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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6) "민족대표의 서명과 의암성사의 유시문"
기사입력 2025.06.19 16:26 조회수 9,503 댓글수 0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7. 민족대표의 서명과 의암성사의 유시문
독립선언서에 대한 민족대표의 서명은 2월 27일 밤 재동 최린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대표해서 이승훈·이필주·함태영이, 그리고 불교 측 대표로 한용운이 참석했다. 천도교에서는 대표들이 김상규 집에 모여 도장을 모아 최린에게 보내왔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청원서 등에 기명날인하려 하였으나 선언서 외의 여타 문서가 미비되어 별지에 서명하고 그 밑에 날인토록 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서명자의 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연령순이나 가나다순으로 하자고 제의하였다. 3교단 중에 종교적으로 기독교가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뜻이다. 천도교 측을 대표한 최린은 이를 그대로 찬성할 수 없었다. 가나다순이나 연령순으로 서명하게 되면 선생보다 제자가 먼저 기명할 수 있기 때문에 천도교의 체제상 곤란하다고 완곡히 설명하였으나 양측 주장이 맞서서 쉽게 타협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최린은 “그러면 이 순간까지 서로 노력해온 일은 파기할 수밖에 없다”고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때 최남선은 “인물로 보아서나 거사의 동기로 보아서도 손병희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첫 번째로 서명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고 기독교 측에 양보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이승훈의 제의에 따라 두 번째는 장로교를 대표해서 길선주 목사가 서명하고, 세 번째는 감리교를 대표해서 이필주 목사를, 그리고 불교를 대표해서 백용성이 서명한 후 그 다음은 가나다 이름순으로 서명하기로 의견이 일치되어 기명날인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탑동공원으로 결정하고 2월 28일 밤 가회동 성사님 댁에서 대표자 전원이 회동하여 거사를 위한 마지막 모임을 갖도록 약속하였다.
28일 오후 5시 가회동 성사님 댁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성사님은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인사 말씀을 하였다.
“이번에 우리의 의거는 조선의 신성유업을 계승하고 아래로 자손만대의 복리를 작흥하는 민족적 위업입니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제현의 충의에 의지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다수의 학생이 동원되어 모일 것이니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논의 결과 탑동공원에 많은 학생과 군중이 모이게 되면 군중심리에 의해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고 이로 인해 일본군경에게 악독한 탄압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민족대표들은 그 근처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장소를 변경하기로 하였다.
이에 앞서 의암 성사는 이번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됨에 따라 이날 박인호 대도주에게 다음과 같은 유시문을 보내어 차후 교단을 책임 운영하도록 유시하였다.
諭 示 文
不侫이 吾敎의 敎務를 座下에게 專委함은 己爲十數年이라 更說할 必要가 無하거니와 今日 世界種族 平等의 大氣運下에 我東洋 同族의 共同幸福과 平和를 爲하여 終始 一言을 黙히 不能하므로 玆에 政治方面에 一時 進參케 되었기 如是 一言을 伸託하노니 惟 座下는 幹部諸人과 共히 敎務에 對하여 益益 勉勵하여 小勿妄動하고 我 五萬年 大宗敎의 重責을 善護進行할지어다.
己未 2月 28日
義菴 孫 秉 熙
* 불영(의암성사가 본인을 낮추어 지칭함)이 우리 교회의 교무를 춘암에게 맡긴 지도 벌써 십 수 년이 되었습니다. 더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 모든 인종이 평등하다는 큰 흐름 속에서, 우리 동양의 같은 민족들이 함께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 잠시 정치적인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말을 전하니 잘 새겨 듣기 바랍니다.
춘암은 교회 간부들과 함께 교무에 더욱 힘쓰고 정진해서 조금도 망녕되게 움직이지 말고 우리 오만 년의 위대한 종교의 중책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희암 성주현 해의)
기미년 2월 28일
의암 손병희
8.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3월 1일, 민족적 거사가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왜경에게 발각되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최린은 이날 아침에 대문 안에 독립선언서 두 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서울시내에 배포되었음을 확인한 후 서둘러 성사 댁으로 가서 시중의 동향을 보고하고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성사를 모시고 12시경 인력거로 약속장소인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 도착했다. 최린은 주인 안순환에게 30여명분의 점심을 부탁하고 별실에 일동은 자리를 잡았다.
민족대표들은 오후 1시가 넘자 대부분 모였다. 탁자 위에는 나용환이 가져온 100여매의 독립선언서가 놓여 있었다. 일동은 감격에 떨리는 손으로 각기 선언서를 들고 묵묵히 읽어 내려갔다. 1시 반이 넘어서자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 4명이 불참하고 전원이 모였다.
이에 성사께서 이종일에게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했으니 크게 낭독하라고 지시하여 이종일은 인쇄된 독립선언서의 오자를 고치고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의암성사는 최린에게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이 사실을 통보하도록 지시하고 일동에게 민족대표로서 당당히 행동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때 탑골공원에 모인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선언 장소가 변경된 것을 뒤늦게 알고 학생대표 강기덕·김원벽·한위건 등 10여 명이 태화관으로 달려와 민족 대표에게 장소변경을 항의하고 탑골공원으로 갈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권동진과 최린이 장소변경의 사유를 말하고 간곡히 타일러 돌려보냈다.
식탁이 열리자 한용운은 자진해서 일장 연설을 하였다. 국제정세의 추위는 바야흐로 조선민족에게 독립을 허용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동안 우리 민족은 간악한 일제의 쇠사슬을 풀고 자유천지를 향해 궐기하기 위한 힘을 구축하였다는 점, 따라서 우리들의 이 모임은 민족독립의 성사를 뒷받침하는 의미 깊은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요지였다. 일동은 기립하여 조선독립 만세를 삼창하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 탑동공원에 모인 군중의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 들려왔다.
오후 3시가 지나자 정복경찰 7~80명이 몰려와 태화관을 포위하고 일인 경부가 최린을 불러 경시총감부로 연행한다고 하자 차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30분 후에 차 한 대가 도착해서 첫차에 의암성사를 비롯해서 한 차에 세 분씩 연행하였다. 5시가 지나서야 최종으로 최린과 한용운이 연행되었는데, 그때 시내는 일본군이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한편 전부터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중등 이상 각 학교 학생들은 전날의 지시에 따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1시쯤부터는 속속 탑동공원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2시쯤에 이르러서는 이들 학생의 수는 4, 5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때 경신학교 졸업생인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선언서가 낭독되자 흥분과 감격에 상기된 군중들은 일시에 숙연해졌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날 무렵 감격에 넘친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獨 立 宣 言 書
吾等은 玆에 我朝鮮이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에 權威를 仗하여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여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여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並進하기 爲하여 此를 提起함이니, 是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며 全人類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 何物이던지 此를 沮止 抑制치 못한지니라.
舊時代의 遺物인 侵略主義 强權主義의 犧牲을 作하야 有史以來 累千年에 처음으로 異民族 箝制의 痛苦를 嘗한지 今에 十年을 過한지라 我生存權의 剝喪됨이 무릇 幾何며, 心靈上 發展이 障碍됨이 무릇 幾何며, 民族的 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其餘補裨할 機緣을 遺失함이 무릇 幾何뇨.
噫라, 舊來의 抑鬱을 宣暢하려하면, 時下의 苦痛을 擺脫하려하면, 將來의 脅威를 芟除하려하면, 民族的 良心과 國家的 廉義의 壓縮銷殘을 興奮伸張하려하면, 各個 人格의 正堂한 發達을 遂하려하면 可憐한 子弟에게 苦耻的 財産을 遺與치 아니하려하면, 子子孫孫의 永久 完全한 慶福을 導迎하려하면, 最大急務가 民族的 獨立을 確實케 함이니, 二千萬 各個가 人마다 方寸의 刃을 懷하고 人類通性과 時代良心이 正義의軍과 人道의 干戈로서 護援하는 今日 吾人은 進하야 取함에 何强을 挫치 못하랴. 退하야 作함에 何志를 展치 못하랴.
丙子修護條約 以來 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食하였다하야 日本의 無信을 罪하려 아니하노라. 學者는 講堂에서 政治家는 實際에서 我 祖宗世業을 植民地視하고 我 文化民族을 土昧人遇하야 한갓 征服者의 快를 貪할뿐이요, 我의 久遠한 社會基礎와 卓犖한 民族心理를 無視한다하여 日本의 少義함을 責하려 아니하노라. 自己를 策勵하기에 急한 吾人은 他의 怨尤를 暇치 못하노라. 現在를 綢繆하기에 急한 吾人은 宿昔의 懲辯을 暇치 못하노라. 今日 吾人의 所任은 다만 自己의 建設이 有할 뿐이요 決코 他에 破壞에 在치 아니하도다. 嚴肅한 良心의 命令으로써 自家의 新運命을 開拓함이요 決코 舊怨과 一時的 感情으로써 他를 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 舊思想 舊勢力에 覊縻된 日本 爲政家의 功名的 犧牲이 된 不自然 又 不合理한 錯誤狀態를 改善匡正하야 自然 又 合理한 正經大原으로 歸還케 함이로다.
當初의 民族的 要求로서 出치아니한 兩國合倂의 結果가 畢竟 姑息的 危壓과 差別的 不平과 統計數字上 虛飾의 下에서 利害相反한 兩民族間에 永遠히 和同할 수 없는 怨溝를 去益深造하는 今來實績을 觀하라 勇明果敢으로써 舊誤를 廓正하고 眞正한 理解와 同情에 基本한 友好的 新局面을 打開함이 彼此間 遠禍召福하는 捷徑임을 明知할 것이 아닌가. 또 二千萬 含憤蓄怨의 民을 威力으로서 拘束함은 다만 東洋의 永久한 平和를 保障하는 所以가 아닐뿐 아니라 此로 因하여 東洋安危의 主軸인 四億萬支那人의 日本에 對한 危懼와 猜疑를 갈수록 濃厚케 하야 그 結果로 東洋全局이 共倒同亡의 悲運을 招致할것이 明하니 今日 吾人의 朝鮮獨立은 朝鮮人으로 하여금 正堂한 生榮을 遂케 하는 同時에 日本으로 하여금 邪路로써 出하야 東洋支持者인 重責을 全케 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여금 夢寐에도 免치못하는 不安恐怖로서 脫出게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로 重要한 一部를 삼는 世界平和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한 感情上 問題리요.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에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過去 前世紀에 鍊磨長養된 人道的 精神이 바야흐로 新文明의 曙光을 人類의 歷史에 投射하기 始하도다. 新春이 世界에 來하야 萬物의 回蘇를 催促하는도다. 凍氷寒雪에 呼吸을 閉蟄한 것이 彼一時의 勢라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니 天地의 復運에 際하고 世界의 變潮를 乘한 吾人은 아모 躊躇할 것이 업스며 아모 忌憚할 것 업도다.
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이며, 我의 自足한 獨創力을 發揮하야 春滿한 大界에 民族的 精華를 結紐할지로다.
吾等이 茲에 奮起하도다. 良心이 我와 同存하며 眞理가 我와 倂進하도다. 男女老少 업시 陰鬱한 古巢로서 活潑히 起來하야 萬彙群象으로 더부러 欣快한 復活을 成遂하게 되도다. 千百世 祖靈이 吾等을 陰佑하며 全世界 氣運이 吾等을 外護하나니, 着手가 곳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 따름인저.
公 約 三 章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직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요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하여금 어데 까지든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建國 四千二百五十二年 三月 一日
朝鮮民族代表
孫秉熙 吉善宙 李弼柱 白龍城 金完圭 金秉祚 金昌俊 權東鎭 權秉悳
羅龍煥 羅仁協 梁甸伯 梁漢黙 劉如大 李甲成 李明龍 李昇薰 李鍾勳
李鍾一 林禮煥 朴準承 朴熙道 朴東完 申洪植 申錫九 吳世昌 吳華英
鄭春洙 崔聖模 崔 麟 韓龍雲 洪秉箕 洪基兆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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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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