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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7)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독립만세운동"
기사입력 2025.06.25 15:56 조회수 9,535 댓글수 0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9. 지하 독립신문의 발행
천도교는 3․1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영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지하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니 얼마나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과거 『제국신문(帝國新聞)』을 발행했던 언론인으로 신문의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곧 전개될 3·1독립운동의 취지와 운동의 전개 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춘암상사와 상의하여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발행하기로 하고 보성학교 교장인 윤익선(尹益善)을 발행인으로 정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한 이종일은 3월 1일 만세운동이 터지면 자신이 구금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전 2월 28일『천도교회월보』발행인 이종린(李鍾麟)으로 하여금 독립신문의 창간호 원고를 집필토록 하여 보성사에서 발행하도록 했다. 이에 보성사의 김홍규 감독은 3월 1일 오전에 독립신문 1만 5천 부를 인쇄하여 당일에 배부하였다. 이렇게 해서『조선독립신문』제1호가 간행되자 일경은 이날 오후 6시에 윤익선을 체포했다.
이에 창간 실무를 담당했던 이종린은 이날 밤 경성 서적조합 서기 장종건(張倧鍵)과 논의하여 독립신문을 프린트 판으로 계속 발행하기로 하고 3월 2일 간행비 20원을 장종건에게 전했다. 그래서 이종린은 관훈동 서적조합에서 독립신문 제2호, 제3호, 제4호까지 발행하였으나 역시 일경에 발각되어 3월 10일 원고와 등사기구 일체를 압수당하고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독립신문』의 내용을 보면, 제1호는 주로 민족대표들의 거사에 임하는 순국 결사의 결의를 담고 있다. 제2호는 3월 1일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 관련 기사와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였다. 특히 가정부(假政府), 즉 임시정부의 조직계획을 예고하는 기사가 주목을 끈다. 제3호는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상황을 계속 보도하고 있으며, 제4호는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던 문서에 대해 보도하였다.
그 후 『독립신문』은 천도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장종건의 주도 아래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계속 비밀리에 발행되었으며, 3월 25일 장종건 등이 체포된 후에도 사람과 장소를 바꾸어가며 6월 22일 제36호와 8월 29일 국치기념호(國恥記念號)까지 간헐적으로 발행되었다.
『독립신문』발행 후 경향 각지에는 이에 고무되어『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조선민보(朝鮮民報)』,『국민신보(國民新報)』,『혁신공보(革新公報)』등이 연달아 간행되어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독립운동의 길잡이가 되었다.
10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독립만세운동
탑동공원에서 학생들과 합류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어느덧 서울 시내를 누비며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으로 돌변하였다.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수십만 군중의 시위행진은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온 시가는 철시하고 시위군중의 대열이 물결치는 가운데 일제는 전 경찰력과 보병 3개 중대, 기병 1개 소대를 시내 요소에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시위대열의 수에 압도당한 일제는 처음에는 방관하는 듯하였으나 해질 무렵부터 시위군중을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적수공권으로 독립을 외치는 시위행렬은 점차 일제의 저지선에 부딪혀 주모자급이 속속 구속되었으나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시내로 번져가면서 밤에는 횃불이 등장하고 태극기가 곳곳에 꽂혀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의 함성은 삽시간에 전국에 퍼져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나갔다. 3월 1일 만세시위가 시작된 것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개성, 수원·평양·진남포·안주·선천·의주·대구·부산,원산·홍원등 11개 시·군에서 서울의 거사와 때를 같이 했다. 다음날에는 해주·연안·황주·중화·강서·대동에서 일어났으며, 5일까지는 경기 이북지역에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5일에는 군산·벽동·맹산·영변, 10일에는 철원·광주에서 궐기하였고, 점차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회조직이 있는 곳부터 터져 나온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은 요원의 불길처럼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우리나라 최남단인 제주에서는 3월 20일에, 최북단인 은성에서는 4월 4일에 각기 봉기하였다.
이러한 만세시위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3월 6일에는 서간도에서 7,200여명이 시위하였고, 13일에는 용정에서도 독립선언대회가 개최되었다.
비폭력 군중의 평화적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전투태세를 갖춘 2개 사단의 정규군과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헌병 2만명, 이밖에도 경찰과 한인 헌병보조원 수만 명을 분산 배치하였다.
일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군중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시위 군중에 대한 발포는 물론 이들을 집단학살한 예가 허다하였으며, 특히 평북의 정주, 평남의 맹산·양덕, 황해도 수안, 그리고 수원 제암리 등지에서는 수십 명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또한 구속된 시위자에 대한 고문 역시 잔인무도하였다. 수많은 시위자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생명을 잃거나 불구자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집계된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의 시위운동에 참가한 인원과 그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집회 건수 1,542 회
집회 인원 2,023,098 명
사 망 자 7,509 명
부 상 자 15,961 명
구금자 수. 46,948 명
소실된 교회 47 동
소실된 학교 2 동
소실된 민가 715 동
이와 같이 기미 3·1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학살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독립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일제에 대해 경종을 울리게 함으로써 그 후 일제가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바꾸어 소위 문화정치라는 통치방법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11. 민족대표들에 대한 공판의 진행
남산 경무총감부에 구속된 민족대표 29명은 그날 밤부터 일제히 개별적인 취조가 시작되었다. 의암성사와 권동진·오세창·최린 4인은 청사 정문 안의 숙직실에 수감된 후 개별적으로 불려 나가 거사에 대한 간단한 취조를 받기 시작하였다. 3월 1일 밤중에 전원에 대한 제1차 취조가 끝났는데, 그 결과 선언서에 서명치 않은 인사들 중에서도 독립운동의 모의와 추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일경은 즉시 관련자 체포에 나서 다음날부터 박인호·최남선·노헌용·김홍규·김도태·함태영·송진우·현상윤·임규·안세항·이경섭·김세환·김지환·강기덕·김원벽·정노제 등 16인을 체포하였다.
32명의 민족대표와 추후 구속된 16명 등 48명은 내란죄 피의자로 다루어 연일 심문을 진행시켜 독립운동의 주모자급에 대한 취조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3월 중순까지 검찰조서가 작성되고 4월 상순에는 경성지방법원 예심을 받기에 이르렀다.
성사에 대한 경찰조서는 3월 1일 밤중으로 작성되어 검찰에 송치하고 5일경에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거사의 동기와 경위, 그리고 독립운동의 규모에 대하여 심문하던 취조관이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이번에 독립운동이 자주적 민족운동이 아니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현혹되어 일부 불순분자들이 배후에서 선동하여 일으킨 소요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술책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거사의 의도와 자금의 출처, 분배,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 전달 발송 경위 등을 추궁했으나 민족대표들은 처음부터 사실 그대로 숨김없이 답변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한편 독립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민족대표들의 심문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손병희 선생 취조서
문 : 피고 등이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다는 것을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었는가. (3,운동비사 78면)
답 : 우리들은 전에 미리 학생들에 통지한 일이 없고 3월 1일 동지가 왔을 때 학생들이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을 것이라 하므로 나는 학생들이 오늘 일을 알고 있다고 들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문 : 피고들은 어째서 명월관 지점으로 모였는가.
답 : 그것은 우리들이 파고다공원에 가서 선언서를 발표하고 그곳에서 체포되면 많은 학생들이 무슨 일을 할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명월관 지점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문 : 어떠한 뜻으로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하려고 하였는가.
답 : 그것은 선언서의 인쇄가 그때까지는 될 것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날로 정하였지 다른 이유는 없다. (비사 78면)
문 : 피의자는 조선의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 그렇다. 될 줄로 생각한다. (비사 81면)
문 : 어째서 된다고 생각하는가.
답 : 그것은 목하 파리에서 개최 중인 강화회의에 일본은 5대국의 일원으로 동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동 회의는 민족 평화 등의 권리를 줄 것을 의제로 하고 있는데 그 회의에 참석 중인 일본은 조선의 안녕질서를 보지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또 지금 영국에서는 애란을 독립시키는 것을 신문으로 보았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일본은 당연히 조선독립을 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 : 그런데 선언서를 본즉 조선민족에 대하여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고 했는데, 이것을 본즉 어디까지나 독립의 의사를 발표할 것을 권하고 민족 전체의 분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선언서는 그렇게 되었다. 조선민족은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어디까지나 독립의 의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문 : 요컨대 이 취지에 의하면 최후의 일인까지 어디까지나 반항하라는 것이니 이런 선언서를 피고 등의 명의로 발표하면 보는 사람은 어떠한 태도로 나올까 하는 것을 피고는 예상하고 있었는가.
답 : 지금 지방법원 예심결정서를 보면 우리들이 선언서를 발표하기 때문에 각처에서 폭동이 일러났다고 써 있으나 나는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예기치 않았다. (비사 102면)
문 : 천도교는 본년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회를 열 것을 각 교도에게 시달하고 시행한 일이 있는가. (비사 86면)
답 : 나는 해마다 기도를 올리는데 천도교에서는 협의상 1월부터 2월까지 49일간 기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 : 이 기도는 어느 때부터 조선독립을 성취할 시기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비사 86면)
문 : 피고는 금년 2월 25일경 김상규에게 천도교 보관금 중 6만 원을 대여한 일이 있는가. (비사 99면)
답 : 그렇다. 3만 원씩 2회에 6만 원을 대여하였다.…… 안동현에서 좁쌀을 매매하면 이익이 있다 하므로 만주 좁쌀을 조선으로 수입하여 궁민을 구제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김상규에게 융통하였는데, 그 일은 천도교 사업으로 하였다.
문 : 그 6만 원은 독립운동에 사용할 목적으로 상해 임시정부 수립자금과 이강공의 해외에 갈 준비금으로 썼는가.
답 : 그렇지 않다.
문 : 천도교의 교도는 전부 얼마나 되는가. (비사 101면)
답 : 천도교는 교도의 교안이 있는데 그 수는 약 300만에 달하고 있으나 실제 의무를 다하고 있는 교인이 200만 가량이 되나 정확한 숫자는 나도 모른다.
문 : 피의자는 장래나 미래도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가. (비사 81면)
답 :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려는 나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2) 최린 선생 취조서
문 : 피고는 이번 여러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이 틀림없는가. (비사 579면)
답 : 그렇다. 틀림이 없다.
문 : 그러면 그 전말을 말하라.
답 : 내가 독립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첫째, 조선 민족의 생존권을 확장하는 것, 둘째, 일본정부에 대하여 조선에 대한 정책을 회오케 하는 것. 셋째, 목하 강 화회의에서 세계평화를 제창함에 재하여 이때 조선민중에 대한 열국의 동정을 일으킬 생각에서였다. 따라서 그 목적을 달하는 데는 조선도 민족자결 즉 조선독립을 기도하여야 되겠다는 의도에서 이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문 : 그 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그 발기인은 몇 사람이었는가.
답 : 그 시발은 작년 음력 12월 말에 손병희가 나와 권동진 오세창을 자택으로 초청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세우자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었다. 그것이 근원이 되어 동지들을 모아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비사 577면)
문 : 이 선언서는 누가 기안하였는가. (비사 576면)
답 : 그 선언서는 지금 경성부 내 수하정에 있는 최남선에게 말하였던바 동인이 문장을 쓴다 하므로 의뢰하였으며, 그 선언서의 골자는 내가 동인에게 말하였다.
문 : 그 후 피고는 선언서와 청원서 등의 기초에 있어서 누차 최남선과 회합하였는가. (비사 589면)
답 : 그렇다. 최남선이 누차 나에게 와서 기초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문 : 천도교 및 야소교의 거물들이 회합하여 선언서의 취지를 협의한 일이 있는가 (비사 590면)
답 : 그러한 협의를 한 일은 없다. 선언의 대체의 취지서는 손병희·권동진·오세창과 나 4인이 협의하여 정하고 야소교파에는 선언서의 초고를 만든 후에 보이고 합의케 한 것이다.
문 : 그 서면에는 어느 때 어디서 조인하였는가. (비사 593면)
답 : 함태영이가 2월 27일 나에게 야소교 측 사람의 인장을 가져와서 조인하였고 천도교 측 사람들의 것도 동일 조인하였다.
문 : 피고는 검사에 대하여 끝까지 자기는 독립운동을 그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지금도 아직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가. (비사 596면)
답 : 그렇다. 어디까지나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다.
문 : 그대들은 학생을 파고다공원에 모아가지고 선언서를 배포한 일이 있는가. (비사 577면)
답 : 처음에 우리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이기로 하였던 것인데 어제 밤 오후 8시경 우리 동지들이 손병희씨 집에 회합하였을 때 그 석상에서 박희도가 말하기를 학생들이 우리가 파고다공원에 모이는 것을 알고 학생들도 파고다공원에 모이기로 했다고 하는데 만일 학생들이 집합하면 위험하다고 하였으므로 명월관 지점으로 변경하였던 것이지 결코 학생을 모아놓고 선언서를 배포한 것은 아니다.
문 : 3월 1일 당일 학생들이 소란하였는데 그것은 피고들이 소란케 한 것이 아닌가. (비사 583면)
답 : 그렇지는 않다. 학생들은 장래의 인물이므로 정치운동을 할 시기가 아니다. 나는 학생들에게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을 시키지 않는다.
문 : 그러면 파고다고원에 피고들이 모여 선언서를 배포하는 것을 학생들은 어떻게 하여 알았는가.
답 : 그것은 모른다.
문 : 그러면 학생들은 운동과 관계없는가.
답 : 그렇다. (비사 583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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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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