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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6년 여름, 한울나눔터 참가자 모집천도교 대학생단이 포덕 166년 여름을 맞아 청소년 대상 인성수련 프로그램 ‘한울나눔터’를 개최한다. 이번 한울나눔터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마음의 힘을 기르고, 공동체적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기획된 1박 2일간의 단기 수련 프로그램이다. 행사는 오는 9월 6일(토)부터 7일(일)까지 부산 금련산 청소년수련원에서 진행되며, 전국의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청소년 30명을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참가비는 무료이며, 간단한 개인 물품만 지참하면 된다. 천도교 대학생단은 “짧은 일정이지만 청소년들이 건강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며 서로 배려하고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알차게 준비하고 있다”며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현재 프로그램의 세부 일정과 내용은 계획 중이며, 참가자에게 추후 별도로 공지될 예정이다. ▣ 참가 개요 일정: 2025년 9월 6일(토) ~ 9월 7일(일), 1박 2일 장소: 부산 금련산 청소년 수련원 대상: 초·중·고등학생 인원: 30명 (선착순 마감) 참가비: 무료 ▣ 준비물 염주, 세면도구, 수건, 여벌옷, 개인 상비약 등 ※ 추가 준비물은 추후 별도 안내 예정 ▣ 문의 및 신청 조화정 단장: 010-8318-9220 박현서 부단장: 010-2421-7173 이예나 부단장: 010-6229-5883 이번 여름, 한울나눔터에서 청소년들이 함께 웃고 배우며 성장하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단 참가 신청 링크 자료제공 : 천도교대학생단 -
이도천 선도사 순도 47주기 추모, “통일의 불꽃” 다시 되새겨이도천 선도사 순도 47주기를 맞아, 천도교 교단과 시민들이 그의 뜻을 기리는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이도천 선도사는 1978년 8월 5일, 임진각 철조망 앞에서 “조국이여, 통일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분신 순도한 천도교 선도사다. 47년이 흐른 올해, 그날의 숭고한 뜻을 기억하고자 추모식을 봉행하였으며, 교단과 신앙인들은 생명으로 통일을 외쳤던 한 신앙인의 정신을 다시 되새겼다. 이날 추도식은 사단법인 동학민족통일회가 주최하고 천도교중앙총부,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의 후원으로 봉행하였으며 이문상 동학민족통일회 사무총장의 집례, 신혜원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의 경전봉독(성령출세설), 최용근 동학민족통일회 수석공동의장의 약력보고가 있었다.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이 대독한 박인준 교령의 추모사는 “오늘 통일열사 이도천 선도사의 분신 47주기를 맞아, 이 행사를 새롭게 되살리고 매년 이어가며, 선도사의 순도 정신을 잊지 않고 동학 이념의 사회적 구현을 이루어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주선원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은 위령문을 통해 “선도사님께서 천사님의 뜻을 받들어서 도를 닦고 불의와 싸우신 그 정신과 뜻을 저희들도 받들어서 수도와 포덕에 더욱 힘쓰고, 기어이 민족통일의 숙원을 완수하여 지상천국 건설의 대원을 달성하고야 말 것을 고인의 영전에 맹세합니다”라고 말했다. 임진각 철책 앞에서 외친 “통일하라” 1908년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송호리에서 출생한 이도천 선도사는 함흥농업학교와 수원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에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38년부터 함흥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교회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함흥청우당 선전부장에 선임된다. 1948년 청우당 남북연락책임자로 활약하던 중 내무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여 부산에 거주하여 1952년 부산시 좌천 동전교실을 창설하였다. 1976년 춘천교구장에 선임되어 교구발전에 헌신하다가 1978년 8월 5일 임진강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아래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순도하였다. 입암 이도천 선도사는 통일운동을 전개하며, 교단의 포덕정신에 입각해 민족의 하나 됨을 서원해오다가 순도 직전 유언을 통해 “내 죽음이 통일의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히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천주의 신앙과 인내천의 실천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이번 추모식에는 임진각 앞에 걸린 ‘평화통일’ 현수막과 함께 묵념, 헌화, 천덕송 합창 등 순도의 의미를 기리는 시간으로 이어졌으며 추모식에 참석한 참석자들은 이도천 선도사의 신앙과 결단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광복 80년, 분단 80년… 여전히 남은 과제 “한울님의 뜻 따라 민족 하나로” 이도천 선도사의 순도는 통일의 염원을 넘어 신앙적 실천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선생의 외침은 오늘날까지도 천도교인 모두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분단 80주년이 되는 해다. 이도천 선도사의 순도는 물리적 분단을 넘어, 신앙과 생명으로 시대를 깨우고자 한 울림이었다. 이번 추모식을 계기로, 교역자 및 교인들은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실천적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천도교 미래세대가 함께한 ‘2025 한울인성어린이캠프’ 성료천도교 어린이·청소년들의 인성과 공동체 의식을 기르는 ‘2025 한울인성어린이캠프’가 지난 8월 1일(금)부터 4일(월)까지 3박 4일간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번 캠프는 서울 중앙대교당과 서울유스호스텔 일대에서 열렸으며, 전국 각지 교구에서 모인 초·중·고등학생들이 함께 참여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번 캠프는 낙안회, 대학생단의 자원봉사 속에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염주 만들기, 몸살림운동, 운현궁 역사탐방, 스케이트 체험, 연극 관람 등 다채로운 활동을 통해 천도교 신앙과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등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캠프 기간 중 시일일에는 중앙대교당에서 교인들과 함께 시일식을 봉행하며 경건한 시간을 가졌고, 아이들이 직접 준비한 합창 공연도 함께 선보여 큰 박수를 받았다. 3박 4일의 여정 속에서 참가 어린이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 따뜻한 공동체를 이뤄냈다. 캠프에 참여한 한 학생은 “친구들과 함께 놀고 배우면서 천도교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어 좋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천도교대학생단은 “이번 캠프는 교단의 미래를 이끌어갈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신앙과 인성을 함께 키울 수 있도록 마련한 뜻깊은 자리였다”며 “앞으로도 청소년 및 청년 대상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으로도 미래세대가 천도교의 정신을 배우고 체험하며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기사 및 사진 제공 천도교청년회 -
천도교중앙총부, ‘나는 한울인’ 전자 교보 작성 참여 요청천도교중앙총부는 전국 교인을 대상으로 천도교 홈페이지 내 ‘나는 한울인(전자 교보)’ 시스템에 교보 정보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 요청은 교단 운영의 기반이 되는 정확한 데이터 확보와 행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나는 한울인(전자 교보)’는 전국 교인의 기본 현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자료 시스템으로, 교인의 인적 사항과 연락처 등 현황 정보를 바탕으로 교단 행정, 각종 공지 및 자료 배포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에 따라 교단은 모든 입교 교인에게 전자 교보 작성을 독려하고 있다. 작성 대상은 전 교인으로, 신입 교인의 경우 각 교구의 교보 작성 담당자가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참여 방법은 천도교 홈페이지(https://www.chondogyo.or.kr)에 접속 후, 상단 메뉴 ‘나는 한울인’을 선택하여 개인정보를 입력하면 된다. 모바일의 경우에도 홈페이지에 접속해 같은 절차를 따르면 된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이번 전자 교보 시스템은 교단의 행정력 강화와 소통 기반 마련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라며 “모든 교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문의는 천도교 중앙총부 교무관(02-6488-6825) 또는 이메일(chondogyo.kyomu@gmail.com)로 가능하다. 자료제공 천도교중앙총부 -
천도교와 3 · 1운동(13) "만세 일자와 규모"『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4. 맹산교구의 만세운동 포덕 50년 초의 교세 평남 맹산에 동학이 들어온 것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다. 천도교 『맹산군연원록』에 의하면 지덕면 오봉리에 사는 최정섭이 포덕 40년(1877) 11월 16일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정섭은 포덕 18년(1877) 9월 2일 생으로 23세 때 입교한 셈이다. 이듬해인 포덕 41년(1900)에는 입교하는 사람이 늘어나 오봉리의 최기언, 봉인면,팔봉리의 이양섭, 지덕면 소창리의 김석조, 애전면 함온리의 박윤조, 초평면의 방효준, 지덕면 효리의 방은준, 학천면 고하기의 박치홍 부자가 입교하였다. 다시 포덕 42년((1901)에는 더욱 늘어나 맹산면 원남면 옥천면 동면에 포교되었다. 포덕 45년(1904) 8월 30일에는 맹산에서도 진보회를 개최하여 상투도 자르고 검정색 의복도 입었다. 진보회 조직에 관한 천도교창건사의 기록에 의하면 맹산에서는 방기창이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어디서 몇 명이 모여 단발흑의의 시위와 개회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로부터 천도교세는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여 포덕 51년(1910)에 이르면 약 150호 정도가 된다. 역대 교구장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던 포덕 60년(1919)까지의 역대 교구장은 다음과 같다. 교구 창립일은 알 수 없으나 초대 교구장은 김창각이었다. 포덕 51년 9월에도 재선되어 52년 2월까지 역임하였다. 포덕 52년 3월부터는 김영율이 교구장으로 선임되었고, 그 해 9월에 김영율 교구장이 사정이 있어 교구장을 사임하게 되어 김창수가 임시로 그 후임이 되었다. 포덕 53년(1912) 11월에 조병칠이 교구장에 선임되었고, 포덕 55년(1914)에 이봉준이 새 교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해 7월에는 중앙총부의 직제개편에 따라 맹산교구는 덕천대교구에 소속되었다. 덕천대 교구장은 박왕식이었으며 맹산 교구장에는 방기창이 선임되었다. 방기창은 맹산 천도교의 연원대표로서 이때 교훈이었으며 후에 도정이 되었다. 포덕 59년까지 방기창이 교구장을 계속 역임하였다. 공선원은 김창각, 전제원은 임대규, 금융원은 박창도 였다. 포덕 59년(1918) 6월에 문병로가 교구장이 되었다. 한편 포덕 57년부터 각 면 전교사가 임명되었는데 정승주·임대규·박봉림·이승학·박명원·김천석·김대현·이기섭이었다. 3·1운동 준비 1912년부터 실시된 우이동 봉황각 수련에 맹산군에서도 2기에 연원대표인 방기창, 4기에 이관국, 5기에 박승민·방진원·유병순, 6기에 김치송, 7기에 박정간·궁상원 등 7명이 참가하였다. 포덕 60년(1919)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 간의 기도가 전국적으로 행해졌는데 맹산에서도 49일 간의 기도를 맹산면 수정동 교당에서 인근 교인들이 모여 봉행했다. 당시 소학교 2학년생이었던 김득홍(83세)의 증언에 의하면 어른들은 이번 기도는 예사 기도가 아니라 하시며 집에서 물을 데워 목욕재계하고 교당에 가서 기도를 봉행했다 한다. 맹산 교당은 마당이 넓었으며 토방이 높았고 앞에는 큰 강당이 있었으며 뒷방은 네 개로 나누어진 온돌방이 있었다 한다. 이 온돌방에서 기도를 봉행했다 한다. 김득홍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방기창 도정은 서울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직접 지령을 받아 가지고 내려와 급하니 각 전교실에 연락하여 3월 1일 12시에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맹산교구의 만세계획은 각 면 전교실에서 청년들만 동원하여 거행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소수인원을 동원하여 만세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박연수 어른이 전해 들었다는 증언에 의하면 독립선언서는 조기간이 가져왔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이었던 라인협·나용환 두 선생이 천도교 평양교구에 수천 매를 전달했다. 이중에서 교구 간부였던 조기간이 2월 24일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갖고 맹산 북창까지 와서 북창 교구장인 방은준이 맹산교구에 전달했다고 한다. 한편 『독립운동사 권2』에 의하면 맹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사람은 당시 덕천 천도교구 공선원 현성재였고, 거사를 지도한 이들은 당시 천도교 교구장이던 문병로를 비롯하여 길응철·방기창·정덕화·김치송·이관국·방진원 등 천도교 간부들 여럿이었다고 했다. 만세 일자와 규모 김득홍의 증언에 의하면 3월 1일 12시에 55명의 천도교도가 박창도를 앞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당시 소학교 2학년이었으며, 수업 중 시장 쪽에서 만세소리가 들려오면서 학교 앞을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튿날인 3월 2일 12시에도 역시 55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한다. 1일과 2일은 평일이었으므로 천도교 청년들만 만세를 불렀고 헌병과 경찰의 제지로 해산했다고 한다. 헌병 분대에는 헌병소위 사다께(佐竹) 외에 7~8명뿐이었고 헌병보조원은 15명 정도였다.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2권』에는 만세를 부른 날짜가 3월 6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박연수 선생 증언에는 3월 9일이라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 김득홍 어른에게 확인하였더니 분명히 3월 1일부터 3일간 연속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만세를 부른 인원은 55명이라 하였다. 나이 많은 분들은 제외하고 청장년만 만세를 부르도록 계획했기 때문에 각 면 전교실에서 55명만 모였다고 한다. 박창도가 선두에서 지휘했으며 그의 나이는 당시 35세로서 키가 헌칠한데다 얼굴이 잘 생겼고 힘이 장사이며 카이젤 수염이었다고 한다. 박창도는 포덕 53년 8월에 맹산교구가 운영하는 제148강습소 제2회 종업생이다. 이 만세 참가자에 대해서는 『3·1독립운동사』에는 30명이, 『독립운동사』에는 50명 이, 박연수 선생은 400여 명이라고 했다. 김득홍 어른은 3일째 만세시위 때 헌병대로 몰려갔던 인원도 바로 55명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사격으로 48명이 현장에서 즉사한 사실을 보더라도 55명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3일째의 기억에 의하면 학교 선생이 아침 수업을 시작하려고 기립 경례를 마치자 책보를 싸라고 하면서 집에 돌아가 밖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 만세 광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천도교 청장년 55명만이 참가했다는 것이다. 48명이 총살당해 3일째 만세시위는 헌병대로 향했다. 첫날처럼 12시부터 시작하였다. “헌병을 쫓아내야 한다”고 외치면서 현병대로 갔다. 김득용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집이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날 새벽 4시경에 덕천방면에서 60리를 걸어 20명에 달하는 완전무장한 군인이 헌병대에 도착했다 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덕천 헌병중대에 증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만세시위대는 헌병대로 몰려 들어가 물러가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사다께 헌병대장이 욕설을 퍼붓자 박창도는 의자로 헌병대장을 때리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또(佐騰) 상등병이 권총으로 박창도를 쏘았다. 박창도는 복부에 총탄을 맞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사또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억센 힘으로 거머쥐었다. 목이 졸린 사또도 총에 맞은 박창도도 같이 죽었다고 한다. 이때 군중들이 헌병대로 밀고 들어가자 헌병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해 48명이 즉사하고 1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6명은 몸을 피했다. 부상당한 사람은 한봉진으로 어머니 쪽 외사촌 오빠였다고 한다. 헌병들은 48명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들것을 만드느라고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때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한봉진은 재빨리 도망쳤다. 뒤따라 헌병들이 추격했는데 거리로 들어갔을 때 조짚을 지고 오는 사람의 지개를 바꾸어지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니 헌병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간신이 피신할 수 있었다 한다. 그는 군청 뒤에 있는 장덕화의 집에 가서 숨었다가 학무리 계중학의 집으로 옮겨 살아났다. 헌병들은 살인마와 같이 들것에 시체를 실어내면서 총검으로 일일이 찔러보며 확인했다고 한다. 순국한 이들의 시체는 2마정 가량 떨어진 골짜기에 버렸는데, 김득홍 어른은 어머니와 같이 밤중에 그곳에 가보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외사촌 오빠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리저리 돌아 현장에 갔더니 48명의 시체가 그냥 내버려져 있더라는 것이다. 박연수 선생의 유족들과 동향인들로부터 들어 밝혀진 순국 순도자는 다음과 같다. 朴昌道, 桂仲成, 吉成龍, 張龍宣, 安吉甫, 朴必永, 吉錫璉, 朴都官, 李承植, 趙秉七, 方應哲, 李正必, 弓尙元(7회) 朴春日, 金永律, 金鳳保, 禹光卨, 朴道乾, 盧錫璣, 金昌涉부친 韓基斗부친 金昌涉부친 李官俊부친 方士麟부친, 方洛道부친 朴瑞鳳부친 김득홍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맹산 수정리 거리에 살고 있던 박검수 형제도 순국순도했다고 한다. 3·1운동 때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7명이다. 형을 제일 많이 산 사람은 교구장이었던 文炳魯로서 1년 6개월간을 고생하였다. 그리고 1년씩 복욕한 사람은 5인인데 方殷俊 朴應俊 張峻化 朴明源 弓處官 朴準祺 등이다. 독립운동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에 의하면 3·1운동을 극대화하고 모의했던 사람으로 文炳魯 吉應哲 朴기창 鄭德化 金致松(6회) 李寬國(4회) 方鎭垣 등을 꼽고 있다. 이들 중 교구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체포되지 않았고 학살당하지도 않았다. 다만 김득홍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원로들은 3·1운동의 일선에 나서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한다. 끝으로 김득홍 어른의 몇 가지 증언을 부기해 둔다. 1) 맹산 천도교의 연원 관계는 원래 방기창 도정이 지도하였다. 그 후에 조처항에게 물려주었고 조처항은 문병로에게, 문병로는 길응철과 박용완에게 물려주었다 한다. 따라서 포덕 70년대에는 길응철 연원과 박용완 연원이 맹산연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2) 맹산교구는 3·1운동 직후 헌병대에 점령되어 1년간 빼앗겼다. 헌병들이 물러가면서 경찰에게 인계하여 수개월간 경찰이 점령했다 돌려주었다 한다.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특별기고] 이재명 대통령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대북정책 변화에 찬성, 천도교와 동학민족통일회도 남북평화교류에 앞장서야지난(2025.07) 28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은 이재명 정부에 대한 북의 공식입장을 담화형식으로 발표했다. 김여정 부부장은 ‘대조선확성기방송중단, 삐라살포중지, 개별적한국인들의 조선관광허용’ 등 한국(남한)의 이재명 정부가 조선(북한)과의 관계개선의 희망을 갖고 집권초기부터 성의 있는 노력을 인정했다. 또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실종된 평화의 복귀와 무너진 남북관계의 복원 등 강대강의 시간을 끝내고 선대선, 화해와 협력의 시간을 열어갈 것을 제안했다’고도 밝혔다. 그러나 김여정 부부장은 ‘최근에는 몇 달 후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 수뇌자회의에 그 누구를 초청할 가능성까지 점치며 헛된 망상을 키우고 있다’며, 이전의 윤석열 정부 때처럼 노골적인 비난은 삼가고 그래도 수위를 조절하여 비판한 흔적이 엿보였다. 남북의 신뢰회복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 김여정은 대남 담화문의 서론에서 긍정과 부정이 섞인 내용으로 흐르다가 본론에 가서는 남측과 관계개선의 뜻이 없음을 단호하게 천명했다. 강한 어조의 비판 내용은 첫 번째가 흡수통일의 본색에 대한 우려, 두 번째가 대규모합동군사연습, 세 번째가 돌이킬 수 없는 동족개념의 상실 등이다. 이러한 김여정의 담화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정 속에 긍정의 내용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했던 ‘흡수통일우려 해소, 한미군사훈련축소, 동족개념 복원’ 등에 대한 노력과 박정희,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했던 ‘조국통일3대원칙과 남북기본합의서’ 등을 되살려 노력한다면 남북화해와 상생의 기회는 올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남북, 북미 고위급 회담과 정상회담을 촉구한다 남북의 평화와 교류에 있어 실질적인 진전이 있으려면 남북, 북미 고위급 회담과 정상회담에서 찾아야 된다. 그럼 그동안의 남북고위급회담과 정상회담을 살펴본다. *김구 선생이 1948년 4월 19일 방북하면서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란 유명한 말을 남긴, 남측의 김구와 김규식, 북측의 김일성과 김두봉의 일명‘4김 회담’을 개최했다. *1972년 7월 4일 남한의 이후락과 북한의 김영주는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의 명의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을 대신하여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90년부터 노태우 정부는 8차례의 남북실무회담 등 남북고위급 회담을 개최 ‘남북기본합의서’를 창출했다. *1994년 6월 지미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핵 활동 동결’을 합의, 김일성 주석이 카터 전 대통령에게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으나, 동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관련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되었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정부는, 1948년 남북분단이후 첫 번째 남북 최고 지도자 정상회담에서, ‘평화공존 인식의 체계합의, 이산가족상봉,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실시 등의 평화정착과 민간교류, 경제 활성화’ 등으로 합의된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2월에 '대한민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2년 5월 11일~14일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국회의원)는 3박 4일 일정으로 북측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남북정상회담을 개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하였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정부는 판문점 남쪽 평화의 집에서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평화 정착, 남북관계 발전 등 논의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과 미국과 북한과의 정상회담 추진, 북미정상회담을 6월 12일 싱가포르 개최에 합의했다. *2018년 9월 18일 문재인 대통령 일행은 항공편으로 평양을 방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9월 평양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2018년 6월 12일 트럼프와 김정은의 북한과 미국 간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개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판문점 선언의 재확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전쟁포로 및 전장 실종자 유해 송환’ 등에 합의했다. *2019년 2월 27일~28일 트럼프와 김정은은 배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했다. 2019년 6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은 29~30일 오전 한미정상회담 이후 판문점으로 이동, 오후 3시 46분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났다. 북미 정상회동과 남북미 정상의 회동은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66년만의 기록이었으나 특별한 합의 내용이 없었고, 한반도 평화구축이라는 의미적인 교훈만 남겼다. 이처럼 남북, 북미 고위급 회담과 정상회담은 나름대로 큰 성과도 거두었고, 국내외 정세의 영향을 받아 흐지부지 되는 아쉬움도 많았다. 이제 이재명 정부 탄생 초기부터 북측(북한)에 대한 남측(한국)이 관계개선의 희망과 평화의 복귀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노력이 더욱 성숙해지만 남북 고위급 회담과 정상회담도 열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천도교와 동학민족통일회도 적극적 남북평화교류에 앞장서야 만약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남북 종교지도자, 종교단체도 교류에 앞장 설 것으로 내다본다. [국정원 등 북한 종교현황 참조] 특히 조선(북한)에 최대종단으로 알려진 천도교(동학)가 보다 적극적인 종교교류에 나서야 한다. 조선에는 천도교가 타 종단에 비해 신도숫자가 많음은 물론 ‘천도교 청우당’이란 정치단체가 있다. 천도교 청우당은 한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남측의 국회의원에 해당)을 약 20여석 확보하는 등 노동당 다음의 제2당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천도교 청우당과 한국의 천도교 소속 ‘동학민족통일회’는 오랫동안 남북교류 파트너로 활동해왔다. 최근 천도교중앙총부(교령 박인준) 강병로 종무원장은 필자에게 앞으로 천도교 남북교류에 앞장설 것이며 최선을 다해 평화통일의 분위기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렇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과 실천철학을 표방하는 천도교단이 남북교류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좌우 양날개짓으로 남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봐라! 끝으로 현재 남북관계가 꽉 막힌 현실에서 정치적인 정상회담 등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첫 번째로 이산가족 상봉 등 서로간의 고향방문 같은 인간적인 일들이 성사되어야 한다. 현재 조선(북한)과 한국(남한)만 서로 간 갈 수 없고 전세계에 모든 국가를 얼마든지 갈수 있다. 임진각에서 임진강 넘어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 좌우 양날개짓으로 남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봐라! 임진강 급류를 헤치며 남이든 북이든 넘나드는 물고기들을 봐라!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이 철책으로 남북을 가르고 분단의 벽으로 남북을 오갈 수 없는 불쌍한 존재로 만들어 놨다. 자! 이제, 남북통일이라는 거창한 담론보다는 남북교류라는 소박한 희망을 이루려는 자세로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사진,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평민 철학자 해월 최시형 신사의 사상, 온라인 특강으로 만난다동학 2세 교조이자 민중 사상의 상징인 해월 최시형 신사의 철학을 조명하는 온라인 강의가 열린다. 해월 사상의 현대적 가치를 되새기며,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 윤리를 모색하고자 마련된 이번 특강은 충북공공정책연구원이 주최하고, 문화공간 아르마리와 직접민주지역자치 우주당이 후원한다. 해월 최시형 신사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사상을 삶으로 실천한 철학자였다. 신사는 양반 중심의 위계적 사회를 부정하고, 평민·여성·천민까지 모든 사람을 하늘처럼 존엄한 존재로 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굶주린 백성과 밥을 나누고, 핍박받는 민중과 함께 걷는 신사의 실천은 ‘몸으로 살아낸 철학’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강의는 『평민 철학자 해월 최시형』의 저자이자 대구대학교 김용휘 교수를 초빙해 해월 사상의 철학적 · 사회적 의미를 깊이 있게 전달할 예정이다. 강의 개요 강사: 김용휘 (대구대학교 교수 / 『평민 철학자 해월 최시형』 저자) 강의 방식: 온라인 ZOOM 실시간 강의 수강 기간: 2025년 8월 1일(금) ~ 8월 23일(토) 모집 마감: 2025년 8월 22일(금)까지 참가비: 1만 원 입금 계좌: 새마을금고 9002-2025-0686-4 (예금주: 문화공간 아르마리) 문의: 010-2969-6690 해월신사의 철학은 오늘날 공동체와 민주주의, 생명 존중, 평등 사유의 근간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번 특강은 인간 존엄과 공동체 정신에 대한 성찰을 원하는 이들에게 귀중한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천도교 청년회 창립 106주년 기념식, 8월 31일 중앙대교당에서 개최천도교 청년회가 창립 106주년을 맞아 오는 2025년 8월 31일(일) 오전 11시,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기념식을 거행한다. 1919년 창립 이래 한울님의 진리를 바탕으로 시대 청년의 사명을 실천해온 천도교 청년회는, 올해 106번째 창립기념일을 맞아 그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함께 그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청년회는 “그동안 청년회를 사랑해주시고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과 기념의 자리를 나누고자 하오니, 바쁘시더라도 귀한 시간 내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부탁드린다”며 초청의 뜻을 전했다. 이번 기념식은 1부 공식행사에 이어 2부에서는 청년회원과 교인들이 함께하는 축하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이를 위해 청년회는 다양한 무대를 함께 꾸릴 축하공연 참가자를 모집 중이다. 노래, 댄스, 밴드, 악기, 퍼포먼스 등 형식에 제한 없이 누구나 지원 가능하며, 천도교 청년회와 대학생단 동문, 선후배, 현역 단우 모두 참여할 수 있다. 공연 신청 마감은 2025년 7월 31일(목)까지이며, 신청자는 이름, 나이, 소속 교구, 분야, 곡명, 무대 설명 등을 작성해 문자(010-7172-5660) 또는 이메일(chondoyouth@gmail.com)로 제출하면 된다. 한편, 청년회 창립 106주년을 기념하여 성금을 통한 후원도 받고 있다. 성금은 우리은행 513-240146-13-101 (예금주: 천도교청년회중앙본부)으로 접수받고 있으며, 모든 성금은 기념행사와 청년 활동 지원에 소중히 사용될 예정이다. 청년의 이상과 열정을 되새기며 한울세상을 향한 여정을 함께 걸어온 천도교 청년회의 106번째 생일에, 많은 교인들의 관심과 참여가 기대된다. -
천도교와 3 · 1운동(12) "직업은 대부분 농업이었고 종교는 모두 천도교라 했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이곳에서 희생된 교인은 10명이요, 부상자는 43명이었다. 그리고 체포된 사람이 무려 140여 명에 이르렀다. 순국 순도한 10명은 다음과 같다. 廉錫河 廉錫漢 朴弘善 李鍾煥 李永浩 徐鳳化 元俊善 黃斗律 黃熙鍾 金尙甲 그리고 왜경에게 체포되어 함흥감옥에서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다음 9명이다. 安昌憲 崔鳳天 薛雲龍 崔德福 廉元亨 崔錫崑 元秀弘 廉仁煥 李泰仁 『3·1독립운동실록(하)』에 실린 일인의 신문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월 10일 오전 11시경 단천읍 시장방면에서 약 600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라 쓴 국기 수십 장을 선두에 세우고 함성으로 만세를 부르면서 군청을 습격하였다. 이 급보를 받은 헌병분대에서는 만일을 대비하여 읍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녀를 피난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재향 일본 군인과 일본인 장정이며 기타를 소집하여 경계대를 조직하고 진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쉽게 해산하지 아니하매 대충돌이 일어나 3시간 동안이나 수라장이 되었다. 이와 같이 격투를 한 끝에 군중 측에서 8명이 사상되고 주모자 143명이 검거되었는데 검거된 자는 공립소학교에 수용해 두고 취조한 후 겨우 12명을 제외해 놓고 그 나머지는 장태를 엄하게 하여 방면한바 군중은 대부분이 천도교인이었다.” 3월 22일에는 천도교인인 김성호, 황희청, 이태인, 이종근, 송문일, 황승오등이 주동이 되어 북두일면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독립유공자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군중 500여 명을 이끌고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투석하였다 그러자 헌병들은 군중을 향하여 총질을 하였다. 이 총격으로 8명의 군중이 현장에서 사살되고 2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헌병 1명도 부상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김성호를 비롯하여 5명이 체포되어 함흥 지방법원을 거처 고등법원에까지 올라갔으나 유죄판결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 당국은 천도교도가 많이 살고 있는 신만면에 헌병 1개 중대를 상주시킴으로써 공포 속에 평온을 유지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단천의 3·1운동은 3월 한 달 동안에 현장에서 총살자 또는 척살자 33명, 중경상자 24명, 피검자 290명을 내는 격렬성을 보였다. 단천 교인들의 3·1운동은 준비단계에서부터 헌신적이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총부에서 대교당 신축 명목으로 성금을 모금할 때 단천 교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각출하였다. 어떤 분은 논과 밭과 소까지 팔아 성금을 내는 사례도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무릅쓰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3·1운동 이후의 교세 민족의식을 일깨워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앞장섰던 천도교인들은 직접 간접으로 많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주도 세력들은 조금도 굴함이 없이 교세를 재건하는 것이 곧 보국안민을 위한 길이라 믿고 일어섰다. 이들이 다름 아닌 3·1운동의 주도자들이었다. 김용문 선생은 3·1운동 당시 단천교구의 주역으로 다음과 같이 64명을 기록하고 있다. 최봉천, 안창헌, 치석곤, 최복덕, 벽운용, 염원형, 염인환, 원수홍, 이원수, 서봉화, 염석하, 염석한, 이영호, 김상갑, 벽관학, 김병갑, 황명옥, 김여수, 박한익, 박홍선, 김병무, 이종환, 염명준, 김덕율, 김상근, 황영순, 한성칠, 김윤택, 서기순, 서치현, 이재용, 이운범, 김학범, 이기준, 김덕희, 염석범, 봉덕업, 김진섭, 박영호, 이주팔, 황시린, 김창록, 김기종, 최봉익, 김병은, 정기선, 박계율, 박창운, 최흥두, 박홍인, 이성규, 박세향, 이재열, 박진후, 천인봉, 봉덕실, 조진관, 염호섭, 최병덕, 최병홍, 황희율, 황희종, 원준희, 김낙순 중요 간부들인 교구장을 비롯해서 교구직원, 그리고 연원대표들이 모두 체포되어 실형을 받게 되자 한 때 교구는 공백상태에 빠졌다. 이듬해인 포덕 61년(1920) 3월에 이르러 교구 직원과 순회교사, 각 면 전교사를 새로 선출하고 7월에는 다시 교구임원을 재구성하였다. 안창헌과 같이 연원대표로 있던 염인환을 교구장으로 선출하였고 공선원(총무)에 원수홍을, 전제원에 이종순을, 금융원에 김정현을, 서기에 김경하를 선출했다. 이후 단천교구는 사회적으로 대강연회를 개최하고 단기교육 강도회도 갖고 활동을 개시하여 더욱 많은 교인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3. 수안교구의 만세운동 머리말 수안군의 3·1만세운동은 황해도에서 가장 격렬했다. 천도교에서도 희생자를 많이 낸 시위운동중 하나이다. 천도교인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본헌병들이 쏜 총탄에 9명이 즉사하고 18명이 중상을 당했으며 70여 명이 체포되어 63명이 최저 6개월 이상, 최고 2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수안군 천도교인들의 만세시위는 읍내에서만 그치지 않고 수구면 석달리, 홀동 장터와 천곡면 두대리, 연암면 율리에서도 계속되었다. 단천교구에서는 우이동 봉황각 수련에 4기에 홍순걸, 5기에 안봉하·홍순걸 등 3명이 참가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한독립운동사(권2)』와 독립운동사편안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 이병헌 저 『3·1운동비사』, 그리고 『천도교연원록』, 수안군 『천민보록』,『 천도교창건록』 등의 기록을 더듬어 만세시위의 경위를 알아보기로 한다. 수안군의 당시 교세 수안군에 동학이 처음 들어온 것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천도교창건록』에 의하면 烈菴 金成根이 포덕 34년(1893)에 입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갑도동학혁명전에 동학이 수안군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김성근은 도동면 사람으로 추측된다. 동학혁병 당시 동학군이 한때 중화에도 나타났던 기록이 보이므로 동학혁명 이전에 동학이 이 지역에 들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포덕 45년(1904) 갑진개혁운동 당시에는 漳菴 吳榮昌 연원과 泓菴 羅仁協 연원의 지도 아래 대대적인 개회를 하였다. 『천도교창건사』에 의하면 황해도 열군에서 개회한 지도자를 17명이나 열거하고 있다. 安鳳河 金應河 李壽榮 李昌郁 李昌杰 洪碩貞 李憂선 李宗燁 金應幹 李鳳璘 李鎭禹 李邦郁 崔明伯 金澤英 李殷烈 崔榮九 李昶烈 수안군은 바로 오영창·나인협 연원이므로 인근각지 진보회 개회에 동원되었음은 분명하다. 수안에 천도교가 대대적으로 포교된 것은 포덕 43년부터 44년 사이다. 이때의 교 호수는 300호가 넘었다고 한다. 동학이 천도교로 바뀐 뒤인 포덕 50년(1909) 10월 현재의 교 호수는 234호이며 교인 수는 970명이었다. 이것은 포덕 49년에 이용구·김연국 일파가 시천교로 분파하는 영향을 받아 직접 관련되지 않았으나 교세가 후퇴했다. 다만 최영구가 시천교 쪽으로 가게 되어 후에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포덕 50년(1909)에 접어들면서 포제를 고쳐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교세는 약간 늘어났다. 포덕 60년대까지 수안교구 역대 교구장은 다음과 같다. 金相允 (50年) 洪淳杰 (51年) 金應河 (52年) 金益培 (53年) 金洞善 (54年) 洪碩貞 (55年) 金永萬 (56年) 安鳳河 (57年) 포덕 60년(1919) 3·1운동 당시의 교구장은 안봉하였다. 교세는 약 300호 정도였으며 교인 수는 1,500명 정도였다. 각 면 전교사를 역임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金處熙, 閔丙善, 韓淸一, 韓國英, 朴春益, 張聖道, 李東郁, 黃鼎五, 金顆熙, (여자 전교사) 田貞嬅, 宋秀嬅, 李道嬅 교인의 분포는 도동면 율계면 공동면 수구면 천곡면이 비교적 많았으며 나머지는 대포면 연암면 대천면 오동면 소내면 동부면 서부면 수안면 등에 몇 십 호씩 있었다. 만세운동의 준비 수안교구에 천도교 중앙총부로부터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에 관한 지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 저녁때였다. 독립선언서가 수안교구까지 전달된 경로에 대해 ‘황해도도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곡산 천도교인 이경섭이 2월 28일 서울 이종일에게서 독립선언서 일천 장을 받아가지고 기차로 3월 1일 황해도 신막에 내려 천도교 서흥교구장 박동주에게 750장을 주면서 서흥교구와 해주교구에 보내도록 하였고 자기는 곧 수안으로 갔다. 도중에 이종숙의 집에서 천도교 수안교구장 안봉하와 홍석정 김영만 홍순걸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하는 동시에 자기는 발이 아프니 나머지는 곡산에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경섭은 서울에서 기차로 신막까지 와서 도보로 신계를 거쳐 곧바로 수안 도동면 덕동에 있는 이종숙의 집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수안교구장을 비롯한 임원 및 간부를 비밀리에 불러 전달하였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안봉하는 수안면 석교리에 있었다.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실록』에는 이경섭이 3월 1일에 안봉하 수안교구장을 찾아가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안봉하 교구장을 비롯하여 김영만·이찬홍·최용식·이영철과 교도인 홍석정·한청일 등이 모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1919년 11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경섭은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중 수안교구에 150매 정도 건네주면서 독립만세시위를 빨리 거행하도록 하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교구장 이하 여러 간부들은 독립만세시위를 원칙적으로 빨리 하기로 하고 이튿날인 3월 2일 시일식을 마치고 다시 교구실에서 비밀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3월 3일 즉, 그 이튿날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런 계획을 눈치 챈 헌병 분대는 참석했던 몇 사람을 체포, 헌병대에 구금하였다. 『3·1독립운동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수안헌병분대가 탐지한 바가 되어 피고 이영철·홍석정·한청일 이하 전기 피고들은 그날로 동 헌병대에 구금되었었다. 이때 체포되지 아니한 이영철·홍석정·한청일 등은 다시 전기 독립운동계획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이 체포된 것이 아니라 일부 참석자 중에서 몇 사람이 체포된 것 같다. 전후의 기록에 나타난 이름들을 살펴보면 체포된 사람은 이봉하 교구장 등 교직자인 것 같다. 그러나 검속 당하지 않은 한청일·홍석정·이영철 등은 뜻을 굽히지 않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동원하는데 계속 힘썼으나 시간이 급하여 많은 교인을 동원하지 못했다. 3월 3일의 피의 항쟁 3월 3일 오전 6시경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북쪽 공포면·연안면·도소면·율계면, 동쪽 천곡면, 동북쪽 수구면, 남쪽 대성면, 그리고 수안면에서 중견 천도교인들이 ??군 교구에 달려왔다. 밤중에 수십 리씩 걸어서 들어온 것이다. 이때 康國甫,崔陽鳳,車濟南,金應河,韓眞錫,柳光善,金泰赫,朴利鳳,崔錫九,金應道,朴泰洙 등 130명이 모였다. 여러 기록에 게재된 내용들을 종합하여 보면 그 윤곽을 알 수 있는데 황해도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여기서 주도 인물 중의 이영철이 선두에 서고 한청일과 홍석정은 중앙에서 2개의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130여 명이 함께 뭉쳐 만세를 부르며 금융조합 앞 큰길을 지나 헌병 분경대쪽으로 향하였다. 행렬이 헌병 분견대 앞에 당도하여 이영철이 ‘우리들은 오늘부터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서 자유민이 되고 조선국의 독립도 된다’고 소리높이 외치고, 이영철·한청일·홍석정 등은 번갈아가며 ‘우리는 이미 조선독립을 선언하였으니 너희들은 속히 부대를 내어놓고 물러가라’고 함성을 질렀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대열은 점점 늘어나 고함소리 만세소리에 천지가 떠나갈 듯 당장 독립이 다 된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드디어 이영철·차제남·김응도·유광선·김태혁 등 여러 사람은 헌병대 사무실로 몰려들며 분대장 요시노(吉野匡) 중위에게 분대를 인도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일본헌병과 보조원들은 벌벌 떨며 어찌할 줄을 몰라 하다가 결국 서울 본부에서 연락이 있는 대로 곧 물러가겠다고 서약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환성을 올리며 시가지를 돌아 천도교교구로 모여서 승리의 개가를 올렸다.” 한편 각지에서 시위 행렬부대가 계속 교구로 몰려들었다. 교구로 돌아올 때 대천면 사리원 전교실에서 떠난 이동욱·이재관·김문상·김응수·용계홍 및 임창운·이두천·이시용 등 50명의 행렬은 돌아오던 중 3일 10시경 대천면 사창리에서 헌병들의 저지를 받기도 하였지만 이들을 밀어제치고 달려왔다. 읍내는 온통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흥분한 군중들은 헌병대를 쫓아내야 한다고 나서게 되었다. 이때가 11시경이었다. 이동욱·오관옥이 앞장섰으며 뒤따르는 교인들도 일백여명이나 되었다.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 분견대에 도착한 이들은 마당으로 밀려들며 “조선은 이미 독립되었으니 너희들은 빨리 물러가라”고 했다. 당황하던 헌병들은 돌변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많은 교인들이 총탄을 맞아 쓰러졌다. 일부는 체포되었으며 대오는 무너졌다. 이 대목에 대해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6시에 교구로 모였던 군중들은 6시반경 헌병대에 도착하였다 한다. “독립의 선언을 하였으니 속히 이 분대 사무실을 내어놓고 물러가라. 만일 듣지 아니하면 계속하여 지방으로부터 몰려오는 천도교도가 더욱 증가하여 어디까지든지 이 요구를 하리라”고 강압하였다고 한다. 헌병대 앞에 도착한 이들은 헌병의 만행을 항의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헌병 분대로 돌입하였다. 이때 헌병들은 다시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여기서 몇 사람이 쓰러졌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헌병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하며 살육행위를 감행하였다. 1919년 미국상원 제66회 의사록에는 다음과 같이 서양 선교사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3월에 시위가 처음 일어났을 무렵에 2~3백 명의 군중이 황해도 수안 헌병 분견소를 찾아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니 당신들은 물러가라고 통고하였다. 헌병들은 물론 한국이 독립을 획득하였다면 물러가겠지만 그러나 그 전에 서울로부터 명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해답하였다. 군중은 이에 만족하고 돌아갔다. 약 2시간 후에 한 떼의 다른 군중이 와서 같은 요구를 하였다. 이번에는 헌병이 발포를 해서 5명을 죽였다. 다른 몇 사람인가는 상처를 입고 잡혀서 갇히었다.” 황해도 장관보고서(1919. 8. 18)에는 이날 발포로 즉사한 자는 9명, 중상자는 18명이었다고 한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게 된 헌병대는 평양주둔 보병부대를 증원, 엄중 감시하는 동시에 일일이 수색전을 벌여 많은 사람을 검속하였으며 한편 의용단, 야경단을 조직, 강제 진압에 나섰다. 그런데도 3월 7일 수구면 석달리 홀동에서 천도교 전교사 이승필·이달수·이재협 등이 주동이 되어 약 40명이 장날을 이용,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헌병주재소의 습격을 기도하면서 격렬하게 만세를 불렀다. 맺는 말 사망 9명, 중상 18명으로 피의 항쟁을 벌였던 수안군 천도교도들의 만세시위는 끝났으나 일제의 강제수색과 현장에서 주모자 색출로 70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일 년 반의 재판을 거친 끝에 최고 2년 최저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희끗 센 사람도 섞여 있었으며, 의복 한 벌도 차입할 수 없는 형편으로 보기 흉한 푸른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직업은 대부분 농업이었고 종교는 모두 천도교라 했다. 이들 중 홍두익과 최석규 등 2명은 병으로 출정하지 못하였다. 나머지 68명은 1920년 11월 2일부터 경성 복심법원 정동 특별 법정에서 재판을 개정 8일까지 마쳤는데 다음과 같이 형을 받았다. 징역 2년 : 安鳳河, 金永萬, 李永喆, 洪斗玉, 李東郁, 1년 6월 : 羅燦洪, 洪吉載, 李潤植, 金溶植, 金炯宣, 李應洙, 李達河, 張聖道, 羅龍日, 安昌浩, 鄭理彦, 李致濟, 金明白, 梁石斗, 康夢洛, 朴宗燮, 金炳領, 梁啓殷, 金麗鎭, 金河京, 金熙德, 柳光善, 金泰赫 ,金錫鳳, 朴泰道, 康國甫, 車濟南, 1년 : 洪斗益, 李在觀, 白受和, 金文祚, 李彩龍, 田昌五, 李鍾國, 金龍洙, 龍桂弘, 金元杰, 鄭達明, 柳良鎭, 鄭斗濱, 朴昌淳, 金健榮, 金啓淑, 金貞萬, 金榮弘, 鄭益淳, 李宗植, 李台仁, 朴鎭化, 金應基, 鄭鎭河, 韓眞錫, 朴利鳳, 金錫龜, 吳炳善, 8월 : 李義萬, 徐相麟, 6월 : 朴昌雲, 李時庸, 李斗闡, 병중에 있던 홍두익은 쾌차하였으나 최석구는 기관지염으로 오랫동안 감옥에서 고생하다 포덕 61년 (1920) 8월 4일 재판 판결이 나기 전에 순도순국하였다. 최석구는 수안군 서부면 지암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52세에 환원하였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국내 동포의 체계적·실용적 지원을 위한 동포체류지원센터 지정서 수여식 및 간담회 개최법무부는 국내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안정적 정착과 지원을 위해 지난달 공모와 심사를 거쳐 비영리단체(기관) 23곳을 “동포체류지원센터”로 지정하였으며, 오늘 “지정서”를 수여하고 센터 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이번에 지정된 동포체류지원센터는 국내 동포지원을 위해 출입국·체류·영주·국적·취업 상담과 사회통합 교육 등을 ’25년 7월 1일부터 2년 동안 담당하게 됩니다. 법무부는 이날 동포체류지원센터 지정서 수여식 직후 개최된 간담회에서 올해 추진하고 있는 동포 체류자격 통합 방안과 한국어와 정체성 교육 강화 방안 등 사회통합 교육 강화 방향을 설명하고 이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날 간담회에서 센터 대표들은 “동포 체류자격인 방문취업(H-2)과 재외동포(F-4) 체류자격을 재외동포(F-4) 체류자격으로 통합하는 방안”의 조속한 시행과 더불어 재외동포(F-4) 체류자격으로 통합되더라도 그동안 방문취업(H-2) 자격자가 일해오던 단순노무 분야에서 계속해서 종사할 수 있도록 취업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또한 대표들은 후세대로 내려갈수록 동포와 그 자녀들이 한국어 구사 능력 부족으로 학업이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면서, 한국어 습득과 학습 동기 유발, 학습 과정 다양화의 필요성은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재외동포(F-4) 체류자격이나 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어 능력 입증서류를 제출하는 방안의 도입은 신중하게 검토해 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번에 법무부가 추진하고 있는 동포 체류자격 통합에 대해 동포사회에서는 반기고 있지만, 동포의 배우자(비동포)는 국내에서 취업이 농·축산업·임업, 간병·가사 분야로 제한되어 있어 생계유지에 큰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도 마련해 줄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법무부는 동포체류지원센터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번 간담회에서 건의된 내용들을 포함하여 무국적동포 포용, 동포체류지원센터의 법제화, 동포 전담 부서 설치, 사회통합프로그램 운영과정과 방식의 다양화 등 동포와 그 가족들이 안정적으로 국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동포지원정책을 추진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