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천도교중앙총부, 독립기념관과 함께 ‘한국 독립운동과 천도교’ 행사 개최천도교중앙총부는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독립기념관과 협력해 ‘한국 독립운동과 천도교’ 행사를 9월 23일부터 10월 19일까지 독립기념관 경내에서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 천도교가 걸어온 길과 그 정신을 기리고, 후대에 그 뜻을 전하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9월 23일(화)에는 ‘한국 독립운동과 천도교 특별기획전’ 개막식과 함께 ‘천도교 순국선열 추모식’이 오전 10시에 진행된다. 추모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들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마련된다. 행사 기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일반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상설전시관 연계 자율탐방 및 체험교육 △전시관 특별해설 △‘한국 독립운동과 천도교’ 특강 △소장자료 수장고 탐방 △SNS 참여 이벤트 등이 있다. 특히 ‘한국 독립운동과 천도교’ 특강에서는 천도교가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앞장섰던 역사를 깊이 있게 다루어 참가자들에게 생생한 역사 교육의 장을 제공할 예정이다.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진리를 바탕으로 민족 자주와 평등의 가치를 실천해왔다. 특히 3·1운동을 비롯해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순간마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정신으로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천도교중앙총부 사회문화관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행사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독립운동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마음 깊이 새기길 바란다”며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
여성회본부, ‘2025 희망의 숲 나무심기 봉사’ 참여여성회본부는 9월 13일(토) 서울 노을공원에서 열린 「2025 희망의 숲 나무심기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이번 행사는 한국사회평화협의회가 주최했으며, 기후위기 극복과 녹색 환경 조성을 위해 마련된 뜻깊은 자리였다. 이날 봉사에는 여성회본부 실무진 2명과 신정 중앙감사가 함께하여 모래와 흙을 옮기고 직접 나무를 심으며 푸른 숲을 가꾸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참가자들은 서로 격려하며 즐겁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환경보호의 소중한 의미를 되새겼다. 특히 이번 봉사는 지구와의 상생과 미래세대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리였다. 여성회본부는 앞으로도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실천 활동에 꾸준히 동참하며,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계획이다. -
여성회본부, 민족종교협의회 주최 역사탐방 워크숍 참가천도교 여성회본부는 민족종교협의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민족종교 독립운동 성지순례 및 워크숍’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9월 11일부터 12일까지 1박 2일 동안 전북 정읍과 원평 일대에서 진행되었으며, 여성회본부 임원들과 청장년 회원들이 함께 참여해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숨결을 느낀 순례 이번 성지순례는 민족종교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기반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되새기기 위해 마련됐다. 순례단은 첫날 정읍 태인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지를 시작으로 원평 장터와 주변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했다. 이어 근대 종교운동의 자취가 남아 있는 유적지를 방문하며, 종교가 단순한 신앙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 해방운동의 정신적 중심지였음을 몸소 확인했다. 참가자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그 후손들이 독립운동으로 이어간 발자취를 직접 확인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원평 장터 일대는 일제강점기 항일 시위와 민족운동의 주요 현장으로, 곳곳에서 선열들의 희생과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역사적 맥락을 되새긴 해설 해설은 이재선 전 청년회장이 맡아, 민족종교와 독립운동이 어떤 관계 속에서 발전해왔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이 전 회장은 “민족종교가 일제강점기에 신앙 공동체로 머무르지 않고, 독립운동의 정신적 버팀목이자 행동의 중심이 되었다”라고 강조하며, 지역별 역사와 사건을 세밀하게 풀어냈다. 참가자들은 해설을 들으며 단순한 답사 이상의 의미를 느끼고, 역사를 생생하게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의 소감과 다짐 순례 참가자들은 “책과 사진으로만 접하던 역사의 현장을 직접 걸으며 선열들의 숨결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라며, “우리가 지켜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오늘의 신앙생활은 과거의 역사와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선열들의 희생 위에 지금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고, 그 정신을 현재의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가겠다”라고 다짐했다. 역사와 신앙을 잇는 연대 여성회본부는 이번 성지순례를 계기로, 민족종교협의회와 더욱 긴밀히 협력하여 역사와 신앙을 잇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청소년과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역사교육 프로그램, 여성 리더십 강화 워크숍, 공동 학술대회 등을 준비하며 민족종교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 민족종교협의회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앞으로도 종단 간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고,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며,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이번 성지순례와 워크숍은 그러한 첫걸음으로, 참가자 모두가 “역사와 신앙을 잇는 다리”가 될 것을 다짐하며 막을 내렸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17일○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을 조직하다.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이는 일제에 맞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무장 조직으로,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결집한 광복군은 중국과 연합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광복군은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며 독립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은 한국 전통문화와 현대적 역동성을 세계에 알리는 자리였다. 160여 개국이 참가한 이번 올림픽은 냉전 시대 동서 진영을 아우른 ‘화합의 올림픽’으로 평가되며, 한국이 세계 무대에서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1991년, 남북한 동시 UN 가입. 1945년 분단 이후 46년 만에 국제 사회에서 각각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두 나라는 같은 날 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국제 협력의 장에 함께 발을 내디뎠다. ○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 세계 금융위기 촉발.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을 선언하였다. 150여 년 역사를 지닌 이 금융회사의 붕괴는 전 세계 금융시장을 흔들며 글로벌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하루 만에 세계 증시 약 6천억 달러(한화 약 660조 원)가 증발하면서 공포가 순식간에 확산한 이 날을 ‘검은 화요일’이라 부른다. ‘리먼 사태’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각국은 금융 규제와 경제 안전망 강화를 추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16일○ 1620년, 메이플라워호, 영국의 플리머스항 출발. 청교도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영국 플리머스항을 떠나 신대륙을 향해 항해에 나섰다. 혹독한 바다를 건너 낯선 땅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종교적 자유를 바탕으로 공동체를 세웠고, 이는 훗날 미국 건국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메이플라워호는 지금도 신대륙 개척 정신과 민주주의 전통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 1810년, 멕시코, ‘돌로레스의 외침’으로 독립전쟁 시작. 오늘, 멕시코의 작은 마을 돌로레스에서 이달고 신부가 민중에게 스페인 식민 지배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외쳤다. ‘돌로레스의 외침(Grito de Dolores)’이라 불린 이 선언은 대규모 봉기로 이어졌고, 멕시코 독립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오늘날 멕시코는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삼아 국가적 정체성을 기리고 있다. ○ 1965년,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사망. 안익태는 미국과 유럽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서양 고전음악을 깊이 익혔고, 1935년 「코리아 환상곡」을 작곡하여 세계 무대에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냈다. 교향악 지휘자로도 활동하며 한국 음악의 위상을 알린 그는, 오늘날까지도 애국심을 일깨우는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 1987년, 오존층 파괴 물질의 규제에 관한 국제 협약인 몬트리올 의정서 채택. 캐나다 몬트리올에 모인 24개국은 프레온가스 등 오존층을 파괴하는 화학물질의 생산과 사용을 단계적으로 감축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협약은 지구 환경 보호를 위한 인류 최초의 글로벌 협력 사례 중 하나로, 이후 기후변화 대응 정책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
최지욱·류영은 동덕, 9월 28일 화촉 밝혀오는 9월 28일(일) 오후 1시 30분, 대구 수성구 용학로에 위치한 륜 웨딩에서 최지욱 동덕과 류영은 동덕이 화촉을 밝힌다. 최지욱 동덕은 최용근(여주교구장)·이용임 동덕의 맏아들로, 대학생단 단장을 역임했다. 또 류영은 동덕은 류남식(대구시교구 교무부장)·현양숙 동덕의 딸로 역시 대학생단 단장을 역임했다. 교단의 미래를 빛낼 두 젊은이가 백년가약을 맺는 이 자리는 두 집안과 교인, 친지들의 축복 속에 진행될 예정이다. 아래는 온라인 청첩장이다. https://salondeletter.com/w/nsnmomps0c -
서울교구 어린이들, 봉황각에서 청소년 시일식 및 환경정화 활동 펼쳐서울교구 어린이들이 봉황각을 찾아 내실 마당과 담장을 깨끗하게 청소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날 행사는 봉황각에서 열린 어린이·청소년 시일식으로 시작되었다. 시일식 후에는 의창수도원에서 정성껏 준비한 김밥, 떡볶이, 과일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함께 나누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청소 활동에서는 돌담 기와 위에 자라 있던 이끼와 잡초를 제거하고, 텃밭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모두 뽑았다. 작업 도중 모기가 많았고, 공벌레와 지렁이, 지네 등 다양한 벌레도 등장했지만, 아이들은 꿋꿋이 활동을 이어갔다. 아이들은 힘든 가운데서도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하며,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봉황각을 찾아 텃밭 가꾸기, 잡초 뽑기, 청소 등 환경정화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이번 활동은 어린이들이 스스로 봉황각을 돌보고 가꾸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 의식과 봉사의 기쁨을 느끼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
문학의 향기, 전주와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 글은 포덕 166(2025)년 9월 17일, 전주문인협회 초청(완산도서관) 특강 원고이다. 1. 종교사적 관점으로 본 역사관 우리는 흔히 서양의 역사는 기독교(가톨릭, 개신교)의 역사라고 말한다.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의 상징적인 역사는 무엇인가? 보통 동양은 불교 문명권이라고 말한다. 물론 유교[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공자가 체계화한 종교적·윤리적·정치적 사상 체계이다. 유교는 인간관계 속에서의 도덕적 실천, 사회 질서의 유지, 정치적 통치 이념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불교, 도교와 함께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이념 체계인 삼교(三敎 유교, 불교, 선교) 중 하나로 분류된다.], 힌두교[(힌두교(हिन्दू ध, Hinduism)는 인도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로, 인도, 네팔, 발리 등지에서 주요 종교이다. 2020년 기준으로 11.6억명(세계 인구의 15%) 이상이 믿으며, 신자 수는 기독교, 이슬람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이슬람교[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 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기독교 등의 셈족계 제종교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크교(시크교는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창시된 종교이다.), 자이나교[(자이나교(Jainism)는 인도지역에서 발원한 인도 계통의 종교로 명칭의 어원인 '지나'는 승리자라는 의미이며 '자이나'는 승리자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등 각 나라별로 민속종교까지 그 영향력은 과히 역사라 할 정도로 막대하다. 17세기 초 서양학문으로 이해되었던 서학(西學)은 18세기 후반 신앙으로 받아 들려지며 모진 탄압에서도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유교 즉 성리학이 국교라 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에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종교사상이 창명되었고, 훗날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음력) 경주 용담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창명한 새로운 도(道)요, 종교철학사상이다. 동학의 명칭이 확정되기 전 처음에는 무극대도 (無極大道)라 칭하였고, 그 다음에는 천도(天道)로 칭하다가 결국 동학(東學)이라 반포하였다. 그런데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동학 명칭을 세상에 알릴 때 전라도 남원땅 은적암에서 동학론, 즉 논학문을 지어 반포함으로 훗날 전라도에서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사상적 계기가 된다. 당시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남원을 중심으로 전주 등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동학을 포덕하게 된다. 2. 동학이라는 명칭의 유래 동학의 동(東)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동의보감(東醫寶鑑)(조선 시대, 1596년에 임금의 명을 받아 1610년에 허준이 완성한 의학 서적),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東醫寶鑑)조선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동서와 남북의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춘 병풍식의 첩 형식을 채택하여 1861년에 간행한 지도집. 지도첩.]’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조선(朝鮮)의 국명(國名)에서도 동(東)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어원이 ‘동방’과 ‘광명’이라는 뜻으로, ‘동쪽의 해 뜨는 곳, 또는 아침의 나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곳,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학은 ‘동방의 학문’이란 뜻으로,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어둠을 걷어내고 다시 밝음을 열어가는 새로운 세상의 학문이자 사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앞서 설명했듯이 무극대도, 천도, 동학이라는 여러 명칭을 사용하였다. 훗날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 뒤를 이어 동학 3세 교조가 된 의암 손병희 성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세상에 크게 선포하였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저술한 〈교훈가〉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논학문(동학론)〉에 “내가 또한 동(東)에서 나서 동(東)에서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나 학(學)인 즉 동학(東學)이라.”라고,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일반적으로는 동학의 명칭에서 서학(西學)에 반대하고 대응하는 차원에서 생겨났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짧은 생각에 머무른다. 어느 사상이나 종교가 탄생할 때 무엇을 반대하고 대응하는 차원에서 나왔다고 정의하면 그 사상에 대한 정당성은 물론 바른 이해를 하는데 너무 협소해진다. 물론 당시 서학과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은 분명 존재했다. 동학이 창도되는 전후에 서학만이 문제가 되었던 게 아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외부 세력 못지않게 조선의 내부문제도 심각하였다. 인간을 구별 짓는 신분차별과 탐관오리의 착취, 외세에 대응하지 못하는 조선조정,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깨어나는 민중, 나라의 주인이라 자각하는 백성들, 인권과 자주,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는 시대적 상황 등 수많은 원인들이 있었다. 3.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사상에 근거하여 일어난 우리 근대사의 반봉건·반외세 자주독립운동이다.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관계는 ‘근원 없는 물이 없고, 뿌리 없는 나무 없다’로 비유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과 전개에서 동학사상이 빠질 수 없다는 의미다.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시천주(侍天主) 즉,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즉천(人卽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또한 수운 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의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는 인내천(人乃天)·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펼쳤다. 4. 동학 집강소 설치와 민주자치시대 동학농민혁명은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무장기포와 황토현 승전, 그리고 장성 황룡에서 전라감영군과 경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또한 장성, 정읍, 태인, 원평, 독배재, 삼천동, 효자동, 용머리고개를 거쳐 1894년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조선 건국자의 본향이자 호남의 수부(首府) 수부(首府)(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도시, 한 도의 감영이 있던 곳)였던 전주성을 무혈입성(無血入城)으로 함락시켰다. 전주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의 수부였기 때문에 전주지명을 확장하여 호남, 즉 전라도까지 포함한다고 봐야 한다. 조선 역사에는 호남의 가치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말이 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록에 나오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만약에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물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전라도는 오늘날의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를 포함하였다. 그 행정구역의 중심지가 전주였다. 당시 전주성 안에는 전라감사가 근무하는 감영 즉 선화당이 있어 명실상부하게 전라도의 행정중심지이자 지방정치를 총괄하였다. 그래서 호남제일성, 호남제일문 등 역사적 건물에도 전라도 상징의 명칭이 따라 붙었다. 바로 그 전라도 행정의 중심이자 조선 왕조, 즉 이씨 조선의 본향인 전주성을 동학혁명군이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를 호령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특히 조선 정부와 동학혁명군이 전주화약을 통해 집강소에 의한 민주자치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폐정개혁안 12개조>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짓게 한다.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 수부인 전주성 점령은 여느 지방도시를 점령한 사건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전라도 각 군현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더욱이 전주성 선화당에 집강소 총본부격의 자치, 통치기구가 있었다. 이는 동학혁명군의 일방적 자치행위가 아니라, 전봉준 총대장, 손화중 총관령 등 혁명군 대표와 조선왕조의 위임을 받은 홍계훈 초토사와 김학진 전라감사 간의 협약에 의해 폐정개혁을 수행한 국가적인 차원이었다. 5. 전주동학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람 전주동학농민혁명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서영도 장군과 이복용 장수 이야기다. 서영도 장군은 완산 접주 출신으로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전주성 밖 완산 집강소 책임자로서 폐정개혁을 혁명적으로 단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혁명 좌절 후 1895년 3월까지 최후 항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남문 밖 초록바위에서 ‘동학거괴 서영도’ 이름으로 공개 총살형을 당했다. 이는 그의 역할과 활동이 대단히 컸음을 보여준다. 이복용 장수는 소년접주 출신으로 완산전투 시기에 선두에서 큰 활약을 하다가 전사하였다. 이복용은 애기접주의 별칭으로, 혁명군의 사기진작은 물론 관군들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였다. 애기접주 즉 소년접주들의 활약은 전국적으로 용맹을 떨쳤는데, 대표적으로 해주접주 김구(김창수), 장흥접주 최동린, 전주접주 이복용 등이 상징적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전주성 점령 과정에서 여성 동학군들이 큰 몫을 해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여성 동학도들이 성안에 몰래 들어가 대포 총구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등 목숨을 건 일화들이 많다. 여성접주의 상징적 인물은 장흥 지역에서 활약한 이소사 여장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6. 2차 동학농민혁명과 항일무장투쟁 일본군의 침략에 맞선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과 대규모로 항쟁한 우금티 전투 패배 후 각 지역으로 흩어지거나 보은, 장흥, 대둔산 최후항쟁처럼 집단적으로 저항한 여러 이야기가 있다. 전주지역도 마찬가지로 최후항쟁 후 쫓기고 죽임을 당한 참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주 초록바위 천변에서부터 다가산 천변에 이르는 지역에서 체포당한 동학의병들은 숱한 죽임을 당했다. 일본 국왕 메이지의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하라"는 특명을 받은 일본군과 그 지휘를 받았던 관군은 초멸작전을 펼쳐 총살형은 물론이고 참수형, 산 채로 불태우는 화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였다. 접주는 물론 무명 동학혁명군 수백, 수천 명이 처형을 당해 전주천의 물이 1개월 이상 핏물로 흘렀다는 말들이 전해오고 있다. 바로 이런 역사의 현장에 기념비는 물론 표지판을 세워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1차 기포, 반외세 2차 기포, 보국안민· 광제창생·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대의를 위해 기포하여 엄청난 피해로 풍비박산이 난 듯 했으나, 천도교로 거듭난 동학은 기미년 3‧1혁명을 통해 제2의 동학혁명으로 전개되었으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 근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세계 혁명사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역사였다. 그 혁명 정신은 독립운동은 물론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5‧18민중항쟁, 6‧10민주항쟁, 최근에는 촛불혁명, 빛의 혁명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분단된 남북통일을 달성해야만 동학농민혁명은 성공한 혁명이 될 것이고 희생된 동학선열들의 후손된 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특히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동학농민혁명의 진정한 명예회복과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될 것이다. 7. 동학농민혁명과 문학의 향기 동학농민혁명을 시나 소설로 펴낸 대표작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동학혁명 1백주년(1994년) 즈음 우리들은 동학농민혁명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가를 말할 때 남한의 송기숙 교수(역사소설 『녹두장군』), 북한의 박태원 선생(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꼽았다. 송기숙 교수는 ‘녹두장군’ 개정판 후기를 통해 '민중이 자발적 합의에 이르면, 그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송기숙 교수께서 살아생전 나와 몇 번 만나 대하소설 『녹두장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작가가 글을 쓸 때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녹두장군』도 원래 10권으로 계획했지만 12권으로 늘어나면서 글이 중간 중간에 늘어졌다”고 고백하였다. 박태원 선생은 『갑오농민전쟁』 집필 과정에서 시력과 전신마비 등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부인 권영희의 도움으로 완성했다고 알려졌다. 박태원은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까지 방대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1894년 당시의 법제와 풍속,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하고 고증하였다 한다. 동학과 관련한 수많은 문인들을 소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분 더 말씀드리자면 신동엽 시인의 대서사시 「금강」을 뺄 수가 없다. 나는 동학 관련 책 중에 「금강」을 가장 신명나게 읽었다. 읽고 또 읽고 한 열 번은 읽은 것으로 기억난다. 「금강」은 실존인물인 전봉준과 가공인물인 신하늬로 대표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동학혁명을 형상화하였다. 「금강」은 동학혁명이 상징하는 민족적 수난과 고통의 과정이 이 땅 역사의 비극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해주며, 새삼 이 땅의 주인이 한민족 스스로이며 민중 그 자체임을 소중하게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큰 의미를 남겼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우리 고장 이곳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 두 분을 소개한다. 하나는 동아일보 신춘당선작 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이다. 안도현 시인은 한 때 나와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그리 길지 않은 시이다. 시 전문을 그대로 소개하고 각자 느낌을 알아서 평가해보기 바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문학동네, 1997년 1쇄, 2002년 4쇄) 중에서. 작가들을 소개할 때 빼먹으면 좀 서운해할 사람이 있다. 바로 이광재 소설가이다. 이광재 작가가 동학 관련 책자 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 등 여러 권을 출간했지만 최명희 선생기념 혼불문학상 수상작 『나라 없는 나라』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나라를 잃어가는 조선 말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동학농민군, 선비들, 정치가들,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치열하고 진지한 삶을 담아냈다는 평가들이다. 이광재 작가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민주주의의 화신이라 불렸던 김근태 선생의 조직에 들어가 함께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동학 관련 유적지도 함께 도보로 탐방했던 기억들이 솔솔 난다. 이 작가는 최근에 장편소설 『청년 녹두』를 펴냈다. 끝으로 여기에 계시는 시인, 소설가 중에 한강 작가의 뒤를 이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분이 꼭 나왔으면 하는 말로 본 강연을 마칠까 한다. 글 송암 이윤영 전주동학혁명전시관 관장. 저서로는 수운 최제우 선생 일대기 『만고풍상 겪은 손』, 동학농민혁명장편소설 『혁명』, 전주역사문화의 자부심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출간 예정. 오마이뉴스 74화 연재작, 동학문화대상 수상작) 등이 있다. -
울산 여시바윗골 ... 을묘천서 받고 이적을 체험하다(2)대신사는 성동에서 조금 떨어진 유곡동 여시바윗골에 작은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 여시바윗골은 그 지형이 마치 소쿠리같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가끔 사람들이 대신사를 찾아와 도담(道談)을 나누고는 했다. 이곳 여시바윗골에서 대신사는 어느 이인(異人)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해득하지 못한다는 책을 받고, 이 책의 내용대로 기천(祈天), 곧 하늘에 기도했다. 이를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한다. 을묘천서는 실제로 어떤 책을 받았다기보다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수운 대신사께서 체험하게 되는 종교체험의 한 현상이다. 즉 대신사는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이인을 만나 천서를 받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신비 체험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이란, 지금까지 자신의 밖에서 도(道)를 구하는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안에서 도를 구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을 말한다. 세상으로부터 도를 얻고자 했던 방식을 버리고 기도를 통해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절대적 존재로부터 도를 얻고자 하는 방식을 택한것이라고 하겠다. 윤석산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을묘천서 이전까지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서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면, 이후부터는 유신론(有神論)의 입장에서 신으로부터 도(道)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운 대신사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상이라는 일상적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기존의 가르침을 만나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았지만, 을묘천서 이후 기천(祈天)을 통하여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일상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는 전혀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도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구도의 방법이나 대상 등 그 양상이 을묘천서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을묘천서 이후의 변화는 수운 대신사로 하여금, 용담에서 경신년 4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하였고,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세상에 내놓게 한 그 징검다리와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을묘천서는 바로 이와 같은 면에서 수운 대신사, 그리고 동학이라는 가르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울산광역시는 이곳 일대를 1997년 역사문화보존지구로 고시하고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2호로 지정하였다. 1997년 10월 9일 ‘전 수운 최제우 유허지’로 지정된 후, 1998년 최제우의 종현손녀인 천도교인 최말란의 기부채납으로 수운 최제우 유허비가 건립되었으며, 1999년에는 비각이 세워지고 2004년 초가·초당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울산광역시는 2005년 유허지 명칭에서 ‘전(伝)’자를 삭제해 달라는 교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심의를 거쳐 ‘수운 최제우 유허지(水雲崔濟愚遺墟地)’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2015년 국토부의 개발제한구역 내 생활공원 사업 공모에 울산광역시 중구청이 선정되어 최제우 유허지 생활공원이 조성되었다. 또한 최근에 이르러 대신사의 소유였다는 육두락(六斗落)의 논이 있던 자리에 동학관이 건립되었다. 동학관은 총 23억 원의 예산을 들였으며, 건축 면적은 859.46㎡(약 260평)이다. 건물 형태는 단층 콘크리트 한옥이다. 울산광역시와 울산 중구가 함께 추진한 ‘동학관’ 건립 사업은 울산이 동학의 모태가 된 곳임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2020년 3월에 건립 사업 첫 삽을 떠서, 2022년 3월 31일 개관식을 진행했다. 동학관 자료실은 수운 최제우 선생과 을묘천서, 울산과 동학, 민족종교 동학의 역사 등에 대한 전시물로 꾸며지고, 관리할 울산 중구는 향후 유허지 전체를 관리하면서 ‘최제우’, ‘동학’, ‘울산독립운동’ 등을 주제로 한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하게 된다. 여시바윗골 유허지는 2011년을 기준으로 학생, 관광객 등 단체 관람객은 물론 천도교인과 국내외 동학 천도교 연구자, 문화계 인사 등 연간 5천여 명 이상이 방문하는 곳이다. 앞으로도 동학 천도교는 물론 우리 정신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위상을 떨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다음 회 예고 : '<내원암과 적멸굴> : 대신사께서 득도 전에 수련을 하신 곳'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영등포교구, 재개발 속 교당 수호 위한 탄원서 운동 전개영등포교구 교당이 위치한 지역이 재개발 대상에 포함되면서, 오는 10월 재개발 방식이 확정될 예정이다. 이에 영등포교구 동암 조광걸 교구장은 전국 교구장들에게 영등포교구 교당의 존치를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본 교당은 서울 영등포역 인근에 위치한 교단의 중요한 거점 교당으로, 교화 활동의 중심지이자 교인들의 신앙 결집 공간으로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동암 조광걸 교구장은 공공 재개발이든 민간 재개발이든 교당 존치를 기본으로 대응해 나갈 방침임을 밝혔다. 영등포교구는 포덕 93(1932)년 한 교인 가정집에서 집회를 시작해 전세를 전전하다가, 24평 주택에서 교구 운영을 이어왔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포덕 136년(1996) 6월 18일,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의 교당을 봉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 교당에서 시일식을 봉행해온 지 30년을 넘어섰으며, 교구 개설 이후 73년의 역사를 쌓아왔다. 동암 조광걸 교구장은 “영등포교구 교당은 타 교당과 마찬가지로 특정 지역 교인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교단 전체가 지켜나가야 할 교당”이라며, “지금껏 각지의 교당이 재개발 문제가 발생할 때 각자도생 방식으로 대처하면서 토지 보상, 타지 신축은 물론, 현금 청산되어 신앙 공동체가 중심을 잃는 경우까지 있었다”면서 “이번에 영등포교구에서 전국 교인의 동참을 요청하는 사례는 향후 교단 내에서 유사한 재개발 문제에 공동대처해 나가는 전범(典範)이 되어 교단을 지켜나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거주 지역과 관계없이 천도교 재산을 수호하는 일에 뜻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동암 조광걸 교구장은 전국 교구와 교인들에게 탄원서 서명을 요청하며, 10월 중 탄원서를 취합해 관계 기관에 제출할 계획임을 밝혔다. 영등포교구는 전국 교인의 연대와 참여가 교당 존치의 힘이 될 것이라며,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동참 의사가 있는 교인이나 뜻을 같이하는 일반인은 아래의 번호로 연락하면 된다. 010-9613-0926 (조광걸 교구장), 010-9248-0859(배동호 교무부장), 02-843-0982(영등포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