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동학(東學) 연구를 넘어서 천도교학(天道敎學) 정립으로
용담정 내에 서 있는 수운 대신사의 동상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터전인 지구 행성은 급변하는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물질문명의 극단적인 발달과 정신적 가치의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를 ‘개벽세(開闢世)’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혼돈(混沌, chaos) 속에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인류의 새로운 정신적 좌표를 제시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가치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도교의 근본 이념과 교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천도교학(天道敎學) 정립은 시대적 요구에 비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또 현재 모처럼 전국적으로 열기를 띠고 있는 동학 르네상스가 천도교에 대한 관심 혹은 연구(공부)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천도교의 미래와 인류의 활로를 열기 위해 천도교학 정립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대적 소명으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대종정의(大宗正義)> 「오교의 신사상시대」를 보면 “우리 (천도)교의 본소(本素)는 가득히 차서 반푼의 더할 것을 요구치 아니하나, 이것을 발표하기는 사상문명으로 현대문명의 선구(先驅)를 지어야 하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다시 개벽’의 시대, 문명대전환의 시대를 이끌어갈 ‘천도교학’을 정립하여 포덕광제의 대업을 이루어야 한다.
그럼 우리가 정립해야 할 천도교학이란 무엇인가?
천도교학이란, 수운대신사가 창명한 천도(天道)와 동학(東學) 그리고 의암성사에 의해 근대적 종교체제를 도입·구축한 천도교(天道敎)의 교리, 역사, 문화, 사상 및 그 실천적 의미를 총체적으로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교의(敎義)를 넘어,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정신을 통해 현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법과 지구적 차원의 위기에 대한 대응 방안, 현대문명의 대안을 제시하는 실천적인 학문이다.
천도교학은 기독교학, 불교학, 도교학 등과 같이 종합학문적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앞으로 연구 성과가 축적된다면 이를 다시 분야별로 세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도교학은 그동안의 동학농민혁명 역사 중심의 동학(東學) 연구와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이제는 K-컬쳐(=문화)의 뿌리가 되는 K-사상 연구 흐름과 함께 기존의 동학 연구를 넘어서는 천도교학을 연구·정립해야 한다.
동학 연구가 천도교의 뿌리와 발생 배경을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천도교학은 그 뿌리를 바탕으로 현대에 살아 숨 쉬는 종교로서의 천도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가치를 학문적으로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다. 천도교학 정립은 천도교를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살아있는 종교'이자 '미래 문명의 대안'으로 확립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작업인 것이다. 물론 천도교학 정립 과정에는 기존의 동학 연구의 축적된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엄밀한 문헌비평을 바탕으로 해체(解體, deconstruction)하는 작업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천도교학 체계 정립의 기본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종교학을 핵심으로 하되, 철학,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등 다학문적 방법을 통합하여 천도교 현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천도교의 핵심 교리(시천주, 사인여천, 후천개벽 등)와 역사(동학혁명, 3·1혁명 등), 조직(중앙총부, 교구), 수행/의례(주문, 시일식 등)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종합적 학문 분야로 정립한다. 마지막으로 천도교 사상이 현대 사회의 문제(환경, 평화, 인권 등)에 제시하는 의미를 찾아 실천적 역할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
천도교학은 우선적으로 천도교의 다섯가지 핵심 교리를 중심으로 현대학문을 참조하여 그 내용을 체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시천주(侍天主)의 종교학·신학적 정립이다.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이 근본 교리의 신관(神觀)과 인간관(人間觀)을 현대 종교학·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심화해야 한다. 특히 한울님과 인간의 내재적 합일이라는 독특한 사상을 서구 종교와의 비교를 통해 보편성과 독창성을 확보해야 한다.
둘째,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학적 정립이다.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가르침은 인류 평화와 공생의 시대를 여는 현대 윤리의 핵심 원리이다. 인간 존엄성을 극대화하는 이 사상을 생태 윤리, 사회 윤리 등에 확장하여 적용하는 학문적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문명사적 해석이다.
‘다시 개벽(開闢)’을 통해 오는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의 비전은 시대적 변혁과 새로운 문명 건설의 동력을 제공한다. 이는 미래학, 사회 변동론 등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넷째, 수심정기(守心正氣)의 수양론적 정립이다.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한다"는 수양법은 현대인의 정신 건강과 영성 회복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이는 심리학, 명상학 등의 학문과 연계하여 그 과학성과 실천성을 입증하고 보급해야 한다.
아울러 의암성사의 ‘이신환성(以身換性)’ 수행법과 비교분석하여 천도교 수행법의 변화발전 양상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이웃 종교의 수행법과 비교하여 그 독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궁극적 목표로서의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론이다.
천도교의 최종 목적인 '이 세상에 한울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적 관점에서 연구하여 구체적인 사회 개혁 모델과 정책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구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안을 도출해서 구현해야 한다.
이와 함께 천도교의 역사를 철저한 고증(=실증)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 사실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공정하게 기술해야 한다. 특히 그동안 미흡했던 천도교 제도변천사의 연구·정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향후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천도교백년약사<상권> 이후 중단되었던 교사 편찬을 차근차근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 천도교학 정립의 실제적인 방법론은 무엇일까?
우선 천도교 중앙총부 산하에 독립적인 (가칭)천도교학연구원이나 천도교학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대학교를 설립하여 천도교학과를 설치·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현재 운영 중인 천도교종학대학원과 연구소 등을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이를 위해 먼저 전문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교단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종교학, 철학, 역사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연구 인력을 적극적으로 확보하고 지원하여, 학문적 객관성과 다양성을 보장해야 한다.
다음으로 경전의 현대적 해석(解釋) 및 교재 편찬이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의 핵심 경전을 현대어로 풀이하고 주석을 달아 일반 대중과 학계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교인과 일반인을 교육할 체계적인 천도교학 교재를 편찬해야 한다.
경전의 현대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다. 교인들의 정성과 지혜를 모아 시간이 걸리더라도 질높은 번역과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앞으로 도래할 통일시대를 생각한다면 북한 천도교경전에 대한 비교 연구도 함께 병행해야 한다. 천도교종학대학원의 교재로 우선은 ‘천도교학 개론’ 같은 것을 편찬하여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내외 학술 교류를 활성화해야 한다. 국내외 주요 대학 및 연구 기관과의 학술 교류를 통해 천도교 사상의 글로벌 보편성을 검증하고 확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천도교학 학회나 연구회 등 연구 네트워크를 조직·운영해야 한다. 물론 현재 운영 중인 동학학회와 연계하여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각 분야(교리, 교사, 의례, 사상사 등)별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천도교학 총서'를 발간하여 학문적 권위를 확보하고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이와 함께 천도교의 예복, 노래(천덕송과 송가), 건축 등 종교 예술과 문화적 표현을 분석하여 한국 종교 문화사 내에서의 위상도 정립해야 한다.
이러한 천도교학 정립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일까?
첫째, 종교적 정체성 및 위상 강화이다. 학문적 기반 위에 교리가 정립되면, 천도교는 근대적 민족 종교라는 역사적 수식어를 넘어 현대 인류 문명의 대안을 제시하는 종교로서 새로운 위상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둘째, 대사회적 영향력이 증대될 것이다. 정립된 학문적 논리를 바탕으로 교육, 윤리, 환경, 통일 문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천도교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참여와 영향력이 크게 증대될 것이다.
셋째, 천도교 세계화의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인내천, 사인여천 등 천도교의 보편적 가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국제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천도교의 세계화를 위한 단단한 발판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천도교학’ 정립으로 용시용활(用時用活)해야 할 시점이다.
‘다시 개벽(開闢)’의 정신은 단순히 과거의 구호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맞게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는 천도교의 생명력이다. 지금은 천도교학 정립을 통해 천도교의 빛나는 사상을 현대 학문 체계 안에서 새롭게 부활시켜야 할,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다시 개벽'의 시점이다.
교단과 학계, 그리고 모든 동덕들이 힘을 모아 천도교학 정립의 대업(大業)에 매진할 때, 천도교는 민족의 구심점을 넘어 인류의 정신 문명을 선도하는 종교(=인류교)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천도교학 정립,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요 우리의 소명이다.
글 박돈서(선도사, 공주교구장, 감사원장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