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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4. 수련도장 봉황각을 건축하다
성사께서는 일제강점기에 기본권이 박탈당한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된 종교 활동을 십분 활용하였다.
경술국치 후 총독정치를 예의 주시하시던 성사께서는 1911년 봄에 의친왕 이강공과 더불어 우이동 골짜기를 찾아 밀회를 하였다. 그리고 이해 8월에 중앙총부 간부진을 대동하고 우이동 일대를 탐사하고 금융관장 정구영에게 이곳을 중심으로 밭과 임야를 가리지 말고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약 3만 평 정도를 속히 구입하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우이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속한 심산유곡인 오지였다. 서울 시내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입구에 초가집 몇 채가 있고 4킬로 정도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도선암이란 암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해 11월 금융관장은 임야 27,946평을 800원에 매입하고 성사의 지시에 따라 이듬해부터 수련도장을 짓기 시작했다.
경술국치 이후 민족독립에 대한 남다른 결의를 다지고 있던 성사께서는 전국의 교역자들에게 우선 독립 의지를 확고히 심어주기 위해 수련도장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일제의 집요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오지인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기로 했던 것이다. 수도원은 교인이면 누구든 전국 어디에서나 올 수 있고 수련 기간도 제한이 없이 침식을 같이 하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를 피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봉황각 건축공사는 다음해인 1912년 3월 7일 기공하여 6월 19일 준공하였다.
당시 봉황각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봉황각 : 목조 와즙 1동 28평 2홉
내 실 : 목조 와즙 1동 18평 2홉
부속건물 : 양기와집 8평 3홉
5. 전국 중요 교역자 연성수련
제1회 49일 특별수련
수련기간 : 1912년 4월 15일~1912년 6월 2일
성사께서는 봉황각 건축을 시작하면서 지체 없이 지방 두목을 지명 소집하여 4월 15일부터 6월 2일까지 도선암을 빌려 첫 번째 49일 특별연성을 지도하였다. 인원은 13개도 18개 교구에서 21명이 참가했는데, 그중에 교인을 직접 교화 지도하는 대교구장 및 교구장이 18명, 연원주가 3명 등 핵심적 간부가 대거 참가하였다. 특히 이중에는 3·1운동 당시 천도교 측 민족대표인 라인협· 박준승· 임예환· 홍기조 등 4명도 수련에 참여하였다.
제1회 수련생 명단
吳榮昌, 洪基億, 李鼎錫, 李承祐, 韓泰勳, 李貞漸, 崔周億, 韓賢泰, 朴文華, 洪基兆, 林禮煥, 羅仁協, 朴容台, 金熙淳, 李采一, 鄭桂玩, 金炳泰, 李炳春, 朴準承, 吳昌根, 李鍾奭
수련생의 일과표는 다음과 같다
5시 기 상
6시 식 사
7시 휴 식
8시 ~ 11시 기 도
오후 1시 휴 식
2시 ~ 5시 기 도
6시 식 사
7시 휴 식
8시 ~ 11시 기 도
제2회 49일 특별수련
수련기간 : 1912년 11월 1일~12월 8일
1회 수련이 끝나자 성사께서는 1912년 11월 1일 두목 49인을 선발하여 2회 49일 연성수련을 시작했다. 수련 장소는 봉황각과 도선암 두 곳에서 실시하였으며 수련 시간은 제1회와 같다.
2회 수련은 전국 37개 교구에서 교구장 18명, 대교구장 23명 등이 대거 참가했으며 기타 연원주와 교구 임원이 참가하였다.
수련생 명단
姜琫秀, 吉學晟, 金明善, 金炳柱, 金奉年, 金洙玉, 金承周, 金案實, 金煉九. 金泳彦, 金宗範, 金鎭八, 朴洛陽, 朴麟珏, 朴花生, 方基昌, 方燦斗, 白永魯, 申光雨, 安處欽, 吳明運, 禹世夏, 劉啓善, 尹炳卨, 李君五, 李岐琓, 李燉夏. 李東求, 李祥宇, 李龍儀, 李有年, 李晶和, 李種秀, 林來圭, 林永秀, 張南善. 張承官, 鄭道永, 鄭承德, 鄭瑢根, 周德仁, 陳鍾九, 崔士岷, 崔碩連, 崔永坤, 韓寬珍, 韓世敎, 洪鳳巢, 黃學道
제1회와 2회 수련 시 성사님의 법설 대요는 다음과 같다.
“연성의 묘법은 이신환성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유형한 나이니 유형한 나를 무형한 나로 바꿀 것이요, 신변세사(身邊世事)의 나를 성중천사(性中天事)의 나로 바꿀 것이다. 그대들이 만일 육신의 나로부터 생기는 모든 인연을 끊는다면 본연한 성령의 나는 자연히 나올 것이다. 사람은 평소 견실한 수련을 쌓지 않으면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마음이 흔들리나니 이것은 그대들로 하여금 반드시 꼭 수련을 해야 되겠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시적인 결심은 쉬우나 평생을 통한 결심으로 수양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제3회 49일 특별수련
기간 : 1913년 1월 1일~ 2월 9일
포덕 54년(1913) 1월 1일 성사 지방 두목 48인을 선발하여 봉황각에서 제3회 특별연성을 49일간 실시하였다. 전국 37개 교구에서 대교구장 5명, 교구장 33명, 연원주 2명, 총부임원 5명, 교구임원 4명 등이 참가하였다.
수련생 명단
姜益漸, 金光俊, 金國彦, 李貴淵, 金基洙, 金士彬, 金世業, 金淳澤, 金良根, 金龍田, 金應旭, 金俊興, 金泰鍾, 魯相祐, 柳漢永, 朴光明, 朴仁和, 朴莊祐, 朴昌洛, 朴昌勳, 白寬範, 白應奎, 白粲浩, 孫太龍, 辛光魯, 元致英, 劉文學, 尹世顯, 李景燮, 李觀國, 李起東, 李象鉉, 李龍雷, 李廷馥, 李弼和, 林淇鎭, 林淳灝, 金哲鎭, 鄭相容, 丁永淳, 鄭漢泳, 趙錫烋, 池東燮, 崔競淳, 崔承雨, 崔孝健, 洪聖運, 洪淳杰, 洪河淸
이때 성사께서 수련생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는 가도화순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선사께서 역설하신 것이니, 수도의 극치는 부화부순이다. 천하대사는 다를지언정 가정에서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아무리 성인이라도 죽기 전에는 그 인격과 명예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요, 큰 성이은 큰 일을 당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인간생활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니, 첫째는 사상생활이요, 둘째는 학문생활이요, 셋째는 노동생활이다. 그 중에서 사상생활 하는 사람은 능히 학문생활 하는 사람과 노동생활 하는 사람을 부릴 수 있으나, 노동생활하는 사람은 학문생활하는 사람과 사상생활하는 사람을 부릴 수 없는 것이다. 난세에는 이것이 바뀌기 때문에 민생이 도탄에 드는 것이니라”하셨다.
(계속)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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