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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사(小史) ○ 9월 25일○ 1513년, 에스파냐 탐험가 발보아, 태평양 발견 에스파냐 탐험가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 1475~1519)가 파나마 지협을 넘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발견하였다. 발보아는 1510년 파나마에 상륙하여 무능한 총독을 쫓아낸 뒤 총독이 되었다. 초기에는 다른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원주민을 학살하고 고문했으나, 한 원주민 추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 학살을 멈추고 원주민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1513년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태평양에 도착했고, ‘남쪽 바다(Mar del Sur)’라고 이름 지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인도라고 생각한 것처럼 발보아 역시 태평양을 작은 만으로만 생각했다. 태평양 발견으로 본국인 에스파냐에서 발보아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신임 총독은 그의 인기를 우려해 발보아에게 협력한 원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발보아에게도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 1776년, 정조,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1752~1800)는 즉위 후인 음력 9월 25일, 창덕궁 금원 북쪽에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 직제학, 직각, 대표, 검서관 등의 관리를 두었다. 규장각은 왕실의 학문 연구 기관이며 도서관이자 국정 운영의 자문 기관으로서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의 학문 발전과 문화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정조의 개혁 의지와 학문 존중 정신이 집약된 상징적 제도라 할 수 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 산하로 재편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폐지되었다. 해방 이후 일부 남아 있는 도서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이관되었다. ○ 1881년, 중국의 사상가 루쉰이 태어나다 중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 루쉰(魯迅, 1881~1936)이 이날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이며, ‘루쉰’은 데뷔작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할 때 처음으로 사용한 필명이다. 『광인일기』는 신문화운동을 주도한 세력의 시선에서 본 봉건사회에 대한 최초의 도전서였으며, 사상혁명과 문학혁명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중요한 작품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아Q정전(阿Q正傳)』은 신해혁명 시기 중국 농촌의 생활상을 심각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봉건적 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루쉰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떨치게 했다. 루쉰의 사상과 문학은 이후 중국 현대문학의 초석이 되었고 루쉰이라는 이름은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로 자리매김했다. ○ 1950년, 시인 정지용이 사망하다 한국 현대시의 대표적 서정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이 세상을 떠났다. 충북 옥천 출신으로, 휘문고보와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휘문고보 교사를 거쳐 광복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향수」, 「유리창」 등의 작품으로 섬세한 언어와 서정적 감수성을 통해 한국어 시의 미학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람, 자연, 하늘이 어울려 사는 세상, ‘밥이 생명이다’ 전시근현대미술관 담다에서 9월 2일부터 30일까지 열리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131주년 특별기획전 ‘밥이 생명이다’는 동학 천도교 정신을 예술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통해 민중의 목소리와 생명 사상을 오늘의 언어로 전한다. 제2회 K-동학예술제와 연계된 이번 전시는 회화, 판화, 설치, 조각, 디지털 영상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매체를 아우르며, 모두 3개의 존(Zone)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제1 전시관은 ‘K-동학, 그 날의 함성’을 주제로 강금복, 김태삼, 배삼수, 송문익, 전정호, 조안석, 최연, 홍성민, 홍성웅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다. 강금복 작가의 「해월 최시형」은 해월신사의 고된 삶을 상징하는 깊은 주름과 꿋꿋한 눈빛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검은 바탕 위에 붓으로 드러낸 눈매는 마치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하다. 조안석 작가는 「문바위골에서의 해월 최시형」이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해월 신사의 깨달음을 글로 기록하는 장면과 문바위 뒤 언덕 너머까지 총기포령으로 인해 운집한 수많은 동학군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였다. 홍성웅 작가의 「비나리」는 동학농민군의 넋을 위로하는 비나리다. 판화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민중의 축원이자 노래가 됨을 보여준다. 제2 전시관은 ‘K-동학, 그 날의 함성’을 주제로 중앙총부가 소장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9점이 특별 전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무장동학포고문(茂長東學布告文)」 필사본 영인본은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무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면서 내놓은 포고문이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생생한 현실 진단과 지배층에 대한 비판이 매우 선명히 제시되어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게 된 배경과 목표가 담겨 있다. 「대정(大正)」, 「교장(敎長)」, 「교수(敎授)」 영인본은 해월 최시형 신사가 육임제(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 가운데 교장, 교수, 대정에게 수여한 임명장으로, 군영의 질서와 지휘 체계를 보여준다. 강금복, 고재춘, 김성인, 두시영, 이행균, 진철문, 박경범 작가가 참여한 제2 전시관에서 고재춘 작가는 조각 「수심정기(守心正氣)」에서 간결한 형태의 돌과 금속을 조합해, 전투에 임하기 전에 청수를 봉전한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김성인 작가(근현대사미술관 담다 이사장)의 「태동」은 생명 탄생의 순간을 추상적 형태로 풀어낸 작품으로, 평등, 인간 존엄을 주장한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대한민국 근대화의 시작임을 알린다. 또한 화면을 가득 채운 원과 곡선은 공동체적 미래로 나아가는 에너지를 상징한다. ‘K-동학, 예술평화씨알’을 주제로 하는 제3 전시관에는 방그레, 신희섭, 오관진, 이상구, 조인길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다. 이상구 작가는 설치미술 작품인 「동학! 오늘을 말하다」에서 삶과 죽음, 희생과 구원의 상징을 넘어 남북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동학농민군을 희생으로 몰아넣은 폭탄과 총알, 그 바깥으로 널린 수많은 해골은 동학군들의 죽음과 고통, 분단을 상징한다. 이는 한편으로 통일을 향한 새로운 시작, 평화의 길을 여는 희망을 나타낸다. 이번 전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천도교의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장(場)이다. 오는 9월 30일까지 근현대사미술관 담다에서 이어지는 이번 특별전은, 세대를 아우르는 작품과 기록,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밥이 곧 생명”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남은 기간 더 많은 교인들과 일반인들이 전시장을 찾아, 가족과 함께 작품을 직접 마주하며 동학 천도교 정신을 오늘의 삶 속에서 새롭게 되새기기를 기대한다. 근현대사미술관 담다 전화 031-283-7222 경기 용인시 기흥구 강남동로140번길 1-6 (에버라인 어정역 1번 출구 도보 10분) ※ 매주 월요일 정기 휴무 -
동학정신 세계화의 비상, 2025 경주동학문화제 개최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포덕 166(2025)년 9월 27일(토요일), 경상북도 경주시 경주동학교육수련원에서 「2025 경주동학문화제」를 개최한다. 올해 문화제는 “동학정신 세계화의 비상”이라는 주제로 열리며, 동학의 핵심 가치인 인내천(人乃天), 평등·인류애·자연 존중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이를 세계와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되며, △노리개 만들기 △3D펜 작품 만들기, 페이스페인팅, 코딩로봇 체험 등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10:00~18:00)과 기념식(13:00~14:00), 그리고 다양한 축하공연과 비전선포(14:00~15:30)로 꾸려진다. 축하공연 무대에는 하랑씨어터의 ‘해설이 있는 뮤지컬과 LONG ISLAND밴드, 부산예대 HADAN FAMILY, 세심관, DJ 라임의 트로트EDM 공연팀 등이 참여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동학은 단순한 종교적 사상을 넘어 오늘날 K-Spirit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인간 존엄과 평등을 강조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원류로 자리 잡아왔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진 동학정신은 억압과 불평등에 맞서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어낸 역사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 속에서도 중요한 사상적 자산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번 경주동학문화제는 이러한 동학정신을 재조명하고, 세계시민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플랫폼으로 의미를 더한다. 천도교중앙총부 관계자는 “경주동학문화제는 동학정신을 문화와 예술로 풀어내 시민과 공유하는 축제의 장”이라며, “특히 이번 행사는 동학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상징적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행사명: 2025 경주동학문화제 일시: 2025년 9월 27일(토) 10:00~18:00 장소: 경주동학교육수련원(경주시 탑리길 108) 문의: 02-6488-6831 주최·주관: 천도교중앙총부 후원: 경상북도, 경주시 -
[칼럼] 죽음 탐색, 죽음으로 만나는 삶나는 그즈음 지독히도 관념의 세계를 탐닉하는 기인 소설가의 책을 읽고 있었다. 『죽음의 한 연구(박상륭. 문학과 지성사. 2020)』였다. 올해만 두 사람의 자살과 참으로 소중한 한 사람의 죽음을 맞았던 터여서다.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은 일진당 정홍숙 님이다. 내 평생 남의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오열을 하고 장지까지 따라가서 통곡을 한 건 처음이다. 마지막이기도 할 것이다. 그만큼 내게 일진당은 각별하고 각별한 분이시다. ‘죽음의 한 연구’를 갈피마다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읽는 도중에 또 하나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내가 아는 20대 청년이었다. 그 부모도 잘 안다. 그 지역에 강의하러 가면 그 집에서 자기도 했고 청년과는 식사도 했다. 기가 막히고 숨이 막혔다. 사람의 죽음은 천지 순환의 한 과정이라느니, 소멸은 없고 형상이 바뀔 뿐이며 모든 존재는 형상이 있고 없음을 넘나드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라고 들어왔다. 죽음에 대한 고담준론을 많이도 나눠봤다. 그러나 현실이 되면 다르다. 청년의 부모에게 위로 전화도 안 되었다. 전화를 꺼놓은 것이다. 새파란 자식을 자살로 보냈으니 전화나 문자마저 조심스러웠다. 며칠 지나서 연락이 닿았다. 또 며칠이 지나서 전화가 왔는데 나를 와 줄 수 있냐고 했다. 아파트로 들어가려는데 겁이 나고 울음이 바쳐서 못 가겠다는 것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목을 맸는데 같이 들어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날짜를 잡고는 먼 길을 네댓 번 차를 갈아타며 갔다. 나는 나름의 준비를 극진히 하고 출발했다. 말려뒀던 쑥을 양손으로 비벼가며 손질했다. ‘티베트 사자의 서’ 해당 페이지와 ‘성령출세설’ 전문을 인쇄했다. 향 대, 초, 쑥 차, 새 다기 세트도 챙겼다. 6시간여 가는 동안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우연히 버스에서 몇 년 만에 만난 분이 우리 어머니 49재 때 바라춤을 추신 분이셨다. 기차로 갈아타는데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그 순간에 죽은 청년의 부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변호사와의 상담이 늦어져 약속 장소에 한 시간여 늦겠다는 것이다. 나는 여유 있게 다음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아파트로 가는 동안에 쑥 향을 피울 라이터를 안 가져온 게 생각나서 다이소 매장에 들어 라이터를 샀는데 장작 아파트에 들어가서 내 짐을 풀자 준비한 각 성냥이 나왔다. 내가 깜빡하고 성냥 챙긴 것을 잊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냥으로 아무리 해도 불이 붙지 않았다. 그래서 사 간 라이터로 초와 쑥대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성냥 챙긴 것을 알고 라이터를 사지 않았다면 진혼 의례가 차질을 빚을뻔한 것이다. 식구들은 미리 만나 식사와 차를 나누며 위로를 했고 동의를 구한 방식대로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진혼 의식을 했다. 모든 절차가 잘 끝났다. 청년의 흔적이 있는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엄마는 눈물로 아들을 떠나보냈다. 불교의 ‘광명진언’인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를 108독 했다. 부모가 절에 아들을 모시고 매일 1000독씩 한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준비한 ‘성령출세설’ 독송은 하지 않았다. 진혼 의식의 준비과정과 진행을 하는 동안 나는 죽음을 살았다. ‘성령출세설’에 대한 걸출한 연구서인 오문환 님 논문을 다시 읽었다. 중앙대교당에서 한 라명재 님의 죽음에 대한 설교도 동영상으로 보았다. (https://youtu.be/GiG7PNrbqlE?si=y6mkA2H2sa2Zz_h_) 내가 6~7년 전에 ‘오마이뉴스 10만 인 클럽’에서 한 죽음 강의 자료도 다시 보았고 어머니 49재 때 우리 집에서 내가 준비해서 내 나름대로 했던 자료와 영상도 다시 들추어봤다(https://cafe.naver.com/moboo/4039?tc=shared_link) 지난 4월에 전생 연구가 박진여, 한국죽음학회 회장 최준식, 서울 의대 교수 정현채, 하버드 의대 이븐 알렉산드 등 종교·예술·의료인 50여 명이 한 <2025년 인간의 사후 의식 존속에 관한 서울 선언>도 다시 꼼꼼히 읽었다. 재작년 동대문구청에서 6개월 동안 진행한 노화와 죽음 잘 맞기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했던 경험도 소환했다. 인하대 의대 학장 임종한 교수와 공저를 냈는데 그때 내가 쓴 글도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와 49재였다. <죽음의 한 연구>는 바닷가 창녀의 아들인 ‘나’가 어느 선승에게 이끌리어 ‘유리’라는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살인을 하게 되고 그 살인으로 촌장이 되고, 이후 ‘유리’의 계율에 따라 다시 죽음에 이르는 길에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완성하는 이야기이다. 죽음에 대한 완전한 완성을 꿈꾸는 박상륭 작가의 시도가 엿보인다. 우리의 삶이란 크게 둘로 보인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밝게 할 것인가. 또 하나는 어떻게 하면 죽음에 맞선 영혼의 구제이다. 세상에 열과 성을 다하되, 세상 너머의 초월적이고 영적인 존재로서의 자기 구원을 이룰 것인가. 박상륭 책은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깊은 회의를 바탕으로 영적 구원에 집착한다. 비운의 천재 작가 조선 중기의 김시습도 그랬다. 그는 꿈과 환상과 현실을 서정성과 역사성에 버무리는 신화 작품을 쓸 수밖엔 없었다. 우리는 오늘도 생과 사의 다리 위에서 몸부림친다. <죽음의 한 연구>에서 수도승 유리가 지독한 고행을 자처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작품에는 생명은, 녹색은, 영생마저도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 빛을 낸다는 철학의 대칭성이 있다. 일진당 님은 내가 어머니 모신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쌀독은 텅텅 비고 몸과 마음은 비렁뱅이처럼 너덜너덜해 있을 때 천사처럼 오셨다. 내가 사는 장계면 사무소와 동네 이장에게 떼를 써가며 내 집을 알아냈다. 경월당 님과 같이 바리바리 어머니 내의와 먹을거리와 돈 봉투를 들고 오셔서 나를 다른 방으로 가게 하고는 두 분이서 어머니랑 잤다. 밤 새 어머니 뒷수발을 다했고 나는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쪽잠을 벗어나 숙면을 했다. 내가 만 8년을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있었던 힘이 되어 주셨다. 나는 그때 참 한울님을 만났다고 여긴다. 우리 어머니 49재 때 바라춤 추신 분이 청년의 49재 때도 같은 춤을 추기로했다. 한울의 삶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은 한울의 삶을 이어간다. 오늘도 그렇다. 전희식(목암. 진주 교구) -
천도교와 3 · 1운동(20) "천도교의 결정적인 역할"『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제 5 장 3.1운동 관련 논문 1, 3.1운동과 천도교 (참고 표영삼 자료) 머리말 포덕 60년(1919) 3월 1일 일어났던 3.1운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나와 있다. 긍정적인 평가도 나와 있거니와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부정적인 평가이든 긍정적인 평가이든 제각기 보는 입장이 있어 일리가 있다. 역사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교단으로서는 3.1운동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 3.1운동과 교단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근년에 이르러 일부 진보적 사학자 중에는 천도교의 역할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동학혁명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눈으로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 3.1절을 맞아 교단의 입장에서 몇 가지를 추려 그 의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천도교의 선도적 역할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규명은 천도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 역할은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준비단계에서는 천도교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운동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 대중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첫째, 3.1운동의 기본 방침을 천도교에서 1월 하순경에 결정했다. 모든 사회운동에는 그 운동 원칙을 정하고 전개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기본원칙은 바로 운동주체가 정하게 마련이다. 당시 의암성사 밑에서 참모로 주역을 담당했던 여암(如菴 崔麟)의 수기에 의하면 기본원칙은 천도교에서 단독으로 결정했다. 여암이 의암성사를 찾아갔을 때 의암성사는 “장차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우리들이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무위무능하게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이미 정한바 있으니 제군은 십분 분발하여 대사를 그르침이 없이하라” 고 부탁했다 한다. 의암성사의 이 말씀은 3.1운동의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 때는 기미년 1월하순경인 듯 하여 대단히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은 3대 운동 원칙을 세웠다. 1) 독립운동은 대중화하여야 할 것. 2) 독립운동은 일원화 하여야 할 것. 3)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 이 3대 원칙의 결정은 물론 의암성사와 권동진·오세창과 같이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3.1운동은 천도교가 단독으로 정한 원칙에 의해 전개되었던 것이다. 둘째,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은 전체 천도교인 단독으로 마련했으며 또한 지출되었다. 3.1운동 1년 전인 포덕 59년(1918) 4월에 부구(部區) 총회를 열고 신 교당을 건축키로 경정하였다. 모금운동은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천도교인들은 단순히 대 교당을 짓는다하여 성금을 각출한 것이 아니라 성사께서 어떤 중대한 일을 거사하게 될 것이므로 앞장서서 자금을 마련해야겠다는 애국애교의 심정에서 각출했던 것이다. 천도교인들은 가난한 농민들이었으므로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논밭과 소를 팔았던 것이다. 즉 생활 수단을 팔아 나라위한 큰일에 바쳤던 것이다. 기미년 1월에 각출한 성금은 상당액에 이르렀다, 이 때 일제 총독부 당국이 이 사실을 알고 돌려주라는 압력이 있었다, 할 수 없이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방교구장들과 상의한 결과 각 교구는 되돌려 받은 것처럼 영수증만 쓰고 당초 목적한 대로 운동자금으로 사용키로 하였다. 이때 약 500만 원 가까이 모금되었는데 대교당 건축과 중앙총부 사무실 건축에 필요한 27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운동자금으로 쓰게 되었다. 은행에 약 6만 원 예치했다가 당국에 의해 동결되었고 그 나머지는 수시로 비밀히 사용할 수 있게끔 춘암상사에게 맡겨놓았다. 이 자금으로 준비단계의 각종 비용을 충당했으며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에 필요한 여비 등에도 사용했다. 심지어 기독교 측의 요청으로 5000원을 주었으며 독립선언서 인쇄 사실이 탄로 나자 종로경찰소 신형사의 입을 막기 위해 역시 5000원의 거금을 주기도 했다. 어떤 운동을 막론하고 운동자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천도교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금을 주도적으로 마련 차질 없이 진행하게 하였다. 이런 자금마련은 운동주체로서의 천도교가 해야 할일을 완수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즉 운동의 주체자로서 전체 교인이 참여하여 논밭팔고 소 팔고 심지어 여자들의 머리치장에 필요한 다리까지 팔아 마련한 것이다. 셋째,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시종 천도교에서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쇄와 배포도 천도교가 주관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육당 최남선이 집필하였다. 그를 선정하였던 것이 바로 천도교였으며 2월 15일에 초안이 완성되어 가져왔던 것을 검토하고 보관 한 것도 천도교였다. 그리고 인쇄에 있어서도 천도교에서 전적으로 맡아 하였다, 조판기술 관계로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에서 판을 짜가지고 2월 27일에 넘겨받아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인쇄하였다. 인쇄 총책임자는 33인의 한 분이었던 천도교 간부(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었다. 독립선언서의 배포 책임도 천도교에서 전담하였는데 이종일의 책임하에 인쇄를 마친 후 신 교당 건축 장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가 배포했다. 서울지역의 배포는 학생들이 담당하였고 지방에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자기 종교 계통에 따라 배포하였다. 천도교는 독립선언서의 작성에서부터 인쇄 배포에 이르기 까지 준비단계에서 거의 단독으로 담당하였다. 운동의 일원화에 앞장서다 넷째, 3.1운동을 일원화 하는데 있어서도 천도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기독교 측의 노력도 높이 평가하지만 전민족의 운동이 되게 하기 위해 천도교 측의 노력이 대단했다. 여암 자서전의 일부를 보면 처음에는 윤용구·한규설·박영효 윤치호 등과 접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으로 기독교 측과 불교 측을 만나 공동으로 운동을 벌이자고 합의하였다. 윤용구·한규설·박영효·윤치호 등 4인이었다. 윤용구는 구한말 대신으로 국변 후에 일본의 작위를 고사하였고 그 성품이 고결한 사람이었으며 한규설은 을사늑약 때 참정대신 즉 총리대신으로 그 조약을 한사코 반대한 사람이었고 박영효는 소위 개화당 영수로서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일인의 침략을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귀양살이까지 한 저명한 귀족 혁명가이다. 윤치호는 과거 광무년 간에 독립협회장으로서 특히 미국인 간에 신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규설만이 일이 중대하니 심중히 고려해 보자는 약속이었고 그 밖에 박영효·윤용구·윤치호는 모두 회피하여 면회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한 인물들이다. 독립운동은 민족적 제전이다. 신성한 제수에는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좋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제물이 되면 어떠냐, 구시대의 인물들과의 제휴가 실패되자 다음에는 기독교와 불교 유교 측에 교섭해 보기로 하였다. 이승훈은 그간 자기가 경과한 모든 사유를 말하고 다음에 작일 기독교 측 여러 사람이 회합한 내용을 “기독교 측에서 독자적으로 운동을 진행할 방침”이란 것을 말하였다. 도대체 일국의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대사업이다. 독립운동이 만일 분산적으로 된다면 그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민족적 불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니 절대로 통일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승훈은 곧 이어서 말하기를 “작일 회의에서 가장 곤란한 문제는 비용에 관한 문제였는데 분담해서 변통해 보자고 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한즉 천도교에서 우선 5000원만 돌려주었으면 만사여의할 듯싶다. 만일 5000원이 못된다면 3000원가량이라도 우선 급한 비용이 될듯하니 기어이 돌려주기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동대문 밖 상춘원에 가서 의암성사를 뵙고 그동안 경과 사항을 보고하고 이승훈이 청구한 금액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선생님 말씀이 5000원 청구하였으니 그 액수대로 융통해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다음날 22일에 5000원을 가지고 소격동 이승훈 숙소에 가서 직접 교부하였다. 결국 5000원을 마련해줌으로써 기독교 측과 제휴는 성공하였다. 다음은 불교 측과 제휴하는 일이 남았다. 24일 밤에 평소부터 친교가 있는 강원도 양양군 통천면 신흥사 승려 한용운(韓龍雲)을 생각하고 그의 주택 재동 43번지를 탐방하였다. 나는 그의 의사를 간파하고 그간의 경과 사실을 피력하였더니 불교 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널리 통지하지 못한 채 한용운 백용성 2인만 참가하였으나 그들은 족히 불교를 대표할만한 인물이었다. 결국 천도교 기독교(장로교, 감리교) 불교 등 세 종교 단체가 하나가 되었으며 또한 학생들이 가담되어 운동을 거족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유감스러운 점은 유교 측 대표와 천주교 대표가 빠졌다는 점이다. 끝으로 남은 일은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는 일이다. 2월 27일에 이승훈·이필주·함태영·한용운·최남선 등이 모여 의론한 결과 의암성사를 첫머리에 쓰고 감리교, 불교 순으로 대표자의 이름을 쓰고 나머지 29명은 가나다순으로 정했다. 육당이 중간에 서서 인물로 보나 거사동기로 보나 손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수위를 쓰는 것이 어떠냐고 기독교 측에 권고했다. 이승훈은 그러면 두 번째로 기독교를 대표하여 길선주 목사를 쓰자고 타협론을 제출했다. 그러나 길선주는 장로교파로서 기독교 전체를 대표할 수 없은즉 감리교를 대표하여 이필주 목사를 세 번째로 쓰자고 했다, 그 말에 따라 한용운은 제 4위는 백용성을 쓰는 것이 옳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의암성사를 첫머리에 쓴 것은 천도교대표자로 기명한 것이 아니라 육당이 “손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수위에 쓰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는 점과 이 육당의 제안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의암성사는 영도자로서 수위에 기록한 것이며 당시 일반 사회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대표 중에 대표가 된 것이다. 교단의 3.1운동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역사를 보는 눈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면 그 이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3.1운동을 남다르게 보는 대표적인 사례는 북한의 3.1운동관이다. 그들은 첫째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 중에서 러시아 혁명을 개입시키고 있다. 러시아 혁명에 자극되어 3.1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둘째, 3.1운동의 주체는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33인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타협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관으로 보면 사회 구조는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체제로 바뀌게 마련이므로 그 동기는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에 뿌리를 대지 않을 수 없으며, 3.1운동의 주체는, 특히 선봉적 역할은 노동자로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데 자극받아 일어났다고 하면 그들의 이론에 맞지 않을뿐더러 사회사적으로 분수령을 형성하는 3.1운동에서 소외되게 될 것이다. 그들의 3.1운동관은 종교 단체의 역할을 철저히 배격하고 자기들의 역사관에 부합되는 이론으로 재해석하려는데 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정연한 설명이 가능하더라도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서는 이론 자체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천도교에서는 다른 역사관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즉 부정적으로 평가하든지간에 우리 나름대로의 역사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3.1운동은 낡은 문화가 물러가고 새 문화가 다시 개벽되는 종교적 역사관에 입각한 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사에서 전 근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구별을 신분제도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듯이 낡은 문화와 새 문화의 차이는 인간의 존엄성에서 벗어나는 질서와 향상시키는 질서의 차이로 구분된다. 전근대적인 사회체제는 신분제도를 근간으로 한다면 근대적 사회체제는 신분제도가 타파되고 평등성을 확보하는 사회체제의 차이에 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낡은 문화 (병든 문화)는 인간존엄성을 무시한 문화라면 새 문화(다시 개벽)는 인간존엄성을 향상시키는 문화이다. 대신사는 그 분기점을 스스로의 세계관에 대한 해답의 체계(無極大道)를 얻은 포덕 원년(1860)을 분기점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우리의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향상시키는 역사로 흘러왔다는 것이다. 동학혁명운동도 3.1운동도 정치 경제제도의 현상들을 제거하면 이런 쪽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이 천도교의 종교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추상적일 수 있으나 종교적인 역사관이므로 그런 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존엄성의 실험을 위한 역사적 과제로 제기한 것이 다름 아닌 보국안민이다. 보국은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배제하고 국제간에 정의를 확립하고 민주적 완전자주독립을 확립하자는 것이요, 안민은 자유 평등 정의 민주 번영의 가치들이 실현되는 인간존엄성을 토대로 한 사회제도를 확립 물질적 정신적으로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3.1운동을 천도교의 역사관으로 볼 때 새 문화 창조 과정에서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국제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보다 나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보국안민운동의 하나였다라고 할 수 있다. 둘째 3.1운동은 천도교라는 이념집단이 선도하여 국제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도교는 교정일치(敎政一致)라는 설명체제로 역사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사회변동은 인간의 의식(敎)이 변해야 사회구조를 개혁할 수 있다. 동시에 사회구조는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상호 교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변동에는 그를 주도할 수 있는 이념체계와 집단이 중요하다. 아무리 사회적 모순이 성숙되었다하더라도 그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이념체제가 있어야 하고 그 이념체제를 실천하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자연발생적으로 폭발 저항할 수도 있으나 이념집단이 형성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저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이념집단이 형성되면 기층민중이 그 조직에 직결 저력을 발휘 사회적 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조직적으로 사회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다.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운동의 경우를 들어보면 동학이란 이념체제를 가진 집단이 없었으면 혁명운동은 불가능 했다. 농민문제가 아무리 모순관계를 가졌더라도 이를 이끌고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이 없으면 안 된다. 이념집단이 없어도 혁명운동이 가능하다고 하면 1894년에 동학 아닌 다른 집단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났어야 한다. 그 당시 실학 계통이나 그리스도 계통의 사상적 종교적 집단이 있었으나 그 곳에는 기층민중들이 모여들지 않았으며 혁명을 주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학에 대해서 기층민중은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었으며 그 힘으로 혁명을 집행했다. 이것은 동학이 갖는 이념체제가 기층민중의 이해와 일치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화할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운동은 동학이란 이념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학·천도교는 바로 새 문화 창조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이념집단이며 동학혁명과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3.1운동은 일시적으로 일본제국주의 통치에 항거한 운동이 아니라 자유 평등 민주 번영을 실현시키기 위한 이념운동이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언론 자유 운동 100주년… ‘민족언론의 선구자’ 차상찬 선생 기린다언론 자유 운동 100주년 기념…춘천 출신 언론인 차상찬 선생 업적 조명 춘천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민족문화운동가였던 청오(靑梧) 차상찬 선생(1888~1946)의 업적을 기리고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2025년 차상찬 학술대회’가 오는 26일(금) 오후 2시, 한림대학교 국제회의실에서 열린다. 이번 학술대회는 ‘언론 자유 운동 100주년 기념’의 의미를 담아 진행되며, (사)차상찬기념사업회, 차상찬학회, 한림대학교 도헌학술원,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다. 차상찬 선생은 1925년 3월부터 ‘전조선 기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추대되어, 같은 해 4월 15일부터 사흘간 서기를 맡아 언론 자유를 위한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언론탄압에 굴하지 않고 언론인의 양심과 사명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며 조선의 언론 자유 수호와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천도교와 개벽사, 그리고 차상찬 차상찬 선생의 언론 활동 중심에는 천도교와 개벽사가 있었다. 당시 천도교는 독립운동을 비롯해 교육, 출판,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했다. 개벽사는 천도교가 설립한 출판·언론 기관으로, 잡지 『개벽』을 비롯해 『신여성』, 『어린이』, 『제일선』 등 시대를 대표하는 간행물을 발행하며 사상과 문화를 선도했다. 차상찬 선생은 개벽사의 주요 편집자이자 필자로 활동하며, 민족의 현실을 비판하고 대중의 의식을 고양하는 기사와 칼럼을 다수 집필했다. 특히 잡지 『제일선』의 발행과 편집을 맡아 사회 문제를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는 한편, 젊은 문인들에게 지면을 제공해 새로운 문학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민족언론과 문화예술운동이 결합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천도교와 개벽사가 차상찬의 언론 활동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기에, 선생은 일제 강점기라는 억압적 상황 속에서도 언론인의 양심을 지키며 민족정신을 알리고 확산시킬 수 있었다. 다채로운 발표와 토론 이번 학술대회는 2016년부터 매년 열려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한다. 발표 이후에는 유정월 교수(홍익대), 이승은 교수(고려대), 박정애 교수(강원대)가 참여하여 심도 깊은 토론을 이어간다. 전시 ‘시대를 기록하다: 차상찬과 김유정’ 학술대회에 앞서 오전 11시부터는 국제회의관 로비에서 김유정문학촌 기획전 ‘시대를 기록하다: 차상찬과 김유정’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두 인물이 지녔던 풍자와 해학, 그리고 민중의 삶에 대한 관심이라는 공통점을 중심으로 그 관계를 재조명한다. 특히 차상찬 선생이 김유정 작가의 문학 활동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준 일화가 소개된다. 김유정의 첫 작품 「산골나그네」는 차상찬이 발행·편집을 맡았던 『제일선』을 통해 세상에 나왔으며, 이후 『신여성』과 『개벽』에도 김유정의 작품 「총각과 맹꽁이」, 「금 따는 콩밭」을 실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두 사람의 기록과 시선은 오늘날에도 강원도 문화사의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
8월 한가위 추억8월 한가위 추억 한가위 전 장날이면, 우리 엄니 아침 일찍부터 머리 감고 새 옷에 분단장이라 사과보다 붉디붉은 고추며, 부지깽이로 털던 깨, 일찍 벤 오리쌀을 머리에 이고 흰 이를 드러내며, 꽃처럼 피어나는 웃음, 30리 장길을 바람처럼 날아간다 엄니들이 집으로 돌아오실 즈음이면 오늘은 새 신발일까, 새 옷일까 아이들은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오후가 되면 뒷동산에 올라 노란 실잠자리를 미끼 삼아 장구 잠자리 잡고 덩실 더덩실 집에 돌아오면 서울서 온 형과 누나,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첫사랑 속눈썹 같은 송편을 빚고, 서로가 자랑이다 저녁이 익어지면 달도 환히 웃고 소년, 소녀들 모두 나와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며 강강술래 서늘한 달빛은 소녀의 마음을, 기운찬 귀뚜라미는 소년의 마음을 간질간질, 두근두근 그렇게 나도 들길 달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글 / 운암 오제운(신태인교구장, <동귀일체> 고문) -
어둠 속의 빛천도교신문은 『홀로 피어 꽃이 되는 사람』 연재를 시작합니다. 시인이자 숲 해설가인 이시백 동덕의 생활 명상 글과 라명재 송탄교구장이 엄선한 동학 경전 구절을 함께 엮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학의 지혜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일상의 삶 속에서 꽃피우는 동학의 길을 함께 사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어둠 속의 빛 한 아이가 길에서 버려진 꽃 한 송이를 주웠다. 누나가 좋아하는 장미, 누나는 한참이나 향기를 맡으며 붉으레한 볼로 쓰다듬었다. 누나는 청맹과니였다. 마음이 믿음에 흔들리지 않으면 고요함에 들 수 있고 고요함으로 지혜에 들면 내면에서 한울의 빛이 스스로 올라와 형체 없는 한울을 보며 형체 있는 한울도 보게 된다. <대종정의 : 오교의 요지> 누나를 생각하고 아이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버려진 장미를 떠올립니다. 모두 귀한 존재들이지요.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24일○ 1896년, 미국의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 출생 “그래, 모두의 젊음은 꿈이야. 일종의 화학적인 광기야.”(F. 스콧 피츠제럴드) ‘찰나에 지나지 않아 찬란한’ 젊음과 사랑을 노래한 미국의 ‘재즈 시대’를 작품들로 생생하게 그려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1896~1940)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절망과 허무감을 작품 세계에 반영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대표 작가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이자 뉴욕 사교계의 명사인 피츠제럴드의 화려한 수식어 이면에는 경제적으로 절박해 150여 편의 단편을 써내야 했던 처지 등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 44살에 심장마비로 짧은 생을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문학의 상징적 작가로 평가받으며 지금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1953년, 세계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의(The Robe)」, 미국에서 개봉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란 20세기 폭스사(社)가 개발한 와이드스크린 영화 촬영 및 영사 방식을 말한다. 표준 35mm 필름에 영상을 가로로 압축해 기록하고, 상영 시 확대해서 넓은 화면 비율을 구현하는 기술이다. 「성의(The Robe)」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의 로마를 다룬 영화로, 리처드 버턴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예루살렘 수비대 마르셀루스 역을 맡았다. 혁신적인 시네마스코프 기법은 곧 전 세계 영화 산업의 표준으로 자리 잡으며 영상 예술의 지평을 넓혔다. ○ 1971년, 영국, 소련 외교관 105명을 추방하다 영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 첩보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소련 외교관 105명을 대거 추방하였다. 1960년대 영국에는 1,000명이나 되는 소련 외교관과 배우자가 머물고 있었다. 영국의 정보기관인 MI5는 이들 중 4분의 1이 스파이 활동을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당시 영국 경찰에 자수한 올레그 라이얼린은 소련 대사관에 의류 무역단체 직원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나 실은 양국 간 전쟁 시 지하철, 댐 등의 시설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임부를 지닌 KGB 내 영국 책임자였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소련은 이때 붕괴된 첩보 능력을 복원하기까지 근 20년이 걸렸다. 영국은 2018년에도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추방한 바 있다. ○ 1991년, 노태우 대통령,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다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 총회 기조연설은 한국이 같은 해 유엔에 가입한 직후 이뤄진 첫 연설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한반도의 평화 정착 의지를 밝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기조연설에서 첫째, 남북한 간의 평화체제 전환, 둘째, 군비 감축과 군사적 신뢰 구축, 셋째, 사람, 물자, 정보의 자유로운 결의 등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 실현을 위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한국은 민주화와 국제 협력 의지를 강조하며 외교 무대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 1993년, 한약 분쟁으로 약국 전면 휴업 의약분업 문제와 한약 분쟁이 격화되면서 전국의 약국들이 전면 휴업에 돌입하였다. 정부는 약사법에 따라 한약을 의약품으로 규정하며 약사의 한약 조제 가능성을 확대하는 법 개정을 추진했다. 한의사계는 한약의 전문성을 이유로 약사의 한약 조제와 일반약 판매를 강하게 반대했고, 약사계는 한약의 접근성 확대를 주장했다. 이에 따른 환자들의 불편은 물론 사회적 혼란이 이어졌으며, 정부의 보건 정책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갈등은 의료계와 약업계 간의 이해관계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23일○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초석, 아우구스투스 출생 오늘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기원후 14)가 태어난 날이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anus)였으나,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지명되며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와 삼두정치를 하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내전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학술, 문예를 장려하며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안정기를 열어 로마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 1846년, 해왕성 발견, 천문학의 지평 넓히다 독일의 천문학자 요한 갈레(Johann Gottfried Galle)가 해왕성을 발견했다. 갈레는 1838년에 토성의 제3 고리를 발견하고, 1839년에서 1840년까지 3개의 혜성을 발견하는 등 당시의 천문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1846년에는 프랑스의 수학자 르베리에의 궤도 예측으로 이미 그 존재가 입증되었던 해왕성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는데, 그는 르베리에에게 해왕성 탐사 의뢰를 받고 그날 밤에 추정 위치 근처에서 이 별을 포착하였다. 이 발견은 태양계 탐구에 큰 전환점을 마련하며, 인간이 수학적 계산을 통해 새로운 행성을 찾아낼 수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 1910년, 의병장 이근주, 국권 피탈에 통분 자결 의병장 이근주(1860~1910)가 경술국치로 나라가 강제로 빼앗긴 데 통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충남 홍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의병을 이끌고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으며, 나라를 잃은 후에도 의기를 굽히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국권 상실에 맞서 싸운 수많은 의병들의 절망과 결의를 상징한다. 정부는 이근주 의병장에게 1991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 1973년,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 대통령에 복귀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Juan Domingo Perón)이 군사 쿠데타로 실각한 지 18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페론주의’라는 이름으로 대중적 지지를 얻은 그는 산업 발전과 노동자 권익을 강조했지만, 권위주의적 통치로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의 복귀는 남미 정치사에서 대중운동과 군부 권력이 교차하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그의 아내인 에바 페론(Eva Peron)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에비타」의 실제 모델로, 성녀라는 평가와 함께 아르헨티나의 몰락을 가져온 단초라는 상반된 평가를 얻고 있다. 구금된 후안 페론을 위해 노동자들을 부추겨 총파업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나 급작스러운 복통(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자궁암)으로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 1996년, 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 시작 우리나라 노동운동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노사정 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수십만 노동자들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다. 이 총파업은 노동자 권익 신장과 민주적 사회운동 확산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우리 사회의 노동 관계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