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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나와 우리를 다시 찾는 길입니다" 성강현 교구장의 동학 연구와 삶겨울의 문턱에 접어든 어느 날, 성강현 대동교구장을 만났다. 최근 『수운의 길을 걸어 동학을 만나다』(선인)를 펴낸 그는, 출간 소감과 더불어 천도교인으로서, 동학 연구자로서, 그리고 역사 연구자로 살아가는 길에 대해 담담히 들려주었다. 아울러 오늘의 시대에 동학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오래도록 품어온 생각들을 차분히 풀어놓았다. 문 : 반갑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그동안 포로수용소 내 천도교인들의 활동 연구, 동학과 천도교사 연구, 그리고 근현대사 전반에 대한 연구에 매진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폭넓은 연구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의식은 무엇인가요? 특히 동학과 천도교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나 전환점이 있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에 ‘수운 최제우의 길’을 따르는 연구를 책으로 묶어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답 : 2024년이 수운대신사 탄생 200주년이라 교단 안팎에서 기념식, 국제 콘퍼런스, 자료집 발간 등 여러 행사가 진행됐지만, 제게는 조금 ‘나와 떨어져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수운대신사 탄생 200주년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일인데, 여기에 나만의 의미를 하나 더 보탤 수는 없을까?” 동학과 천도교가 말하는 ‘인간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제 삶 속에서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역사를 공부하고, 답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수운대신사 200주년을 기념해 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수운대신사님의 집안 이야기(정무공, 근암공, 어머니와 가족사), 구도 과정, 동학 창도 이후의 삶, 그리고 이후 안타까운 가족들의 운명을 생애 전반과 유적지를 망라해 정리한 결과물이 바로 이번 책입니다. 문 : 각자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주체적인 실천이 모여 수운대신사 탄생 200주년이 풍성해지고 빛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이번 신간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책 속에서 수운 대신사의 사상을 대신사의 발자취 따라가며, 오늘의 사회와 신앙 현실에 맞추어 재해석하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여기서 궁금해집니다. 동학과 천도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답 :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계기는 “나를 찾는 작업, 우리를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역사는 늘 외세에 휘둘리고 간섭받아왔습니다. 그 굴레를 끊는 출발점이 동학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저는 동학을 ‘자주적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K-컬처, K-문화도 결국 200년 전 수운대신사가 이 땅에 와서 ‘나를 발견하고, 우리의 의미를 새롭게 세운 것’에서 시작된 흐름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문제의식은 역사학적으로는 자주적 근대화, 동학과 천도교, 민족운동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아버지입니다. 아버님이 황해도 금천 출신 천도교인이셨고, 북한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셨습니다. 천도교 포로 연구는 곧 아버지 세대, 북한 천도교인들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서, 대학 진학 때 ‘정 붙일 데가 천도교밖에 없었다’는 아버님의 말이 마음에 남았고, “내가 대학에 가면 동학·천도교를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이후엔 교사생활을 하며 연구에서 멀어졌지만, 형님 성주현 상주전도사님의 “정신 차려라” 한마디에(웃음)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본격적인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문 : 천도교 포로 연구와 학위 논문은 어떻게 연구하게 되셨되었나요? 답 : 대학원 시절 거제도 포로수용소 답사를 갔다가, 제가 발표에서 “이 포로수용소에 천도교인이 많았다, 활동도 활발했다.”고 말했더니 지도교수님이 크게 관심을 가지시며 “이걸 연구 주제로 삼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자료가 거의 없어서, 석사 논문은 아버님과 또 한 분, 두 분의 구술증언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이후 박사 과정에서는 구술자를 약 열 명으로 늘리고, 미군 측 문서(85포로수용소, 1951년 9월 17일 학살 사건)에 대한 자료를 찾았습니다. 구술 증언 중에 “9월 17일에 천도교인들이 희생됐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미군 방첩대(CIC)의 조사 기록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발견했습니다. 마이크로필름 자료와 구술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 “역사적 가치가 입증됐다.”는 감각을 강하게 느꼈고, 연구자로서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문 : 선생님이 생각하는 ‘연구 방법론’, 특히 현장 답사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답 : 역사 연구는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이 주는 감응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 책에도 적멸굴에서의 경험이나 은적암에서 느낀 것, 손봉조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 등이 담겨 있는데, 현장에 가면 ‘대신사께서 여기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세상을 꿈꾸었을까’를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동학을 알고 싶은 분들께는 책에 적어둔 주소들을 따라 직접 답사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연구자의 시각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는 철학의 입장에서, 문학 연구자는 문학의 입장에서, 예술가는 예술의 감각으로 동학과 수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청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인생의 고비마다 수운대신사의 수난로, 동학 순례길을 걸어보며 내 삶의 문제의식과 수운대신사의 문제의식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책에서 저는 “수운대신사의 수난로를 동학 순례길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제안도 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문 :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연구하시다 보면, 사료가 부족하고 기록에 공백이 있을 때가 많았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답 :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역사적 상상력입니다. 사실과 사실 사이에 생기는 ‘틈’을 어떻게 메워갈 것인가, 그것이 역사 연구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저는 현장에 가서, 이렇게 스스로 묻습니다. “내가 수운대신사였다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예를 하나 들면, 대학 때 김개남 대접주의 손자를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모내기를 한창 하고 계셨는데, 그냥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죠. 그런데 “내가 따르는 선배였다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함께 논에 들어가 모내기를 도왔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열리고, 점심까지 같이 먹으며 집안 이야기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깊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현장 속에서 몸으로 함께하는 행위가, 사료의 틈을 메우는 역사적 상상력을 가능하게 합니다. 문 : 오늘날 학계와 사회에서 동학과 수운대신사의 연구는 어떤 위치에 있다고 보시나요? 답 : 많이 진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동학은 아직도 ‘비주류’, ‘언더그라운드’ 정도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자주적 근대화를 이야기하면서 동학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각의 편향입니다. 외부 학자들은 ‘객관화’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두고 멀리서만 조망하려 하고, 교단 연구자들은 교단의 틀 안에 갇혀 사회화·공론화에 미숙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 학자들은 조금 안으로 들어오고, 교단 연구자들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동학 연구가 살아있는 학문이 되고, 사회와도 소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 : 여기서 조금 이야기를 넓혀서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개벽’, ‘시천주·인내천’ 정신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답 : 우리 사회의 갈등은 결국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풀 수 있습니다. 동학의 시천주·인내천은 바로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한가운데에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사 갈등, 환경 문제, 여러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들을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우주, ‘천지부모’라는 인식 속에서 새롭게 바라봐야 합니다. 동학의 가르침인 ‘유무상자’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모두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정신 위에서 삶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돈이 곧 권력이 되어 버렸지만, 동학의 사상으로 세상을 잘 설명해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동학 속에 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믿습니다. 문 : 앞으로의 연구 계획과, 연구자로서의 다짐을 들려주신다면요? 답 : 저는 역사 연구자로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동학의 이야기를 계속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번 수운대신사 책에 이어, 해월신사, 의암성사, 춘암상사, 그리고 동학혁명, 3.1운동, 민족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자료집과 유적지 소개 형식으로 정리해, 동학을 더 쉽게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나아가 동학·천도교의 전체 역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작업도 언젠가 해보고 싶습니다. 이 일은 혼자 할 수 없고, 여러 연구자들과의 협업이 필요합니다. 갈 길이 멉니다. 무엇보다도 후학으로서 수운대신사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그 마음으로, 더 공부하고, 더 연구하고, 더 많은 자료를 찾으며 나아가고자 합니다. 문 :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인터넷천도교신문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과 기억에 남는 현장 경험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길 바랍니다. 답 : 이 책을 많이 읽어주시고, 널리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꼭 한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가셔서 수운대신사님의 기운을 한번 느껴보십시오. 제가 은적암에서 경험한 일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간 적이 있습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온 다음 날이었는데, 눈을 쓰며 은적암으로 올라갔어요. 바람 한 점 없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은적암에 발을 딛는 순간, 강풍이 확 휘몰아치더니, 이내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그때 저는 “아, 정말 이곳이 대신사님께서 공부하신 자리구나.”하는 현장감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책과 연구를 넘어, 우리가 역사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덕암 성강현(역사학자, 대동교구장)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강릉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사학과 졸업, 동의대학교 대학원에서 『6.25전쟁시기 천도교 포로의 전향과 종교 활동애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천고등학교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동의대학교와 예문여자고등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6.25전쟁시기 천도교 포로들의 일상생활』, 『태안 동학농민혁명사』(공저), 『대한민국의 역사 교육과정 1』(공저) 등 다수 인터뷰를 마치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울림이 있었다. 성강현 교구장의 말은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동학의 길과 포개지고 깊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고백처럼 들렸다. 동학의 사상은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걸음과 질문, 그리고 끊임없는 성찰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성강현 교구장이 말하는 ‘나를 찾는 일, 우리를 찾는 일’은 수운 대신사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는 일이 곧 오늘의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라는 것. 그 길이 청년들에게, 연구자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진하게 전해졌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따뜻하게 남는 인터뷰였다. 앞으로 성강현 교구장이 이어갈 연구의 길과 그 길을 통해 다시 밝혀질 동학의 빛을 기대해본다. -
On Propagating Truth No.4 -
박인준 교령 포덕으로 김성군 해운대구의회 부의장 동천교구에 입교포덕 166년(2025) 11월 3일(월), 부산 해운대구의회 김성군 부의장이 흥신포 동천교구에 입교하였다. 동천교구는 월요시일식을 봉행하는 관계로 이날 오후 5시 성화실에서 시일식을 봉행한 뒤 입교식을 봉행하였다. 입교식에는 흥신포 도정 박인준 교령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였으며, 서천문과 주문을 전수하였다. 또한 김대석 교구장, 유석운 동천고등학교 교장, 박효 교감, 신원기, 김용휘, 최민국, 안길중 부장 등 교구 간부와 학생 동덕들이 함께하여 새 동덕의 탄생을 축하했다. 집례는 신원기 교화부장이 맡았다. 남해가 고향인 김성군 부의장은 “할아버지 때부터 천도교를 해온 집안이었지만,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며 신앙을 잊고 있었다”며 “준암 교령님을 만나 다시 천도교를 할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매우 기쁘다”고 입교 소감을 밝혔다. 한편 교구에서는 김 부의장이 동천고등학교의 현안 사업과 관련하여 교육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입교는 박인준 교령이 직접 포덕하여 이뤄진 뜻깊은 사례로, 지역사회와 교단 안팎에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
[특별기고] 통권 900호, 한 세기를 건너온 이름 ‘신인간’종이 잡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는 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닌 시대에, 한 권의 잡지가 묵묵히 99년 9개월, 1,197개월을 채우고 통권 900호에 도달했다. 1926년 4월 1일 창간된 월간 『신인간』이 그 주인공이다. 천도교 유일의 기관지이자, 한국 근현대사 100년, 격동의 세월을 통과해 온 이 잡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인간·역사·신앙 아카이브”다. 이번 포덕 166(2025)년 12월호, 통권 900호는 단순한 ‘기념호’가 아니라, “다시 신인간,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새 만물”을 선언하고 다시 출발하는 기념호다. 권두언에서 오암(박길수 주간)은 1926년 4월, 창간호 권두언의 문장, “우리가 바라는 바는 오직 ‘신인간’의 창조이다”를 다시 불러내 오늘의 우리(천도교인, 동학하는 사람들)을 비춘다. 이로써 지난 99년 9개월의 시간을 ‘자축’이 아니라 ‘자기성찰과 재천명’의 시간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인류세의 기후위기, 디지털·AI 혁명, 지구 질서의 격변 속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새로워지는 때”를 후천개벽의 시대로 읽어내고, 여기에 응답하는 새 하늘(한울), 새 땅(문명), 새 사람(신인간), 새 만물(사물의 주체성)을 하나의 비전으로 제시한다. 1. “천도교의 시간, 신인간의 시대”를 말하는 900호 이번 900호의 중심에는 두 개의 굵은 축이 있다. 첫째 축은 “신인간의 시대입니다, 천도교의 시간입니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되는 준암 박인준 교령 인터뷰 기사다다. 교령 취임 200일과 『신인간』 900호를 기념해 마련된 긴 대담은, 한 개인의 신앙 이력에서 출발해, 교단의 현황과 과제,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준비, 인류세·AI 시대의 문명 전환, 남북 평화와 민족통일, 탈종교 시대의 영성과 수도, K-사상으로서 동학·천도교의 가능성까지 폭넓게 다룬다. “천도교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동학·천도교 사상은 K-철학, K-사상이 될 수 있다”는 언급은, 동학-천도교가 더 이상 과거의 종교가 아니라 미래 문명을 설계하는 사상 자원임을 분명히 한다. 둘째 축은 「신인간 통권 900호–창간 100주년 특집: 축하와 제언」이다. 종법사·전직 교령·교단 각 기관 대표·동학민족통일회·여성회·청년회 등 교단과 시민사회 각 부문의 필자들이 총출동해, 100년을 건너온 『신인간』에 대한 축하와 함께 냉정한 제언을 보낸다. “후천개벽의 등불로 우뚝 서라”, “잡지의 미래를 개척하는 선구자가 되라”, “청년들의 손을 잡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가자”, “한울 공동체의 잡지가 되라”는 메시지들은, 신인간이 더 이상 ‘총부의 잡지’에 머물 수 없으며, 교단 전체와 동학 시민사회,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의 공적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연원회 의장 김성환, 종무원장 강병로, 종의원 의장 정정숙, 감사원장 대행 박돈서, 종학대학원장 김혁태,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 주선원, 천도교여성회본부 김명덕 회장, 천도교청년회 이상미 회장, 영등포교구 조광걸 교구장 등 교단 각 영역의 책임자들이 한데 모여 한 권의 잡지를 두고 각자의 축하와 당부를 건넨다는 것은, 『신인간』이 단지 “사보”가 아니라 교단의 정신적 지형을 형성해 온 공적 매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2. 100년의 발자취 위에서 다시 ‘신인간’을 묻다 『신인간』의 역사는 곧 천도교의 역사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변천사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민주화와 세계화, 그리고 오늘의 인류세·AI 시대까지, 잡지의 지령(誌齡)은 곧 시대의 상처와 희망의 연대기를 의미한다. 900호라는 숫자는 국내 잡지 가운데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장구한 지령이며, 그 사이 수만 명의 필자들이 이 지면을 거쳐 갔다. 이번 호의 특별기획 「『신인간』 발행사를 통해 본 한국 근현대사」는, 이 오랜 역사를 한 번 더 조명한다. 잡지가 매달 써 내려간 발행사의 기록을 따라가며, ‘신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가 겪어 온 고난과 역경, 도전과 재기를 함께 되짚는다. 신인간의 100년은 곧 “다시개벽”을 향한 한국 근현대사의 또 다른 얼굴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인간 명품 30선’ 연재의 일곱 번째 글로 실린 신언준의 「자중·분투·창조」는, 20세기 초 신인간 창간기의 사상적 긴장을 다시 불러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새것이란 무엇인가, 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새 사람, 새 생활, 새 문명’이라는 신인간의 원초적 문제의식을 지금 여기의 독자에게 되묻는다. 또 한 편, 박길수의 연재 「다시개벽의 이론과 역사」는 이번 호에서 7회, 그리고 연재의 마지막 회를 맞으며, 천도교 경전에 나타난 시대인식과 개벽론을 정리한다. 창도시대–은도시대–현도시대를 거쳐 오늘의 후천개벽기로 이어지는 사상적 지형이 정리되면서, 900호는 자연스럽게 ‘100년 뒤 다시개벽’을 사유하는 좌표가 된다. 연구논단에서는 라명재의 「해월신사 통문 연구(3·끝)」, 이동초의 「천도교 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 관리(4)」가 실려, 신인간이 단지 감성적인 잡지가 아니라, 교단 사상과 유산을 학문적으로 축적하는 플랫폼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해월신사의 통문을 통해 19세기 동학운동의 정신을 복원하고, 전국에 산재한 천도교 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 과제를 짚어내는 작업은, 2027년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준비하는 교단 전체의 과제와도 직결된다. 3. 청년과 미래세대와 함께 만드는 900호 통권 900호는 과거만을 회고하지 않는다. AI·디지털 시대를 통과하는 청년 세대의 고민과 감각을, 지면의 중요한 축으로 배치한다. 「내가 생각하는 신인간」 코너에서는, 정의필이 「AI시대의 신인간상」을 통해 생성형 AI와 인간, 영성과 도덕성의 문제를 사유하고, 명승철은 「다시 100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에서 신인간 2세대·3세대 독자의 시선으로 다음 100년을 상상한다. 윤철현은 「영성을 회복하여 도덕 사회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영성’과 ‘도덕 사회’라는 키워드를 통해 신인간 독자의 삶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청년·학생 지면도 풍성하다. 「학생마당」의 김상휘는 “사람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야의 확장”을, 「청년마당」의 박현빈은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기록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신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작은 에세이를 들려준다. 이것은 단지 청년·학생의 ‘코너’가 아니라, 100년 잡지가 다음 세대와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천도교여성회본부 회장 김명덕의 축하 글과 더불어, ‘마음편지’ 코너에서 임남희가 들려주는 “부모님의 신앙은 살아 있는 경전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은, 세대 간 신앙의 전승이 어떻게 한 가정과 한 교단의 생명을 이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다. 4. 종이 잡지가 사라지는 시대, 왜 신인간인가 오늘 우리는 “종이 잡지가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대형 서점의 잡지 코너는 해마다 줄어들고, 무가(무료잡지)와 SNS 숏폼이 사람들의 시간을 가져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100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온 한 권의 월간지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이번 호 신인간 칼럼 「AI와 숏폼 콘텐츠의 진화, 문화 전파의 새로운 지평」은, AI와 숏폼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문화 환경 속에서 신인간 같은 ‘롱폼’(장문의, 천천히 읽는 글쓰기)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AI가 요약하고 숏폼이 주목도를 끄는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깊이 읽고, 오래 생각하고, 함께 질문하는 매체”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인간』은, “사라지는 종이”가 아니라 “거꾸로 시대를 비추는 종이 등잔”이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통권 900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내 마음 열리는 곳에 세상 또한 열리고 – 『신인간』 통권 900호, 새로운 시작입니다」에서 발행인 윤태원은, 신인간을 단지 한 권의 잡지가 아니라, 천도교와 동학, 그리고 넓게는 생명평화의 미래를 꿈꾸는 이들의 ‘공동 플랫폼’으로 재정의한다. 종이·웹·영상·강좌·좌담회를 아우르는 종합 미디어로서, 다시 100년을 준비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5. 다시개벽의 과거를 안고, AI 이후의 미래를 향해 『신인간』 통권 900호는, “다시개벽의 과거를 안고, 현재를 밟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한 걸음이다.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간을 통과해 온 이 잡지는, 이제 인류세·AI 시대 이후의 인류 사회, 곧 생명평화·대동·지상천국을 향한 문명 전환의 비전을 묻고 있다. 900호의 여러 글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같은 것을 말한다. 인간은 다시 “한울을 모시고, 사람을 하늘로 섬기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종교는 교권이 아니라 영성과 삶의 실천으로 다시 서야 한다는 것, AI와 디지털 기술은 인간과 만물의 존엄을 살리는 방향으로만 쓰여야 한다는 것, 청년과 여성, 지역과 농촌, 돌봄과 생태가 새 문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99년 9개월의 시간을 지나 통권 900호에 이른 지금, 『신인간』은 묻는다. “다음 100년, 우리는 어떤 신인간으로 살 것인가?” 이 질문에 응답하고 싶은 이라면, 이번 900호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시라. 지난 100년의 겹겹의 기록 위에, 지금 여기의 우리의 얼굴과, AI 이후를 살아갈 미래 세대의 얼굴이 함께 겹쳐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겹침 속에서, ‘다시개벽’의 시대를 여는 작은 길잡이 불빛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목 차 ●권두언 / 다시 신인간,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새 만물 / 오암 04 ●성명서 / 12·3 비상계엄 사태 1년 천도교 성명서 / 천도교중앙총부 06 ●신인간이 만난 사람 - 준암 박인준 교령 / “신인간의 시대입니다 천도교의 시간입니다” / 박길수 08 ●지상설교 / 수도와 한울님 마음 / 정윤택 31 ●특집 신인간 통권 900호 - 창간 100주년 : 신인간900호-100주년 특집: 축하와 제언37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 조동원_ 종법사 38 ○--10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개벽의 미래로 / 박남수_ 전 천도교 교령 39 ○-- 신인간, 사람다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 송범두_ 전 천도교 교령, 순의포 도정 42 ○-- 후천개벽의 등불로 우뚝 서기를 / 이정희_ 전 천도교 교령 46 ○-- 잡지의 미래를 개척하는 선구자로 / 백동민_ (사)한국잡지협회 회장 49 ●신인간을 빛낸 사람들 (3) ○-- 불꽃처럼 살아간 『신인간』의 에너자이저, 박달성 I 박길수 51 ●내가 생각하는 신인간 (9) ○AI시대의 신인간상 / 정의필 64 ○다시 100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 명승철 66 ○영성을 회복하여 도덕 사회를 이루는 사람 / 윤철현 68 ●신인간 명품 30선–07 / 자중自重·분투奮鬪·창조創造 I 신언준 71 ●신인간900호-100주년 특집: 축하와 제언 ○-- “한울님의 감응이 함께하기를 심고합니다” / 김성환_ 연원회 의장 80 ○-- 중일변을 맞이하는 『신인간』 / 강병로_ 종무원장 83 ○-- 꿈은 꾸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 정정숙_ 종의원 의장 86 ○-- 새 시대를 여는 『신인간』으로 발전하기를 / 박돈서_ 감사원장 대행 89 ○-- 100년의 거룩한 여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 김혁태_ 종학대학원 원장 91 ○-- 평화 세계의 교두보가 되라 / 주선원_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 93 ○-- 『신인간』 100년 대계를 마련하길 김산_ 천도교유지재단 이사장 96 ○-- 함께 만들어가는 한울 공동체의 잡지가 되길 / 김명덕_ 천도교여성회본부 회장 98 ○-- 청년들의 손을 잡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가자 / 이상미_ 천도교청년회 중앙본부 회장 101 ○-- 『신인간』, 영우靈友의 마음속으로 / 조광걸_ 영등포교구 교구장 104 ●신인간칼럼 / AI와 숏폼 콘텐츠의 진화, 문화 전파의 새로운 지평 / 최태형 108 ●마음편지 / 부모님의 신앙은 살아 있는 경전이었습니다 / 임남희 114 ●신인간통신 / 『신인간』 제호 로고를 다시 디자인하며 / 윤태원 120 ●학생마당 / 사람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야의 확장 / 김상휘 122 ●청년마당 /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을 내딛고 / 박현빈 126 ●기획연재 / 다시개벽의 이론과 역사(7. 끝) / 박길수 130 ●연구논단 / 해월신사 통문 연구(3.끝) / 라명재 145 ●연구논단 / 천도교 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 관리(4) / 이동초 151 ●시운시변 / 이 땅에 평화와 사랑의 눈발이 나부끼는 그날까지 / 주선원 161 ●신인간 함께 읽기 / 의심과 성찰을 통과한 믿음을 위하여 / 편집실 172 ●특별기획 / 『신인간』 발행사를 통해 본 한국 근현대사 / 성강현 174 ●내 마음 열리는 곳에 세상 또한 열리고 / 『신인간』 통권 900호, 새로운 시작입니다 / 윤태원 184 신인간 구독 / 신인간 보내기 운동 참여 문의 02 - 730 - 6710 1권 5,000원 / 1년 50,000 / 평생구독 1,000,000 -
자인현(玆仁縣) 후연주점(後淵酒店)감영에서 참형을 시행한 이후 사흘 후에 처자를 불러 방면하며, 시신(屍身)을 거두도록 분부하였다고 되어 있다. 대신사의 시신은 단양 접주 민사엽(閔士燁)의 지도를 받는 동학 교도 김경숙과 김경필, 옥바라지를 전담했던 곽덕원, 그리고 대신사의 양사위인 정용서(鄭用瑞)와 해월 신사의 매부인 임익서(林益瑞), 상주 사람 김덕원(金德元) 등에 의해 수습되어, 3월 13일에 대구를 떠나 자인현(慈仁縣)에 이르렀다. 지금 자인현은 경산시(慶山市) 자인면(玆仁面)이다. 관덕당, 즉 현대백화점 앞길인 반월당 길을 따라 영남대로를 내려가면, 경산시로 들어서게 되고 이내 자인면에 이른다. 자인면 소재지로 들어가기 전 오래된 큰 연못이 있다. 이름은 ‘삼정지(三政池)’이다. 자인면 입구의 나지막한 구릉 일대는 유물 지정지이기도 하다. 삼정지는 구릉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의 유물은 한장군묘(韓將軍墓)를 중심으로 그 주변 일대에 삼국시대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 조선시대 자기편(磁器片) 및 와편(瓦片) 등이 다량으로 채집되었다. 특히 예전에는 목곽묘(木槨墓) 단계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삼정지 일원이 중요한 유물의 자리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삼정지가 대신사 시신이 사흘을 머문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그렇다면 집 뒤에 연못이 있는 주점, 즉 후연주점(後淵酒店)은 어디쯤 있었을까? 삼정지에서 자인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지금은 슈퍼가 하나 있다. 이 슈퍼가 있는 자리가 주막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주막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고, 바로 이 슈퍼가 있는 자리가 옛날 자인현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입구이기 때문이다. 대구 관덕당에서 경주까지 대신사의 시신을 운구하며 들렸던 자인현 어느 주막. 지금은 찾을 길 없지만, 삼정지에 석양이 내려앉는 아름다운 모습이 왜 이리 처연한지 눈물이 흐른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포덕 166년 11월 30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13관법 : 무극대도"포덕 166년 11월 30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13관법 : 무극대도" 상암 오문환 선도사 -
[특별기고] 『신인간』 통권 900호 특집 - 권두언“우리가 바라는 바는 오직 ‘신인간’의 창조이다.” 포덕 167년 4월 1일 발행된, 『신인간』 창간호, 통권 1호 권두언 <무하설>의 핵심 문장입니다. 그로부터 99년 9개월, 1,197개월을 지나, 오늘, 통권 900호입 니다. 『신인간』 편집자나 교단(중앙총부)만이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현재 입니다. 『신인간』 독자는 물론 천도교인 모두의 마음이 있었기에 이를 수 있었 던 오늘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한편 “『신인간』이 충분히 ‘신인간 창조’의 제 길을 걸어왔느냐” 하 면, 말문이 막힙니다. “지금 세상이 『신인간』이 예견하고, 약속한 대로, ‘신세 계’냐”고 자문해 보면,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신인간』 통권 900호에 즈 음하여 『신인간』 자신의 장래를 기약하는 일보다, 『신인간』의 사명을 재확인, 재천명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인류는 지금 ‘거대한 전환’의 시간, 후천개벽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최근 몇 년의 시간은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후천개벽은 현실적으로 선천 물질개벽과 축의시대 인지認知혁명까지를 포괄하면서, 이를 다시 개벽하 는 인문개벽과 산업産業혁명까지입니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디지털혁명’, 즉 ‘4차 산업혁명기’로서, AI가 산업구조는 물론 인간의 인식 체계까지도 혁명적 변화의 흐름 속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류세人類世라는, 일찍이 경험 하지 못했던 전 지구적 기후위기 속에서 ‘지구 개벽’의 층이 보태지고 있습니 다.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새로워지는” 때입니다. 하늘(한울)의 새로움은 한울(神性)의 재발견, 재발명(밝힘)입니다. 호모 데우스 (Homo Deus)는 각자위심하던 그 인간의 신화神化를 이야기할 뿐, 신성의 내면 화와 동귀일체를 말하지 않습니다. 내 몸에 모신 내재적 신성이자 우주에 가 득차고 무위이화하는 기화적 신성인 한울님으로의 존재론적 전회를 결여한 ‘신神인간’은 인간중심주의의 극단적 과잉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한울 됨, 즉 영성을 회복하고 다시 밝히며, 생명의 문명이 작동하는 천도의 복권이 곧 새 한울(新天)입니다. 땅의 새로움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온 제도, 기술, 경제, 국가와 세계 체 제의 재편성, 재수립 과정입니다. 그동안의 지구 질서는 한계에 도달하여 새로 운 질서를 기다리며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미국내의 내전 상황, 러시아 대 우 크라이나(미국, 유럽) 전쟁,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영토를 둘러싼 일본과 중 국의 갈등, 미국과 남미의 전쟁 위기 등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습니다. 낡은 틀 이 부서지고 새로운 틀이 모색되는 중입니다. 미국 일극 체제가 종말을 고하 고, 중국, 러시아, 인도, 중동, 아프라카가 제 목소리 내는 다극체제가 부활하 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도덕문명, 생태문명으로 인류의 생활 윤리를 새롭게 하여 새로운 세계의 창조적 재구축을 도모하는 것이 곧 새 땅(新地)입니다. 사람의 새로움은 기하급수적 속도로 기술, 자본, 데이터의 부속물로 전락하 며 개인화하는 인간의 재탄생, 재창조입니다. 한울의 신성이 재발견되는 만큼 내재적 신성의 대변자로서의 인간으로 재발명再發明된 것이 곧 신인간입니다. 한울(神性)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삼경三敬과 물오동포物吾同胞의 신념으로 만 물과의 관계도 재발견한 인간, 새로운 윤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영 성, 즉 한울의 나 됨을 자각하고, 관계의 신성을 자각하여 만물의 지휘자, 대변 자, 조화자로서 역할 하는 것이 곧 새 사람(新人)입니다. 만물의 새로움은 사물의 주체성을 재조명, 재구축하는 일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이 한울님 조화의 결실로서 신령한 존재임, 인간과 더불어 형제자 매임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사물 인터넷’을 통해 ‘그들’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진 오늘날, AI를 매개로 만물이 인간의 ‘반려자’로서 자리매김하는 시대 입니다. 인간과 사물 간의 관계 역시 일방적 소비가 아니라 한울이 한울을 먹 는 관계로 다시 자리매김됩니다. 비인간 존재가 동포임을 수긍하고 AI와 물질 이 행위자임을 인정하여, 착취(추출), 남용, 남발(폐기)하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공생하고 동귀일체하는 신문명 구성원으로 재발견하는 새 만물(新物)입니다. 오늘, 참 좋은 날입니다. 고맙습니다! 『신인간』 900호까지를 성찰하고, 다 시 새로움을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 입니다. ‘『신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종교, 도덕, 윤리, 정치, 경제, 법률! 그것이 곧 신세계의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더 높이, 더 멀리[高飛遠走]까지 갈 수 있다 고 믿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너(후손, 후학, 후배)를 만나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悟菴) 추신 : 1. 『신인간』 통권 900호, 『신인간』 창간 + 신인간사 창립 100주년에 즈음하여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천도교신문> 광고 참조) 2. 『신인간』 보내기 운동, 『신인간』 구독 확장 운동에도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 봉행천도교중앙총부는 포덕 166년(2025) 12월 11일(목) 오후 2시, 울산시 중구 원유곡로에 위치한 수운 최제우 유허지 동학관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을 봉행한다. 이번 봉고식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숭고한 정신과 대신사의 크신 행적을 기리는 동시에, 동학이 제시한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과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지니는 의미를 다시금 환기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천도교 성지인 울산 여시바윗골 유허지에 흉상을 봉안하고 제막식을 진행함으로써, 동학 창도 정신을 시대에 맞게 계승하고자 하는 천도교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이다. 중앙총부는 이번 제막 봉고식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정신이 한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뿌리내리고 확장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천도교중앙총부 서소연교무관장은 “수운대신사님의 가르침은 시대를 넘어 인간 존엄과 공동선의 가치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정신적 유산”이라며 “뜻깊은 자리에 많은 분들이 함께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고 천도교중앙총부 교무관이 주관하는 가운데, 울산 여시바윗골 유허지 보존회가 후원하여 진행된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은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며, 관련 문의는 02-6488-6825로 하면 된다. -
동학순례길 기초조사 - 동학의 근본을 찾아 떠나는 역사 순례천도교사회문화관이 동학의 사상과 혁명 정신을 현장에서 되새기기 위한 ‘2025 동학기행–동학순례지 기초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기행은 동학 전문가들과 함께 직접 유적지를 탐방하며 동학의 근본을 차근히 탐구하는 프로그램으로, 현재 3차까지 답사를 마무리하고 12월 11일~12일 4차 답사를 앞두고 있다. 올해 동학기행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주제로 총 4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1차(11월 14~15일) 답사는 해월 최시형 선생과 초기 동학 재건의 발자취가 스며 있는 동학의 발상지를 중심으로, 2차(11월 22~23일)는 원주 송골–여주–서울 일대 해월신사 피체 노정(避逮路程)에 따른 핵심 사적지를 순례하였으며, 3차(11월 28~29일)는 홍천·인제·고성 일대 강원 북부지역의 해월신사 은거지 및 포덕 활동 관련 유적 심층 조사하였다. 각 답사는 신춘호 박사의 현장 강의와 함께 진행되어, 동학의 재건 배경과 사상의 핵심을 직접 체감할 수 있는 깊이 있는 교육의 장이 되었다. 마지막 4차 동학기행은 12월 11~12일에 진행될 예정이며 장흥·해남·소안도 동학·천도교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한다. 동학의 심장부에서 배우는 사상… “만유를 공경하는 삶을 향하여” 사회문화관은 “동학의 뿌리를 따라가며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사상을 오늘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함께 모색하는 시간”이라며 “많은 교인과 시민들이 함께 참여해 동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동학순례길 기초조사는 동학이 지향한 만유공경의 가르침과 인간존엄의 사상을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여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회문화관은 앞으로도 동학사상과 동학혁명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획 프로그램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다. -
‘우리 음악’의 길 개척하며 천도교 음악의 새 지평을 연 늦깎이 국악 작곡가 정수당(正守堂) 김정희 동덕지난 8월 14일 제162주년 지일기념식. 의례를 마친 뒤 무대에 오른 문화공연은 많은 교인에게 오래 남는 감동을 주었다. 판소리 〈흥보가〉의 흥에 이어, 『해월신사 법설』을 가사로 삼은 창작곡 〈수심정기〉, 천덕송 가운데 민족적 선율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영부의 노래〉가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온 장내가 함께 부른 〈진도아리랑〉이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이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한 이는 북한 토속민요 연구와 천덕송 창작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 정수당(正守堂) 김정희 동덕(영등포교구)이다. 어려운 가정형편과 뒤늦은 음악 공부, 육아와 생계를 모두 감당해야 했던 삶의 조건 속에서도, “언젠가는 작곡가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북한 민요 연구와 동학 천도교 음악 연구, 천덕송에 대한 고민과 창작은 그에게 단순한 직업을 넘어 ‘천도교인으로서의 삶’ 그 자체였다. 김정희 동덕이 작곡가로서 젊은 세대의 천도교인에게 전하는 메시지, 그리고 천덕송의 내일에 관해 그의 인생사와 함께 들어본다.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 되는 동귀일체, 그것이 천도교 음악” 문. 제162주년 지일기념식 후 문화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하셨습니다. 의례 이후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문화적 장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기획 단계에서 가장 고민하신 부분은 무엇이었으며, 천도교 정신을 무대 위에 어떻게 담아내고자 하셨는지요? 답. 천도교가 ‘민족종교’라면 음악 문화에서도 그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첫 곡은 우리 전통 성악의 대표 장르인 판소리, 그 가운데서도 가장 흥겹고 재미있는 〈흥보가〉의 ‘박타령’을 골랐습니다. 두 번째는 지일기념일의 의미를 살려 『해월신사 법설』 〈수심정기〉 일부를 가사로 삼고, 중모리장단에 창부타령조 선율을 입혀 제가 작곡한 곡 〈수심정기〉를 올렸고요, 마지막 곡은 천덕송 중에서 전통 선율을 가장 잘 구현했다고 보는 〈영부의 노래〉를 선택했습니다. 앵콜곡은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는 〈진도아리랑〉으로 마무리했고요. 무대를 만들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동귀일체(同歸一體)’였습니다. 연주자는 연주만 하고 관객은 듣기만 하는 구조가 아니라, 추임새도 넣고 같이 따라 부르면서 연주자와 청중이 한마음이 되는 공연 말입니다. 우리 전통음악은 본래 그런 문화였고, 저는 그 전통이야말로 천도교의 시천주, 사인여천, 동귀일체 정신과도 잘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좋은 엄마와 작곡가, 어린 시절 두 가지 꿈이 끝내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죠” 문. 선생님은 흔히 말하는 정규 코스를 밟은 음악인이라기보다, 여러모로 우회로를 걷다가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음악과의 인연을 간단히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답. 제가 기억하기로는 열 살 무렵 제 인생 목표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 두 번째는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어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에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 『세광 애창 700곡집』이라는 노래책을 사 오셨고, 제게 악보 읽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그 책에 수록된 세계 각국의 동요·민요·가곡 악보를 보며 하루 종일 부르고 또 부르며 놀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 언어의 발음도 익히게 되었고, 악보를 보고 부르거나, 들은 멜로디를 악보로 옮기는 일이 제게 즐거운 놀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 음악 인생의 첫 출발점이었고, 이후 어머니께서는 어려운 형편에도 1년 동안 피아노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피아노 외의 음악 공부는 모두 독학이었지요. 그러나 음악은 저에게 늘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멈출 수 없는 재미’였습니다. IMF, 해고, 재취업 실패… 그렇다면 지금은 공부할 시간! 문. 스무 살에는 공대를 선택하셨다가, IMF 시기에는 음악학원 교사로 일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음악 전공을 결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답. 삶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더군요. 대학에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이후에는 공장에도 다녔습니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뒤에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정시에 출퇴근을 해야 하는 맞벌이를 하기가 어렵게 되어, 음악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격증이 없어 감사에 걸려 해고됐고, IMF가 겹치면서 남편의 직장도 불안정해졌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지금은 일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때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공부에 쓰자.” 마침 정년퇴직하신 친정어머니께서 연금 일부를 일시불로 받아 제게 보태주셨고, 그 돈으로 부산예술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작곡을 전공하려면 작곡과 피아노를 둘 다 배워야 했고, 작곡 레슨비가 너무 비쌌기에, 아는 언니에게 한 달에 일정액을 드리며 1년 반 정도 피아노 레슨을 받아서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한 학기 지난 후에 작곡 전공으로 바꾸었지요. 그때까지 화성법, 대위법, 음악사 등은 모두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에는 육아와 살림, 공부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기에 참 고단했습니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도 못 말린다”는 말처럼, 자발적으로 선택한 공부였기에 버틸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제가 나중에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자발성’의 힘을 몸으로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토속민요에서 발견한, 난생처음 들어본 독창적인 아름다움 문. 선생님의 대표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북한 토속민요입니다. 이 분야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답. 국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던 시기에 황해도 토속민요인 <풍구소리>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 선율이 너무 좋아서 “이 곡으로 작품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북한 토속민요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석사 논문이 단 두 편뿐이더군요. 황해도 한 편, 함경도 한 편. 평안도 토속민요에 대한 논문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때 ‘이건 보물창고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토속민요는 한 집단의 음악적 모국어이자 삶의 기록인데, 분단과 세월 탓에 절반이 통째로 공백 상태로 남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북한 토속민요부터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한국민요대전』을 집대성하신 최상일 PD님을 만난 일이었습니다. 특강 자리에서 인사를 드리며 제가 “북한 토속민요를 석‧박사 과정에서 연구하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께서 “음원은 어디서 구할 건데?” 하고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이주민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모아보겠다”고 하니, “MBC에 이미 수천 곡이 들어와 있는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구하신 북한 현지 음원을 정리하고 계셨던 겁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기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엮은『북한 민요 작품집』 문. 그렇게 연구하신 북한 민요와 창작이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였지요? 답. 북한 민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2002년입니다. 그 이후로 논문을 쓰는 한편, 북한 토속민요 선율을 바탕으로 곡도 꾸준히 써왔습니다. 그러던 중 2018년에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쏠리는 걸 보며 ‘이제까지 써온 곡들을 모아 한반도의 평화와 상생을 기원하는 첫 작품집을 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까지 북한 토속민요를 바탕으로 한 곡이 일곱 곡 있었는데, 정상회담을 기념하는 의미로 한 곡을 더 만들어 여덟 곡짜리 작품집을 완성했습니다. 연주 시간으로 환산하면 65분이 조금 넘는 분량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첫 작품집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작품집입니다. 북한 민요에는 정말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어느 나라 노래와도 다른, 우리만의 음조직과 장단, 정서가 살아 있습니다. 그 음악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불러내는 작업은 남과 북을 잇는 다리이자, 동학 천도교가 지향해온 만민평등과 평화의 이상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연기연>을 읽고 변증법이 떠올라 무척 놀라웠습니다” 문. 천도교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답. 부산예술대학에 다닐 때 <인간과 종교>라는 교양 과목이 있었습니다. 첫 수업 시간에 김용휘 교수님께서 “종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라고 물으셨고, 제가 유일하게 손을 들었습니다. “종교가 없어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성인들이 남긴 책도 있고, 양심에 비추어도 도리를 알 수 있는데 왜 꼭 종교가 필요한가”라는 것이 제 생각이었지요. 그런 제가 동학 천도교 교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건 바로 그 수업을 맡으셨던 김용휘 선생님, 그리고 같은 학교 교수님이셨던 김춘성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입니다. 『동경대전』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을 처음 공부하게 되었을 때 무척 놀랐습니다. “이게 변증법 아닌가? 헤겔 철학이 들어오기 훨씬 전인 19세기 중엽 조선에 이미 이런 사유가 있었다니.” 하는 놀라움이었지요. 이어서 해월 신사의 삼경(三敬) 사상,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같은 가르침을 읽으면서, 제가 평소에 중요하게 여겨온 좌우명들이 이 교리 안에 다 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경물(敬物)’ 사상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물티슈나 일회용 기저귀를 거의 쓰지 않았고, 화악산수도원에서 화장실 쓰레기를 태우는 일을 하면서 일회용품이 남기는 잔해와 독성의 문제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만물을 공경하라’는 삼경 사상과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용담정 수련이었습니다. 당시 제 삶은 여러모로 바닥을 치고 있었고,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수련을 하면 마음에 힘이 생긴다”고 권유하셔서 겨울방학 기간에 2박 3일 용담정 수련에 참여했습니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 시간 동안 비록 특별한 체험은 없었지만 ‘이 길을 계속 가면 내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련 둘째 날 “입교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고, 마침 제 생일 바로 다음 날이 제 입교일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천도교인으로서의 삶’을 저의 중심에 두게 되었습니다. <불연기연> 등 네 곡의 천덕송으로 은사님 환갑을 축하하다 문. 천덕송 창작 역시 선생님의 작업 가운데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특히 포덕 157년(2016) 은사이자 전교인이신 김춘성 선생님의 회갑을 맞아 네 곡의 천덕송을 작곡해 선물하셨는데요, 그 사연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답.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나니 “전교인이 김춘성 선생님이신데, 나는 아직 선생님께 밥 한 끼 제대로 대접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의 환갑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선생님께 가장 기쁜 선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천덕송’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한울님께 마음속으로 “김춘성 선생님께 드릴 천덕송을 만들고자 하니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경전을 펼쳤더니, 맨 먼저 <불연기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첫 곡을 『동경대전』의 <불연기연>으로 정했고, 두 번째 곡은 힘든 시기에 제가 가장 많이 읽었던 대신사님의 <시문>, 세 번째 곡은 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이 집약된 〈수심정기〉, 네 번째 곡은 『의암성사 법설』 가운데 〈진심불염〉으로 정했습니다. 집에서는 집중하기가 어려워 노트북과 경전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작곡을 했습니다. 한 달 동안 네 곡을 작곡하고, 국악기 편성으로 반주를 붙인 후 연주자를 섭외하고, 녹음과 편집, 믹싱, 마스터링까지 마쳤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너무 촉박한 일정이라 아쉬움도 남지만, 한울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추석 전날, 인사동에서 선생님과 단둘이 식사를 한 뒤 찻집에서 “선생님, 환갑 선물입니다.” 하고 그 음원을 들려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무척 기뻐하셨고, 그 순간 저 역시 “천덕송과 천도교 음악 문화에 내 삶을 더 깊이 바쳐야겠다”는 마음을 다시금 다지게 되었습니다. 네 곡 가운데 특히 〈시문〉과 〈진심불염〉은 지금도 제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입니다. "천덕송은 동귀일체를 이루는 노래이자, 평등·평화·생명을 담아내는 노래" 문. 음악 연구자이자 작곡가의 시선에서 볼 때 천덕송이 지닌 정신적·예술적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답.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말이나 글처럼 논리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혼의 문을 두드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느 집단이든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공동체 의식을 다져왔습니다. 학교에는 교가가 있고, 군대에는 군가가 있고, 국가에는 국가(國歌)가 있듯이 말입니다. 오래전부터 농부들은 들노래를 부르며 함께 땅을 갈았고, 어부들은 뱃노래를 부르며 고기를 잡았습니다. 다투던 사람들도 같이 노래하며 일하는 동안에는 한마음이 되었지요. 천덕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천덕송을 부르는 것은 결국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이루고자 함입니다. 천덕송은 천덕사은을 노래하고, 동귀일체를 추구하며, 신심을 돈독히 하고, 깨달음의 기쁨을 표현하는 종교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약자와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평등과 평화에 기여하고, 어렵게 이룩한 민주주의의 열매를 더욱 공고히 하는 사회·역사적 역할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냉전과 분단을 넘어 평화로 나아가는 길에 힘을 보태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외되고 메마른 현대인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따뜻한 감성과 영성을 일깨우는 문화・예술적 역할 역시 중요합니다. 저는 이런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것이 천덕송의 정신적·예술적 본질이라고 봅니다. 일본 노래에서 온 곡들은 이제 보내줄 때… 21세기 가치로 새 천덕송 지어야 문. 오늘날 교단 내부에서도 “천덕송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시대와 호흡하는 새 천덕송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답. 포덕 159년(2018), 『신인간』에 〈천덕송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현재 부르고 있는 천덕송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짚고,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점은 몇몇 곡의 선율이 일본 노래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목적풀이〉는 일본의 〈철도창가〉에 노랫말만 바꾼 곡이고, 〈검가(기 2)〉와 〈배 떠나간다〉는 일본 특유의 ‘요나누키’ 단음계로 된 일본풍 노래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을 침탈하고 동학군을 학살했던 역사가 분명한데, 그런 노래들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오래 불러왔으니까 계속 부른다”는 태도로 유지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측면에서도 교리·교사와 어긋나는 표현, 어법에 맞지 않거나 뜻이 모호한 구절, 품위가 떨어지는 내용, 현재 맞춤법, 띄어쓰기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 정리가 필요합니다. 운율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 전통 시가의 기본 운율은 대체로 3·4조, 4·4조에 2음보인데, 7·5조에 3음보라는 형식은 일본 전통 시가에서 온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우리 고유의 리듬과 말맛을 살릴 수 있도록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천덕송은 21세기 인류가 함께 고민하는 가치들―생태·문화다양성, 상생, 인권, 연대, 복지, 평등, 평화 등―을 적극 반영해야 합니다. 이런 가치들은 수운 대신사, 해월 신사, 의암 성사가 가르쳐주신 바와도 직결됩니다. 동시에 전통 양식과 민족적 요소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도교 음악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면서도 다양성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방향에서 ‘내일의 천덕송’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 천도교의 서사와 민요의 서정을 만나게 하는 것이 제 작업" 문. 선생님은 북한 민요뿐 아니라 경기·서도·남도 등 다양한 민요를 연구하고 창작에 활용해오셨습니다. 민요 속에서 천도교 정신을 어떻게 발견하고 재현해내고 계신지,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주신다면요? 답. 제가 2016년에 작곡한 네 곡의 천덕송 가운데, 『의암성사 법설』을 가사로 삼은 〈진심불염〉은 전남 영광군 논매는소리 〈문여가〉의 선율을 주제로 삼아 만든 곡입니다. 두레 공동체가 함께 논을 매면서 부르던 그 노래에는 꿋꿋하고 유장한 선율, 서로를 북돋는 공동체 정서가 잘 녹아 있습니다. 저는 그 선율에서 의암 성사의 기상을 떠올렸고, 그래서 그 음형을 〈진심불염〉의 주제 선율로 삼았습니다. 민요를 바탕으로 새 천덕송을 짓는 작업이 제 첫 번째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연구 작업입니다. 포덕 162년(2021)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음악 양상과 문화콘텐츠로서의 잠재성’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한국민요대전』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새야 새야〉 외에도 여섯 가지 다른 선율의 〈새야 새야〉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천도교와 관련된 노래는 그 수가 많지 않지만, 넓은 지역에 퍼져 있고, 비슷한 가사가 <논매는 소리>, <무덤 다지는 소리>, <정월 대보름 새 쫓는 소리>, <둥당애타령> 등 여러 갈래 민요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사례들을 찾아내고 분석해 논문으로 공유하는 것이 제 두 번째 작업입니다. 동학 천도교의 주체도 백성이고, 민요의 주체도 백성입니다. 저는 동학 천도교의 서사와 민요의 서정을 만나게 하고, 여기에 ‘지금 이곳’의 지향과 정서를 담아 예술적 숨결을 불어넣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민요는 역사성과 지역성, 시대성과 정체성을 모두 갖춘 새로운 천도교 음악 문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겁니다. 장구·단소와 함께 부르는 천덕송, 어린이에게는 ‘진짜 전래동요’를! 문. 앞으로 교단의 주요 의례나 행사에 민요적 요소와 국악을 더 깊이 접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구상을 하고 계실 줄 압니다. 민요의 서정성과 공동체성이 교단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요? 답. 우선 우리 어린이들에게 ‘진짜 전래동요’를 돌려주고 싶습니다. 널리 알려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두껍아 두껍아〉, 〈쎄쎄쎄〉, 〈여우야 여우야〉 같은 노래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일본 와라베우타(동요)입니다. 와라베우타는 대부분 2분박, 2/4나 4/4 박자가 많고, 특정 음으로 종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반면 한국 전래동요는 3분박이 많고, 12/8 박자가 가장 흔합니다. 이런 차이를 바로잡기 위해 포덕 162년(2021) 서울우리소리박물관에서 『전래동요 자료집』과 음원을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진짜 전래동요’를 천도교 어린이들이 널리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천덕송 가운데 〈영부의 노래〉, 〈지일기념가〉처럼 민요풍으로 작곡된 곡들은 피아노 대신 장구와 단소로 반주하면 훨씬 흥겹습니다. 장구와 단소는 이미 초등 교과 과정에도 들어가 있으니, 역량이 되는 교구에서는 유소년부를 활성화해 ‘장구·단소로 천덕송 연주하기’ 프로그램을 운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민요라는 보물창고를 잘 활용해 새 천덕송을 작곡하는 작업도 병행할 수 있겠지요. 이번 지일기념식에서처럼 교단의 각종 의식과 행사에 국악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중앙총부와 각 교구의 음악 문화도 점차 뚜렷한 정체성을 갖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제대로 된 우리 문화를 만드는 일이 곧 ‘천도교인의 길’ 문. 안익태 애국가 문제 제기, 북한 민요 연구, 천도교 음악 연구 등 선생님이 다뤄온 주제들은 기존 음악계가 쉽게 손대지 않는 어려운 분야였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결국 천도교 음악과 문화적 자산으로 어떻게 연결될지요? 답. 한국 근대사에서 천도교는 3‧1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뿐 아니라 『천도교회월보』, 『개벽』, 『농민』, 『신여성』, 『어린이』 등 다양한 잡지를 통해 대중의 의식과 문화를 선도한 주역이었습니다. 천일기념식, 어린이날 행사 등도 온 나라가 주목하는 문화행사였지요. 스승님들은 우리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하는 작업들은 제가 속한 영역에서 잘못된 것들을 하나씩 바로잡으면서, 앞으로의 우리 문화를 ‘제대로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색이 짙은 곡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우리 정서와 양식에 기반한 새로운 천덕송을 짓고, 한국적 색채와 천도교 정신이 어우러진 공연을 기획해 무대에 올리고, 동학·천도교와 관련된 음악 문화를 학문적으로 정리해나가는 일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결국 이 모든 작업은 ‘천도교인으로서의 행위’입니다. 제가 걸어온 길과 그 결과물들이 조금이라도 천도교의 문화자산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노래만큼 우리 노래도, 남의 학문만큼 우리 자신도 연구합시다” 문. 오늘날의 천도교인, 특히 젊은 세대 교인들에게 음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요? 답. 세 가지 정도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남의 노래를 듣고 부르는 만큼 우리 자신의 노래도 듣고 부르자는 것입니다. K-팝이 세계를 누비는 시대지만, 그 바탕에는 우리의 민요와 전통음악, 그리고 동학 천도교의 노래들이 있습니다. 천덕송과 우리 민요를 사랑하는 마음이 곧 천도교 음악의 미래를 여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둘째, 남의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 만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연구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동・서양 철학과 음악을 두루 섭렵하면서도, 결국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지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준 것이 동학 교리와 우리 음악이라고 느꼈습니다. 『동경대전』의 불연기연, 삼경 사상, 특히 경물 사상은 오늘날 생태위기와 인류 문명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큰 자산입니다. 셋째,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천도교인의 것이라는 점을 항상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제 삶을 돌아볼 때, 특별한 재능이라기보다 물욕이 적고, 의지가 강하고,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붙드는 성향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성향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준 것이 바로 천도교 신앙과 수련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남북한 민요 연구를 더 깊게 이어가고, 새로운 천덕송을 작곡하고, 제자들을 길러내며, 천도교 음악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남의 노래만큼 우리 노래를, 남의 학문만큼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연구할 때 천도교의 노래와 문화도 다시 한번 꽃피울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인터뷰 진행 노은정 전 편집장)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불연기연>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75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시문>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76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수심정기>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77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진심불염>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