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천도교와 3 · 1운동(15) "교인들은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을 위한 모금에 참여했다"
기사입력 2025.08.21 14:30 조회수 7,708 댓글수 0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고주리의 학살사건
고주리의 보복만행은 4월 15일 제암리 집단학살 후에 자행되었다. 이날 오후 수비대는 조희창을 선두로 6명의 수비병과 함께 팔탄면 고주리로 향했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부락이다. 이때 고주리 주민 대부분은 제암리의 참변을 목격하고 거의 모두 산속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김흥열(전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 가족만은 ‘그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죄없는 사람들을 저희 마음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하는 생각에서 온 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안에 있었다.
조희창은 수비대들을 이끌고 김흥열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조희창은 수비대를 시켜 김흥열을 비롯한 김성열·김세열·김주업·김주나·김흥복 등 한 가족 6명을 방에서 끌어내어 포박을 지어 집 뒤 언덕으로 끌고 올라갔다. 이때 김성열 · 김세열 · 김주남 · 김흥복 등은 고문의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끌려갔다.
조희창은 칼을 뽑아들고 김흥열에게 백낙렬이 숨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으면 전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김흥열이 모른다고 하자 조희창은 이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동했으면서 모른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하면서 칼등으로 김흥열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김흥열은 “내가 안다 해도 네 놈에게 그 분이 계신 곳을 말할 수 없다. 조국과 민족을 파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네놈에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냐? 현상금 200원이 그리도 탐이 난단 말이냐! 삼괴지역과 발안 만세운동도 나와 이정근이 주동했다. 마음대로 하여라.” 하며 조희창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희창은 군도를 뽑아들고 사정없이 김흥열의 목을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수비대들이 일제히 군도를 휘둘러 차례차례 6인의 목을 치자 붉은 피를 뿜으며 목이 사방에서 펄펄 뛰었다.
그래도 모자랐던지 사방에 나딩구는 몸체에 난도질을 가해 여섯 토막을 냈다. 팔다리가 잘리어 사방에서 펄펄 뛰었고 언덕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수비대들은 6명의 시체를 걷어 모아놓고 짚가리의 짚을 날라다 쌓아 놓은 후 불을 질렀다. 당시 김주업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참살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때 김세열의 아들 김원기가 밖으로 뛰어나와 이 광경을 보고 “나만 살면 뭘 해, 같이 죽여라!”하며 수비대에게 덤벼들자 수비대들의 구둣발에 채여 울타리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김주업의 처 한씨는 이 집안이 유일한 혈손인 김원기를 끌어당겨 치마폭에 숨겨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한씨 부인은 너무나 잔인한 참살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그날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다가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하니 김흥열 일가는 한꺼번에 7명이 몰살되고 만 것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남양교구 관내의 3·1운동은 서울보다 한 달 정도 늦은 4월에 일어났으나 관내 전 교인과 주민들, 그리고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가장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화수리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인해 일본군에 의해 가장 잔학한 보복만행을 당했다.
특히 수촌리와 제암리·고주리의 집단학살은 가장 비참했다. 제암리와 고주리가 다른 마을보다 더 혹독하게 보복을 받게 된 것은 이 마을 주민들의 항일 의식이 다른 마을보다 더 높았던데 원인이 있다. 이 마을에는 거의 전부가 천도교인과 감리교 신자들이 살았다. 아시다시피 천도교는 보국안민을 표방, 당시 3·1운동의 주도적 핵심세력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내놓은 천도교개론 서문에 의하면 “일본은 천도교를 박멸하거나 조선을 내놓거나 그 어느 것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 하나만 보아도 당시 전국에서 성미실적 1등을 기록한 천도교 남양교구 산하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시각은 좋을 리가 없었다. 또한 천도교인과 함께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감리교 신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6. 양덕군교구의 3·1운동
머리말
양덕군은 평안남도 북동쪽 끝에 위치하여 함경남도 고원군·영흥군·문천군 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군 남동쪽으로는 황해도 곡산군과 접경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산간지대로 1907년 이후 의병활동이 유명했던 곳이다. 다행히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국도가 군 중앙을 통과하여 비교적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군민의 문화수준은 매우 높다. 특히 온천이 유명하여 외래 방문객도 많아 사상면에서도 다른 산간지역보다 훨씬 높다.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애국심이 강하고 민중들의 저항의식이 높음에 따라 어느 지역보다 민족의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로 말미암아 3·1독립운동도 격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은 일찍이 갑오동학혁명 후인 1895년부터 동학이 들어와 민중의식을 고취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진보회 운동을 통한 개혁운동이 있었고 뒤이어 의병운동을 거치면서 반제·반봉건적인 사상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격렬한 3·1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경무총감부와 헌병대사령관의 보고서(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인 ‘소요사건 경과 개람표’에 의하면 양덕군에서는 3월 5일 3백명이 3·1만세시위운동을 전개, 헌병대를 습격했으므로 일본군 16명이 출동하여 발포, 40명이 살상되었으며, 일본인도 1명 사망했다고 하였다. 양덕군민회가 펴낸 『양덕군지』에 의하면 사망자는 15명이었고 중경상자는 70여명이었으며 체포된 사람도 70여명이었으며 그 중 옥고를 치룬 분이 4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희생을 치룬 3·1운동 중의 하나였다.
이 운동은 누가 주도했으며 어떤 조직력이 동원되어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천도교도들이었으며 동학 이래 다져진 민중적인 조직력과 사상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양덕군의 천도교세
1938년 천도교의 총 교호 수는 8천 2백 5십 7호였다. 1919년 당시 양덕군의 천도교 호수는 약 7백호이다.
천도교가 양덕지방에 최초로 들어온 것은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포덕34년(1893)이었다. 당시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포덕 37년부터 점점 퍼지기 시작하여 하나의 연원을 갖게 되었다.
대구면(지금은 성천군이지만 그때는 양덕군이었음) 천동리에 있는 윤효순(1862년생)을 비롯하여 구룡면 봉계리의 손태룡(1873년생, 처음에는 유주(流呪)로 동학을 하다가 포덕 38년에 정식 입도함)은 포덕 34년 11월 23일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수덕리의 김성호는 포덕 38년에, 온천면 상신리의 이상화는 포덕 38년에, 상국리의 심성원(1870년생)은 포덕 36년에, 화촌면 평암리의 박봉상은 포덕 34년에, 상웅면 중리의 김기섭은 포덕 39년에, 같은 마을의 정추언도 포덕 39년에, 대륜면 통동리의 이양순은 포덕 39년에, 사기리의 손병서는 포덕 38년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손태룡은 김영석(어디 분인지 미상)어른으로부터 입도하였으며 그 후 김병술·박봉각과 같은 우수한 지도자에게 포교하여 많은 포덕을 내었다. 그리하여 양덕군에서는 유일한 대접주가 되었다. 당시 대접주가 되려면 적어도 천여호의 교호수를 가져야 한다.
포덕 69년(1828)에 작성된『손태룡 연원록』에 의하면 양덕군뿐만 아니라 강동·성천·곡산군까지 포덕하였음을 볼 수 있으므로 1천호는 넘었을 것이다,
양덕군 동학교단이 최초로 사회운동을 전개한 것은 포덕 55년(1904)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 8월 그믐을 기해 진보회 운동을 한 것이 시초다. 갑진개화운동이라 하는 진보회운동은 러일전쟁으로 우리나라는 그 승전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 확실해지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정부가 승자의 편에 들어 발언권을 얻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 정부를 개혁하여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진보회란 명칭을 내세운 것은 일반적으로 동학이라면 관의 탄압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를 피해보자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손태룡 대접주는 당시 의암손병희 성사의 지시에 따라 수백 명의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운동에 나섰다. 양력 9월 28일자 『대한매일신문』 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진보회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순천군수 이승주 씨의 내부로 한 보고를 보면 동학당 천여 명이 둔취하여 기에는 보국안민 넉자로 쓰고 회장은 문관일이라 하는데 경도회(京都會)의 지휘위를 기다린다 하며 맹산, 양덕, 등지의 각 인민 7~8백인이 보국안민한다 칭하고 소요 막심하므로 효유하여도 듣지 아니한다 하더라.”
또한 『황성신문』 11월 3일자에 보면 평남관찰사가 “근일 관하 각 군에 민중을 선동하여 칭하기를 진보회라고 읍읍 취회하기에 백방 효유하나 종불청종(終不聽從)하고 일익 회집하는데...” 라는 보고가 있었다.
양덕에서도 동학교도들이 몇 백 명씩 모여 진보회를 개최하고 머리(상투)를 자르며 검은 옷을 물들여 입는 일대 정치적 시위가 있었다. 『천도교창건사』에 의하면 양덕에서 집회하는데 그치지 않고 삼등으로 가서 여러 군의 동학교도와 더불어 일대 시위를 벌이는 한편 평양으로까지 진출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 개혁운동을 통해서 양덕의 동학 교세는 더울 늘어났다. 그러나 이용구 일파가 앞잡이가 되어 을사늑약을 지지하는 매국행위가 자행되자 크게 실망했다.
포덕 46년(1905) 12월 1일 일본에 망명 중이던 의암성사는 사태가 다급함을 알고 동학을 천도교라 선포하고 이듬해인 포덕 47년 2월에 서울 상다동에 천도교중앙총부 간판을 걸면서 일진회와 완전히 구별하게 되었다. 양덕군에서도 상부지시대로 재빨리 탈퇴하였다. 일진회의 이용구도 1907년에 이르자 정치단체가 해산되게 되자 12월 13일에 시천교라는 종교단체로 떨어져 나갔다. 이때 많은 교인들이 교단을 떠나 시천교로 갔다.
1907년 의병활동이 치열해지자 천도교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거나 일제의 동태를 살펴 알려주는 등 간접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천도교로 새 출발한 후 포덕 51년에 이르러 일본제국주의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하자 한때 교단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들어 교세는 포덕 52년 현재 5백호가 넘었다.
포덕사업과 교육사업
양덕군에 천도교 교구를 세운 것은 포덕 48년(1907)이었으며 초대 교구장은 김처성(金處聲, 대구면 신장리)이었다. 이 당시 포덕사업이 활발하여 포덕 51년 10월에 이영화와 오인규가 중앙총부로부터 ‘신포덕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전교사를 임명하였다.
포덕 52년 3월부터 손용호(하룡면 창리)가 새로 교구장이 되고 초대 교구장이었던 김처성은 공선원이란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6명의 전교사를 임명하는 한편 교세가 늘어나 이영화를 금융원으로 임명하였다. 포덕 53년에 접어들면서 전교실마다 초등교육을 위한 1년간의 강습소를 개설하여 교육에 열을 올렸다. 14개 강습소가 운영되었는데 제일 활발했던 곳은 제 262 강습소였다. 소장은 이병모였고, 소감은 최기훈·조정화가 맡았으며, 건물은 이명환이 제공, 희사했다. 졸업자 중에는 이학근·최두옥·이은조와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포덕 53년 1월에는 교구장에 지기철·전제원에 박종기를 선출했으며 포덕 54년 1월에는 교구장에 손태룡·공선원에 한충흡, 금융원에 이하경으로 바뀌고, 포덕 55년 1월에는 교구장에 한충흡·전제원에 손용점, 공선원에 이봉화, 금융원에 이하경으로 경질되었다.
포덕 55년 7월 1일에는 대교 구제가 창설되어 양덕군은 순천군과 성천군이 합쳐 하나의 대교구를 만들어 <성천대교구>라 부르게 되었다. 대교구장에는 성천교구장인 이돈하가 겸임하였다.
양덕교구장은 손태룡으로 바꾸고 전제원은 박만관이 잠시 맡았다가 8월 19일에는 교구장에 김택서가, 금융원에는 이봉화, 9월에는 공선원을 최정항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이해 10월에는 강도원과 전교사를 많이 임명하여 포덕교화에 힘썼다. 당시 교직자는 다음과 같다.
강도원: 이봉화·한충흡(2명)
전교사 : 손기현·조이균·이춘화·조경운·김홍화·신태성·최운화·양달화·조열화·유기화. 손권화·오경화·민석화·김용화·서윤화·김병술·우영화·이춘성·김윤실·손양모·이경근·민치선·한충빈·노병헌·김기운·박명두(26명)
포덕 57년 2월에는 손태룡을 다시 교구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전제원에 정명옥, 공선원에 신용주를 선출했다.
포덕 58년 2월에는 총부에서 육도사(나용환·오영창·홍기억·홍기조·나인협·임예환)를 순회케 하여 양덕군에는 나용환과 나인협 도사가 내려와 강연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한바 있다. 이 강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교인들에게 사기를 높여주었다. 이후 강연회의 필요성을 느끼어 양덕군 교구 내 순회교사를 더욱 늘리게 되었다. 즉, 김태섭·박윤겸·김태주 등 3명의 순회교사를 새로 임명, 강도회에 힘쓰게 하였다.
이듬해인 포덕 59년 6월에는 서기에 김병술을 임명하여 교구진영을 강화하였다. 포덕 59년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힘쓴 한해였다. 중앙대교당 신축성금 조성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게 되어 교구업무도 폭주했다. 양덕군 교구의 교당신축성금은 약 3백호가 각출에 참가, 2천원 정도를 마련하여 상납하였다. 이때 일반교인들은 이번 모금은 민족독립을 위한 것임을 알고 참여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5원 내지 10원씩을 각출했다고 한다.
포덕 60년이 되자 중앙에서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소원하는 49일기도를 봉행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에 걸쳐 각 면 전교실에서는 지방 핵심지도자들이 모여 특별기도를 봉행하였다. 이번 기도는 신앙적으로 어떤 중대사를 대비하여 다짐을 하는 기도였다. 1월에 교구임원을 개편하여 교구장에 이영화를 선출하였으며 공선원은 박명두, 전제원은 정명옥, 금융원은 이봉화, 서기는 김병술을 선출하였다. 이때의 교세는 약 8백호였다.
3·1운동의 전개과정
앞으로 전개될 독립운동에 대비하여 1912년 4월부터 실시한 봉황각 수련에 양덕교구에서도 4기에 손대용, 5기에 김봉섭, 6기에 박명두·한기원·김진선, 7기에 공달빈·신용주 등 7명이 참가했다.
이 지역의 3·1운동은 3월 5일에 이루어졌는데, 그 준비는 3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독립선언서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는 성천으로부터 보내졌다는 설과 평양에 교구장이 가서 직접 받아왔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병헌 편저 『3·1운동비사』에 의하면 “양덕군은 교통이 불편한 산간벽지인 관계로 당시 독립선언서가 양덕군 대구면에 거주하는 김병술 선생이 성천군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가지고 그때 천도교 교구장인 양덕군 온천면 이영화씨 댁에 3월 1일에야 도착하였다”고 했다. 또한 독립운동사편찬위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 제4장 제5절 양덕군란에는 “당시 천도교 양덕군 교구장이던 이영화는 온천면 상청리에 살고 있었는데, 1919년 2월 하순 평양에서 열린 대교구장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서울서 보내온 독립선언서 1백여 장을 받아가지고 3월 1일에 평양을 출발, 양덕군 대구면과 상룡면, 하룡면 등지에 들러 천도교 독신 교우들을 찾아 숙의했다”고 하였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볼 때 이병헌의 기록이 신빙성이 짙다. 왜냐하면 당시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배포되었으므로 회의를 통해 배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교구장회의는 지역별이나 도 별로 개최한 사실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당시 독립선언서는 김상열(선천)이 평안도를 책임지고 2천매를 할당받아 평양을 거쳐 선천으로 간 것은 사실이다. 김상열은 서울서 28일에 떠나 평양에 들렀다가 다음날 새벽 평양을 출발, 선천에 하오 1시에 도착했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가군으로 사람을 보내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는데 직접 보낼 인편이 없을 때에는 인근 교구로 보내 거기에서 다시 전달하도록 했다.
양덕군의 경우는 성천군교구로 보낸 독립선언서를 가장 가까운 대구면 광산리 김병술에게 보냈던 것이다. 깁병술은 다름 아닌 교구 서기를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병술은 곧 교구장이 살고 있던 온천면 상청리까지 가야 했으므로 빨라야 3월 2일 저녁에 도착했다고 보아야 한다. 독립선언서를 받은 이영화 교구장은 3월 3일 8십리 길을 달려가 양덕면 용계리에 있는 손태룡 어른을 찾아가 의논한 후 10여 명의 중진 교역자와 연락하여 협의한 결과 거사일을 3월 5일로 정하고 구읍인 동양 상석리 소목다리 교구실로 모이도록 했다. 한편 거사 방법과 전략을 짜기 위해 3월 4일 중진 간부들은 소목다리에 있는 교구에 모여 비밀회의를 진행하였고 여러 가지 인원 동원에 따르는 준비를 진행하였다. 태극기를 그린다든지, 식사 준비를 한다든지, 준비할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사전에 탐지되어 준비사업에 착수하기도 전에 헌병대가 출동하여 12시경에 10여 명을 예비 검속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검토하고 넘어갈 것은 거사일이 3월 4일이냐 아니면 3월 5일이냐 하는 점이다. 『3·1운동비사』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사『에는 분명 3월 4일 장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보고에 의하면 “양덕에서는 3월 5일과 6일 및 동 8일의 3일간 각기 당지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운동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록 중 어느 것을 취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조선총독부 보고가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현지 헌병대의 보고를 토대로 작성한 문헌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4일과 5일의 착각이 생겼는가. 증인들은 4일이라고 하며 그날이 장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양력 3월 5일은 바로 음력 2월 4일이며 장날이었다. 이 양력과 음력의 차이가 착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3월 4일은 장날이며 양력으로 치면 3월 5일이 된다. 따라서 양력으로 3월 5일에 거사한 것이 맞는 것 같다.
또한 『3·1운동비사』에는 “10여인은 3월 3일(4일)에 동군 천도교구실에서 회의하기로 하였는데 그날 12시경에 헌병대로부터 예비검속을 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다른 회의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므로 식사준비와 같은 사전준비를 하기 위해 모였던 것 같고 이를 의심스럽게 여겨 예비 검속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계속)
![]()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게시물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