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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호모 사피엔스’ 탈퇴 선언탄핵 집회를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한 친구가 그랬다. “사람이 술을 과하게 먹으면 실수도 하는 법인데 윤석열이 한번 봐 주자”고. 다들 농담인 줄 알지만, 옆자리 친구는 “한두 번도 아니고 안 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예수가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마태복음에 있다. 그때 예수가 ‘윤석열이 말고’라는 말을 안 했으니 용서하자”라고 거들었다. 여기까지는 탄핵 집회의 뜨거운 열기가 뒤풀이 자리까지 이어진 농담 섞인 대화였다. 한 친구가 옆 의자에 놓아둔 손팻말을 집어 들었다. ‘국민의 명령이다. 윤석열 퇴진’과 ‘내란 수괴 윤석열 탄핵’이라는 손팻말이었다. 그 친구가 진지한 표정으로 수괴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했다. 수괴(首魁)는 국어사전에 보면 못된 짓을 한 집단의 우두머리라고 나온다면서 그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지도자를 그렇게 부른 게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나 전두환 군사 독재 때도 그랬다.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 지도자에게 보안법을 걸어 감옥에 가두면서 수괴라고 했다. 이런 어두운 역사를 가진 폭력과 지배의 용어보다 그냥 ‘우두머리’라고 하자는 제안이었다. 수괴라는 표현의 대상이 된 적이 있는 나는 치 떨리는 기억이 스쳤다. 길고 긴 수배 생활. 납치되어 고문실을 견뎌야 했던 시간들. 안기부와 기무사에서 당한 치욕의 순간들. 사뭇 달라진 분위기는 탄핵이라는 역사 반동이 왜 되풀이되는지, 김대중과 노무현과 문재인 정부의 한계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대한민국 대통령 개개인 인간성과 인격의 문제인지, 우리나라 국민성 문제인지, 현대 문명은 어디로 흘러가는지까지 얘기가 번졌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내 책임이다’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이 현상. 대한민국 국민을 들먹이면서 그걸 윤석열 단죄의 지표로 삼는 현실. 자기 자신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규탄과 비난과 요구를 먼저 앞세우는 이 거리와 이 함성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진중해졌다. 지금 줄을 잇는 종교인과 대학교수들의 탄핵 지지 성명과 기자회견들. 길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 대한민국 모든 사람을 윤석열 탄핵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로 갈라 세우는 이 흐름. 윤석열과 국민의 힘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자신의 과오는 면책되는 이 현상. 탄핵 뒤가 더 중요하다면서 ‘사회 대개혁’을 내세우는 사람들. 국민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면서 윤석열의 퇴진을 요구하는 종교인들. 풍자와 해학으로 윤석열을 비판하는 예술인들. 죄수처럼 국회 소위원회 증언대에 선 국무위원들과 군 장성과 경찰 고위층. 집회장에서 만나는 어린 여학생들의 순박한 열망. 갈채와 비난과 함성. 나는 그들 모두에게서 내 모습을 본다. 나는 겁이 많고 비열하고 때론 용감하다. 당장 한순간을 넘기려고 뻔한 거짓말을 한다. 곧 후회할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해서는 안 될 짓도 한다. 그리고 탄핵 집회에도 간다. 나는 오늘의 윤석열을 만들었다고 지적되는 극우 유튜버들이 주장하는 부정선거와 계엄령의 논거가 궁금해서 유튜브에서 찾아봤다. 찾을 수가 없었다. 검색어로 ‘비상계엄’과 ‘부정선거’를 입력하면 나와 견해가 같은 사람들의 영상만 주르륵 뜬다. ‘극우’라고 검색해도 안 나온다. 구글은 나 좋아하는 것만 보여 준다. 그래서 나는 온 세상이 내 편인 줄 안다. 이미 나는 정보의 편식, 사고의 편향이 심각하다는 결론이다. 인간이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구조다. 사회가 두 동강 나는 원리다. 우리는 물질(돈)의 종이 되어 넘치고 넘치는 물질에 묻혀서 신성을 잃고 소박함과 청빈을 내버렸다. 반면에 외로움과 불안과 긴장과 공격성으로 나를 채웠다. 작은 비판에도 내 인격 전체가 부정당했다고 피해의식을 뻥튀기해서 공격한다. 편을 짜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한다. 윤석열이 국회와 야당과 비판적인 시민들을 반국가세력, 척결해야 할 종북세력으로 봤기에 법률도 헌법도 국민도 다 팽개쳤다. 자기 목숨까지 팽개쳤다. 윤석열을 치매라고도 하고 신경쇠약 환자라고도 한다. 진단과 단죄는 쉽다. 현대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질병에 걸려있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미친 짓을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한다. 돈 써 가며 제 무덤을 판다. 현대인들의 질병이다. 혐오와 차별을 금하고 언어폭력과 시선 폭력마저 못하게 벌을 주면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전쟁터에서의 대량 살육은 이제 만성이 되어 그냥 넘긴다. 이게 오늘날의 인간 실상이다. 나는 정보중독자다. 한쪽 주장의 과식 상태다. 우리 사회가 그렇다고 여겨진다. 어느 편에 설 건지 늘 기웃거린다. 상반되는 선택을 하면서 스스로를 변호한다. 현대 문명을 이루게 한 이성과 논리와 지성과 합리성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윤석열이가 비상계엄으로 제 무덤을 팠다면 현대 인류는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군림하면서 이들에게 사시사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제 무덤 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의 비극이다. 나는 탈퇴서를 쓴다. 호모사피엔스 동네에서 벗어나는 탈퇴서다. 비가 새면 우선 양동이를 가져와서 빗물을 받아내야 하지만, 비가 그치면 지붕을 고쳐야 한다. 안 그러면 비 올 때 또 샌다. 되풀이되는 탄핵과 길거리 외침. 어떻게 잘라 낼 것인가? 그래서 호모사피엔스 탈퇴서를 쓴다. 새로운 나를 위한 첫걸음이다. 신성을 회복하고 낮아지고 낮아지기 위한 첫 단추다. 목암 전희식(진주교구, 한울연대 공동대표/ 마음치유 농장 대표) -
중편소설 <하얀 혁명>(2)<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벼린 무기가 미흡하고 쌓인 전량이 부족하다 하여 천심을 회복하려는 한울님의 뜻을 저버리고 출진을 망설여서 되겠습니까? 철성(鐵聲) 소리만 듣고서도 떨쳐 일어서는 기백이 있어야 천지가 돕고 신명이 동할 것입니다. 이미 호남의 전봉준 장군이 일어섰다 하고, 해월선생께서도 기포를 명하셨는데 무얼 더 주저한단 말입니까? 내 안에 한울님이 모셔져 있음을 아직도 믿지 못한단 말입니까?” 이창진 접주의 절명(絶命)이라도 불사할 만한 토로가 있자 의기소침해 있던 좌중에 일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규석은 평소 이창진의 척왜양에 대한 소회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성심을 다해 동의했고, 다른 접주들도 우레 같은 박수로 격려를 보냈다. 특히나 호남동학군이 기포했다는 소식에 경기동학군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당위성이 더해져 회의장 분위기가 일변 출진하는 쪽으로 울흥하게 일었다. 수접주가 다시 나섰다. “이창진 접주의 고변(高辯)을 듣자니 묵우(默祐)의 기운이 출중하여 후천개벽이 멀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 우리 이천포도 기포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이제부터는 도소의 육임(六任)을 중심으로 서로 뜻이 맞는 접주들끼리 모여 출진을 위한 세부 사항을 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도소 회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일동 심고. 한울님 감사하옵니다. 한울님의 은덕으로 오늘 이천포 동덕이 일심으로 기포를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안위보다는 한울님의 섬김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오며, 광제창생한 나라에서 평등한 백성 되기를 간구하오니, 척왜양의 기치가 한울님께 닿아 사해 만민이 한울사람과 더불어 살게 해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이천포 접주들 모두 엎드려 기도드렸사옵니다.” 수접주의 심고가 끝나자 각 고을의 접주와 도소의 육임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향후의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무기와 전량의 확보였다. 이미 황산의 강용구 접주가 음죽과 안성의 관아를 깨뜨릴 방도를 제시하고 나선 터라 젊은 접주들은 자연스레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강용구 접주가 먼저 말머리를 잡았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음죽과 안성은 저의 세거지(世居地)인 황산과 지척이라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두 관아는 방비도 허술하고 제가 익히 알고 지내는 별감과 좌수가 여럿 있어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습니다. 더하여 향청(鄕廳)의 담이 높지 않아 월장(越墻)하기로 친다면 여반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군사의 숫자도 몇 안 되고 기강도 무뎌 동학군의 철성 소리만 들어도 삼십육계 줄행랑칠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안성은 신임군수가 부임하기 전이어서 가히 최적의 기회라 할 만합니다. 화승총이나 활을 든 인원 200인이면 능히 성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강용구의 말에 용기를 얻은 접주들이 자기 접에서 힘을 보탤 만한 인원수를 어림해 숫자를 내놓았다. 삽시간에 400인이 모여졌다. 강용구는 화선지를 꺼내 접별로 제시된 인원수를 적고 물건 실어 나를 달구지 숫자도 추렴해 함께 적었다. 화선지 가득 숫자가 적혀나가자 젊은 접주들은 일본군과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벌써 승리를 쟁취한 듯 흐뭇하게 양팔을 겹쳐 겨드랑이 밑에 고였다. 출진에 앞서 비축할 물건의 목록을 만들어두자는 건의가 나와 즉석에서 현물 없는 오일장이 열리기도 했다. 화선지를 따로 꺼내 쌀이나 콩, 동아줄, 푸른 대나무, 삼 줄기, 볏짚, 소금, 석유, 화약, 대동목(大同木) 등 비축해야 할 물품의 목록과 수량을 세세히 적어나갔다. 드디어 거사 날짜가 정해졌다. 정확히 닷새 후인 9월 25일, 오포가 울리는 정오. 민정(民丁)을 200인씩 둘로 나누어 음죽과 안성의 두 관아를 동시에 공격하며, 탈취한 무기와 전량은 즉각 광혜원으로 옮겨 본격적인 출진에 대비키로 했다. 공격은 의외로 쉽게 진행되었다. 어디서 비밀이 누설되었는지 막상 당일이 되자 동학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곡괭이와 쇠스랑, 거릿대를 든 농민들이 관아 앞에 구름처럼 몰려와 꽹과리를 치고 고함을 지르자 혼비백산한 관군들이 무기를 집어 던지고 삼십육계 줄행랑치기 바빴다. 동학군은 죽창 한번 휘두르지 않고 쉽사리 관아를 점령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마을 축제 같았다. 그만큼 동학군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기도 했고,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일이라면 농민들이 쌍수를 들어 소매를 걷고 나선 결과였다. 탈취한 물건은 달구지에 싣지 못할 만큼 많았다. 화승총이나 창, 장검 같은 무기류도 많았고, 곡식이나 피륙은 몰려든 백성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도 넘쳐났으며, 노비문서나 채무문서 등을 샅샅이 찾아내 불살라버림으로써 애초에 동학이 기치로 내걸었던 폐정 개혁안 12조를 실천했다. 이 정도 무기와 군량이면, 특히나 이렇게 들끓는 민심이면 출진을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관아 공격을 성공적으로 마친 각 접은 접주를 중심으로 바삐 움직여 무기와 전량을 싣고 애초에 모이기로 했던 광혜원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허연 옷을 입고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를 보자 이천 수접주는 일이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모일 사람은 관군이나 일본군을 상대로 싸울 젊은이들이어야 하거늘 막상 인원을 점고해보니 어린애까지 동반한 식솔 전체가 떨쳐나섰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는 유랑민 차림의 농부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무리를 이끌고 싸움을 벌인다는 건 숫자만 요란했지 오히려 방해꾼이 더 많다는 사실에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급히 몇몇 접주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가속(家屬)을 대동하고 나서면 어찌 총 든 일본군과 대적한단 말이오?” 수접주가 물고 있던 장죽을 뽑아 놋재떨이를 탕탕 치며 힐난하자 접주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답했다. “가장이 떠나고 나면 남은 식솔이 받을 핍박이 극심한지라 함께 나선 것이지요.” “작년 보은 취회 때도 온 식구가 따라나선 바 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하니 막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연초(年初)에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 이후 안핵사가 지역 인민을 동학패당이라 지칭하고 겁박하기를 부지기수,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를 붙잡아 대살(代殺)까지 행하였다 들었습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누가 남고자 하겠습니까?” “전장에 나가더라도 밥은 먹어야 할 터, 불 때고 밥 짓는 일을 어찌 허투루 보냐며 아녀자들이 팔 걷고 나서는 통에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보니 접주들의 말이 구구절절 옳은지라 수접주는 장죽에 담긴 담뱃가루가 줄줄 새는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다.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은 다시 없었다. 유탄이 날고 포환이 떨어지는 전쟁터에 사패지(賜牌地) 경작하러 떠나는 작인들처럼 가속을 대동하고 나섰으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무리를 이끌고는 전투는커녕 보은까지 행군해 갈 자신이 없었다. 가는 도중에 맞닥뜨리게 될 일본군과 관군과의 교전을 생각하면 머리칼이 쭈뼛 섰다. 동학군을 보면 굶주린 담비처럼 덤벼들 게 분명한데 이런 오합지졸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흘리게 될 피의 강이 눈앞에서 벙벙하게 흘렀다. “아무래도 아니 되겠소.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 식솔을 대동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 한 가지 제안하리다. 무기 없는 사람은 인원에서 제외합시다. 화승총이나 장창, 최소한 궁시를 든 자 이상만 추리자 이 말이오. 어떻소?” “그 말씀이 장히 타당합니다. 그렇게 합시다.” 즉석에서 동의가 나왔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는 접주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사코 고집을 꺾지 않는 자가 있을 것인즉.” 중구난방이 이어졌다. 더 듣자 해도 뻔한 말들이라 수접주가 단호하게 오금을 박았다. “군율로 그리 정했다 하면 필시 마음을 돌릴 것이오. 엄중한 군율로 말이오.” 손사래 치며 나서려던 자들이 세웠던 무릎을 도로 개고 주저앉았다. 수접주가 윽박지르던 기세를 몰아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일단 그 일은 그렇게 하십시다. 그보다 먼저, 이번에 관아에서 탈취한 병장기를 다룰 훈련이 필요할 텐데 말이오?” 수접주가 어디서 들은 말이 있었던 듯 군사 훈련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 일이라면 각 접에 포수 노릇하는 도인이 상당수 있을 것이니 이들에게 포술을 가르치게 함이 어떻겠소?” “좋소. 당장 내일부터 훈련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포수를 모이라 연통을 넣으시오.” 얘기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더 뭉개고 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회의를 마친 접주들이 본거지로 돌아가 결과를 알렸다. 무수한 반대가 일었으나 결사코 참여하겠다는 사람에 한해 죽창이라도 가졌다면 끼워주는 선에서 무마하고 포수 교관을 선발하여 화승총 사격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나 말이 훈련이지 심지에 불을 붙이다가 손가락을 태워 먹기 일쑤였고, 화약 쟁이는 손놀림이 허술해 쏟는 게 태반이었으며, 총알 튀어나가는 시간을 가늠하지 못해 헛방을 놓기 일쑤였다. 한나절 씨름한 끝에 겨우 탄환 장전 기술은 익혔으나 과녁 맞추는 일은 또 다른 연찬이 필요한지라 능숙해지기까지는 하세월이었다. 사격훈련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그것은 군사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총기 탓이었다. 총이 많으면 한꺼번에 여러 명을 훈련시킬 수 있지만, 워낙에 숫자가 부족한지라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게다가 화승총은 명중률이 떨어져 조준 사격이 쉽지 않았고, 재장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일제사격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총은 칼이나 창과 달리 직접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아니어서 관아나 적병에게 탈취하지 않고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기왕에 지니고 있던 것과 음죽과 안성에서 빼앗은 화승총을 합친다 해도 일본군이나 경군(京軍)이 지닌 신식무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게 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있는 다른 관아를 습격하여 탈취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창진 접주가 진천(鎭川) 관아를 기습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사격훈련을 마친 동학도를 중심으로 특공부대를 편성해 야습하자는 계획이었다. 그의 계획에 찬동하는 도인이 대거 몰려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많은 인원이었다. 엄선을 거친 후 1개의 주공 부대와 2개의 협공 부대를 편성해 맹훈련에 돌입했다. 습격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무기는 빈약할지라도 워낙 많은 숫자가 야음을 틈타 일시에 달려드니 진천 관아의 관군은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줄행랑치고 말았으며, 현감과 아전을 포박해 꿇리고, 군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다수의 무기와 탄환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음죽과 안성에 이어 진천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자 동학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제는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천포가 진천 관아 습격에 성공한 직후 경기포 본진으로부터 광혜원에서 황산으로 이동하라는 군령이 내려왔다. 이천 수접주의 지휘 아래 큰 짐은 소달구지에 싣고, 멜 수 있는 짐은 등에 지고 길을 나섰다. 만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다. 황산에 도착하니 원주, 횡성, 홍천 지역의 강원도 군과 충청도 북부에서 기포한 동학군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족히 1만은 넘어 보였다. 의암 손병희 대접주가 경기동학군의 수장으로 나선 것도 큰 힘이 되었다. 한울님의 옹위와 보살피심이 황산에 모인 동학도의 신심을 부추겨 주문 외우는 소리가 낭자하게 울려 퍼졌다. 다시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황산은 지세가 협소해 사소한 움직임에도 목화송이 휩쓸리는 형국이라 인근의 무극 장터까지 주둔지를 확장하여 북새통을 이룬 후 드디어 동학군은 보은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연도에 구경 나왔다가 빗겨 깎은 죽창이나마 꼬나들고 끼어드는 인원이 늘어나는 통에 대열은 열두 발 상모 끈처럼 장사진을 이루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열은 크게 선봉군과 중앙군, 후위군의 셋으로 나누고, 중앙군은 다시 손병희 대접주가 이끄는 중군과 좌, 우군의 셋으로 공격대형을 갖추었다. 진천 관아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천포는 후위군의 주력으로 편성되었다. 경기동학군은 소걸음으로 꾸준히 움직여 증평을 거쳐 괴산을 향해 짓쳐 나아갔다. 괴산은 동학군이 섬멸해야 할 1차 목표 지점이기도 했다. 괴산을 공격 목표로 삼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부족한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괴산 관아에서 이 지역의 동학 접주 2명을 붙잡아 처형한 것을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괴산 일대는 삽시간에 몰려드는 동학군으로 북적였고, 공격 정보를 입수한 관아의 수성군(守城軍) 역시 횃불을 치켜들고 여장(女牆)을 두텁게 덧쌓아 방비하고 있었다. 한편 괴산은 일본군이 동학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는 지역이기도 했다. 일주일 전, 경기동학군 선발대의 습격으로 괴산과 지척에 있는 안보(安堡) 병참부가 공격을 당해 군용전신이 끊기는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군용전신은 일본군이 보호 1순위에 놓는 군사 장비로서, 만약 괴산이 점령되면 인근에 위치한 가흥(可興) 병참부 역시 위협받을 처지에 놓이기에 일본군은 이미 이 일대에 정찰병까지 내보내 첩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전투는 뜻밖에도 일본군의 기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경기동학군의 선봉이 괴산 못미처의 작은 고개를 넘기 위해 접근하는 도중 이곳에서 정찰 활동을 벌이던 일본군 정찰병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 2개 분대 30명의 정찰대가 2개 조로 나뉘어 1개 조는 선봉군의 정면을 파고들었고, 다른 1개 조는 측면으로 우회하여 중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과의 첫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습 공격을 받은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고, 고작 2개 분대의 공격으로 선봉군과 중앙군이 속수무책 당하고 만 것이었다. 이번에도 전세를 유리하게 이끈 이는 이창진 접주였다. 일본군 숫자가 많지 않은 걸 알아차린 그가 후위군 화승총 부대를 지휘해 일제사격을 가한 결과 실탄이 바닥난 일본군이 퇴각하기 시작했고,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용품까지 버린 채 충주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괴산 초입에서 치른 일본군과의 첫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동학군은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기쁨에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경기동학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청산에서 북상하여 올라온 동학군과 세를 합쳐 괴산 관아로 쳐들어갔다. 동학군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성벽에 운제(雲梯)를 걸치고 불화살을 날리며 통나무수레로 성문을 깨뜨렸다. 이를 본 관군이 대군의 숫자에 놀라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내고 도망쳐버렸고, 관군과 함께 저항하던 부락민 삼십여 명을 붙잡아 도륙 내자 괴산 일대는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화염과 함성으로 뒤덮여 동학군 세상이 되고 말았다. 중앙군 손병희 대접주의 행렬이 성문을 지나 관아에 도착하는 것을 끝으로 괴산전투는 막을 내렸다. 한규석은 이창진과 함께 관아로 들어가 손병희 대접주에게 승리 축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대접주께서 무척 기뻐하셨어. 이번 전투에서 자네의 공로가 지대하다는 걸 잘 알고 계시더군.” 한규석은 이창진의 무공을 추켜세우며 진중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 칭찬이나 듣자고 한 일이겠나?” “아무튼 장한 일을 했어. 그런데 말일세. 우리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죽거나 다친 자가 무수하다 들었네. 그 수가 얼마나 된다던가?” “아직 다 수습된 건 아니지만 죽은 자가 족히 백 명은 넘는다 들었네. 자세한 것은 곧 알게 되겠지.” “관군과 일본군은 몇이나 죽었다던가?” “관군의 숫자는 지금 파악 중이고, 일본군은 한 명이 죽고 네 명이 부상당했다 들었네.” “어허, 낭패로고.” “낭패라니?” “관군의 사상자는 빼더라도 일본군 한 명을 죽이는 동안 동학군 백 명이 죽었다면 이 어찌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진 무기가 열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네. 이 어찌 제대로 된 전투라 할 수 있겠나? 그리고 앞으로가 더 문젤세. 고작 일본군 정찰병 삼십 명이 우리 동학군 일만 명을 업신여기고 달려들 정도인데 장차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파견했다는 후비보병(後備步兵) 19대대를 만나면 어찌 되겠나? 게다가 죽산 부사 이두황(李斗璜)의 장위영(壯衛營) 군과 안성 군수 성하영(成夏泳)의 경리청(經理廳) 군이 지난번 우리가 지나왔던 광혜원과 안성에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나? 일본군과 관군이 우리 동학군만 보면 진멸하러 달려들 것이 불 보듯 뻔한데 항차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래서 괴산 관아를 공격한 게 아니었나? 노획한 무기도 상당하고 환곡 사백 석에 공전(公錢)도 팔천 금이나 확보했다네.” “앞으로 날은 더 추워질 테니 입성도 두툼히 갖추어야 하고, 많은 인원에 먹성 대기도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걱정이 하나 더 생겼네. 자네도 괴산 읍내 불타는 것 보지 않았는가? 탐관오리들이 끼친 패악을 참지 못해 당장 개벽 세상을 만들 것처럼 날뛰는 사람들 말일세. 이들이 관가나 민가 지붕에 불쏘시개를 찔러 넣어 소실된 가옥만도 오백 채가 넘는다네.” “나도 기실은 그게 걱정일세.” 둘은 전화(戰火)의 참상이 채 가시지 않은 읍내를 둘러보며 품었던 소회를 풀어냈다. 외적의 침탈과 모리배의 악행을 징치하기 위해 기포한 동학군이건만 이 중에는 시정잡배, 협잡꾼까지 묻어 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이가 있으나 이들을 추려낼 방도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로 인해 화란(禍亂)이 더욱 극심해질 게 염려스러웠다. 이창진은 가던 길을 멈추고 행전을 조여 매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이제부터라도 군율로 더욱 엄히 다스리고 전량을 철저히 단속함은 물론, 무리 중에서 동학교에 입도하지 않은 자들을 솎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화적 떼와 다를 것이 무언가? 우리 이천접이 먼저 솔선하여 경기포의 모범을 보이세.” 한규석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전투 결과를 세밀히 분석하고 기록해 차기 전투에 대비하는 일도 생각해봐야겠어. 허투루 병력을 낭비하여 1대 100으로 동학군이 죽어서야 쓰겠는가? 전황의 유불리와 진퇴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전투상보(戰鬪詳報)를 꼼꼼히 기록하는 것도 엄중한 일일 걸세. 내가 이 일을 자청해서 맡아 할 터이니 그리 알게나.” 한규석은 이천접 진중으로 돌아오는 즉시 한지 두루마리를 한 채 사서 마름질하여 지니고 다니며 난중 세사(亂中細事)를 꼼꼼히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
포덕 165년 12월 8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 신인간 선언설교 : 신인간 선언(오암 박길수) -
2024 인내천수운문화제 따뜻함을 나누는 우리만의 콘서트 HEALING:CON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12월 13일 18시 30분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2024인내천수운문화제 따뜻함을 나누는 우리만의 콘서트 HEALING:CON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어 인내천수운문화제를 통하여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문화행사로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교인 및 일반인들에게 뜻깊은 의미를 전달할 예정이다. 인내천수운문화제의 기본 정신을 표현한 '당신이 한울입니다.'라는 슬로건처럼 “따뜻함을 나누는 우리만의 콘서트, HEALING:CON”을 이웃 시민을 초청한다. 메인MC 민서의 사회로 첫 번째 공연은 신진발달장애인 연주 그룹 파라솔의 클라리넷 앙상블 연주 공연으로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의미를 되새기며 서로 만들어 나가는 연주 속에서 큰 감동과 울림을 선사하고자 한다. 장예예술교육 및 사회 공헌 활동 등을 통하여 발달장애인의 의식개선에 앞장서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뮤직그룹 파라솔의 공연과 함께 조은세 아티스트, 오웬(O.WHEN) 아티스트, 백아연 아티스트의 공연 및 토크가 이어진다. 윤석산 교령은 행사를 앞두고 “올해는 동학 천도교를 창명하신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의 출세 200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입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시천주와 인내천 운동은 우리 안에 평등과 조화로 여여한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략) 인내천수운문화제를 통해 돌봄과 실천을 함께하는 따뜻한 공동체를 회복하고 행복한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
외교부, 「제6차 여성과 함께하는 평화 국제회의」 개최외교부는 12.10.(화) 서울 롯데호텔에서 「제6차 여성과 함께하는 평화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분쟁 상황에서 여성을 보호하고 분쟁해결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화하는 여성‧평화‧안보(WPS: Women, Peace and Security) 의제에 대한 기여를 강화하기 위해 외교부가 2019년부터 매년 개최해온 행사다. ※ 여성과 함께하는 평화 구상(Action with Women and Peace Initiative) - ▴연례 국제회의(2019.7월, 2020.11월, 2021.11월, 2022.12, 2013.11월 등 5차례 개최),▴국제기구 협력사업(분쟁지역 성폭력 예방‧대응 및 여성의 평화활동 참여 증진)으로 구성 올해 회의는 “안보리 결의 1325호 25주년을 앞두고 – 유엔 임무단 및 국가간 교훈 공유”를 주제로 개최됐다. 내년은 여성‧평화‧안보 의제에 관한 첫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인 1325호 결의가 채택된지 25년이 되는 해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부, 국제기구, 시민사회 및 학계 인사들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의 여성‧평화‧안보 의제의 진전사항과 남은 과제를 짚어보고, 향후 발전 방안을 논의했다. 강인선 외교부 2차관은 개회사에서 “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많은 분쟁을 겪고 있는 올해, 국제 분쟁, 인권 옹호와 인도적 지원의 현장에서 여성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강 차관은 더 많은 여성들이 국제 분쟁 협상가 및 중재자, 평화유지군, 평화구축가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변화를 이끌어낼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우리나라가 2024-25년 임기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서 안보리 회의장은 물론이고 분쟁의 현장에서 여성 평화활동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임무를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줄리 비숍(Julie Bishop) 유엔 사무총장 미얀마 특사(前 호주 외교장관), 시마 사미(Sima Sami) 유엔 여성기구 총재, 잉그리드 예르드(Ingrid Gjerde) 노르웨이군 국방참모장은 기조연설에서 내년 유엔 안보리 결의 1325호 채택 25주년을 맞아 여성‧평화‧안보 의제의 이행 강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한층 더 결집해나갈 필요성을 강조했다. 바트뭉흐 바트체첵(Batmunkh Battsetseg) 몽골 외교부 장관, 재클린 오닐(Jacqueline O’Neill) 캐나다 여성‧평화‧안보 대사, 올로프 스쿡(Olof Skoog) 유럽연합 인권특별대표, 볼커 튀르크(Volker Türk) 유엔 인권최고대표, 장-피에르 라크루아(Jean-Pierre Lacroix) 유엔 평화활동국 사무차장 등 주요국 및 국제기구 인사들도 영상으로 축사를 전해왔다. 개회식 이후에는 4개 세션별로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오전 첫 번째 세션에서는 유엔 평화유지 임무단 출신 연사들이 평화 유지의 현장에서 여성의 참여를 증진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아시아 지역의 학계 및 시민사회 연사들이 아시아 국가에서 여성‧평화‧안보 의제가 어떻게 이행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향후 이행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미얀마 여성들의 평화구축 노력을 국제사회가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논의하기 위한 특별 세션도 열렸다. 마지막 세션에는 청년들이 연사로 나서, 여성‧평화‧안보 의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동 의제에 대한 미래 세대의 인식을 높이고 이와 동시에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청년들의 논의 참여 기회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청년 연사들은 전통적인 안보 이슈뿐 아니라, 사이버안보, 기후변화 등 신흥 안보 이슈 논의에서도 여성들의 참여와 기여가 더욱 강화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 세션별 주제: ▴제1세션: 유엔 평화유지활동과 여성‧평화‧안보(WPS) 이행 – 유엔 임무단의 경험 ▴제2세션: WPS 국가행동계획 수립과 이행 – 아시아 국가의 경험 ▴특별세션: 아시아 사례 연구 – 미얀마 여성의 평화구축 노력 ▴청년세션: WPS 의제의 다음 25년을 향해 – 청년의 시각 이번 회의는 2024-25년 임기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 평화와 안보 증진을 위한 우리나라의 기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한편, 내년 유엔 안보리 결의 1325호 채택 25주년을 맞아 여성‧평화‧안보 의제의 발전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더욱 증진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
한파 취약계층 보호시설 현장 긴급 점검행정안전부 이한경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12월 10일(화) 대전광역시 동구 지역을 방문해 한파 취약계층 보호 대책 이행 상황을 점검했다. 이번 점검은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겨울철에 대비해 취약계층 보호를 위한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먼저, 이한경 본부장은 1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대전역 인근 쪽방촌을 방문해 겨울철 난방 및 화재 안전대책을 점검했다. 이 본부장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쪽방 주민을 지원하고 있는 쪽방상담소 직원들과 자원봉사자,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주민들을 만나 위문품을 전달하고 격려했다. 이어서, 노숙인 일시보호센터를 찾아 노숙인을 위한 쉼터 운영 상황과 한파 대책 등을 확인했다. 이 본부장은 센터 관계자로부터 의료, 급식, 잠자리 등 노숙인 지원 현황을 보고받고, 노숙인 안전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세심히 살펴줄 것을 당부했다. 끝으로 한파 쉼터로 운영 중인 중앙동 경로당을 방문한 이한경 본부장은 어르신들이 가까운 한파 쉼터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도록 평소 자치단체가 쉼터 위치 등을 적극 홍보할 것을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대설·한파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겨울철 자연재난 대책기간’(11.15.~3.15.)을 운영하고 있으며, 쪽방촌 주민, 노숙인 등 취약계층 보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쪽방에 거주하는 고령자·장애인·기저질환자 등에게는 방한용품(손난로, 목도리, 내복 등) 제공을 포함한 건강관리 지원을 강화하며, 노숙인에 대해서는 겨울철 현장 활동 전담팀을 구성해 야간 순회 및 밀착 상담을 통해 시설 입소 또는 응급잠자리를 이용하도록 적극 안내하고 있다. ※ 응급잠자리(일시보호시설, 응급구호방, 고시원 등 244개소) 및 임시주거비 지원 등 자치단체 실정에 따라 노숙인 동사 사고예방을 위한 보호·지원 강화 아울러, 생활지원사 3만 5천여 명을 활용해 한파 시 취약노인*의 안전을 확인**하고, 응급상황 발생에 대비해 안전조치(119 신고 등)를 실시하는 등 노인돌봄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 65세 이상 기초수급자·차상위·기초연금수급자 중 독거 등 돌봄이 필요한 노인(54만여 명) ** 주거상태 및 기저질환 등 건강상태 고려하여 안전확인 및 생활교육 이한경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겨울철 한파는 취약계층에게 더욱 가혹하고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라고 강조하면서, “정부는 취약계층이 올겨울을 안전하고 따뜻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
포덕 165년 12월 8일 온라인 어린이 시일식 봉행포덕 165년 12월 8일, 천도교 어린이들이 온라인을 통해 하나 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이번 어린이 시일식은 북부산 교구의 박민성 어린이가 집례를 맡고, 삼천포 교구의 이채윤 어린이가 경전을 봉독하였다. 이어지는 설교는 천도교 청년회 이재선 회장이 맡아 어린이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시일식 후에는 천도교 대학생단 조영은 동덕의 지도 아래 어린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특별 활동, ‘궁을장 자개 그립톡 만들기’가 진행되었다. 어린이들은 전통 공예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체험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온라인 어린이 시일식은 매달 둘째 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진행되며, 전국 각지의 교구 어린이들이 모여 경전 봉독과 설교를 통해 신앙심을 다지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교류를 나누는 자리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천도교 청년회는 매달 2, 4주차 시일 저녁 9시에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 저녁 기도식’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청소년들이 신앙적 성장을 도모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 마련된다. 직접 참여하는 방법은 각 교구에 한달에 한 번 매월 2, 4주차에 출석하여 참여하거나, 일요일 교당에 나오기 어려운 경우 집에서 줌으로 접속해서 참여할 수 있다. 또 신청을 하면, 시일활동 물품을 교구나 각 가정으로 발송하여 받을 수 있다. (신청 : 010-9275-8060) 천도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신앙과 함께 창의력을 키우고 서로를 이해하며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사진, 글 조영은(천도교 대학생단) -
수련은 힘을 모으는 것, 내 마음을 믿어야죠지난 12월 1일 현도기념식을 마치고 서울교구 여성회에서 박태량 여성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경로잔치와 봉사활동을 비롯하여 서울교구의 온갖 살림을 도맡아 해온 서울교구 여성회의 이야기와 박태량 여성회장의 신앙생활, 교단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소망을 들어보았다. 반갑습니다.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님 모십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헌신해 오셨는데, 오늘 뜻깊은 현도기념일에 인터뷰하게 되어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해 오시고 또 교회를 위해 헌신해 오셨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교회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서울교구 여성회가 천도교 여성회본부에 통합됐다가 포덕 124년도에 재결성했습니다. 그때 제가 재무부장을 맡았어요. 그때 당시에 저는 바로 이 앞에서 가게를 하면서 교회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청수봉전을 참 많이도 했지요. 남편이 교단에서 오래 일했어요. 관리실에서요. 소암 김경규씨가 제 남편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한평생 교회에서 늙었습니다. 교회 일을 참 열심히 하시던 분이에요. 그 바람에 저도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게 되었지요. 교회의 모든 일에 여성회의 손이 닿지 않는 일이 없었을 텐데, 생업을 하시면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하기가 참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지금 수운회관 바로 앞인 덕성여대 자리에서 18년 동안 사진 인화, 복사집을 했어요.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이 있었죠. 우리 집이 작업이 많기로 서울 시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집이었어요. 그때는 여기 통계청도 있었거든요. 지금 이 옆에 있는 노인복지관 그 자리가 통계청이었어요. 지금은 대전으로 이사를 갔죠. 덕성여대 평생교육원도 학생이 천 명 가까이 됐어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교회 일에는 정성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참 기쁘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 재무부장을 하다가, 본부로 가서는 6년간 조직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여성회본부에서 감사를 맡고 있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장직은 2010년부터, 2016년 박징재 회장 역임 기수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13년간 역임하고 계시는데, 보람된 일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몇 가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여성회에서 경로잔치를 참 오래 해왔지요. 옛날엔 가정 방문도 많이 다니면서 어른들 대접하기도 했고, 봉사활동을 참 많이 했습니다. 불우이웃 돕기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가 최근 코로나가 오면서부터 못하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여성회에서 중심이 되어서 시일식 후 교인분들에게 서울교구 식당에서 직접 식사를 준비하여 밥을 대접해왔습니다. 코로나 이후에는 식사를 못 하게 되니 식당 문을 닫아놓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몇 년 사이에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시게 되었고요. 경로잔치는 우리가 직접 반찬을 만들어서 대접했습니다. 다음 세대들이 좀 이어서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늘 하던 일이니까 내가 맡은 임무는 다해야죠. 회비만 내고 참여하지 않는 분들도 많고, 그런데 그나마 회비를 내는 회원들도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경로잔치를 하면 어른들께서 참 좋아하시거든요. 가정 방문도 좋아하시는데, 지금은 그게 다 멈춰져 버렸어요. 정리하자면, 우리 여성회에서는 경로잔치, 가정 방문 등의 교단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 그리고 바자회, 불우이웃돕기 등을 해마다 하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청에서 임명장도 받고 상장도 받았어요. 회장님의 리더십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하시는 여성회 동덕님들께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니까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이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오래 장기 집권을 하고 있으니까요. 하여튼 여태까지 활동은 내가 힘 닿는 데까지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구 행사에 사람이 많이 왔고, 우리 여성회 많은 회원이 같이 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을 도맡아서 할 사람이 줄어들어서 갈수록 어려워지고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조직이나 사람들이 줄어들고 젊은 세대들은 찾아보기 힘들죠. 마음을 내서 함께하는 일이니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죠. 모든 일은 내가 앞장을 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저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와 주니 고맙죠. 교회 일은 내 몸을 아끼지 말고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돈을 떠나서 내 몸을 불사르고 봉사를 하면 모든 것이 자동으로 따르는 것 같아요. 말씀 들으면서 신앙의 힘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회장님께서는 천도교를 하면서 언제가 제일 좋으셨어요? 내가 처음에는 천도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왔잖아요. 그러다가 교회 일을 하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1년에 두 번, 여름과 겨울이면 수련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처음 수련을 하는데, 주문을 외우면서 3일 동안은 제대로 앉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3일이 지나서야 아픈 다리가 싹 나아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수련을 한 200명씩 다녔어요. 그땐 선풍기 같은 것도 없을 때예요. 밥도 된장 국물 한 그릇을 먹어도 참 꿀맛이었어요. 그뿐인가요. 세탁기도 없었어요. 경주에 가면, 계곡물에서 발도 담그고, 세수도 하고 잠잘 때도 한 방에서 다 같이 잤어요. 생각해 보면 경주 용담교구는 수련을 참 많이 합니다. 수련을 많이 하는 교구는 뭔가 다릅니다. 우리 서울교구도 수련을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지만, 본부에서 지방을 돌아다닐 때, 가서 인사하고 지방 교구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각 교구에서 경과보고를 하는데, 이 교회가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고 지방에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참 기뻤습니다. 처음에 ‘천도교’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천주교도 아니고 이거 뭐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올해 대신사님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며 대교당에서 며칠 동안 다 함께 수련했잖아요. 그때도 참여하셨지요? 대교당에서의 주문 수련은 어떠셨나요? 참 좋았어요. 저는 교회에서 하는 수련은 절대 빠지지 않아요. 시일식도 그렇고요. 평생 그랬어요.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지요. 우리 교회의 목적은 수련에 있는데, 무슨 일을 해도 수련부터 먼저 해야겠더라고요. 제가 서른 몇 살에 교회에 들어왔는데, 지금 나이 팔십을 바라봅니다. 올해 일흔 아홉이에요. 그동안을 돌이켜보면 그렇습니다. 우리 천도교에서는 수련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일 하시면서 보람도 되고 또 신앙 생활 하시면서 가슴에 품고 있는 스승님 말씀 같은 거 있잖아요. 어떤 말씀이 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의 흉을 보지 말고 내 마음을 지켜라. 그 말씀입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잘 지키는 것’ 그것 하나를 품고 살지요. 그런데 신앙생활이라는 게, 평소에 실천이 잘 안될 때가 많잖아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나요?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는 내가 남한테 말을 안 합니다. 속으로 계속 삭입니다. 장사를 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는데, 그럴 때면 스스로 마음을 꽃 피우는 거지. 그럴 땐 수련을 하는 거죠. 지금도 수련을 하면 내가 엄청나게 울어요. 속에 쌓인 게 많은가 봐요. 심고 드릴 때 주로 어떤 마음을 품으시나요? 주위에 모든 것이 바른길로 돌아가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가족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요. 그것 말고는 없어요. 회장님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기도는요? 나를 위해서는 안 합니다. 지금도 내가 새벽에 일어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그렇게 기도를 2시간 합니다. 자기 전에는 한울님 앞에 앉아서 고합니다. 한울님, 오늘 하루가 다 끝나고 잡니다, 하고요. 그리고 나쁜 일 있으면 좀 잘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또 심고합니다. 아이들에게 크게 나쁜 일 없이 원하는 대로 풀리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요. 그 덕에 손주들도 좋은 대학 다니고 다들 잘 풀렸어요. 내 안에 한울님이 계시고, 한울님이 간섭을 하신다고, 그렇게 느낍니다. 제가 좀 아프기도 했는데, 그때도 한울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늘 심고를 합니다. 회장님께서는 타인을 위해 마음을 모으고 심고를 드리신다고 하셨는데, 회장님 자신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꽃 피워지기를 바라세요? 나는 늘 교회를 위해 심고를 드리는데, 교구는 교구대로 화합이 좀 됐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나와서 같이 화합되면 좋겠고, 서로 위하며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여성회 회장으로서 오래 봉사를 해오셨습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인들이 모여 봉사하고 실천해 오셨던 선하고 강한 에너지가 교단을 이끈 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교단에 바라는 점, 그리고 후학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과거에는 대교당에서 행사를 하면 수백 명이 자리를 채워 앉아 대교당 안이 꽉 찼는데 지금은 빈자리가 많아서 안타까워요. 그리고 우리 천도교는 서로 편 가르지 말고 단합이 돼야 해요. 나는 우리 교단이 수련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천도교의 맥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학들이 잘 크려면 윗사람들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큽니다. 이제 누가 그 씨앗이라도 잘 키워가면 좋겠습니다. 기자는 이 인터뷰를 통해 수련의 힘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하나 더 드렸다. 수련의 힘이 어디서 온다고 보세요? 신앙의 힘은 무엇인가요? 수련은 교회에 힘을 모아주는 거예요. 신앙은? 글쎄요. 내 마음을 믿어야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마음’이라는 말을 오래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심고는 드리지 않는다는 말씀이 떠올라,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께서 건강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
천도교감사원 12월 정기감사 시행천도교감사원(원장 부암 정덕재)은 12월 5일(목) 11시 수운회관 907호에서 12월 정기감사 개회식을 하고 3일간의 정기감사를 시작하였다. 감사 회의는 감사원 재적 5명(감사원장 포함)중 참석 5명으로 성원되었다. 개회식에서 정덕재 감사원장은 “감사 회의는 늘 말씀드렸지만 교헌과 규정에 따라서 천도교단을 좀 더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고 모든 업무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기초를 공고히 하여 교단 발전을 이루어내는 데 있다. 당연히 동덕님 여러분들 간에 서로 기화가 소통돼야 하고 우리가 늘 이야기하던 동귀일체 또한 종무 업무를 교헌과 규정에 맞추어서 제대로 진행될 때 가능합니다. 감사를 하는 이유는 정해 놓은 규칙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을 지키지 아니했을 때, 제자리로 돌려놓고 바르게 갈 수 있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수많은 선배 동덕께서 심혈을 기울여 교헌이 만들어졌고, 규정이 만들어졌고, 업무 방침이 정해져서 그렇게 행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그래서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있고 또 그 책임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때는 개인에게 그것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도 주는 것이다. 수운 대신사님 출세 200년 행사를 하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교령님, 종무원장님, 각 기관장님 총부에 계시는 동덕들이 수고한 덕분으로 큰 고비는 넘기고 잘했다고 생각을 한다. 세세하게 갖춰야 할 부분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동덕님들께 알려드려야 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이번 감사를 통해 업무에 대해 챙겨보고 대화를 나눠볼 테니 모두 잘 협조해서 감사 업무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해 주시기 바란다.” 또 “천도교가 과거보다 발전되게 하는 소임을 다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지금 내가 하는 업무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또 궁극적으로는 포덕으로 이루어져서 많은 어진 동덕들이 교단으로 올 수 있도록 마중물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합심해서 앞으로 우리의 목적인 포덕천하를 이루는 데 모두 다 힘을 합쳐 주시고 감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범창 종무원장은 “지난 8월 감사 이후로 중앙총부를 비롯한 부설기관 동덕들이 열심히 업무를 수행하였고, 그 모든 것들은 교헌과 규정에 따랐는데 혹시나 잘 몰랐거나 또 이해 부족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며 피감기관은 감사 지적이 생길때는 시급하게 시정 보완해서 두 번 다시 같은 내용으로 지적받는 일이 없도록 정성을 다해 업무에 임해주고, 또 잘했다고 칭찬받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은 더 확대해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바란다. 우리가 신앙심을 바탕으로 해서 근무하고 있고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니 모든 것은 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원장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교헌과 규정에 맞게 해 나가야 하는 것을 우리 모두 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감사에서 여러 가지 지적 또는 권장되는 사항들을 잘 보완하고 장려해서 교단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윤석산 교령의 격려사를 전달하였다. 이번 12월 정기감사는 12월 7일(토)까지 실시된다. -
“중장년층의 경험, 기업의 경쟁력으로”… 서울시 중장년일자리사업 채용특성 분석결과서울시의 중장년 일자리 정책이 기업 채용비용 절감과 조직 안정성에 기여하며 긍정적인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 중장년 일자리 사업의 채용 특성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며, 중장년층이 기업과 일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대표이사 강명, 이하 재단)은 지난해부터 ‘서울런4050’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한 중장년 일자리 사업의 채용 특성을 분석한 결과보고서를 4일(수) 발행했다. 연구에는 ’23년부터 재단의 기업연계 일자리 사업에 참여한 11개 기업이 조사에 응했다. 재단은 서울시에서 인생 후반을 준비하는 중장년 세대(40~64세)를 위해 설립한 출연기관으로 경력설계, 직업교육, 취업과 창업 등을 포함한 일자리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이번 연구는 재단의 기업 연계 일자리 사업에 참여한 기업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채용특성에 관해 심층 인터뷰를 실시하고 분석했다. 참여사업은 인턴십, 채용설명회, 직무훈련으로 직군은 KSCO에 의해 분류한 경영직, 서비스직, 기술직으로 범주화하여 총 11개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인터뷰 대상자는 사업, 직무별로 추천을 받았으며 인사담당자와 기업 대표 11명이 참여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중장년 채용 기업들의 54.5%는 정규직으로 고용했으며, 45.5%는 일정기간 계약기간 후 정규직으로 전환하거나, 유연근무가 가능한 기간제 파트타임이나 성과급 기반의 프리랜서로 채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채용된 직무는 경영·영업직, 서비스직, 기술직으로 IT보안 및 데이터베이스 관리 등 기술직이더라도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기보다는 사회생활과 경력을 기반으로 도전할 수 있는 직무가 많았다. 중장년을 채용한 기업들은 중장년의 경험과 경력이 직무적응도와 융통성, 임기응변, 문제해결력 등이 높다는 점을 중장년 채용의 첫 번째 장점으로 꼽았다. 둘째는 책임감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돌발행동이 적고, 근속연수가 길어 채용비용 절감 및 조직의 안정성에 기여한다는 점이었으며, 셋째는 젊은 세대에 비해 비즈니스 매너, 고객응대, 원활한 의사소통 등 사람을 대하는 기술도 뛰어나다는 점으로 조사되었다. 심층 인터뷰에 참여한 기술 영업 분야의 기업 관계자는 “채용비용 감소도 기업에는 중요한 요소인데, 회사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축적돼 있어 일의 효율성이 매년 새롭게 채용하는 것보다 월등히 낫다”고 전했다. 재단과의 연계를 통한 중장년 채용의 특성은 검증된 인재를 기업에 맞춤형으로 매칭하여 고용 안정성과 채용 적중도를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일자리 플랫폼과 비교했을 때 허수 지원자가 적고, 중장년 세대와의 직접 만남을 통해 신속한 인재 검증이 가능해 채용 효율성도 높아졌다. 연구에 참여한 데이터라벨 관련 기업 관계자는 “채용 플랫폼을 통한 채용은 대체 왜 지원하셨는지 생각하게 되는 허수지원자들이 많았다”고 말했으며, IT보안관제 업체 관계자도 “재단 연계를 통한 지원자들은 더 진지하게 구직을 준비하고 허수지원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며 “타 기관 채용설명회는 채용성과가 없었는데, 1일 행사만으로 성과가 컸다”고 답했다. 공간위생관리 기업 관계자는 “재단을 통해서 채용하는 분들은 일하고자 하는 열의가 있고 각오가 다르기 때문에, 채용 적중도가 높았다”고 평가했다. 반면 중장년 고용의 어려움도 드러났다. 참여 기업들은 공통적으로 체력적인 문제와 디지털 역량 부족이 가장 큰 장애물로 지적하였으며, 세대 간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도 일부 기업에서 드러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재단의 디지털 역량 강화 및 마인드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기업들은 향후 더 많은 중장년을 채용할 수 있도록 적합한 채널을 제공받기를 원했으며, 재단이 중장년 인력풀에 대한 더 면밀한 정보를 제공해 직군별, 사업별로 보다 적극적인 채용을 지원해 주기를 요구했다. 인터뷰에 참여한 IT 및 데이터라벨, 헤드헌팅 등 관련 기업에는 “중장년 인력풀 및 인력의 경력에 대한 통계를 제공해주길” 요구했으며, 음식서비스 기업에서는 “산업별 또는 지역별로 하는 채용설명회를 진행한다면 기업과 구직자 간 맞춤형 서비스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헤드헌팅 업계 관계자는 “고용보험에 가입하는 직종이 아니면 취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경우 다양한 일자리 연결이 쉽지 않다”며 좀 더 유연한 일자리 발굴에 힘써줄 것을 요구했다. 재단은 이번 연구를 토대로 일자리 사업의 성공적 취업 사례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지역별, 산업별 맞춤형 채용설명회 확대 ▲중장년 인력풀 관리 시스템 구축 및 체계화 ▲실습 중심의 기업 맞춤형 교육과정 설계 및 운영으로 직무연계 교육 프로그램 고도화 ▲디지털 역량 및 마인드셋 변화 교육 강화의 과제를 추진해 갈 계획이다. 강명 서울시50플러스재단 대표이사는 “중장년층은 한번 고용한 기업에서는 적극적으로 다시 채용을 고려할 만큼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경력과 책임감을 갖춘 귀중한 인재”라며, “적극적인 일자리 지원 사업 개선을 통해 앞으로 기업과 중장년 모두가 만족하는 좋은 일자리를 발굴하고 연결해 가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