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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종교협의회, 성지순례 첫 일정으로 용담정과 대신사태묘 참례한국민족종교협의회는 5월 15일 오후 1시, 130여 명의 회원이 함께한 가운데 성지순례 첫 일정을 진행했다. 첫 방문지는 경북 경주시 현곡면에 위치한 용담성지와 대신사 태묘로, 이곳에서 참례식을 거행하였다. 참례의식 후, 회원들은 용담정과 용담수도원을 방문하였으며, 이곳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일대기에 대한 최상락 용담수도원장의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회원들은 이번 참례식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한국 고유의 종교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깊게 다졌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 관계자는 "이번 성지순례는 한국 민족종교의 뿌리와 정신을 되새기고, 회원들이 하나로 결속할 수 있는 기회"라며 "앞으로도 전통을 지켜가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성지순례는 용담성지 대신사 태묘를 시작으로 다양한 민족종교 성지를 순례하며 민족 종교의 가치와 정신을 체험하는 일정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사진제공 : 신주민 -
용담 성지를 신혼 여행지로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삼천포교구 선우당 김명숙입니다. 지난 4.12~13일 양일간 경주용담 동학교육수련원에서 율암 신명식 도정님의 주재하에 순원포 동덕들의 워크숍을 계기로 영등포, 수원, 성남, 부산시, 대동, 사천, 삼천포교구의 동덕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토론회를 주관한 도암 선도사께서 각자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교단 발전과 연원 발전을 위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시간을 갖자면서 남성 동덕 한 분, 여성동덕 한 분 이런 순으로 발언토록 진행해 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교단의 현실을 걱정하고 후손들이 신앙을 기피하려는 사회 풍조와 맞물려 걱정하면서 어린이 시일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발전방안을 꾸밈없이 제시해 주셨습니다. 저의 차례가 되어 남편(운암 최도수)을 만나게 되면서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었고 용담으로 신혼여행을 오게된 것을 털어 놓으면서 저의 발언이 길어졌습니다. 저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도 없으며 또한 도력높은 숙덕 어르신들처럼 공부를 많이 하여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나는 신앙생활을 착실히 하고 있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한울님을 제 마음속에 모시고 생활한다는 확신만은 항상 갖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지요. 이제부터 썩 대단하지도 못한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할아버님을 비롯하여 아버님, 그리고 시아주버님들까지 대대로 뿌리 깊은 천도교 집안 자손인 운암 최도수 동덕을 만났던 38년 전은 벚꽃이 만발하고 온 세상이 꽃 천지였던 봄날이었습니다. 저는 경남 고성이란 작은 지역에서 태어나 여중, 여고를 나왔고 대구대학교를 거쳐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무렵 남편의 고향인 삼천포에 처음으로 종합병원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1987년 여름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온 남편을 만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만나면서 대화도중 천도교 사상과 1대 2대 3대 교조이신 스승님들의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그때까지 사실 저는 무신론자에 불과했으므로 솔직히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 먼 나라 이야기로만 여겨졌습니다. 3년여 동안 만나오면서 첫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밤잠을 설쳤으나 그때 저를 데리고 간 곳이 경주 용담정이었습니다. 조그만 트럭을 타고 몇 시간을 달려 겨우 찾아갔던 그곳, 용담정에서 처음으로 이 사람을 계속 만나고 또 미래를 설계한다면 나는 천도교 집안의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다지 가볍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무게감과 저를 짓누르는 뭔가를 느끼며 고민도 많이 했지만, 어느 순간 천도교인으로 살아가는 방법, 신앙생활의 첫걸음과 어떤 공부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답니다. 그렇게 포덕131년(1990) 10월 28일 수운대신사님 탄신일에 맞추어 지금은 환원하신 현암 최영윤 선도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주례사 내용 중 딱 한 가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념일만 되면 생각나는 쩌렁쩌렁하게 힘주어 말씀하셨던 그 내용! 어머님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때 세 양동이의 피를 흘릴 만큼 큰 산고 속에서 너희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부모님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는 것 같이 봉양하라시던 그 말씀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결혼식 후 창녕 부곡 하와이로 신혼여행지를 정했다는 애길 듣고 그나마 기대를 했건만 결국 또 저의 신혼여행지는 경주 용담정이 되었습니다. 샛노란 한복을 차려입고 꽃고무신을 신고 비탈진 길을 둘이서 오를 때 쪽 길옆 산에서 반겨준 건 그나마 날다람쥐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딸 아이가 태어나 두 돌이 지날 무렵 화악산이란 곳으로 수련하러 같이 가자는 큰댁 형님이신 박둘덕 봉신당님의 애길 듣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굽 높은 신발까지 신고 성큼 따라나섰습니다. 그때 아마 총부에서 주최하는 여성회 수련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삼천포교구에서는 윤상선 정미당님을 필두로 다섯 분 정도 참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새벽부터 출발하여 오후 늦게 화악산 밑 민들레 슈퍼 앞에 도착했을 땐 강행군에 이미 지쳐 있을 때였지요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름이라 신발을 벗고 계곡물을 건너서 늦은 저녁이 다 되어야 수도원에 도착했으니까요. 일주일이 일 년처럼 느껴졌던 고행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조언과 아낌없는 격려로 우리 일행을 이끌어 주셨던 정미당 윤상선 내수도님과 봉신당 박둘덕 큰형님의 은덕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첫걸음마를 내딛게 해주신 희생정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화악산 수도원 수련을 기점으로 살아가면서 삶에 지치고 어려운 난간에 봉착했을 때 경주 용담수도원, 가리산수도원, 명동산 수도원 등으로 저의 마음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올해로 12년째가 되는가 봅니다. 남편의 하던 일마저 큰 어려움 속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저 또한 3교대 근무에 온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딸이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 뜻을 가지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보겠다는 이야길 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새벽길을 가방 하나만 챙겨서 나섰습니다. 20여 년 전 한 번 가봤던 길을 묻고 물어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쯤에서야 화악산 입구 민들레 슈퍼 앞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 혼자의 몸으로 어둠 속 깊은 산을 오른다는 공포와 무서움이 먼저 앞서더군요. 마음을 다잡고 소리 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간절한 심고를 드리고 주문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깜깜한 밤, 엎어지고 미끄러지면서 오르길 반복했을 무렵,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궁을기가 보였습니다. 저의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그 깃발을 보는 순간 안도의 눈물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그렇게 오르고 또 오르면서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우면 혹시 산짐승이라도 나올까 봐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워가며 도착한 화악산 수도원. 그렇게 반갑고 고마워서 수도원에 계신 분들 앞에서 소리 내 울어 버렸습니다. 당시 영등포교구 소속 여성회에서 수련 오신 몇 분들과 같이 일주일간의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련 4일째 되던 날 새벽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도 이젠 떳떳한 천도교인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토록 끝도 없고 수도 없이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쏟아지던 폭포수를 처음 보았으며 온몸과 머릿속이 하얗고 저에게 끊임없이 내려와서 안기던 궁을기와 일심이란 글자를 어떻게 글로 표현을 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심(一心)이란 글자를 흰 종이 위에 수도 없이 썼었던 그때 그 감동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숙덕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서 수도원 옆 샘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대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앞날까지 몸살 기운이 있었던 제가 샘물을 다 퍼내고 파랗게 끼 이끼를 씻어내면서 흘렸던 눈물은 분명히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일주일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마지막 날 내려오는 그 산길은 올라갈 때와는 정반대로 뛰어서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울 고시원에서 공부하던 딸의 베개 속에 고이 간직해온 영부 한 장을 정성스럽게 넣어두고 심고를 드린 후 조용히 내려왔고 딸은 첫 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11년 차 시청에 근무 중입니다. 저는 누가 뭐라 해도 분명히 한울님의 은덕이며 조화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이 조금 넉넉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저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한울님이란 든든한 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매년 그러하듯 5월이 왔습니다. 양가 부모님 모두가 환원하셨지만, 그 성령은 항상 저희와 함께하고 계심을 믿기에 5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그 흔하디흔한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한울님 스승님 양가 부모님 모두 사랑합니다. 끝으로 지난 겨울 천도교여성회 동계수련에 남편 운암 최도수 동덕과 참가하여 둘이서 용담정을 오르면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운암, 만약 먼 훗날 어느 한쪽이 먼저 육신이 떠나게 된다고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지금처럼 혼자 용담정을 찾아오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그 옆에는 서로가 함께하고 있다고 믿읍시다. 그리고 가능한 지금처럼 함께 손잡고 육신이 떠나는 날까지 오래오래 천도교인으로서 한울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갑시다." 워크숍을 마치면서 동학 교육수련원이 하루속히 우리 천도교에서 운영해야 주문 수련, 새벽기도 등 자유롭게 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있었고 앞으로 동덕들이 꾸밈없이 토론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자주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주신 용담수도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두서없는 글을 올리게 되어 많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이 또한 한울님의 은덕으로 여기며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나가는 천도교인으로 남겠습니다. 동덕님 사랑합니다. 글, 삼천포교구 선우당 김명숙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
제 104회 어린이날 기념행사 및 어린이 시일식 박인준 교령 축사제104회 어린이날 기념행사 및 어린이 시일식을 맞이하여 박인준 교령이 축사를 하였다. 박 교령은 축사를 통해 천도교가 어린이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강조하였다. 또한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라는 이름을 처음 지었으며, 천도교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박 교령은 "천도교는 어린이들이 따뜻한 사랑 속에서 올바르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해왔으며, 앞으로도 어린이를 위하고 사랑하는 일에 앞장설 것을 약속합니다. 어린이들이 우리나라의 큰 일꾼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청년회 대학생단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박 교령의 축사는 어린이 존중이라는 천도교의 핵심 가치를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천도교와 동학혁명기념일동학혁명에 대한 교단의 인식 천도교의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은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였다. 동학혁명 직후에는 ‘반역’ 또는 ‘역적’이라는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고향을 등지거나 은신생활을 통해 목숨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동학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갑진개화운동과 3.1운동 등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주제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단에서는 동학혁명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동학혁명과 관련된 가장 앞선 기록은 『천도교회월보』 116호에 게재된 「천도교 61년 연보」의 ‘포덕 35년조’가 아닌가 한다. 당시 이 기록에는 ‘동학란’ 또는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포덕 36년조’에 의하면 ‘전봉준동란(全琫準動亂)’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란’이 가지는 의미는 “폭동, 반란, 전쟁 따위가 일어나 사회가 질서를 잃고 소란해지는 일”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최근까지도 우리의 익숙한 ‘6․25동란’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관리(官吏)의 학정(虐政)을 개혁(改革)하고 생민(生民)의 도탄(塗炭)을 구제(救濟)”로 규정하고 있다. (민영순, 「천도교 61년 연보」, 『천도교회월보』 116호, 1920.4, 28쪽.) 이와 같은 ‘동란’의 인식은 2년 뒤인 1922년 의암성사가 환원하였을 때는 ‘갑오(甲午)의 혁명(革命)’ 또는 ‘갑오혁명(甲午革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앞선 ‘동란’의 인식보다는 상당히 진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계곽청(政界廓淸) 민권옹호(民權擁護)의 기하(旗下)에서 혁명(革命)의 거화(炬火)를 거(擧)하다”라고 하여 혁명으로서의 인식을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성사일대기」, 『천도교회월보』 임시호, 1922년 5, 8-9쪽.) 특히 이때의 ‘갑오혁명’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이후 역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1924년 황의돈이 『개벽』에 기고한 글에서는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식 또한 ‘민중운동’ 또는 ‘혁명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1920년대 초기의 ‘동란’과 ‘혁명’의 용어는 이후에는 좀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즉 ‘동란(東亂)’, ‘동학란(東學亂)’, ‘혁명(革命)’, ‘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 ‘민중혁명(民衆革命)’, ‘갑오혁명운동(甲午革命運動)’, ‘갑오혁명란(甲午革命亂)’, ‘동학당란(東學黨亂)’ 등으로 다양하게 또 혼용되어 표기되고 있다. 그리고 『천도교창건사』에서는 ‘갑오동란(甲午東亂)’과 ‘갑오동란(甲午動亂)’으로 혼용되고 있다.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1934, 70쪽(제2편).) 이는 전통적 역사인식에서 종교적 의미의 혁명뿐만 아니라 정치투쟁과 계급투쟁이라는 의미에서도 ‘혁명’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동학혁명에 대한 용어는 다양하고 혼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나 인식에 대해서는 ‘혁명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으로 천도교청년당은 1926년 4월 7일 제32회 동학혁명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천도교청년당이 동학혁명 기념식을 갖기로 한 4월 7일은 ‘황토현전투에서 동학군이 승리한 날’이다. 「갑오동학난의 자초지종」에 의하면, 4월 7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4月 7日에 古阜 42里 되는 黃土峴에서 全琫準軍과 接戰하여 死傷 千餘를 남기고 餘地없이 敗退하니 이것이 東學革命運動의 첫 烽火이었다.(일기자, 「갑오동학란의 자치자종」, 『개벽』 68, 1926.4, 39쪽.) 즉 천도교청년당은 동학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처음으로 격파하고 대승한 날을 동학혁명 기념일로 보았고, 이날 기념식을 갖기로 한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교단에서 처음으로 동학혁명 기념식을 봉행하려고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기념식이 거행되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1926년 5월호 『개벽』에 동학혁명 기념식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이에 비해 4월 5일 천일기념식을 봉행하였다는 기록은 있다. 동학혁명 기념식도 거행되었다면 당연히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학혁명 기념식을 가지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은 두 번 다시 가져보지 못했다. 이는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천도교청년동맹은 원래 ‘동학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던 적이 있었다. 해방 후 첫 동학혁명 기념식 개최 일제강점기 동학혁명 기념식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였던 천도교단은 해방 후 1947년 2월 9일 첫 기념식을 봉행하였다. 당시의 동학혁명 기념식에 관한 언론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54년 전 민주건국을 위하여 빈천한 농민대중을 중심으로 봉건사회를 파타하고 궐기한 역사적 혁명전쟁을 일으킨 동학혁명운동을 기념하고자 천도교청우당중앙위원회에서는 오는 9일 하오 1시에 천도교 강당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다 한다.「동학혁명운동의 54주년 기념」, 『대한독립신문』 1947년 2월 7일자. 53년 전 우리 조선의 봉건사회를 타도하고 서민 부녀 하층계급을 타파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봉기한 동학혁명기념일을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기념행사위원회에서는 지난 9일 하오 1시경 시내 천도교당에서 회원 수백 명 참석 아래 거행되었는데, 먼저 이우영 씨 사회로 시작되었고 축사로 본사 사장 최동오 씨의 열변에 박수 열광으로 종막을 지은 다음 동학혁명 당시 당원이었던 오지영 씨의 동학운동 회고담이 있은 후 기념행사 위원이 오지영 씨에게 기념품 기증이 있은 다음 오후 4시 반경 폐회되었다.「조선민주혁명의 선구 동학투쟁 기념식 성대」, 『대동신문』, 1947년 2월 11일자. 이 두 기사에 의하면, 해방 후 첫 동학혁명 기념식은 2월 9일 중앙대교당에서 거행되었다. 기념식 행사를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장관을 역임하였고 대동일보 사장이었던 최동오의 축사와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던 오지영의 회고담이 있었다. 하지만 천도교청우당은 왜 2월 9일에 기념식을 가졌는 지에 대한 해명이 없다. 일반적으로 동학혁명하면 기념일로 고부기포(1월 10일), 백산기포일(3월 21일), 황토현전승일(4월 7일) 등이 연상되는데, 2월 9일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고부기포가 일어난 날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2월 9일경으로 추정된다. 이후 동학혁명과 관련된 기념식이 역시 거행되지 않았다. 다만 동학혁명 기념식에 앞서 1946년 10월 20일 천도교청우당 홍천지부의 주최로 홍천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정선 등지에서 희생된 동학혁명군을 위령제를 하였다. (「갑오운동 희생자 위령제 거행 준비」, 『대동신문』 1946년 10월 19일자.) 동학혁명 67주년에 사회적 합의로 ‘기념일’ 제정 해방 후 한 차례 동학혁명 기념식을 가진 교단은 1961년 4·19혁명을 계기로 동학혁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기념일 제정을 서둘렀다. 이는 그동안 교단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을 적정한 날을 정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방편적으로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제강점기에는 4월 7일 황토현전승일에, 해방 후에는 2월 9일에 각각 기념식을 거행한 바 있듯이 특정한 날로 기념일로 정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4·19혁명을 계기로 혁명정신이 사회적으로 고양되자 교단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하여 동학사상을 사회적으로 확산하고자 하였다. 즉 “동학사상은 우리 민족의 사상이요 인간평등의 사상이다. 동시에 동학혁명운동은 안으로 부패폭정을 혁신하고 밖으로 외세침략을 반거한 운동이다. 이 혁명사상은 세계혁명사상 어느 것에 비하여도 가장 새로운 것이었다. 이렇게 성스럽고 새로운 혁명운동이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에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으로부터 백만 대중이 의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혁명의 의의를 국민 전체의 사상으로 계속 거양하지 못하고 반세기 동안을 지하에 묻힌 옥석과 같이 민중의 머리에는 무관심 몰이해하고 지내왔다” (「동학혁명 67회 기념식」, 『신인간』(속간 19호), 1961.4, 14쪽.)라고 하여, 그동안 동학혁명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를 스스로 자인하였다. 이에 따라 교단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교단은 1961년 3월 동학혁명기념준비위원을 구성하여 혁명의 의의와 약사를 밝히는 한편 동혁혁명 기념일을 제정하여 혁명의 기념을 민중과 더불어 지키고 이를 계승키로 하였다. 이에 교단은 3월 19일 동학혁명기념준비위원을 대표하여 신숙(申肅, 동학당 대표위원), 장기운(張基云, 천도교 교무관장), 오익제(吳益濟) 등 3인과 사계(斯界)를 대표하는 김상기(金庠基, 서울대학교 교수), 장도빈(張道斌, 단국대학교 교수), 최인욱(崔仁旭, 작가), 신일철(申一徹, 고려대학교 강사)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에서 무려 4시간 동안 좌담회를 갖고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였다. 조선일보사는 좌담회를 갖게 된 동기를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에 의의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오늘 (3월) 21일은 민중운동의 전통으로 깊이 새겨야 할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68년 되는 날이다. 민중의 힘이 과시된 이 운동은 당시의 봉건제와 침략주의에 항거해서 봉기했던 것으로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데 그 정신이 있었다. 이를 즈음해서 천도교중앙총부와 본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인 동 기념행사의 하나로서 사계학자들을 모시고 동학혁명의 뜻을 살피는 좌담회를 다음과 같이 마련했다. 오늘날까지는 이 혁명을 기념할만한 일자 표증이 확실치 못하였던 바, 최근 여러 기록을 수집 분석해본 결과 격문을 발표하고 봉기한 날이 3월 21일이라는데 확인되어 처음으로 기념행사를 갖게 된 것이다. (「좌담회 갑오동학혁명의 의의-그 67주 기념일을 맞아」, 『조선일보』 1961년 3월 20일자.) 이 기사에 따르면, 그동안 동학혁명을 기념할 만한 일자가 제대로 없었는데, 역사적 사료를 분사해본 결과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로 제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명칭도 ‘동학혁명’이라고 확증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로 제정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오익제) : 기록에 보면 고부에서 처음 농민봉기가 자연발생적으로 갑오년 정월에 일어났다가 이용태가 탄압을 심하게 되자 3월에 만여 명의 동학군이 일제히 궐기된 것으로 되어있더군요. 그런데 최인욱 선생께서는 「草笛」을 쓰고 계신데, 거기에 3월 21일 날 동학혁명이 본격적으로 거사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혹시 고증자료라도.... 최인욱 : 저는 소설을 쓰면서 이 역사를 제 주견 하에서 다 쓸어보았는데요 정월의 고부의 봉기와 3월 동학기포는 단계를 짓는 것이 어떨까 해요. 물론 정월 고부의 봉기가 동학혁명의 전초적 조건 즉 전초전의 역할이 되었지만 정월 고부의 그것은 그 전년에 빈번했던 민란과 성격이 거의 같고 다만 규모가 크다 뿐이지요. 그래서 과거에는 단계를 짓지 않고 정월 고부의 봉기를 그대로 하나의 동학의 내용으로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보면 그 정월의 고부민란이 그대로 수습되지 않았는 데서 점점 그것이 확대되어 가지고 3월에 이르러 드디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 호남의 여려 동학접주들이 격문을 발하고 소위 의식적으로 기포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정월 고부의 봉기는 민란으로서의 성격이었고 동학혁명은 소위 기포형식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또 격문으로 보나 확실히 3월에 와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헌들을 고증해 볼 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3월 21일로 소설에 쓰게 된 것은 고부민란에서부터 경과를 시간적으로 따져서 추상적으로 인정했는데 지금 여러 군데 기록에서 3월 21일이라는 것이 고증적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것 같은데... 사회 : 기록에 보면 「동도문변」과 또 당시의 일본공사관기록에 3월 21일로 드러나더군요. 최인욱 : 그 시일 문제는 다른 문헌이 나오지 않는 한 대단히 유력시 되고 있습니다. 김상기 : 그런데 그대의 기록은 양력을 표준으로 한 것도 있고 음력을 표준으로 한 것도 있어요. 정월 고부봉기의 중심인물이 역시 전봉준으로 볼 수 있고 이것이 졸창간의 일이 아니라 그 전해 계사년 겨울부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소위 동학의 남접 중진들의 움직임이 있었고요. 그 1월설에 있어서는 저도 30여 년 전에 알아보았습니다만 기록에도 보고 또 그때 난을 겪은 고부지방의 부호들에게 물어보고 특히 전봉준의 처숙이 송희오(宋喜五)인데 그의 손주 손용호라는 분이 정월 14일로 얘기해요. 이렇게 정월에 일어나고 고부에서 조병갑을 쫓은 후 박원명이가 임명되었는데 아주 부드럽게 다스려서 모두 갈아왔다가 이용태가 안핵사로 와가지고 포악한 짓을 하니까 다시 3월에 일어났다고 알려지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좀 더 신중하게 일자를 고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일철 : 김 선생님이 쓰신 책 가운데 『동학과 동학란』을 보면, 1893년 겨울부터 표면화했는데 그 만석보를 파괴한 것이 봄에 하지 않았나요. 봄이면 1월과 3월 사이로 볼 수 있는데... 김상기 : 만석보 문제는 정월 14일로 저는 기억되는데요. 사회 : 그러면 만석보 파괴 일자 문제는 따로 기록에 볼 수 있으니까 별문제가 아닌가요. 정월에 고부에서 봉기한 것도 사실이고 3월에 또한 기포한 것이 사실이고 6월에 집강소 시대로 들어갔다가 9월에 재기포한 것이니까요. 이 기포일자 문제는 이 정도로 그치면 합니다. 최인욱 : 결국 정월에 봉기했다가 백성에게 심한 피해가 오는데서 다시 본격적인 계획적인 조직적인 하나의 기포가 거기서부터 발단된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역사적 관찰에 있어서 기포의 단계를 어디서부터 짖느냐 하는 것은 그 연구하는 분들의 하나의 견해차이가 될 수 있겠습니다. 장도빈 : 그런데 애초부터 고부의 봉기가 전봉준의 지도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봉준은 처음부터 고부봉기를 일으켜 가지고 혁명을 이끌어 나가려는 사상을 가진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조사해보면 이것은 전봉준의 계획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좌담회 갑오동학혁명의 의의-그 67주 기념일을 맞아」, 『조선일보』 1961년 3월 20일자.) 위 좌담회 내용에 의하면, 동학혁명기념일을 3월 21일로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논점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바로 동학혁명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점이다. 최인욱은 3월 기포, 김상기는 신중론, 장도빈은 고부기포에 각각 동학혁명의 기점을 두고 있다. 즉 최인욱은 고부기포를 동학혁명의 전 단계로 인식하였으며, 김상기는 고부기포와 3월기포의 연결과정에서 좀 더 역사적 고증을 통해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장도빈은 전봉준의 역할을 볼 때 고부기포를 동학혁명의 기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혁명기념일은 ‘3월 21일’로 정하는 데는 무난하게 합의를 도출하였다. 당시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천도교단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김상기와 장도빈, 그리고 문학계를 대표하는 최인욱, 신진학자인 신일철 등이 참여하여 확정하였고, 이를 언론계인 『조선일보』가 뒷받침하였다. 동학혁명기념일 제정 후 첫 기념식 이와 같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처음으로 정해졌다는 점에서 기념일 제정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고 가진 첫 기념식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민족저항운동 사상 빛나는 한 전통으로서 기리 새겨야 할 갑오동학혁명 제67주년 기념식이 지난 3월 21일 천도교당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천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상오 11시 장기운씨 사회로 식이 진행되고 이영복 씨의 개회사와 오익제 씨의 약사보고에 이어 신숙씨의 기념사가 있었으며, 곽상훈 민의원 의장과 조한상 씨(정계 대표) 그리고 장도빈(학계 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식이 끝난 후에 이항녕 선생과 최인욱 선생 및 신일철 선생 세 분을 모시고 기념강연회가 있었는데 모인 청중이 시종 감격하여 마지않았다. (「갑오동학혁명 기념-스냅」, 『신인간』(속간 19호), 1961.4, 표지 3쪽.) 기념일 제정 이후 첫 기념식은 1961년 3월 21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천도교인과 서울시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천도교단을 대표하여 좌담회에 참석하였던 장기운, 신숙, 오익제 등이 주도하였으며 외부 인사로는 민의원 의장 곽상훈, 정계를 대표한 정한상, 학계를 대표한 장도빈 등이 축사를 하였다. 그리고 기념식 후에는 최인욱, 이항녕, 신일철 등 제씨가 기념강연을 하였다. 첫 기념식은 사회적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계, 학계, 문학계 등에서 대표들이 참석하였던 것이다. 첫 기념식 이후에도 동학혁명 기념식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제정된 동학혁명기념일인 매년 3월 21일에 개최되었다. 제68주년 동학혁명 기념식은 3월 21일 12시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이지형 국민운동본부 차장이 축사를 하였다. (「동학혁명 68주년 21일 기념식 거행」, 『조선일보』 1962년 3월 21일자.) 69주년 기념식은 3월 21일 오후 1시 국민회당에서 열렸다. (「21일 기념식 동학혁명 69주년」, 『동아일보』 1963년 3월 21일자.) 69주년 동학혁명기념일을 맞아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동학혁명의 의의를 밝힌 바 있다. (3월) 21일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중혁명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의 불씨를 던졌던 동학혁명의 제69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조 봉건사회가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병든 내적 모순을 드러내자 뿌리 깊게 얽히었던 민중의 불만이 약 30년간의 ‘민란의 시대’를 연출,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새 질서,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회혁명으로 번져 갑오경장이란 역사의 새 물결을 가져온 것이 바로 동학혁명이다. 착취만을 당하던 힘없는 농민들이 동학당을 지도자로 벌떼처럼 일어났던 이 혁명은 하나의 농민전쟁이었고 계급전쟁이었으며 또한 무력적인 사회혁명임이 분명했다. 머리와 허리에 잡색포를 두르고 손에는 칼, 창과 총기를 든 채 황색 깃발을 나리며 전라도로 충청도로 삼남 일대를 장악하고 서울로 강원도로 달려 연 3백만 동학군이 한결같이 부르짖었던 외침은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자’는 것이었다. (「동학혁명 21일은 제69주년」, 『경향신문』 1963년 3월 20일자.) 이와 같은 동학혁명의 의의를 기념하는 동학혁명기념일은 3월 21일을 기해 매년 기념식을 갖고 혁명 정신을 기렸다. 다만 처음에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거국적인 기념식이 되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도교단의 기념식으로 축소되었다. 그렇게 진행되어 오던 동학혁명 기념식은 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 1994년 3월 21일 오전 11시 탑골공원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교단은 동학혁명 기념행사에 보다 적극 나서야 1994년 동학혁명 1백주년을 계기로 일부 동학혁명 관련 단체에서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사회적 합의에 따라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고 기념식을 가져오던 천도교단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또한 천도교단은 이러한 논의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혼란을 거듭하였고 관점에 따라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비롯하여 관련 단체의 추천을 받은 인사들로 ‘동학농민혁명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념일 제정을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견과 논란을 거듭하였다. 천도교단은 어느 동학혁명 관련 단체보다도 먼저 사회적 합의를 거쳐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동학혁명기념일을 사회적으로 확산하지 못함에 따라 오늘날 이와 같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의 논란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제 천도교단은 어느 누구보다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였던 그 역사성을 확고히 지켜내야 한다. 그것만이 동학혁명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선열들을 올바르게 기리는 것이며, 그 혁명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
5월 천도교 어린이 시일식, 가정의 달 맞아 카네이션 감사패만들기 진행포덕 166년 5월 11일, 가정의 달을 맞아 천도교는 다섯 번째 어린이 시일식을 봉행했다. 이번 시일식은 수원교구에서 김경진 어린이가 집례를, 김지후 어린이가 경전 봉독을 맡았으며, 설교는 도경교구 정민선 동덕이 진행하여 어린이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시일식은 오전 11시부터 11시 30분까지 이어졌으며, 이후 11시 30분부터 12시까지는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청년회와 대학생단이 준비한 이번 활동은 ‘카네이션 감사패 만들기’로, 참가 어린이들은 실시간 화면을 보며 감사패를 직접 조립하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은 짧은 편지를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행사에 필요한 교구와 재료, 간식은 사전에 각 가정으로 배송되어, 참가 어린이들은 집에서도 안전하고 즐겁게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카네이션 감사패를 부모님께 선물하는 흐뭇한 시간을 갖도록 하였다. 사진 및 자료, 천도교청년회 제공 -
수원교구 하루수련 '도심 속 수도원' 및 가정의 달 행사천도교 수원교구(교구장 지암 안춘보)는 지난 5월 10일 교화부 주관으로 ‘도심 속 수도원’ 하루 수련을 진행했다. 이날 수련은 새벽 5시 기도식으로 시작되어 새벽, 오전, 오후로 나뉘어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수련 중에는 대교당 시일설교 영상 중 공암 박돈서 공주교구장님의 ‘깨달음의 노래’, 오암 박길수 동덕의 ‘천년의 꿈’ 등을 시청하었으며, 교인들은 가로쓰기 경전 <동경대전>을 함께 윤독하고 상향배례를 올렸다. 이날 하루 수련의 일정은 오후 5시에 마무리되었다. 이번 수련에는 교인 14명이 참여하여 주문과 수련을 통해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정신을 되새겼다. 특히 영등포교구 정준규 동덕이 동참하여 의미를 더했다. 하루 수련은 5월부터 10월까지 매월 한 차례씩 열릴 예정이다. 한편, 수원교구는 5월 11일 시일식 후 가정의 달을 맞아 교구 숙덕 어르신들을 위한 행사를 진행했다. 행사에서는 ‘천지부모’의 뜻을 되새기며 교인들이 어르신들께 큰 절을 올렸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작은 선물과 ‘어머니의 마음’ 노래를 전달했다. 기사 및 사진, 천도교수원교구 제공 -
5월부터 매주 환급! 디지털 온누리로 취약상권 살린다중소벤처기업부(장관 오영주, 이하 중기부)는 오는 5월 11일(일)부터 9월 30일(화)까지 약 5개월간 전국 전통시장 및 골목형상점가 등 취약상권 대상으로 디지털 온누리상품권 환급행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2025년도 제1회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확보한 예산으로 경기침체로 위축된 취약 상권의 매출 회복과 내수 진작을 목표로 마련됐다. 5월 11일(일)부터 9월 30일(화)까지 약 5개월간 진행되며, 디지털 온누리상품권(모바일·카드형)으로 결제한 소비자에게 회차별 누적 결제금액의 최대 10%를 동일한 디지털상품권으로 환급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총 20회차로 운영되며, 회차별로 1인당 최대 2만원까지 환급받을 수 있다. 최소 1만원 이상 결제시 1천원 단위로 환급이 적용(1천원 미만 절사)되며, 지급은 각 회차 종료 후 약 일주일 뒤부터 ‘선물하기’ 기능을 통해 순차적으로 이뤄진다. < 결제금액별 디지털상품권 환급금액 예시 > 결제금액 10,000원 33,000원 67,000원 100,000원 134,000원 200,000원 이상 환급금액 1,000원 3,000원 6,000원 10,000원 13,000원 20,000원 지급한 날로부터 30일 이내 선물하기 등록을 해야하며, 30일을 넘기면 환급액은 소멸된다. 보유금액이 200만원을 초과할 경우 환급액을 수령할 수 없고, 환급액만큼 사용한 후 선물하기 수령이 가능하다. 이번 행사는 매주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1회차로 정해 운영하며, 회차별 운영 요일을 통일함으로써 소비자 혼선을 줄이고, 지속적 참여를 유도해 전통시장과 상점가의 매출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다. < 회차 운영 일정 > -
광복의 빛, 통일의 길을 밝히다통일부와 교육부는 5월 19일(월)부터 25일(일)까지 “광복의 빛, 통일의 길을 밝히다”라는 슬로건으로 제13회 통일교육주간*을 개최한다. * 국민의 통일의지를 높이기 위해 ’13년부터 매년 5월 넷째 주를 통일교육주간으로 지정 통일부는 올해 처음으로 통일교육주간 슬로건 공모전(3.6.~3.21.)을 실시했다. 1,271명이 2,342건을 응모했으며, 그 중에 1등을 한 “광복의 빛, 통일의 길을 밝히다”가 제13회 통일교육주간 슬로건으로 채택되었다. 이 슬로건은 80년 전 역사의 어둠을 뚫고 빛을 되찾은 광복의 그날처럼 온 국민이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통일의 길을 밝혀가자는 의지를 담고 있다. 통일부는 통일교육주간을 계기로 5월 19일(월) 국립통일교육원을 최초로 전면 개방한다. 지금까지는 원내 행사 참여를 사전에 신청해야만 국립통일교육원에 입장할 수 있었는데, 이번 행사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방문할 수 있다. 통일교육주간 개막식(오후 2:00~3:00)과 어린이 통일골든벨(오후 3:30~4:30)이 원내 잔디마당(실제 베를린 장벽 전시)에서 진행되며, 이 외에도 지역주민, 특히 어린이들이 놀면서 배울 수 있는 놀이체험 행사가 오후 1:00~6:00까지 운영된다. AI 로봇 ‘바라미’와 대화할 수 있고, 광복 80년 기념 「통일 마카롱」 및 「통일빵」도 받을 수 있다. 탈북민 쉐프 6명이 즉석에서 요리한 따끈따끈한 북한 고급요리(녹두지짐, 떡만두, 아바이순대)도 제공한다. 한편, 정부가 청년들에게 먼저 다가간다는 의미에서 젊은층 유동인구가 많은 신촌 스타광장과 홍대 레드로드 R4에서 ‘2030 팝업 부스 행사’가 운영된다. 행사는 5월 20일(화)과 5월 21일(수)에는 신촌 스타광장에서, 5월 23일(금)에는 홍대 레드로드 R4 퍼포먼스존에서 진행된다. 그 외 통일부는 통일교육연구센터 학술회의, 통일부 어린이·중학생 기자단 발대식, 50초 통일 숏츠 영화제 시상식, 글로벌 통일체험 발대식 등을 진행하며, 전국 각급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이뤄지는 각종 통일교육 활동을 지원한다. 5월 21일(수)에는 국립통일교육원 내 통일교육연구센터가 「국제질서 변화와 글로벌 통일교육」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5월 22일(목)에 어린이·중학생 기자단 발대식을, 5월 23일(금)에는 50초 통일 숏츠 영화제 시상식을 개최한다. 5월 23일(금)~24일(토), 1박 2일에 걸쳐 글로벌 통일체험 참가자 등을 대상으로 글로벌 통일체험 발대식을 진행한다. 전국 각 지역에 위치한 지역통일교육센터와 지역통일관에서도 통일교육주간을 계기로 지역별 특성에 맞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지역통일교육센터는 △통일교육 홍보부스를 운영(서울센터)하고 △안양시 청소년 축제에 참여(경인센터)하며 △음악회, 토크콘서트 등을 개최한다. 지역통일관은 ‘가정의 달’과 연계하여 가족과 같이 참여할 수 있는 통일교육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제13회 통일교육주간 누리집(www.uniweek2025.com)에는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각종 학습자료가 제공되며, 통일교육주간 7일 동안에는 집중적으로 온라인 이벤트가 실시된다. 통일부 장관은 “통일교육주간을 통해 미래세대 등 전 국민이 통일과 광복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고 통일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근대 시기 천도교와 3.1혁명-근대를 관통한 천도교의 ‘독립정신’(1)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1. 문제의 제기 한국 근대의 시작점을 무엇으로, 혹은 어느 시기로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제다. 근대를 어떤 기준으로 이해하는지에 따라 당시 한국사회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게 인식될 수밖에 없고, 인과적 결과물인 오늘날의 사회적 성격 역시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구자에 따라 근대라는 사회의 질적 변화를 내부의 주체적 동력이나 주관적 요소에서 찾을 수도 있고, 서구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나 정치제도 등 타율적으로 강제되거나 이식된 외부적 요소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본고는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는 주체적인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으면 한국의 근대와 그 성격을 올바르게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한국의 근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한국의 근대, 한국적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서구에 대한 내적 대응이 사상적으로 정리되고, 운동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1860년대에 주목해야만 한다. 기존의 주류사학이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은 개항과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지만,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외부의 기계적 작용과 계기만을 주목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근대를 설명하는 것으로 한국의 근대는 절대 설명될 수 없다. 반드시 내재적이고 주체적인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하고, 그 변화가 내부를 질적으로 바꾸는 질적인 변화라는 것이 명징하게 설명되어야만 홖도한 근대의 시작점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한국의 연구자 다수가 1876년에 주목한 것은 서구사회를 모델로 제시한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론’을 교조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동양 및 한국사회에 적용한 결과다. 단지 일본과 체결한 조약 하나가 한국사회 내부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인식은 역사적 사실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교조적 인식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강화도조약’ 때문에 조선에 갑자기 서구의 자본주의가 들어오지 않았고, 조선의 신분질서가 무너지지 않았으며, 정치, 사회제도 등의 급격한 변화가 찾아오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엇보다 ‘강화도조약’ 자체가 조선 민중의 의식이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구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세계질서는 1876년 개항 이전에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을 통해 이미 1860년대에 조선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고, 이 충격파는 중국이 이미 서구의 식민지로 몰락해가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공포와 함께 배가되었다. 한국사회 내부는 이 충격파로 인해 근본적인 성격의 변화, 즉 변증법이 설명하는 사회의 질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본고는 이 질적 변화를 따라 한국의 근대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특히, 지나치게 과소평가된 동학의 근대적 의미와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사회 근대 초기의 궤적을 쫓아가 보고자 한다. 동학이 주도한 이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동학의 자주·평등사상의 전파로 한국의 근대가 시작되었고, 이 자주·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한반도 최초의 근대 혁명인 동학혁명이 폭발하여 조선 민중의 의식을 근대로 견인하였으며, 이 근대의 흐름이 대동단결과 평등·평화라는 한국적 근대의 가치를 표방하며 근대민족으로서 한민족이 탄생한 3.1혁명으로 귀결되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동학이 주도한 한국적 근대의 여정 1) 한국적 근대의 태동-동학의 창시 1860년대 조선은 본격적인 충돌의 방식으로 서구와 대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사회가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서구 열강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정해진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단지 시기가 문제였을 뿐이다. 조선의 성리학적 신분질서와 정치제도, 특히 60여 년 지속된 세도정치는 조선의 근간인 농민들의 삶을 근본까지 파괴하고 있었고, 기득권에 집착하던 집권세력과 양반, 유생들은 성릭학적 질서를 유지하자는 위정척사론의 선동에 경도되어 혁명적 내적 변화와 개혁에 쓰여야 할 귀중하고 긴박한 시간을 허송세월로 낭비하고 있었다. 1860년대 서구의 충격파에 대한 조선사회의 내적 대응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양반, 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위정척사론의 논의와 그것을 실천하는 사회적 운동으로서 위정척사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평등을 지향하는 종교 사상이자 혁명 사상인 동학이 창시되어 민중들에게 급속히 전파되면서 한국사회에 강력한 파장을 미치기 시작하였고, 점차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위정척사론은 풍양조씨 일가가 서구세력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공격함으로써 집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활용한 정치적 전술이었다. 집권세력이 된 풍양조씨 가문의 선동에 호응한 유생들은 이미 1930년대부터 위정척사사상에 강하게 경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노사학파’를 이끌며 위정척사 논의를 주도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1839년에 두 편의 시를 통해 서구를 배척하고 춘추대의를 밝혀야 한다고 노래하였다. (「乙亥冬以洋胡邪說肆行 命致祭儒賢諸院 金平澤在晉執事華陽斐然有述 遙步原韻二首」.) 기정진은 서구의 문물과 종교는 성리학자가 지켜야 할 춘추대의를 훼손하는 사악한 것으로 마땅히 파괴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성리학적 가치는 세상의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가치였고, 조선 사회 유생 대다수가 이러한 가치관에 경도되어 있었다. 기정진은 천주교뿐 아니라 불교와 노장사상 역시 이단으로 배척하였다는 점에서 단지 서구나 외세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배척하는 유교 원리주의자이자, 중화적 가치에 함몰된 광신도였다. 조선의 성리학이 ‘존화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정척사사상이 자주적이거나 반 외세을 표방한 사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위정척사사상은 단지 집권세력인 풍양조씨나 대원군 등이 유생들과 함께 부당한 권력과 성리학적 신분질서가 가져다주는 이익을 나누기 위해 결합한 이익공동체였을 뿐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첫째, 외부적으로 서구열강의 침략을 막아내고, 둘째, 내부적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혁파하고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천지가 개벽할만한 개혁을 수행해야만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일어난 일본의 메이지쿠데타 * 이 사건을 ‘메이지 유신’으로 부르는 것은 옳은 관점이라 할 수 없다. 초슈와 사쓰만의 하급무사들에 의해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일왕이던 고메이(孝明)은 근왕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들 하급무사들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에도 막부를 무력으로 전복시켰으므로 쿠데타로 보는 것이 정확한 관점이다. 이들 하급 무사들은 집권 이후에도 군벌로서 세력을 유지하였고, 이 세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장우순의 「근대국가 일본의 형성과정과 그 구조 - 전통에서 소환한 근대 -」(『동아시아고대학』 53, 동아시아고대학회, 2019.)를 참조). 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가 내부의 혁명적 변화 없이 서구에 맞설 역량을 키운다는 것 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혁명적 개혁 없이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지 못할 것이고,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한다면 식민지로 전락하여 혁명적 개혁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두 과제는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과제이면서 상호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는 거대한 하나의 전략적 과제였다. 위정척사사상 역시 이러한 과제에 대한 조선사회 내부의 대응이었다. 위정척사사상을 기반으로 한 위정척사운동은 1866년 기정진이 ‘병인소’를 올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기정진은 이 시기 지속적으로 관직을 제수받으며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유림을 회유하고 대원군의 정책을 지원할 것을 요구받았다. 병인양요를 경과하면서 ‘병인소’는 당시의 많은 유생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화서학파 *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의 유생들을 일컫는다.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 역시 화서학파의 문인이었다. 의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당시 유생들의 위정척사은 서양을 과소평가하였을 뿐 아니라 서양의 영향으로 급변하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현실 역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협소한 시각이었지만,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 아래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이 보여줄 수 있는 당연한 인식으로 신분질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척왜양이(斥倭攘夷)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역량이 필요했지만, 조선의 역사가 줄곧 그러했듯이 유생들은 중국마저 저버린 중화의 가치에 목숨을 건 채 입으로만 어양(禦洋)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양을 위해서는 민력과 국력을 급속하게 신장시키는 혁명적 개혁이 필요했다. 일본을 능가하는 혁명적인 개혁을 통해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할 책무가 있었던 조선의 여론 선도층 유생이 개혁에 앞장서기보다 개혁을 저지하고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위정척사론을 주창한 것은 나라와 민중을 멸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중대한 시대적 착오였다. 위정척사운동은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1873년 이후 사실상 지속될 동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유생들에게 위정척사사상은 매우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미쳤고, 유생들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대응하여 일으킨 을미의병, 을사조약, 정미7조약에 대응하여 일으킨 1905년의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 등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의병의 활동과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을미의병(전기의병)→을사의병(중기의병)→정미의병(후기의병)으로 변모하면서 초기에 매우 강력하게 표방되었던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지키기 위한 ‘기득권 수호’라는 집단이기적인 성격이 점차 옅어지고, 점차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성격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이 ‘보국안민’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일제에 결사 항전하였던 정신으로부터 일부나마 영향을 받은 결과로 실제로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에는 평민 출신의 의병장들이 활동하였고, 의병조직에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던 농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860년 서구의 침략에 대해 양반, 유생들이 위정척사사상에 근거하여 운동을 전개하였다면, 평민들 사이에서는 천지개벽에 가까운 혁명적 사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시천주(侍天主)사상’과 한울님을 경배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종교사상이었지만, 그 자체로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를 거부하는 혁명적, 사회적 사상이었고,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여 ‘보국안민’을 우선한 실천적 구국 사상이기도 하였다. 시천주(侍天主)는 모든 사람이 그 내부에 이미 천주를 모시고 있음을 천명한 사상으로 이후 2대 교주인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한국적 근대의 전략적 가치인 평등 평화의 이념으로 정착하였고, 최종적으로 3.1혁명을 통해 한민족의 근대적 가치와 전망인 ‘독립정신’으로 체계화되었다. 시천주 사상이 근대적 평등을 지향한 혁명사상이라는 사실은 조선의 전통사상인 유교와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理)와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인 기(氣)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학문적 정진을 통해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해야만 했고, 때문에 학업을 업으로 삼은 양반, 유생 외에는 이러한 이기론에 접근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유교가 출세와 권력이 보장된 집단의 전유물인 이상 평민과 천민, 여성들은 절대로 평등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었고, 차별과 불평등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마디로 유교와 성리학은 반상, 남녀, 노소의 차별을 근간으로 성립된 차별의 사상이자 학문이었던 것이다. 반면, 동학의 시천주 사상은 평민뿐 아니라 천민이나 여성들까지 누구라도 입교하여 수행하면 도인(道人)이 될 수 있었고. 이러한 수월성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민중들의 근대적 자각으로 매우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최제우는 「포덕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10년을 공부해서 道成道立 되게되면 속성이라 하지마는 무극한 이내 도는 3년 불성이면 그아니 헛말인가.……입도한 세상 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 아닌가.” * 신일철, 「최수운의 동학사상」, 『사상』 9, 사회과학원, 1991, 267쪽에서 재인용. 누구라도 입도한 후 3년 이내에 도를 이룰 수 있고,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양반들이 누려온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관점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선언과 진배없는 이러한 발언은 급속하게 민중들에게 확산, 수용되었고, 조정과 양반층에는 커다란 경각심과 위기의식을 조성하였다. 조정이 1860년에 창시하고 1861년부터 포교를 시작한 동학에 깜짝 놀라 1863년 최제우를 체포하고, 1864년에 처형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동학은 짧은 포교 시간에도 불구하고 매우 급속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확산은 동학이 당시 민중의 근대를 향한 요구와 이해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최제우는 ‘보국안민’을 시대적 방책으로 제시하였고, 선천시대가 가고 봉건적 신분질서로부터 해방된 모든 인간이 평등한 후천개벽의 호시절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동학이 조선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인간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개창하기 위해 창시된 혁명적 세계관을 가진 사상임을 천명한 것이다. 조선의 근대는 수운 최제우가 ‘시천주 사상’을 통해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고, 이러한 사상에 반응한 민중들에 의해 근대 의식으로서 평등의 이념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내적 변화는 서구의 근대와 그 결과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하는 혁명적이고, 질적인 수준의 변화였고, 이러한 질적 변화는 한국적 근대가 동학사상을 통해 이미 1860년대에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리학적 봉건질서의 수호 획책하며 역사의 퇴행을 기도한 수구적이며 반동적인 사장인 위정척사사상 역시 동학과 동학혁명의 영향, 그리고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을 통해 점차 한국적 근대의 가치 안으로 수렴될 수 있었다. 서구에서 자본의 이익과 승리를 위해 발명된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내부의 선언적 평등을 주장하며 성립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수미균평’의 전통적 평등개념이 이미 존재하였고, * “……又神誌祕詞曰如秤錘極器秤幹扶踈樑錘者五德地極器百牙岡朝降七十國賴德護神精首尾均平位興邦保太平…”, 「金謂磾傳條」, 『高麗史』 卷 一二二. 삼균주의를 정립하여 임시정부의 이념을 선도한 조소항은 그가 제창한 평등사상의 근원에 이러한 한민족 전통의 평등사상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평등사상은 서구에서 발명된 ‘민족’의 제한적이고 선언적인 평등개념을 초월하는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평등를 지향하였다. 최제우는 이러한 전통에서 추출한 근본적, 절대적 평등사상을 제창함으로써 한국적 근대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였고, 봉건질서를 뒤집는 후천개벽의 혁명사상으로 전파시켰다. 따라서 최제우는 한국적 근대의 창시자로, 최초로 한국적 ‘민족’의 개념을 제시한 사상가였다. (계속) 글, 장우순(성균관대학교) -
제103주기 의암 손병희 성사 순도 · 순국일 맞아 묘소참례 봉행… 성사의 뜻 기리며오는 포덕 166년 5월 19일(월), 제103주기 의암 손병희 성사 순도 · 순국일을 맞이하여 천도교중앙총부는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소재 의암성사 묘소에서 묘소참례식을 오전 11시에 봉행한다. 이번 행사는 의암성사의 숭고한 가르침과 헌신을 기리고, 교인들이 신앙의 근본을 다시금 되새기며 실천을 다짐하는 소중한 자리가 될 예정이다. 이번 묘소참례식에는 진강현 서울북부보훈지청장, 황정희 강북문화원장 등의 내빈이 참석한다. 각 가정에서는 재가기도로 저녁 9시에 ‘환원 기도식’을 봉행할 예정이다. 환원기도식 식순은 개식/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경전봉독(성령출세설)/천덕송합창(환원기도가)/심고/폐식이다. 의암성사는 포덕 2년(1861) 4월 8일 청주에서 태어나 포덕 23년에 입도하였다. 성사는 해월신사의 명을 받아 교조 신원운동을 전개했고 광화문복합상소(1893)에도 참여했다. 동학혁명(1894) 때에는 북접 통령으로 이인전투, 우금티전투, 태인 성황산전투, 보은전투 등을 치루며 척왜 구국전선에 나섰다. 의암성사는 포덕 46년(1905)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하였고,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의암성사는 거족적인 3·1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3·1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일제에 의하여 구금되어 징역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고문으로 전신마비의 병환을 얻게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포덕 63년(1922) 동대문 밖 상춘원에서 향년 62세로 순도 ·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