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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4) "제암리(堤岩里)의 3·1운동... 만세시위의 봉화 올라"
기사입력 2025.08.14 10:38 조회수 4,914 댓글수 0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5. 제암리(堤岩里)의 3·1운동 <참고 : 성주현 자료>
머리말
포덕 60(1919)년 3월 1일의 만세시위는 천도교의 주도적 역할로 전개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3·1운동 당시 천도교인들은 땅, 소, 밭, 심지어 집까지 팔아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 독립운동과 투쟁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남양반도를 중심으로 한 남양교구의 3·1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암리(堤岩里)학살사건으로 더 알려진 남양교구의 3·1운동 역시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일으켰으며 화수리 주재소 습격에 대해 화수리를 비롯하여 수촌리·한각리·조암리·제암리·고주리 등 1백여 채의 가옥 방화, 20여명의 사망, 40여 명의 투옥, 5백여 명의 고문 등 일본군의 철저한 보복을 받았다. 이 가운데 수촌리의 보복상과 제암리·고주리의 집단학살은 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다. 더욱이 제암리 집단학살의 희생자 대부분이 아직도 기독교인으로 왜곡되거나 잘못 기록되어지고 있다.
남양반도의 천도교
남양반도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동학혁명 이전이었으나 어느 때부터 포덕이 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동학혁명 전에 수원을 중심으로 김내현(金乃鉉)·안성관(安聖寬) 두 동덕이 활동하였으며 이 지역에서도 이미 동학이 포교되어 고주리의 김흥렬(金興烈)을 중심으로 상당수가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지역의 동학군은 수촌리의 백낙렬(白樂烈)과 김흥렬(金興烈)의 인솔 하에 수원 김내현(金乃鉉)·고석주(高錫柱)접주 휘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우는 등 혁명에 참여했다. 포덕 46년 갑진개화운동 때에는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흑의단발, 폐정개혁 등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포덕 51년에 우영규가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포덕 53년 1월 김인태 교구장에 이어 조동술이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해 10월에 조동술 교구장에 이어 백낙온(白樂溫)이 교구장이 되었으며 포덕 55년 7월 한세교 교구장 때 수원 대교구에서 분립하였다. 3·1운동 전인 포덕 59년 4월 한세교 교구장에 이어 라천강이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3·1운동의 준비
포덕 53년 천도교 3세 교조 의암성사께서 우이동에 봉황각을 신축하고 3월부터 지방두목을 불러 49일간씩 7차에 걸쳐 연성강도를 시킬 때 남양교구에서도 이종석(1) 정도영(2) 한세교(2) 이규식(3) 이성구(3) 김정담(5) 이민도(6) 김흥열(7) 김창식(7) 등 9명이 우이동 연성강도회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준비를 갖추었다.
포덕 60년 서울에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전개하자 남양교구에서도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백낙렬·김성렬·안종후(기독교인) 등이 서울로 올라가 직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당시 순회교사인 백낙렬은 장안면 거북골(마정리)전교실, 기림골전교실, 장안리전교실, 덕다리전교실, 사기말전교실, 고온리전교실, 덕목리전교실의 교역자들을 만나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고 이에 동의를 얻은 다음 우정면 주곡리의 차희식, 팔탄면 고주리의 김흥렬과도 만나 상의를 했다.
한편 김흥렬은 제암리·고주리 전교사인 안종환·안정옥과 기독교인 안종후를 찾아가 만세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확인받은 후 가재리의 이정근(유학자)과도 상의를 했다.
이렇게 만세운동의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갈 무렵 백낙렬 순회교사는 중앙총부로부터 이병헌이 수원교구에 내려온다는 연락을 받고 김흥렬과 논의한 끝에 고주리·제암리의 전교사인 안종환·안종린을 3월 16일 아침 일찍 수원 복수리교구에 파견시켰다.
그러나 안종환과 안종린은 수원 복수리교구에서 비밀회의 도중 일본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중경상을 입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서 김흥렬에게 천도교중앙총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김흥렬은 즉시 수촌리로 나아가 백낙렬을 만나고 중앙총부의 지시를 전했는데 그 내용은 각 교구의 만세운동은 자체부담으로 계속 전개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백낙렬 순회교사는 빚을 내서라도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고 김흥렬은 팔탄면과 향남면을, 백낙렬은 우정면과 장안면을 책임지기로 했다. 백낙렬과 김흥렬 두 동덕은 이튿날부터 동분서주하면서 자금을 모금하는 하편 만세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만세시위의 봉화 올라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춘 남양교구의 만세운동은 서울보다 한 달 늦은 4월 2일 저녁 9시경 장안면 수촌리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일제히 시작되었다.
장안면의 백낙렬은 4월 3일 새벽 3시경 이봉구·정순영·홍수관 등과 함께 청수상 앞에서 만세시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심고하고 백낙렬의 지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자 이봉구·정순영·홍수관은 집집마다 돌면서 교인과 주민들을 동원했다.
아침 9시가 되자 석포리 방면에서 주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수촌리 방면의 주민들은 머리에 흰 끈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 또한 우정면 주곡리에서도 차희식이 주민을 동원하여 수촌리 전교실로 모였다.
잠시 후 수촌리전교실에서는 이봉구가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고 쓴 깃발을 들고 홍수광·차인범은 비밀리에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태극기를 든 군중들은 백낙렬의 ‘대한독립만세’의 선창에 따라 함성을 지르면서 수촌리를 돌고 독정리로 향했다. 이때 독정리전교사 이종근이 교인 우종렬·우영규와 함께 교인과 주민을 동원하여 전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만세를 부르며 군중들과 합세했다. 또한 김창식은 덕다리 교인과 주민들을, 최건환 독정리구장은 전주민을 동원하여 신촌에 집결해 있었다.
한편 장안리에서는 전교사 조교순과 김인태·양순서 등이 주민을 이끌고 신촌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사방에서 몰려든 군중들은 그동안 억눌린 생활을 발산하듯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어서 군중들은 어은리 기림골로 향했다. 기림골에서는 김현조 순회교사와 김익배 전교사가 주민을 동원, 전교실에 대기하고 있다가 합류했다. 이때 백낙렬이 앞으로 나아가 장안면사무소로 가자고 외치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질서정연하게 장안면사무소로 향했다. 군중들은 면사무소에 이르자 사무소에 난입하여 사무집기를 모두 파괴하고 서류 장부를 파손, 밖으로 내던졌다. 기세가 오른 군중들은 더욱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때 도망하려다 붙잡힌 김현묵 면장도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 이윽고 면사무소는 검은 연기가 치솟으면서 서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한편 조암리 쌍봉산에서도 이를 환영하는 듯 많은 군중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뿐만 아니라 어은리 주민들도 이에 합세했다.
장안면사무소를 습격한 군중들은 쌍봉산으로 이동했다. 쌍봉산은 해발 117미터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우정면과 장안면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정상에서는 이미 우정면 덕우리, 장안면 금의리 등 주민들이 먼저 도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이들을 환영했다. 삽시간에 쌍봉산은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부른 군중들은 쌍봉산을 내려와 일부는 멱우리 쪽으로 하산하였고 나머지 일부는 조암리 낡은아실 쪽으로 하산, 조암리 주민들과 합세하여 우정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사기말로 향했다. 우정면사무소는 장안면사무소의 습격소식을 듣고 미리 도망하여 직원이 한명도 없었다. 군중들은 장안면과 마찬가지로 우정면사무소를 부수고 집기와 서류를 밖으로 끌어내 소각했다. 이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약 2천 5백 명으로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 대부분이 참가했다.
화수리주재소 습격
이어 군중들은 백낙렬과 정영순의 지시에 따라 김현묵 장안 면장을 앞세우고 친일파인 우정 면장 최중환 집으로 몰려가 살해코자 했으나 마침 부재중이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한각리로 향해 소산광장에 집결하였는데 이때 모인 군중은 약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여기서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기로 모의를 하고 만세를 부른 후 주재소를 서서히 포위해 가면서 세 방면으로 공격을 가했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주재소 안에 있던 순사부장 가와바다와 순사들이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투석전을 벌였다. 당황한 순사들은 총을 버리고 도망쳤으나 이내 붙잡혀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가와바다 순사부장은 문 뒤에 숨어서 계속 총을 쏘아댔다. 이때 이봉구가 깃대를 들고 주재소를 향해 뛰어들다가 넘어졌으며 이 광경을 본 김정식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었으나 역시 총에 맞고 쓰러졌다. 뒤를 이어 이경백·김현모가 주재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마찬가지로 희생되었다.
이를 틈타 장소진·장제덕이 주재소 뒤쪽에 있던 나무를 지고 주재소로 달려가 불을 질렀다. 불이 주재소로 옮겨 붙자 가와바다는 필사적으로 도망가면서 군중에게 계속 사격을 가했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던지면서 쫓아갔으며 마침내 김익경이 날쌔게 달려들어 가와바다를 내동댕이치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차희식·이봉구·정서성 등 군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가와바다를 때리기 시작했다. 가와바다는 마침내 참살 당했으며 그의 시체 위에는 군중들이 던진 돌로 무덤을 이루었다. 일단 시위가 끝나자 군중들은 만세를 계속 외치면서 각자 부락으로 해산했다. 이날 만세시위로 김정식은 다리를, 이경백은 복부를, 김현모는 심장을 관통당해 2명이 죽고 3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편 발안리 유학자 이정근은 제자들과 동지들을 모아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배양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는데 수촌리 전교사의 백낙렬과 제암리 전교사 안정옥과 자주 만나 정국에 대해 논의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4월 3일 삼괴지역(우정면과 장안면)에서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하고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그리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정근은 대대적인 봉기를 위해 발안리 주재소의 동정을 살폈다. 당시 발안주재소에 주둔해 있던 수비대는 삼괴지역으로 들어가 주재소는 텅 비어 있었다.
4월 4일 이정근은 여러 제자들을 불러 발안 장날인 4월 5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하고 발안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화수리에서 만세시위를 마친 백낙렬과 안정옥·김흥렬이 찾아와 발안 장날 만세시위에 전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4월 5일 장날에는 사방에서 장꾼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낮 12시가 되자 이를 신호로 이정근·안정옥·김흥렬 등이 주동이 되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발안리 주재소로 향했다. 이날 수촌리의 이봉구도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냇가에서 돌을 날랐으며 제암리와 고주리 주민들도 함께 행동했다. 시가지를 한바퀴 돈 군중들은 발안리 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몰려갔다.
한편 주재소는 사이다가 이미 사수들을 배치해 놓고 위협사격을 가했다. 군중들은 이에 대항하여 투석전을 벌이면서 주춤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군중들은 계속 돌을 던져 주재소 유리창을 모두 깨어버렸다. 이때 이정근·김흥렬·안정옥이 군중을 이끌고 합류하였고 이정근이 “물러서지 말고 주재소를 습격하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나 일경의 위협사격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투석전이 전개되는 동안 수비대 30명이 도착, 주재소를 둘러쌌으며 주재소 안에 있던 수비대들도 칼을 들고 지원 온 수비대와 함께 배치되었다.
군중들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만세를 부르자 수비대는 기다렸다가 군중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며 맨 앞에서 만세를 부르던 이정근이 수비대장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어 김경태가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다가 달려들자 역시 사정없이 칼로 내리쳐 즉사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처참한 광경을 본 군중들은 더욱 세차게 투석전을 전개했으나 수비대의 위력에 밀려 부득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만세시위로 수촌리의 이봉구, 제암리의 안진순·안봉순·홍원식·안종후·김정헌·강태성, 고주리의 김성렬 등이 수비대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일본군의 보복만행
한편 만세시위를 마친 군중들은 일본군이 와서 보복을 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자 저녁 때 사랑리 남산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화수리 주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의 보복을 예견한 화수리 주민들은 비 오는 밤을 이용하여 가족을 이끌고 원안리와 호곡리 방면으로 미리 피신을 하였다.
4일 새벽이 되자 화수리 주재소 습격사건을 보고받은 발안리 주재소 아리다 중위가 이끄는 수비대 1개 소대 30여명이 화수리로 달려와 마을을 완전히 포위하고 몇몇 집에 불을 놓았다. 그리고 집집마다 수색을 했으며 주민들이 모두 피신가고 없자 집집마다 방화를 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수비대는 원안리와 굴원리로 몰려가 송낙인 등 4명을 포박, 주재소로 끌고 와 주민의 행방을 알기 위해 갖은 고문을 가했다. 한편 발안리 주재소장 사이다는 사건 현장을 돌아본 후 아리다 중위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수비대를 이끌고 다시 호곡리와 원안리로 몰려가 주동자 색출을 위해 혈안이 되었다. 얼마 후 수비대는 주민 30여 명을 굴비처럼 포박하여 주재소로 끌고 와 온갖 고문과 폭행을 자행했다.
잠시 후 사이다와 아리다 중위는 다시 수비대를 이끌고 불에 타다 남은 화수리 주재소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주재소에서 좀 떨어진 소나무 숲에서 돌무덤을 발견하고 가와바다의 시체를 찾아낸 다음 사이다는 한각리로 갔으며, 아리다는 화수리 임시주재소로 돌아왔다.
한편 원안리와 호곡리에서 끌려온 주민들은 수비대의 고문에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비대는 고문을 하다가 기절하면 냇가에다 내다버리는 등 갖은 만행을 주저하지 않았다.
수비대의 보복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마을의 가축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먹고 화수리의 전가옥을 방화했다.
이처럼 화수리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보복만행은 수촌리·한각리·조암리·석포리·장안리·어은리·멱우리·사곡리·고온리·덕정리·독정리·사랑리·화산리·운평리·원안리·제암리·고주리·이화리 등 삼괴지역과 남양교구 산하 전부락에 걸쳐 자행, 1백여 채의 가옥 방화와 20여명의 사상, 40여명의 투옥, 5백여 명의 주민을 고문, 폭행했다. 이 가운데 가장 처참한 보복을 당한 수촌리와 제암리⦁고주리의 참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수촌리의 보복만행
수비대들이 네 차례에 걸쳐 가장 악랄하고 혹독하게 보복을 가한 곳이 바로 수촌리이다. 이것은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 쓴 깃발을 들고 항상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했기 때문이다. 이 깃발은 이봉구가 들고 다니다가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주재소로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깃발을 버리고 나왔다.
4일 오전, 사이다는 수비대와 함께 화수리주재소 현장을 조사하다가 이 깃발을 보고 수촌리 주민들이 사건을 선동했으리라고 단정했다. 발안에 돌아온 사이다는 밤에 아리다를 불러 다음날 새벽을 기해 수촌리를 급습하기로 계획했다. 이것이 제1차 보복이었다.
4월 5일 새벽 3시반경 아리다는 수비대 30여명과 함께 수촌리 큰말부락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을 마구 쏘아댔다. 뿐만 아니라 교회당을 불 지르고 집집마다 방화를 시작했다. 삽시간에 수촌리 큰말부락은 불바다로 변했다. 주민들은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가족을 이끌고 어두운 산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수비대는 피난하는 주민들을 향해 마구 총격을 가했다. 이날 보복으로 가옥 24채와 5명(김영조·홍병연·홍경식·차한주·김성좌)이 총상을 입었고 4명(백남학·백성오·김정희·김응칠)이 칼에 부상을 당했다. 일본 수비대는 이처럼 수촌리를 완전히 생지옥으로 만들고 마을을 떠났다.
제2차 보복은 이날 늦게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수비대는 수촌리에 다시 들려 불타고 남은 8채 가옥을 샅샅이 수색했다. 이때 이봉구가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부장을 죽일 때 가와바다의 피가 묻은 옷을 미처 버리지 못하고 다락에 감추었다가 수비대에 발견된 것이다. 또한 산속에 피신해 있던 주민 4명이 집이 궁금하여 잠깐 내려왔다가 수비대에 붙잡혀 장안리 주민들과 발안리 주재소로 끌려갔다. 발안주재소에 끌려온 수촌리 주민들에게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수비대는 이들을 창고로 끌고 가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리치자 몸이 터져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그 여독으로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제3차 보복은 4월 7일에 자행되었다. 이날 일본 수비대는 수촌리 가장 마을에 들이닥쳤다. 수비대는 가장 마을에 들어와 수촌리를 중심으로 이웃부락인 꽃밭에, 용담굴 주민들을 가가호호 돌아다니면서 모이라고 했다. 수촌리 주민들이 하는 수 없이 모이자 갑자기 주민들을 포위하고 결박을 지어 발안리주재소로 끌고 갔다. 수비대들은 밧줄에 묶여 들어오는 사람마다 몽둥이질을 가해 즐비하게 쓰러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뒹굴었다. 이때 끌려온 주민은 약 1백30여 명이나 되었다.
제4차 보복은 그 다음날 있었다. 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 등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너무나 엄청난 보복을 당해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사이다는 이러한 주민들의 행동에 격분하여 수비대를 시켜 8채 남은 가옥을 돌아다니며 고문을 해 누워있는 환자를 4채의 가옥에 몰아넣고 나머지 4채마저 불을 질렀다. 4차례의 보복으로 수촌리 마을 42채 중 4채만 남기고 38채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이때에 천도교전교실 겸 강습소도 불타버렸고 이봉구의 집도 소각되었다. 또한 백낙렬의 집에도 불을 놓아 13간 행랑채가 소각되었으나 다행히 안채는 주민들이 불을 껐다. 소각된 행랑채는 3·1만세운동을 위해 많은 천도교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했던 천도교인의 집회장소였다.
제암리의 집단학살
삼괴지역의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습격사건, 화수주재소 습격사건에 이어 발안 만세운동이 연이어 일어나자 발안주재소장 사이다는 4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삼괴지역의 거의 모든 부락에 대해 보복을 감행한 후 드디어 제암리에도 보복의 손길을 뻗쳤다.
4월 15일 오후 2시반경 사이다는 조희창과 수원에 본부를 둔 일본군 제 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 다께오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30명의 수비대를 이끌고 제암리에 들어섰다. 수비대들은 제암리를 완전 포위하여 한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조희창을 시켜 “사이다가 좋은 말을 한다고 하니 주민들은 교회당에 전원 다 모이라”고 하면서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강제로 모이게 했다. 이때 발안에서 수비대에게 잡혀 수원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 끝에 집에 돌아와 누워있던 6명도 끌고 왔다.
주민들이 이 마을에 있는 초가집으로 된 감리교 교회당에 모두 모이자 수비대들은 교회당을 완전 포위하고 돌연 출입구와 창문을 모두 큰 못으로 박아 도망가지 못하게 밀폐한 다음 사이다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여 살육하기 시작했다. 교회당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했다. 갇혀 있는 주민들은 있는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수비대들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더욱이 천인공노할 사실은 천진난만한 어린이까지 무참히 참살했다는 사실이다. 천도교 전교사 안종환은 인간도살장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어린 아들을 안고 교회당으로 갔다가 죽게 되자 어린아들을 창밖으로 내보내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이 어린 것만은 제발 살려 달라”고 피맺힌 애원을 했으나 수비대들은 조금도 사정없이 이 어린 아이를 군도로 내리쳐서 참살하고 말았다. 진정 목불인견의 참사가 아닐 수 없다. 수비대들은 교회당 밖에서 죽은 시체까지 끌어다 모아놓고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시체를 분간할 수 없게 불을 질렀다.
불길은 제암리 주민들의 피맺힌 한을 뒤로 한 채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게다가 교회당이 초가집이었으니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런데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안종엽과 김정헌은 교회당 흙벽을 뚫고 사력을 다해 도망갔으나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즉사하고 뒤이어 도망친 안경순 역시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을 수비대가 쫓아가 칼로 목을 쳐서 죽이고 말았다.
이러한 생지옥 속에서도 오직 한사람 노경태만이 실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성공,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수비대의 총격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는 데 마침 뒤쫓던 수비대가 각반 끈이 풀어져 다시 고쳐 매는 사이에 위기를 모면하여 산 속으로 숨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날 제암리의 교회당 안에서 참살당한 주민은 어린이까지 합쳐서 모두 24명인데, 그중 천도교 신자가 15명이고 김리교 신자 및 기타가 9명이었다.
이날 희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천도교 신자>
안정옥·안종엽·안봉순·홍순진·안종환 및 그의 아들 안유순, 안무순·김정헌·안명순· 안관순·안종린·김덕용·안경순·안상용
<감리교 신자 및 기타>
안종락·안종후·안진순·안필순·조경칠·강태성·노경태(당시 유일한 생존자)·홍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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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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