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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3일○ 1932년, 이라크 왕국 독립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함께 이라크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1932년 10월 3일, 하심 가문의 파이잘 1세가 통치하는 왕국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에서 나타난 민족자결과 독립운동의 성과로, 아랍 세계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1950년, 국군, 38선을 돌파하여 간성을 탈환하다 6·25 전쟁 중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반격을 개시했다. 이날 강원도 간성을 탈환하며 38선을 돌파, 북진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는 전세를 뒤집는 상징적인 승리로 기록되었다. ○ 1967년, 포항종합제철단지 기공식 경북 포항에서 포항종합제철단지(현 포스코) 기공식이 열렸다. 모래바람이 이는 황무지가 세계적인 제철공업단지로 변화하는 첫 출발점이었다. 박태준 사장의 필사의 노력과 진정성 담긴 호소에 전 직원이 제철소 완공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건설 현장을 지켰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이후 포항종합제철은 포항제철소 2-4기, 광양제철소 1-4기, 광양 5고로 증설 등 설비를 확장하여 한국을 세계 5위권의 철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다 1948년,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서방 점령지역과 소련 점령지역으로 분할되어 별도의 국가가 되었던 동독과 서독이 분단 45년 만에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었다. 이 사건은 냉전 종식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10월 3일은 독일의 국가 기념일인 ‘통일의 날’로 지정되었다. 베를린이 다시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었고, 독일은 냉전 종식과 유럽 재편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 1993년, 소말리아 모가디슈 전투 발발 소말리아 내전 중 미군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군벌 요인 납치 작전을 벌이다 발생한 전투이다. 미군과 소말리아 민병대 간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블랙 호크 다운」이라는 제목으로 이 전투를 다룬 영화가 나왔다. 미군은 이후 소말리아에서 철수했고, 소말리아의 내전은 계속되었다. 미국의 특수작전 실패와 민간인 피해, 미국의 해외 개입에 대한 신중론 확산 등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남긴 사건이다. -
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2일○ 1898년, 배화학당이 설립되다 서울 정동에 설립된 배화학당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애니 베어드에 의해 세워진 여성 교육 기관이다. 개교 당시 이름은 캐롤라이나학당으로 초・중등 과정을 교육했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학교 이름을 개칭했다. 근대적 여성 교육의 산실로 자리 잡으며 수많은 여성 지도자와 교육자를 배출하였다. 오늘날 배화여자대학교와 배화여자고등학교의 모태가 된다. ○ 1920년, 일본군, 제2차 훈춘 사건을 일으키다 일본군은 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훈춘 사건’을 조작하고 대대적인 출병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 독립군과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봉오동·청산리 전투로 이어지는 항일 무장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제2차 훈춘 사건은 만주 국경지대의 혼란과 일본군의 군사 개입, 항일 무장투쟁의 결과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1950년, 미국의 만화가 찰스 슐츠, 만화 「피너츠」 연재 시작 이날, 찰스 슐츠는 「피너츠(Peanuts)」 연재를 시작했다. 네 칸짜리 만화였지만, 세계 만화사의 흐름을 바꾼 순간으로 기록될 만큼 의미 있는 시작점이다.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으로 대표되는 이 작품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캐릭터마다 뚜렷한 개성이 살아 있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만화 속 강아지인 스누피가 삶의 소소한 고민과 실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많은 독자들이 푹 빠져들었다. ○ 1973년, 서울대 학생들, 유신 반대 시위 10월 2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교정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전국 대학가로 퍼져 민주화 열망을 고조시켰으며, 이후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이날, 평양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은 2000년 제1차 정상회담 이후 7년 만의 만남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협력 확대를 위한 10.4 선언으로 이어졌다. 남북 관계 진전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
[칼럼] 정치와 종교, 그 적정(適正)한 거리근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통일교의 정교유착(政敎癒着) 의혹은 앞으로 점점 그 실체가 드러나겠지만 종교계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사례라고 생각된다. 이를 계기로 정치와 종교의 적정한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를 위해 먼저 정치와 종교 간의 관계 유형을 분류해 보고,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나타난 정교유착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 후에 동학·천도교 역사를 정교 관계의 시각에서 개관(槪觀)해 보고 천도교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해 보고자 한다. 정치와 종교는 인류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 하나는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을 책임지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조화롭게 기능할 때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이 둘의 관계가 늘 이상적이지는 않았음을 증명한다. 정치권력이 종교의 신성함을 이용하거나, 종교가 정치적 야심을 드러낼 때, 그 위험한 동거는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정교일치(政敎一致)’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종교 지도자가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이다. 중세 유럽의 교황청이나 이슬람 신정국가가 대표적인 예다. 둘째,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정치와 종교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여 서로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셋째, ‘정교유착(政敎癒着)’은 공식적으로는 정교분리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정치 권력이 종교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특정 종교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바로 이 세 번째 유형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라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정치와 종교가 긴밀하게 얽히고설킨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식민 통치의 안정화를 위해 종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11년 제정된 사찰령은 조선 불교를 통제하고 일본 불교의 영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제는 사찰의 주지 임명권을 갖는 등 불교계를 식민 통치의 하위 조직으로 편입시켰고, 일부 불교계는 이에 동조하여 친일 행각을 벌였다. 기독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신사참배 강요는 민족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지만, 일부 기독교 교단과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용인하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는 종교의 신념을 버리고 정치 권력에 굴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대일항전기(對日抗戰期)에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가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교단 조직은 비밀 연락망이 되고, 종교 지도자들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처럼 종교가 민족의 아픔과 함께하며 저항의 목소리를 낸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해방 이후, 특히 군부 독재 시절에는 ‘정치권력과 종교의 위험한 유착’이 본격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운동과 같은 체제 동원 사업에 종교계를 적극 활용했다. 교회와 사찰은 정권의 정책을 홍보하고 국민의 정신 무장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1970년대 유신 체제 하에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유신 헌법을 '하늘의 뜻'이라며 찬양하는 등 정치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개신교 민주화 운동 세력 등은 독재에 맞서 저항하며 종교의 사회 참여적 역할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정치와 종교의 유착이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일해재단 설립 과정에서 전경련과 함께 종교계가 막대한 기부금을 강요받았으며, 이것은 군부 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금을 모으는 데 종교가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경유착(政經癒着)과 함께 ‘정교유착(政敎癒着)’의 전형이 되었다. 또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침묵하거나 심지어 학살을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며 종교의 윤리적 역할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1980년대 ‘오대양(五大洋) 사건’이나 ‘용산 참사’와 같은 종교 관련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정치 권력은 종교 단체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된 수사나 해결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종교는 단순히 정치에 동원되는 것을 넘어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특정 대형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의 집권 초기부터 '소망교회 인맥'이 주요 공직에 대거 등용되면서 정교유착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특정 종교에 편향된 정책을 추진하고, 불교계는 이에 반발하여 '종교 편향' 문제를 제기하는 등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최순실 게이트'는 무속 신앙과 유사한 종교적 요소가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낳았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이 창시한 영생교와 관련된 논란은 한국의 종교와 정치 유착이 단순한 제도적 관계를 넘어 개인적 신념과 사적 관계로까지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준 충격적인 사례였다. 이 사건은 정치와 종교의 건강한 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요즘에도 특정 종교 단체는 선거 때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며 ‘조직적 표몰이’에 나섰고,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특정 종교 시설을 찾아가거나 종교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종교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정치의 공정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정치와 종교 간 적정 거리는 과연 얼마일까? 단순히 “종교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사회 정의와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야 할 사회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적정한 거리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첫째,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종교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적 행위를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평화·정의를 위해 사회적 발언을 해야 한다. 촛불집회와 같이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외침에 종교계가 함께하는 것은 정의로운 행동이지만, 특정 정당의 선거 운동을 돕는 것은 종교의 순수한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다. 둘째,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특정 종교 지도자만을 만나거나 특정 종교 행사만을 참석할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공정하게 대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역대 정부에서 최고지도자의 행보가 특정 종교에 치우쳐서 비판 받은 사례를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공정한 종교정책을 펴는 것은 종교 간 갈등을 예방하고, 모든 시민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이다. 셋째, ‘비판적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종교는 권력과 단순히 유착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연대하여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종교의 본연적 역할이자 사회적 양심으로서의 의무이다. 종교는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 혹은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조화롭게 상생(相生)해야 한다. 정치는 특정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기보다, 모든 시민의 삶을 공정하게 보살피는 ‘보편적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종교는 정치적 권력을 탐하기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윤리적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지향하는 정교분리는 단순히 정치와 종교를 물리적으로 떼어놓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고유한 가치와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위험한 동거의 유혹을 경계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동학·천도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교정일치(敎政一致)’라는 독특한 형태를 보여왔다. 동학·천도교인의 정치적 행위는 창명된 초기에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했으나, 시대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저항, 독립운동, 그리고 생존을 위한 협력 등으로 변화해 왔다. 동학농민혁명기 (1894) : 혁명과 탄압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東學)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거대한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왜와 서양 오랑캐를 배척하여 정의를 내세움)'를 외치며 사회 개혁을 요구한 종교적 혁명이자 정치적 투쟁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동학을 반체제적인 '좌도(左道)'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시기의 관계는 '정교유착'이라기보다는 종교 조직에 기반한 정치적 항쟁과 국가 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의 양상으로 보아야 한다. 대일항전기 (1910-1945) : 독립운동의 구심점 대일항전기, 천도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치 행보를 보였다. 1919년 3.1 혁명 당시, 천도교의 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는 종교가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시기 천도교의 정치 참여는 권력과의 유착이 아닌,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의 유착 사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해방과 남북 분단 이후 (1945-현재) : 극단적 운명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제3의 길(중도)을 걸은 천도교의 운명은 다음과 같이 남북한에서 극과 극으로 갈렸다. #북한에서의 '정치적 위장' : 천도교의 교세는 전통적으로 북한 지역에서 강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종교를 탄압하면서도 정치적 명분을 위해 1946년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이라는 정당을 허용했다. 이 정당은 실제로는 조선노동당의 하부 조직으로, 북한 정권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다당제 국가'라는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위장(파사드facade)에 불과했다. 이는 종교가 생존을 위해 독재 정권에 종속된, '생존형 유착'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남한에서의 '정치적 소외' : 남한에서는 정권과 유착된 기독교와 불교가 세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천도교는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며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 정치인들의 선거 활동에서 천도교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천도교인들의 정치적 활동은 주로 남북통일 관련 학술대회나 시민단체 활동 등에 한정되었다. 이는 정치 권력과의 관계 형성을 위한 기반이 매우 취약하게 된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천도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정권에 대한 저항(동학농민혁명), 민족 운동의 리더십(3.1 혁명), 그리고 체제에 의한 흡수(북한 천도교청우당의 경우)와 소외(남한 천도교)라는 독특하고 극적인 과정을 거치며 정치와 얽혔다. 이는 권력과 상호 이익을 추구한 다른 종교의 유착과는 다른, 역사적 운명에 따라 형성된 특수한 정교 관계라 할 수 있겠다. 천도교는 교정일치를 지향하지만 용시용활(用時用活)하여 시대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현시대는 교정분리(敎政分離)가 대세이므로 이에 부응(副應)하면서 ‘개벽세(開闢世)’의 시운(時運)을 타고 최적의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시점에서는 정치계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천도교의 4대 목적(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 달성을 위해 중도(中道) 실용주의적으로 지혜롭게 처변(處變)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공암 박돈서(선도사) -
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1일○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하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와 맞선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페르시아의 패권은 무너지고, 알렉산더는 서아시아와 이집트, 인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길을 열었다. 그의 원정은 동서 문명의 교류를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1910년, 일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다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1910년 10월 1일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입법·사법·행정을 총괄하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했고, 한국인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을 철저히 억압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식민지 통치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발생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조선말 큰사전’을 편찬하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제에 의해 대거 검거된 사건이다. 최현배, 이윤재, 한징 등 학자들이 모진 고문 끝에 옥고를 치렀고, 일부는 순국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의 단면을 보여주며, 동시에 한국어 보존을 위한 학자들의 숭고한 뜻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 재판 종결 제2차 세계대전 후 전범 처리를 위해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 군사 재판이 이날 종결되었다. 나치 독일의 주요 지도자들이 인류에 대한 범죄와 전쟁범죄로 기소되어 사형과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은 국제 사회가 집단학살과 침략 전쟁에 책임을 묻는 첫 사례로, 오늘날 국제 형사 재판의 토대가 되었다.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이는 장기간 이어진 국공내전의 종식을 의미했으며,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 새 출발을 알렸다. 이로써 동아시아와 세계 냉전 구도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창립 40주년 기념식 개최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주관한 창립 40주년 기념식 및 민족화합과 국운융성 기원대회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전국 각계의 민족종교인 3,000여 명이 함께하며 민족적 단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행사에는 박인준 교령과 강병로 종무원장을 비롯해 박차귀 민족종교협의회 여성회 명예회장, 김명덕 천도교여성회본부회장, 다수의 동덕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참석자들은 한마음으로 민족의 화합과 번영, 그리고 세계 평화 실현을 기원하였으며, 공연과 다양한 프로그램이 더해져 대회의 의미를 더욱 높였다. 박인준 교령, 동학‧천도교의 역사적 사명 강조 박인준 교령은 축사에서 동학‧천도교의 역사적 사명과 민족종교협의회의 의미를 강조했다. 박 교령은 “동학‧천도교는 조선조 말, 나라가 서세동점의 위기에 처하고, 무능한 조정과 탐학한 관리들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 허덕일 때, 창생을 구제하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최제우 수운대신사께서 창명하신 우리 민족의 대표적 종교”라며 “이후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으며, 천도교로 현도한 이후에도 3.1혁명,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무인멸왜기도운동 등 민족사의 고비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 왔다”고 밝혔다. 박 교령은 이어 “민족종교협의회 또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대동단결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 온 바, 앞으로도 천도교와 함께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정신으로 이웃 종교와 힘을 합해 민족의 화합과 대한민국의 융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족종교의 연대와 미래 비전 한국민족종교협의회는 이번 4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민족종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시대적 과제를 함께 해결하며 민족의 단합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아울러 앞으로도 세계 평화 실현과 인류 공동번영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을 천명했다. 이번 대회는 한국 민족종교계의 연대와 화합을 확인하고, 미래 40년의 비전을 새롭게 세우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 -
소로록, 소로로록…천도교신문은 『홀로 피어 꽃이 되는 사람』 연재를 시작합니다. 시인이자 숲 해설가인 이시백 동덕의 생활 명상 글과 라명재 송탄교구장이 엄선한 동학 경전 구절을 함께 엮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학의 지혜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일상의 삶 속에서 꽃피우는 동학의 길을 함께 사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소로록, 소로로록… 사이가 좋다는 건 시냇물처럼 흐르는 물 같은 거야. 먼저 다가가 나 여기 있다고 소리로 알리는 거야. "큰 소리로 힘껏 불러 말하노니, 오라. 다시 오라. 너의 몸은 누가 태어나게 한 것이며, 너의 성품는 누가 신령하게 하는가? 너의 마음을 좁은 몸에 가두지 말고 열면, 차근차근 멀리 봐야 할 곳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처음엔 한 조각의 한울을 보게 되고, 나중에는 한울의 전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니 생각해 볼지어다." - 『의암성사법설』 「대종정의: 오교의 요지」 (※ 이 부분은 현 경전에는 나와 있지 않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대인관계에서 마음 열기가 쉽지 않아요.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마음보따리를 풀어보면 어떨까요? 서로 대화를 하다보면 반드시 사르르 풀리는 접점이 있을 겁니다. -
천도교와 3 · 1운동(21)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2. 잊혀져 가는 3.1운동 우상화로 왜곡된 3.1정신 (참고 박성수 자료) 우리에게 자장 중요한 사실은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당시의 연합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이 같은 국제승인이 있건 없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단지 우리민족의 요구와 선언만으로 수립된 것이다. 굳이 연합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독립이 미국의 독립선언만으로 가능했듯이 우리의 독립도 우리 민족의 자결만으로 독립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을 잊지 말자 올해로 3.1운동 90주년을 맞는다. 당연히 축하해야 하지만 반성할 것도 많다 3.1운동이 일어난 해는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한지 10년이 되기 직전 인 9년차였다. 우리민족이 돌연 세계를 향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독립선언을 하기까지 민족대표 33인, 그중에서도 손병희 선생의 노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3.1운동이 아무 준비도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어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 까지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3.1운동이 성공한 것인데 그런 것이 제대로 기술되지 않았다. 준비과정이 모두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발각될 뻔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나고 보면 그런 일들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세월의 물결에 씻겨 가지와 잎이 떨어져 태백산 정상의 주목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었다는 사실, 선언서를 인쇄한 사람이 천도교 보성사의 이종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를 손병희 선생이 했다는 사실은 확실한데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낭독한 사실만 교과서에 뚜렷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학생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으나 모두가 거짓이다. 일이 잘되면 자신이 했다며 공을 내세우지만 일이 잘못되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뒤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가면서 많은 사람이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품에 감추고 혹은 걸어서 고향을 찾아갔다. 유관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관순 이전에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매국노 이완용까지도 민족대표의 한사람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나라가 독립되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절한다고 말했으나 만세운동 준비를 일본경찰에 알리지는 않았다. 3.1운동 앞에 매국노의 양심이 무릎을 끓은 것이다. 3.1때처럼 모두가 한 몸 한마음이 되어 애국심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세계화 운운하는 바람에 애국심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개인주의만 꽃피는 요즈음 배워야할 역사의 교훈이다. 북한의 3.1운동 왜곡 최근 몇 년 사이 3.1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학생이 많아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건망증은 본래 노인들의 지병으로 알고 있는데 요즈음 젊은이들도 건망증에 걸린다는 것이니 세태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심지어 젊은 학자들도 3.1운동이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니 용서받을 일이 아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3.1운동의 나라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 한 사실은 유명하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 그대 한국이여 네가 다시 한번 불을 켜는 날엔 한국아 너는 동방의 빛이 되리라.” 이 시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던 1929년 4월 2일 동아일보에 실려서 지금도 우리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3.1운동의 비폭력 정신은 인도의 간디와 네루까지도 고개를 숙였다는데 우리는 왜 3.1운동을 잊어만 가는가? 역사는 기억해야 역사라고 한다. 잊으면 역사는 영원히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고 무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망각보다 더 무서운 범죄는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다. 한번 왜곡된 역사는 다시 살리기 어렵다. 3.1운동을 가장 심하게 왜곡하고 있는 나라가 북한이다. 북한의 역사왜곡은 날조라 할 정도다. 폐쇄된 공간 북한은 우리 근대사를 온통 김일성 위주의 역사로 개악하였다. 철창 속에 갇힌 북한 인민민주주의 인민들은 독립운동을 김일성 혼자 한 것처럼 꾸민, 아니 날조한 연극을 보고 박수치라고 강요받고 있다. 1911년을 김일성이 태어난 해라하여 주체 원년으로 삼고 조금 있으면 대대적인 주체 100년 축제를 할 모양이니 이쯤 되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북한에서는 3.1운동 때 여덟 살 난 김일성이 시위대를 이끌고 평양 대동문까지 갔다는 거짓말을 믿어야한다. 거기에 더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서울의 민족대표보다 먼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믿어야한다. 북한에서는 이 거짓말을 믿지 않으면 강제수용소에 가야한다. 한편 남한에서도 3.1운동에 대한 역사인식이 불완전하다. 3.1운동은 학생들이 먼저 일으킨 학생들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만일 민족지도자들의 독립선언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학생과 군중들의 무질서한 시위운동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그야말로 일제가 바라고 바라던 폭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지도자들은 미리 못을 박고 당부하기를 질서를 지키고 비폭력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3.1운동은 훌륭한 독립운동으로 네루와 간디 그리고 타고르까지도 부러워했던 독립운동으로 기억된 것이다. 민족자결로 충분하였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당시의 연합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 이 같은 국제승인이 있건 없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단지 우리민족의 요구와 선언만으로 수립된 것이다. 굳이 연합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독립이 미국의 독립선언만으로 가능했듯이 우리의 독립도 우리민족의 자결만으로 독립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자칫하면 이 같은 대원칙을 우리는 잊는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자율적인 의사결정으로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독립을 선언하고 1910년의 국권침탈조약을 무효화시킨 것이 3.1독립운동이었다. 우리는 1965년 한일양국 간에 기본조약을 맺어 오랫동안 끊어졌던 국교를 정상화 하였다. 만일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가 없었다면 기본조약 제 2조 “1910년 8월 22일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모든 조약은 무효”라는 조문을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국민은 그때 한일회담을 반대하였고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였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3.1독립정신에 입각하여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를 무효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외쳤던 독립만세의 함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을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명문화한 것이니 어찌 우리가 3.1운동을 잊었다 할 수 있는가.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30일○ 1955년, 미국의 영화배우 제임스 딘 교통사고로 사망 헐리우드의 대표적 청춘스타였던 제임스 딘(James Byron Dean, 1931~1955)은 「이유 없는 반항」, 「자이언트」 등으로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으나, 24세의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에덴의 동쪽」으로 아카데미상 최초로 사후에 남우주연상이 주어졌다. 그의 요절은 ‘영원한 반항아’라는 이미지를 더욱 굳히며 대중문화의 전설로 남았다. 1999년 미국영화연구소가 선정한 최고의 남자 배우 25명 중 18위에 선정되었다. ○ 196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족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확대, 편한 OECD가 이날 공식 출범하였다. 회원국들은 경제 성장과 무역 확대, 개발도상국 지원을 목표로 협력하며, 오늘날 세계 경제 질서를 이끄는 핵심 기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 1966년, 아프리카 보츠와나공화국 독립 아프리카 남쪽에 자리 잡은 보츠와나가 이날 영국의 보호령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며 경제 성장의 기반을 다져, 아프리카 내에서 비교적 민주주의가 정착된 국가로 평가받는다. 서부 지역 대부분은 칼라하리사막이 뒤덮고 있어서, 남아공과의 접경지대인 남동부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 1981년, 서울,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총회에서 서울을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최종 선정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서울올림픽은 냉전 시대 화해와 교류를 상징하는 대회로 기억되고 있다. ○ 1995년, 이준 열사 유해, 56년 만에 돌아오다 이준은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의 검사이자 외교관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고종의 밀명으로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할 수 없게 되자 지병이었던 뺨 종기가 도졌으며, 울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이날 이준 열사의 유해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조국으로 봉환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는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뜻을 되새기게 한다. -
김현성, 동학을 노래하다…경전에서 길어 올린 신작으로 문화운동의 새 물꼬가을밤, 천도교중앙대교당 앞마당이 노래와 이야기로 환해졌다. 9월 25일 오후 7시, 「이등병의 편지」와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이 ‘자유와 독립을 향한 동학혁명의 이야기와 노래’를 주제로 단독 콘서트를 열고, 동학 천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신작들을 처음 공개했다. 공연은 1부 ‘민족 시인의 노래·독립군의 노래’, 2부 ‘동학, 아름다운 사람들’로 나뉘어 진행됐다. 관람석에는 박인준 교령과 강병로 종무원장, 서소연 교무관장, 최인경 사회문화관장, 남연호 도서관장을 비롯해 100여 명의 관객이 자리해 기타 선율과 서사에 귀를 기울였다. 서막은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 이어 이육사의 「청포도」, 윤동주의 「별 헤는 밤」,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이 잔잔하면서도 힘 있는 편곡으로 무대에 올랐다. 「나는 자랑스런 의병이에요」와 신곡 「홍범도의 묘비」는 청중의 호흡을 낮추며 독립군의 마음을 불러냈고, 「이등병의 편지」와 「술 한잔」이 1부의 여운을 길게 남겼다. 무대 양옆 대형 스크린의 자막과 영상은 곡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했다. 2부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해월신사법설』에서 가사를 뽑아 쓴 신곡으로 채워졌다. 2부 공연 시작에 앞서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이 초대 손님으로 나와 동학 천도교가 3‧1혁명에서 촛불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의 심장부에 서 있었음을 환기시켰다. 최 관장은 “작은 문화운동이 국민의 마음에 스며들도록 전국 순회 프로그램으로 이어가겠다”고 밝히면서 대중을 향한 천도교 문화운동의 지향점을 명확히 했다. 김현성 역시 “음악은 시대를 기록하고 메시지를 건네는 유용한 통로”라며, 전국 소극장 투어와 음악극·뮤지컬 등으로의 확장을 예고했다. “동학은 미지로 보일지 몰라도, 여기서 길어낼 에너지는 엄청나다”는 그의 기대가 덧붙었다. 이어진 「해월 선생 내게 물으시네」는 「대인접물」의 문장을 경쾌하게 풀어 천도교 교리를 자연스레 각인시켰고, 「탄 도유심급」은 바른 마음을 다잡는 경구를 리듬으로 새겼다. 『용담유사』 「흥비가」 구절을 인용한 「아름드리나무」의 흥겹고 포근한 결이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배우 김진휘의 ‘일하는 한울님’ 낭독이 이어지며 서소문 옥중 해월 최시형 신사의 육성이 현재의 시간 위로 포개졌다. 뒤이은 「해월, 작별의 인사」와 「세상에서 참 기쁜 일」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를 만난 기쁨과 해월의 결연한 마음을 절제된 선율로 그려 깊은 공명을 만들었다. 김현성은 “(이 노래들은) 경전의 문장을 노랫말로 발췌해서 처음 들려드리는 것”이라고 창작 배경을 전했고, 무대는 「주먹밥」, 「기미독립선언을 노래함」으로 이어졌다. 앵콜로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관객과 함께 합창하며 밤하늘의 여운을 길게 남겼다. 내내 공연을 지켜본 20대의 비(非)교인 정소라(가명) 씨는 “자막과 영상 덕분에 노랫말과 맥락이 또렷했다”며, 신앙 배경이 없어도 동학과 천도교의 핵심을 따라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비(非)천도교인에게도 열린 입구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서울교구 송영기 동덕은 “중앙대교당 앞마당이 공연장으로 변한 순간, 교당이 ‘문화의 마당’이 될 수 있음을 체감했다”며 유연한 공간 활용의 가능성을 짚었다. 맑은 날씨와 어울린 선곡이 현장을 하나로 묶었다는 소감도 전했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동학은 이런 식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 오늘 콘서트에 크게 감동했다. 동학이 음악, 미술, 운동으로까지 이처럼 확장되는 방식이야말로 동학이 사회 속으로 퍼지는 길”이라고 강조해, 중앙총부가 지향하는 K-동학의 좌표를 다시 확인케 했다. 권윤호 동덕은 배우 김진휘의 낭독을 언급하며 “해월 신사께서 하셨을 말씀이 자막과 함께 흐르자 울컥해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음악과 서사의 결합이 만든 집중력, 신작에 맞춘 자막 운영의 효과가 눈에 띄이는 부분이다. 주선원 동학민족통일연구회 상임의장은 “매우 독특한 기획을 해줘서 오늘만큼은 정말 기쁘다. 경전 말씀이 오늘의 노래로 울릴 때 너무 좋았다”고 평했고, 서울교구 양윤석 선도사는 “최근 중앙총부가 추진한 행사 중 가장 빛나고 가장 탄탄한 기획”이라며 제작진의 열의와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 ‘김현성의 아름다운 사람들’은 노래로 만난 동학 천도교의 현재형 기록이었다. 수운 대신사와 해월 신사의 가르침을 오늘의 언어와 선율로 되살린 무대, 그리고 그 무대를 발판으로 전국을 잇는 순회 문화운동의 약속이 한데 포개졌다. 문화로 스며드는 교화, 생활 속에서 자라는 신앙. 중앙총부가 열어갈 다음 장을 기대하게 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
「2025 경주동학문화제」 동학 정신, 세계로 비상(飛上)하다포덕 166년(2025) 9월 27일, 「2025 경주동학문화제」가 ‘동학정신 세계화의 비상(飛上)’을 주제로 경주동학교육연수원에서 열렸다. 올해 행사는 의식, 공연, 비전 선포, 체험 프로그램을 촘촘히 엮어 천도교 신앙과 예술, 지역 공동체가 한자리에 어우러진 축제의 장으로서 마련됐다. 현장에 모인 천도교인과 시민들은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현재의 언어로 체험하며, 세계로 향하는 동학 정신의 다음 걸음을 함께 그렸다. 개막 의례는 용담교구 최중환 동덕의 집례로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경전 봉독 순으로 경건하게 진행됐다. 이어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 주낙영 경주시장 환영사(송호준 부시장 대독), 경주시의회 이동협 의장 축사(임활 부의장 대독), 경상북도의회 배진석 부의장, 최재필 운영위원장의 축사가 차례로 이어졌다. 이날 행사에는 김성환 연원회 의장, 강병로 종무원장, 명승철 연원회 부의장, 최상락 용담수도원장, 김명덕 여성회장, 박차귀 부산시교구장을 비롯한 각 교구장 등 교단의 주요 인사가 대거 참석해 축제의 의미를 더했다. 서울 및 지방 교구에서 참석한 교인들 외에 경주 지역 문화·예술계 및 시민사회 관계자와 시민들도 자리를 함께해 ‘경주에서 다시 밝힌 동학의 불빛’을 격려했다. 박인준 교령은 기념사에서 경주의 역사적 의미와 동학 정신의 세계적 가치를 강조했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 고도로, 이곳 경주에서 동학 천도교가 창명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면서 “우리는 166년 전 경주에서 시작된 ‘다시개벽’의 커다란 울림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사람과 천지 만물,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는 생명 사상, 모든 사람이 신분적, 인권적 차별이 없는 고귀한 인격체라는 만민 평등 사상의 정신은 동학농민혁명으로, 나아가 3·1운동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헌법 정신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K-문화, K-예술로 나타나고 있다”고 역설했다. “천도교의 이름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꿈과 희망을 열어가기 위해 이곳에 모인 우리들인 만큼 경주동학문화제를 통해 동학 천도교의 참모습과 그 정신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경주시 가정리 출신 최해춘 시인은 『용담유사』 「검결」을 모티브로 한 자작 축시를 낭송해 오프닝 의식의 여운을 문학으로 이어 주었다. 주무대 공연은 극단 하랑시어터의 뮤지컬 「하늘을 품은 백성들」이 이끌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인내천 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장면을 오늘의 언어와 음악으로 풀어낸 작품으로, “하늘은 멀리 있지 않네. 내 마음속에 숨 쉬고 있네”는 합창이 객석의 큰 박수를 받았다. 이어 그룹사운드 ‘롱아일랜드’가 폭발적인 사운드로 축제의 열기를 높였고, 남성 3인조 보컬 ‘세심관’이 감미로운 하모니로 무대를 채웠다. 올해 무대에서 특히 눈길을 끈 장면은 부산예술대학교 실용무용과 교수, 학생, 졸업생이 함께한 스트릿댄스 팀 ‘하단 패밀리’의 퍼포먼스였다. 이 공연은 천도교중앙총부–부산예술대학교–동천고등학교 간 업무협약(MOU) 의 첫 결실로 마련된 무대다. 협약에는 “부산예술대가 천도교의 각종 행사에 참여해 공연·전시 등 예술 활동을 펼치고, 중앙총부는 공간과 기회를 제공하며 천도문화를 현대적 감성으로 확장한다”는 실천 과제가 담겼다. 이번 스트릿댄스는 MOU 정신을 현장에서 구현하며 축제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증명했다. 스트릿 댄스 공연이 끝나자 무대 중앙에 펼쳐진 미디어 퍼포먼스와 함께 천도교의 미래 비전이 선포됐다. “한울님 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내 모신 한울님과 하나임을 믿고 신인간으로 거듭나겠습니다.” “가족·이웃종교·길 위의 모든 분들을 한울님으로 대하겠습니다.” “만물을 내 몸같이 돌보는 삶을 살겠습니다.”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내다보며 조화를 이루는 동학문화를 선도하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스크린 속 화려한 영상과 함께 울려 퍼졌다. 이어 21자 주문 합송이 진행됐다. 무대에 올라온 박인준 교령은 “대신사님, 해월신사님이 마당 포덕을 할 때도, 동학혁명군이 죽창을 들고 싸우러 나가면서도 주문을 외웠다. 3·1혁명을 앞두고 의암성사께서 전국 지도자들을 모아 49일 기도를 봉행할 때도 주문의 힘으로 나아갔다. 오늘의 천도교가 세상에 널리 펼쳐지려면 주문 공부로 힘을 채우고, 그 힘으로 세상을 선도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 말에 호응하듯 모든 교인이 함께 21자 주문을 21회 합송했다. 한편, 주무대 뒤편에서는 궁을장 노리개 만들기 체험, 활쏘기 체험, 신인간사·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전시, 홍보 부스 등이 운영됐다. 본 공연 뒤에는 라임&붐업MC의 디제잉으로 EDM 트로트 파티가 이어져, 세대와 장르의 경계를 넘어 하나가 되는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번 경주동학문화제에 참가한 교인들은 한목소리로 “젊어진 축제, 알찬 프로그램”을 꼽았다. 원주교구 김영덕 교구장은 “전반 구성과 완성도가 최고였다”고 평했고,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은 “21자 주문 합송과 함께 젊은 무대가 자부심을 일깨웠다”고 말했다. 용담교구 노상규 동덕은 “시천주 사상이 더 널리 퍼질 수 있는 계기”라고 평가했고, 대동교구 선영숙 동덕은 “가장 젊은 축제였다. 앞으로도 젊은 무대를 통해 새 세대 교화가 활기를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시에 개선을 바라는 의견도 솔직하게 이어졌다. 대구시교구 서광우 동덕은 “내용은 뛰어난데 관객 동원이 아쉬웠다”고 지적했고, 울산교구 정의필 도정은 “햇빛 가리개 모자 등 현장 편의가 조금 더 세심했으면 좋겠다. 외부 주요 내빈이 참석한 만큼 앞줄 좌석 운영도 더 빈틈없었으면 한다”고 제언했다. 서울교구 방자명 동덕은 “전반 연출과 그래픽은 훌륭했지만 사전 홍보가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같은 의견은 내년 프로그램 기획과 지역 시민 참여 확대, 현장 운영의 디테일을 가다듬는 실천 과제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가르침은 오늘날 환경, 평화, 인권의 의제를 관통하는 세계 보편가치로 확장되고 있다. 이번 문화제는 동학 천도교의 언어로 예술, 시민사회가 함께 만드는 교화 생태계의 가능성을 엿보는 기회였다. 2025 경주동학문화제는 그렇게 참석자들의 가슴에 ‘비상(飛上)’의 약속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