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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사(小史) ○ 9월 4일○ 1870년, 프랑스 제3공화정(1870~1940) 수립. 보불전쟁 패배 이후 수립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초기에는 많은 사회적 혼란을 겪었으나 1879년 공화주의 세력의 승리로 정치적 안정을 찾았다.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을 본격적으로 부활시킨 체제로 평가받으나 우익들의 음모로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 했다. ○ 1909년,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조인. 간도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영토였으며, 우리 민족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그러나 청은 백두산정계비문을 내세워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인들의 간도 출입을 금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일본은 만주의 철도 부설권, 탄광 개발권 등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에 조인하였다. ○ 1965년, 독일의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 사망.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목사, 대학 강사,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아프리카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뒤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13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그곳에 병원을 개설하고 한평생을 바쳤다. 20세기의 성자, 최고의 휴머니스트, 인류애의 화신으로 불린다. -
청년의 열정과 선배의 울림이 하나 된 축제천도교청년회 창립 106주년 기념식이 지난 8월 31일 오전 11시, 중앙대교당에서 봉행되었다. 1919년 창립 이래 한울님의 진리를 바탕으로 청년의 사명을 실천해 온 청년회는 이번 기념식에서 지난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미래의 비전을 함께 모색했다. 이상미 청년회장은 기념사에서 “106년이라는 세월은 선배님들의 피와 땀, 헌신과 열정이 쌓여 이룬 역사이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강병로 종무원장은 격려사에서 “네 분 스승님은 우리 마음에 살아 있는 영원한 청년이며,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천도를 지켜주신 선배들도 영원한 청년”이라며 “청년회원 여러분은 밝고 긍정적인 비전을 가진 한울사람으로, 스승님들께서 보여주신 높은 기상과 의지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기념식은 1부 공식행사와 2부 축하공연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청년들의 재기발랄한 무대와 선배들의 기타 연주가 어우러져 세대가 함께하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청년회는 앞으로도 교단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으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명을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다음은 이날 발표한 기념사의 전문이다.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천도교 청년회장 이상미입니다. 먼저,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시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 참석해주신 모든 동덕님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특히 멀리서 일부러 발걸음을 해주신 분들, 또 청년회와 늘 마음으로 함께해주시는 선배 동덕님들께 각별한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천도교 청년회 창립 106주년을 맞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106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며, 수많은 역사적 격동과 사회적 변화를 지나온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청년회의 맥을 이어오며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이라는 천도교의 대의를 지켜내고 실천해 오신 선배님들께 먼저 깊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그 숭고한 뜻과 실천 위에서 오늘의 청년회가 존재하고, 저 또한 이 자리에 설 수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천도교의 가르침은 언제나 명확합니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은 곧 한울이다. 이 한마디 안에 우리의 신앙과 실천, 그리고 삶의 방향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울로 태어나 서로를 존귀히 여기며, 인간과 자연과 만물을 공경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정신은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 언제나 유효하며, 또한 우리 청년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기준입니다. 청년회는 바로 이 가르침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해 온 주체였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민족을 깨우치고 독립을 위해 나섰으며, 사회가 불안할 때는 정의와 연대를 외쳤습니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도 청년회는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봉이었고, 이는 오늘 우리에게 큰 자부심과 동시에 막중한 책임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저는 역대 회장님들에 비해 나이가 어린 편이며, 또 여성 회장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부담이 적지 않았습니다. 선배님들처럼 해낼 수 있을까, 청년회라는 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이 바로 청년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언제나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통을 이어가되, 그 속에서 미래의 길을 찾고, 새로운 시대의 언어와 행동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바로 청년입니다. 제가 여성으로서, 또 지금 시대의 청년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청년회의 역사와 정신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선배님들의 지혜와 가르침을 받들어, 다른 시선과 감각을 지닌 청년들이 더욱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습니다. 오늘의 청년회는 100여 년 전처럼 직접적으로 나라를 지키고 민족을 깨우치는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청년회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일상 속에서 교리를 실천하며, 사회 속에서 따뜻함과 연대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작은 배려와 나눔이 곧 현대의 포덕이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서로를 살피는 것이 곧 광제창생이고,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 올바름을 세우는 것이 곧 오늘날의 보국안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작은 실천들이 모여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지상천국의 기초를 놓게 된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청년회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활동을 이어갈 것입니다. 과거의 발자취를 존중하며 선배님들의 뜻을 계승하고, 현재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하며, 미래를 살아갈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지상천국 건설의 주역으로 세워나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청년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다양한 교류의 장을 마련하겠습니다. 또한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교리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참여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문화를 바탕으로, 시대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며 포덕의 길을 활짝 열어가겠습니다. 존경하는 동덕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06년은 단순히 숫자가 아닙니다. 이는 선배님들의 피와 땀, 헌신과 열정이 쌓여 이룬 역사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청년회는 앞으로도 그 역사 위에 새로운 역사를 쌓아가겠습니다. 과거와 단절되지 않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으며,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청년회의 정신으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이 귀한 자리에 함께해주신 모든 동덕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청년회의 앞날에 많은 관심과 지도, 그리고 아낌없는 응원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청년회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칼럼] 지금, 내 마음은 어떤 색인가요누군가 우리에게 자연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어떤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자연은 반드시 이렇다고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자연은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보존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자연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무한하지만, 우리가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의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한 데다, 그 속성 또한 말이나 글로써 나타내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산, 나무, 숲, 흙, 물, 공기, 풀, 등의 생태적 감각을 정확히 추론해내기도 그렇고, 따뜻한 햇살과 대지를 흐르는 공기와 산소 그리고 낮과 밤, 내면과 외면을 아우르는 지기(至氣)의 활동을 살피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에다 기국 따라 형성되는 자연색의 오묘함도 있습니다. 사실 자연을 보며 느끼는 색에 대한 감정이란 아침에 떠오르는 햇살을 보면서 느껴지는 신선함이나 해질 무렵 석양으로 장식된 하늘을 보며 느끼게 될 상념 정도일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색들이 자연 전체를 대변하는 색이 아닐지라도 자연미(형태와 색상)가 주는 아름다움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계기가 된다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색상에 젖은 채 생활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색상에 포위되어 있기에 색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색은 감성뿐만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도 일조하고 있다면 마음을 다스리는 차원에서도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은 기분의 정도나 상태에 따라 색상이 수시로 변하는데, 노여운 감정이 일어나면 붉은 색상이, 기쁨에 겨우면 장밋빛 형상이 자리합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개되는 색의 성질을 유추해보면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이 지니는 상징성은 심리와 건강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색상의 상징성에 비유하여 만약 산이나 들이 온통 붉은색으로 장식되어 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겠습니까? 아마 하루 내내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피로감이 높아질 것입니다. 이러한 색 담론에서 색으로 사람은 물론 온 생명의 감정을 조율한다는 논리가 불연(不然)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성품과 마음과 몸의 향상성을 촉진하는데 색상의 기여도(색의 속성과 심미안, 한색, 난색, 흥분, 침착, 편안함, 긴장감)가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개의 성향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겠지만, 기쁘고 감사하고 사랑이 가득한 마음이라면 한층 밝고 경괘한 색감이 드러날 것이요, 반대로 분노와 두려움, 긴장과 불안에 사로잡힌 감정 색이라면 마음에 불편이나 분노의 기세가 드리워져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런 색 담론에 유념하면서 이 순간 나의 얼굴이 붉은색인가? 아니면 푸른색인가? 노란색인가? 하얀색인가? 아니면 검은색인가를 바라보며, 심리적 연상으로 오늘 내 마음을 사로잡은 감정은 무엇인가를 자문해본다면 어떻겠습니까? 글, 송암 박철(선구교구장)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동학 사상의 본질을 문학과 신화로 탐구하다지은이: 임금복 장르: 동양사/동양문화 일반 출판사: 모시는사람들 쪽수: 352쪽 발행일: 2025년 8월 10일 동학 사상의 근원을 문학적 서사와 신화적 상상력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책이 출간됐다. 성신여대 국제교육원 대우교수로 재직 중인 임금복 교수가 집필한 『동학의 사상적 서사와 신화적 상상력』(모시는사람들 刊)이 그 주인공이다. 이번 책은 동학 연구의 학문적 지평을 넓히는 한편, 종교와 철학, 문학, 신화가 융합된 통합적 해석을 시도해 주목받고 있다. 임 교수는 1997년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이래 동학 사상과 문학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그간 『동학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2004), 『그림으로 읽는 수운 최제우 이야기』(2014), 『수운 최제우와 함께하는 중국 탐방기』(2024)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동학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으며, 이번 책은 그러한 연구를 집대성한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세 갈래 시선으로 본 동학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서로 다른 시선으로 동학의 사상과 세계를 해석한다. 제1부에서는 한승원의 『동학제』, 유현종의 『들불』,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등 동학 관련 소설을 중심으로 동학 정신과 민중의 삶이 어떻게 문학 속에서 재현되는지를 살핀다. 특히 ‘개벽’과 ‘인내천’이라는 핵심 사상이 민중 서사와 어떻게 만나는지를 분석하며, 문학이 동학 정신을 계승하는 중요한 장치였음을 밝힌다. 제2부는 동학 경전에 담긴 신화적 상상력을 탐구한다. 요순 신화와 삼황오제 신화, 그리고 시천주의 개념 등을 토대로, 동학의 경전이 단순한 교리집이 아니라 신화적 언어와 수사학으로 구성된 서사임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동학의 교리가 지닌 상징성과 그 속에 담긴 우주적 상상력을 새롭게 해석한다. 제3부에서는 『동경대전』, 『용담유사』, 『해월신사법설』, 『의암성사법설』 등에 등장하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을 집중 분석한다. 공자와 노자, 제갈량 등 다양한 중국 사상가와 정치가들이 동학의 서사 안에서 어떤 의미로 변용되고 있는지를 규명하며, 동학이 단순히 한국적 사상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문명 전체와의 대화를 통해 발전했음을 조명한다. 동학을 새롭게 바라보는 통합적 연구 『동학의 사상적 서사와 신화적 상상력』은 동학을 단순한 종교 운동으로만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철학·문학·신화·역사·윤리 등 다양한 학문적 관점을 교차시킨다. 이를 통해 동학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동학 정신이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함을 입증한다. 저자는 “동학은 민중의 삶에서 태어난 사상이며, 그 안에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풍부한 서사와 상상력이 담겨 있다”며,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동학을 더 깊이 이해하고 현대적 의미를 재발견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책은 동학을 연구하는 학자뿐 아니라 역사와 문학, 종교와 철학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넓은 시야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학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뜻깊은 길잡이가 될 전망이다. -
소설 『하얀 혁명』, 묻힌 경기 동학군의 역사를 되살리다동학혁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전라도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을 떠올린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사건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거대한 민족적 저항이었다. 그중에서도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봉기한 경기 동학군의 활약상과 유혈 투쟁은 결코 다른 지역 못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왜곡되거나 축소, 폄훼되어 왔으며 심지어 기록조차 소실되는 등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소설 『하얀 혁명』은 이러한 역사적 공백을 메우고자 기획된 작품으로, 그동안 묻혀 있던 경기 동학군의 면모를 역사적 실체에 최대한 접근해 복원하고, 이를 문학적 서사로 재탄생시켰다. 이 작품은 단순히 과거를 되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근대사의 질곡을 바로잡고 동학혁명을 새롭게 조망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은 본지인 월간 ≪신인간≫과 ≪천도교신문(인터넷판)≫을 통해 2024년부터 2025년까지 연재되며, 처음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는 경기 동학군의 숨은 역사가 문학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본지가 역사적 기록의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얀 혁명』의 저자 김현종은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1년 계간 ≪한국문학시대≫에 단편소설 「이각형」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입문했다. 이후 장편소설 『아버지의 나라』를 8년간 연재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이번 『하얀 혁명』은 작가가 수년간의 역사 연구와 현장 답사를 거쳐 완성한 역작으로, 본지를 통해 많은 호응과 관심을 받았다. 김현종 작가는 앞서 장편소설 『천살의 시대』(실천문학, 2023)와 소설집 『보다 보이다』 등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을 문학적으로 탐구해 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와 문학의 만남 『하얀 혁명』은 한 지역의 역사를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 동학혁명 전체의 성격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다. 작가는 동학혁명을 “백성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하며, 경기 동학군의 봉기와 그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희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민주, 자주, 평화의 가치를 되짚는다. 이번 작품은 본지를 통해 처음 선보인 이후, 역사학계와 문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그림자 속에 묻혀 있던 경기 동학군의 역사가, 이제 『하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세상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김현종 작가 인터뷰 https://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357&me_id=19&me_code=30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3일○ 660년, 백제 의자왕, 당나라로 끌려가다. 의자왕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사비성(지금의 부여)이 포위되자 태자와 함께 웅진성(지금의 공주)으로 도망쳤지만 사비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했다. 이에 의자왕과 왕자들, 신하 88명, 백성 12,000명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 1783년, 영국,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다. 미국 독립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조약으로, 1775년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시작된 이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을 위한 전쟁으로 바뀌었다. ○ 1943년, 이탈리아, 미국 등 연합국에 항복 선언.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과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동맹국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전개되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3년 7월, 시칠리아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실각했다. 이후 새 총리가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이날 연합군과 휴전 협정에 조인했다. -
천도교와 3 · 1운동(17) "1918년 12월 1일 경운동 현 교당 기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1운동의 준비 포덕 60년(1919) 당시의 교구장은 이종수(李種秀)였다. 구성교구는 태천교구와 합하여 구성대교구로 되어 있었다. 대교구장은 태천의 이정점 어른이었으나 구성교구장은 이종수 어른이 맡았다. 교구의 중요 직책은 전제원(典制員)에 백응구, 공선원(共宣員)에 전중록, 금융원(金融員)에 박응준, 서기에 원명준이었다. 각 전교실의 전교사는 모두 20명이었으며 다음과 같다.(포덕 60년) 구성면 김정상, 동산면 김관화, 오봉면 김상련, 방현면 임찬흡, 이현면 강만영, 노동면 배윤직, 운계동 허희경, 깅상동 이치언, 서산면 최봉호, 백운동 김낙용, 송수동 이천길, 대성동 최광한, 신음동 전학수, 관서면 이대화, 사기면 윤태화, 왕당동 김용연, 조악동 이시영, 이 밖에도 중방동·청용동 였다, 장동 전교실이 있었는데 전교사는 정기환·노인화 였다. 교회건물은 구성면 우부동에 4동(38間), 서산면 남평동에 2동(6間), 백운동에 1동(4間), 동산면 덕화동에 2동(9間), 방현면 하단동에 1동(5間), 청룡면에 2동(8間), 처나면 탑동에 2동(7間), 사기면 송백동에 1동(3間), 신시에 1동(5間)이 있었다. 연원은 이종수·백웅구 계통과 원치영·김정삼 계통이 주가 되었고 선천의 김상열(月鳳 金商悅) 계통이 약간 있었다. 3·1운동 준비는 연원계통으로부터 착수되었다. 제1차 준비사업은 자금조달이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3·1운동 거사자금으로 포덕 59년(1918) 11월부터 본격적인 모금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의 문헌인 ‘천도교일반’이란 글에 보면 “동년 12월 28일 이미 약 9만원의 건축비를 신도로부터 연사(捐捨)케 하고 그 중에는 전혀 신도의 임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므로 반환해주도록 명한 바…”라고 하였다. 총독부는 천도교가 교당건축비라는 명목으로 모종의 자금을 모은데 대해 의심을 갖고 강제로 반환조치토록 하였던 것이다. 각 교구는 11월 초부터 모금에 착수, 1인당 5원 내지 10원씩을 목표로 약 50만 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구성에서도 약 1천호 정도가 모금에 응했으므로 그 금액은 5천 원이 넘는다. 포덕 52년(1911) 1년간에 납부한 월성미 총액이 8백9십7원(포덕 52년도 금융관 금전출납표)이었으므로 6배에 가까운 자금을 모아 올렸던 것이다. 다른 군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상한 각오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다는 절실한 심정으로 논밭을 팔고 소도 팔아 바쳤던 것이다. 이 자금 각출을 간과하고 3·1운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일제 총독이 강제로 돌려주라고 하여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돌려준 것처럼 영수증만 발행하였다. 이런 사실이 후일에 발각되어 강계교구에서는 간부들이 기소되어 처벌받은 사실도 있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1918년 12월 1일 경운동 현 교당 기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모금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어 1월 말에 목표 액수가 완료되었다. 한편 총부는 정신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즉 중앙총부는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에 걸쳐 매일 하오 9시에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염원하는 기도를 봉행토록 하였다. 중앙총부는 이 기도를 각별히 진행시키기 위해 경성·해주·의주·길주·원주·경주·서산·전주·평강 등 9개 처에 대표기도소를 특설하고 주요간부를 파견하여 지도하였다. 각군 교구에서도 주요 간부들이 날마다 교당에 모여 기도식을 봉행하면서 장차 어떤 큰 일을 치르기 위한 마음다짐을 굳혀나갔다. 3·1만세운동의 본격적인 준비는 선천의 김상열(勉菴 金商悅)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월봉 선생은 선천에서 사기면으로 독립선언서를 보냈으며 이것을 다시 구성군에 비밀히 송달했다”고 사기면 허철 )선생이 증언하고 있다. 구성군교구에서는 선언서를 등사기로 비밀리에 더 많이 복사하여 각 면에 배포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운동 전개 연원과 지역관계로 운동은 3개소에서 각각 추진되었다. 즉 영북지방(사기면·천마면·관서면)은 신시(사기면 소재지)에서, 영남지방은 구성읍과 남시(방현면 소재지)에서 추진되었다. 구성읍은 구성면·서산면·동산면 등 3개면이 합쳐 준비하였고, 남시에서는 방현면·노동면·이현면 일부, 오봉면 등 4개면이 합쳐 준비하였다. 일본 총독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3월 10일(확인 곤란함)과 3월 11일에 구성읍과 남시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한국독립운동사 1』에는 다음과 같이 일제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五) 철산·구성군 : …다음 구성군내의 운동은 읍내와 신시에서 주목을 끌 운동이 일어났다. 읍내운동은 3월 11일에 발생하여 3월 20일과 4월 1일에 각기 1천명 내지 3천명의 군중이 회집, 일 군경의 발포제지를 무릅쓰고 몇 차례씩 시위를 전개하였다. 신시에서는 3월 31일과 4월 1일의 양일간에 걸쳐서 약 1천 명 내지 1천 5백 명의 군중이 회집, 시위를 벌였으며 양일 다 살상자가 적지 아니 발생하였다.” (360면) (3월 10일과 20일의 시위운동은 확인하기 어려움) 평북도 장관이 정무총감에게 3월 31일자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四) 구성군 관내 : 동군 방현면 남시에서는 3월 11일 오후 2시 폭민 약 3백명이 일단이 되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하여 특히 헌병주재소에 쇄도코자 하였으나 미리 경계중인 구성 분견 소장이 해산시키고 주모자 15명을 체포하였음.”(760면) 三. 구성군 관내 : “3월 18일 오후 2시 사기면 신시의 장날에 편승, 야소교도 등을 중심으로 하는 폭민 약 3백 명이 독립기를 날리며 만세를 고창하고 헌병주재소에 밀려왔으나 즉시 퇴산시켰으며 주모자 10명을 검거하였음.”(762면) “본일(3월 11일) 삭주군 읍내에서 약 2천명, 구성군 읍내에서 약 3백...의 군중이 소요하여...”(764면) “三, 구성군 관내 : 읍내에서 31일 약 3백 명이 폭동을 일으켜 일단 해산되었으나 재기하여 수(遂)히 사상(死傷) 3명을 내었으며 의하여 파병을 하였음. 동군 남시에서도 동일(3월 31일) 폭민 5천명 이상이 집합하고 주재소를 파괴하였음. 또한 동군 신시에서도 동일 폭동이 일어났으므로 선주수비대에서 15명의 파병을 하였음.”(766면) “二. 구성군 관내 : 4월 1일 약 3천명의 폭민이 읍내에 습래(襲來), 사방의 문에서 진입코자 함을 발포 해산시켰으나 계속 불응하여 평양에서 소위이하 병정 4명의 응원을 받아 엄중 경계중임.”(769면) 이상의 평북 도지사가 총독부 정무총감 앞으로 보고된 보고서에 의하면 구성군 읍내에서 두 번(31일, 4월 1일), 방현면 남시에서 두 번(3월 11일, 31일), 사기면 신시에서 세 번(3월 18일, 31일, 4월 1일)씩 모두 7차례의 시위가 있었다.(3월 10일의 만세시위는 확인이 안됨). 이밖에 자료로써 주목할 만한 것은 이병헌(李炳憲)의『3·1운동비사』가 있고, 이용락(李龍洛)의 『3·1운동실록』이 있으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3·1운동)』가 있다. 세 가지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 (十二) 구성군 의거 : 3월 11일 오후 2시 경에 천도교 주동으로 남시에서 약 4백명이 회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헌병의 총칼에 사상자 3명을 내고 주모자 15명이 체포되었고, 그 후 3월 30일에는 읍내와 남시에서 다수의 군중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적의 총칼에 사상자가 10명이나 되었다. (3월 30일은 31일의 잘못인 것 같음) 이용락의 『3·1운동실록』 구성 : 3월 11일 오후 2시경 남시에서 약 4백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사상자 3인을 내고 해산을 당하였다.“3월 30일 읍내와 남시에 2만 여명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10여인이 총살을 당하였고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3월 30일은 31일의 오기인 것 같음) 『독립운동사』 제9절 구성군 : 3월 11일 하오 2시경 군내 남시에서 군중 4백여 명이 시위투쟁을 벌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로 몰려들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피검자 15명을 내었다. 3월 30일(31일의 오기인 것 같음)에는 오전과 정오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3백 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벌여 읍내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헌병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여기서 군중은 경찰과 충돌, 사상자 수명을 내고 해산했다. 3월 31일은 남시 장날이었다. 이날 정오를 기하여 5천여 명의 군중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일본 기록에는 이날 군중은 낫과 도끼를 들고 헌병주재소를 포위, 헌병들에게 폭행하였다고 했으나 이는 자기네들 발포의 구실을 삼기 위한 과장 보고이려니와 이날의 투쟁이 심상치 않았던 양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 7명과 피검자 5명을 내었다. 같은 날 31일에 신시에서도 일어났다. 즉 이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벌였다가 헌병주재소로 몰려드니 헌병이 발포하여 부상자 1명을 내었다. 4월 1일에는 읍내와 남시와 신시 세 곳에서 일어났다. 읍내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 9백 명 가량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일본측은 헌병과 군대가 연합하여 이를 제지 해산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들은 끈덕지게 투쟁을 계속, 하오 5시에 이르러서야 부상자 3명을 내고 해산하였다. 남시에서는 전날의 투쟁을 이날에 재개하였다가 강제 해산되었으며, 신시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에 전날보다도 더 많은 1천 5백명 이상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재개하였다가 경찰의 발포로 군중측에 부상자 5명, 피검자 30명과 일본 측 부상자 4명을 내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확실한 것만 추려보면 구성군에서의 3·1만세시위는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즉 3월 11일에는 남시에서, 3월 18일에는 신시에서, 3월 31일에는 읍내와 남시 및 신시 등 세 곳에서, 4월 1일은 읍내와 신시에서 시위운동이 벌어졌다고 여겨진다.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On Propagating Truth, No.3In ancient China, there were five virtuous kings, who made wise laws and ruled the people with compassion and justice. Thereafter sages were born and they determined the movements of the sun, moon, and stars, and they made a calendar and a book of astronomy. Then, they determined the unchanging nature of the Heavenly Way.⁴ They taught that the mind and actions of humankind as well as all the changes of the universe depended on the Will of Heaven.⁵ The sages had reverence for the Will of Heaven and followed the Principle of Heaven.⁶ This passage is excerpted from the English edition of Donggyeong Daejeon, translated by Professors Suk San Yoon and Yong Kim. The verse is from On Propagating Truth, Number Three, in Donggyeong Daejeon. -
천도교 연구소, 연구위원 공개 모집 …교단 미래 전략 모색천도교중앙총부 산하 천도교 연구소가 교단의 장기적 과제 해결과 미래 발전 전략 수립을 위해 연구위원을 공개 모집한다. 이번 모집은 천도교가 당면한 교단 내부의 변화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환경 변화 속에서 종교의 역할을 새롭게 모색하려는 취지로 추진된다. 연구 분야는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전 분야로 열려 있으며, 지원 자격은 만 65세 이하이면서 박사과정 수료 이상의 학력을 갖춘 이들이다. 지원을 위한 별도의 신청서는 없으며, 연구 의지가 있는 학자와 전문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모집 기간은 포덕 166(2025)년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다. 천도교 연구소 운영 방향은 오는 10월 중순 열릴 예정인 차기 모임에서 구체화될 예정이다. 연구위원으로 활동할 이들은 향후 교단의 학문적 기반을 강화하고,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천도교의 역할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연락 및 문의는 천도교 현기사 성주현 상주선도사(010-3020-4893, heeamllo@chondogyo.or.kr)에게 할 수 있다. -
동두천교구, 우이동 의창수도원에서 야외 시일식 봉행천도교 동두천교구는 지난 8월 31일, 매 시일 교당에서 봉행해 오던 시일식을 우이동 의창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겨 봉행했다. 이날 시일식에는 교구 소속 교인 15명이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먼저 의암성사의 묘소에 참배하며 성사의 뜻을 기렸다. 이어 의창수도원에서 진행된 시일식에서 교인들은 3.1혁명을 주도한 의암성사의 정신과 ‘이신환성(以身換性)’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지상천국 건설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이날 시일식 설교는 서종환 의창수도원장이 맡아 더욱 깊은 교화의 시간이 되었다. 교인들은 교당이 아닌 성지에서 봉행한 특별한 시일식이 더욱 신심을 깊게 해주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강정환 동두천교구장은 “앞으로 한 달에 시일이 다섯 번 있는 경우, 네 번은 교당에서, 한 번은 의창수도원에서 봉행하자”는 방안을 제안했으며, 교인들은 이에 뜻을 모았다. 의암성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의창수도원의 역사적 의미를 재확인하는 이번 시일식 후 동두천교구 교인들은 앞으로도 교당과 수도원을 오가며 신앙과 수련의 터전을 함께 가꾸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