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천도교와 3.1운동(5)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기사입력 2025.06.11 12:48 조회수 9,690 댓글수 0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s url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6.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성사께서는 망명지 일본에 계시면서 언론과 교육의 창달이 문명개화의 첩경임을 절감하여 1906년 귀국 시 일본에서 최신 인쇄기와 활자를 구입하여 보문관을 설치하고 교서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업자인 민건식의 계획적인 사기에 걸려 실패하고 1910년 초 중앙총부 직속의 창신사를 다시 설립하여 이곳에서 천도교의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말 보성학원의 경영권 일체를 우리 교회가 인수하면서 동교가 경영하던 출판 일쇄소인 보성사를 중앙총부 직속의 창신사와 병합하여 출판사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보성사는『천도교회월보』, 교서, 교과서와 함께 일반 인쇄출판업까지 영업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결손이 계속되자 당시 보성사 총무인 임명수가 여러 차례 성사에게 더 이상 적자를 감당할 수 없으니 인쇄소를 처분하자고 건의했으나 그때마다 성사께서는 “그냥 둬!”라고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결국 교회 중진들까지 결손운영을 근심하여 보성사의 매각을 건의하자 성사께서는 “지금 결손을 본다고 해서 문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한나라가 많은 돈을 들여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일조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함이요. 우리 보성사도 그 역할을 다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요” 라고 하시면서 그 건의를 물리쳤다. 그때 중진들이 건의한 대로 보성사를 처분하였더라면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출판사는 문을 닫아야 하고 인쇄에 가담한 직원은 전부 구속될 것이 확실한데 누가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자청하겠는가. 결국 성사님 말씀대로 보성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다한 끝에 왜놈들의 방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성사의 선견지명은 그때 다시 증명되었다.   

     

      7. 대교당 건축과 독립운동자금 조성

      당시 천도교는 전국에 37개 대교구와 193개 교구, 그리고 300만 명의 교인을 가진 우리나라 최대의 종단이었다. 그래서 매월 지방에서 올라오는 성금으로 중앙총부의 경상비는 물론 재정난에 시달리는 20여 개 사립학교에 보조금을 지급하고도 매월 수천 원씩 예금할 정도로 재정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 돈은 종로경찰서가 매월 천도교의 재무 회계내용을 보고하도록 하는 등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어 장차 조선독립운동에 소요될 막대한 운동자금의 조달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도 막바지에 이르자 성사께서는 시국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면서 측근들에게도 국제정세의 변화에 항상 관심을 갖고 살펴보라고 지시하였다.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성사께서는 독립운동의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직감하셨다. 그 해 1918년 4월 4일 부구총회에서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의하고 교인 매호당 10원 이상씩의 건축헌금을 대신사 탄신기념일인 10월 28일까지 납부하도록 결의하였다. 모금이 시작되자 전국의 교인들은 생활수단인 논과 밭 그리고 황소 등을 팔아 성금을 냈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수원 대교구에서는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축을 빙자한 독립운동자금을 조성할 때 천도교 전교사인 백낙열을 위시한 교인 여러 사람이 아래와 같이 논과 밭을 팔아 건축헌금을 납부하였다.

                   백낙열 (수촌리)   논  3,000평,   밭   2,000평.

                   백낙소 (동 생)    논  1,500평    밭   1,000평

                   김흥열 (고주리)   논  3,000평    밭   3,000평 

                   기봉규 (사금발)   논  3,000평    밭   7,000평 및 가옥

                   최진협 (한각리)   논  1,500평    밭   1,000평

                   최진승 (한각리)   논  1,000평    밭   6,500평

                   박시정 (이화리)   산,  3,000평    소   1두

                   박용석 (노진리)   논  1,000평    밭   2,000평

                   박운선 (노진리)   논  1,000평    밭   2,000평

                   우준팔 (거묵골)   논    450평    밭   1,000평

                   우의현 (거묵골)   논  1,500평

                   문경화 (거묵골)   논  2,000평

                   우경팔 (거묵골)   논  1,500평      

                                   (주, 신인간 1979년 3월호 68~69면)      


      그런데 성금 모금 운동이 시작되자 일제는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천도교중앙총부가 보유한 한성은행의 3만 원, 상업은행의 3만 원, 한일은행의 6천6백 원 등 6만6천6백 원을 동결시키고, 이미 받은 성금은 전액 본인에게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교인들은 왜경이 감시를 피하기 위해 헌금을 돌려받은 양 가짜 영수증을 제출하거나 성금 액수를 10분의 1로 줄여 기장하는 등 교당건축성금으로 약 500만 원이라는 거금이 모금되었다. 

      중앙총부는 동년 가을에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윤치오 소유의 대지와 그 인근 부지 등 1824평을 3만 원에 매입하고 1918년 12월 1일에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했다.  

      그라나 중앙대교당 건축은 1919년 3·1운동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7월에 다시 시작하였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일제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조선은행 본점을 설계한 일본인 나까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에게 설계를 의뢰하고 도면을 첨부하여 총독부에 건축허가를 신청했으나 예상했던 대로 토목국 기사로부터 허가가 거부되었다. 이유는 교당설계가 너무 거창하고 내부에 기둥이 없어 붕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설계자인 中村이 직접 총독부에 출두하여 안전성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결국 교당 규모를 반으로 줄여서 겨우 허가를 받았다.

      교당과 중앙총부 청사 규모는 다음과 같다.

        대교당 1동 연와조 1층 212평 8홉, 2층 45평 6홉, 3층 14평 4홉,

                           4층 7평 8홉,  계 280평 6홉

        중앙총부 청사 2층 1동, 사무실 199평 1홉, 숙직실 1동 18평 5홉,

                              제1창고 1동 16평, 제2창고 1동 5평

                               1변소 19평, 제2변소 5평, 계 263평

                                   

      건축비는 대교당 건축에 22만 원, 중앙총부 건물 건축에 5만 원, 대지 구입에 3만 원, 합계 30만 원이 소요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건축성금이 3·1독립운동과 독립운동 군자금에 사용되었다.  


                     제2장  3·1운동의 계획과 실천

      1. 독립운동을 위한 49일 특별기도 실시

      성사께서는 국권침탈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끊임없이 구상하면서 은밀히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포덕 59년(1918) 8월 성사께서는 권동진·오세창·최린 세 사람을 조용히 봉황각으로 불러 “세계의 동향을 주목하여 중요 상황은 수시로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이 천명되고 그 해 11월에 4년간이나 계속되던 세계1차대전이 종식되면서 이듬해인 1919년 1월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성사께서는 이때가 독립운동의 절효의 기회로 생각하였다.

      포덕 59년(1918) 12월 6일 성사는 전체 교인에게 독립운동을 위한 49일 특별기도를 행하도록 종령 제120호를 반포하였다. 이것은 3·1운동을 앞둔 특별 구국기도로서 그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기    간 : 1919년 1월 5일~2월 22일(49일간)

          1. 기도시간 : 매일 하오 9시. 단 시일에는 시일기도를 마치고 이어 봉행함

          1. 기도의식 :   ➀ 청수 한 그릇을 봉전함

                             ② 백미 5홉을 봉전함 

                             ③ 촛불 3개를 청수 탁전에 점함

          1.  기도심고 :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대원으로 함

          1.  주    문 :  신사주문 (신사영기 아심정 무궁조화 금일지) 13회


      이와 관련하여 성사께서는 그 전해 12월 24일 인일기념식에 참석차 상경한 교단 간부들을 상춘원으로 불러 말씀하시기를 “지금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우리의 무위무능으로 간과 한다면 천추에 한이 될 것이다. 내 이미 계획한 바 있으니 제군들은 내 지시에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보국안민이 되고 못되는 것은 새해 1월 5일부터 시작하는 특별기도에 달려있으니 정성껏 시행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49일특별기도를 위해 서울·해주·의주·길주·원주·경주·서산·전주·평강 등 9개처에 대표기도처를 정하여 각기 4인의 중앙총부 간부진을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였다. 이는 닥쳐올 대사에 대비해서 각 지방 교회조직을 점검하려는 뜻이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세 사람은 동대문 밖 상춘원 성사의 거처에 자주 모여 파리강화회의 소식과 세계 약소민족 해방운동, 그리고 국내 인심동향 등을 성사에게 보고하는 한편 시국대처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2. 3·1운동의 3대원칙 확정

      포덕 60년(1919) 1월 초순 성사께서 권동진·오세창·최린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지금 우리 목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우리가 이런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무위무능하게 보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내 이미 오래전부터 작정한 바 있으니 그대들은 십분 분발하여 대사를 그릇됨이 없게 하라” 하시고 독립운동의 준비를 지시하시면서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 세 원칙은 성사가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확고부동한 소신이었다.

          1.  독립운동은 대중화 할 것

          1.  독립운동은 일원화 할 것

          1.  독립운동은 비폭력으로 할 것


      또한 독립운동의 추진은 권동진·오세창·최린 3인이 협의해서 진행하되 일본 경찰의 감시를 감안하여 최린이 거사계획을 주도하되 중요사항은 권동진·오세창과 상의해서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3. 민족대표의 선정

      성사의 지시를 받은 최린은 2월 초순경 최남선·송진우·현상윤 등과 재동 자택 또는 재동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극비리에 수차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협의하였다.

      우선 민족대표 선정과 관련하여 독립운동의 대중화 원칙에 의하여 무엇보다 민중의 신망을 받는 인물들을 물색해 보았으나 만족할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구한말의 대신 중에서 지조 있고 덕망 있는 인물을 찾기로 하여 우선 윤용구·한규설·박영효·윤치호 4인을 선정하고 교섭하기로 하였다. 윤용구는 구한국 대신으로 일본의 작위를 거절한 성품이 고결한 사람이었고, 한규설은 을사늑약 체결 시 참정대신으로 한사코 반대했던 사람이다. 박영효는 개화당 영수로 일본의 침략을 반대한 저명한 귀족 혁명가였고, 또한 윤치호는 과거 독립협회장으로 특히 미국인들한테 신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최린은 한규설, 송진우는 박영효, 최남선은 윤용구와 윤치호를 각각 맡아서 교섭해 보았으나 이들 모두가 승낙하기를 꺼리므로 결국 인물중심의 민족대표 구성은 실패하였다.

      이에 최린은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한 인물이다. 독립운동은 민족의 제전이다. 신성한 제수에는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더 좋을 것이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민족운동의 제물이 되면 어떠냐”고 하면서 민족대표를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아니라 의암 선생을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모시고 우리 젊은 사람들이 다 같이 대표단에 참가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나 최남선은 저명인사의 참여 없는 천도교 측만의 민족운동으로는 대중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하자 최린은 흥분을 가누지 못하며 “이 순간까지 논의해온 일은 전부 취소하기로 합시다” 하고 일어나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4. 천도교·기독교·불교의 합동

      구한말의 대신을 중심으로 민족대표 구성에 실패한 후 최남선이 최린을 찾아와 이르기를 “지금 기독교 측에서도 무슨 기미가 있는 듯한데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이승훈 장로와 더불어 의론할만하니 연락을 하여보는 것이 어떤가”라고 했다. 이에 최린은 즉시 현상윤과 의논하여 오산학교 출신인 김도태를 2월 8일 정주로 보냈으나 이승훈이 장로교회 관계로 선천에 가 있어 직접 만나지 못하고 오산학교 경영에 관하여 좋은 소식이 있으니 즉시 상경하라는 최남선의 말을 이승훈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승훈은 정주 장로교회 장로로 있으면서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계속 학교를 경영하고 있는 애국자였다.

      김도태의 전달을 받은 이승훈이 2월 11일 상경했으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최남선은 만나지 못하고 대신 송진우와 현상윤을 만나 셋이서 계동 김성수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천도교 측의 운동계획과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고 천도교 측 운동에 기독교 측의 참가 의향을 물었더니 이승훈은 이에 적극 찬동하고 동지를 규합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날로 서울을 출발하여 2월 12일 선천에 도착한 이승훈은 사경회에 참석한 장로교 목사 양순백·이명룡·유여대·김병조 등 동지를 만나 서울의 운동계획을 설명하였던바 일동은 한결같이 이에 찬성하였다. 다시 14일 평양에 나와 왜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기독병원에 입원하면서 장로교 목사인 길선주와 신홍식을 만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2월 17일 재차 상경하여 최남선을 만나려 하였으나 연락할 방도가 없어 고민하던 차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를 만나 기독교 측에서도 독립운동에 관하여 논의가 분분하다는 말을 듣고 2월 20일 박희도의 집에서 남감리교 목사 오영화·정춘수, 북감리교 감리사 오기선·신홍식 등 여러 사람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방략을 서로 협의한 결과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규합할 것과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결의하였다. 당초 함태영 집에서도 이와 별도로 이갑성·안세환·오상식·현준 등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협의를 하였으나 의견이 구구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2월 21일 최남선은 소격동 이승훈 숙소로 찾아가 그동안 왜경의 주목 때문에 상봉치 못한 이유를 말하고 같이 재동 최린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승훈은 그동안의 경위를 말하고 전날 박희도의 집과 함태영 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기독교 측에서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 최린은 독립운동은 민족적 대사업인 만큼 절대로 통합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남선도 이승훈도 동의하면서 내일 기독교 측과 다시 상의하여 대답하겠다고 하면서 어제 회의에서 운동자금 조달 문제가 가장 난제로 거론되었다고 하면서 천도교에서 5천원을 융통해 주면 좋겠는데 그것이 어렵다면 3천 원만이라도 변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최린은 천도교에서도 은행에 예금하였던 돈을 일전에 왜경에게 전부 압수당하여 곤란 중에 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주선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날 저녁 최린은 상춘원에 가서 성사님을 뵙고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운동자금에 대해 말씀드리자 성사께서는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5천 원을 융통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춘암에게 말할 터이니 돈을 받으면 곧 기독교 측에 보내시오”라고 승낙하였다. 다음날 2월 22일 천도교 금융관장 노헌용이 5천 원을 최린의 집으로 가져왔다. 최린은 즉시 이승훈이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가 5천 원을 직접 교부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22일 밤 이갑성 집에서 이승훈·박희도·함태영 등 여러 사람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구체적 방법을 협의한 끝에 천도교 측의 운동방법을 정확히 탐문한 후 합동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고 이 교섭을 함태영·이승훈 양인에게 일임하였다.

      다음날 저녁 함태영과 이승훈이 재동 최린 댁을 방문하여 전날 기독교 측의 회의 결과를 설명하고 독립선언보다는 독립청원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에 최린은 우리의 자주적 정신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선언이라야 옳다고 주장하자 두 사람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동지들과 상의 후에 회답하기로 하였다.

      그날 밤 이승훈·함태영 두 사람은 함태영 집에서 오기선·박희도·안세환 등 여러 사람과 숙의한 결과 천도교 측과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함태영·이승훈 두 사람을 기독교 측 대표로 선정하여 제반 교섭을 일임하였다.

      2월 24일 이들 두 사람이 최린 댁을 방문, 기독교 대표 자격으로 천도교와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발표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동이 공식으로 성립되었다. 

      최린은 의암성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성사께서는 양대 종교단체의 합류는 이번 민족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라 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2월 22일에 49일 기도회가 끝난 후 보고 차 상경한 교구장들과 우이동 봉황각 기도회에 참석했던 중앙총부 간부들에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 하셨다. 이번 거사에는 기독교 불교와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운동의 성격과 운동추진에 따른 제반 사항 등을 설명하고 추후 독립선언서의 발송 등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갈 것이니 각 교구에 내려가 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종교 이외의 단체는 모조리 해산시켰기 때문에 일반 사회단체를 포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종교단체 중에서 불교와 유교의 참가 없이는 일원화된 통일체제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2월 24일 밤 최린은 평소부터 친교가 있었던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계동 자택으로 찾아가 그동안의 경과를 밝혔더니 즉석에서 불교 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한용운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대단히 기뻐하였으나 유림 측의 참여가 없음을 못내 섭섭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후 한용운은 불교 측 동지들과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하고 일경의 감시가 심해 한용운·백용성 두 사람만 민족대표로 참가하기로 하였다. 다만 유교 측을 참여시키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유교 측은 원래 조직체계가 분명치 못하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인물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왜경의 경계가 삼엄하고 더 이상 조직을 확대하다가는 계획이 누설되면 대사를 그르칠 염려가 있어 세 교단이 주체가 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5. 독립선언서의 작성

      독립선언서에 대해서는 1919년 1월 하순 최린·최남선·현상윤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의 기본방향을 논의할 때 선언서 작성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작성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때 최남선이 “나는 내 생애를 통하여 학자 생활로 일관하려고 이미 결심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독립선언서만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데 그 작성상의 책임은 최형이 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최린은 그의 문장력을 인정해온 터라 그의 심정을 이해하였다. 다만 의암 선생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정신을 반드시 선언서에 반영하도록 부탁하고 선언서의 골자는 최린이 말하는 취지와 최남선의 생각을 서로 논의해서 기초하였다.

      그 후 최남선은 일본 정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강화회의 각국 위원에게 보내는 서한도 작성하기로 하고 우선 2월 15일 독립선언서를 작성 완료하여 최린에게 수교하였다. 최린은 초고를 읽어본 후 오세창·권동진에게 보내어 검토한 후 기독교 측에도 보내어 동의를 얻었다.

      그 후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최남선에게 선언서를 작성케 함은 불가한 일이니 선언문은 자기가 짓겠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으나 최린은 이를 거절하였다.

       

      6.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독립선언서 원고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조판한 후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에게 넘겨져 사원과 직공들이 퇴근한 후 신임할 수 있는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 직공 신영구, 그리고 기초자인 최남선 입회하에 2월 20일부터 인쇄에 들어가 25일까지 1차로 25,000매를 인쇄하여 신축 중인 천도교대교당으로 운반하여 은닉하고 미리 정한 대로 암호인 청색지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천도교에서는 안상덕이 3,000매를 수령하여 강원도와 함경남북도 방면으로 출발하였고 이경섭은 1,000매를 가지고 황해도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김상설은 3,000매를 인수하여 평양교구에 1,500매를 넘겨 평남 지역에 배포한 후 나머지 1,500매를 평북 지역에 배포하였다. 인종익은 3,000매를 인수하여 전라남북도를 거처 충청도 지역에 배포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김창준이 3,000매를 수령하여 평양과 선천 지방에 배포했고, 이갑성도 2,000여 매를 인수하여 서울 시내와 경상도 지방에 배포했다. 불교 측에서는 한용운이 3,000매를 인수하여 주로 경상도 지방과 서울 일원에 배포했다.

     2월 27일 밤 부족한 선언서를 추가 인쇄하기 위하여 이종일은 야간에 등불이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공장 내 창문을 모두 가리고 인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한창 인쇄가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인쇄한 선언문을 치우려 하였으나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라는 고함이 빗발쳤다. 모든 것을 각오한 이종일은 큰기침을 하며 문을 열었다, 신승희였다. 그는 독사처럼 음흉하고 생쥐처럼 날센 종로서의 한인 형사였다. 수없이 많은 애국동포가 그의 손에 검거되어 무참히 고문을 당하게 한 악명 높은 민완 형사였다

      이종일은 그의 앞에 무릎을 끓고 애원하였다. “하루만 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날 터이니 오늘 하루만 눈감아 주십시오.” 두 손으로 빌며 읍소하였다. 관내를 순시하던 그자는 보성고보의 뒷담 골목을 지날 때 인쇄소 안에서 여느 때와는 달리 창문을 굳게 가리고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들긴 것이다. 실내를 돌아보고 사정을 알아차린 그는 가만히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종일은 다시 그의 소매를 붙들고 사정하였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평소에 자주 들려 농담도 곧잘 하던 그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이종일은 다시 그의 옷소매를 끌며 “우리 성사님한테 같이 갑시다.” 하였더니 뜻밖에도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고 했다.

      이종일은 곧 밖으로 나와 성사 댁으로 달려가 위급상황을 보고 하였다. 묵묵히 듣고 계시던 성사께서 좀 기다리라면서 안방으로 들어간 후 잠시 있다 종이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이걸 가져다주시오. 밤늦게 수고가 많습니다. 아무쪼록 잘 무마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인사할 겨를도 없이 인쇄소로 돌아온 이종일은 신승희에게 종이 뭉치를 꺼내 주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면서 곧 사라졌다. 이종일과 김홍규는 일시에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쪼록 저자가 배신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다시금 힘을 내어 작업을 계속하였다. 10시가 넘어 일만 매의 독립선언서가 추가로 인쇄되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손수레에 실어 경운동 신축교당 창고에 갔다 숨겨놓고 성사에게 가서 무사히 인쇄를 마치고 운반해 두었다고 보고하였다.

      종로서 한인 형사 신승희는 성사로부터 5천 원의 거금을 받고 3·1운동이 발발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5월 초순에  종로서 사법주임과 함께 만주 봉천에 출장 갔다가 5월 14일 귀환하였는데 서울역 구내에 대기하고 있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자 그날 밤 준비했던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출장 중 직무유기와 뇌물수수 혐의가 탄로 된 것이다. 갖가지 악행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했던 그가 40세를 일기로 마지막에 민족적 양심에 따라 애국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종일은 재판에서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밤 21,000매를 인쇄하여 2월 28일 아침 오세창의 지시대로 7, 8인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종일 선생 논설집에 의하면 독립선언서는 2월 20일에서 25일까지 25,000매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3월 1일 만세시위를 시작한 서울을 비롯해서 개성, 부산, 대구, 평양, 신의주, 원산 등 10여 곳에서 동시에 봉기한 것을 보면 독립선언서는 2월 25일에 25,000매를 인쇄하여 먼 곳부터 배포하고 부족분 10,000매를 27일 인쇄한 것이 분명하다.

     

    (계속)

     

    KakaoTalk_20250414_150311481.jpg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