여 명, 중경상자 50여 명을 내었다.”

     『동아일보』가 펴낸 3·1운동 관계 주요사적에 의하면 “3월 5일에는 낫·도끼 등을 지닌 시위대가 일본군경 연합대와 충돌, 40명 이상의 살상 희생자를 내고 일본 측도 1명이 사살되었다”고 했다. 낫과 도끼 등을 지니고 습격했다는 헌병대의 보고는 자신들의 발포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위증 보고이고 일본 측 1명이 사살되었다는 것은 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시계마쯔란 자가 군중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날뛰다가 일본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을 말한다.

      일본 측 기록인 평남도장관(도지사)의 보고에 의하면 3월 8일에도 천도교인들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분견대로 돌진하는 시위운동이 있었다고 했다. 즉 “3월 8일 오전 11시경 근근 12명의 천도교도가 일단이 되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분견대로 향하여 돌진하여 왔으므로 경계 중인 헌병이 이를 저지하고 전부 분견대에 구속하여 일이 없었으나 촌락지방의 천도교도는 분견소 습격을 제거하려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독립운동사』에는 “3월 8일에 시위운동은 재연. 당일 상오 11시부터 천도교인 1백여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대 앞을 통과하다가 또 다시 10여명이 피검되었다”고 했다.


      맺음말

      3월 4일과 5일, 그리고 8일에 걸쳐 천도교인들은 구읍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4일의 경우는 준비 중에 있다가 예비 검속을 당했고 5일에는 수천 명(필자는 약 5백명 정도로 추산함)이 피를 흘리며 시위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8일에도 용감하게 소수 천도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다시 시위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참으로 용감하고 대담한 3·1만세운동이었다.

      산중에서 농사나 지어먹고 사는 천도교인들이 어디에서 그런 저력이 나타났을까. 이 3·1운동으로 인하여 순국한 사람은 모두 15명으로 밝혀졌다. 이학근·이승근·박만전·한봉조·조정각 등 5명과 기타 10명(실명)이다. 이학근과 이승근은 바로 이영화  교구장의 두 아들이다. 이들은 앞에 서서 총지휘하다가 맨 처음 총에 맞고 쓰러졌다. 특히 중상자도 많았으나 이름이 전해지지 못해 안타깝다. 그리고 피검자는 70여 명이었으나 그 중에서 핵심인물과 지식인을 뽑아 투옥하였다. 재판기록이 없어 몇명이 얼마동안 옥살이를 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3·1운동비사』에 의하면 “곽치현·김병술·이영화·최기창·조정화·윤인권·박응모” 등만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6·25 이후 월남한 천도교인이며 옥살이를 직접 하였던 윤인권이 증언한 것이다. 이들은 평양감옥에서 최고 1년 6개월, 최하 6개월간의 옥살이를 치렀다.

      일본 헌병은 3·1운동이 끝나자 곧 보복적으로 천도교구의 사무실을 불질렀다. ‘양덕군지’에 의하면 “종리원은 동양에 있었는데 3·1운동 때 일본 헌병대가 방화하여 복구를 못하고 있다가 군청이 이전함에 따라 1922년께 양덕읍에 대규모로 웅장하게 신축했다”고 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해 그 후 양덕군의 천도교 활동은 3년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중요간부가 학살당하거나 체포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헌병들의 탄압이 심하여 지하에서 활동하였다. 자경대를 조직하여 조직적으로 감시하여 탄압했던 것이다. 하루속히 순국자의 이름과 복역자의 이름, 그리고 중상자의 이름 석 자만이라도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7. 구성군교구의 3·1운동 


      머리말

      3·1운동과 같이 거족적인 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민족주의적인 의식화를 가능케 하는 이념체계와 전국 규모의 든든하고 훈련된 조직체와 활동에 필수적인 자금동원력이 갖추어져 있음으로써 천도교는 3·1운동을 성공시키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은 일제의 무단정치로 말미암아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훌륭한 재능과 능력을 가졌더라도 민중적인 조직을 갖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새로운 이념체계와 전국적인 민중조직과 자금동원력을 갖추고 있었던 천도교의 지도급 인사들의 활동은 그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일부 젊은 층에서 3.1운동사를 비판할 때 천도교의 이런 점은 도외시한 채 운동을 왜곡시키거나 호도하며 매도하는 일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우리로서 자성해야 할 점은 이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기준이 될 이론체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3·1운동이 이루어진 이후 오늘까지 70년이 넘도록 천도교도가 치룬 3·1운동에 대한 제대로 된 책자 하나 발간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대로 간다면 미래에는 3·1운동과 천도교는 무관한 운동이 되어버리고 불교나 기독교의 주동적 역할에 따라가거나 노동자·농민의 궐기에 추종한 천도교로 전락할지 모른다.

      필자는 작년에도 이 점을 안타깝게 여겨 지방에서 천도교도들이 얼마나 희생적으로 3·1운동을 전개했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몇 개 군 교구를 골라 기록으로 남긴 일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운동을 하였더라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면 후일 입증할 길이 없어진다. 말로 큰소리를 친다 해도 3·1운동을 경험한 세대는 거의 떠나갔으니 누가 우리들의 주장을 받아주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지방에서의 운동기록을 정리하는 것만이 선열들에 대한 보답이요 역사가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촉구하는 유일의 방법이다.

      금년에는 구성(龜城), 제암리(提岩理), 영산(靈山), 양덕(陽德)에서의 운동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성군의 천도교세

      평안북도에서 비교적 격렬히 3·1운동을 전개했던 곳은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약사』에 의할 때 정주·의주·철산·용천·영변·구성·선천 등지였다. 이중에서 사상자가 많은 곳은 정주였다. 구성군에서도 순국자가 21명이며 투옥되어 옥고를 치룬 분이 28명이나 된다. 이들 중 거의가 천도교인이었다는 점에서 구성군 3·1만세시위는 천도교가 주동이 되어 격렬하게 추진했음을 말해준다.

      어째서 천도교인들이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앞장섰을까. 죽음도 마다않고 나섰던 이념에는 천도교의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과 아울러 강한 교세와 훌륭한 지도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구성군에 동학이 최초로 전파된 것은 포덕 35년(1894) 경부터이다. 한 가닥은 정주(定州)쪽의 안처흠(安處欽)연원이었고, 한 가닥은 태천(泰川)쪽의 이정점(李貞漸)연원이었으며, 한 가닥은 구성 노동면 면덕동 태생인 문익현(文益賢)연원이었다. 이 세 가닥 연원이 구성군 각지에 동학을 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익현 어른은 포덕 35년에 일찍이 입도(정식 입도는 포덕 38년임)하여 처음엔 접주(接主)였으나 다음엔 수접주(首接主), 대접주(大接主), 그리고 의창대령(義昌大領)까지 역임했다. 의창대령이라면 1만호의 교인을 포덕 했을 때 수여되는 직책이다. 당시 구성을 중심으로 하여 태천·정주·곽산·선천·철산·의주·삭주·창성·벽동·강계·초산 등지까지 포덕이 이루어졌으므로 그 활동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구성에 교세가 급진적으로 확대된 것은 포덕 40년(1899)부터 42년(1901)까지 2~3년 사이였다. 그러나 포덕 45년(1904)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해 8월에 갑진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심한 탄압을 받아 교세는 역전하여 줄기 시작했다. 특히 을사년(1905)에 일본과의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한국군이 해산되면서 의병활동이 치열해졌을 때 이용구(李容九)의 일진회 매국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교도들이 같은 부류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포덕 51년(1910)에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倂呑)함에 따라 보국안민을 표방한 천도교에 대한 기대가 높아져 교세는 약간 회복되어 2천 5백호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구성군에서 교인이 가장 많았던 면은 노동면(蘆洞面), 서산면(西山面), 천마면(天摩面)이었고 다음으로 오봉면(五峯面), 구성면(龜城面), 방현면(方峴面), 관서면(館西面)이었다. 나머지는 이현면(梨峴面), 사기면(沙器面). 동산면(東山面)의 순이었다. 포덕 53년(1912) 6월에 군 교구가 중앙총부에 납부한 월성미액은 109원 16전이었다. 1호당 5전씩으로 평균해보면 2천2백호 정도이다. 1945년 해방 당시의 군내 총인구가 1만3천1백8십호였으므로 당시의 총인구를 1만호로 추사나더라도 약 4분의 1에 해당된다. 이러한 교세는 포덕 60년(1919)에는 약간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2천호 정도는 되었다고 본다. 평안북도에서 구성군의 교세는 의주와 정주 다음으로 꼽혔다. 숫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의식면에서도 매우 높았다. 문익현 어른이 포덕 54년 9월 23일에 75세로 세상을 떠난 다음 그 뒤를 이어 원치영(元致英)을 비롯하여 장석항(長錫恒), 이정점(홍기조 연원), 연원에서는 이종수(李種秀), 백응구(白應구), 정중록(全中錄), 전학수(全學秀), 김정삼(金鼎參)과 같은 쟁쟁한 후계자가 뒤를 이었다. 

      동학은 관의 지목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활동에 있어서 항상 고난이 뒤따랐다. 첫째의 시련은 포덕 41년(1900)의 경자교난이다. 중앙정부로부터 전국에 걸친 동학탄압이 이루어져 의·구·송(義龜松) 삼암 중 구암과 송암이 체포되어 구암은 무기징역, 송암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평안도에서는 저 유명한 영변의 강성택(姜聖擇) 도인이 영변부사 이도재(李道宰 : 1848~1909, 동학혁명이 일어난 후 전라감사가 되어 동학군을 많이 학살한 자임)에게 체포되어 순도하였다. 이 때 수천 도인이 체포되어 많은 순도자를 내었다. 구성에서도 문익현 어른을 비롯하여 이종수. 전중록. 백응구 등 그 외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무수한 형장(刑杖)을 맞고 풀려났다.

      그 후 갑진개혁운동(1904.8) 때도 매우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했다. 갑진개화운동은 8월 29일(음)에 개회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이 합세하여 해산시켰다. 이튿날인 9월 1일(음)에 구성읍 남문 밖에 다시 모여 단발을 하고 강연회도 열었다.『대한매일신보』 보도(1904. 10. 3)에 의하면 “…구성군에는 동학비도 6천여 명이라 하고...”라는 관찰사 이용관의 보고가 있었다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약 3천명 이상이 집회한 것이 틀림없다.

      이 사건을 심상치 않게 여긴 일본군은 전위대를 동원, 문중승(文仲承)·박병천(朴炳天)·최봉상(崔鳳祥)·이종덕(李鍾德)을 비롯한 10여명의 젊은 동학군들을 체포, 심한 고문을 가했다. 문중승은 어깨뼈가, 최봉상은 정강이 뼈가 부러져 3~4개월간 고통을 당했다. 또한 상투를 자른 많은 동학군들은 산간지역으로 피신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생활난이 겹쳐 고통은 이중삼중으로 심했다.

      동학이 들어오면서부터 구성의 동학교도들은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투철한 반제국주의. 반봉건적인 정신으로 더욱 무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구성군교구 지도자들은 포덕 46년(1905)에 접어들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문중승. 최신홍(崔信弘)·원치영(元致英)·전중신(全中信) 등 젊은 층이 주동이 되어 구성읍내에 유신학교(維新學校)를 여름에 설립하였다. 또한 교구나 전교실 등에 27개의 강습소를 설치하여 초등교육에 힘썼다. 특히 군 교구 강습소는 2년제로서 중등교육과정을 이수케 하여 김기전(小春 金起田)·전의찬(又石 全義贊)·김학서(金鶴瑞) 등 쟁쟁한 인사를 많이 배출하였다. 구성교구는 수적으로도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에서나 인물 면에서도 매우 뛰어났던 교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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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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