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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청년회·대학생단, 박인준 교령과 간담회지난 6월 7일(토) 낮 12시, 박인준 교령은 청년회 및 대학생단 단원 등 10명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번 간담회는 지난 5월 어린이날 행사의 성과를 되짚고, 향후 청년회와 대학생단의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논의하고자 마련되었다. 참석자들은 다가오는 청년회 창립기념식 준비를 비롯해, 동천고등학교 및 동천교구와의 교류 방안,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 사업 등 다방면의 활동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었다. 특히 준암 박인준 교령은 청년 세대의 역할과 주체성을 강조하며, “앞으로의 천도교는 젊은동덕들의 의지와 열정으로 빛나길 바란다.”며 격려의 말씀을 전했다. 또한 청년회와 대학생단 단원 유치를 위한 실질적인 방안들이 오가는 가운데, 참석자들 간에 소통과 협력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청년회의 한 회원은 “교령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직접 미래 계획을 공유하고 조언을 들을 수 있어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앞으로의 활동에 더욱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전했다. 이번 간담회는 천도교 청년세대의 결속과 비전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향후 천도교 내 청년 활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청년회와 대학생단은 이러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청년 교화에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의 관심과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정성으로 힘을 보탤 성금 계좌는 다음과 같다. [청년회] 우리은행 513-240146-13-101 (예금주: 청년회중앙본부) [대학생단] 카카오뱅크 3333-19-0677270 (예금주: 조화정 단장) 사진, 기사제공 천도교청년회 -
제45대 천도교대학생단, 진주에서 정기모임 개최지난 5월 30일(금)부터 6월 1일(일)까지 2박 3일간, 진주시 교구에서 제45대 대학생단과 청년회 동덕들이 함께하는 뜻깊은 정기모임이 열렸다. 이번 정기모임은 특히 단장 조화정 동덕과 사무국장 조영은 동덕의 고향인 진주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행사로, 그 의미가 더욱 특별했다. 첫날 저녁, 대학생단은 함께 식사를 나누며 서로의 근황을 공유하고, 자격증 취득과 영어경전 소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의 일정은 다채로운 활동들로 채워졌다. 이튿날 점심에는 시암 정의적 진주시교구장님의 배려로 불고기 식사가 제공되어 대학생단과 교구장님이 함께 즐겁고 푸짐한 한 끼를 함께했으며, 오후에는 보드게임 카페에서 다양한 게임을 즐긴 후, 남강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며 자연 속에서 힐링하는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발지압 체험, 운동기구 이용, 진주성 산책 등 몸과 마음을 풀 수 있는 활동들이 이어졌고, 마트에서 직접 장을 봐 준비한 정성 가득한 저녁 식사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번 모임에서는 진주교구 교인들의 따뜻한 환대가 돋보였다. 편안한 장소 마련과 맛있는 반찬 준비 등 교인들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2박 3일간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대학생단은 “대학생단으로서 서로에 대한 유대감을 더욱 깊이 다질 수 있어 좋았다."며, “열심히 하겠다. 대학생단 활동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기사 및 사진 제공 천도교대학생단 -
근대 시기 천도교와 3.1혁명-근대를 관통한 천도교의 ‘독립정신’(4)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지난 호에 이어) 3. 독립정신의 근원-동학의 평등, 평화 사상 1918년 11월(음력) 조소앙 등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 무오년인 2018년 작성되어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한다. 아직까지 작성 시기와 발표 시기가 정확하게 고증되지 않았다. 와 최남선이 작성하여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낭독된 「독립선언문」에는 개항 이후 한민족의 과제로 부상한 ‘독립정신’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일부로 ‘독립정신’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요소인 ‘평등’, ‘평화’에 대한 인식이 언급되어 있다. “……我大衆아 公義로 獨立한 者는 公義로 進行할지라. 一切方便으로 軍國專制를 剷除하야 民族平䓁을 全球에 普施할지니 此는 我獨立의 苐一義오. 武力兼倂을 根絶하야 平均 天下의 公道로 進行할지니 此는 我獨立의 本領이오. 密盟私戰을 嚴禁하고 大同平和를 宣傳할지니 此는 我復國의 使命이오. 同權同富로 一切同胞에 施하야 男女貧富를 齊하며 䓁贒䓁壽로 智愚老幼에 均하야 四海人類를 度할지니 此는 我立國의 旗幟오. 進하야 國際不義를 監督하고 宇宙의 真善美를 軆現할지니 此는 我韓民族이 應時復活의 究竟義니라……” (삼균학회, 『素昻先生文集』 上, 서울, 횃불사, 1979, 230∼232쪽.) 당시 해외에서 민족운동을 이끌던 민족운동 지도자 다수가 참여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한 이들은 金敎獻, 金奎植, 金東三, 金躍淵, 金佐鎭, 金學滿, 呂 準, 柳東說, 李 光, 李大爲, 李東寧, 李東輝, 李範允, 李奉雨, 李相龍, 李世永, 李承晩, 李始榮, 李鍾倬, 李沰, 文昌範, 朴性泰, 朴容萬, 朴殷植, 朴贊翼, 孫一民, 申檉, 申采浩, 安定根, 安昌浩, 任邦, 尹世復, 趙鏞殷(조소앙), 曺煜, 鄭在寬, 崔炳學, 韓興, 許爀, 黃尙奎 등으로 당시 해외에서 민족운동을 주도하던 대부분의 명망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역적으로 만주, 연해주, 미주, 중국 관내를 포괄하고, 정치, 사상적으로는 민주공화제와 사회주의를 아우르며, 종교적으로도 대종교와 기독교, 유교 등이 망라되어 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서명을 했던 인물들과 당시 민족운동을 양분하였던 외교노선과 무장투쟁노선을 대표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따라서 「대한독립선언서」는 당시 민족운동을 이끌던 대부분의 운동가들이 동의하였던 독립 및 민족운동의 방향에 대한 거대한 합의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선언서의 내용은 선언서를 기초한 조소앙 등 소수 인물에 국한된 견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동권(同權)은 정치적 평등을, 동부(同富)는 경제적 평등을, 등현(等賢)은 교육적 평등을, 등수(等壽)는 사회적 평등을 개인 및 국내적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고, 민족평등(民族平等)은 민족 간의 평등을, 평균천하(平均天下)는 국가 간의 평등을 국제적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첫째, 민족평등을 전 세계에 베푸는 것, 둘째, 평균천하의 세상을 만드는 것, 셋째, 대동평화를 선전하는 것, 넷째, 남녀노소, 빈부 차별이 없는 동권동부의 이념으로 세계에 기여하는 것을 조선독립의 명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독립선언문」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다음은 「독립선언문」의 내용이다.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며, 全人類 共存 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중략)……今日 吾人의 所任은 다만 自己의 建設이 有할 뿐이오, 決코 他의 破壞에 在치 아니하도다. 嚴肅한 良心의 命令으로써 自家의 新運命을 開拓함이오, 決코 舊怨)과 一時的 感情으로써 他를 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중략)……二千萬 含憤蓄怨의 民을 威力으로써 拘束함은 다만 東洋의 永久한 平和를 保障하는 所以가 아닐 뿐 아니라, 此로 因하야 東洋安危의 主軸 四億萬 支那人의 日本에 對한 危懼와 猜疑를 갈수록 濃厚케 하야, 그 結果로 東洋 全局이 共倒同亡의 悲運을 招致할 것이 明하니, 今日 吾人의 朝鮮獨立은 朝鮮人으로 하여금 邪路로서 出하야 東洋 支持者인 重責을 全케 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여금 夢寐에도 免하지 못하는 不安, 恐怖로서 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로 重要한 一部를 삼는 世界平和,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한 感情上 問題리오.……” (최남선 등, 「독립선언문」, 1919. 3. 1. 해외에서 선포된 여러 ‘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았지만, 주로 국내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인식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독립선언문」의 경우 「대한독립선언서」와 같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역시 평등과 평화를 위해 한민족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평등과 평화의 강조는 ‘3.1 독립선언’을 주도한 천도교가 ‘인내천’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평등사상을 핵심 사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선언문에 반영한 것으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던 인물들이나 천도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던 인물들이 모두 대동소이한 평등관과 평화관을 표방하였다는 것은 대종교 역시 동학사상이 주도한 한국적 근대의 영향을 받은 수혜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밑줄 친 부분의 “인류 공존 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는 언급은 「대한독립선언서」가 언급한 민족평등과 상통한다. 「독립선언문」은 한민족의 독립이 일제를 파괴하거나 증오의 감정으로 일제를 배척하기 위함이 아니며,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한 하나의 단계로서 정당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을 동양평화, 세계평화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해하되, 독립의 과정과 그 연장의 과정에서 평등에 기초하여 동양평화를 이루고, 나아가 세계평화를 이룩하자는 평등과 포용을 핵심으로 하는 평화적인 세계관을 강하게 표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동단결이 민족독립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급선무라는 인식은 1917년 해외에 망명한 14인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작성한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소앙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대동단결선언」의 앞부분이다. “夫合則立分則倒난 天道의 原理오 分久欲合은 人情의 律呂라 撫念하건대 久로난 三百年儒者의 黨論이 李朝滅亡史의 太半을 占領하엿고 近에 至하야 난 十三道志士의 墻鬩이 新建設의 中心을 攪亂하난도다 如斯한 三分五裂의 悲劇을 目睹하고 分門立戶의 苦痛을 備嘗한 吾人은 情律에 依하야 大合同을 要求합이 自然의 義務오 또 道理에 據하야 總團結을 主張함이 當然의 權利로다 非但吾人의 主論이 如是라 一般同胞의 聲이오 時代의 命이니 滿天下傷心志士에 誰가 獨히 同感치 안으리오……” (申聖·趙鏞殷·申獻民·朴容萬·韓震·洪煒·朴殷植·申采浩·尹世復·曺煜·朴基駿·申斌·金成·李逸, 「大同團結之 宣言」, 1917, 7.) 당시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은 민족운동세력의 분열을 가장 큰 내부의 모순으로 인식하였고, 지역감정에 기반한 민족운동세력의 내부분열을 민족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으로 보았다. 분열이야말로 나라가 망한 원인이자, 나라를 되찾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 인식하였고, 따라서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대합동’과 ‘총단결’을 통해 민족의 ‘대동단결’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대한독립선언서」에서는 「대동단결선언」에서 제시된 민족독립의 전제인 ‘대동단결’을 실천하기 위한 방략 또한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당시 민족운동세력 대부분이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정책과 지도이념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서구 열강과 일본이 걷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배제하고, 개인의 평등(계급해방), 민족평등(민족해방), 평균천하(세계해방)를 추구하자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평등사상은 동학의 시천주, 사연여천, 인내천 사상의 연장선에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 사상 모두 한국 전통의 평등사상으로부터 추출되었으며, 동학이 가장 이른 시기 이러한 평등사상을 혁명사상과 후천개벽 사상의 근원으로 제창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3.1혁명이 폭발하기 이전까지 민족운동 내부에서 논의되고 있었고, 선언문 등을 통해 일정 부분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 ‘독립정신’의 대체적인 윤곽은 민족의 ‘대동단결’을 통해 민족독립의 기반을 이룩하고, 개인적, 민족적, 국가적 평등을 실천함으로써 세계평화라는 궁극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한민족의 독립론이자 세계관이며, 민족운동 전략이었다. 이는 동학이 제시한 한국적 근대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한다. 한편 3.1혁명은 독립정신을 온전한 형태로 드러나게 한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였다. 3.1혁명의 영향으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나 그밖에 민족운동단체들이 3.1혁명 이전의 ‘독립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살펴볼 것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1일에 선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강」과 「헌장」이다. 「정강」에는 역시 앞에서 확인된 독립정신의 핵심요소인 ‘평등’과 ‘평화’가 강조되어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한 「정강」 (대한민국임시정부, 「정강」, 1919. 4. 11.)이다. 一. 民族平等 · 國家平等及 人類平等의 大義를 宣傳함 二. 外國人의 生命財産을 保護함 三. 一切 政治犯人을 特赦함 四. 外國에 對한 權利 義務난 民國政府와 締結하난 條約에 一依함 五. 絶對獨立을 誓圖함 六. 臨時政府의 法令을 違越하난 者난 敵으로 認함 「정강」의 1항에는 ‘민족평등, 국가평등,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한다’고 하여 3.1혁명 이전 ‘독립정신’의 핵심요소인 평등과 평화의 가치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헌장」, 1919. 4. 11.)이다. 神人一致로 中外協應하야 漢城에 起義한지 三十有日에 平和的 獨立을 三百餘州에 光復하고 國民의 信任으로 完全히 다시 組織한 臨時政府는 恒久完全한 自主獨立의 福利에 我 子孫黎民에 世傳키 爲하야 臨時議政院의 決議로 臨時憲章을 宣布하노라 第1條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制로 함 第2條 大韓民國은 臨時政府가 臨時議政院의 決議에 依하야 此를 統治함 第3條 大韓民國의 人民은 男女貴賤及 貧富의 階級이 無하고 一切 平等임 第4條 大韓民國의 人民은 信敎 · 言論 · 著作 · 出版 · 結社 · 集會 · 信書 · 住所 · 移轉 · 身體及 所有의 自由를 享有함 第5條 大韓民國의 人民으로 公民資格이 有한 者는 選擧權及 被選擧權이 有함 第6條 大韓民國의 人民은 敎育 納稅及 兵役의 義務가 有함 第7條 大韓民國은 神의 意思에 依하야 建國한 精神을 世界에 發揮하며 進하야 人類의 文化 及 平和에 貢獻하기 爲하야 國際聯盟에 加入함 第8條 大韓民國의 舊皇室을 優待함 第9條 生命刑 身體刑及 公娼制를 全廢함 第10條 臨時政府난 國土恢復後 滿 一個年內에 國會를 召集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장」에서 주목할 것은 ‘제1조’와 ‘제3조’, ‘제7조’의 내용이다. 다른 조항이 형식과 절차를 나타내는, 시기별로 변화가 가능한 가변적 가치를 담고 있는 반면, 이들 조항은 임시정부가 지향하는 이념적, 사상적 가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제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정체의 국가임을 선포하고 있다. 제3조의 경우 대한민국이 빈부나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를 지향한다고 표방하였는데, 이는 앞서 「대한독립선언서」 등에서 표방된 ‘독립정신’의 핵심 가치인 ‘평등’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핵심적인 이념적 가치로 설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7조의 경우 역시 앞서 표방된 ‘독립정신’의 핵심 가치인 평화를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중요한 이념적 가치로 설정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3.1혁명의 민족적 요구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정강」 및 「헌장」을 통해 3.1혁명 이전에 민족운동세력 대다수가 합의한 ‘독립정신’을 공유,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표명하였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설립된 한국독립당(이하, 한독당)은 임시정부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 대다수가 참여한 정당으로 당시 임시정부 주도세력의 지향점을 「당의」와 「당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한독당 설립 당시 발표된 「당의」의 내용이다. 우리는 5천 년 獨立自由하여 오던 국가를 異族 일본에게 빼앗기고 지금 정치의 蹂躪과 경제의 破滅과 문화의 抹殺 아래서 사멸에 직면하여 민족적으로 自存을 得하기 不能하고, 세계적으로 共營을 圖하기 末由한지라. 이에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원수 일본의 모든 침략세력을 撲滅하여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여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주국을 건설하여서, 안으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 생활을 확보하며,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균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世界一家의 進路로 향함. (삼균학회, 앞의 책(『素昻先生文集』 上), 337쪽.) 역시 개인의 평등, 민족의 평등,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 그리하여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기부터 한독당과 임시정부는 비교적 분명한 이념적 색체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한독립선언서」에서 공개되었던 ‘독립정신’의 개략적인 내용이 ‘삼균주의’를 통해 단계별 전술과 전략으로 구분되어 보다 구체화 되었고, 이로써 삼균주의는 정치이념으로써 일정한 이론적 뼈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대종교 계열의 정치인들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삼균주의를 통해 정치이념을 이론화한 것과 달리 국내가 주 무대였던 천도교는 3.1혁명 이후 그러한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이는 천도교의 평등, 평화 사상이 현대적 정치이념으로 발전하지 못한 핵심적인 이유가 되었다. 다음은 한독당의 「당강」이다. 1. 대중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2. 엄밀한 조직하에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단체와 연락을 취할 것 4. 보선제를 실시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평등하게 하고 기본권리를 보장할 것 5. 토지와 대생산수단을 국유로 하여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6. 생활상의 기본지식과 필요기능을 수학하기 위해 충분한 의무교육을 공비로써 실시하여 국민의 수학권을 평등하게 할 것 7. 민족자결과 국제평등을 실현할 것 8. 세계일가의 조성을 위해 노력할 것 (노경채, 『한국독립당연구』, 신서원, 1996, 86∼87쪽.) 한독당의 「당의」, 「당강」은 기존의 ‘독립정신’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단계별 전술을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독당이 이전에 표방된 ‘독립정신’에서 볼 수 없었던, 민족 평등을 위한 필수 조건인 한민족 독립을 위해 ‘일제 침략세력을 박멸’하는 민족혁명의 단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이러한 민족혁명론이 대두된 것은 1917년이나 1919년 당시에는 민족운동 세력이 외교론 등 무장투쟁 외에도 다른 전술적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1930년이 되면 이런 수단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 외에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균주의’는 ‘독립정신’을 체계화한 매우 뛰어난 정치사상이지만, ‘독립정신’의 일부분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며, ‘독립정신’이라는 거대한 민족의 전략적 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집합으로 보아야 한다. ‘독립정신’은 민족의 독립, 민족의 통일과 발전, 평등과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모든 전략적 가치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 정치, 사회, 경제, 사상적 가치가 ‘독립정신’이라는 전략적 가치를 위해 하나로 화합하고 대동단결할 수 있다. 동학사상 역시 독립정신의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이자 핵심적인 가치이지만, 독립정신의 부분집합에 해당한다는 점은 삼균주의와 다를바 없다. 다만 동학사상이 ‘독립정신’의 근원 가까이에 있는 사상이라면 삼균주의는 동학혁명, 3,1혁명 등의 과정을 통해 축적, 발전된 ‘독립정신’의 결과물에 가깝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독당의 「당강」과 「당의」를 통해 전술적 구체성을 확보한, ‘독립정신’을 대표하는 정치사상의 하나인 ‘삼균주의’를 독립과 민족의 발전, 세계평화를 위한 전략으로 실천하겠다는 의지는 1931년 4월에 발표된 「대한민국임시정부선언」에서도 반복적으로 표방된다. (국사편찬위원회, 『大韓民國臨時政府資料集』 22, 국사편찬위원회, 2008, 59∼65쪽.) 주목할 것은 ‘삼균주의’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 후의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이념으로 지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임시정부의 구성원들 역시 ‘삼균주의’의 이념에 동의하였다는 것이며, 독립된 조선에 그간 논의되어온 ‘독립정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 다시 광복 후 한반도에 건설할 신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건국강령」의 총장 6항에서는 1931년 4월에 발표한 「대한민국임시정부선언」에서 언급한 ‘삼균주의’를 건국한 새로운 국가에서 확대하고 발양할 것임을 천명하였고, 3장에서는 건국된 국가에서 삼균제도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삼균주의’에 입각한 각종 제도를 실행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第 72號」(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국사편찬위원회, 2006, 250∼254쪽). 이처럼 3.1혁명 이후에도 이전부터 논의되어온 ‘독립정신’의 골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고, 이러한 전략을 보다 강화하고 원활하게 실천하기 위해 보다 구체적인 전술과 방략들이 첨가되었다. 광복 이전 ‘독립정신’의 주요 실천과제는 민족의 대동단결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민족혁명, 즉 민족의 독립이었고, 광복으로 독립국가가 건설된 이후에는 개인, 민족, 국가의 평등을 이룩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주도하는 것이었다. 4. ‘3.1정신’과 ‘천도교정신’ ‘3.1정신’은 동학혁명, 의병전쟁, 독립운동 및 각종 민족운동의 과정에서 확인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평등과 평화의 가치를 오늘날 제도에 반영하고 실현함으로써 보국안민을 하자는 것이다. 특히 통합, 대동단결을 함으로써 독립정신과 세계평화의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전제를 확보하는 실천 전략이다. 동학의 창시와 함께 시작된 한국의 근대는 동학사상의 변천 및 발전과 함께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였다. 동학의 평등사상은 조선의 신분질서에 타격을 가하였고, 시천주, 사인여천의 평등사상과 보국안민, 제폭구민, 축멸왜양 등의 시대정신을 기치로 봉기한 동학혁명은 조선의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민족의식을 성장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천도교 지도부는 ‘3.1독립선언’을 통해 ‘3.1혁명’을 견인하였고, 동학의 평등사상을 한국적 근대의 전략이자 ‘독립정신’과 ‘3.1정신’의 핵심 구성요소로 관철시켰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독립정신’은 동학이 표방한 평등, 평화, 반외세 등의 가치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따라서 ‘독립정신’과 그 실천 전략인 ‘3,1정신’은 천도교정신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1860년대 평등사상을 제기하며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하였던 동학의 사상과 각종 구호들은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기된 전략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사상과 구호들은 각종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을 통해서 제기되거나 표방되었던 가치들이다. 또한, 1920년 독립전쟁에 참여한 단체들이나 1920년대 초중반 만주지역에서 성립된 여러 민족운동 단체들 역시 이러한 전략들을 표방하며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평등에 기반한 평화와 이를 위한 전제로 대동단결을 제시하는 ‘독립정신’과 이를 실천하고 통합하는 전략으로서 ‘3.1정신’은 이미 초기의 동학과 천도교 사상에서 제기되었다. 다만 시천주-사인여천-인내천으로 평등을 지향한 핵심 사상이 점차 직설적이고, 근대적인 수사로 바뀌어 갔던 것은 점차 서구의 영향이 한반도에 깊숙이 침투하고, 민란과 동학혁명 등으로 민중들의 인식과 요구가 급격히 높아졌던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학사상의 창시부터 3.1혁명의 주도까지 동학과 천도교는 일관되게 평등사상을 주장하며 근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고, 동학사상을 독립정신의 핵심 내용으로 반영시켰다. 결국, 독립정신과 3.1정신의 근원에는 동학사상과 천도교사상이 있고, 이들은 서로 긴밀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3.1혁명은 동학 세력을 축으로 전개된 근대의 거대한 여정, 혹은 동학적 기획의 결과물이었다고 보아도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근대 초기 한국의 정신과 사상을 주도하면서 한국적 근대의 가치와 방향을 제시한 동학은 한국 근대의 서막을 열었을 뿐 아니라 근대민족으로서 한민족을 탄생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근대 초기를 주도한 동학의 사상과 실천이 바로 역사적, 사회적 의미의 천도교 정신일 것이라 확신한다. 최근 탑골공원이 주목을 받는 것은 탑골공원이 3.1혁명을 상징하는 기념물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탑골공원이 가진 지리적, 역사적 요소가 3.1혁명의 상징으로서 그 가치를 높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탑골공원은 상징물이자 공간일 뿐 결코 ‘독립정신’이나 ‘3.1정신’을 대표할 수 없다. ‘3.1혁명’의 정신이나 ‘독립정신’을 대표하는 것은 마땅히 그 사상의 기원이 되었거나 형성에 기여한 사상이나 인물이어야 한다. 동학사상이 성립된 순간부터 일관되게 3.1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족운동의 흐름을 주도하고 지속적으로 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천도교가 가지는 상징성은 단지 기념물로 존재하는 탑골공원과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독립정신’과 ‘3.1정신’은 동학과 천도교에서 비롯된 정신이자 사상으로 오늘날 ‘독립정신’과 ‘3.1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사상적, 정신적 상징도 동학과 천도교 외에는 없다고 본다. 탑골공원이 3.1혁명으로 인해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역사성을 근거로 연고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 역시 ‘독립정신’과 ‘3.1정신’을 상징할 수 있는 천도교 종단뿐이다. 한국의 근대는 동학의 평등사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또한, 근대민족 한민족을 완성한 3.1혁명은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주도하였다. 근대의 시작점부터 3.1혁명까지 한국의 근대의 초기를 관통한 핵심 사상과 가치, 운동의 중심에 동학과 천도교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천도교가 그간 혁명의 역사를 통해 축적한 도력과 공력에 어울리는 사회적, 사상적, 종교적 실천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은 근대를 주도한 동학의 사상과 가치를 계승하여 현대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보국안민’하고, 경제적,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평등의 가치를 실천하며, 평화의 사상으로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주도하는 천도교의 선한 영향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다. 천도교가 주도한 3.1혁명이나 근대 시기의 여러 민족운동에 대해서도 그간의 무관심한 태도에서 벗어나 종단 주도로 일정한 관계를 설정하고, 천도교의 가치와 결합시켜 천도교와 대한민국의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그 모색들이 교단의 정책과 방침으로 실천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근대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천도교가 한국사회의 주요의제를 선도하는 종교와 사상으로서 커다란 사회적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본다. (끝) 장우순(성균관대학교) -
계미중추판 『용담유사』 강독하는 대학원 교수와 학생들, 천도교중앙총부 방문포덕 166(2025)년 6월 10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종교학과 조현범 교수와 석·박사 과정을 밟는 4명의 대학원생이 중앙총부 종무원실을 방문했다. 이들은 강독 중인 계미중추판 『용담유사』 원본을 직접 확인하고, 해석과 이해에 도움이 될 자료와 자문을 얻고자 중앙총부를 찾았다. 이 자리에는 강병로 종무원장을 비롯해 전명운 교화관장,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남연호 중앙도서관장이 함께했다. 전명운 교화관장이 “『용담유사』를 강독한 소감이 어떤가”라고 묻자, 학생들은 “종교적 감수성이 강하게 느껴졌다”고 응답했다. 조현범 교수는 특히 「몽중노소문답가」를 언급하며 “수운 대신사의 종교 체험이 아주 직접적이고 솔직한 언어로 표현되어 깊은 인상을 받았다”라고 밝혔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시대적 정서나 가치관은 달라도, 이처럼 경전 원본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천도교만이 지닌 고유한 자산이자 자랑”이라고 강조했다. 1881년 충북 단양에서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용담유사』 초판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1883년 음력 8월에 간행된 계미중추판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에게는 특별 전시 기간에만 공개되나 이날 방문을 맞아 특별히 원본이 공개되었다.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은 “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지 못하고, 오직 동학농민혁명사만 등재되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며, “『용담유사』야말로 민족 최초의 K-사상과 철학을 담은 기록으로써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라고 강조했다. -
천도교와 3.1운동(5)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6.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성사께서는 망명지 일본에 계시면서 언론과 교육의 창달이 문명개화의 첩경임을 절감하여 1906년 귀국 시 일본에서 최신 인쇄기와 활자를 구입하여 보문관을 설치하고 교서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업자인 민건식의 계획적인 사기에 걸려 실패하고 1910년 초 중앙총부 직속의 창신사를 다시 설립하여 이곳에서 천도교의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말 보성학원의 경영권 일체를 우리 교회가 인수하면서 동교가 경영하던 출판 일쇄소인 보성사를 중앙총부 직속의 창신사와 병합하여 출판사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보성사는『천도교회월보』, 교서, 교과서와 함께 일반 인쇄출판업까지 영업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결손이 계속되자 당시 보성사 총무인 임명수가 여러 차례 성사에게 더 이상 적자를 감당할 수 없으니 인쇄소를 처분하자고 건의했으나 그때마다 성사께서는 “그냥 둬!”라고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결국 교회 중진들까지 결손운영을 근심하여 보성사의 매각을 건의하자 성사께서는 “지금 결손을 본다고 해서 문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한나라가 많은 돈을 들여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일조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함이요. 우리 보성사도 그 역할을 다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요” 라고 하시면서 그 건의를 물리쳤다. 그때 중진들이 건의한 대로 보성사를 처분하였더라면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출판사는 문을 닫아야 하고 인쇄에 가담한 직원은 전부 구속될 것이 확실한데 누가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자청하겠는가. 결국 성사님 말씀대로 보성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다한 끝에 왜놈들의 방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성사의 선견지명은 그때 다시 증명되었다. 7. 대교당 건축과 독립운동자금 조성 당시 천도교는 전국에 37개 대교구와 193개 교구, 그리고 300만 명의 교인을 가진 우리나라 최대의 종단이었다. 그래서 매월 지방에서 올라오는 성금으로 중앙총부의 경상비는 물론 재정난에 시달리는 20여 개 사립학교에 보조금을 지급하고도 매월 수천 원씩 예금할 정도로 재정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 돈은 종로경찰서가 매월 천도교의 재무 회계내용을 보고하도록 하는 등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어 장차 조선독립운동에 소요될 막대한 운동자금의 조달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도 막바지에 이르자 성사께서는 시국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면서 측근들에게도 국제정세의 변화에 항상 관심을 갖고 살펴보라고 지시하였다.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성사께서는 독립운동의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직감하셨다. 그 해 1918년 4월 4일 부구총회에서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의하고 교인 매호당 10원 이상씩의 건축헌금을 대신사 탄신기념일인 10월 28일까지 납부하도록 결의하였다. 모금이 시작되자 전국의 교인들은 생활수단인 논과 밭 그리고 황소 등을 팔아 성금을 냈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수원 대교구에서는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축을 빙자한 독립운동자금을 조성할 때 천도교 전교사인 백낙열을 위시한 교인 여러 사람이 아래와 같이 논과 밭을 팔아 건축헌금을 납부하였다. 백낙열 (수촌리) 논 3,000평, 밭 2,000평. 백낙소 (동 생) 논 1,500평 밭 1,000평 김흥열 (고주리) 논 3,000평 밭 3,000평 기봉규 (사금발) 논 3,000평 밭 7,000평 및 가옥 최진협 (한각리) 논 1,500평 밭 1,000평 최진승 (한각리) 논 1,000평 밭 6,500평 박시정 (이화리) 산, 3,000평 소 1두 박용석 (노진리) 논 1,000평 밭 2,000평 박운선 (노진리) 논 1,000평 밭 2,000평 우준팔 (거묵골) 논 450평 밭 1,000평 우의현 (거묵골) 논 1,500평 문경화 (거묵골) 논 2,000평 우경팔 (거묵골) 논 1,500평 (주, 신인간 1979년 3월호 68~69면) 그런데 성금 모금 운동이 시작되자 일제는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천도교중앙총부가 보유한 한성은행의 3만 원, 상업은행의 3만 원, 한일은행의 6천6백 원 등 6만6천6백 원을 동결시키고, 이미 받은 성금은 전액 본인에게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교인들은 왜경이 감시를 피하기 위해 헌금을 돌려받은 양 가짜 영수증을 제출하거나 성금 액수를 10분의 1로 줄여 기장하는 등 교당건축성금으로 약 500만 원이라는 거금이 모금되었다. 중앙총부는 동년 가을에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윤치오 소유의 대지와 그 인근 부지 등 1824평을 3만 원에 매입하고 1918년 12월 1일에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했다. 그라나 중앙대교당 건축은 1919년 3·1운동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7월에 다시 시작하였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일제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조선은행 본점을 설계한 일본인 나까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에게 설계를 의뢰하고 도면을 첨부하여 총독부에 건축허가를 신청했으나 예상했던 대로 토목국 기사로부터 허가가 거부되었다. 이유는 교당설계가 너무 거창하고 내부에 기둥이 없어 붕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설계자인 中村이 직접 총독부에 출두하여 안전성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결국 교당 규모를 반으로 줄여서 겨우 허가를 받았다. 교당과 중앙총부 청사 규모는 다음과 같다. 대교당 1동 연와조 1층 212평 8홉, 2층 45평 6홉, 3층 14평 4홉, 4층 7평 8홉, 계 280평 6홉 중앙총부 청사 2층 1동, 사무실 199평 1홉, 숙직실 1동 18평 5홉, 제1창고 1동 16평, 제2창고 1동 5평 1변소 19평, 제2변소 5평, 계 263평 건축비는 대교당 건축에 22만 원, 중앙총부 건물 건축에 5만 원, 대지 구입에 3만 원, 합계 30만 원이 소요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건축성금이 3·1독립운동과 독립운동 군자금에 사용되었다. 제2장 3·1운동의 계획과 실천 1. 독립운동을 위한 49일 특별기도 실시 성사께서는 국권침탈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끊임없이 구상하면서 은밀히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포덕 59년(1918) 8월 성사께서는 권동진·오세창·최린 세 사람을 조용히 봉황각으로 불러 “세계의 동향을 주목하여 중요 상황은 수시로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이 천명되고 그 해 11월에 4년간이나 계속되던 세계1차대전이 종식되면서 이듬해인 1919년 1월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성사께서는 이때가 독립운동의 절효의 기회로 생각하였다. 포덕 59년(1918) 12월 6일 성사는 전체 교인에게 독립운동을 위한 49일 특별기도를 행하도록 종령 제120호를 반포하였다. 이것은 3·1운동을 앞둔 특별 구국기도로서 그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기 간 : 1919년 1월 5일~2월 22일(49일간) 1. 기도시간 : 매일 하오 9시. 단 시일에는 시일기도를 마치고 이어 봉행함 1. 기도의식 : ➀ 청수 한 그릇을 봉전함 ② 백미 5홉을 봉전함 ③ 촛불 3개를 청수 탁전에 점함 1. 기도심고 :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대원으로 함 1. 주 문 : 신사주문 (신사영기 아심정 무궁조화 금일지) 13회 이와 관련하여 성사께서는 그 전해 12월 24일 인일기념식에 참석차 상경한 교단 간부들을 상춘원으로 불러 말씀하시기를 “지금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우리의 무위무능으로 간과 한다면 천추에 한이 될 것이다. 내 이미 계획한 바 있으니 제군들은 내 지시에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보국안민이 되고 못되는 것은 새해 1월 5일부터 시작하는 특별기도에 달려있으니 정성껏 시행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49일특별기도를 위해 서울·해주·의주·길주·원주·경주·서산·전주·평강 등 9개처에 대표기도처를 정하여 각기 4인의 중앙총부 간부진을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였다. 이는 닥쳐올 대사에 대비해서 각 지방 교회조직을 점검하려는 뜻이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세 사람은 동대문 밖 상춘원 성사의 거처에 자주 모여 파리강화회의 소식과 세계 약소민족 해방운동, 그리고 국내 인심동향 등을 성사에게 보고하는 한편 시국대처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2. 3·1운동의 3대원칙 확정 포덕 60년(1919) 1월 초순 성사께서 권동진·오세창·최린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지금 우리 목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우리가 이런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무위무능하게 보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내 이미 오래전부터 작정한 바 있으니 그대들은 십분 분발하여 대사를 그릇됨이 없게 하라” 하시고 독립운동의 준비를 지시하시면서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 세 원칙은 성사가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확고부동한 소신이었다. 1. 독립운동은 대중화 할 것 1. 독립운동은 일원화 할 것 1. 독립운동은 비폭력으로 할 것 또한 독립운동의 추진은 권동진·오세창·최린 3인이 협의해서 진행하되 일본 경찰의 감시를 감안하여 최린이 거사계획을 주도하되 중요사항은 권동진·오세창과 상의해서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3. 민족대표의 선정 성사의 지시를 받은 최린은 2월 초순경 최남선·송진우·현상윤 등과 재동 자택 또는 재동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극비리에 수차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협의하였다. 우선 민족대표 선정과 관련하여 독립운동의 대중화 원칙에 의하여 무엇보다 민중의 신망을 받는 인물들을 물색해 보았으나 만족할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구한말의 대신 중에서 지조 있고 덕망 있는 인물을 찾기로 하여 우선 윤용구·한규설·박영효·윤치호 4인을 선정하고 교섭하기로 하였다. 윤용구는 구한국 대신으로 일본의 작위를 거절한 성품이 고결한 사람이었고, 한규설은 을사늑약 체결 시 참정대신으로 한사코 반대했던 사람이다. 박영효는 개화당 영수로 일본의 침략을 반대한 저명한 귀족 혁명가였고, 또한 윤치호는 과거 독립협회장으로 특히 미국인들한테 신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최린은 한규설, 송진우는 박영효, 최남선은 윤용구와 윤치호를 각각 맡아서 교섭해 보았으나 이들 모두가 승낙하기를 꺼리므로 결국 인물중심의 민족대표 구성은 실패하였다. 이에 최린은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한 인물이다. 독립운동은 민족의 제전이다. 신성한 제수에는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더 좋을 것이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민족운동의 제물이 되면 어떠냐”고 하면서 민족대표를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아니라 의암 선생을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모시고 우리 젊은 사람들이 다 같이 대표단에 참가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나 최남선은 저명인사의 참여 없는 천도교 측만의 민족운동으로는 대중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하자 최린은 흥분을 가누지 못하며 “이 순간까지 논의해온 일은 전부 취소하기로 합시다” 하고 일어나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4. 천도교·기독교·불교의 합동 구한말의 대신을 중심으로 민족대표 구성에 실패한 후 최남선이 최린을 찾아와 이르기를 “지금 기독교 측에서도 무슨 기미가 있는 듯한데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이승훈 장로와 더불어 의론할만하니 연락을 하여보는 것이 어떤가”라고 했다. 이에 최린은 즉시 현상윤과 의논하여 오산학교 출신인 김도태를 2월 8일 정주로 보냈으나 이승훈이 장로교회 관계로 선천에 가 있어 직접 만나지 못하고 오산학교 경영에 관하여 좋은 소식이 있으니 즉시 상경하라는 최남선의 말을 이승훈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승훈은 정주 장로교회 장로로 있으면서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계속 학교를 경영하고 있는 애국자였다. 김도태의 전달을 받은 이승훈이 2월 11일 상경했으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최남선은 만나지 못하고 대신 송진우와 현상윤을 만나 셋이서 계동 김성수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천도교 측의 운동계획과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고 천도교 측 운동에 기독교 측의 참가 의향을 물었더니 이승훈은 이에 적극 찬동하고 동지를 규합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날로 서울을 출발하여 2월 12일 선천에 도착한 이승훈은 사경회에 참석한 장로교 목사 양순백·이명룡·유여대·김병조 등 동지를 만나 서울의 운동계획을 설명하였던바 일동은 한결같이 이에 찬성하였다. 다시 14일 평양에 나와 왜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기독병원에 입원하면서 장로교 목사인 길선주와 신홍식을 만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2월 17일 재차 상경하여 최남선을 만나려 하였으나 연락할 방도가 없어 고민하던 차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를 만나 기독교 측에서도 독립운동에 관하여 논의가 분분하다는 말을 듣고 2월 20일 박희도의 집에서 남감리교 목사 오영화·정춘수, 북감리교 감리사 오기선·신홍식 등 여러 사람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방략을 서로 협의한 결과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규합할 것과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결의하였다. 당초 함태영 집에서도 이와 별도로 이갑성·안세환·오상식·현준 등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협의를 하였으나 의견이 구구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2월 21일 최남선은 소격동 이승훈 숙소로 찾아가 그동안 왜경의 주목 때문에 상봉치 못한 이유를 말하고 같이 재동 최린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승훈은 그동안의 경위를 말하고 전날 박희도의 집과 함태영 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기독교 측에서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 최린은 독립운동은 민족적 대사업인 만큼 절대로 통합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남선도 이승훈도 동의하면서 내일 기독교 측과 다시 상의하여 대답하겠다고 하면서 어제 회의에서 운동자금 조달 문제가 가장 난제로 거론되었다고 하면서 천도교에서 5천원을 융통해 주면 좋겠는데 그것이 어렵다면 3천 원만이라도 변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최린은 천도교에서도 은행에 예금하였던 돈을 일전에 왜경에게 전부 압수당하여 곤란 중에 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주선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날 저녁 최린은 상춘원에 가서 성사님을 뵙고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운동자금에 대해 말씀드리자 성사께서는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5천 원을 융통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춘암에게 말할 터이니 돈을 받으면 곧 기독교 측에 보내시오”라고 승낙하였다. 다음날 2월 22일 천도교 금융관장 노헌용이 5천 원을 최린의 집으로 가져왔다. 최린은 즉시 이승훈이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가 5천 원을 직접 교부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22일 밤 이갑성 집에서 이승훈·박희도·함태영 등 여러 사람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구체적 방법을 협의한 끝에 천도교 측의 운동방법을 정확히 탐문한 후 합동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고 이 교섭을 함태영·이승훈 양인에게 일임하였다. 다음날 저녁 함태영과 이승훈이 재동 최린 댁을 방문하여 전날 기독교 측의 회의 결과를 설명하고 독립선언보다는 독립청원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에 최린은 우리의 자주적 정신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선언이라야 옳다고 주장하자 두 사람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동지들과 상의 후에 회답하기로 하였다. 그날 밤 이승훈·함태영 두 사람은 함태영 집에서 오기선·박희도·안세환 등 여러 사람과 숙의한 결과 천도교 측과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함태영·이승훈 두 사람을 기독교 측 대표로 선정하여 제반 교섭을 일임하였다. 2월 24일 이들 두 사람이 최린 댁을 방문, 기독교 대표 자격으로 천도교와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발표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동이 공식으로 성립되었다. 최린은 의암성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성사께서는 양대 종교단체의 합류는 이번 민족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라 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2월 22일에 49일 기도회가 끝난 후 보고 차 상경한 교구장들과 우이동 봉황각 기도회에 참석했던 중앙총부 간부들에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 하셨다. 이번 거사에는 기독교 불교와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운동의 성격과 운동추진에 따른 제반 사항 등을 설명하고 추후 독립선언서의 발송 등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갈 것이니 각 교구에 내려가 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종교 이외의 단체는 모조리 해산시켰기 때문에 일반 사회단체를 포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종교단체 중에서 불교와 유교의 참가 없이는 일원화된 통일체제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2월 24일 밤 최린은 평소부터 친교가 있었던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계동 자택으로 찾아가 그동안의 경과를 밝혔더니 즉석에서 불교 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한용운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대단히 기뻐하였으나 유림 측의 참여가 없음을 못내 섭섭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후 한용운은 불교 측 동지들과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하고 일경의 감시가 심해 한용운·백용성 두 사람만 민족대표로 참가하기로 하였다. 다만 유교 측을 참여시키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유교 측은 원래 조직체계가 분명치 못하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인물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왜경의 경계가 삼엄하고 더 이상 조직을 확대하다가는 계획이 누설되면 대사를 그르칠 염려가 있어 세 교단이 주체가 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5. 독립선언서의 작성 독립선언서에 대해서는 1919년 1월 하순 최린·최남선·현상윤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의 기본방향을 논의할 때 선언서 작성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작성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때 최남선이 “나는 내 생애를 통하여 학자 생활로 일관하려고 이미 결심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독립선언서만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데 그 작성상의 책임은 최형이 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최린은 그의 문장력을 인정해온 터라 그의 심정을 이해하였다. 다만 의암 선생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정신을 반드시 선언서에 반영하도록 부탁하고 선언서의 골자는 최린이 말하는 취지와 최남선의 생각을 서로 논의해서 기초하였다. 그 후 최남선은 일본 정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강화회의 각국 위원에게 보내는 서한도 작성하기로 하고 우선 2월 15일 독립선언서를 작성 완료하여 최린에게 수교하였다. 최린은 초고를 읽어본 후 오세창·권동진에게 보내어 검토한 후 기독교 측에도 보내어 동의를 얻었다. 그 후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최남선에게 선언서를 작성케 함은 불가한 일이니 선언문은 자기가 짓겠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으나 최린은 이를 거절하였다. 6.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독립선언서 원고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조판한 후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에게 넘겨져 사원과 직공들이 퇴근한 후 신임할 수 있는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 직공 신영구, 그리고 기초자인 최남선 입회하에 2월 20일부터 인쇄에 들어가 25일까지 1차로 25,000매를 인쇄하여 신축 중인 천도교대교당으로 운반하여 은닉하고 미리 정한 대로 암호인 청색지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천도교에서는 안상덕이 3,000매를 수령하여 강원도와 함경남북도 방면으로 출발하였고 이경섭은 1,000매를 가지고 황해도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김상설은 3,000매를 인수하여 평양교구에 1,500매를 넘겨 평남 지역에 배포한 후 나머지 1,500매를 평북 지역에 배포하였다. 인종익은 3,000매를 인수하여 전라남북도를 거처 충청도 지역에 배포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김창준이 3,000매를 수령하여 평양과 선천 지방에 배포했고, 이갑성도 2,000여 매를 인수하여 서울 시내와 경상도 지방에 배포했다. 불교 측에서는 한용운이 3,000매를 인수하여 주로 경상도 지방과 서울 일원에 배포했다. 2월 27일 밤 부족한 선언서를 추가 인쇄하기 위하여 이종일은 야간에 등불이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공장 내 창문을 모두 가리고 인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한창 인쇄가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인쇄한 선언문을 치우려 하였으나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라는 고함이 빗발쳤다. 모든 것을 각오한 이종일은 큰기침을 하며 문을 열었다, 신승희였다. 그는 독사처럼 음흉하고 생쥐처럼 날센 종로서의 한인 형사였다. 수없이 많은 애국동포가 그의 손에 검거되어 무참히 고문을 당하게 한 악명 높은 민완 형사였다 이종일은 그의 앞에 무릎을 끓고 애원하였다. “하루만 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날 터이니 오늘 하루만 눈감아 주십시오.” 두 손으로 빌며 읍소하였다. 관내를 순시하던 그자는 보성고보의 뒷담 골목을 지날 때 인쇄소 안에서 여느 때와는 달리 창문을 굳게 가리고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들긴 것이다. 실내를 돌아보고 사정을 알아차린 그는 가만히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종일은 다시 그의 소매를 붙들고 사정하였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평소에 자주 들려 농담도 곧잘 하던 그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이종일은 다시 그의 옷소매를 끌며 “우리 성사님한테 같이 갑시다.” 하였더니 뜻밖에도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고 했다. 이종일은 곧 밖으로 나와 성사 댁으로 달려가 위급상황을 보고 하였다. 묵묵히 듣고 계시던 성사께서 좀 기다리라면서 안방으로 들어간 후 잠시 있다 종이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이걸 가져다주시오. 밤늦게 수고가 많습니다. 아무쪼록 잘 무마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인사할 겨를도 없이 인쇄소로 돌아온 이종일은 신승희에게 종이 뭉치를 꺼내 주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면서 곧 사라졌다. 이종일과 김홍규는 일시에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쪼록 저자가 배신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다시금 힘을 내어 작업을 계속하였다. 10시가 넘어 일만 매의 독립선언서가 추가로 인쇄되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손수레에 실어 경운동 신축교당 창고에 갔다 숨겨놓고 성사에게 가서 무사히 인쇄를 마치고 운반해 두었다고 보고하였다. 종로서 한인 형사 신승희는 성사로부터 5천 원의 거금을 받고 3·1운동이 발발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5월 초순에 종로서 사법주임과 함께 만주 봉천에 출장 갔다가 5월 14일 귀환하였는데 서울역 구내에 대기하고 있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자 그날 밤 준비했던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출장 중 직무유기와 뇌물수수 혐의가 탄로 된 것이다. 갖가지 악행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했던 그가 40세를 일기로 마지막에 민족적 양심에 따라 애국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종일은 재판에서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밤 21,000매를 인쇄하여 2월 28일 아침 오세창의 지시대로 7, 8인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종일 선생 논설집에 의하면 독립선언서는 2월 20일에서 25일까지 25,000매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3월 1일 만세시위를 시작한 서울을 비롯해서 개성, 부산, 대구, 평양, 신의주, 원산 등 10여 곳에서 동시에 봉기한 것을 보면 독립선언서는 2월 25일에 25,000매를 인쇄하여 먼 곳부터 배포하고 부족분 10,000매를 27일 인쇄한 것이 분명하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제99주년 6 · 10독립만세운동 기념 영상 공개…100주년 향한 발걸음 시작6·10독립만세운동 99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내년 100주년을 준비하는 홍보 영상이 공개됐다. 이번 영상은 천도교중앙총부와 천도교사회문화관, 그리고 6·10독립만세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공동으로 기획·제작한 것이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진 대규모 항일 시위로, 3·1운동 이후 가장 의미 있는 민중 항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주권 회복과 자유를 외쳤던 이날의 외침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돼 있다. 공개된 영상은 당시 만세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주요 인물, 정신적 의의를 조명하는 한편, 현재의 대한민국이 그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 나갈지를 묻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울러 내년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행사와 사업의 방향성도 소개하며, 국민적 관심과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한편, 내년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식, 학술대회, 답사 프로그램 등 다채로운 기념사업이 추진될 예정이다. 천도교중앙총부와 6·10독립만세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이번 행사를 통해 시민사회와 함께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6·10만세운동이 지닌 자유와 정의의 정신을 오늘날 사회에 되살리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
제 99주년 6 · 10독립만세운동 기념식, 천도교중앙대교당6·10 독립만세운동 99주년 기념식이 6월 10일 서울 종로구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일제강점기 순종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난 6·10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내년 100주년을 앞두고 그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기념식은 천도교 의례와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 6·10 만세운동 주역들을 기리는 순서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종교·이념을 넘어 독립을 외쳤던 선열들의 뜻을 기렸다. 박 교령은 천도교청년동맹 간부 박래원 선생의 활동을 언급하며 천도교의 역할을 강조했고, 6·10 만세운동이 민족협동전선과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진 중요한 계기였음을 짚었다. 이준식 권오설권오창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내년 100주년이 분단 극복과 민족 통합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부 행사에서는 추진위 활동 보고, 역사선언문 낭독이 있었으며, 이번 기념식은 민족적 연대와 자주정신의 가치를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였다. -
6 · 10 독립만세운동 99주년 기념식,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봉행6·10 독립만세운동 99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6월 10일 서울 종로구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 이번 기념식은 1926년 일제강점기 하에서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난 6·10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내년 100주년을 앞두고 그 가치를 재조명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기념식은 전명운 교화관장의 집례로 천도교의례(개식, 청수봉전, 주문 3회 병송 등),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 심고, 폐식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어진 2부 행사에서는 6·10 만세운동의 주역들을 기리는 순서가 이어졌다. 이날 기념식은 종교·이념·계층을 초월해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선열들의 뜻을 기리며, 이 운동이 민족 통합의 초석이 되었음을 강조했다. 박인준 교령은 기념사에서 “내년은 6·10만세운동 100주년입니다. 우리는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박 교령은 “천도교청년동맹의 간부였던 박래원 선생은 춘암 박인호 상사의 조카로, 천도교 지도자들의 지원 속에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며 천도교의 주도적 역할을 언급했다. 또한 “6·10만세 운동에서 보여준 종교, 정치, 계급적 이념을 뛰어넘는 민족협동전선의 실천은 민족적 과제인 독립운동 통합의 시발점이 되었고, 해외로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전파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이듬해 천도교청년동맹 대표인 박래홍을 중심으로 한 국내 최대의 좌우합동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라고 의미를 짚었다. 권오설권오창 기념사업회 이준식 이사장도 “내년 100주년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분단 극복과 민족 통합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인 기념 행사가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2부 행사는 6·10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박성현 이사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황선건 유족회장이 추진위 경과보고와 역사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동초 선도사의 특별강의 ‘천도교단과 육십만세운동’은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이 요약하여 전달했다. 이번 기념식은 6·10 만세운동이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민족적 연대와 자주정신의 가치를 전하는 살아 있는 유산임을 일깨우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아래는 준암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 전문이다. 제99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사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분열이 아닌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을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고 동귀일체하여 손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6·10만세운동 99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주신 동덕 여러분과 유족 여러분, 그리고, 황선권 6.10만세운동 유족회 회장님, 권오설 권오상 기념사업회 이준식 이사장님, 항일혁명기념단체연합 김찬휘 상임이사님, 6.10만세운동 100주년준비위원회 권영길, 윤경로 공동위원장님, 그리고, 온라인을 통해 시청해 주시는 국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내년은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러한 때를 앞두고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하여 추모 선양하고 있는 김단야, 박래원, 권오설, 권오상, 이관술, 이동환, 이선호 등의 독립운동가에 대하여 우리는 공경합니다. 이 분들은 모두 6·10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서 국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으신 분입니다. 특히 박래원 선생은 천도교 4세 대도주이신 춘암 박인호 상사의 조카로 당시 천도교청년동맹의 핵심간부로서 춘암상사를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의 지원 속에 6·10만세를 진두 준비하였습니다. 의암 손병희 성사께서 영도하신 3·1혁명 이후 일본의 만행은 극에 달했는데, 이런 가운데 고도화된 일제의 민족분열공작의 결과로 대한독립의 의지를 가졌던 일부 인사들은 식민지 조선을 인정하고 대신 조선에 독자적 의회를 설치하여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일정 부분 내정의 자치권을 얻자는 이른바 자치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같은 자치론에 대해 반대하며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합동을 하게 되었고, 제2의 3·1혁명을 표방하며 6·10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천도교가 주체가 되어 조선공산당과 연대하여 준비하던 6·10만세운동은 거사 일인 순종의 인산일 전에 사전 발각되어 3·1혁명과 달리 거국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전국의 천도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수백 명이 체포되면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6·10만세 운동에서 보여준 종교, 정치, 계급적 이념을 뛰어넘는 민족협동전선의 실천은 민족적 과제인 독립운동 통합의 시발점이 되었고, 해외로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전파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이듬해 천도교청년동맹 대표인 박래홍을 중심으로 한 국내 최대의 좌우합동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천도교는 그 독립의 의지를 〈오심당〉 운동과 〈무인멸왜기도〉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80년이 된 지금까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은 일본의 배상 문제, 그리고 진정 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를 보면서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천도교는 동학의 정신으로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를 향해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 받아 일야에 멸하고자” 새로운 극일의 길로 뚜벅뿌벅 걸어가면서, 동시에 과거를 극복하고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어떤 세력과도 연대와 협동, 그리고 상생의 정신으로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고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의 대업이 하루빨리 성취되기를 기대하면서 간절히 심고하겠습니다. 6·10독립만세운동 99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올리며, 한울님의 감응이 함께 하기를 심고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포덕166년 6월 10일 천도교 교령 박 인 준 심고 -
포덕 165년 6월 8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귀귀자자 살펴 내어"천도교에서 '귀귀자자 살펴 내어'의 뜻은 대신사님의 가르침을 한 글자 한 구절 꼼꼼히 살펴내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올바르게 수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지난 6월 8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설교는 서울교구 정윤택 교구장이 맡았으며, 천도교의 핵심 가르침과 대신사(최제우)의 정신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이는 대신사께서 남원 은적암에서 제자들의 수도를 염려하며 도수사와 논학문을 지으신 배경과 그 의미를 설명한다. 특히, 주문 21자에 담긴 무극대도의 이치와 수도의 방법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하며, 강령주문과 본주문을 통해 한울님과 하나 되는 경험을 강조한다. 또한, 한울님의 불택선악(不擇善惡)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한울님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알려준다. -
천도교중앙총부, 종로구에서 감사패 수상지난 6월 9일, 서울 종로구 민방위교육장에서 열린 ‘종로구 후원자 감사의 날’ 행사에서 천도교중앙총부가 지역사회 공헌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감사패를 수상했다. 이날 행사에는 종로구의 복지 증진에 기여한 다양한 후원단체와 인사들이 초청되어 자리를 빛냈으며, 천도교중앙총부를 대표해 강병로 종무원장이 참석해 감사패를 전달받았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지역 내 복지사업과 나눔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온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우리 교단이 실천해온 나눔과 상생의 정신이 지역사회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어 기쁘다”며, “앞으로도 더욱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힘쓰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번 행사는 종로구청이 주관하고 지역사회 복지 증진에 기여한 단체 및 개인을 격려하고자 마련된 자리로, 민과 관이 함께하는 의미 있는 행사이다. 사진제공 최진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