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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님 모신 무궁한 나를 찾아서… 첫발 뗀 신입 교인중앙총부는 포덕 166(2025)년 8월 9일(토)부터 10일(일)까지 이틀간 우이동 의창수도원에서 ‘나를 찾아서’를 주제로 포덕 166년 신입 교인을 위한 특별수련을 진행했다. 이번 수련은 새로 입교한 교인과 복교인을 대상으로 천도교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 경전과 의절 교육, 수련 실습을 통해 한울님을 모신 무궁한 나의 존재를 깨달으며 신앙생활의 기본기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번 교육에는 서울, 도봉종로, 강남, 공항, 동두천, 대전 교구에서 총 15명이 참석했으며, 교육은 강의, 실습, 영상 시청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됐다. 1일 차 –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첫 여정의 시작점 첫날 오전 10시 개강식. 서종환 의창수도원장은 환영사에서 “이번 기회를 통해 신앙을 굳건히 하고 한울님을 모시고 받들고 섬기는 데 도움을 얻길 바란다”며 “교육이 잘 이뤄져서 각자가 속한 교구에서 더욱 열심히 교화에 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강병로 종무원장은 “이번 교육은 신입 교인을 위해 중앙총부가 마련한 첫 번째 교육”으로, “인생에는 여러 선택이 있지만 가장 크고 중요한 선택은 천심(天心), 즉 한울님 마음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프로그램이 잃어버린 천심을 찾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차례로 연단에 올라 자기소개와 교육에 대한 기대감을 밝히며 수련에 임하는 각오를 전했다.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전명운 교화관장은 이번 교육이 ‘많은 내용을 주입하기보다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 중 그간 간과되거나 덜 알려진 내용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전 관장은 네 분 스승님, 경전, 의절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맹목적인 주입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식이 이 시대의 흐름에 맞는 교육 방식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첫 강의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와 해월 최시형 신사의 일생과 사상을 영상 콘텐츠로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수운 대신사 영상은 1824년 경주에서 태어나 가난 속에서도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며 세상 혼란과 백성의 고난을 해결할 길을 찾던 중 시천주의 깨달음을 얻어 동학을 창명한 과정을 담았다. 해월신사 영상은 수운 대신사를 만나 제자가 된 뒤, 대신사 순도 이후 교단을 이끌며 교리를 정리하고 경전을 편찬하며 동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발자취를 알기 쉽게 소개했다. 오후 시간에는 ‘수련의 이해와 실습’이 이어졌다. 강의를 맡은 김춘성 선도사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수련법이 나와 있으며, 호흡법, 요가, 명상 등 다양한 것들이 소개되는 가운데 비교도 해볼 수 있는 반면, 함정도 숨어 있다”고 말하며, 천도교 수련의 특징은 “주문이 수련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천도교의 수련은 단순히 몸이나 건강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한울님과 통하여 한울님의 감응을 받는다는 점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강의 후 각자의 궁금증과 수련 중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하고 공유했다. 이어 참가자들은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 경전 이해를 돕는 영상을 시청하고, 오관과 천도교 의절에 관한 전명운 교화관장의 강의를 들었다. 전 관장은 현대 사회 변화 속에서 천도교인이 지녀야 할 생활 태도와 실천 방안을 제시하며, 경전의 가르침을 일상에 녹여낼 것을 당부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서종환 수도원장의 지도에 따라 합송과 현송을 번갈아 가며 실제 수련에 임했고, 오후 9시에는 학습한 의절에 따라 신입 교인들이 직접 집례를 맡아 경전을 봉독하고 기도식을 봉행했다. 2일 차 – 대도견성을 향한 아침 수련, 새로운 출발을 알린 폐강식 둘째 날 아침, 참가자들은 70분간 아침 기도식과 수련에 참여했다. 주문에 집중하며 내 안에 모신 한울님의 존재를 새기는 시간이었다. 이후 의암 손병희 성사와 춘암 박인호 상사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영상을 시청했고 마지막 순서인 수료식을 지켜보았다. 폐강식에서 서종환 수도원장은 “1박 2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다룰 수 있는 교육은 많지 않은데, 꼭 알아야 하는 것들만 담겨 앞으로 천도교를 공부해 나가는 데 탄탄한 기초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한 분, 한 분 더 크게 성장해 대도견성(大道見性) 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여러분은 이미 신입 교인이 아니며,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숨어 있는 빙산의 나머지 부분에 해당하는 잠재력을 지녔다. 이제 동기부여가 됐으니 뭔가 크게 이룰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이미 지상신선”이라고 말했다. 또 “중앙총부에서는 이 같은 교육 외에도 신입 교인을 위한 길라잡이 교재를 구상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결과물이 나와서 여러분들의 성장을 돕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특별수련은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신입 교인들에게 신앙의 뿌리를 심고, 향후 신앙생활의 방향을 정립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참석자들은 각자의 교구로 돌아가 한울님을 모신 거룩한 존재로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교단의 미래를 밝히는 주역이 될 것을 다짐했다. 한편, 중앙총부는 오는 8월 23일(토)~24일(일) 양일간 경주 용담수도원에서 신입 교인을 위한 두 번째 특별수련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신입 교인을 위한 특별수련, 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조남혜(신입 교인, 동두천교구) “거짓말하지 말고 살아라. 아, 그게 한울님이구나, 거짓말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그 한울님을 만난 것 같았고, 새로 나에 대한 질문, 제가 왜 여기 있습니까, 제가 뭡니까, 하는 것, 매번 올 때마다 계속 가져갑니다. 아무튼 굉장히 좋았고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몸을 좀 움직이는 타이밍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박보연(신입 교인, 공항교구) “저는 시일식하고 기도식, 요렇게 딱 두 개만 접하고 있어서 천도교에 대한 이해가 좀 없었어요. 그런데 이런 특별한 교육을 통해서 천도교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앞으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서는 것 같습니다.” ■김소이(신입 교인, 공항교구) “저는 작년에 입교식을 한 이후 어떤 식으로 천도교를 해야 되는지 정확하게 기준이 잘 안 잡혀 있었는데, 이번 교육을 통해서 심고나 수련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고 그간에 궁금해했던 『동경대전』이라든가 다른 경전들에 대해서도 영상을 보면서 알 수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다만 조금 힘들었던 부분은 제가 전날 저녁에 일이 있어서 늦게 잤더니 영상이나 교육이 재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정도 넘어가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 30분이나 단위별로 짧게 끊어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희윤(예비자, 대전교구) “제가 이번 특별수련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가장 크게 감명받은 건 수련 부분입니다. 다 같이 수련을 하는 도중에 소리가 나서 주변을 돌아보니까 강령이 오신 분들이 여럿 계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주문을 외니까 어제 잠이 부족했던 관계로 저녁 이후에 머리가 좀 아팠는데 그게 살짝 가라앉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내 안에 모신 한울님에게 직접 다가가는 이런 수련이 자기 자신을 조절하고 자기 마음을 다잡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임덕녀(전교인, 대전교구) “이번 특별수련 기간이 짧긴 하지만, 한울님이 그나마 저에게 많은 용서를 주시고 감화를 주시는지 그동안 너무 공부를 안 했던 그런 상황이 많이 참회가 되고 또 앞으로 내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도 있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계획도 있고 한데, 바깥에 나가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마음도 자꾸만 흔들려요. 다시 마음을 잡으려고 하면 자꾸 잡념이 생기고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원장님 말씀 듣고 새로운 마음으로 더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이재원(신입 교인, 대전교구) “낯선 곳에 와서 제가 그간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교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감회가 깊습니다. 천도교 경전에 제가 평소 궁금해했던 부분이 잘 나와 있어서, 너무 늦게 여기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동덕 여러분을 만나뵙게 되어 참 반갑고, 앞으로 공부해야 할 게 무궁무진해서 노후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임미정(전교인, 대전교구) “신입 교인을 위한 특별수련을 마련해주신 데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천도교는 ‘믿는다’가 아니라 ‘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수련을 통해서 도를 깨닫고 실천하는 게 우선이니까 ‘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어디 가서 얘기할 때 ‘나, 천도교 한다.’ 이렇게 한번 말해보려고 합니다. 수련을 통해서 이렇게나 많은 경험과 깨우침을 여럿 계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주문을 외니까 어제 잠이 부족했던 관계로 저녁 이후에 머리가 좀 아팠는데 그게 살짝 가라앉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내 안에 있게 해주셔서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천도교를 하는’ 데 저도 동참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아이들이 없으면 천도교의 미래 또한 없을지도 모릅니다”열악한 환경 속에서 시작된 어린이 하계 수련 낙안회 김미정 회장(천도교여성회본부 교화부장)은 올해도 어김없이 ‘한울 어린이 여름 캠프’ 현장을 지켰다. 그에게 어린이 캠프는 교단의 미래를 위한 장기 프로젝트다. “어린이 수련 캠프를 맡은 지 벌써 20년이 넘은 것 같아요. 처음 시작은 2004년쯤이었어요. 그땐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수련했는데, 어린이만 100명이 넘었어요. 여성회 여름 수련과 함께 어린이들은 별도 프로그램으로 운영했고, 장소는 용담수도원이었어요. 지금처럼 좋은 시설에서가 아니라 가건물 식당을 숙소로 사용했어요. 그 자리에서 6박 7일 동안 다 같이 자야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지요.” 당시 어린이 프로그램을 운영할 여성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여성회본부는 여행이야기와 손잡고 탐방 프로그램 강사를 양성했다. 이에 주로 젊은 엄마들로 이루어진 교인 여성들이 강사로 참여했고, 이것이 낙안회의 뿌리가 됐다. “각자 10년 넘게 답사 강사로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린이 수련 프로그램을 맡게 됐어요.” 예산 문제로 찾아온 공백과 한울나눔터와의 연결고리 그러나 2010년 전후로 어린이 수련은 예산 문제로 중단됐다. “우린 전부 무료 자원봉사였는데, 수고했다고 여성회에서 식사비를 주셨죠. 그런데 그게 소문이 나서 ‘낙안회는 돈을 줘야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오해를 받은 거예요.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었는데……. 결국 불러주지 않으니 프로그램이 끊기고, 아이들도 발길을 끊게 됐죠.” 약 5년 전부터 국고 지원이 가능해지면서 상황이 나아졌지만, 교인 수가 줄면서 어린이 모집이 어려워졌다. “전국에서 교인 자녀 30명 모으기가 힘들어요. 게다가 코로나19로 몇 년을 쉬고 나니 참가자 구성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올해는 아예 처음부터 선착순 30명을 모집했고, 하루나 이틀만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응이 좋아서 부모님들이 ‘겨울에도 진행해줄 수 없느냐’고 하세요.” 김미정 회장은 캠프를 초등학생에서 중고등학생으로, 다시 대학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한울나눔터’에서 찾는다. “예전엔 초등학생이 자라서 중고생이 되고, 한울나눔터에 참여하며 대학생단으로까지 이어졌어요.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은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니 장기간 봉사에 어려움이 있어요. 게다가 사춘기 시기 청소년 모집은 더 힘들고요. 이런 사정이 겹쳐 한울나눔터도 중단됐죠.” 하지만 대학생단에서 올해 한울나눔터를 다시 시도한다는 소식에 반가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옛날처럼 아침저녁으로 두 시간씩 수련한다고 하면 아무도 안 오죠. 지금은 천도교를 알고 친해지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해요. 어른들이 보기엔 수련 시간이 짧다고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이나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야 프로그램이 이어질 수 있다고 봐요. 20년 넘게 쌓아온 팀워크로 아이들 눈높이도 척척 캠프 운영에서 중요한 건 참가자들 눈높이에 맞는 환경과 식사다. “전에는 수도원이나 여성회복지회관을 이용했는데, 시설이 아이들 기대에 못 미쳤어요. 요즘 아이들은 매일 샤워해야 하고, 음식도 입맛에 맞아야 해요. 올해는 유스호스텔에서 숙박했고, 식사도 다양하게 준비했어요. 비건을 선택한 초등 3학년이 있었는데, 고기를 안 먹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건강과 만족 중 하나를 택하라면, 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주는 쪽을 선택해요. 이 과정에서 대학생 보조 진행자들의 역할이 컸다. “더운 날 직접 나가서 음식을 사 오고, 메뉴를 고민해주는 모습이 참 고마웠어요.” 현재 낙안회 팀원은 6명. 대부분 10년 넘게 함께한 이들로, 4명은 창립 멤버다. “20년 넘게 하다 보니 각자 역할을 잘 알아서 프로그램이 수월하게 돌아가요. 하지만 모두 50~60대가 되다 보니 체력적으로 쉽지 않아요. 새로운 팀원이 필요하지만, 요즘 젊은 엄마들은 일하러 나가니 쉽게 낙안회에 들어오지 못하고요.” 최근엔 반가운 제안도 있었다. “한 엄마가 ‘어릴 때 캠프에 참여했는데, 그때 지도하신 선생님이 아직도 계신다’며 관심을 표하더군요. 당시 함께 캠프에 참여했던 친구들과도 연락이 된다면서요.” “어린이 여름 캠프가 끊기면 미래도 끊긴다” 김미정 회장은 어린이 캠프가 단절될 경우를 가장 두려워한다. “이 프로그램이 없으면 천도교의 미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물론 아이들이 커서 교회 활동을 계속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경험의 장은 있어야죠. 1~2년만 쉬어도 아이들이 안 모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어른들이 가진 오해를 풀고 싶다고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다 할 수 있어요. 지방 교구에서 1학년이나 유치원생을 보내도 걱정하지 마시라고 해요. 중요한 건 믿고 보내주는 거예요. 그게 아이들을 키우는 첫걸음입니다." -
제162주년 지일기념식 봉행포덕 166년(2025) 8월 14일,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각 교구에서 제162주년 지일기념식을 일제히 봉행하였다. 해월신사의 숭고한 정신, ‘수심정기’로 울려펴져 이번 기념식은 시암 전명운 교화관장이 집례를 맡았으며 ▲개식 ▲청수봉전(여성회본부 이정녀 부회장) ▲심고 ▲주문 3회 병송 ▲경전봉독(여성회본부 김명덕 회장) - 해월신사 법설 守心正氣(수심정기) ▲기념사 ▲천덕송 합창 ▲심고 ▲폐식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이후 문화공연에는 천도교연합합창단 ‘샘’과 국악공연팀 ‘지음’의 무대가 이어졌다. 박인준 교령은 기념사에서 “오늘은 해월신사님께서 수운대신사님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으신 뜻깊은 날”이라며, 이 날을 ‘사해 운중 밝은 달이 솟아 세상을 밝힌 날’로 비유한 지일기념가의 의미를 되짚었다. 이어 해월신사의 일생을 소개하며 “해월신사님은 정성과 공경, 믿음이 한울에 사무쳐 천명을 받고, 평생 수심정기의 독공수련에 매진하셨다”고 강조했다. 해월신사의 삶과 사상, 그리고 유산 기념사에서는 해월신사가 ‘민중의 성자’이자 ‘일하는 한울님’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상세히 전해졌다. 해월신사는 전국을 걸으며 수백만 명을 포덕했고, 『동경대전』·『용담유사』·『도원기서』를 간행해 올바른 가르침이 전승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공주·삼례·광화문·보은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여 평화적·민주적·비폭력 종교운동으로 확산시켰고, 나아가 보국안민·제폭구민·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지휘하며 시대의 고난 앞에 서슴없이 나섰다. 해월신사는 신분 해방, 어린이 해방, 여성 해방, 생태 해방을 주창하고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특히 박 교령은 “해월신사님의 경천·경인·경물의 삼경사상은 물질만능주의와 인간 탐욕으로 인한 지구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생명사상”이라며 “이는 오늘날 인류 문명의 전환기를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라고 평가했다. 포덕 168년 탄신 200주년 향한 3개년 기념사업 이날 천도교중앙총부는 포덕 168년(2027)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올해부터 3개년 기념사업에 돌입한다고 발표했다. 주요 계획으로는 △기념식 및 학술대회 △세계 어린이 인권문화제 △다큐멘터리 제작·상영 △기념 공연 △해월신사 동상 건립 △상설 및 기획 전시 △경전 목판본 제작 등이 제시됐다. 이 사업들은 동덕과 일반 시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형태로 추진될 예정이다. 박 교령은 “동덕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과 정성을 간곡히 요청드린다”며, 이번 기념사업이 교단 중흥과 더불어 인류 보편 가치 확산의 전기가 될 것임을 밝혔다. 광복 80주년과 평화통일 기원 기념식의 마지막에서 박 교령은 “내일이면 광복 80주년을 맞이한다”며, 남북 평화통일과 국가 발전, 국제 전쟁 종식, 지구촌 평화 환경 구축을 기원했다. 박 교령은 “해월신사님의 뜻을 잇는 우리는 세계 속에 평화를 전하고, 개벽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교단 공헌자에 대한 시상 이날 지일기념일을 맞아 교단 발전에 헌신한 교인 포상 및 공로패 시상식도 함께 열렸다. 시상은 박인준 교령이 직접 맡았으며, 선구교구 성심당 최진심 선도사와 대구 대덕교구 정암 김정수 전임 교구장이 <공로패>를 수상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최진심 선도사가 직접 참석해 수상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번 시상은 교단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앞으로도 신앙과 봉사의 길을 이어가기를 격려하는 의미를 담았다. 축하공연,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무대 2부는 대학생단 조화정 단장의 사회로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첫 무대는 천도교 ‘샘’ 연합합창단이 <천덕송 이음곡>과 <도나도나>를 선사하며 큰 박수를 받았다. 이어 ‘지음’의 무대가 펼쳐졌다. 소리꾼 양현태, 가야금의 이서희, 대금의 장한백, 장단의 이주아 단원이 함께 꾸민 판소리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은 흥과 웃음을 자아냈고, ‘수심정기(김정희 작곡)’, 천덕송중 ‘영부의 노래’는 깊은 울림을 전했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객석에서는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250여 명의 교인과 내외빈이 참석해 뜻깊은 이날을 기념했다. 다음은 이날 발표한 기념사의 전문이다. 기 념 사 공경하는 국내외 동덕 여러분!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해월신사님께서 천명(天命)에 따라 수운대신사님으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지 162주년이 되는 지일기념일입니다. 이 날을 지일기념가에서는 ‘사해(四海) 운중(雲中) 밝은 달이 솟아 올라서 어둔 세상 명랑(明朗)하게 비춰주신 날’, ‘이세(二世) 교조(教祖) 되셔서 세상 건지신 날’, ‘창생 살아난 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뜻 깊은 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해월신사님의 위대한 삶과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깊고 높은 가르침을 가슴속 깊이 되새기며 새롭게 결의를 다지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해월신사님께서는 만고 없는 무극대도인 천도를 얻으셔서 후천개벽의 새벽을 여신 수운대신사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후에는 평생토록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수심정기(守心正気)의 독공수련에 매진하셨습니다. 해월신사님은 진정으로 정성과 공경과 믿음이 지극하신 분이셨습니다. 정성이 한울에 이르러 천명을 받으셨고, 공경이 한울에 이르러 조용히 천어를 들으셨고, 믿음이 한울에 사무쳐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이후 포덕에 진력하여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이 되셨고, 천도교 2세 교조로 도통을 이어받아 창생을 구제하셨습니다. 해월신사님의 가르침은 가물던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고, 그 절개는 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소나무 같았으며, 그 법도는 가을 서리 같았습니다. 해월신사님을 한 번 뵈온 사람들은 모두 감복하여 입도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의 덕화(徳化)’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엄혹한 관의 탄압 가운데에서도 36년 동안 보따리 하나 둘러메시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시면서 ‘수백만 명 포덕’이란 기적을 이루어내셨습니다. 해월신사님은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공주와 삼례, 광화문과 보은에서 교조신원운동(教祖伸冤運動)을 적극 전개하여 평화적이고 민주적이며, 비폭력적인 종교인의 진면목을 보이셨습니다. 동학 도인들의 높은 도덕성을 바탕으로 전개한 교조신원운동은 오늘날 ‘현대 시민운동의 원류’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후 민중의 염원과 시대의 요청에 따라 보국안민(輔国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지휘하는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삶을 사시다가 거룩하게 순도하셨습니다. 공경하는 국내외 동덕 여러분! 천도교 2세 교조로서 해월신사님이 쌓으신 업적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대지(大地)와 같은 넓은 덕으로 수백만 명을 포덕하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어 향후 개벽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고, 둘째로는 수운대신사님의 유훈에 따라 경전『동경대전』과 『용담유사』, 천도교의 초기 역사를 기록한『도원기서』를 간행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전승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며, 셋째는 교조신원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을 통하여 도인과 민중에게 신앙의 자유와 보국안민의 정신, 자주와 평등 의식을 일깨웠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삶의 발자취를 보이신 해월신사님을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민중의 성자’, ‘일하는 한울님’으로 부르면서 추앙하고 있습니다. 공경하는 국내외 동덕 여러분! 해월신사님은 수운대신사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계승하였으며, 민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말씀을 실천하고 확장한 영적 스승인 동시에 대사상가이셨습니다. 해월신사님이 설파하신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사상(三敬思想)은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와 인간 탐욕으로 인한 지구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생태중심주의 가르침으로서, ‘생명 사상의 원천’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 해월신사님은 후천개벽을 밝히시면서, 문명 전환기의 어둠 속에서 절망하는 도인과 민중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셨습니다. 신분 해방, 어린이 해방, 여성 해방, 생태 해방을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제 행동으로 가르쳤습니다. 또한 앞으로 “우리 도의 운수에 영웅호걸들이 많이 나서 세계에 포덕사로 나가 형체 있는 한울님 소리를 들을 것이라 ”고 말씀하셨으며, “장차 천도교가 세계 인류의 정신을 지도하고, 우리나라가 세계의 선도국가가 되리라”는 비전을 제시하여 당시 도인들과 민중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셨습니다. 해월신사님의 이러한 구원과 희망의 정신은 스승님께서 직접 지으신 강시에서도 은유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때는 그 때가 있으니 때는 곳곳이라 산에 있는 새야! 너는 그것을 알지 않느냐? 세속이 비록 무엇을 외로이 듣는다 해도 다른 날 능히 못 가운데 죽게 된 고기를 건지리라” 공경하는 국내외 동덕 여러분! 우리는 해월신사님의 용시용활(用時用活)하신 삶과 수행에서 길어 올린 높은 가르침을 깊이 체득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선양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중앙총부에서는 포덕 168(2027)년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동덕님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그 의미를 널리 알리고자 올해부터 3개년에 걸쳐 기념사업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기념식과 기념 학술 대회 개최, 세계 어린이 인권 문화제 개최, 다큐 영화 제작/상영, 기념 공연, 동상 건립, 상설/기획전시, 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 목판본 제작 등의 사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동덕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과 협력을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함께 교단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는 대업에 참여하여 지혜와 정성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내일 뜻깊은 80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평화적인 남북통일과 국가 발전, 국제적인 전쟁의 종식, 지구촌의 평화 환경 구축을 기원하며, 모든 동덕님께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이 늘 함께 하시길 심고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 166년 8월 14일 천도교 교령 박 인 준 심고 -
천도교와 3 · 1운동(14) "제암리(堤岩里)의 3·1운동... 만세시위의 봉화 올라"『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5. 제암리(堤岩里)의 3·1운동 <참고 : 성주현 자료> 머리말 포덕 60(1919)년 3월 1일의 만세시위는 천도교의 주도적 역할로 전개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3·1운동 당시 천도교인들은 땅, 소, 밭, 심지어 집까지 팔아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 독립운동과 투쟁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남양반도를 중심으로 한 남양교구의 3·1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암리(堤岩里)학살사건으로 더 알려진 남양교구의 3·1운동 역시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일으켰으며 화수리 주재소 습격에 대해 화수리를 비롯하여 수촌리·한각리·조암리·제암리·고주리 등 1백여 채의 가옥 방화, 20여명의 사망, 40여 명의 투옥, 5백여 명의 고문 등 일본군의 철저한 보복을 받았다. 이 가운데 수촌리의 보복상과 제암리·고주리의 집단학살은 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다. 더욱이 제암리 집단학살의 희생자 대부분이 아직도 기독교인으로 왜곡되거나 잘못 기록되어지고 있다. 남양반도의 천도교 남양반도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동학혁명 이전이었으나 어느 때부터 포덕이 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동학혁명 전에 수원을 중심으로 김내현(金乃鉉)·안성관(安聖寬) 두 동덕이 활동하였으며 이 지역에서도 이미 동학이 포교되어 고주리의 김흥렬(金興烈)을 중심으로 상당수가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지역의 동학군은 수촌리의 백낙렬(白樂烈)과 김흥렬(金興烈)의 인솔 하에 수원 김내현(金乃鉉)·고석주(高錫柱)접주 휘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우는 등 혁명에 참여했다. 포덕 46년 갑진개화운동 때에는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흑의단발, 폐정개혁 등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포덕 51년에 우영규가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포덕 53년 1월 김인태 교구장에 이어 조동술이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해 10월에 조동술 교구장에 이어 백낙온(白樂溫)이 교구장이 되었으며 포덕 55년 7월 한세교 교구장 때 수원 대교구에서 분립하였다. 3·1운동 전인 포덕 59년 4월 한세교 교구장에 이어 라천강이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3·1운동의 준비 포덕 53년 천도교 3세 교조 의암성사께서 우이동에 봉황각을 신축하고 3월부터 지방두목을 불러 49일간씩 7차에 걸쳐 연성강도를 시킬 때 남양교구에서도 이종석(1) 정도영(2) 한세교(2) 이규식(3) 이성구(3) 김정담(5) 이민도(6) 김흥열(7) 김창식(7) 등 9명이 우이동 연성강도회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준비를 갖추었다. 포덕 60년 서울에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전개하자 남양교구에서도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백낙렬·김성렬·안종후(기독교인) 등이 서울로 올라가 직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당시 순회교사인 백낙렬은 장안면 거북골(마정리)전교실, 기림골전교실, 장안리전교실, 덕다리전교실, 사기말전교실, 고온리전교실, 덕목리전교실의 교역자들을 만나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고 이에 동의를 얻은 다음 우정면 주곡리의 차희식, 팔탄면 고주리의 김흥렬과도 만나 상의를 했다. 한편 김흥렬은 제암리·고주리 전교사인 안종환·안정옥과 기독교인 안종후를 찾아가 만세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확인받은 후 가재리의 이정근(유학자)과도 상의를 했다. 이렇게 만세운동의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갈 무렵 백낙렬 순회교사는 중앙총부로부터 이병헌이 수원교구에 내려온다는 연락을 받고 김흥렬과 논의한 끝에 고주리·제암리의 전교사인 안종환·안종린을 3월 16일 아침 일찍 수원 복수리교구에 파견시켰다. 그러나 안종환과 안종린은 수원 복수리교구에서 비밀회의 도중 일본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중경상을 입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서 김흥렬에게 천도교중앙총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김흥렬은 즉시 수촌리로 나아가 백낙렬을 만나고 중앙총부의 지시를 전했는데 그 내용은 각 교구의 만세운동은 자체부담으로 계속 전개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백낙렬 순회교사는 빚을 내서라도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고 김흥렬은 팔탄면과 향남면을, 백낙렬은 우정면과 장안면을 책임지기로 했다. 백낙렬과 김흥렬 두 동덕은 이튿날부터 동분서주하면서 자금을 모금하는 하편 만세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만세시위의 봉화 올라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춘 남양교구의 만세운동은 서울보다 한 달 늦은 4월 2일 저녁 9시경 장안면 수촌리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일제히 시작되었다. 장안면의 백낙렬은 4월 3일 새벽 3시경 이봉구·정순영·홍수관 등과 함께 청수상 앞에서 만세시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심고하고 백낙렬의 지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자 이봉구·정순영·홍수관은 집집마다 돌면서 교인과 주민들을 동원했다. 아침 9시가 되자 석포리 방면에서 주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수촌리 방면의 주민들은 머리에 흰 끈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 또한 우정면 주곡리에서도 차희식이 주민을 동원하여 수촌리 전교실로 모였다. 잠시 후 수촌리전교실에서는 이봉구가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고 쓴 깃발을 들고 홍수광·차인범은 비밀리에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태극기를 든 군중들은 백낙렬의 ‘대한독립만세’의 선창에 따라 함성을 지르면서 수촌리를 돌고 독정리로 향했다. 이때 독정리전교사 이종근이 교인 우종렬·우영규와 함께 교인과 주민을 동원하여 전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만세를 부르며 군중들과 합세했다. 또한 김창식은 덕다리 교인과 주민들을, 최건환 독정리구장은 전주민을 동원하여 신촌에 집결해 있었다. 한편 장안리에서는 전교사 조교순과 김인태·양순서 등이 주민을 이끌고 신촌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사방에서 몰려든 군중들은 그동안 억눌린 생활을 발산하듯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어서 군중들은 어은리 기림골로 향했다. 기림골에서는 김현조 순회교사와 김익배 전교사가 주민을 동원, 전교실에 대기하고 있다가 합류했다. 이때 백낙렬이 앞으로 나아가 장안면사무소로 가자고 외치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질서정연하게 장안면사무소로 향했다. 군중들은 면사무소에 이르자 사무소에 난입하여 사무집기를 모두 파괴하고 서류 장부를 파손, 밖으로 내던졌다. 기세가 오른 군중들은 더욱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때 도망하려다 붙잡힌 김현묵 면장도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 이윽고 면사무소는 검은 연기가 치솟으면서 서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한편 조암리 쌍봉산에서도 이를 환영하는 듯 많은 군중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뿐만 아니라 어은리 주민들도 이에 합세했다. 장안면사무소를 습격한 군중들은 쌍봉산으로 이동했다. 쌍봉산은 해발 117미터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우정면과 장안면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정상에서는 이미 우정면 덕우리, 장안면 금의리 등 주민들이 먼저 도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이들을 환영했다. 삽시간에 쌍봉산은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부른 군중들은 쌍봉산을 내려와 일부는 멱우리 쪽으로 하산하였고 나머지 일부는 조암리 낡은아실 쪽으로 하산, 조암리 주민들과 합세하여 우정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사기말로 향했다. 우정면사무소는 장안면사무소의 습격소식을 듣고 미리 도망하여 직원이 한명도 없었다. 군중들은 장안면과 마찬가지로 우정면사무소를 부수고 집기와 서류를 밖으로 끌어내 소각했다. 이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약 2천 5백 명으로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 대부분이 참가했다. 화수리주재소 습격 이어 군중들은 백낙렬과 정영순의 지시에 따라 김현묵 장안 면장을 앞세우고 친일파인 우정 면장 최중환 집으로 몰려가 살해코자 했으나 마침 부재중이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한각리로 향해 소산광장에 집결하였는데 이때 모인 군중은 약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여기서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기로 모의를 하고 만세를 부른 후 주재소를 서서히 포위해 가면서 세 방면으로 공격을 가했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주재소 안에 있던 순사부장 가와바다와 순사들이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투석전을 벌였다. 당황한 순사들은 총을 버리고 도망쳤으나 이내 붙잡혀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가와바다 순사부장은 문 뒤에 숨어서 계속 총을 쏘아댔다. 이때 이봉구가 깃대를 들고 주재소를 향해 뛰어들다가 넘어졌으며 이 광경을 본 김정식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었으나 역시 총에 맞고 쓰러졌다. 뒤를 이어 이경백·김현모가 주재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마찬가지로 희생되었다. 이를 틈타 장소진·장제덕이 주재소 뒤쪽에 있던 나무를 지고 주재소로 달려가 불을 질렀다. 불이 주재소로 옮겨 붙자 가와바다는 필사적으로 도망가면서 군중에게 계속 사격을 가했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던지면서 쫓아갔으며 마침내 김익경이 날쌔게 달려들어 가와바다를 내동댕이치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차희식·이봉구·정서성 등 군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가와바다를 때리기 시작했다. 가와바다는 마침내 참살 당했으며 그의 시체 위에는 군중들이 던진 돌로 무덤을 이루었다. 일단 시위가 끝나자 군중들은 만세를 계속 외치면서 각자 부락으로 해산했다. 이날 만세시위로 김정식은 다리를, 이경백은 복부를, 김현모는 심장을 관통당해 2명이 죽고 3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편 발안리 유학자 이정근은 제자들과 동지들을 모아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배양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는데 수촌리 전교사의 백낙렬과 제암리 전교사 안정옥과 자주 만나 정국에 대해 논의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4월 3일 삼괴지역(우정면과 장안면)에서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하고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그리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정근은 대대적인 봉기를 위해 발안리 주재소의 동정을 살폈다. 당시 발안주재소에 주둔해 있던 수비대는 삼괴지역으로 들어가 주재소는 텅 비어 있었다. 4월 4일 이정근은 여러 제자들을 불러 발안 장날인 4월 5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하고 발안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화수리에서 만세시위를 마친 백낙렬과 안정옥·김흥렬이 찾아와 발안 장날 만세시위에 전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4월 5일 장날에는 사방에서 장꾼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낮 12시가 되자 이를 신호로 이정근·안정옥·김흥렬 등이 주동이 되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발안리 주재소로 향했다. 이날 수촌리의 이봉구도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냇가에서 돌을 날랐으며 제암리와 고주리 주민들도 함께 행동했다. 시가지를 한바퀴 돈 군중들은 발안리 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몰려갔다. 한편 주재소는 사이다가 이미 사수들을 배치해 놓고 위협사격을 가했다. 군중들은 이에 대항하여 투석전을 벌이면서 주춤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군중들은 계속 돌을 던져 주재소 유리창을 모두 깨어버렸다. 이때 이정근·김흥렬·안정옥이 군중을 이끌고 합류하였고 이정근이 “물러서지 말고 주재소를 습격하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나 일경의 위협사격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투석전이 전개되는 동안 수비대 30명이 도착, 주재소를 둘러쌌으며 주재소 안에 있던 수비대들도 칼을 들고 지원 온 수비대와 함께 배치되었다. 군중들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만세를 부르자 수비대는 기다렸다가 군중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며 맨 앞에서 만세를 부르던 이정근이 수비대장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어 김경태가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다가 달려들자 역시 사정없이 칼로 내리쳐 즉사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처참한 광경을 본 군중들은 더욱 세차게 투석전을 전개했으나 수비대의 위력에 밀려 부득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만세시위로 수촌리의 이봉구, 제암리의 안진순·안봉순·홍원식·안종후·김정헌·강태성, 고주리의 김성렬 등이 수비대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일본군의 보복만행 한편 만세시위를 마친 군중들은 일본군이 와서 보복을 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자 저녁 때 사랑리 남산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화수리 주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의 보복을 예견한 화수리 주민들은 비 오는 밤을 이용하여 가족을 이끌고 원안리와 호곡리 방면으로 미리 피신을 하였다. 4일 새벽이 되자 화수리 주재소 습격사건을 보고받은 발안리 주재소 아리다 중위가 이끄는 수비대 1개 소대 30여명이 화수리로 달려와 마을을 완전히 포위하고 몇몇 집에 불을 놓았다. 그리고 집집마다 수색을 했으며 주민들이 모두 피신가고 없자 집집마다 방화를 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수비대는 원안리와 굴원리로 몰려가 송낙인 등 4명을 포박, 주재소로 끌고 와 주민의 행방을 알기 위해 갖은 고문을 가했다. 한편 발안리 주재소장 사이다는 사건 현장을 돌아본 후 아리다 중위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수비대를 이끌고 다시 호곡리와 원안리로 몰려가 주동자 색출을 위해 혈안이 되었다. 얼마 후 수비대는 주민 30여 명을 굴비처럼 포박하여 주재소로 끌고 와 온갖 고문과 폭행을 자행했다. 잠시 후 사이다와 아리다 중위는 다시 수비대를 이끌고 불에 타다 남은 화수리 주재소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주재소에서 좀 떨어진 소나무 숲에서 돌무덤을 발견하고 가와바다의 시체를 찾아낸 다음 사이다는 한각리로 갔으며, 아리다는 화수리 임시주재소로 돌아왔다. 한편 원안리와 호곡리에서 끌려온 주민들은 수비대의 고문에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비대는 고문을 하다가 기절하면 냇가에다 내다버리는 등 갖은 만행을 주저하지 않았다. 수비대의 보복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마을의 가축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먹고 화수리의 전가옥을 방화했다. 이처럼 화수리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보복만행은 수촌리·한각리·조암리·석포리·장안리·어은리·멱우리·사곡리·고온리·덕정리·독정리·사랑리·화산리·운평리·원안리·제암리·고주리·이화리 등 삼괴지역과 남양교구 산하 전부락에 걸쳐 자행, 1백여 채의 가옥 방화와 20여명의 사상, 40여명의 투옥, 5백여 명의 주민을 고문, 폭행했다. 이 가운데 가장 처참한 보복을 당한 수촌리와 제암리⦁고주리의 참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수촌리의 보복만행 수비대들이 네 차례에 걸쳐 가장 악랄하고 혹독하게 보복을 가한 곳이 바로 수촌리이다. 이것은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 쓴 깃발을 들고 항상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했기 때문이다. 이 깃발은 이봉구가 들고 다니다가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주재소로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깃발을 버리고 나왔다. 4일 오전, 사이다는 수비대와 함께 화수리주재소 현장을 조사하다가 이 깃발을 보고 수촌리 주민들이 사건을 선동했으리라고 단정했다. 발안에 돌아온 사이다는 밤에 아리다를 불러 다음날 새벽을 기해 수촌리를 급습하기로 계획했다. 이것이 제1차 보복이었다. 4월 5일 새벽 3시반경 아리다는 수비대 30여명과 함께 수촌리 큰말부락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을 마구 쏘아댔다. 뿐만 아니라 교회당을 불 지르고 집집마다 방화를 시작했다. 삽시간에 수촌리 큰말부락은 불바다로 변했다. 주민들은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가족을 이끌고 어두운 산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수비대는 피난하는 주민들을 향해 마구 총격을 가했다. 이날 보복으로 가옥 24채와 5명(김영조·홍병연·홍경식·차한주·김성좌)이 총상을 입었고 4명(백남학·백성오·김정희·김응칠)이 칼에 부상을 당했다. 일본 수비대는 이처럼 수촌리를 완전히 생지옥으로 만들고 마을을 떠났다. 제2차 보복은 이날 늦게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수비대는 수촌리에 다시 들려 불타고 남은 8채 가옥을 샅샅이 수색했다. 이때 이봉구가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부장을 죽일 때 가와바다의 피가 묻은 옷을 미처 버리지 못하고 다락에 감추었다가 수비대에 발견된 것이다. 또한 산속에 피신해 있던 주민 4명이 집이 궁금하여 잠깐 내려왔다가 수비대에 붙잡혀 장안리 주민들과 발안리 주재소로 끌려갔다. 발안주재소에 끌려온 수촌리 주민들에게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수비대는 이들을 창고로 끌고 가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리치자 몸이 터져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그 여독으로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제3차 보복은 4월 7일에 자행되었다. 이날 일본 수비대는 수촌리 가장 마을에 들이닥쳤다. 수비대는 가장 마을에 들어와 수촌리를 중심으로 이웃부락인 꽃밭에, 용담굴 주민들을 가가호호 돌아다니면서 모이라고 했다. 수촌리 주민들이 하는 수 없이 모이자 갑자기 주민들을 포위하고 결박을 지어 발안리주재소로 끌고 갔다. 수비대들은 밧줄에 묶여 들어오는 사람마다 몽둥이질을 가해 즐비하게 쓰러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뒹굴었다. 이때 끌려온 주민은 약 1백30여 명이나 되었다. 제4차 보복은 그 다음날 있었다. 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 등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너무나 엄청난 보복을 당해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사이다는 이러한 주민들의 행동에 격분하여 수비대를 시켜 8채 남은 가옥을 돌아다니며 고문을 해 누워있는 환자를 4채의 가옥에 몰아넣고 나머지 4채마저 불을 질렀다. 4차례의 보복으로 수촌리 마을 42채 중 4채만 남기고 38채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이때에 천도교전교실 겸 강습소도 불타버렸고 이봉구의 집도 소각되었다. 또한 백낙렬의 집에도 불을 놓아 13간 행랑채가 소각되었으나 다행히 안채는 주민들이 불을 껐다. 소각된 행랑채는 3·1만세운동을 위해 많은 천도교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했던 천도교인의 집회장소였다. 제암리의 집단학살 삼괴지역의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습격사건, 화수주재소 습격사건에 이어 발안 만세운동이 연이어 일어나자 발안주재소장 사이다는 4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삼괴지역의 거의 모든 부락에 대해 보복을 감행한 후 드디어 제암리에도 보복의 손길을 뻗쳤다. 4월 15일 오후 2시반경 사이다는 조희창과 수원에 본부를 둔 일본군 제 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 다께오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30명의 수비대를 이끌고 제암리에 들어섰다. 수비대들은 제암리를 완전 포위하여 한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조희창을 시켜 “사이다가 좋은 말을 한다고 하니 주민들은 교회당에 전원 다 모이라”고 하면서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강제로 모이게 했다. 이때 발안에서 수비대에게 잡혀 수원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 끝에 집에 돌아와 누워있던 6명도 끌고 왔다. 주민들이 이 마을에 있는 초가집으로 된 감리교 교회당에 모두 모이자 수비대들은 교회당을 완전 포위하고 돌연 출입구와 창문을 모두 큰 못으로 박아 도망가지 못하게 밀폐한 다음 사이다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여 살육하기 시작했다. 교회당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했다. 갇혀 있는 주민들은 있는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수비대들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더욱이 천인공노할 사실은 천진난만한 어린이까지 무참히 참살했다는 사실이다. 천도교 전교사 안종환은 인간도살장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어린 아들을 안고 교회당으로 갔다가 죽게 되자 어린아들을 창밖으로 내보내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이 어린 것만은 제발 살려 달라”고 피맺힌 애원을 했으나 수비대들은 조금도 사정없이 이 어린 아이를 군도로 내리쳐서 참살하고 말았다. 진정 목불인견의 참사가 아닐 수 없다. 수비대들은 교회당 밖에서 죽은 시체까지 끌어다 모아놓고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시체를 분간할 수 없게 불을 질렀다. 불길은 제암리 주민들의 피맺힌 한을 뒤로 한 채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게다가 교회당이 초가집이었으니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런데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안종엽과 김정헌은 교회당 흙벽을 뚫고 사력을 다해 도망갔으나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즉사하고 뒤이어 도망친 안경순 역시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을 수비대가 쫓아가 칼로 목을 쳐서 죽이고 말았다. 이러한 생지옥 속에서도 오직 한사람 노경태만이 실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성공,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수비대의 총격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는 데 마침 뒤쫓던 수비대가 각반 끈이 풀어져 다시 고쳐 매는 사이에 위기를 모면하여 산 속으로 숨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날 제암리의 교회당 안에서 참살당한 주민은 어린이까지 합쳐서 모두 24명인데, 그중 천도교 신자가 15명이고 김리교 신자 및 기타가 9명이었다. 이날 희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천도교 신자> 안정옥·안종엽·안봉순·홍순진·안종환 및 그의 아들 안유순, 안무순·김정헌·안명순· 안관순·안종린·김덕용·안경순·안상용 <감리교 신자 및 기타> 안종락·안종후·안진순·안필순·조경칠·강태성·노경태(당시 유일한 생존자)·홍원식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광복 80주년 맞아 천도교 성명서 발표천도교중앙총부는 2025년 8월 15일 광복 80주년을 맞아 ‘광복 80주년 기념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번 성명서에는 광복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 정의로운 역사 회복, 지구촌 평화 실현을 위한 다섯 가지 다짐과 요청을 담았다. 천도교는 성명서 서두에서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민족 자주와 세계 평화를 향한 하늘과 국민의 뜻이 이룬 결실이었다”며,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등 숱한 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왔음을 강조했다. 성명서 주요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재평가와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했다. 해월 최시형 신사의 ‘보국안민·제폭구민·척양척왜’ 기치를 언급하며, 동학농민혁명이 자주정신과 국민주권의 기원임을 밝혔다. 둘째, 친일잔재 청산과 역사 정의 회복을 요구했다. 광복 8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남아 있는 친일 인사의 미청산과 역사 왜곡을 지적하며, 강력한 입법과 역사교육 정상화를 촉구했다. 셋째, 민족 자주의 광복은 평화적 남북통일로 이어져야 한다고 천명했다. 분단을 넘어 평화와 협력의 한반도 실현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넷째,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국가 발전을 제시했다. 불평등과 차별,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 정의로운 공동체 지향을 선언했다. 다섯째, 전쟁 없는 지구촌 평화 확산을 호소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가르침 아래 인류 공동체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노력할 것을 밝혔다. 성명서는 “광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신앙은 회피가 아니라 실천”이라며, 앞으로 민족 자주, 남북 평화, 역사 정의, 지구촌 평화 실현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겠다고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천도교는 “80년 전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그 외침을 이제는 ‘평화와 개벽만세’의 실천으로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오늘 8월 15일 광복절은 제21대 대통령 국민임명식이 있는 날이기도 하여 천도교 박인준 교령은 축하메시지를 통해 " 이재명 대통령님의 국민주권임명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의 진리는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와 국민을 위하여 쓰여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대통령께서 국민의 뜻을 받들어 정의와 복지, 평화와 번영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천도교는 동학 창도 이래 개벽의 정신으로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시대적 사명을 다해왔습니다. 역경 속에서 더욱 강해지셨던 대통령님의 성장 과정처럼,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은 이 시대에 대한민국을 성숙한 민주공화국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대통령님의 걸음마다 한울님이 감응하시기를 심고합니다."라고 밝혔다. 아래는 성명서의 전문이다. 광복 80주년 기념 천도교 성명서 “자주독립의 정신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지구촌의 개벽을 향하여”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는 8월 15일, 우리는 광복 80주년을 맞이합니다.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민족 자주와 세계 평화를 향한 하늘과 국민의 뜻이 이룬 결실이었습니다. 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등 숱한 독립운동을 통해 인간 존엄과 정의로운 세상의 실현을 외쳐왔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천도교는 오늘, 다음과 같은 다짐과 요청을 밝힙니다. 하나, 동학농민혁명은 항일국권회복운동의 시작이자 국민주권의 뿌리입니다. 천도교의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는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고, 그 뜻을 지키기 위해 순도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외세의 침략과 불합리한 봉건체제에 맞선 자주정신과 국민주권의 기원이며, 3·1운동의 밑거름이었습니다. 우리는 촉구합니다. 동학농민혁명 참가자들은 정당하게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아야 하며, 나아가 독립운동의 역사에 온전히 자리매김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정의로운 역사 회복이며, 후손의 도리를 다하는 길입니다. 둘, 친일잔재 청산 없이는 진정한 광복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광복 80년이 지난 오늘도, 친일 인사의 미청산과 역사 왜곡은 우리 사회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분열과 갈등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왜곡은 언제든 다시 준동하여 민족자존과 정의를 훼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광복은 정치적 자주를 넘어 정신의 해방과 역사 정의의 회복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정부와 국회는 강력한 친일청산 입법과 역사교육 정상화에 앞장서야 하며, 시민사회 역시 정의로운 기억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셋, 민족 자주의 광복은 평화적 남북통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광복은 분단을 넘어선 평화와 협력의 한반도 실현일 때 완성됩니다. 천도교는 남과 북이 전쟁의 위협 없이 공존하고 화해할 수 있는 길에 신앙적 실천으로 함께할 것입니다. 정부와 시민사회는 남북 교류 확대와 평화체제 구축에 더욱 책임 있게 나서 주기를 바랍니다. 넷, 광복의 정신은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국가 발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광복은 민족의 해방뿐 아니라, 국민이 존엄한 삶을 누리는 사회를 실현하는 기초입니다. 천도교는 동학의 정신에 따라 불평등, 차별, 생태 위기를 넘어서는 정의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며 행동할 것입니다. 다섯, 광복은 국경을 넘어 전쟁 없는 지구촌 평화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구촌의 평화 환경 구축과 전쟁 종식은 시대적 과제이자 모든 종교·사회의 책무입니다.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가르침의 선언을 바탕으로 인류 공동체가 생명과 존엄을 지키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동귀일체의 한울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광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신앙은 회피가 아니라 실천입니다. 천도교는 민족의 자주, 남북의 평화, 정의로운 역사 회복, 지구촌 평화 실현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80년 전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그 외침을 이제는 “평화와 개벽만세”의 실천으로 이어가겠습니다. 포덕 166년(2025) 8월 15일 천도교중앙총부 -
“시각언어로도 포덕이 될 수 있습니다”“이 글씨체로 폰트를 만들면 정말 아름답겠다.” 『용담유사』 목판본을 다시 펼쳐 든 순간, 강정환 교구장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반년여, 천도교를 담은 새로운 글씨가 탄생했다. 이름하여 ‘수운천도체’.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창명한 동학 정신이 담긴 순우리말 경전 『용담유사』(1883)의 활자를 디지털 글꼴로 되살린, 최초의 천도교 서체다. 수운천도체 개발은 강정환 교구장의 기획 아래, 연세대학교 박종욱 교수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2024년 말 기획서를 구상하고, 2025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됐다. “그저 예쁜 글씨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사상을 복원하고, 그것을 통해 대중에게 천도교가 낯설지 않게 스며들게 하고 싶었습니다.” 개발 방향은 명확했다. 고전 원본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기준으로 한 ‘본체’와, 현대적 감각의 가독성을 높인 ‘각체’,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3월 한 달은 본체 개발에 집중했고, 4월은 각체의 형태 다듬는 데 할애했다. “본체는 금세 완성됐습니다. 각체는 수십 차례 수정했어요. 너무 딱딱하지 않으면서 본체의 특성을 살려야 했거든요.” 문제는 비용이었다. 폰트 개발은 최소 수천만 원에서 억 단위가 드는 커다란 프로젝트라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박종욱 교수가 말하기를, ‘지금 예산이 부족하더라도 모금에 최선을 다하시죠. 저는 이 취지에 공감합니다. 함께하겠습니다.’” 그 말이 신호탄이 되어 천도교인이 아닌 지인들이 적극 나서면서, 전국의 천도교 교인들도 하나둘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다. 천도교 대동교구와 동두천교구를 중심으로 시작된 후원은 곧 동천, 수원, 마산, 옥구 등 다른 교구로 퍼져나갔다. 강 교구장의 딸도 대만에서 후원금을 보내왔다. “제 딸은 천도교 교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폰트가 갖는 문화적 의미에 공감해서 후원금을 보냈어요. 저는 그게 포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말로 설명하기 전에 먼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수운천도체는 2025년 5월 21일, 공식적으로 중앙총부에 기증되었다. 현재 디자인 출원이 완료된 상태이며, 정식 등록까지는 약 10개월에서 1년이 소요될 예정이다. 따라서 일반 공개는 빠르면 2026년 상반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등록이 완료되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무료 공개 서체’로 배포될 예정이다. “전 세계 한국어 학습자들에게 이 폰트를 뿌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언젠가 교재나 간판, 또는 한글 캘리그라피 작품 속에서 ‘수운천도체’라는 글씨를 보고 누군가 ‘이게 뭐지?’라고 궁금해한다면, 그 순간이 바로 포덕의 시작 아닐까요?” 실제로 수운천도체는 해외 교류와 청소년 교육에서 활용 가능한 시각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앙총부는 향후 이 서체를 기반으로 △포덕 교재 제작 △ 천도교 안내 책자 및 홈페이지 서체 통합 △ 교인용 의절 문서 개편 △ 청소년 인문교양 콘텐츠 개발 등 다양한 활용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교단 고유의 시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도 수운천도체는 핵심 자산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강 교구장은 이 글꼴을 ‘디자인 자산’이 아닌 ‘포덕의 도구’로 보고 있다. “수운 대신사의 사상이 말씀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 글자자체의 형태, 그 결, 그 여백 안에도 깃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정신을 시대의 언어로, 오늘의 시선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꼴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죠.” 한편, 동두천교구에서는 올해 5월 소파방정환색동도서관을 개관하고 지역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책장 정비와 도서 기증으로 마련된 이 공간은 주 3일 개방 중이며, ‘천도교는 지역과 함께하는 종교’라는 메시지를 담은 교화의 현장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입교자 수도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 10명, 올해는 상반기에만 7명이 입교했고, 교인 모두가 천도 말씀을 전하는 ‘순번 설교’를 7월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인이 직접 말하고, 공부하고, 나누는 것이 교화의 시작이니까요.” 강 교구장은 말한다. “『용담유사』가 그 시대 민중에게 말을 걸었던 방식 그대로, 우리는 수운천도체를 통해 오늘날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겁니다. 그것이 서체든 영상이든 음악이든, 새로운 세대와 천도교를 잇는 통로가 된다면 그 자체로 포덕이지요. 글씨 하나로도, 새로운 신앙의 문은 열릴 수 있습니다.” [수운천도체 후원 명단] [일반 13명] 강신택, 강영철, 강우영, 남관희, 남상용, 노병인, 박진화, 이면우, 이원용, 장수봉, 조명균, 천경배, 최종현 [교인 75명] 강병로, 강인숙1, 강인숙2, 강정환, 구옥주, 구정애, 권영철, 김대영, 김명자, 김 산, 김성수, 김성희, 김순자, 김영희, 김용성, 김정숙, 김종권1, 김종권2, 김종원, 김창석, 김창호, 김채옥, 김춘성, 김희수, 박인준, 박정성, 박종주, 배영선, 배윤지, 서소연, 서은용, 성강현, 성충모, 송봉구, 신동명, 신동순, 신용성, 신태주, 심국보, 안상호, 안춘보, 우창수, 유영자, 유정수, 윤미옥, 윤석운, 이도엽, 이미숙, 이부자, 이상우, 이순임, 이옥련, 이유연, 이윤정, 이창용, 임순화, 장인갑, 장효재, 전경훈, 정시영, 정윤택, 조남혜, 주선원, 진향선, 최갑성, 최무생, 최미순, 최성만, 최지현, 최창식, 하수희, 홍정인, 황서윤, 황지영, 황추미 [단체 명의] 세종교육문화진흥원, 청송회, 천도교동천교구, 천도교마산교구, 천도교옥구교구 -
“문화예술 속에 동학의 가치를 담아 세계로 향하는 K-동학을 꿈꿉니다”근현대사미술관 담다가 지난 포덕 166(2025)년 6월 14일 개최한 ‘기후의 퍼즐, 변화를 잇다’ 전시 오프닝은 미디어아트 행사를 넘어선, 예술을 통한 시대적 물음과 실천의 장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이이남, 김창겸, 방우송 등 국내 대표 미디어아트 작가들과 독일의 베른트 할브헤르(Bernd Halbherr), 중국의 샤이엔(Xia Yan)이 참여해 기후 위기를 주제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시각화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이남 작가는 금강산의 사계를 디지털 회화로 재해석하며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고, 방우송 작가는 파동의 소리를 시각화하여 보이지 않는 자연의 흐름을 드러냈다. 김창겸 작가의 작품은 숲과 동물, 꽃이 보내는 조화로운 세상을 감각적으로 전달했고, 베른트 할브헤르는 독일의 숲에서 채집한 이미지를 변형시켜 자연의 회복과 인간의 반성을 촉구했다. 샤이엔은 중국 전통 정원 속 자연의 호흡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지구 생태계의 조화를 형상화했다. 이날 오프닝에는 박인준 교령과 이상식 국회의원도 참석해 예술과 종교, 정치를 아우르는 연대의 자리를 만들었다. 축사 후에는 인뮤직 앙상블의 연주와 함께 작가들의 설명이 이어졌고, 7월 30일까지 전시가 계속된다. 정정숙 관장은 “기후 위기는 인간의 탐욕이 낳은 시대적 경고”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현재의 나를 성찰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지구를 그려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근현대사미술관 담다는 2019년 6월 14일 개관한 이후 줄곧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예술로 담아내는 데 주력해왔다. 정정숙 관장은 중앙총부에서 23년간 근무하다 퇴직한 뒤, 미술 애호가인 남편 김성인 이사장과 함께 미술관 운영을 시작했다. 정 관장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동학에서 시작된다”고 단언하며, 미술관의 전시 주제를 동학 창도에서 3.1운동, 민주화 운동, 한반도의 평화로 이어지는 큰 흐름으로 설정했다. 이에 매년 3월에는 3·1운동과 독립운동, 5월에는 5·18 민주화운동, 6월에는 환경, 9월에는 동학혁명 등 주제에 따라 연속성과 메시지를 지닌 전시를 기획한다. 여기에 비어 있는 달에는 초청작가들의 자유 주제 전시가 이어지며, 연중 3월부터 11월까지는 전시가 끊이지 않는다. 정정숙 관장은 문화예술이 포덕의 새로운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1세기는 문화예술의 시대이며, 감정에 닿는 코드가 사람을 움직입니다. 우리가 문화예술을 통해 동학의 감수성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동학 정신을 품은 콘텐츠가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속 가능한 문화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는 2027년을 계기로 ‘K-동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천도교를 알리는 콘텐츠 페스티벌을 구상하고 있다. 그가 그리는 K-동학의 비전은 광범위하다. 국내외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기념전, 동학 사상에 기반한 공모전, 작곡가가 참여한 창작 음악 발표회, 뮤지컬과 드라마, 영화까지 포괄하는 문화예술 융합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나아가 국제 심포지엄을 열어 생명, 환경, 여성, 어린이 문제를 논의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도 제안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천도교문화원이 설립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전시, 공연, 콘텐츠 제작이 이뤄지는 복합문화공간에서 우리의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을 체계적으로 해내야 합니다.” 정정숙 관장은 지난 4월 3일 종의원 총회에서 천도교종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의장으로서 그는 교단의 법령, 예산, 정책을 심의·확정하는 종의원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운영위원회와 예산결산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종교의 공공적 위상 강화를 위해 법률 제도도 검토 중이다. 군대, 교도소 등 천도교가 제도권 내로 진입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관련 부처의 법령을 조사하고 제안하는 활동도 추진하고 있다. “저희는 지금 ‘스승님 발자취를 따라 공부하는 종의원’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공부하고 실천하는 종의원이 되어, 종무원과 협력하며 교단 발전의 기초를 마련해나갈 것입니다.” 전시 기획자이자 교단의 입법기관 수장으로서 그가 그리는 미래는 명확하다. 천도교는 더 이상 종교의 울타리에 갇혀서는 안 되며, 문화예술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현대사미술관 담다에서 시작된 이번 기후 전시와 K-동학 구상은, 천도교의 사상과 정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지만 강한 실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해월신사 200주년, 이제는 시민이 나설 때입니다”“저는 그저 해월신사님께 감동한 한 사람일 뿐입니다.” 경기동학민회 창립을 앞두고 여주·이천 지역의 동학 유적지를 정비하자는 전국 청원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김시형 동덕의 말에는 담담하지만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활동가가 아닌, 늦은 나이에 천도교에 입교하고 동학의 유산을 삶의 지표로 삼아 실천에 나서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포덕 157(2016)년 종학대학원에 진학하며 영등포교구에서 입교한 그는, 서울과 안양에 거주지를 두고 있었지만 마음은 늘 여주에 있었다. 바로 해월신사의 묘소와 전거론 의암성사 법통 승계지, 이천의 향아설위 선언 터 등 역사적 유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직접 가서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해월신사 묘소는 그나마 이항진 전 여주시장이 노력해 경기도 문화재로 승격되었지만, 기념관은 고사하고 주차장 하나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유적지는 거의 방치 수준입니다.” 김시형 동덕은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전국적인 유적지 정비 청원운동을 제안했다. 이번 청원운동은 천도교여주교구와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경기동학민회, 여주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등 7개 단체가 공동 주최하고 있으며, 현재 온라인 서명운동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의 목소리입니다. 지자체 예산을 이끌어내려면 지역의 열망이 필요하고, 그것이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전국적인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명을 받기 시작한 겁니다.” 그는 이 운동의 기획 실무를 맡고 있을 뿐 아니라, 6월 26일 출범한 경기동학민회의 상임공동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경기동학민회는 향후 이 청원운동을 핵심 사업으로 삼고, 지속적으로 관련 의제를 정책화할 계획이다. 김시형 동덕은 여주와 이천에 남은 해월신사 유적을 ‘정신문화의 기둥’이라 표현한다. 여주의 주록리에는 해월신사의 묘소가 있고, 도전리는 해월신사가 의암 손병희 성사에게 동학의 법통을 전수한 곳이다. 이천 수산리는 해월신사가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선언한 장소로, 민중 중심의 문명사적 전환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동학과 3·1운동, 나아가 대한민국의 기원을 상징하는 성지입니다. 이 가치에 걸맞은 기념사업과 정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재 청원서는 유적지 접근로 정비, 안내 표지판 설치, 기념물 조성, 기념관 건립 등 구체적인 계획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내년 지자체 선거에서 각 후보들의 공약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히 김 동덕은 “정치 이전에 시민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캠페인도 직접 고안했다. “당신은 한울님입니다”라는 문구를 담은 뺏지를 만들어 보급하며, 천도교의 핵심 교리인 ‘인내천’, ‘시천주’를 쉽고 감동적으로 전하는 방식에 힘써왔다. 그는 이 활동이 수운대신사와 해월신사, 의암성사를 잇는 동학의 맥을 시민들과 나누는 ‘현대적 해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해월신사 묘역 외에는 대부분의 유적지가 문화재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여주시나 이천시, 경기도, 중앙정부 모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김 동덕은 “일차적으로는 지역 조례 제정이 선행돼야 하고, 나아가 중앙정부의 동학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비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이 운동의 진정한 목표는 동학과 천도교를 다시 삶 속으로 되살리는 것입니다. 천도교가 지닌 생명과 평화, 인내천과 천지부모라는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합니다.” 그의 말은 단호했다. “저는 60세가 넘어서 입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신앙이 진짜 신앙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유산을 재발견하고, 다음 세대에게 감동으로 전해야 합 니다. 지금 이 운동은 그 시작일 뿐입니다.” 김시형 동덕과 같은 평범한 이들의 실천은 동학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제 그 정신을 국가와 지자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답을 모색해야 할 시간이다.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은 천도교의 씨앗을 다시 뿌리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
말구불재 넘어 스승을 향해… ‘세상을 구하러’ 달려간 그 길“해월신사님께서 걸으셨던 길, 그 길을 다시 걷는 것은 순례를 넘어 기도이자 각성입니다.” 경주에서 포항까지 약 100리, 해월신사가 스승 수운대신사를 만나기 위해 걸었던 그 길을 되살리는 ‘해월순례길’ 조성에 앞장선 박택호 동덕은 이 길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영적 귀향’이라 정의한다. 종학대학원 수련생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여름, 경주 용담수도원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순례길 조성의 발단이 된 제안을 처음 들었다. “지금 개별적으로 걷는 길은 2차선 차도라 위험하다. 시골 정취를 살리면서도 안전한 순례길을 만들자”는 누군가의 소망이 그의 마음에 씨앗처럼 심어진 것이다. 포항 신광면에 거주하는 박택호 동덕은 이후 발로 답사하며 옛길을 찾기 시작했다. 지도에는 사라진 고갯길,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은 산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구간, 즉 해월신 사의 자취가 남아 있다는 ‘말구불재’ 고갯길을 찾아내는 데까지 수차례의 시도가 필요했다. “말구불재에 올라서면 멀리 구미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옵니다. 그곳에서 스승을 향해 달려간 해월신사님의 간절함이 가슴을 울렸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보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른 감동이 더 컸습니다.” 그는 순례길 조성을 단순한 관광자원 개발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 말기 국가와 공동체가 해체되는 위기 속에서 동학의 사상을 통해 삶의 해답을 모색했던 해월신사의 고뇌와 결단을 되새기는 과정이라 말한다. 순례길은 5개 구간으로 나뉘어 조성되고 있다. 검곡에서 신광 만석리까지는 해월어록비가 세워진 상징적인 출발지이고, 이어지는 법광사지길과 생명의 길, 양동마을과 옥산서원 일대는 신라·조선 시대 문명의 자취와 함께 유네스코문화유산의 품격을 담고 있다. 마지막 구간은 검단 약수터와 말구불재를 지나 용담정으로 이어지는 영적 완성의 여정이다. 각 구간은 선사시대 고분군, 신라비, 조선 서원 등 역사성과 교육적 가치가 풍부해 향후 문화관광자원으로의 활용 가능성도 크다. “가장 평범한 산과 들, 마을과 강이 해월신사님의 삶을 품고 있습니다. 이곳은 거대한 관광지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 그 자체를 돌아보게 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진짜 세계적인 순례길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순례길 조성은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난관은 검곡 입구의 출입 문제였다. 과거에는 해월신사의 유택으로 바로 진입이 가능했지만, 수몰과 귀촌 등으로 구성된 현재 마북리 주민들과의 입장 차이로 인해 마찰이 생겼다. 다행히 최근에는 주민들과 천도교 포항교구, 동학 관련 시민단체가 협의를 이어가며 편의시설 설치와 출입 방식에 대한 조율이 진행되고 있다. 박택호 동덕은 “올해 말까지는 검곡 계곡 집터가 온전히 개방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 순례길을 ‘세상을 구하러 검곡에서 용담까지 달려간 길’이라 표현한다. 극심한 혼란기였던 구한말, 민중이 절망하고 있던 시기에 스승을 찾아 나선 해월신사의 여정은 종교적 헌신을 넘어 민족사적 전환점이기도 하다. “세상은 해월신사님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검곡에서의 평온한 삶을 내려놓고 길 위에 선 그 결단이 없었다면, 동학의 법맥도, 3·1혁명의 정신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길은 순례자에게 영적인 울림을 준다. 박 동덕은 수십 차례 순례를 했지만, 말구불재 정상에 서면 언제나 전율을 느낀다며 “스승을 향한 해월신사님의 간절함이 그 땅에 배어 있는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별한 영적 체험 대신, 천도교 경전에 담긴 대자연과 공생의 정신을 되새기며 매번 새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해월신사님은 ‘날짐승 삼천도 각각 그 종류가 있고, 털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물건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치리라’고 하셨습니다. 산새 울음과 들꽃 향기, 촘촘한 오솔길 하나까지 하늘처럼 여긴 그 마음을 순례길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길이 종교적 순례에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문화자산으로 자리 잡기를 희망한다. 순례길 인근에는 선사시대 유물, 신라 유적, 조선 서원 등 다양한 역사자원이 분포해 있다. 포항시와 경주시, 시민단체들이 협력한다면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유의미한 관광·교육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아이들은 조상들의 삶을 배우고, 어른들은 옛 정취를 떠올리며, 외국인에게는 한국의 정신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세트장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순례길, 이 길 자체가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끝으로 그는 해월신사의 탄신 200주년이 되는 2027년을 전환점으로 삼아, 이 순례길이 천도교의 현대적 신앙 실천의 장이자 시민사회와 호흡하는 교류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검곡에서 용담까지, 그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 누구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평범한 삶 속에서 하늘을 모시는 길, 바로 그 길이라는 사실을요.” -
제162주년 지일기념식 봉행 예정천도교는 포덕 166년(2025) 8월 14일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각 교구에서 제162주년 지일기념식을 봉행한다고 밝혔다. 지일(地日)은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 선생이 수운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로, 해월신사의 위대한 삶과 사상을 기리고 그 뜻을 계승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번 기념식은 시암 전명운 교화관장이 집례를 맡아 진행하며 ▲개식 ▲청수봉전 ▲심고▲주문3회 병송 ▲경전봉독 해월신사 법설 守心正氣(수심정기) ▲기념사 ▲천덕송 합창 ▲심고 ▲폐식 순으로 진행되며, 이후 문화공연에는 천도교연합합창단 "샘"과 국악공연팀 "지음"의 문화공연이 이어질 예정이다. 천도교중앙총부는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께서 천도교 제1세 교조(敎祖)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최제우)로부터 도통(道統)을 이어받아 제2세 교조가 되신 지 162주년이 되는 기쁜 날을 맞아, 다함께 신사님의 삶과 수행을 통한 가르침을 실천하고 이웃에게 실천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한울세상을 이루어내길 심고합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천도교는 포덕 168(2027)년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올해부터 3개년에 걸쳐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하여 해월신사의 용시용활의 삶과 수행에서 길어 올린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그 정신이 오늘의 사회와 인류에 새롭게 살아 숨 쉬도록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일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