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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암 박인호 상사 승통 118주년 도일기념식 봉행“의암성사와 춘암상사의 관계는 ‘축성(築城)’과 ‘수성(守城)’의 관계입니다. (동학)혁명 이후 흩어진 교단을 수습해 다시 세운 분이 의암성사라면, 그 교단을 성장시키고 굳건히 지켜낸 분은 바로 춘암상사라 하겠습니다.” 박인준 교령은 포덕 167년 1월 18일, 제118주년 도일기념일을 맞아 기념사를 발표하고, 춘암상사님이 평생 여일하게 그러하셨듯이 “하루빨리 천심을 회복하고 통일된 세상에서 평화롭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심고”한다고 밝혔다.(<기념사> 전문 하단 참조) 춘암 박인호 상사 승통일인 제118주년 도일기념일을 맞아 포덕 167년 1월 18일 오전 11시 서울과 전국 일원에서 기념식이 봉행됐다. 중앙총부 주관으로 중앙총부본관(다목적홀, 수운회관 지하1층)에서 서울 인근 교인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된 도일기념식은 교회의식에 따라 개회하여(청수봉전 이정녀 여성회본부 부회장), 경전봉독(신앙통일과규모일치, 김명덕 여성회본부 회장), 천덕송합창(기념송1-3), 기념사, 천덕송합창(도일기념가1-2) 순으로 진행되었다. 식후에는 ‘샘'연합합창단의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천도교 4세 대도주 춘암 박인호 상사님은 포덕전 5년(1885) 충남 덕산군 양촌면 막동에서 탄신하여 포덕 24년(1883)에 목천으로 해월신사를 찾아뵙고 입도한 이후 해월신사의 명으로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암에서 49일 기도를 한 이후10년 독공을 매진하셨다. 이후 광화문복합상소, 보은취회에 적극 참여하셨을 뿐 아니라 동학혁명 때는 덕의대접주로 수만의 동학군을 지휘하셨다. 의암성사님이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승계한 이후에는 “춘암은 내(의암) 사람”이라는 말씀을 들을 만큼 보필에 충실하였고, 포덕 49년(1908) 1월 18일 대도주직을 승통하고, 교단을 이끄셨다. 의암성사를 모시면서 각급 학교의 지원, 운영을 주도하였고, 교단 제도를 정비하여 안착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포덕 60년(1919)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48인으로 옥고를 치르시고, 이후 교단 분열이 되풀이되는 상황에서도 굳건히 원칙을 지켜내시다가, 포덕 81년(1940)년 4월 3일 환원하셨다. 박인준 교령이 기념사에서 밝힌 대로 춘암상사는 스승님(해월, 의암) 재세시나 홀로 교단을 이끌 때나 스승님들의 가르침과 뜻을 올곧게 지켜,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기를 견디며 건너올 수 있게 하였다. 이날 도일기념식은 시일인 덕분으로 예년에 비해 많은 교인들이 참석하여 모처럼 풍성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특히 식후공연은 ‘샘'연합합창단 외에 청년회(회장 이상미)와 대학생단(단장 조화정)의 회원 및 단원 8명이 함께하여 교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공연곡은 ‘개벽행진곡’ ‘한울세상’ ‘주문의 노래’이었으며, 교인들의 앵콜 요청에 따라 ‘샘’을 선곡하여 모든 교인과 함께 부르며 대미를 장식하였다. 다음은 이날 박인준 교령이 발표한 기념사의 전문이다. 기 념 사 공경하는 국내외 동덕 여러분,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가 되신 지 118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도일기념일입니다. 춘암상사의 아명은 용호(龍湖), 자는 도일(道一)이십니다. 포덕 전 5년(1855) 2월 1일 충남 예산군(당시 덕산군) 가야산 남쪽 막동리에서 부친 박명구와 모친 온양 방씨 사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상사께서는 10세의 늦은 나이에 한학에 입문하였으나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접고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심신이 건강하고 근면했던 상사께서는 농사일은 물론 기골이 장대하여 씨름판에서도 이름을 날렸고, 걸음이 빨라 축지법을 쓴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천성이 순박하고 과묵하셨던 상사께서는 틈나는 대로 글을 읽고 사색하며 청년기를 보내셨습니다. 당시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천도교는 인간 존엄과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민중의 정신을 일깨우고, 암울했던 시대 상황에서 새 시대로 나아갈 희망의 길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상사께서는 천도교를 믿으면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에서 질병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9세 되던 포덕 24년(1883) 3월, 목천에 계시는 해월신사를 찾아가 입도하셨습니다. 이후 포덕 25년(1884), 춘암상사는 해월신사,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암에서 49일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때 해월신사께서 <강시(降詩)>와 <강서(降書)>를 받으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상사께서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음을 깊이 자각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상사께서는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어육주초를 끊는 등 지극한 정성으로 수도에 매진하셨습니다. 낫자루를 베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 주문을 외우기를 10년이나 하셨고, 논밭을 갈 때도 갓과 망건을 풀지 않았습니다. 또한 매달 해월신사를 찾아 가르침을 받으면서 포덕에 정성을 다하여 내포 지방에 입도한 도인이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스승에 대한 예가 중요하다고는 하나 농사짓는 사람의 옷차림이 어찌 그러한가?”라고 물었으나, 상사께서는 “한울님은 정성이 지극한 사람에게 가까우니, 몸의 불편함은 한울님 은혜에 비하면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시며 흔들림 없이 정진하셨습니다. 구한말, 정부의 무능과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자 천도교는 민중 해방과 반식민지화를 위한 구국 운동으로 타올랐습니다. 춘암상사는 포덕 34년(1893)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시고, 보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운동에서는 ‘덕의대접주’에 임명되어 내포 지역 동학도들을 이끌었습니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상사께서는 「천불변 도역불변(天不變道亦不變)」과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대장기에 <덕의대접주 박인호>라 쓰고 지휘하니 수십만 동학군의 주문소리가 천지에 진동했습니다. 포덕 39년(1898) 1월, 상사께서 의암성사와 함께 해월신사께 신년 문후를 드렸을 때입니다. 신사께서 흰 꿩 한 마리로 의암성사와 겸상을 차려 주시며 ‘서로 일치(一致)하라’는 묵교(黙敎)를 내리셨습니다. 이를 깨달은 상사께서는 비록 연장자였지만, 즉시 의관을 정제하고 의암성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배례를 올렸으며, 이후 의암성사 앞에서는 평소의 편한 말투를 높임말로 바꾸고 절대 담배도 피우지 않는 등 깍듯한 예우를 갖추셨습니다. 포덕 40년(1899) 3월 10일, 의암성사께서는 상사에게 ‘춘암(春菴)’이라는 도호를 내리십니다. 이는 의암성사가 내린 첫 번째 도호이자 교단 전체로는 네 번째 도호였습니다. 포덕 41년(1900) 5월 1일, 송파에 있던 해월신사의 묘소의 유골을 수습하여 칠흑같이 어둡고 비 내리는 밤을 틈타 운구하여 여주 원적산 천덕봉 기슭으로 이장하였습니다. 포덕 60년(1919) 3·1운동 당시, 춘암상사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분으로서 서대문 감옥에서 1년 9개월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모든 재산권 행사가 금지되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출옥 후 포덕 61년(1920)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준공하여 3·1운동 자금 조달의 구심점이자 민족정기의 상징으로 삼으셨습니다. 나아가 6·10 만세운동과 신간회(新幹會) 등 항일 운동과 청년·출판·농민·여성 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끄셨습니다. 포덕 78년(1937) 12월, 상사께서는 비몽사몽간에 왜병들이 울며 물러가는 환상을 보시고 “조선이 독립할 징조”라 하시며, 교인들에게 밀명으로 ‘무인멸왜기도운동’을 실시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이 운동이 발각되어 많은 교인이 검거되고 상사께서도 병상에서 고초를 겪으셨으나, 천도교 신앙을 통한 나라 사랑의 의지는 길이 남았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 81년(1940) 4월 3일, 분열되었던 교회가 합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향년 86세로 환원하셨습니다. 4월 7일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 묘지에 안장되셨으며, 이때 최린이 친필로 쓴 지석(誌石)이 함께 묻혔습니다. 이후 현재 묘소가 있는 포천의 무봉산으로 이장하였습니다. 공경하는 동덕 여러분! 의암성사와 춘암상사의 관계는 ‘축성(築城)’과 ‘수성(守城)’의 관계입니다. 혁명 이후 흩어진 교단을 수습해 다시 세운 분이 의암성사라면, 그 교단을 성장시키고 굳건히 지켜낸 분은 바로 춘암상사라 하겠습니다. 상사께서는 교단 분열의 아픔 속에서도 “남을 비방할 시간이 있으면 주문을 더 생각하라”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 하시며 화합과 기도, 그리고 참신앙을 강조하셨습니다. 나라가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우리 천도교에 달려 있으니 참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이 시대 우리가 실천할 일입니다. 실천궁행으로 대도를 수호하신 상사님의 뜻을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천도교 중흥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입니다. 스승님들의 가르침 아래 하나로 뭉쳐 참신앙의 길로 나아갈 때, 분단 조국을 하나로 통일하고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목적을 진실로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루빨리 천심을 회복하여 통일된 세상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심고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 167(2026)년 1월 18일 천도교 교령 박 인 준 심고 -
영월 직동 - 대인접물을 설법하다영양 윗대치에서 이필제와의 연계로 해월 신사는 다시 관에 쫓기는 몸이 되어 이곳저곳으로 숨어다니다가, 태백산으로 들어가 14일을 추위와 굶주림으로 보내고 영월 직동(稷洞)의 박용걸(朴龍傑)의 집으로 내려와서 한겨울을 보낸다. 이와 같은 사실을 『도원기서』에서는 다음 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時則九月 序屬三秋 須以行之 登高下底越谷上壁 丹楓蕭瑟 黃葉飄飛 一以觀有水之處 一以擇容膝之巖 掃葉以爲席 結草以爲幕 宵以炮火 晝以伐木 歌唱採薇 飢不適首陽之跡 節比洗耳 羞不堪川之飮 月嫌淸宵 故遮思家之懷 雲蔽白日 空作憶弟之淚 飢眼昏迷 靑山共靜 短腔虛 碧泉盡渴 際虎嘯而起坐 如有勸於敬念 時猿啼而佇立 似有悲於懷人 有何節兮 絶飮不食飮者十日 鹽一掬而盡矣 醬數匙而空也 風蕭蕭而吹衣 露赤身而將何 聲在樹而氣肅 令人懷之 高秋憑念 无到携手上壁 而顧顧相謂曰 兩人之中 誰先誰後 抱落以死於意可也 洙對曰 兄言誰可 死地必 有生隅 吾之兩人 若爲一死 吾之日後之英名 置之十餘年 敬天爲師之道 孰能雪寃而顯名於世乎 姑爲保命不亦宜乎 將以爲行商之儀 飾裝以試之 忍不見其形也 爲其十三日 在民去于嶺南 兩人來于朴龍傑家 是夜三更 朴老見我謂曰 衣之薄着之餘 其間寒苦如何 答曰 如此如此 其老 曰 當此深冬 何往誰救 過冬於吾家如何 答曰 言雖好矣 若爲過冬則 此洞知我者多也 最甚難矣 其老曰掇其內房而在則 誰可知之 對曰 吾非親戚 掇在內房未安 若以老兄之言 則結義如何 其老樂爲結義 明爲始在於內房 而過冬 順興主翁之兄 來爲入道 當臘月主翁 擔一人之服 厥兄擔 一人之服也 明年壬申正月初五日 以悔過之意 作祝文告于天主 初六日主人及洙 自有感古之心 相謂曰 彼雖負我我何負乎 卽往師母氏之家 師母見曰 其間在何處而圖命乎 疇昔之括視尙今記念 兒之不敏 君不過念如何 對曰 過念則何以來之乎 師母氏時爲臥病 米穀艱乏 故送人於順興 則負米送之矣 不違期日來之也 明日還于在處 而又去順興留之林生來之 故負米以送之 不過幾日 林生再來如有愁色 故主人問曰 去不過幾日 有何故而急來 林生默然良久 答曰 世貞方今捉囚於襄陽 故來也 主人及洙聞其言 驚駭不已 夜不能成寐 明日卽往師家 則師母之氣像 未安措 措慓慓 世淸亦爲惶惶 一室憧憧 全聖文適在其時也 師母曰 若在此則禍將及矣 避厄之道 只在於君等 將何以爲之也 洙曰 爲先家眷移于朴龍傑之家 爲可也 때는 9월이요, 절기는 가을이라. 모름지기 길을 떠나, 높은 곳은 오르고, 또 아래로 내려가 계곡을 건너고, 절벽을 오르니, 단풍이 소슬(蕭瑟)하고 누런 가을 잎이 바람에 나부낀다. 한편으로는 물이 있는 곳을 찾고, 한편으로는 무릎이나마 간신히 펼 수 있는(쉴 수 있는) 바위를 찾아 이파리를 쓸어내고 자리를 만들고, 풀을 엮어 초막(草幕)을 지었다. 밤에는 불을 놓고 낮에는 나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니, 그 굶주림이 수양(首陽)의 자취에 못지않고, 절개는 세이처사(洗耳處士)에 비길 수 있고, 부끄럽기는 영천(潁川)을 마시는 것에 감당할 수가 없다. 달은 맑은 밤을 시기하여 집 생각하는 회포를 막고, 구름은 빛나는 태양을 가려 공연히 동생들 생각을 하게 하여 눈물을 흘린다. 굶주려 눈이 혼미해지고, 청산(靑山)이 한가지로 고요하고, 짧은 창자는 비었고(먹은 것이 없고), 푸른 샘물도 다 말라 버렸다. 범 우는 소리 들릴 즈음에 일어나 앉으니 공경하는 생각을 권함이 있는 것과 같고, 원숭이 우는 소리 들릴 때에 멈추어 일어나니, 사람을 그리워하는 슬픔이 있는 것과 같다. 무슨 절개가 있는가? 마시지 않고 먹지도 못한 지가 열흘이요, 소금 한 움큼도 다 떨어지고 장(醬) 몇 술도 비어 버렸다. 바람은 소슬히 불어 옷깃을 흔들고, 아무것도 입지 못해 헐벗은 몸으로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말소리는 나무에 걸려 있고 기운은 숙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천고(天高)의 가을에, 생각을 기대어 이를 곳이 없으니, 손을 들어 절벽에 올라 돌아보고 돌아보며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하고, 누가 뒤에 할꼬. 끌어안고 떨어져 죽는 것이 좋겠구나.” 하니, 강수 대답해 말하기를, “형의 말씀이 비록 옳으나, 죽을 곳에서도 반드시 사는 모퉁이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만약 한가지로 죽어 버린다면, 우리의 일후(日後)의 이름을, 십 년에 두며 하늘을 공경하고 스승을 위하는 도리를 누가 알아 능히 설원(雪冤)을 하며,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리오. 아직 목숨을 보조함이 역시 마땅치 않겠습니까?” 장차 행상(行商)을 할 생각으로 행장을 꾸리고 이를 시험해 보니, 그 형상을 차마 볼 수가 없다. 13일이 되어 재민은 영남(嶺南)으로 가고, 두 사람이 박용걸(朴龍傑)의 집으로 왔다. 이날 밤 삼경(三更)에 박 노인이 우리를 보고 말하기를, “옷을 이렇듯 얇게 입었으니 그간의 추위와 고생이 어떠했겠습니까?” 대답하기를, “이러이러했습니다.” 하니, 그 노인이 말하기를, “이렇듯 깊은 겨울을 맞아 어디로 간들 누가 구해 주겠습니까? 우리 집에서 겨울을 보냄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말씀인즉 매우 고마우나, 만약 겨울을 넘기게 되면, 이 동네에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 매우 난처할 겁니다.” 그 노인이 말하기를, “안의 방을 치우고 안에만 계시면 누가 알겠습니까?” 대답하기를, “우리는 친척도 아닌데 방을 치우고 우리가 차지하고 있으면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만약 노형(老兄)의 말과 같이한다면, 결의(結義)를 맺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 노인이 즐거이 결의를 하였다. 다음날부터 안방에서 지내며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순흥(順興)에 주인 노인의 형 되는 사람이 와서 입도(入道)를 하였다. 12월이 되어 노인은 한 사람의 옷을 맡고, 그 형 되는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옷을 맡았다. 다음 해인 임신년(壬申年, 1872년) 정월(正月) 5일에 허물을 뉘우치는 뜻으로 축문(祝文)을 지어 한울님께 고(告)했다. 6월에 주인이 강수와 함께 스스로 옛날이 돌이켜 느껴지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우리를 저버렸으나 우리가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사모님 댁으로 가니, 사모님께서 보고 말하기를, “그동안 어디에들 가 있어 목숨을 도모하였습니까? 지난날에 괄시한 것을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불민(不敏)하였으니 아이들을 과히 허물치 마시오.” 하니, 대답하기를,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면 어찌 이렇듯 왔겠습니까?” 사모님은 그때 병환으로 누워계실 때였다. 쌀이 없는 까닭으로 날을 기약하고 사람을 순흥(順興)에 보내니, 쌀을 (사람에게) 지워서 보내주었다. 기약한 날을 어기지 않고 쌀이 왔다. 다음날 있던 곳으로 돌아가 또 순흥(順興)으로 가니, 이곳에 머물던 임생(林生)이 왔다. 쌀을 보내온 지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아 임생(林生)이 다시 오고, 얼굴에 근심하는 빛이 있는 것 같아 주인이 물어 말하기를, “돌아간 지 불과 며칠 만에 무슨 까닭이 있어 이렇듯 급하게 왔는고?” 하니, 임생(林生)이 한참 묵묵히 있다가 대답해 말하기를, “세정(世貞)이가 방금 양양(襄陽)에서 붙잡혀 갔기 때문에 왔습니다.” 주인과 강수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마지않았다. 밤에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사모님의 기상(氣象) 또한 편안하지를 못하여 초조하게 떨고 있었다. 세청(世淸)이 역시 황황하여 한 집안이 모두 슬픔에 차 있었다. 마침 그때에 전성문(全聖文)이 왔다. 사모님이 말하기를, “만약 이곳에 있으면 화(禍)가 장차 미칠 것이라. 액(厄)을 피하는 도리가 다만 그대들에게 있으니 장차 어찌하겠소?” 강수가 말하기를, “먼저 가족들을 박용걸(朴龍傑)의 집으로 옮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 『도원기서(道源記書)』 한겨울을 난 해월 신사는 먼저 자신의 허물을 비는 참회의 기도식을 한다. 박용걸의 집 뒤를 기도소로 만들어 49일 기도를 하고, 이 기도가 끝나는 날, 한때 이필제의 꼬임에 속아 많은 동학 도인들을 잃고, 또 영양 윗대치의 마을이 풍비박산 난 것을 참회하고 한울님께 비는 참회식을 했던 것이다. 이어서 당시 영월 직동에 모인 동학 도인들을 향해 「대인접물」의 법설을 행한다. 영월 직동에서 행한 「대인접물」의 중요한 부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惡人莫如善待 吾道正則 彼必自正矣 奚暇較其曲直長短哉 謙讓立德之本也 仁有大人之仁小人之仁 正己和人大人之仁心也 以詐交者亂道者 悖道者逆理者也 待人接物 必隱惡揚善爲主 彼以暴惡對我則 我以仁恕待之 彼以狡詐飾辭則 我以正直順受之則 自然歸化矣 此言雖易 體用 至難矣 到此來頭 可見道力矣 或道力未充 率急遽難忍耐 率多相沖 當此時 用心用力順我處我則易 逆我處我則難矣 是故待人之時 忍辱寬恕自責內省爲主 非人勿直 吾非血塊 豈無是非之心 若生血氣傷道故 吾不爲此也 吾亦有五臟 豈無貪慾之心 吾不爲此者養天主之故也 악한 사람은 선하게 대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나의 도가 바르면 저 사람이 반드시 스스로 바화하는 것은 대인의 어진 마음이니라. 거짓으로써 사람을 사귀는 사람은 도를 어지럽게 하고 도를 사납게 하는 자요, 이치를 거역하는 자이니라.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함에 반드시 악을 숨기고 선을 찬양하는 것으로 주를 삼으라. 저 사람 이 포악으로써 나를 대하면 나는 어질고 용서하는 마음으로써 대하고, 저 사람이 교활하고 교사 하게 말을 꾸미거든 나는 정직하게 순히 받아들이면 자연히 돌아와 화하리라. 이 말은 비록 쉬 우나 몸소 행하기는 지극히 어려우니 이런 때에 이르러 가히 도력을 볼 수 있느니라. 혹 도력이 차지 못하여 경솔하고 급작스러워 인내가 어려워지고 경솔하여 상충되는 일이 많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마음을 쓰고 힘을 쓰는데 나를 순히 하여 나를 처신하면 쉽고 나를 거슬려 나를 처신하면 어려우니라. 이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에 욕을 참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스스로 자기 잘못을 책하면서 나 자신을 살피는 것을 주로 하고, 사람의 잘못을 그대로 말하지 말라. 내 핏덩어리만이 아니러니 어찌 시비하는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만일 혈기를 내면 도를 상하므로 내 이를 하지 아니하노라. 나도 오장이 있거니 어찌 탐욕하는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내 이를 하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봉양하는 까닭이니라. - 『해월신사 법설』 「대인접물」 해월 신사는 ‘내 핏덩어리만이 아니러니 어찌 시비하는 마음이 없으리오(吾非血塊 豈無是非之心).’라는 말을 통해 자신을 늘 경계하고 뒤돌아보며 반성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 만한 사람이면 스승으로 모신다(孰非我長 孰非我師 吾雖婦人小兒之語 可學而可師也).’라고 하므로 늘 자신을 낮추며 배우는 마음가짐을 중히 여기는 데에 사람을 맞이하고 사물을 접하는 ‘대인접물’의 정신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거짓으로써 사람을 사귀는 사람은 도를 어지럽게 하고 도를 사납게 하는 자요, 이치를 거역하는 자이니라(以詐交者亂道者 悖道者逆理者也).’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필제의 교언(巧言)에 속아서 많은 도인을 잃은 사실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월 직동은 깊은 산간 마을이다. 이 산간 마을에서 한겨울을 지낸 해월 신사는 새로이 동학 교단을 일으킬 계획을 한다. 그러나 무작정 계획을 세우는 것만은 아니다. 계획에 앞서 먼저 행했던 일을 돌아보고 깊이 반성하며 한울님께 참회하므로, 이 참회를 통해 새로운 다짐을 한 것이다. 대신사의 가르침과 같이 ‘허물을 뉘우친 사람은 욕심이 중국 제일의 부자인 석숭의 재물이라고 해도 탐내지 않는[懺咎斯人 慾不及石氏之貲]’ 그런 마음의 참회를 먼저 했던 것이다. 천도교 서울교구에서 세운 ‘대인접물(待人接物)’ 조형물이 직동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이곳이 그 옛날 해월 신사께서 대인접물의 설법을 한 곳이오, 하며 선언하듯 묵묵히 서 있다. 산간 마을이 대부분 그렇지만, 직동 역시 갈 때마다 마을이 조금씩 바뀐다. 그사이 길이 넓어지고,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한다. 지금이야 도로가 넓어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얼마나 깊은 오지였을까. 태백산 깊은 곳에서 매서운 바람과 추위, 굶주림과 싸우는 한편, 마음속에는 커다란 응어리를 안고 말로 하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견디다, 이곳 직동으로 내려온 것이다. 풍비박산이 나고 그래서 혈혈단신으로 직동으로 왔지만, 해월 신사는 그 많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동학의 재건을 위해 또 한걸음 크게 내디딘, 참으로 뜻깊은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대인접물」에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사물을 어떻게 접하느냐 하는 해월 신사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비단 동학의 가르침을 넘어 이 시대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로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 가르침. 갈등이 극에 달해 있는 오늘날, 그 가르침의 울림은 더욱더 크다.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Q.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A.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천도교 경전에는 일본을 ‘개같은 왜적 놈’이라고 적지한 바 있으며, 이를 토대로 배일의식이 고조되었습니다. 천도교는 1910년 8월 29일 일제 강점 직후 그 부당성을 알렸으며, 1910년대에는 민족문화추진운동본부, 천도구국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동학혁명과 같은 대중적 독립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대두로 천도교는 이를 기회로 3·1운동을 기획하였으며,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에서는 의암성사 손병희 등 15명이 서명하였으며,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 의주, 등 지방 조직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독교에 5천 원을 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희암 성주현(상주선도사) -
On Propagating Truth No.4 -
동학농민혁명 단체 대표단, 민주당 정청래 당대표에게 동학 서훈 추서 ‘당론 채택’ 건의동학농민혁명 관련 단체 대표자들이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당대표와 면담을 갖고, 동학농민혁명 2차 참여자에 대한 서훈 추서를 위한 법률 개정과 당론 채택을 공식 건의했다. 지난 12일 국회 본관 당대표실에서 열린 이날 면담에서 정청래 당대표는 “오래전부터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자주 언급해 왔지만, 서훈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며 “제기된 건의에 공감하며, 당과 국회의 입법 절차 차원에서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이어 “동학농민혁명의 인내천 사상은 왕권 시대에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던 민주와 평등, 인간 존엄의 가치를 높이 들었던 위대한 민중혁명으로, 우리 민주주의의 뿌리”라며 “이는 3·1독립운동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을 거쳐 오늘의 민주주의로 이어진 힘의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19세기 암담했던 한반도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독립운동과 민주주의의 전개 또한 크게 지체되었을 것”이라며, “참여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서훈 추서는 늦은 감이 있다”는 개인적 소견도 덧붙였다. 이날 간담회에는 동학서훈국민연대(상임대표 박용규), 동학농민혁명유족회(회장 정탄진),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대표 고재국), 동학농민혁명기념관(관장 이윤영), 동학민족통일회(상임의장 주영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관계자 등 전국 동학혁명 관련 단체 대표자 10여 명이 참석했다. 박용규 동학서훈국민연대 상임대표는 “1895년 을미의병 참여자 가운데 149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으나,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항거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참여자는 단 한 분도 서훈을 받지 못했다”며, “전봉준 장군의 공초 기록과 일본군 작전일지 등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가 명백한 항일 독립운동임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만큼, 독립유공자법 개정을 통해 동학농민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민주당이 앞장서 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이에 함께 자리한 더불어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과 윤준병 의원도 “정청래 당대표는 누구보다 역사 인식이 깊고, 독립운동의 뿌리가 동학농민혁명에 있음을 잘 알고 계신 분”이라며 “관련 법률 개정이 실질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정청래 대표는 “동석한 두 분 의원이 중심이 되어 국회에서 공개 토론회를 열고, 언론과 국민에게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며 “자신도 해당 토론회에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이용길 충남동학단체협의회 회장과 김두년 경북 예천 이사장, 정의적 경남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이 전라도와 충청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경상·강원·황해 등 전국에서 봉기했음에도 오랜 기간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 전승되지 못한 사례가 많고 일부 지역에서는 관심도 부족한 현실”을 호소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최두현 부장은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인 5월 11일 국가기념식에 대통령이 한 차례도 참석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며, “대통령의 참석은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 회복, 그리고 서훈 문제 해결에 큰 힘이 될 것”이라며 정 대표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정청래 대표는 “그동안 묻혀 있거나 음지에 남아 있던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관련 법률 개정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화답해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한편, 이번 면담을 주선한 이윤영 동학농민혁명기념관장은 “향후 관련 단체와 학계, 정당, 유족 등이 함께 참여하는 국회 토론회를 조속히 개최해 사회적 공감대를 넓히고, 동학농민혁명 서훈 문제가 더 이상 지체되지 않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자료 및 사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
제118주년 도일기념일 맞아 전국 각 교구에서 기념식 봉행포덕 167년(2026) 1월 18일(일) 오전 11시, 제118주년 도일기념일을 맞아 중앙대교당과 전국 각 교구에서 기념식을 봉행한다. 중앙대교당 기념식은 중앙대교당 안전진단 공사로 인해 수운회관 지하 1층 (가)다목적홀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도일기념일은 춘암 박인호 상사가 의암 손병희 성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가 된 날로, 천도교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는 뜻깊은 기념일이다. 춘암 상사는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6·10만세운동 등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정신을 실천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기념식은 춘암 상사의 삶과 사상을 되새기며, 동학과 천도교가 걸어온 항일과 개벽의 길을 오늘의 시대 속에서 다시 성찰하는 계기로 삼을 예정이다. 도일기념일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교단의 신앙과 실천 정신을 공유하는 자리에 많은 관심과 참석을 기대한다. -
마음의 신발을 담다『홀로 피어 꽃이 되는 사람』 천도교신문에서는 시인이자 숲 해설가인 이시백 동덕의 생활 명상 글과 라명재 송탄교구장이 엄선한 동학 경전 구절을 함께 엮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학의 지혜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일상의 삶 속에서 꽃피우는 동학의 길을 함께 사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마음의 신발을 담다 난 홀로 순례를 한다. 바닷바람이 세찬 여름날, 별로 신경 쓰는 이도 없는데, 그녀는 조용히 운동화를 내민다. 내 신발 문수는 어찌 알았는지, 뒤축이 다 닳아 물가 주변을 조심하는 내 모습을 봤나 보다. 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과 모시는 마음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그 마음이 있어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위하는 마음이 생기니 천지가 생기고, 세계가 생기고, 道 또한 생기었느니라." <의암법설 : 성범설> 남해를 순례할 때였지요. 후배와 헤어질 때 터미널에서 불쑥 내미는 신발, 따스한 마음의 감정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
박인준 교령, 대통령 초청 신년 종교지도자 오찬 참석“국민 통합과 공동체 회복, 종교의 책무 강조”박인준 교령은 2026년 신년을 맞아 1월 12일 낮 12시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초청 종교지도자 오찬 및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최한 이번 행사는 <종교와 함께 국민통합의 길로>를 주제로 새해 국정 운영의 방향을 공유하고, 국민 통합을 위한 종교계의 지혜를 경청하고자 마련된 자리로, 불교·개신교·천주교·원불교·유교·천도교·민족종교 등 7대 종단 지도자들이 함께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국민 통합”이라며 “국민들이 서로 화합하고 포용할 수 있도록 종교계가 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간담회에서 박인준 교령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분열과 혐오가 심화되고 있는 사회 현실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종교가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 생명 존중과 평화, 공존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통일교와 신천지 등 이단·사이비 종교로 인한 사회적 폐해가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교 유착을 넘어 시민의 삶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행태에 대해 국가가 보다 엄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교가 다시 국민에게 신뢰와 위안을 주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는 데에도 공감이 모였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우리 사회에 끼치는 해악을 너무 오래 방치해 온 것도 사실”이라며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을 표했다. 참석자들은 국가와 국민에 해를 끼치는 종교 단체의 해산 문제와 함께, 문제가 된 종교 재단의 자산을 활용해 사이비 종교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박인준 교령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며, 이주민과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혐중과 혐오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데 대해서는 종교계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대통령은 민생 문제와 한반도 평화, 외교·안보와 같은 국가 공동체의 존속이 달린 사안에 대해 종교계가 사회의 어른으로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을 당부했다. 특히 이러한 문제들이 정쟁의 대상이 되어 국민 갈등으로 번지지 않도록 종교계가 큰 흐름을 잡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종교지도자들은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며 공감을 표했고, 이 대통령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화답했다. 이날 오찬은 생명 존중과 비폭력, 평화의 가치를 담아 채식 위주의 한식과 국민 통합을 상징하는 비빔밥으로 준비됐으며, 시종일관 차분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
[특별기고] 포덕 167년, 재정 확충과 지속 가능한 교단 운영을 향하여천도교신문은 포덕 167년(2026)을 맞아 새해의 뜻을 함께 나누고자 천도교 각 기관장의 신년 인사를 인터넷신문을 통해 게재한다. 이번 신년 인사는 한울님을 모시는 신앙의 마음으로 지난 한 해를 성찰하고, 새해 교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다짐을 공유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제출된 원고는 도착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게시되며, 이를 통해 동덕 모두가 포덕 167년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포덕 167년 병오년 새해를 맞아 교인여러분의 도가에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으로 건강과 만사여의를 기원합니다. 지난해 유지재단은 교단의 교화포덕의 목적사업을 위하여 그동안 잘 못 부과된 시·군·구의 재산세에 대해 지난 5년분에 대하여 소급 적용받아 약 2억1천3백만원 환급 및 잡풀로 우거져 쓸모없이 버려진 우이동 잡종지에 대하여 노외주차장(40대)을 위한 토지개발행위허가를 신청하여 관련 허가를 득함으로써 그동안 수운회관 임대사업에 국한된 수입원을 새로운 사업으로 확충하는 계기를 맞았습니다. 또한 지난 8년 동안 제대로 운행하지 못했던 25인승(1종 대형 운전가능) 포덕버스를 팔고, 쏠라티 15인승(1종 보통 운전가능)을 구입, 지입차량 운행으로 새로운 수익사업을 창출하고 앞으로 경험을 축척하여 재정이 힘든 지방교구의 수입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관련사업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스승님의 무극대도, 천도교의 진리를 이 세상에 펼치기 위해서는 포덕천하가 이루어져 신앙심에 의한 자발적인 성금이 차고 넘쳐 우리 교단이 펼치고자하는 보국안민, 포덕광제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지만 아직 그렇지 못하는 관계로 유지재단에서는 새해 교단의 목적사업을 위해 재정을 확충하는 방법을 연구·검토, 실행하여 중·장기적으로 교단의 재정을 뒷받침하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새해는 붉은 말의 해라고 합니다. 새해는 힘 좋고, 지치지 않는 적토마의 한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토마의 기운으로 새해에는 도가에 만복이 깃들여 좋은 일과 행복이 가득한 한해 맞으시길 심고드립니다. 천도교유지재단 이사장 수암 김 산 심고 -
[특별기고] 병오년 붉은 말의 기운으로 여는 신앙의 새 출발천도교신문은 포덕 167년(2026)을 맞아 새해의 뜻을 함께 나누고자 천도교 각 기관장의 신년 인사를 인터넷신문을 통해 게재한다. 이번 신년 인사는 한울님을 모시는 신앙의 마음으로 지난 한 해를 성찰하고, 새해 교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다짐을 공유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제출된 원고는 도착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게시되며, 이를 통해 동덕 모두가 포덕 167년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병오년 붉은 말의 기운으로 여는 신앙의 새 출발 병오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모든 가정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올해는 붉은 말이 힘차게 뛰어 나가는 열정과 진취의 해입니다. 이에 맞추어 우리 모두가 그동안의 쇠약해진 신심을 가다듬고 신앙의 에너지를 북돋아 교단중흥의 대업을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바야흐로 종학대학원의 신앙 교육은 참된 신앙을 위한 교인의 필수 교육과정입니다. 교인 개개인의 신앙적 지식 능력과 신앙심 함양이 곧 교단중흥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바라건데,병오년 붉은 말의 기운과 함게 교인 여러분의 용기있는 종학대학원 입학을 염원합니다. 종학대학원장 혁암 김혁태 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