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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늘의 대고천하-천지부모지난 11월 30일은 제가 전주교구에서 120주년 현도기념 특강을 한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대고천하 – 천지부모>라는 제목이었습니다. 120년 전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것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고민과 갈등과 혼란 속에서 선택한 비장한 결정이기에 오늘 2025년에 우리는 대중 앞에 뭘 선포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정한 제목입니다. 우리 천도교가 연례행사로 치르는 기념식이 수도 없이 많은데 그중 하나로 현도기념일을 안일하게 다뤄도 될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점 줄어드는 이름뿐인 교구들과 늘어가는 시일식 빈 의자들을 보면서 우리가 서둘러 선언해야 할 긴급한 과업이 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년여 만에 다시 전주교구로 와서 보니 참석자들이 많이 줄어있었습니다. 제가 고향 쪽인 경남 진주교구로 가기 전에만 해도 시일식에 20명 이상이 참석했고 지하에는 전용 식당도 있었는데 와서 보니 딱 8명이 참석했고 지하 식당은 없고 다른 단체가 입주해 있었습니다. 피아노 반주자도 없고 음향기기로 반주와 노래가 나왔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포덕일까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할 대고천하가 포덕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인 이 멋진 장소의 전주교구에 사람들이 가득 차는 것일까요? 아닙니다”라고도 했습니다. 120년 전 당시를 떠올리면 그렇습니다. 서기 1905년 11월은 대고천하 한 달 전입니다. 조선의 외교권이 빼앗기고 주한 외국 공사관도 모두 폐쇄된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습니다. 일본의 조선 지배 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고 있었는데 동학은 사도난적이니, 동학비적이니, 동학 것들, 동학당, 시천도, 활인도, 사술지무 등으로 불리며 탄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손병희 선생이 진보회를 만들어 근대화 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을 벌였으나 동학에서 뛰쳐나간 이들이 친일파와 손잡고 일진회를 만들어 노골적인 방해 활동을 벌이던 때입니다. 기가 막히지요. 더 심각한 것은 일진회가 “나 친일파요”라고 하지 않고 손병희가 벌이던 갑진개혁운동인 단발과 의복 개량 운동도 했다는 것입니다. 서양을 물리치기 위해 동양끼리 뭉치자면서 일본과 손잡자고 그럴듯하게 백성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혁과 근대화도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서 전광훈 등의 태극기부대가 “우리는 친일이고 미국 숭배주의자요”라고 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러니 손병희의 고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동학 지도부는 다 처형당해 없지, 몇 년 가서 살아 보니 눈이 돌아갈 정도로 일본은 발전하고 있지, 대한제국이라고 이름표는 달았지만 조선 조정은 꼴이 말이 아니지, 동학한다고 어디 내놓고 말할 수가 있나. 동학 내부는 사분오열 일보 직전이지.. “당시 상황은 피가 마르고 숨이 막히는 시절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가하게 요즘 식으로 세미나도 하고 포럼도 열면서 천도교로 개칭을 하니 마니 할 겨를이 없었고 마른침도 없어 입술이 터지고 눈에 핏발이 서는 순간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박정희나 전두환의 파쇼정권 때 수배되고 투옥되고 했던 사람들은 압니다. 야밤에 삐걱대는 대문 소리나 두런거리는 남정네 목소리만 들려도 맨발로 뒷담을 넘어 튀어야 했던 사람들은 압니다. 동지들은 의문사를 당해 시체도 못 찾고 날이면 날마다 투신과 분신이 일어나던 때를 숨죽여 살아 본 사람들은 압니다. 대고천하 당시 손병희의 처지와 심정이 어땠을지를. 당시에 사도난적으로 몰리는 거나 요즘 비정규직 문제나 보안법 폐지 또는 성소수자나 양심적 병역거부 주장을 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거나 똑같은 맥락입니다. 손병희는 동학을 부흥하자, 동학교도를 늘이자. 암자나 동학교도 집에서 만나지 말고 번듯한 건물을 하나 지어보자 등의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식 종교단체로 과감히 변신하면서 조직과 교리를 정비하고 수련과 민족운동을 새로이 펼쳐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정말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백척간두 진일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특강에서 지금 이 순간 ‘천지부모’를 선포하자고 말했습니다. ‘천지는 곧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니, 천지부모는 일체니라’를 떠올리며 “이종진은 곧 전주교구요 전주교구는 곧 이종진이다. 이재선도 그러하니 이종진은 곧 이재선이니라”라고 읊었습니다. 하나 됨의 천지부모 사상은 우리 천도교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라는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천지부모의 삶을 회복하자는 말은 무시무시한 선언입니다. 오늘날 개발과 발전과 효율과 편안함과 돈벌이에 중독된 세상 사람은 남을 경쟁 상대로 봅니다.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고 압니다. 남보다 앞서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두 내 편리를 위한 소모품입니다. 이런 마당에 모든 생물과 물건을 다 내 부모님처럼 여기고 산다는 것은 천지개벽 그 자체입니다. 동물권, 식물권, 자연기본권(Plant Rights) 흐름의 완결판이자 기후 위기 해결, 탄소발자국 제로 운동의 종결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준비해 간 <주식회사 에코샵홀씨>에서 산 고급 손수건을 참석자들에게 선물로 나눠드렸습니다. 전주교구로 돌아온 기념 선물이기도 합니다. 손수건은 화장실에서 일회용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식당에 가서 미세플라스틱으로 된 물티슈나 일회용 냅킨도 쓰지 말자는 것으로 천도교한울연대에서 하던 활동이기도 합니다. 저는 천지부모 개념을 웰다잉 운동으로 선포하자고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죽음은 정말 구질구질합니다. 그 어떤 포유류나 영장류, 고등동물들도 인간처럼 지저분하게 죽지 않습니다. 평생 의료비의 반을 죽기 몇 년에 따 쓰고 자기 팔다리 마음대로 못 움직이고 자기 배변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 앞에 가랑이 벌리고 기저귀 갈아 차는 인생의 말로는 천지부모의 삶을 살지 못한 인간들의 자업자득입니다. 치명적인 문명병입니다. 노인요양원과 치매와 알츠하이머는 인간 외 어떤 동물도 없습니다. 인간이 손대지 않으면 동물과 식물에 병은 없습니다. ‘삼매사(사마지마라니)’나 ‘살레카나’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락사나 조력사는 들어봤겠습니다. 그것이 합법화된 캐나다에서는 제법 고상하게 ‘죽음에 대한 의료지원 (Medical assistance in dying)’이라고 부릅니다. 자이나교의 ‘살레카나’는 우리의 ‘성령출세설’과 닮아있습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있으면서 맑은 정신 상태로 담담하게 (명상적)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껍데기인 몸을 벗고(성령출세) 본래의 영적 자리(잠겨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천지부모의 자연순환 이치에 고즈넉이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등바등 소리 지르고 링거줄 붙잡고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긴 여행을 마친 순례자가 지친 몸을 누일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저녁 노을빛 같은 모습입니다. 영이 적극적으로 드러나 형체 있는 삶을 살다가 영이 조용히 작용하는 섭리인 형체 없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두려움도 슬픔도 아쉬움도 아닙니다. 그런 임종을 우리 동덕님들이 맞을 수 있게 하는 방책과 수련을 마련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는 효과적인 포덕 활동이고 신앙심 확립이며 교구의 건실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호주의 원주민 아보리진족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스스로 깨닫는다고 합니다. 조용히 물병도 가지지 않고 사막 가운데로 가서 꼿꼿하게 앉아서 임종을 한다고 합니다.(좌탈입망). 천지부모의 삶을 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지지난달에 제가 아는 분도 스위스로 안락사하러 갔습니다. 가기 전에 조촐한 이별식을 했습니다. 4,5천 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대고천하 두 갑자를 맞는 오늘, 천도교에 신 대고천하 추진팀이라도 만들어야 할까요? 글, 목암 전희식(전주교구) -
제3차 종무위원회의, 해월 신사 탄생 2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 구성안 등 심의중앙총부는 포덕 166년(2025) 10월 21일, 수운회관 907호에서 제3차 종무위원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는 주요 기념사업과 규정 정비 등 향후 교단 운영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박인준 교령은 격려사에서 먼저 교헌 제48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교령은 “교회의 기본적 사무 계획은 종무위원회의 심의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며 조직도, 직책명, 업무 분장 등 교단 운영의 기초 체계가 명료하게 정비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 “현재 교단 조직도와 업무 명칭이 모호한 부분이 있다. 각종 규정, 시책, 문서 양식까지 모두 종무위원회의에서 책임 있게 정리해 나가야 한다”며 체계적인 행정시스템 구축을 당부했다. 이어 이날 상정된 안건 중 해월 신사 탄생 2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구성(안)과 현도 120주년 기념 포상(안)을 특히 언급하며, “교단의 중대 사업들이 윤곽을 갖추어가고 있다. 기념사업을 통해 교단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제3차 종무위원회의에서는 총 8개의 안건이 상정되었으며, 각 안건은 종무위원들의 질의·검토·보완 의견을 거쳐 심의가 이루어졌다. 1호 안건인 해월 신사 탄생 2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구성(안)에 대해서는 기념학술대회, 성지순례, 자료 발간 등 다각도 사업이 논의되었으며, 일부 위원들은 위원 구성의 전문성 강화와 각 교구 간 협력 체계 마련 등을 보완 의견으로 제시했다. 2호 안건인 목적성금(신인간 창간 100주년 기념사업) 신설(안)은 “의미 있는 기념사업을 위해 조속한 실행계획 마련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이어졌다. 3호 안건은 교회묘지운영위원회 1차 구성(안)으로, 일부 종무위원은 묘지 관리의 기준과 절차를 명확히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4호 안건인 의암성사 묘소 인근 휴게공간 조성 건, 5호 안건인 전주 동학혁명기념관 냉난방기 유지보수 지원(안), 6호 안건인 포덕 166년 제120주년 현도기념 포상(안)은 모두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7호 안건인 특별회계 설치(안) - 2025 동학혁명 정신선양은 사업 규모 확장에 따른 재정의 투명성 및 운영 효율성 확보가 논의의 핵심으로 제시되었고, 8호 기타 안건에서는 향후 교단의 조직 정비 및 장기 계획 수립 관련 의견이 오갔다. 이날 회의에서는 각 안건의 실무적·제도적 보완점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으며, 종무위원들은 자료 검토와 의견 제시를 통해 안건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회의는 심고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종무위원들은 “2027년 해월 신사 탄생 200주년을 비롯한 교단의 중대 과제를 체계적으로 준비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
[칼럼]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 탄신 200주년 어떻게 준비할까?오늘, 출근길. 차창 밖,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들이 시야에 다가오며 온통 노오란 은행잎들로 세상이 물들 듯하였다. 아파트 주택을 벗어나고, 기념관 사무실까지 오는 동안만큼이라도 만추의 계절, 빨갛게 익어가는 홍시들, 울긋불긋 오색단풍들,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고 뽐내는 채송화, 봉선화, 들국화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가을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즉시 차 한 잔과 손에 턱을 괴고, 칼럼을 독촉하는 유난히 눈과 키가 큰 천도교신문 신채원 차장이 생각났다. 더 한소리 듣기 전에 후딱 써서 보내야지 하며, 컴을 열었다. 그 순간 컴 바탕화면에 꽉 들어찬 온갖 글들의 제목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글과 ppt가 완성된 것, 글을 쓰다가 만 것, 제목만 있는 것, 특히 해월 최시형 스승님과 관련된 학술토론회, 강연회 등의 글들이 눈에 팍 들어오면서, 또 해월 스승님 관련 칼럼을 쓴다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생각나는 대로 쓰기로 했다. 얼마 전 천도교 종무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재선 전주교구 교화부장으로부터 가칭)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준비위원회 조직구성을 대충 설명들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오는 2027년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에는 천도교인들만의 잔치가 아닌, 해월 선생의 사상처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조직구성과 정책개발이 되었으면 한다. 그럼 무슨 정책과 콘텐츠로 기획할 것인가는 지면상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압축적으로 사전 준비 차원에서 우리가 연구하고 토론하고 기획할 내용을 열거해본다. 주제: [역사문화개념으로]<1.콘텐츠 정책과 방향, 2.콘텐츠 개발, 3.콘텐츠와 도시부랜링, 4.발굴과 활용, 5.스토리텔링 방법, 6.지역 스토리텔링, 7.설화와 스토리텔링, 8.축제와 콘텐츠, 9.공연과 콘텐츠, 10.영상과 콘텐츠, 11.스토리텔링 전략, 12.지역자원과 웹툰 등으로 기초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기념 행사를 기획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해월 스승님의 삶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지금 만약 해월 스승님이 나타난다면 과연 무슨 말씀과 어떤 일들을 하실까? 우리들은 과연 해월스승님과 같은 일들을 하나라도 하고 있을까? 해월 스승님은 아마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주고, 오고갈 때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환경파괴 등으로 대멸종이 다가오고 있는 것에 교인은 물론 국내외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할 방법을 찾고 대국민, 대인류, 생명평화 운동을 하실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 기념은 기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과 실천을 궁리하고 몸소 직접 나서는 그런 일들을 해야 진정 해월정신이라 말할 수 있다. 侍天主, 人乃天, 事人如天, 物物天事事天, 人吾同胞 物吾同胞, 등 敬天, 敬人, 敬物의 삼경사상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이다.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우금티의 함성, 오늘의 개벽으로” 동학농민혁명 131주기 공주 위령식 봉행동학농민혁명 131주기 공주 우금티 동학혁명군 위령식이 11월 11일 오전 11시, 화창한 가을 하늘아래 공주시 우금티고개 위령탑 앞에서 봉행되었다. 위령식은 박인준 천도교 교령, 김성환 천도교연원회 의장, 박돈서 감사원장(대행) 외 중앙총부 교역자, 충청지역 천도교인과 일반시민 등 약 1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천도교중앙총부 주최, 천도교대전충청연합회 주관,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강세민 동덕(대전교구 전 교구장)의 사회로 개회한 위령식은 국민의례와 교회의식(청수봉전과 심고, 주문3회병송)에 이어, 이윤영 전주 동학혁명기념관 관장의 제의로 참가자 모두가 폐정개혁안 12개조를 함께 낭독하였다. 박인준 교령은 추모사에서 “동학혁명 최대 격전지인 이곳 우금티, 바람 부는 산마루, 그림자 드리운 계곡을 바라보니, 굽이굽이 배어 있는 동학혁명군의 비명과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면서 “우금티 동학혁명군의 혼꽃은 3.1독립혁명으로 이어지고, 민주화 운동과 자주평화통일운동으로 피어나, 오늘의 인류 공동번영과 세계평화를 향한 횃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옷깃을 여미고 선열들의 영령 앞에 추모의 예를 올리며 “우리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영령들의 나라와 겨레를 위한 그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개벽의 일꾼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김태흠 충남도지사는 추모사(자료집)에서 “위령식이 단순한 추모의 자리를 넘어, 동학혁명군의 뜻을 오늘의 삶 속에서 되새기고 실천하는 새로운 출발의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임달희 공주시의회 의장은 “그날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오늘의 과제로 되새기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하고 “공주시의회 또한 우금티의 정신이 단지 추모의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 속에서 실질적인 가치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이어 천도교 샘합창단(단장 조보아)의 선창으로 동학혁명군추모가 합창에 이어, 참가자 전원이 분향하며 동학혁명군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김성환 연원회 의장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한 뒤 심고와 폐식으로 추모식을 마쳤다. 이날 추모식에서는 대전교구 교인을 중심으로 한 충청 지역 천도교인들이 식장 준비와 참석자 안내와 의전 등을 정성 어린 손길로 도맡아 진행하였다. -
[칼럼] 태안 동학혁명을 기억하는 길지난 10월 29일 『태안동학농민혁명사』가 간행되어 출판기념식이 열렸다. 집필자의 한 사람으로 지난 여름 땡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태안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답사한 결실을 보게 되어 기쁘다. 둘러보니 태안(泰安)은 글자의 뜻 그대로 ‘태평하고 안락한’ 곳이었다. 높고 거친 산이 없이 백화산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모습에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해안과 내륙을 겸비한 태안은 전통적으로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태안은 삼한 시대 신소도국(臣蘇塗國)이었다. 삼한은 지금의 직산에 근거한 목지국(目支國)이 통괄했는데, 신소도국은 목지국의 제천행사인 소도를 주관했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태안은 신성하고 종교적인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태안으로 이름을 고친 이후 일제강점기 한때 서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에 태안군으로 회복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이 거세게 일어났던 곳으로 격하했기 때문이었다. 충청도 서부의 동학은 1880년 공주를 시작으로, 1883년에는 내포의 동학을 이끌었던 삽교의 박인호와 아산의 안교선 등이 입교해 포덕의 발판을 마련했다. 은밀하게 교세를 유지하던 태안을 포함한 내포 일대의 동학은 1890년 들어 급성장했다. 이때 서산의 최형순은 교주 해월이 서산을 방문했을 때 입도해 서산과 태안 일대에 동학을 전했다. 특히 교조신원운동이 한창이던 1893년 2월 박희인 대접주가 그릇 장수로 변장해 방갈리 가시내에서 조운삼을 입도시켰고, 이어 방갈리 갈머리 마을의 문장준, 문장로, 문구석 등을 입도시켜 태인 동학의 중심인물로 키웠다. 물산이 풍부한 태안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고 동학의 시천주와 유무상자의 정신은 태안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태안의 동학은 원북면 방갈리, 근흥면 수룡리, 이원면 포지리가 특히 강했다. 그 이유는 지리적 조건과 신망있는 지도자 등이 갖추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박희인은 방갈리 문구석, 가시내 조문필, 수룡리 문동하의 집에서 동학 교리를 가르쳤다. 태안의 동학도는 보은 장내리의 신원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성장했다. 1892~3년 교조신원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박인호는 덕의대접주, 박희인은 예산대접주로 임명되어 내포 일대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동학 세력이 커지자 태안부사 신백희는 충청감사 조병식과 공모해 태안 관내의 동학도로부터 속전(贖錢,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 6만6천 냥을 강제징수하는 횡포를 부렸다. 조석헌과 문장준을 중심으로 태안의 동학은 2~3년 만에 급성장했다. 태안을 포함한 내포의 동학도들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시천주를 가까이 했다. 1894년 1월 고부에서 전봉준이 기포(起包)하자 내포의 동학도는 2월 6일 전직 고관 출신 이정규의 팀힉과 수탈에 저항하는 덕산기포를 감행했다. 내포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인 덕산기포는 4월 농민을 괴롭히던 토호 이진사의 응징을 위한 원벌기포로 이어졌다. 태안은 내포 동학의 핵심으로 전라도의 동학농민혁명과 호응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전주화약으로 타협한 후 내포의 동학도는 시세를 관망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과 청일전쟁으로 상황이 급변하였고, 평양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조선 정부에 동학군 탄압을 승인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어 전봉준을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했고, 교주 해월은 9월 18일 총기포령을 내렸다. 태안의 동학도는 해월의 총기포령을 기다려 분연히 일어났다. 10월 1일 내포의 동학군은 서산 관아를 점령해 군수 박정기를 처단했다. 이튿날인 2일에는 태안 관아를 공격해 부사 신백희와 안무사 김경재, 이방 송봉훈을 처단하고 사전에 붙잡힌 동학접주 30여 명을 구출했다. 이후 내포 동학군은 대흥군 관아를 점령하고 홍주성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홍주 목사 이승우는 예포 대도소를 습격해 어려움을 겪었다. 흩어졌던 태안의 동학군은 10월 15일 태안 경이정에서 재집결했다. 승기를 잡은 관군과 일본군은 내포 동학군을 추격했고, 동학군은 이들을 승전곡으로 유인해 크게 무찔렀다. 승전곡 전투 승리는 일본군에 대한 최초의 승전이었다. 이어 내포 동학군은 관작리 전투에서 승리하고 홍주성으로 향했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무기와 전술로 인해 패배했다. 이후 동학군은 해미성, 매현에서 거듭 패했다. 태안의 동학군은 매현 전투 이후 백화산에서 최후의 항전에 돌입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백화산을 포위해 동학군을 고립시켜 몰살시키려 했다. 백화산의 동학군은 동짓달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을 견디며 11월 11일부터 16일까지 치열하게 조・일 연합군과 항전했으나 끝내 새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산화했다. 백화산 동학군들은 비록 역부족이지만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태안에서는 대대적인 동학군 체포와 참혹한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지금의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있는 백화산의 교장(絞扙) 바위에서는 동학군 수백 명을 붙잡아 10여 명씩 포승으로 묶어 목을 조르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백화산 북쪽의 모래기재, 태안여고 개울, 샘골 마을, 남문리 냇가, 정주내 등 여러 곳에서 동학군이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근흥면 토성산에 숨어든 동학군은 총개머리로 잔인하게 때려죽였고, 작두로 머리를 잘랐다. 산 아래로 던져진 머리는 집 추녀에 매달았다. 산 사람을 집에 가두고 방화하는 만행도 저질러 토성산은 도살장을 방불케했다. 다소 장황하게 태안을 포함한 내포의 동학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에 대해 아는 이가 적고 한편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동학혁명에서 충청도의 서부 태안에서 전개된 동학혁명은 그에 못지않게 크게 전개되었다. 태안을 포함한 내포 지역에서만 대접주(大接主)가 박인호, 박희인, 최형순, 장세헌, 한영교 등 5명일 정도로 내포의 동학군 조직은 탄탄했다. 태안군에 한정해서 보면 수접주(首接主)가 11명, 차접주(次接主)가 1명, 접주(接主)가 55명, 접사(接司)가 28명, 접장(接長)이 1명이었고, 육임(六任)의 직책으로 도집(都執) 14명, 집강(執綱) 2명, 대정(大正) 3명, 중정(中正) 3명, 이밖에 다른 호칭의 직책 등 동학군을 이끌었던 지휘부만 121명에 달했다. 이처럼 태안의 동학혁명은 장엄했다. 태안의 동학혁명에 관한 내용이 잘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 동학군의 기록과 이를 이은 후예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안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조석헌은 『조석헌역사』, 문장준은 『문장준역사』를 남겨 동학군의 시각으로 바라본 동학혁명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태안은 해방 후 전국에서 대표적으로 동학혁명에 관한 기록을 정리한 곳이다. 1965년 천도교 태안교구 문원덕 교구장은 『갑오동학혁명 당시 순도한 순도자 명단』를 작성했다. 문 교구장과 교인들은 동학혁명 참여자의 후손을 일일이 찾아 당시의 기록을 정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학정신선양회’를 조직해 태안의 동학혁명을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일에 앞장섰다. 태안의 동학군 후예들은 힘을 모아 1977년 교장바위에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을 건립했다. 문 교구장은 토성산에서 동학군의 목을 자르던 작두를 발굴해 천안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이 작두는 동학군 학살의 유일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동학농민혁명태안유족회’를 이끌었던 문영식 등의 노력으로 2015년에는 태안 동학의 중심지인 원북면 방갈리 태안 화력발전소 내에 “동학농민혁명기포지” 비를 건립했다. 60여 년간 꾸준하게 태안의 동학혁명 선양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21년 10월 22일 전국 지자체로는 3번째로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동학군이 순절한 백화산 아래 건립되었다. 그러나 태안의 동학혁명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여름 답사를 다녀보니 아직 태안 동학혁명 유적 가운데 제대로 정리된 곳은 교장바위와 방갈리, 태안 관아 정도 밖에는 없었다. 동학군이 학살된 토성산, 태안 동학군이 집결한 진벌, 동학군이 학살된 모래기재와 개구랑, 통개, 목네미샘, 정주내 등에는 이곳이 동학혁명의 유적임을 알리는 표식이 하나도 없다. 통개에는 고사리손으로 만든 작은 나무 팻말이 하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직 태안의 동학혁명은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태안이 동학혁명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태안은 그 어느 곳보다 동학혁명의 역사를 지키려고 애쓴 곳이다. 이제 이에 대한 답을 우리들이 해야 하겠다. 태안 동학혁명 유적지를 연결하는 태안 동학길도 만들고, 백화산 항쟁이 벌어졌던 날 가운데 하루를 택해 “태안동학혁명 기억일”을 만들어 동학군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추모제도 이어 나가자. 다행히 이번에 『태안동학농민혁명사』가 간행되어 그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번 기회에 태안의 동학혁명을 알리고 기리는 일에 나서자. 태안 동학혁명을 기억하는 일에 나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던 동학군의 마음과 하나 되자. 그 힘으로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강사) -
[특별기고] 고부 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인가, 민란인가?최근 이희청 동학농민혁명 고부 봉기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희청 이사장의 전화 용건은 지난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을 일부 개정할 수 있도록 협력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희청 이사장에게 오래전부터 「동학농민혁명특별법」 개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고, 그 이전에 여러 명의 이사장이 교체되기 전부터 그 이야기는 들어왔다. 특별법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 고부를 중심으로 정읍지역에서 오래전부터 「동학농민혁명특별법」 개정에 대한 학술대회와 기자 회견 등을 통해 줄기차게 요구하는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다. 특별법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로 되어 있는 2조 1항이 문제가 된다. 이는 특별법에서 끝나지 않고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인용하고, 역사학자들까지 참고하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에서 1월의 고부 봉기는 혁명 이전의 민란 취급을 받고, 3월의 무장 기포(백산대회 포함)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럼 2013년 3월 17일 전문개정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1조와 2조 1항을 살펴본다. 제1조(목적) 이 법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國權)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계승ㆍ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1월의 1차 봉기인 고부 봉기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빠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2조 1항의‘3월의 1차 봉기’를 ‘1월의 1차 봉기’로 일부 개정하면 될 것 같지만 말 못 할 난공불락(難攻不落)이 있는 모양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차례 이 문제에 대해서 연구자는 물론,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논의를 해왔다. 특히 임형진 교수, 성주현 교수와 심도 있는 논의를 하다가,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제안한 1차 봉기, 즉 ‘1894년 3월의 봉기’를, ‘1894년 1월과 3월 사이의 봉기’로 수정 개정하자는 의견을 모은 적이 있다. 또한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유족회 포함) 일부 임원들에게도 1차 봉기를 3월로만 하지 말고, 1월과 3월 사이로 수정 개정했으면 하는 의견을 말했더니 그리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물론 전국의 50여 개 동학 관련 단체 임원들과 천도교 학자들도 대체로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왜 국회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을 개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참으로 이해 불가 사항이다. 고부 봉기가 민란이면 동학혁명도 민란이 된다 만약 ‘동학농민혁명’ 명칭문제에서 고부 봉기는 월경(越境), 즉 고부군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해서 혁명이 아니고, 무장과 백산 봉기는 경계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혁명으로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고부에서 시작된 혁명은 결국 무장으로 연결되었고, 무장에서 백산으로 연결되어 전라도 전역에 확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민란과 혁명을 구분한다면 갑오년(1894) 동학농민전쟁은 민란으로 보면 전국의 봉기가 모두 민란이고, 혁명으로 보면 전국의 봉기가 모두 혁명이다. 또한 전쟁으로 보면 전국의 봉기가 모두 전쟁이다. 혁명(革命)이란 무엇인가? 국가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취하여 정권(왕권)을 교체하는 것을 뜻한다. 성공하지 못한 혁명은 혁명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동학농민전쟁을 동학농민혁명으로 명명하면서 고부 봉기를 민란 취급한다면 자기부정에 빠지는 것이고, 고부 봉기를 혁명으로 보지 않으면 동학농민혁명의 명칭을 사용할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고육지책의 방안으로,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을 개정하여 1차 봉기를 ‘1월과 3월 사이’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필자 이윤영 부안포 직접도훈 전주 동학혁명기념관 관장 -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동학혁명기념관서 역사특강 진행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학생 70여 명이 9월 25일 오전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을 단체로 방문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방문에는 홍영의, 이재경 교수가 인솔해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기념관에서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첫 특강에서는 국민대 교수들이 동학 사상의 개요와 1차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에 대해 설명했으며, 학생대표가 준비한 자료집을 낭독하며 이해를 도왔다. 이어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이 직접 나서 2차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의병전쟁을 주제로 강연을 이어갔다. 이 관장은 “1차 혁명은 반봉건 운동, 2차 혁명은 반외세 항일무장투쟁”으로 규정하며, 특히 2차 혁명의 항일독립운동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는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를 중심으로 한 폐정개혁안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최초의 민주자치시대를 열었다”며 그 역사적 의미를 짚었다. 그러나 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여 고종을 사실상 포로로 삼고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며 친일 내각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이 관장은 특히 일본군의 불법 경복궁 점령 사건을 계기로 동학농민군이 일본과의 전면 항전에 나서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전봉준·손화중 장군의 남접군과 해월 최시형·손병희 장군의 북접군은 해월의 총기포령 아래 일본에 맞선 항일전쟁을 선포했으나,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주력 부대가 대패하며 패배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장흥, 대둔산, 보은 등 전국에서 이어진 동학의병전쟁도 결국 막을 내렸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이 관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3.1독립운동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최근의 촛불 시민혁명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이 정신이 남북평화통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국회와 보훈부는 최시형, 전봉준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내릴 수 있도록 입법과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특강은 학생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한 농민운동을 넘어, 항일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기사 및 사진 제공 전주동학혁명기념관 -
[칼럼] 천도교의 사후관에 문제를 제기한다필자가 근무하는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에는 남모르는,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올해가 동학혁명 131주년이니까 기념관이 건립된 시간이 3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나는 공사 총책으로 수시로 현장에 오가 가는 신분이었다. 만약 밤에 비가 오기라도 하면 한밤중에 재빨리 와야 했는데, 건물 지붕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조심 조심 지붕에 올라가 안전한지 살펴보다가 그만 가파른 지붕 경사 2층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찔한 순간, 영락없이 중상 아니면 사망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울님’하고 소리쳐 불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뒤에서 미끄러지는 나를 꽉 잡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기어 지붕 정상에 올라 한숨을 쉬고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아무도 없었다. 기념관 개관 후 나는 책자를 3권 출간하였다. 그 집필시간이 기념관 퇴근 시간부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으니, 기념관 문 닫고 그곳에서 집필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새벽 1~2시경 전시관에 누군가 꼭 들어온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 나는 “스승님, 선열님 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여쭙곤 하였다. 물론 모습과 흔적은 볼 수가 없었다. 또 기념관 전시실 문이 자동문이라 누군가가 가까이 와야 열리고 닫힌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뒤 자동문 혼자 열리고 닫히는 상황이 가끔 발생한다. 나는 일어서 문 앞으로 나가 두 손을 합장하고 “한울님 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드린다. 물론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까 수운 대신사 경전에 한울님 하신 말씀 “귀신도 나이니라” 즉 귀신도 한울님 이라는 글귀가 머리를 스친다. 그럼 나는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를 속으로, 입으로 외운다. 천도교에서는 사후관 즉 개체영혼설을 부정한다. 그래서 일부 종교학자들은 천도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종교성립의 주요 내용 중에, 첫째 신의 존재, 둘째 교주의 존재, 셋째 경전의 존재, 넷째 교인의 존재, 다섯째 사후관의 존재 정도가 있어서 한다. 천도교는 사후관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다. 물론 향아설위와 성령출세설이 있지만, 명확한 개체 영혼설이라 말할 수 없다. 천도교가 과거의 영광 즉 우리나라에서 신도수가 제일 많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순수 종교적 신앙에서 교인수가 많았던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운동 즉 혁명운동과 독립운동 등 대중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상황이었다. 현재 정당단체나 사회단체처럼 그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 동참하게 하는 교정일치의 선두에서 대중들을 이끌어갔던 것이다. 현재는 솔직히 말해 천도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환원하는 사람들에 비해 새로 입교하는 사람들이 적으니 세월이 지남에 따라 현저히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천도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기독교나 불교 등과 같이 현상유지라도 할 것이다. 그 하나는 사후관을 확실히 정립해야 한다. 또 하나는 사회개혁 즉 통일운동, 환경운동 등 대중을 선도하는 최전선에 나서야 한다. 현재는 둘 다 미미하기 그지없다. 나는 오랜 동학 천도교 수행한 사람으로서 인간의 사후관을 인정한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성령출세라는 다소 철학적인 사후관이 아니라, 타 종교처럼 개체 사후관을 말한다. 그리고 만약 귀신이 내 앞에 나타나도 하나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귀신(보이지 않는 한울님을 뜻함) 또한 한울님이라는 수운 대신사님 경전을 생각하면 귀신이 다가오더라도 “모시고 반갑습니다. 한울님..”하면 그 귀신들도 나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학의 향기, 전주와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 글은 포덕 166(2025)년 9월 17일, 전주문인협회 초청(완산도서관) 특강 원고이다. 1. 종교사적 관점으로 본 역사관 우리는 흔히 서양의 역사는 기독교(가톨릭, 개신교)의 역사라고 말한다.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의 상징적인 역사는 무엇인가? 보통 동양은 불교 문명권이라고 말한다. 물론 유교[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공자가 체계화한 종교적·윤리적·정치적 사상 체계이다. 유교는 인간관계 속에서의 도덕적 실천, 사회 질서의 유지, 정치적 통치 이념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불교, 도교와 함께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이념 체계인 삼교(三敎 유교, 불교, 선교) 중 하나로 분류된다.], 힌두교[(힌두교(हिन्दू ध, Hinduism)는 인도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로, 인도, 네팔, 발리 등지에서 주요 종교이다. 2020년 기준으로 11.6억명(세계 인구의 15%) 이상이 믿으며, 신자 수는 기독교, 이슬람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이슬람교[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 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기독교 등의 셈족계 제종교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크교(시크교는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창시된 종교이다.), 자이나교[(자이나교(Jainism)는 인도지역에서 발원한 인도 계통의 종교로 명칭의 어원인 '지나'는 승리자라는 의미이며 '자이나'는 승리자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등 각 나라별로 민속종교까지 그 영향력은 과히 역사라 할 정도로 막대하다. 17세기 초 서양학문으로 이해되었던 서학(西學)은 18세기 후반 신앙으로 받아 들려지며 모진 탄압에서도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유교 즉 성리학이 국교라 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에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종교사상이 창명되었고, 훗날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음력) 경주 용담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창명한 새로운 도(道)요, 종교철학사상이다. 동학의 명칭이 확정되기 전 처음에는 무극대도 (無極大道)라 칭하였고, 그 다음에는 천도(天道)로 칭하다가 결국 동학(東學)이라 반포하였다. 그런데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동학 명칭을 세상에 알릴 때 전라도 남원땅 은적암에서 동학론, 즉 논학문을 지어 반포함으로 훗날 전라도에서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사상적 계기가 된다. 당시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남원을 중심으로 전주 등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동학을 포덕하게 된다. 2. 동학이라는 명칭의 유래 동학의 동(東)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동의보감(東醫寶鑑)(조선 시대, 1596년에 임금의 명을 받아 1610년에 허준이 완성한 의학 서적),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東醫寶鑑)조선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동서와 남북의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춘 병풍식의 첩 형식을 채택하여 1861년에 간행한 지도집. 지도첩.]’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조선(朝鮮)의 국명(國名)에서도 동(東)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어원이 ‘동방’과 ‘광명’이라는 뜻으로, ‘동쪽의 해 뜨는 곳, 또는 아침의 나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곳,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학은 ‘동방의 학문’이란 뜻으로,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어둠을 걷어내고 다시 밝음을 열어가는 새로운 세상의 학문이자 사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앞서 설명했듯이 무극대도, 천도, 동학이라는 여러 명칭을 사용하였다. 훗날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 뒤를 이어 동학 3세 교조가 된 의암 손병희 성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세상에 크게 선포하였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저술한 〈교훈가〉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논학문(동학론)〉에 “내가 또한 동(東)에서 나서 동(東)에서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나 학(學)인 즉 동학(東學)이라.”라고,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일반적으로는 동학의 명칭에서 서학(西學)에 반대하고 대응하는 차원에서 생겨났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짧은 생각에 머무른다. 어느 사상이나 종교가 탄생할 때 무엇을 반대하고 대응하는 차원에서 나왔다고 정의하면 그 사상에 대한 정당성은 물론 바른 이해를 하는데 너무 협소해진다. 물론 당시 서학과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은 분명 존재했다. 동학이 창도되는 전후에 서학만이 문제가 되었던 게 아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외부 세력 못지않게 조선의 내부문제도 심각하였다. 인간을 구별 짓는 신분차별과 탐관오리의 착취, 외세에 대응하지 못하는 조선조정,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깨어나는 민중, 나라의 주인이라 자각하는 백성들, 인권과 자주,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는 시대적 상황 등 수많은 원인들이 있었다. 3.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사상에 근거하여 일어난 우리 근대사의 반봉건·반외세 자주독립운동이다.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관계는 ‘근원 없는 물이 없고, 뿌리 없는 나무 없다’로 비유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과 전개에서 동학사상이 빠질 수 없다는 의미다.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시천주(侍天主) 즉,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즉천(人卽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또한 수운 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의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는 인내천(人乃天)·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펼쳤다. 4. 동학 집강소 설치와 민주자치시대 동학농민혁명은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무장기포와 황토현 승전, 그리고 장성 황룡에서 전라감영군과 경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또한 장성, 정읍, 태인, 원평, 독배재, 삼천동, 효자동, 용머리고개를 거쳐 1894년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조선 건국자의 본향이자 호남의 수부(首府) 수부(首府)(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도시, 한 도의 감영이 있던 곳)였던 전주성을 무혈입성(無血入城)으로 함락시켰다. 전주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의 수부였기 때문에 전주지명을 확장하여 호남, 즉 전라도까지 포함한다고 봐야 한다. 조선 역사에는 호남의 가치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말이 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록에 나오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만약에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물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전라도는 오늘날의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를 포함하였다. 그 행정구역의 중심지가 전주였다. 당시 전주성 안에는 전라감사가 근무하는 감영 즉 선화당이 있어 명실상부하게 전라도의 행정중심지이자 지방정치를 총괄하였다. 그래서 호남제일성, 호남제일문 등 역사적 건물에도 전라도 상징의 명칭이 따라 붙었다. 바로 그 전라도 행정의 중심이자 조선 왕조, 즉 이씨 조선의 본향인 전주성을 동학혁명군이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를 호령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특히 조선 정부와 동학혁명군이 전주화약을 통해 집강소에 의한 민주자치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폐정개혁안 12개조>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짓게 한다.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 수부인 전주성 점령은 여느 지방도시를 점령한 사건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전라도 각 군현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더욱이 전주성 선화당에 집강소 총본부격의 자치, 통치기구가 있었다. 이는 동학혁명군의 일방적 자치행위가 아니라, 전봉준 총대장, 손화중 총관령 등 혁명군 대표와 조선왕조의 위임을 받은 홍계훈 초토사와 김학진 전라감사 간의 협약에 의해 폐정개혁을 수행한 국가적인 차원이었다. 5. 전주동학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람 전주동학농민혁명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서영도 장군과 이복용 장수 이야기다. 서영도 장군은 완산 접주 출신으로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전주성 밖 완산 집강소 책임자로서 폐정개혁을 혁명적으로 단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혁명 좌절 후 1895년 3월까지 최후 항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남문 밖 초록바위에서 ‘동학거괴 서영도’ 이름으로 공개 총살형을 당했다. 이는 그의 역할과 활동이 대단히 컸음을 보여준다. 이복용 장수는 소년접주 출신으로 완산전투 시기에 선두에서 큰 활약을 하다가 전사하였다. 이복용은 애기접주의 별칭으로, 혁명군의 사기진작은 물론 관군들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였다. 애기접주 즉 소년접주들의 활약은 전국적으로 용맹을 떨쳤는데, 대표적으로 해주접주 김구(김창수), 장흥접주 최동린, 전주접주 이복용 등이 상징적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전주성 점령 과정에서 여성 동학군들이 큰 몫을 해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여성 동학도들이 성안에 몰래 들어가 대포 총구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등 목숨을 건 일화들이 많다. 여성접주의 상징적 인물은 장흥 지역에서 활약한 이소사 여장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6. 2차 동학농민혁명과 항일무장투쟁 일본군의 침략에 맞선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과 대규모로 항쟁한 우금티 전투 패배 후 각 지역으로 흩어지거나 보은, 장흥, 대둔산 최후항쟁처럼 집단적으로 저항한 여러 이야기가 있다. 전주지역도 마찬가지로 최후항쟁 후 쫓기고 죽임을 당한 참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주 초록바위 천변에서부터 다가산 천변에 이르는 지역에서 체포당한 동학의병들은 숱한 죽임을 당했다. 일본 국왕 메이지의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하라"는 특명을 받은 일본군과 그 지휘를 받았던 관군은 초멸작전을 펼쳐 총살형은 물론이고 참수형, 산 채로 불태우는 화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였다. 접주는 물론 무명 동학혁명군 수백, 수천 명이 처형을 당해 전주천의 물이 1개월 이상 핏물로 흘렀다는 말들이 전해오고 있다. 바로 이런 역사의 현장에 기념비는 물론 표지판을 세워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1차 기포, 반외세 2차 기포, 보국안민· 광제창생·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대의를 위해 기포하여 엄청난 피해로 풍비박산이 난 듯 했으나, 천도교로 거듭난 동학은 기미년 3‧1혁명을 통해 제2의 동학혁명으로 전개되었으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 근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세계 혁명사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역사였다. 그 혁명 정신은 독립운동은 물론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5‧18민중항쟁, 6‧10민주항쟁, 최근에는 촛불혁명, 빛의 혁명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분단된 남북통일을 달성해야만 동학농민혁명은 성공한 혁명이 될 것이고 희생된 동학선열들의 후손된 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특히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동학농민혁명의 진정한 명예회복과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될 것이다. 7. 동학농민혁명과 문학의 향기 동학농민혁명을 시나 소설로 펴낸 대표작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동학혁명 1백주년(1994년) 즈음 우리들은 동학농민혁명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가를 말할 때 남한의 송기숙 교수(역사소설 『녹두장군』), 북한의 박태원 선생(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꼽았다. 송기숙 교수는 ‘녹두장군’ 개정판 후기를 통해 '민중이 자발적 합의에 이르면, 그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송기숙 교수께서 살아생전 나와 몇 번 만나 대하소설 『녹두장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작가가 글을 쓸 때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녹두장군』도 원래 10권으로 계획했지만 12권으로 늘어나면서 글이 중간 중간에 늘어졌다”고 고백하였다. 박태원 선생은 『갑오농민전쟁』 집필 과정에서 시력과 전신마비 등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부인 권영희의 도움으로 완성했다고 알려졌다. 박태원은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까지 방대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1894년 당시의 법제와 풍속,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하고 고증하였다 한다. 동학과 관련한 수많은 문인들을 소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분 더 말씀드리자면 신동엽 시인의 대서사시 「금강」을 뺄 수가 없다. 나는 동학 관련 책 중에 「금강」을 가장 신명나게 읽었다. 읽고 또 읽고 한 열 번은 읽은 것으로 기억난다. 「금강」은 실존인물인 전봉준과 가공인물인 신하늬로 대표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동학혁명을 형상화하였다. 「금강」은 동학혁명이 상징하는 민족적 수난과 고통의 과정이 이 땅 역사의 비극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해주며, 새삼 이 땅의 주인이 한민족 스스로이며 민중 그 자체임을 소중하게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큰 의미를 남겼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우리 고장 이곳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 두 분을 소개한다. 하나는 동아일보 신춘당선작 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이다. 안도현 시인은 한 때 나와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그리 길지 않은 시이다. 시 전문을 그대로 소개하고 각자 느낌을 알아서 평가해보기 바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문학동네, 1997년 1쇄, 2002년 4쇄) 중에서. 작가들을 소개할 때 빼먹으면 좀 서운해할 사람이 있다. 바로 이광재 소설가이다. 이광재 작가가 동학 관련 책자 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 등 여러 권을 출간했지만 최명희 선생기념 혼불문학상 수상작 『나라 없는 나라』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나라를 잃어가는 조선 말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동학농민군, 선비들, 정치가들,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치열하고 진지한 삶을 담아냈다는 평가들이다. 이광재 작가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민주주의의 화신이라 불렸던 김근태 선생의 조직에 들어가 함께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동학 관련 유적지도 함께 도보로 탐방했던 기억들이 솔솔 난다. 이 작가는 최근에 장편소설 『청년 녹두』를 펴냈다. 끝으로 여기에 계시는 시인, 소설가 중에 한강 작가의 뒤를 이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분이 꼭 나왔으면 하는 말로 본 강연을 마칠까 한다. 글 송암 이윤영 전주동학혁명전시관 관장. 저서로는 수운 최제우 선생 일대기 『만고풍상 겪은 손』, 동학농민혁명장편소설 『혁명』, 전주역사문화의 자부심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출간 예정. 오마이뉴스 74화 연재작, 동학문화대상 수상작) 등이 있다. -
삼혁당 김영원 선생 순국 106주기 추모식, 임실 삼요정(三樂亭)에서 항일독립정신 되살리다지난 포덕 166(2025)년 8월 26일, 삼혁당(三革堂) 김영원(金榮遠) 선생의 순국 106주기 추모식이 전북 임실군 운암면 삼요정에서 열렸다. 천도교중앙총부, 임실군과 지역사회단체 관계자, 유족, 천도교인, 마을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번 추모식은 선생의 애국 정신과 교육 정신을 되새기는 뜻깊은 행사였다. 추모식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부 행사는 삼혁당김영원선생추모회(이하 추모회) 김태식 사무장의 사회로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김영원 선생 약사 보고 등이 이어졌다. 유족 대표로 나선 김영원 선생의 증손자 김창식 추모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금년은 광복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이 나라가 있고 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김영원 선생을 비롯하여 선열들의 얼을 잠시나마 기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임실군청 유해수 복지환경국장과 임실군의회 장종민 의장 등이 추모사를 전하며, 선생의 삶과 정신이 지역 공동체에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2부 행사는 천도교임실교구 윤철현 교구장의 집례로 천도교 의식으로 봉행됐다. 임실교구 최순자 여성회장의 청수봉전에 이어 심고, 주문 3회 병송이 진행됐으며, 집례자는 매 의식의 의미를 행사 참석자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전달했다. 박인준 교령을 대신해 단상 앞에 선 강병로 종무원장은 추모사를 통해 “선생님의 숭고한 애국혼과 헌신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가슴속에 깊은 울림을 준다”며 운을 떼었다. 이어 강 종무원장은 김영원 선생이 “동학농민혁명과 갑진개혁운동에 이어 3·1만세운동까지, 세 번의 혁명을 몸소 체험하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선생의 호 ‘삼혁당’은 반봉건, 반외세의 뜻을 담은 이름으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증표라는 것이다. 또한 선생이 삼화학교와 창동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천도교 지도자로 박준승, 양한묵 등 제자를 길러낸 삶은 겨레를 위한 참된 사표라고 말했다. “임실은 당시 전라도에서 천도교인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곳이며, 삼요정은 독립운동의 발상지이자 역사 속의 상징적인 공간”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강 종무원장은 이에 덧붙여 “우리는 선생의 천도교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항일독립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 되는 세상,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향해 우리 모두 나아가야 한다.”라는 말로 이야기의 방향을 맺었다. 이와 함께 임실군과 지역사회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선생의 성령이 우리 민족의 정의와 평화의 길에 함께하길 심고한다”고 전했다. 추모사 후 강병로 종무원장, 유해수 임실군 복지환경국장 등 내빈들의 분향이 이어졌고, 마치는 심고로 2부 행사가 마무리됐다. 김영원 선생(1853~1919)은 조선 말 동학 접주로 시작하여 동학농민혁명, 갑진개혁운동, 3·1만세운동까지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교육의 선구자였다. 임실 청웅과 전주에서 삼화학교, 창동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활동했으며, 교육을 통해 민족의 자주독립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체포되어 옥중 순국함으로써 그의 생애는 항일의 삶 그 자체였다. 삼요정(三樂亭)은 선생이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장소로, 전라도 지역 독립운동의 발상지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일제 시절 철거되었지만, 지역사회의 복원 노력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또한 선생이 임실교구장을 하던 임실교당은 천도교 역사와 삶의 공간뿐만 아니라 임실 지역 3.1운동의 중심지로서 종교·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2020년 12월 4일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등록문화재 제799호로 지정되었다. 이번 제106주기 추모식은 삼혁당 김영원 선생의 항일독립정신과 천도교의 교육 정신이 현재에도 삶 속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지역사회와 천도교중앙총부, 임실군의 협력이 기념 공간 보존과 문화재 지정, 교육 현장 활용 등으로 구체적 결과로 이어지고 있음이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