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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오사카역(大阪驛)
오사카역은 성사가 오사카에서 고베, 나라, 교토 등지를 다닐 때 이용하던 역이었다. 성사는 오사카에서 도쿄로 이주할 때도 이 역을 이용했다. 일본의 자료를 살펴보니 최초의 오사카역은 포덕 25년(1884) 5월 11일 문을 열었다. 당시 오사카에서 고베로 향하는 노선이 개통되면서 역사가 만들어졌다. 초대 역사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우메다 스텐쇼(梅田驛)”라는 애칭이 있었다. 이 일대에 매화밭이 있었던 것 같아 그렇게 불린 듯하다.
오사카역은 포덕 52년(1901) 7월 1일 제2세대 역사로 확장되었다. 제2세대 역사는 초기 역사에서 약 200m 동쪽으로 이동해 지어졌다. 역 앞에는 인력거꾼을 위한 광장이 조성되었고, 역 동쪽 끝에는 오사카우체국 우메다 지점과 전신국 등 공공시설이 함께 건설되었다. 제2세대 오사카역은 고딕 양식의 석조 건물이었으며, 당시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 센푸칸(泉布觀)과 함께 ‘오사카 3대 명소’로 불렸다. 성사가 일본에 왔을 때는 제2세대 역사가 지어진 직후였다. 이후 오사카역은 포덕 91년(1940) 제3세대 건축으로 확장되었고, 일본의 발전과 더불어 오사카역의 기능도 확장되어 포덕 120년(1979) 제4세대 오사카역이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오사카역은 제2세대 자리에 시대의 흐름에 맞게 현대적으로 확장된 것이다.

카미후쿠시마(上福島)
카미후쿠시마는 성사가 오사카에서 처음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당시 주소는 ‘오사카시(大阪市) 기타구(北區) 카미후쿠마치(上福町) 2정목(丁目) 733번지’였다. 성사는 포덕 45년(1904) 3월 19일 오사카에 도착해 이곳에 머물렀다. 성사가 머물렀던 여관이 있었던 이 일대는 현재 주택가로 변해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성사께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오사카역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답사 당시 일대를 돌아보며 ‘카미후쿠시마’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上福島” 우체국뿐이었다. 조사단이 우체국을 찾아가 직원에게 물었지만, 너무 오래된 지명이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조사단은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가능한 최대 범위까지 조사하기 위해 일대를 훑었다. 그 결과 카미후쿠마치(上福町) 2정목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으나, 733번지는 지번 자체가 없어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지역에서 오래된 “福島天滿宮”을 찾아 주지에게 물어보니, 그곳의 예전 주소가 카미후쿠시마 154번지였다는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한 지번 확인을 위해서는 일본 지적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느꼈다. 성사가 묵었던 733번지는 이번 답사로는 찾을 수 없어 추가 답사가 요망된다.
도지마우라마치(堂島裏町)
도지마우라마치는 성사가 포덕 45년(1904) 3월 말부터 6월 30일까지 약 3개월간 거주했던 곳이다. 당시 주소는 ‘오사카시(大阪市) 기타구(北區) 도지마우라마치(堂島裏町) 3정목(丁目) 11번지’였다. 성사는 이곳에 숙소를 정하고 인근에 사무실을 하나 더 구입해 사용했다. 성사는 이곳을 끝으로 오사카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도쿄로 이주했다. 이후 이곳은 천도교인들이 오사카를 방문했을 때 사용되었으며, 천도교 유학생들이 체류한 곳이기도 했다.
현재 이 일대는 일본의 통신회사 NTT(Nippon Telegraph and Telephone Corporation)의 도지마 지부가 자리 잡고 있다. 자료집에는 이곳이 NTT의 고베지부라고 되어 있었지만, 조사를 통해 도지마지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전 조사의 오류를 바로잡은 유의미한 성과였다.
자료집에는 도지마지부 건물 안에 테니스코트가 있고 그 자리가 11번지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건물 안내도에는 4개의 큰 건물이 있었고 중앙에는 주차장이 있었다. 처음에는 위치를 잘못 찾은 줄 알았지만, 한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보니 주차장 지붕 위에 테니스코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성사가 기거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쁜 마음에 사진을 찍고 조사단을 불렀다. 이 위치에 대해 설명하는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위기에 처한 교단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성사의 힘겨운 외유 생활이 떠올랐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답사의 고단함과 정확한 위치를 찾은 안도감이 겹쳐 한참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 감옥 터
제4사단사령부 감옥 터는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를 성공시킨 윤봉길 의사가 갇혔던 곳이다. 이 감옥은 오사카성 안에 위치해 있었다. 필자는 여러 차례 오사카를 방문하고 오사카성을 찾았지만, 이 사실을 몰랐다. 이번에 김동우 사진작가의 안내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답사할 수 있었다.
오사카성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풍국신사(豊國神社)가 보이고, 신사 조금 못 미친 왼편 정원 안에 ‘제4사단사령부 건물터’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 옆에는 일본 시인의 시비도 있다. 안내문에는 “동대번두소옥적(위수감옥적)(東大番頭小屋跡(衛戍監獄跡))”이라고 쓰여 있다.
윤봉길 의사는 포덕 73년(1932)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일본군 지도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11월 18일 윤 의사를 우편 수송선에 태워 오사카로 보냈고, 11월 20일부터 약 한 달간 오사카 형무소, 즉 이 제4사단사령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12월 18일 가나자와 구금소로 이송되어 다음 날인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에 총살되었다.
그의 마지막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는 주문을 낭랑하게 읊으며 순국한 것이었다.
조사단은 이 감옥 터에서 청수를 모시고, 윤 의사의 순국 정신이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이 되리라는 믿음을 담아 같은 주문을 외쳤다.
텐노지(天王寺) 공원과 통국사(統國寺)
텐노지 공원은 포덕 60년(1919) 3월 19일, 3·1운동 이후 오사카 재일 유학생들이 만세를 외치기로 모였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 23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시위를 이끈 인물은 염상섭이었다. 현재 텐노지 공원은 일본인의 휴식처로 잘 조성되어 있다.
근처에는 통국사라는 사찰이 있다. 통국사는 ‘백제고념불사(百濟古念佛寺)’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들이 고향을 기리는 절이다. 해방 이후 오사카의 재일교포가 이 절을 매입하여 ‘원효종’이라는 종파로 운영하고 있다. 절 안에는 재일교포들의 묘와 함께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해가 봉안된 납골당이 있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유해 74구는 2019년(포덕 160년) 2월 27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국으로 송환되었으며, 지금은 미송환 유해 1구가 별도로 봉안되어 있다. 절에는 제주 4·3항쟁 희생자 비와 함께 각 마을의 돌로 조성된 공간도 있으며, 입구에는 베를린 장벽도 설치되어 있다.
오모리(大森) 정류장
오모리 정류장은 오사카 외곽의 사카이시 미나미구에 위치한다. 오사카 시내에서 약 4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다. 성사는 이 먼 곳까지 조희연 등 개화파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요시찰 문서에는 성사가 오모리 정류장까지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왜 이 한적한 곳을 택했는가? 조희연 등이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만나기 위한 장소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성사의 작은 움직임조차도 일제는 요시찰 인물로 주목해 기록에 남겼다.
유적 조사의 기쁨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유적지를 답사하는 일은 책이나 문서로는 경험할 수 없는 깊은 감응을 준다. 필자는 스승님들의 유적지를 답사하며 잊지 못할 체험을 여러 차례 해왔다.
이번 성사의 일본 행적 답사도 그러한 경험 중 하나였다. 성사의 외유가 지닌 깊은 의미를 다시금 떠올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개벽의 정신,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기상이 느껴졌다.
찾은 장소도 있었고 찾지 못한 곳도 있었기에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아직 조사해야 할 행적도 남아 있으며, 이를 후속 조사에 반영할 예정이다. 조사에 함께해준 사회문화관과 동료 조사원들에게 감사드리며, 이 기록이 뒤를 잇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끝.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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