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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행복한 세상(6)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주의.통제경제를 넘어서 시천주(侍天主).인내천(人乃天)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 원리와 방향으로, 자율과 책임, 정성과 공경, 동참과 협동의 3가지를 차분히 제시한다 -
신인간사 윤태원 대표, 제45회 잡지발행인 세미나 참가신인간사 윤태원 대표는 (사)한국잡지협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제45회 잡지발행인 세미나에 참가해, AI시대를 맞이한 잡지산업의 미래 방향과 디지털 융합 전략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는 자리에 함께했다고 전했다. 이번 세미나는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대만 타이베이 시저 메트로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으며, ‘AI 디지털융합시대, 잡지 가치와 미래’를 주제로 국내 잡지발행인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윤 대표는 이번 세미나를 통해 국내외 잡지산업의 변화 흐름을 직접 체감하며, 특히 공루친 대만잡지협회 이사장의 대만 잡지산업 특강, 황창연 플랜티엠 전무이사의 ‘AI First 전략’ 발표, 김창준 플랜티엠 상무의 마케팅 상생 방안 등에 주목하였다. 또한 “기술의 변화에 발맞춰 잡지 콘텐츠의 깊이와 철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번 세미나는 동아시아 잡지산업의 연대 가능성과 새로운 교류의 발판을 확인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한 윤 대표는 세미나 기간 중 만찬 자리에서 “내년(2025년) 4월 1일은 (주)신인간사 창립 100주년이자 『신인간』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임을 소개하며, 한국잡지협회 임직원들과 회원사들의 관심과 축하를 당부했다. 아울러 “잡지의 공공성과 문화적 가치를 지켜온 『신인간』 100년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기념행사에도 적극적으로 함께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잡지협회 백동민 회장은 인사말에서 “AI 기술이 급변하는 시대에도, 잡지가 지닌 문화적 가치와 공공성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이 세미나가 잡지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공동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한국잡지협회는 1962년 창립 이래 국내 잡지산업을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 매년 세미나를 통해 산업 현안을 논의하고 잡지인의 상호 교류를 도모하고 있다. -
영해동학혁명 154주년, 동학정신의 현대적 계승을 모색하다천도교와 학계, 지역 시민사회의 협력으로 지난 6월 20일(금)부터 21일(토)까지, 경북 영덕군 영해면에서 ‘1871 영해동학혁명 154주년 추모제 및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1871년 동학도인들이 펼친 민중항쟁을 오늘의 시선으로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계승할 구체적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번 대회는 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영덕군의 후원 아래 진행되었으며, 동학 천도교 정신인 인내천(人乃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치가 어떻게 당대 민중의 실천으로 구현되었는지를 중심에 두고 논의가 이루어졌다. 최초의 한글 번역본 출간… 154년 만에 세상에 나온 사료 이번 학술대회는 특히, 그간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던 영해동학혁명 관련 1차 사료인 『교남공적』과 『영해부적변문축』의 순한문 원본을 한글로 번역·감수하여 출간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오후 1시, 영해 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열린 학술대회는 김광열 영덕군수, 김성호 영덕군의회 의장, 황재철 경북도의원 등 지역 주요 인사, 천도교 중앙총부의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정의필 도정, 이용 도훈을 비롯해 서울, 부산, 남해, 영양, 예천, 상주, 천안, 아산, 장흥, 순천 등 전국 동학농민혁명연대 회원 단체와 많은 시민들이 함께하여 큰 호응과 관심 속에 성황리에 열렸다. 기존 연구를 넘는 새로운 통찰… 해월 최시형의 역할 재조명 그간 동학혁명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 거의 유일한 참고자료였던 「도원기서」에 비해, 이번 번역 출간된 『교남공적』과 『영해부적변문축』은 당시 관군의 진압 작전일지와 피의자 문초 기록을 담고 있어 보다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해월 최시형이 처음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고 총기포령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이 문초기록을 통해 밝혀졌고, 문초 당시 이필제, 이제발 등을 주동자로 지목함으로써 해월의 존재를 보호하려 한 의도도 드러났다. 또한 여성 소사들의 활발한 참여가 확인되어, 이전 사료에서는 누락된 역사적 실체가 드러났다. 다만 『교남공적』이 초기에 작성된 문초기록이 아닌 2·3차 문초기록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건의 전모를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지적되었으며, 추가 사료 발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동학, 한국형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 학술대회에서는 ‘1871년 영해동학혁명의 재해석과 향후 발전 방향’을 주제로 나행주 건국대 교수가 좌장을 맡고, 신상구 위덕대 교수가 기조강연을 통해 동학의 평등사상과 공동체 정신이 조선 후기 사회 변혁의 분기점이 되었으며, 영해동학혁명은 한국적 근대화의 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신혜란 인천대 연구원은 발표에서, 동학의 자주·평등 정신이 현재 K-컬처의 근간을 이루며, BTS의 ‘Love Yourself’ 메시지와 동학의 인내천 사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흥미롭게 조명했다. 또한 장우순 국학진흥원 연구원과 허채봉 부산동학기념사업회 대표는 새로 공개된 사료 분석을 통해 영해동학혁명이 전국 각지의 동학도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대규모 항쟁이었음을 입증하였다. '동학 민주주의'의 가능성, 새로운 시대 담론으로 떠오르다 토론에서는 ‘혁명’이라는 명칭에 대한 논의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발표자와 참가자들은 영해동학혁명이 민중 중심의 정치·사회적 변혁이자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특히 ‘동학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새롭게 제시되며, 동학정신의 현대적 계승 가능성이 모색되었다. 안승문 동학실천시민연대 대표는 “동학은 19세기의 사상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생명의 사상이며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동양적 가치”라고 강조하였다. ‘살생금지’와 ‘시천주’의 실천… 영성의 군대 동학농민군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동학혁명군이 단순한 무장항쟁이 아닌, 주문을 송주하며 행진하고 살생금지와 인도주의 행동강령을 실천한 영성의 군대였음을 재확인하였다. “굶는 자 먹이고, 헐벗는 자 입힌다. 잘못을 뉘우치면 선처하고, 끝까지 탐관오리를 징치한다.” 이와 같은 강령은 천도교가 지금도 실천하고자 하는 시천주 신앙의 사회적 구현이었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실체를 새삼 일깨워주는 대목이었다. 추모제 통해 순도자의 넋을 기리고 천도교인의 신앙을 되새기다 21일 오전에는 순도 154주년을 기리는 추모제가 봉행되어, 동학 신앙을 실천하다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천도교 의례를 중심으로 진행된 이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시천주와 인내천의 신앙을 오늘의 삶 속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천도교, 동학혁명 계승을 넘어 민족 미래로 나아간다 이번 행사는 단순한 기념의 차원을 넘어, 동학이 남긴 신앙과 실천의 유산을 오늘날 천도교와 시민사회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의 장이었다. 참석자들은 앞으로도 기념관 건립 등 하드웨어 중심의 접근을 넘어서, 스토리텔링, 교육, 문화콘텐츠를 통한 동학정신의 대중적 계승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권대천 기념사업회 위원장은 “영해동학혁명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한 민주혁명이며, 천도교는 그 중심에 있었다”고 밝히며, “그 정신을 되살려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인권, 생명 평화의 길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천도교중앙총부는 앞으로도 동학정신의 현대적 해석과 실천을 통해, 민중과 함께하는 신앙의 길을 흔들림 없이 이어갈 것임을 밝혔다. -
천도교 기관장회의 개최,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사업 등 주요 안건 논의지난 6월 19일, 천도교 주요 기관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단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기관장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는 박인준 교령을 비롯해 김성환 연원회의장, 성주현 상주선도사, 강병로 종무원장, 변종제 종의원부의장, 이국진 감사원장, 김 산 유지재단이사장 등 교단의 핵심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안건들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첫째,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한 준비 상황과 향후 추진 방향이 검토되었다. 해월신사의 사상과 순도 정신을 기리는 이번 기념사업은, 2027년을 맞아 대내외적으로 천도교의 정체성과 역사적 의미를 알릴 중요한 계기로 평가되고 있다. 참석자들은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와 범국민적 참여 방안을 함께 모색하며, 중장기 계획 수립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둘째, 종학대학원 운영 개선(안)이 상정되어, 현재 운영 방식의 개선점과 향후 교육 방향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특히 교역자 양성과 교리 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제도적 보완과 예산 지원 방안이 주요 쟁점으로 다뤄졌다. 셋째, 유지재단 소유 우이동 152번지 부지에 대한 주차장 설치 요청 안건이 다뤄졌다. 교단 재산의 효율적 활용과 지역사회 편의 증진을 위한 이 안건에 대해 참석자들은 현장 여건과 행정 절차를 고려한 타당성 검토를 진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번 기관장회의는 교단의 주요 현안에 대해 책임기관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앞으로도 긴밀한 협의를 통해 천도교 교단의 발전과 교화의 활성화를 위해 공동의 노력을 지속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
해월 최시형 신사 고향 포항, 기념관 건립을 위한 첫걸음 내딛다해월 최시형 신사의 고향 포항에서, 신사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기념관 건립 첫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세미나는 천도교를 비롯한 동학 관련 인사들과 포항시민들의 깊은 관심 속에 진행되었으며, 천도교에서도 오랜 숙원이자 시대적 과제라 할 수 있는 해월 기념관 건립의 서막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사단법인 동대해문화연구소는 6월 23일(일) 오후 2시, 포항시 남구 지곡동 포스코 체인지업그라운드에서 경상북도와 포항시, 포항시의회의 후원을 받아 『포항 해월 최시형 선생 기념관 건립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석태 동대해연구소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호남과 충청 등지에는 이미 여러 동학기념 시설이 조성되어 있음에도, 정작 해월 선생의 출생지인 포항에는 아직 기념공간이 없다는 점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포항다운 콘텐츠와 공간으로 최상의 기념관을 만들어내겠다”고 밝혔다. 세미나에서는 국내 각지의 동학 관련 기념관 조성 사례와 지역 홍보 활동이 공유되었다.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은 전주 기념관의 건립 과정과 전시 운영을, 송선희 청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손병희 유허지 조성사례를 발표하였다. 정의필 울산대 명예교수는 울산 수운 최제우 유허지를, 김성대 경주동학역사문화사업회 이사는 경주 동학홍보 현황과 과제를 소개했다. 천도교중앙총부를 대표해 참석한 남연호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은 “해월 최시형 선생 기념관, 어떻게 설립하면 좋을까요?”라는 발표를 통해, ‘해와 달을 품은 포항정신’과 해월사상의 조화를 이루는 기념관 조성을 제안해 큰 주목을 받았다. 남 관장은 특히 “포항의 자연과학도시 이미지에 걸맞게 해월 정신을 창조적으로 풀어내는 방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종합토론에서는 도형기 지속가능발전연구원장의 사회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참석자들은 MZ세대를 위한 VR·AR 체험관 도입, 포항·경주·울산의 ‘해오름동맹’을 활용한 예산 확보, ‘K-동학’이라는 이름으로 해월정신의 세계화, 동학 해설사 양성과정 사전 운영, 포항정신문화 테마파크와의 연계 등 해월 기념관이 단순한 과거 회고를 넘어 현대적 신앙·정신문화 플랫폼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공감하였다. 이번 세미나는 해월 정신의 뿌리를 되새기고 천도교의 사상적 정수를 현대 사회와 연결하는 중대한 전환점이다. 천도교중앙총부는 해월신사의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포항 기념관 건립에 전 교단적 관심과 협력을 모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해월신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도덕적 삶, 자주적 신앙, 평화의 실천정신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세계에 널리 퍼져나가기를 기원한다. -
동학 · 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영상콘텐츠 : 춘천교구 편(8)동학·천도교의 역사와 교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이 나왔다.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춘천교구 교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동영상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번 사업은 천도교의 교인들을 통해 민족종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며 보존하는 의미있는 사업으로 그 첫 번째 발걸음을 춘천교구에서 시작했다. 춘천교구는 114년의 역사를 가진 천도교의 주요 교구 중 하나이다. 이번 동영상 콘텐츠를 통하여 천도교를 알지 못했던 대중들에게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번에 제작된 총9편의 영상 콘텐츠는 향후 연구 및 문화 콘텐츠 창작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편집자 주- 이 영상에서는 유영희 선도사의 인터뷰를 통해 천도교인의 삶과 신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춘천에서 나고 자란 그녀의 가족사는 천도교 신앙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부모님의 헌신적인 신앙생활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군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천도교 신앙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신앙에 감명받아 열성적인 교인이 되었다. 가평 화학산 수도원 건립에 헌신한 부모님의 이야기는 그녀의 삶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이 영상은 한 가족의 삶을 통해 천도교 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
동학 · 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영상콘텐츠 : 춘천교구 편(7)동학·천도교의 역사와 교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이 나왔다. 동학·천도교 인물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춘천교구 교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동영상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번 사업은 천도교의 교인들을 통해 민족종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며 보존하는 의미있는 사업으로 그 첫 번째 발걸음을 춘천교구에서 시작했다. 춘천교구는 114년의 역사를 가진 천도교의 주요 교구 중 하나이다. 이번 동영상 콘텐츠를 통하여 천도교를 알지 못했던 대중들에게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번에 제작된 총9편의 영상 콘텐츠는 향후 연구 및 문화 콘텐츠 창작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편집자 주- 이 영상에서는 유영희 선도사의 인터뷰를 통해 천도교인의 삶과 신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춘천에서 나고 자란 그녀의 가족사는 천도교 신앙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부모님의 헌신적인 신앙생활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군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천도교 신앙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신앙에 감명받아 열성적인 교인이 되었다. 가평 화학산 수도원 건립에 헌신한 부모님의 이야기는 그녀의 삶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이 영상은 한 가족의 삶을 통해 천도교 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
천도교와 3 · 1운동(7)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독립만세운동"『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9. 지하 독립신문의 발행 천도교는 3․1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영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지하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니 얼마나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과거 『제국신문(帝國新聞)』을 발행했던 언론인으로 신문의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곧 전개될 3·1독립운동의 취지와 운동의 전개 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춘암상사와 상의하여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발행하기로 하고 보성학교 교장인 윤익선(尹益善)을 발행인으로 정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한 이종일은 3월 1일 만세운동이 터지면 자신이 구금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전 2월 28일『천도교회월보』발행인 이종린(李鍾麟)으로 하여금 독립신문의 창간호 원고를 집필토록 하여 보성사에서 발행하도록 했다. 이에 보성사의 김홍규 감독은 3월 1일 오전에 독립신문 1만 5천 부를 인쇄하여 당일에 배부하였다. 이렇게 해서『조선독립신문』제1호가 간행되자 일경은 이날 오후 6시에 윤익선을 체포했다. 이에 창간 실무를 담당했던 이종린은 이날 밤 경성 서적조합 서기 장종건(張倧鍵)과 논의하여 독립신문을 프린트 판으로 계속 발행하기로 하고 3월 2일 간행비 20원을 장종건에게 전했다. 그래서 이종린은 관훈동 서적조합에서 독립신문 제2호, 제3호, 제4호까지 발행하였으나 역시 일경에 발각되어 3월 10일 원고와 등사기구 일체를 압수당하고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독립신문』의 내용을 보면, 제1호는 주로 민족대표들의 거사에 임하는 순국 결사의 결의를 담고 있다. 제2호는 3월 1일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 관련 기사와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였다. 특히 가정부(假政府), 즉 임시정부의 조직계획을 예고하는 기사가 주목을 끈다. 제3호는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상황을 계속 보도하고 있으며, 제4호는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던 문서에 대해 보도하였다. 그 후 『독립신문』은 천도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장종건의 주도 아래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계속 비밀리에 발행되었으며, 3월 25일 장종건 등이 체포된 후에도 사람과 장소를 바꾸어가며 6월 22일 제36호와 8월 29일 국치기념호(國恥記念號)까지 간헐적으로 발행되었다. 『독립신문』발행 후 경향 각지에는 이에 고무되어『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조선민보(朝鮮民報)』,『국민신보(國民新報)』,『혁신공보(革新公報)』등이 연달아 간행되어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독립운동의 길잡이가 되었다. 10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독립만세운동 탑동공원에서 학생들과 합류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어느덧 서울 시내를 누비며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으로 돌변하였다.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수십만 군중의 시위행진은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온 시가는 철시하고 시위군중의 대열이 물결치는 가운데 일제는 전 경찰력과 보병 3개 중대, 기병 1개 소대를 시내 요소에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시위대열의 수에 압도당한 일제는 처음에는 방관하는 듯하였으나 해질 무렵부터 시위군중을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적수공권으로 독립을 외치는 시위행렬은 점차 일제의 저지선에 부딪혀 주모자급이 속속 구속되었으나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시내로 번져가면서 밤에는 횃불이 등장하고 태극기가 곳곳에 꽂혀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의 함성은 삽시간에 전국에 퍼져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나갔다. 3월 1일 만세시위가 시작된 것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개성, 수원·평양·진남포·안주·선천·의주·대구·부산,원산·홍원등 11개 시·군에서 서울의 거사와 때를 같이 했다. 다음날에는 해주·연안·황주·중화·강서·대동에서 일어났으며, 5일까지는 경기 이북지역에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5일에는 군산·벽동·맹산·영변, 10일에는 철원·광주에서 궐기하였고, 점차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회조직이 있는 곳부터 터져 나온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은 요원의 불길처럼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우리나라 최남단인 제주에서는 3월 20일에, 최북단인 은성에서는 4월 4일에 각기 봉기하였다. 이러한 만세시위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3월 6일에는 서간도에서 7,200여명이 시위하였고, 13일에는 용정에서도 독립선언대회가 개최되었다. 비폭력 군중의 평화적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전투태세를 갖춘 2개 사단의 정규군과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헌병 2만명, 이밖에도 경찰과 한인 헌병보조원 수만 명을 분산 배치하였다. 일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군중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시위 군중에 대한 발포는 물론 이들을 집단학살한 예가 허다하였으며, 특히 평북의 정주, 평남의 맹산·양덕, 황해도 수안, 그리고 수원 제암리 등지에서는 수십 명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또한 구속된 시위자에 대한 고문 역시 잔인무도하였다. 수많은 시위자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생명을 잃거나 불구자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집계된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의 시위운동에 참가한 인원과 그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집회 건수 1,542 회 집회 인원 2,023,098 명 사 망 자 7,509 명 부 상 자 15,961 명 구금자 수. 46,948 명 소실된 교회 47 동 소실된 학교 2 동 소실된 민가 715 동 이와 같이 기미 3·1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학살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독립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일제에 대해 경종을 울리게 함으로써 그 후 일제가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바꾸어 소위 문화정치라는 통치방법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11. 민족대표들에 대한 공판의 진행 남산 경무총감부에 구속된 민족대표 29명은 그날 밤부터 일제히 개별적인 취조가 시작되었다. 의암성사와 권동진·오세창·최린 4인은 청사 정문 안의 숙직실에 수감된 후 개별적으로 불려 나가 거사에 대한 간단한 취조를 받기 시작하였다. 3월 1일 밤중에 전원에 대한 제1차 취조가 끝났는데, 그 결과 선언서에 서명치 않은 인사들 중에서도 독립운동의 모의와 추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일경은 즉시 관련자 체포에 나서 다음날부터 박인호·최남선·노헌용·김홍규·김도태·함태영·송진우·현상윤·임규·안세항·이경섭·김세환·김지환·강기덕·김원벽·정노제 등 16인을 체포하였다. 32명의 민족대표와 추후 구속된 16명 등 48명은 내란죄 피의자로 다루어 연일 심문을 진행시켜 독립운동의 주모자급에 대한 취조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3월 중순까지 검찰조서가 작성되고 4월 상순에는 경성지방법원 예심을 받기에 이르렀다. 성사에 대한 경찰조서는 3월 1일 밤중으로 작성되어 검찰에 송치하고 5일경에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거사의 동기와 경위, 그리고 독립운동의 규모에 대하여 심문하던 취조관이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이번에 독립운동이 자주적 민족운동이 아니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현혹되어 일부 불순분자들이 배후에서 선동하여 일으킨 소요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술책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거사의 의도와 자금의 출처, 분배,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 전달 발송 경위 등을 추궁했으나 민족대표들은 처음부터 사실 그대로 숨김없이 답변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한편 독립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민족대표들의 심문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손병희 선생 취조서 문 : 피고 등이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다는 것을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었는가. (3,운동비사 78면) 답 : 우리들은 전에 미리 학생들에 통지한 일이 없고 3월 1일 동지가 왔을 때 학생들이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을 것이라 하므로 나는 학생들이 오늘 일을 알고 있다고 들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문 : 피고들은 어째서 명월관 지점으로 모였는가. 답 : 그것은 우리들이 파고다공원에 가서 선언서를 발표하고 그곳에서 체포되면 많은 학생들이 무슨 일을 할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명월관 지점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문 : 어떠한 뜻으로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하려고 하였는가. 답 : 그것은 선언서의 인쇄가 그때까지는 될 것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날로 정하였지 다른 이유는 없다. (비사 78면) 문 : 피의자는 조선의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 그렇다. 될 줄로 생각한다. (비사 81면) 문 : 어째서 된다고 생각하는가. 답 : 그것은 목하 파리에서 개최 중인 강화회의에 일본은 5대국의 일원으로 동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동 회의는 민족 평화 등의 권리를 줄 것을 의제로 하고 있는데 그 회의에 참석 중인 일본은 조선의 안녕질서를 보지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또 지금 영국에서는 애란을 독립시키는 것을 신문으로 보았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일본은 당연히 조선독립을 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 : 그런데 선언서를 본즉 조선민족에 대하여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고 했는데, 이것을 본즉 어디까지나 독립의 의사를 발표할 것을 권하고 민족 전체의 분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선언서는 그렇게 되었다. 조선민족은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어디까지나 독립의 의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문 : 요컨대 이 취지에 의하면 최후의 일인까지 어디까지나 반항하라는 것이니 이런 선언서를 피고 등의 명의로 발표하면 보는 사람은 어떠한 태도로 나올까 하는 것을 피고는 예상하고 있었는가. 답 : 지금 지방법원 예심결정서를 보면 우리들이 선언서를 발표하기 때문에 각처에서 폭동이 일러났다고 써 있으나 나는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예기치 않았다. (비사 102면) 문 : 천도교는 본년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회를 열 것을 각 교도에게 시달하고 시행한 일이 있는가. (비사 86면) 답 : 나는 해마다 기도를 올리는데 천도교에서는 협의상 1월부터 2월까지 49일간 기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 : 이 기도는 어느 때부터 조선독립을 성취할 시기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비사 86면) 문 : 피고는 금년 2월 25일경 김상규에게 천도교 보관금 중 6만 원을 대여한 일이 있는가. (비사 99면) 답 : 그렇다. 3만 원씩 2회에 6만 원을 대여하였다.…… 안동현에서 좁쌀을 매매하면 이익이 있다 하므로 만주 좁쌀을 조선으로 수입하여 궁민을 구제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김상규에게 융통하였는데, 그 일은 천도교 사업으로 하였다. 문 : 그 6만 원은 독립운동에 사용할 목적으로 상해 임시정부 수립자금과 이강공의 해외에 갈 준비금으로 썼는가. 답 : 그렇지 않다. 문 : 천도교의 교도는 전부 얼마나 되는가. (비사 101면) 답 : 천도교는 교도의 교안이 있는데 그 수는 약 300만에 달하고 있으나 실제 의무를 다하고 있는 교인이 200만 가량이 되나 정확한 숫자는 나도 모른다. 문 : 피의자는 장래나 미래도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가. (비사 81면) 답 :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려는 나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2) 최린 선생 취조서 문 : 피고는 이번 여러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이 틀림없는가. (비사 579면) 답 : 그렇다. 틀림이 없다. 문 : 그러면 그 전말을 말하라. 답 : 내가 독립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첫째, 조선 민족의 생존권을 확장하는 것, 둘째, 일본정부에 대하여 조선에 대한 정책을 회오케 하는 것. 셋째, 목하 강 화회의에서 세계평화를 제창함에 재하여 이때 조선민중에 대한 열국의 동정을 일으킬 생각에서였다. 따라서 그 목적을 달하는 데는 조선도 민족자결 즉 조선독립을 기도하여야 되겠다는 의도에서 이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문 : 그 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그 발기인은 몇 사람이었는가. 답 : 그 시발은 작년 음력 12월 말에 손병희가 나와 권동진 오세창을 자택으로 초청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세우자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었다. 그것이 근원이 되어 동지들을 모아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비사 577면) 문 : 이 선언서는 누가 기안하였는가. (비사 576면) 답 : 그 선언서는 지금 경성부 내 수하정에 있는 최남선에게 말하였던바 동인이 문장을 쓴다 하므로 의뢰하였으며, 그 선언서의 골자는 내가 동인에게 말하였다. 문 : 그 후 피고는 선언서와 청원서 등의 기초에 있어서 누차 최남선과 회합하였는가. (비사 589면) 답 : 그렇다. 최남선이 누차 나에게 와서 기초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문 : 천도교 및 야소교의 거물들이 회합하여 선언서의 취지를 협의한 일이 있는가 (비사 590면) 답 : 그러한 협의를 한 일은 없다. 선언의 대체의 취지서는 손병희·권동진·오세창과 나 4인이 협의하여 정하고 야소교파에는 선언서의 초고를 만든 후에 보이고 합의케 한 것이다. 문 : 그 서면에는 어느 때 어디서 조인하였는가. (비사 593면) 답 : 함태영이가 2월 27일 나에게 야소교 측 사람의 인장을 가져와서 조인하였고 천도교 측 사람들의 것도 동일 조인하였다. 문 : 피고는 검사에 대하여 끝까지 자기는 독립운동을 그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지금도 아직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가. (비사 596면) 답 : 그렇다. 어디까지나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다. 문 : 그대들은 학생을 파고다공원에 모아가지고 선언서를 배포한 일이 있는가. (비사 577면) 답 : 처음에 우리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이기로 하였던 것인데 어제 밤 오후 8시경 우리 동지들이 손병희씨 집에 회합하였을 때 그 석상에서 박희도가 말하기를 학생들이 우리가 파고다공원에 모이는 것을 알고 학생들도 파고다공원에 모이기로 했다고 하는데 만일 학생들이 집합하면 위험하다고 하였으므로 명월관 지점으로 변경하였던 것이지 결코 학생을 모아놓고 선언서를 배포한 것은 아니다. 문 : 3월 1일 당일 학생들이 소란하였는데 그것은 피고들이 소란케 한 것이 아닌가. (비사 583면) 답 : 그렇지는 않다. 학생들은 장래의 인물이므로 정치운동을 할 시기가 아니다. 나는 학생들에게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을 시키지 않는다. 문 : 그러면 파고다고원에 피고들이 모여 선언서를 배포하는 것을 학생들은 어떻게 하여 알았는가. 답 : 그것은 모른다. 문 : 그러면 학생들은 운동과 관계없는가. 답 : 그렇다. (비사 583면)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포덕 166년 6월 22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신앙의 기준과 목적"천도교 동귀일체 원암 김창석 회장은 지난 6월 22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설교에서 천도교 신앙의 본질과 실천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며, 교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이번 설교에서 원암 김창석 회장은 천도교 신앙의 기준과 목적을 되새기며, 올바른 신앙의 길은 무엇보다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자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시는 마음이야말로, 신앙생활의 기준이자 방향이어야 한다”며, 신앙이 삶과 분리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실천적 태도임을 밝혔다. 원암 김창석 회장은 자신이 겪은 개인적인 일화와 신앙적 고민을 진솔하게 나누며, 자기 성찰과 참회를 통한 내면의 변화가 신앙 실천의 핵심임을 전했다. 그는 “신앙은 남을 판단하기 이전에 나를 돌아보고, 잘못을 뉘우치는 데서 시작된다”며, 교인들에게 각자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돌아볼 것을 권유했다. 이어 천도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를 천인합일(天人合一)과 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 제시했다. 한울님과 하나 되는 삶, 그리고 민중과 나라를 이롭게 하는 실천이야말로 천도교인의 존재 이유라고 설파했다. 이를 위해서는 “바른 기준과 뚜렷한 목적을 지닌 신앙인”이 되어야 하며, 이는 곧 “스승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증명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이번 설교는 많은 교인들에게 신앙의 근본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인내천 사상과 신앙 실천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
감정의 흔적감정의 찌꺼기 가볍게 보지 마라 살아온 세월만큼 얼굴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온 삶을 흔들고 왔다 우리는 매일 몸으로, 눈과 귀, 코와 혀로 감정을 먹고 또 먹는다 희노애락 애오욕의 감정들이 붓을 들어 붉은 분노, 푸른 슬픔, 노란 기쁨을 색칠한 뒤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 간다 찌꺼기 없는 사람 누가 있겠는가 한평생 가슴 깊이 쌓이고 쌓인 흔적의 덩어리, 무거운 마음, 강렬한 햇볕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 먹은 감정만 온전하게 다스리자 하늘에 대한 사랑가만 부르자 그 노래가 봄바람 되어 찌꺼기를 녹이고 하늘을 맑게 하며, 우리를 환히 웃게 한다. 천도교 동귀일체 고문 오제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