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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4. 맹산교구의 만세운동
포덕 50년 초의 교세
평남 맹산에 동학이 들어온 것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다. 천도교 『맹산군연원록』에 의하면 지덕면 오봉리에 사는 최정섭이 포덕 40년(1877) 11월 16일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정섭은 포덕 18년(1877) 9월 2일 생으로 23세 때 입교한 셈이다.
이듬해인 포덕 41년(1900)에는 입교하는 사람이 늘어나 오봉리의 최기언, 봉인면,팔봉리의 이양섭, 지덕면 소창리의 김석조, 애전면 함온리의 박윤조, 초평면의 방효준, 지덕면 효리의 방은준, 학천면 고하기의 박치홍 부자가 입교하였다. 다시 포덕 42년((1901)에는 더욱 늘어나 맹산면 원남면 옥천면 동면에 포교되었다. 포덕 45년(1904) 8월 30일에는 맹산에서도 진보회를 개최하여 상투도 자르고 검정색 의복도 입었다. 진보회 조직에 관한 천도교창건사의 기록에 의하면 맹산에서는 방기창이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어디서 몇 명이 모여 단발흑의의 시위와 개회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로부터 천도교세는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여 포덕 51년(1910)에 이르면 약 150호 정도가 된다.
역대 교구장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던 포덕 60년(1919)까지의 역대 교구장은 다음과 같다. 교구 창립일은 알 수 없으나 초대 교구장은 김창각이었다. 포덕 51년 9월에도 재선되어 52년 2월까지 역임하였다. 포덕 52년 3월부터는 김영율이 교구장으로 선임되었고, 그 해 9월에 김영율 교구장이 사정이 있어 교구장을 사임하게 되어 김창수가 임시로 그 후임이 되었다. 포덕 53년(1912) 11월에 조병칠이 교구장에 선임되었고, 포덕 55년(1914)에 이봉준이 새 교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해 7월에는 중앙총부의 직제개편에 따라 맹산교구는 덕천대교구에 소속되었다. 덕천대 교구장은 박왕식이었으며 맹산 교구장에는 방기창이 선임되었다. 방기창은 맹산 천도교의 연원대표로서 이때 교훈이었으며 후에 도정이 되었다. 포덕 59년까지 방기창이 교구장을 계속 역임하였다. 공선원은 김창각, 전제원은 임대규, 금융원은 박창도 였다. 포덕 59년(1918) 6월에 문병로가 교구장이 되었다. 한편 포덕 57년부터 각 면 전교사가 임명되었는데 정승주·임대규·박봉림·이승학·박명원·김천석·김대현·이기섭이었다.
3·1운동 준비
1912년부터 실시된 우이동 봉황각 수련에 맹산군에서도 2기에 연원대표인 방기창, 4기에 이관국, 5기에 박승민·방진원·유병순, 6기에 김치송, 7기에 박정간·궁상원 등 7명이 참가하였다.
포덕 60년(1919)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 간의 기도가 전국적으로 행해졌는데 맹산에서도 49일 간의 기도를 맹산면 수정동 교당에서 인근 교인들이 모여 봉행했다. 당시 소학교 2학년생이었던 김득홍(83세)의 증언에 의하면 어른들은 이번 기도는 예사 기도가 아니라 하시며 집에서 물을 데워 목욕재계하고 교당에 가서 기도를 봉행했다 한다. 맹산 교당은 마당이 넓었으며 토방이 높았고 앞에는 큰 강당이 있었으며 뒷방은 네 개로 나누어진 온돌방이 있었다 한다. 이 온돌방에서 기도를 봉행했다 한다.
김득홍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방기창 도정은 서울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직접 지령을 받아 가지고 내려와 급하니 각 전교실에 연락하여 3월 1일 12시에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맹산교구의 만세계획은 각 면 전교실에서 청년들만 동원하여 거행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소수인원을 동원하여 만세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박연수 어른이 전해 들었다는 증언에 의하면 독립선언서는 조기간이 가져왔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이었던 라인협·나용환 두 선생이 천도교 평양교구에 수천 매를 전달했다. 이중에서 교구 간부였던 조기간이 2월 24일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갖고 맹산 북창까지 와서 북창 교구장인 방은준이 맹산교구에 전달했다고 한다.
한편 『독립운동사 권2』에 의하면 맹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사람은 당시 덕천 천도교구 공선원 현성재였고, 거사를 지도한 이들은 당시 천도교 교구장이던 문병로를 비롯하여 길응철·방기창·정덕화·김치송·이관국·방진원 등 천도교 간부들 여럿이었다고 했다.
만세 일자와 규모
김득홍의 증언에 의하면 3월 1일 12시에 55명의 천도교도가 박창도를 앞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당시 소학교 2학년이었으며, 수업 중 시장 쪽에서 만세소리가 들려오면서 학교 앞을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튿날인 3월 2일 12시에도 역시 55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한다. 1일과 2일은 평일이었으므로 천도교 청년들만 만세를 불렀고 헌병과 경찰의 제지로 해산했다고 한다. 헌병 분대에는 헌병소위 사다께(佐竹) 외에 7~8명뿐이었고 헌병보조원은 15명 정도였다.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2권』에는 만세를 부른 날짜가 3월 6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박연수 선생 증언에는 3월 9일이라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 김득홍 어른에게 확인하였더니 분명히 3월 1일부터 3일간 연속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만세를 부른 인원은 55명이라 하였다. 나이 많은 분들은 제외하고 청장년만 만세를 부르도록 계획했기 때문에 각 면 전교실에서 55명만 모였다고 한다. 박창도가 선두에서 지휘했으며 그의 나이는 당시 35세로서 키가 헌칠한데다 얼굴이 잘 생겼고 힘이 장사이며 카이젤 수염이었다고 한다. 박창도는 포덕 53년 8월에 맹산교구가 운영하는 제148강습소 제2회 종업생이다.
이 만세 참가자에 대해서는 『3·1독립운동사』에는 30명이, 『독립운동사』에는 50명 이, 박연수 선생은 400여 명이라고 했다. 김득홍 어른은 3일째 만세시위 때 헌병대로 몰려갔던 인원도 바로 55명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사격으로 48명이 현장에서 즉사한 사실을 보더라도 55명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3일째의 기억에 의하면 학교 선생이 아침 수업을 시작하려고 기립 경례를 마치자 책보를 싸라고 하면서 집에 돌아가 밖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 만세 광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천도교 청장년 55명만이 참가했다는 것이다.
48명이 총살당해
3일째 만세시위는 헌병대로 향했다. 첫날처럼 12시부터 시작하였다. “헌병을 쫓아내야 한다”고 외치면서 현병대로 갔다.
김득용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집이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날 새벽 4시경에 덕천방면에서 60리를 걸어 20명에 달하는 완전무장한 군인이 헌병대에 도착했다 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덕천 헌병중대에 증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만세시위대는 헌병대로 몰려 들어가 물러가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사다께 헌병대장이 욕설을 퍼붓자 박창도는 의자로 헌병대장을 때리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또(佐騰) 상등병이 권총으로 박창도를 쏘았다. 박창도는 복부에 총탄을 맞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사또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억센 힘으로 거머쥐었다. 목이 졸린 사또도 총에 맞은 박창도도 같이 죽었다고 한다. 이때 군중들이 헌병대로 밀고 들어가자 헌병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해 48명이 즉사하고 1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6명은 몸을 피했다. 부상당한 사람은 한봉진으로 어머니 쪽 외사촌 오빠였다고 한다.
헌병들은 48명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들것을 만드느라고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때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한봉진은 재빨리 도망쳤다. 뒤따라 헌병들이 추격했는데 거리로 들어갔을 때 조짚을 지고 오는 사람의 지개를 바꾸어지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니 헌병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간신이 피신할 수 있었다 한다. 그는 군청 뒤에 있는 장덕화의 집에 가서 숨었다가 학무리 계중학의 집으로 옮겨 살아났다. 헌병들은 살인마와 같이 들것에 시체를 실어내면서 총검으로 일일이 찔러보며 확인했다고 한다.
순국한 이들의 시체는 2마정 가량 떨어진 골짜기에 버렸는데, 김득홍 어른은 어머니와 같이 밤중에 그곳에 가보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외사촌 오빠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리저리 돌아 현장에 갔더니 48명의 시체가 그냥 내버려져 있더라는 것이다.
박연수 선생의 유족들과 동향인들로부터 들어 밝혀진 순국 순도자는 다음과 같다.
朴昌道, 桂仲成, 吉成龍, 張龍宣, 安吉甫, 朴必永, 吉錫璉, 朴都官, 李承植, 趙秉七, 方應哲, 李正必, 弓尙元(7회) 朴春日, 金永律, 金鳳保, 禹光卨, 朴道乾, 盧錫璣, 金昌涉부친 韓基斗부친 金昌涉부친 李官俊부친 方士麟부친, 方洛道부친 朴瑞鳳부친
김득홍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맹산 수정리 거리에 살고 있던 박검수 형제도 순국순도했다고 한다. 3·1운동 때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7명이다. 형을 제일 많이 산 사람은 교구장이었던 文炳魯로서 1년 6개월간을 고생하였다. 그리고 1년씩 복욕한 사람은 5인인데 方殷俊 朴應俊 張峻化 朴明源 弓處官 朴準祺 등이다.
독립운동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에 의하면 3·1운동을 극대화하고 모의했던 사람으로 文炳魯 吉應哲 朴기창 鄭德化 金致松(6회) 李寬國(4회) 方鎭垣 등을 꼽고 있다. 이들 중 교구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체포되지 않았고 학살당하지도 않았다. 다만 김득홍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원로들은 3·1운동의 일선에 나서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한다.
끝으로 김득홍 어른의 몇 가지 증언을 부기해 둔다.
1) 맹산 천도교의 연원 관계는 원래 방기창 도정이 지도하였다. 그 후에 조처항에게 물려주었고 조처항은 문병로에게, 문병로는 길응철과 박용완에게 물려주었다 한다. 따라서 포덕 70년대에는 길응철 연원과 박용완 연원이 맹산연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2) 맹산교구는 3·1운동 직후 헌병대에 점령되어 1년간 빼앗겼다. 헌병들이 물러가면서 경찰에게 인계하여 수개월간 경찰이 점령했다 돌려주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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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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