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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6년 1월 19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불효자는 웁니다(선도사 준암 박인준) -
포덕 166년 1월 12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불망기본(선도사 정암 주선원) -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 춘암 박인호 상사 뜻 되새겨지난 1월 18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제117주년 도일기념식을 봉행하였다. 이날 행사는 개식과 함께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경전 봉독(신앙통일과 규모일치), 천덕송 합창(제 13장 기념송, 제 31장 도일기념가), 기념사 등의 식순으로 이어졌으며 전국 각 교구에서도 같은 시각 일제히 기념식이 봉행되었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춘암 상사께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감내하면서 동학혁명 이후 해월신사와 의암성사를 도와 천도교 재건에 성심을 다했으며, 삼일운동 이후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교단의 극한상황 속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우려 노력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린이날을 제정했고,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펼칩니다. 이렇듯 춘암상사 시절 천도교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개벽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실천궁행으로 대도를 수호하고 실천하신 춘암상사의 뜻을 잘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기념사에 이어 문화행사는 천도교대학생단 조영은 단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천도교 연합합창단 <샘>,의 '별', '아름다운 나라', 천도교대학생단의 '걱정말아요 그대', '나에게 난, 너에게 난', 삼경합창단의 '청산에 살리라', '참됨의 길'의 노래공연으로 뜻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춘암상사는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아 천도교의 제 4세 대도주가 되었다. 춘암상사는 동학혁명 당시 덕의대접주로 활약하였으며 의암성사의 지시로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으로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 동덕여학교(동덕여자대학교) 등 전국의 36여 개의 학교를 운영 및 지원하였다. 3.1독립운동 때는 48인 중 1인으로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을 지원하였고 특히 일제 말 멸왜기도를 실시하도록 밀명을 내렸다. 이처럼 항일 독립투쟁 의지를 불태우다 1940년 4월 3일 향년 86세로 환원하였다. 춘암 박인호 상사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 념 사 국내외 동덕님,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가 되신지 117주년을 맞이하는 도일기념일입니다. 포덕49(1908)년 1월 18일 오전 11시, 의암성사께서는 천도교중앙총부 대도주실에서 이종훈·홍병기·오세창·권동진·오영창·양한묵 등을 비롯한 많은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심법을 춘암에게 전한다’는 <선수문>과 함께 대도주 종통 「선수식」을 거행했습니다. 또한, 승통 10주년이 되는 1918년에는 기념식을 마친 후 ‘이 대도주의 위통은 한울님이 대신사에게 전수하시던 동일한 심법이니 여러분은 그것을 믿으라’는 내용으로 <천도교월보> 2월호에 특필하도록 하는 한편, 삼일운동 전날에는 춘암상사에게 천도교 앞날을 당부하는 <유시문>을 내리십니다. 이처럼 의암성사께서는 춘암상사의 종통을 3회에 걸쳐 재차 확인하는 등 천도교 앞날에 대한 절실함이 춘암상사에게 있음을 확실히 하십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 전 5년(1855) 2월 1일 충남 덕산군 가야산 남쪽에 있는 막동리(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부친 박명구와 모친 온양 방씨 사이에서 탄생하십니다. 상사께서는 10세에 한학에 입문하시고, 후에 지가서와 의서를 공부하다가 중지하고 농사에 전념하시다가 동학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상사께서는 동학을 믿으면 ‘차별과 착취가 없는 평등한 세상에서 질병에 걸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9세 되던 포덕24(1883)년 3월 18일 목천에서 동경대전 간행을 준비하고 계시던 해월신사를 찾아가 입도하십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25(1884)년 8월 중순 해월신사의 명으로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어육주초를 끊고는 정성으로 수련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습니다. 독공하는 동안에는 잠이 깊이 들까 염려하여 낫자루를 베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서 주문 외우기를 10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하셨습니다. 상사께서는 독공 중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해월신사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포덕에도 정성을 다하여 내포 지방에 입도하는 도인이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34(1893)년 2월 광화문복합상소에 의암성사를 비롯한 강시원 손천민 등과 함께 상경하여 봉소하시고, 3월 보은 장내리 취회에는 덕의대접주에 임명되어 내포 지역 동학도인들을 이끌고 <덕의포>라고 쓴 중기와 오색기 그리고 <척양척왜>라고 쓴 기치를 앞세우고 참가하십니다. 동학 교단은 1892년 삼례집회, 1893년 광화문복합상소·공주취회·보은취회 등 집회 횟수를 거듭하면서 2만여 명의 동학도인이 참여하는 등 분위기가 성숙해지자,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을 통해 안으로는 학정과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으며, 밖으로는 일제에 맞서는 등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춘암상사는 「천불변 도역불변(天不變 道亦不變)」이라는 깃발과 「척양척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깃발을 세우는 한편, 대장기에는 <덕의대접주 박인호>라고 쓰고 지휘하자 수만의 동학군이 외우는 시천주 주문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습니다. 포덕39(1898)년 1월 3일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와 함께 해월신사께 신년 문후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신사께서 흰 꿩 한 마리로 의암성사와 겸상을 차려 주면서 서로 일치(一致) 하라는 묵교(黙敎)를 내립니다. 묵교를 알아차린 상사께서는 식사를 마치고 바로 의관 정제하고 의암성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배례를 합니다. 그날 이후 의암성사 앞에서는 절대로 담배도 피우지 않고 평소에 농을 하던 말투도 높임말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포덕40(1899)년 3월 10일 의암성사께서 춘암(春菴)이란 도호를 주십니다. 이는 의암성사가 내린 첫 번째 도호이고, 교단 전체로는 삼암(三菴)에 이은 네 번째입니다. 그리고 포덕73(1932)년 교회에서 존호를 ‘상사(上師)’로 봉정했습니다. 포덕60(1919)년 삼일운동으로 의암성사와 춘암상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피체된 천도교인이 1,300여 명에 달했으며, 일경의 감시가 한층 심해지고 모든 부동산과 동산 사용을 금지당하는 등 교회 활동이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포덕61(1920)년 10월 31일 춘암상사께서 출옥하신 후 어려운 교회 상황 속에서도 다음 해 2월 28일 삼일운동 자금조달에 큰 역할을 하였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준공했습니다. 그해 12월에는 교회제도가 대헌에서 종헌으로 변경됨에 따라 대도주가 교주로 변경되어 포덕63(1922)년 1월 18일에 교주 취임식을 거행합니다. 같은 해 5월 19일 의암성사께서 순국하자 춘암상사는 주상으로 장례를 주관했습니다. 포덕77(1936)년 교회제도가 대헌으로 회복됨에 따라 교주에서 대도주로 복구된 다음 해인 포덕78(1937)년 12월 초 어느 날 밤 상사께서 비몽사몽간에 왜병들이 군화를 끌고 울면서 압록강을 건너 돌아오는 것을 보고 생각하시길 “조선이 독립할 징조로다. 급히 서둘러야 되겠구나”하고는 전국 교인들에게 멸왜기도운동을 밀명으로 내려 실시케 합니다. 그러나 멸왜기도운동이 황해도에서 발각되어 천도교인들 3백여 명이 검거되었고 춘암상사께서도 병상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81(1940)년 4월 3일 분열되었던 교회가 합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수동 자택에서 향년 86세로 환원했습니다. 4월 7일 오전 11시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상여는 교당을 출발하여 오후 2시에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 묘지에 도착했습니다. 오후 3시에 하관을 했는데, 이때 「천도교제4세교주법종춘암상사박인호지묘」라고 최린이 친필로 쓴 지석(誌石)을 함께 묻었습니다. 이날 대교당을 출발하여 장지에 이를 때까지 유족들과 장의위원들을 포함한 1천여 명에 달하는 조문 행렬이 이어지며 성의(盛儀)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대로 밀고 나가 완성을 보았다고 합니다. 특히, 의암성사의 명이 있으면 즉시 총부에서 실행하도록 했으며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의암성사께서는 평소 춘암상사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장벽을 향해서 말한 비밀은 새 나가도 춘암에게 말한 비밀은 새지 않는다” “춘암 대도주는 생각하는 것은 나만 못하지만 대도를 지키는 데는 내가 춘암만 못하다” “춘암은 밤에 만져 보아도 도(道) 덩어리이다” “내가 한강을 그대로 건너 걸어가라 하면 춘암 대도주는 서슴없이 걸어 들어간다”라고 할 정도로 의암성사의 춘암상사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의암성사와 춘암상사의 관계는 축성과 수성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축성이 아무리 잘 되어도 수성을 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동학혁명 이후 수십만 명의 희생을 내고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교단을 수습하여 천도교로 다시금 축성한 것이 의암성사라면, 이 축성된 교단을 성장시키고 수성한 것은 바로 춘암상사라고 하겠습니다. 포덕61(1920)년 이후 교회가 분열되었을 때도 누가 신파 구파에 대한 말을 하면 “자기의 주장과 다르다고 남을 비방하면 되겠는가! 그 시간이 있으면 주문을 더 생각하라”고 하며 어떤 경우에도 남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감내하면서 동학혁명 이후 해월신사와 의암성사를 도와 천도교 재건에 성심을 다했으며, 삼일운동 이후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교단의 극한상황 속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우려 노력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린이날을 제정했고,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펼칩니다. 이렇듯 춘암상사 시절 천도교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개벽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실천궁행으로 대도를 수호하고 실천하신 춘암상사의 뜻을 잘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춘암상사께서 말씀하신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는 말씀은 인간사로만 생각할 수 있으나 천지운행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참을 지키면 한울님이 사랑하고 거짓되면 한울님이 미워하여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스승님을 숭배할지라도 스승님께 의뢰하지 말아야 하며, 앞으로 천도교가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참으로 도를 잘 닦아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지금 세계는 극도로 발달한 과학을 서로 화합하는 쪽으로 쓰기보다는 정쟁(政爭)의 도구로 사용하는가 하면, 아직도 전쟁을 일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거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무기 전쟁뿐만 아니라 무병지란(無兵之亂)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고 도덕은 사람 살리는 기틀입니다. 해월신사께서는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는 수도에 더욱더 힘써서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대신사께서는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라고 했습니다. 이는 때만 기다리기보다는 동귀일체로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국내외 동덕님 여러분,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 되었을 때, 천도교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목적인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진실로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루빨리 천심을 회복하여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 만들기를 심고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166(2025)년 1월 18일 천도교 교령 현암 윤석산 심고 -
포덕 166(2025)년 천도교여성회 합동 동계수련천도교여성회본부(회장 박징재)는 포덕 166년 1월 3일(금)~9일(목)까지 용담수도원에서 “일념재자(一念在玆)라야 만사여의(萬事如意)하리라”라는 주제로 전국여성 합동수련을 개최하는 것을 시작으로 새해를 맞았다. 서울인근 참가자들은 총부의 포덕버스를 빌려 타고, 남녘의 참가자 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경주 용담으로 모였다. 첫날은 반가운 인사로 한동안 유쾌한 소란에 이어 절도 있는 개강식과 짧은 일정을 마쳤다. 다음날은 새벽 수련 후 여명도 밝기 전 용담정에 올라 더듬더듬 돌길을 밟아 떠온 청수를 봉전하며 수운 대신사 영정에 다 같이 참례하였다. 혁암 김혁태 선도사의 이틀간의 강의가 수련의 불을 지폈다. 셋째 날은 특별히 태묘를 찾아 참례하고 대신사 생가를 다녀왔다. 넷째 날 현암 윤석산 교령이 방문하여 수련생들을 격려하고 특강을 하였다. 다섯, 여섯째 날은 무암 김종운 전 용담수도원장의 강의로 수련의 깊이를 더했다. 많은 숙덕어르신이 수련에 참가하였으며, 수도원 생활은 규칙과 질서가 잘 이루어지고 원활하며 여유가 있었다. 이번 수련은 9일 오전 6시 폐강식을 하고 모든 일정을 마쳤다. 수련생과 방문자 총 52명이 함께하였다. 수련생 대표 서울교구 자명당 방자명 동덕은 폐회식 답사에서 “우리 앞에 있는 선배님 자리를 이어가는 것이 우리 세대가 할 일인데 변화가 많은 이 시기에 ‘다시개벽’을 다짐하면서 을사년 올해도 여성회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 다짐한다.”라고 말하였다. -
1월 18일 제 117주년 도일기념일, 중앙대교당 및 전국교구 기념식오는 1월 18일은 춘암상사가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로 취임한 지 117주년이 되는 도일기념일이다. 춘암 박인호 상사(1855~1940)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덕산대접주로 승전곡전투와 신례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상해 임시정부 독립자금 지원, 갑진개화혁신운동 주도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어린이날 제정, 청년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지원한다. 정부는 1990년, 춘암 상사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08년 1월 18일, 의암성사는 천도교중앙총부 대도주실에서 이종훈, 홍병기, 오세창, 권동진 등 다수의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심법을 춘암에게 전한다’는 <선수문>과 함께 대도주 종통 <선수식>을 거행하여 춘암상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춘암상사는 포덕 전 5년(1855년) 충남 덕산군 막동리에서 출생하여, 1883년 해월신사를 찾아 동학에 입도한다. 이후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친 후, 농사와 수련에 전념하며 동학 교리를 깊이 체득하였다. 춘암 상사는 해월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내포 지방에 수천 명의 도인을 입도시키는 등 포덕에 힘썼다. 춘암상사는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 “천불변 도역불변”, “척양척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깃발 아래 수많은 동학군을 이끌었다. 동학혁명 후 교단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춘암 상사는 의암성사를 스승으로 모시며 교단 발전에 헌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춘암 상사와 천도교 교인들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으며, 결국 독립자금모집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춘암상사는 출옥 후에도 6.10만세운동, 멸왜기도운동을 주도하고, 전국 천도교 교구를 중심으로 신간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춘암상사는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며, 신앙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 깊은 교훈을 남긴다. 오늘날 세계는 전쟁과 갈등, 무병지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춘암상사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적, 정신적 기반으로써 실천궁행의 자세로 대도를 수호하며, 참된 신앙의 길을 걷게 한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기념식을 앞두고 “오늘날 세계는 전쟁과 갈등, 무병지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춘암상사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천심을 회복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라고 강조하며 교인들과 국민들의 동참을 독려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한마음 한뜻으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천심을 회복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해 주시기를 기원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포덕 166(2025)년 1월 18일(토) 11시 제117주년 도일기념일 기념식은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일제히 봉행된다. 기념식은 ▲청수봉전▲주문3회병송▲경전봉독▲천덕송▲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념식에 이어 도일기념 문화공연도 개최될 예정이다. -
십무천을 생각하며, 마음을 닦는 시간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하라는 ‘사인여천’이라는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야죠. 그런 믿음으로 나도, 상대방도 한울님이니까 그에 맞게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갔으면 합니다. 회장님 반갑습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첫 번째로 찾아뵙습니다. 포덕 163년 4월 1일부터 166년 3월 30일까지, 이렇게 3년 동안의 임기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회장님 임기 중에 여성회가 창립 100년 맞이를 하기도 했지요. 맡은 바 임무를 막중하게 느끼셨을 것 같아요. 여성회본부 회장을 맡으시면서는 소감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얼떨결에 회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 열흘 고심하다가 이 일은 한울님이 시키신 일인가 보다 하고 일을 맡기는 했는데, '여성회 100년'을 맞이한다는 책임감이 크게 밀려왔지요. 그러나 저는 실무진들을 믿었습니다. 우리 실무진들이 참 훌륭한 분들이라, 함께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모여서 100주년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어요. 저는 그저 선배님들이 지난 100년 동안 하신 역사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천도교여성회 100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기념사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어떤 일에 중점을 두고 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 행사들이 있었지만, 천도교여성회 100년사 책을 출간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100년사 책을 내면서 여성회 각 지부사도 같이 작업을 했는데, 우선 100년사 책이 먼저 나왔어요. 말하자면, 우리 여성회가 걸어온 길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내놓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난관도 많았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심고를 드렸어요. 한울님이 다 도와주시더라고요. 우리 실무진들과 출판위원님의 도움으로 3월 25일, 우리 여성회 창립 기념일에 100년사 책을 배포했을 때 그때가 제일 뿌듯했죠. 책을 받아들고는 한울님 감사합니다, 그 말 밖에 안 나왔어요. 출판위원회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에서 애써주신 덕에 출판을 할 수 있었지요.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100년간 걸어온 길을 담아낸 귀중한 자료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100년이 지난 뒤에야 200년사 책으로 세상에 나오겠지요. 그 막중함을 가지고 작년 한 해 일해오셨어요. 그런데 100년사 출간하는 일 외에도 천도교여성회에서 주관하는 여러 사업들도 있잖아요. 기억에 남는 일이 몇 가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100년을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자체적인 세미나도 열었고, 또 그와 동시에 대신사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중앙총부와 함께 기념행사를 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신사, 대사모님 숭모비를 세운 일입니다. 수운 대신사님은 우리의 큰 스승님이신데, 사모님에 대한 공적도 후세에 남겨야겠죠. 대사모님께서 얼마나 고생 많이 하셨을까요?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를 세우자고 했을 때, 그때는 제가 회장을 맡은 첫해였어요. 추진위원회와 함께 숭모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중앙총부에서 협조해주신 덕에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숭모비로 쓸 돌을 찾으러 쫓아다닌 과정도 떠오르네요. 그 돌을 처음 보았을 때, 참 놀라웠어요. 그 돌은 어느 여신상이 환생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색깔도 참 아름답더라고요.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대신사님으로 인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더 새롭게 세워졌고 그렇게 하신 업적에는 모든 일을 일생을 함께하신 사모님에 대한 공덕도 함께 인정해 드려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들이 아직은 좀 더딘 것 같이 느껴집니다. 특히나 여성회에서는 지난 100년간 여성의 인권 신장에 기여하는 종교의 역할을 해왔잖아요.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앞으로 천도교여성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AI 시대이고, 급변하는 시대잖아요. 제가 회장을 맡으면서 우리 실무진한테 진취적인 방법으로 소통과 믿음으로써 단합해서 지금까지 왔고 앞으로의 100년을 내다본다면, 급변하는 이 시대에 젊은 인재들이 많이 들어오셔서 여성회를 이끌어주면서 활성화해줄 것을 당부하고 싶어요. 우리 기성세대는 기계를 다루는 데 서툰 사람들도 많고 그런 것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들 잘하잖아요. 회의도 줌으로 진행하고요. 여성회에 젊은 세대가 들어오면 많은 변화를 가져오더군요. 그런 변화들이 지금의 여성회를 만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성의 인권 신장에 있어서는 오히려 과거의 천도교여성회가 했던 역할들이 시대를 앞서가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선배님들이 그 어려운 시절에 정말 큰 일들을 하셨죠? 주옥경 사모님을 비롯한 우리 선배님들은 그 시대에 상상도 못 할 만큼 앞장서 나갔잖아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천도교가, 그리고 천도교여성회가 사회 전반적으로 해온 역할들이 있고 앞장서 나갔는데, 그 시절에는 그만한 인력이 됐었어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인력이 안 돼요. 사람이 없어요. 일을 할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맞게 자기 일 하느라 바쁘고 교회 일을 우선적으로 할 수 없는 게 조금 아쉽더라고요. 회장님께서는 결혼하시면서 천도교에 입교하신 건가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오셨는지도 궁금해집니다. 결혼하면서는 교인이 되었지요. 결혼해서 처음에는 저도 시부모 모시고 애들 키워야 하니까 그 뒷바라지가 우선이었죠. 그리고 천도교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한 것은 우리 시아버님 환원하시면서였어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천도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이렇게 마음에 와닿으셨어요? 우리 친정집이 불교 집안인데 나는 천도교 집안으로 시집을 왔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아침, 저녁으로 청수를 모시고 그때는 촛불을 켜셨어요. 그게 무어라고는 말씀도 안 해주시고 혼자 방에서 하시길래 저게 뭔가, 그냥 어른이 하시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시일마다 시부모님께서 우리 애들을 데리고 천도교에 다녀오시고, 그러시면서 제게는 교당에 나오라는 말씀은 한마디도 안 하셨어요. 내가 이 집 장남에게 시집을 왔고 이 집의 뼈대가 있는데, 맏며느리로서 뭔가 붙잡고 가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천도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천도교에 들어왔는데, 누가 끌어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한 6개월 그냥 남편 따라서 왔다 갔다만 했지요. 그러다가 내가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 누가 아는 체도 안 하고 그냥 혼자 왔다 갔다 6개월을 하다 보니까 안 되겠다 싶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동덕님 한 분이 종학대학원에 다니지 않겠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종학대학원이 천도교의 교리를 알아야만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들어가서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아무것도 모르고 와도 된다는 거예요. 열심히만 다니면 된다고요. 그렇게 2년 동안 참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 1년은 도대체 저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수련을 가봐도 뭐가 뭔지 몰랐는데 그러다가 천도교가 이런 곳이구나, 수련이 이런 것이구나 깨우치게 되었어요. 나 혼자 이제 터득하고 느끼면서 다니다 보니까 어느덧 졸업을 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천도교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저 나 나름대로 혼자서 알아간 것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마음에 남는 것은 수련하면서 제가 느낀 이치와 진리였습니다. 동경대전에 보면 ‘십무천’이라고 있지요?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스승님의 가르침 열 가지가 딱 나와 있습니다. 처음엔 천도교의 교리가 참 쉽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의 오산인 걸 알았어요. 내가 몸이 몹시 괴롭고 안 좋았을 때 21일 수련하러 처음으로 법원수도원으로 들어갔어요. 시집와서 처음, 내 생전 처음으로 집 밖에서 생활해 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련 중에 ‘십무천’이라는 큰 글자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여러 번 생각하고 책을 폈는데, 거기 그 가르침이 다 있는 거예요. 그때 나의 마음은, 내가 한울님을 참 우습게 생각했구나, 정말 잘못했다고, 죄송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내가 내 생활 속에서 한울님을 잘 모셔야겠다는 그 이념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여기에 조금 조심스러운 질문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 결혼하시고 보니까 춘암 상사님의 집안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춘암 상사님의 후손으로서 바라볼 때, 춘암 상사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춘암 상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개 같은 왜적 놈’이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저에게 가장 크게 와닿는 말씀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 가르침입니다. 춘암 상사님은 참 과묵한 분이셨다고 해요. 시어머님이 가끔 춘암 상사님에 대해서 얘기해 주셨어요.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춘암 상사님은 참 과묵하시면서 집안을 포용하신 분이셨다고 해요. 그때는 참 어렵게 사셨잖아요. 집안의 온 가족을 다 포용하셨다는 말씀만 기억에 남네요. 춘암 상사님께서 살아오신 삶을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고요. 또 과묵함 속의 포용으로 직접 보여주신 것들이 대대손손으로 내려가는 유산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회장님께서는 손주분들한테는 어떤 걸 남겨주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남겨준다기보다는 내가 살아있는 한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 애들 키울 때 제가 애들한테 절대 거짓말하면 안 된다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우리 집 애들이 착해서 정말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그래서인지 우리 손주들도 보면 다 반듯합니다. 스승님 집안의 사람으로서 며느리로서 살아오셨고, 여성회본부 회장님으로서 활동하시는 데에 부담도 굉장히 크셨을 것 같아요. 제 마음은 항상 똑같았어요. 한결같이 내 마음만 순수하면 모든 게 통하지 않겠나, 또 동덕님들이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했는데 그 마음을 알아줄 때는 참 기쁘죠. 이제 임기가 석 달 정도 남았는데요. 올해 여성회에서 계획하고 계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작년 3월 25일에 여성회 100년사 책을 발간했지만, 지부 100년사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올해는 각 지부사(史) 책이 완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 총회 때는 출간될 예정입니다. 물론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큰 지부는 그래도 활성화돼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부들도 많고, 어르신들께서도 많이 환원하셨고요. 그 점에서 저의 바람은 우리 동덕님들께서 가정 포덕을 우선으로 신앙생활을 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1년에 네 번, 4대 스승님 기념식 날이라도 자녀들과 시일식에 함께하는 것부터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회장님께서 마음이 힘들 때 마음에 품으셨던 스승님 말씀을 소개해 주신다면, 어떤 말씀이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항상 십무천을 생각하면서 나 말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먼저 해보자 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런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큰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삶의 우여곡절에 스승님 말씀에 기대어 의지할 수 있어서 든든한 마음입니다. 어렵지 않지만 행하기 힘든 것을 마음에 품고 행하려고 하는 게 종교인의 마음 자세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새해, 새 마음, 새 걸음 새해가 밝았다. 천도교 여성회가 지난 100년간 세상을 밝혀온 것은 한 사람, 열 사람, 천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걸어온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중 한 사람, 박징재 여성회장의 소회를 들어보았다. 박징재 여성회장을 통해 100년을 끌고 온 사람들, ‘멋진 언니들’을 상상해보았다. -
중편소설 <하얀 혁명>(4)(지난 호에 이어) 보은 충경포 수접주 윤경신은 눈자위와 상체가 헌헌한 중년의 남자였다. 청수잔을 올려 한울님께 심고하는 것으로 상견례를 대신한 후, 신재길은 구해온 총을 더 살펴보겠다며 일행을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윤경신이 두루마기를 벗어 횃대에 걸고는 나달나달해진 짚신을 잔솔가지로 털어 한쪽에 밀어놓았다. 사려 깊음이 몸에 밴 사람처럼 보였다. “경기도에서 예까지 오시느라 여독도 안 풀리셨을 텐데 이리 찾아주심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작년 보은 취회 이래 전국 각지에서 솔병해 모여드는 도인들을 치르시느라 되레 노고가 많으실 듯하옵니다. 이곳 보은 사정은 어떠하온지요?” “동학군을 돕는데 너나가 따로 없지요. 보은 땅에서 동학군에 반대하는 민보군이 조직되었다는 말은 아직 들은 바 없습니다.” “과연 보은이야말로 대도소가 들어서기에 손색이 없는 고장이로군요.” “하지만 워낙 농촌이다 보니 전량과 무기를 마련하는 데 애로가 많습니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기에 월동 준비만으로도 벅찹니다. 이번에 나갔다 온 연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지요.” “성과는 있었는지요?” “삼 년 가뭄 뒤끝이라 몇몇 부농과 지주들의 성의만으로는 신통치가 않습니다.” “하오면?” 셋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향리 도처를 뒤져보면 고부 민란을 초래케 한 조병갑 같은 탐관이나, 납속(納粟)하여 얻은 관직으로 늑봉(勒捧)을 일삼는 무리가 상당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옥천포, 영동포의 접주와 함께 영동에 행차하여 이용직을 만나고 왔습니다.” “이용직이라 하오면?” “백만 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를 제수받았던 인물인데 지금은 파직되어 영동에 살고 있습지요. 그자를 닦달해 겨울옷 일천 벌을 받기로 약속했습니다.” “큰일을 하셨군요. 순순히 내놓지는 않았겠지요?” “목숨은 하나인지라 면전에서야 협조했지만 돌아서서는 우릴 화적 취급했을 겁니다.” 보은 수접주가 이 말을 하고는 망나니 칼처럼 손날을 넓게 펴서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이천 수접주가 모처럼 피어난 웃음기를 만면에 가득 담으며 말했다. “허허, 수접주님의 배포가 참으로 호협하십니다그려. 그나저나 해월선생의 기포령이 너무 늦은 건 아닌지요? 하루가 다르게 날이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기포령을 내리시던 날도 그런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가을걷이를 마친 후에 일어나자는 것이 중론이었습지요.” “기포령을 내리던 날 수접주께서도 그 자리에 함께 계셨단 말씀입니까?” “그러하옵니다.” “그날의 얘기를 듣기 청합니다. 해월선생께서 뭐라 하셨는지요?” 이창진과 한규석이 입을 모아 간청했다. “어허, 낭패로고. 내 어찌 한울님의 천어(天語)를 들으신 해월의 말씀을 감히 옮긴단 말이오. 당치 않소.” “해월선생께서 기포령을 발하실 때는 다 그만한 연유가 있었을 것이고, 신교(神敎)도 함께 전하셨을 터, 간곡히 듣기를 청합니다.” 이번에는 수접주까지 나서서 간청하자 보은 수접주가 더는 물리치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제 부족한 언변을 탓하지 않는다면 몇 말씀 사뢰어보리다. 해월선생께서 청산에 모인 접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보은 수접주가 옷에 풀 먹이듯 적삼 깃을 정갈히 훑어내려 반듯이 펴고는 헛기침으로 목을 고른 후 그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토머리에 얼음 풀리듯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난달 보름에서 하루가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해월선생으로부터 접주들만 은밀히 청산 대도소로 모이라는 전갈이 당도했습니다. 당시는 해월께서 관군의 눈을 피해 그곳에 계시던 때였지요. 각 고을 접주에게 황급히 연통을 넣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나섰습니다. 가는 도중에 보니 큰 고을은 물론이고, 작은 마을도 출진을 준비하는 동학군으로 가득했고, 군량과 무기를 실은 우마차가 길을 막아 동학군 세상이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민초들 모두 가만히 팔 개고 있다가는 왜놈의 손에 나라가 넘어가겠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청산에 도착해 안내된 곳은 허름하게 위장한 초가였습니다. 거기서 하루를 유하고 이튿날 문바위골로 향했지요. 문바위골은 계곡이 깊어 사람이 은거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고, 청산 평야는 바다처럼 넓어 대군을 먹이기에 충분한 터전이었습니다. 게다가 앞은 탁 트이고 뒤는 막혀 있어 인마의 움직임은 물론, 작은 기척도 울림통 속처럼 크게 들려 외적의 방비가 능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보은 수접주가 음성을 낮추어 깔았어도 기실은 말주변이 상당해 당시의 정황을 그림 그리듯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문바위는 형상이 마치 사람이 드나드는 문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 가보면 대단한 영험이 깃들어 있다 느끼실 겁니다. 그 문을 들어서면 속세와는 다른 신령스러운 땅에 들어섰다는 느낌, 지금껏 품어왔던 생각을 온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다가설 수 없는 다시 개벽의 세상, 천 년의 웅지를 펼 도량에 들어섰다는 감동이 절로 솟아날 것입니다. 문바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또한 속리 정이품이 환생한 듯 자태가 엽엽하고, 길가에 늘어선 빨간 남천 열매에 눈을 빼앗겨 한 마장쯤 걷다 보면 이번에는 수령이 족히 오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가 나옵니다. 나무가 어찌나 실하고 울창한지 초열(焦熱)의 폭염에도 가을의 너와집 같고, 세 가지로 나눠 뻗은 줄기 한가운데는 장정 서넛이 둘러앉을 만하고, 나무 아래의 너럭바위 또한 선방 서너 개는 꾸밀 만큼 넓습니다. 이 너럭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면 온 세상이 평평해지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고도 합니다. 동학이 꿈꾸는 세상처럼 말이지요.” 수접주가 없는 정경을 부러 꾸며 말할 리는 없겠으나 곧이듣기에는 너무도 출중한 지세인지라 셋은 언젠가 문바위골에 꼭 가봐야겠다며 속마음을 다졌다. 듣는 이의 수굿한 귀 기울임에 신명이 났던지 수접주가 연달아 말을 이었다. “삼면에 휘장을 친 너럭바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레방석처럼 너른 훈련장에는 무예를 다듬느라 여념 없는 군사들이 그득했고, 산비탈을 다듬어 지은 초막에서는 숯불 태워 밥 짓는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잠시 있자니 흰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해월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접주들이 일제히 일어나 복배(伏拜)로 예를 갖추자 해월은 우리보다 더 깊숙이 허리를 숙여 답례하고는 좌정하셨지요.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접주의 말투가 일순 해월의 목소리인 양 중저음으로 깔리면서 너른 호수처럼 벙벙해졌다. 수접주는 그날의 해월을 상기하려는 듯 청산 쪽으로 머리를 돌려 버성긴 수염을 한 차례 쓸어내린 후 해월선생의 말씀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았소이다. 접주들을 뵈러 내가 직접 보은으로 가야 마땅하나 그곳은 이미 관군이 우리 동학군의 주둔 사실을 아는 고로 거사를 앞두고 혹여 일을 그르칠까 싶어 이리로 모신 것이니 크게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운대선생님께서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을 창도하신 이래 올해로 꼭 삼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나는 이 나라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 그 본성에 인내천(人乃天) 한울님이 있음을 알게 하였고, 만민 모두가 골고루 평등하다는 시천주의 가르침, 사람을 한울님같이 대하고 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을 실천하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오늘 접주님들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이런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하고자 함입니다. 무릇 모든 생명은 스스로 존귀한 가치를 지니며, 우주 만물과 더불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시 개벽의 세상, 즉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주 만상이 다 한울님이고, 어린이나 아녀자, 관노나 사노, 하다못해 들판에 나는 새 한 마리, 풀 한 포기조차 한울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오나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일본이나 청 제국이 서로 취당(聚黨)하여 조선을 겁박하고, 탐학한 관리나 토호들이 반상, 적서, 남녀의 차별에, 토색질, 분탕질까지 저질러 선한 백성 한울님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소외와 핍박을 천형(天刑)으로 알고 사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며, 그릇됨을 알고도 모른 채 묵과하고 굴종하는 건 다시 개벽의 뚜껑을 닫는 일입니다. 묵묵히 참기만 하고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 건 자기 안에 갇힌 기망(欺罔)일 뿐이며,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묘책이 없다고 자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혁명이란 무엇입니까? 원악(元惡)에게 머리 조아리지 않고, 내 믿음을 철석같이 믿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모든 혁명은 분노에서 비롯하며, 인내가 끝나는 곳에서 열리는 새로운 개벽 하늘입니다. 백성의 궁핍과 치욕이 하늘을 찌르고, 외적의 침탈로 나라가 쇠멸하는 이 마당에 마냥 팔 괴고 앉아 상제님의 강림만을 기다린다면 어찌 우리가 축원하는 세상, 혁명의 하늘이 열리겠습니까? 자고로 민심은 천심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창의하는 것은 곧 온 나라 백성이 창의하는 것이며, 한울님이 도모하는 천운의 기회가 도래함이니, 오늘의 기포를 통해 수운 스승님의 무고함을 바로잡고, 외군(外軍)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 조선의 대원(大願)을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생명은 한울님이 주신 것이고 죽어도 한울님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니 성령으로 장생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호랑이가 들어오면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워야 하는 것처럼, 이제 나는 우리 동학도 모두가 함께 떨쳐 일어나 죽기를 다해 싸우자는 창의(倡義)의 기포령(起包令)을 발하는 바입니다. 이를 계기로 풍전등화처럼 스러져가는 조선을 되살리고, 한울님의 목숨을 호기롭게 일으켜 세우는 단초가 되기를 앙축(仰祝)하옵니다. 이것으로 내 말은 줄이고 여러 접주님 모두에게 천지신명의 보살피심과 한울님의 가호가 창대하기를 축수하옵니다. 충경포 수접주 윤경신, 한울님의 천어(天語)에 기대어 해월선생의 말씀 대신 전해 드렸습니다.” 보은 수접주가 밭은 숨을 다독여 해월선생의 기포령을 전하고 말문을 닫았다. 수접주가 들려준 해월의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생생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특히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혁명이며, 스스로 분노하여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시작이라는 말에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일본군이 쏘아대는 총소리 앞에 썩 나서며 울려대는 동학군의 철성 소리였으며, 그들의 화력에 기죽어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한울님이 목소리이기도 했다. 셋은 숙연한 심정으로 해월선생이 창의하며 품었던 늠연한 기상과 기포령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장내리 대도소를 나섰다. 보청천 강물에 드리워진 윤슬이 길게 이어졌다. 일행은 이천접이 야영하고 있는 숙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단정학, 왜가리 들의 귀소가 강을 따라 잔잔히 너울져 함께 흘렀다. 3. 전투 이틀 후, 보은 장내리 대도소에서 출정을 위한 치성식이 열렸다. 전날 밤 은밀히 당도한 해월선생이 의암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전수하는 것으로 치성식이 끝나고 출정이 시작되었다. 통령으로 임명된 의암 대접주가 각 포를 사열한 뒤 3만 대군을 원정군과 수비군으로 나누어 2만의 원정군은 논산으로 이동해 전봉준의 호남동학군과 합류토록 하고, 1만의 수비군은 장내리 대도소, 문바위골 대도소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을 방비케 했다. 이동 편의성을 위해 원정군을 다시 둘로 나누어 1대인 영동과 옥천포는 회덕을 거쳐 공주 장기의 대교(大橋)로 이동했고, 2대는 경기포를 주축으로, 강원, 충청, 경상포와 연합해 심천과 진산을 거쳐 논산으로 향했다. 2대의 주력은 괴산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이천포가 맡았다. 황색기를 든 손병희 통령의 중군을 중심으로 청색기의 선봉, 백색기의 좌익, 흑색기의 우익, 홍색기의 후군이 논산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색 깃발을 치켜든 2만 대군이 진군해 나가자 연도의 산과 들녘은 온통 흰옷 입은 동학군으로 넘쳐났고, 군량과 무기를 실은 우마차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수접주로 승진한 이창진과 전량도감이 된 한규석은 충경포의 신재길 접주와 함께 후군에 편성되어 보무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행군 도중 간혹 만나는 소읍의 관군은 대군의 이동에 혼비백산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일쑤였고, 그 덕에 적으나마 신무기와 탄약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중 회선포 두 대를 노획한 것은 동학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총신이 돌아가면서 총알이 나가도록 고안된 회선포는 기왕에 가지고 있던 한 대와 합쳐져 대열의 선두를 이끌었다. 논산에서 2만의 호남동학군과 만난 경기동학군은 도합 4만의 대군으로 진용을 갖춰 공주를 향해 짓쳐나가기 시작했다. 노성을 지나면서부터는 공주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둘로 나누었다. 손병희 통령이 지휘하는 경기동학군은 좌측의 이인(利仁) 쪽으로 향했고, 전봉준 장군이 지휘하는 호남동학군은 우측으로 돌아 경천을 지나 우금치와 효포(孝浦) 방면으로 이동했다. 한편, 공주의 동쪽으로 진군해 들어간 영동과 옥천포는 금강의 북쪽 강안인 대교에 진을 치고 주력인 호남동학군의 공주 공격 개시 파발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세 방면에서의 일제 공격을 위해 무장의 고삐를 바짝 틀어쥐었다. 이인에 당도한 경기동학군은 회선포 3대를 돌출된 형태로 앞세운 뒤 논배미를 두둑하게 쌓아 총안을 만들었고, 너른 이인 평야에 볏짚을 깔아 진지를 구축했다. 호남동학군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만든 임시 전진기지인 셈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전봉준의 호남동학군으로부터 개전을 알리는 파발이 나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인의 평야 진지는 금방 이동할 것으로 예상해 임시방편으로 구축한 것이라 허허벌판의 추위와 칼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화톳불을 피웠다. 그 탓으로 낮에는 매캐한 연기가 종일 진지를 맴돌았고, 밤에는 멀리서 보아도 대군이 주둔해 있는 게 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불빛 속에 환했다. 손병희 통령은 출진이 미뤄지는 것에 조바심이 일어 접주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통문을 돌렸다. 갑주(甲冑)를 떨쳐입은 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전이 임박했습니다. 공주는 천혜의 군사 요충지인바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직 호남동학군으로부터 개전 파발이 당도치 않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으나, 언제 공격이 시작될지 모르니 무기와 군량을 세세히 점검하고 출진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조만간 있을 공격을 앞두고 접주들의 의견을 수렴코자 하니 기탄없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통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맨 앞줄의 젊은 접주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호남동학군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 성문을 깨부숩시다.” 여기저기서 ‘그럽시다’라는 호기로운 목소리가 울흥하게 일었다. 신중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독불장군이 나서면 백전필패란 걸 모르시오? 원래의 계획대로 동, 서, 남 삼면에서 동시에 공격하면 수성군이 도망칠 곳은 금강뿐이라 독 안에 든 쥐 격입니다. 서둘러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다른 의견도 나왔다. “우리는 타지에서 이동해 왔기에 이인이나 공주의 지세를 잘 알지 못합니다. 무릇 병서에 이르길 지장(智將)은 지세와 산세, 수세를 우선 살핀다 했습니다. 먼저 동리 사람을 불러 지세를 소상히 들어본 후 움직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근동의 지리를 잘 아는 접주가 있어 그가 자진해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도스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보다시피 이인은 땅이 넓어 사방이 트여 있습니다만, 이인부터 공주까지는 산과 능선만이 즐비합니다. 비록 산은 높지 않으나 봉우리가 무수히 많고 산록은 가파르며, 반대로 골이 깊어 대군이 지나가기 쉽지 않습니다. 우마가 다닐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며, 고개를 대여섯 개 연이어 넘어야 공주성에 당도하는 오르막 험로입니다.” 접주의 이 말에 앞으로의 전투가 쉽지 않을 거라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돌멩이 하나를 굴려도 아래보다는 위가 나을 텐데 공주성 공격은 아래에서 위로 치받는 방식이라 쉽지 않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의견도 나왔다. 말한 이는 충경포의 신재길 접주였다. “지금 당장 진지를 옮겨야 합니다. 보다시피 우리 진지는 평야에 포진하여 사방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가진 화승총은 사정거리가 짧아 멀리 있는 적을 맞추기 어렵고, 바람막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인 까닭에 화승에 불을 붙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속히 산봉우리로 진지를 옮기고 몸을 숨겨야 합니다.” 다들 동의했지만 금방이라도 호남동학군의 파발이 당도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당장 애써 만든 진지를 버리고 새로운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신재길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나이 지긋한 접주 하나가 허리부터 세우고 일어나 추임새를 넣었다. “무릇 정병(精兵)이라 함은 전투를 잘하는 병사가 아니라 방비를 잘하는 병사를 말합니다. 오늘의 수고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한다는데 무얼 주저합니까? 군사의 숫자만 믿고 지세가 불리한 평지에 머물렀다가는 화를 키우는 꼴이 될 것입니다. 속히 서둘러야 합니다.”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깨고 또 한 사람이 일어나 조심스레 말했다. “어제 해 질 녘, 좌측방의 초봉리 산마루에서 원조경(遠眺鏡)으로 주위를 살피는 자가 있었습니다. 멀어서 확실하진 않았으나 그 시간에 산야를 누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필시 관군이나 일본군이 우리를 염탐하러 보낸 세작이 아닐는지요?” 이 말이 떨어지자 좌중에 술렁임이 일었다. 당장 진지를 옮기자는 의견과 어차피 하루 이틀 후면 진격할 터이니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할 필요가 뭐 있겠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손병희 통령이 양측의 의견을 다 듣고 난 후 무겁게 입을 뗐다. “진퇴양난이란 필시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합니다.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기병하여 하루를 진군한 뒤 적당한 봉우리를 물색해 진을 치도록 합시다. 오늘은 급한 대로 선봉군인 안성포에서 전방에 보이는 옥녀봉에 척후를 보내 경계초소를 마련하고 적병의 기습을 살피는 것이 어떻겠소?” 타협안이 그럴듯했다. 진지를 옮기자는 의견과 산봉우리에 진을 치자는 의견 모두를 수렴했을뿐더러 옥녀봉은 이인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충인지라 통령의 중재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참에 이창진과 한규석, 신재길은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포로 총총걸음을 옮겼다. “동학군의 수가 많다 하나 병법을 아는 이가 드무니 걱정이오. 당장 오늘 밤에 야습이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백수의 왕 호랑이도 여우에게 꽁무니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소. 적이 허를 찌르고 달려든다면 낭패가 될 터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불침번을 갑절로 세워 방비를 튼튼히 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밤이 무사히 지나길 바랄 뿐입니다.” 걱정을 여러 겹 쌓는다고 하여 행운이 찾아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고작 하루를 더 넘기지 못하고 그날 밤 평야에 주둔해 있던 경기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었다. 야습은 엉뚱하게도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비롯되었다. 서둘러 옥녀봉에 경계초소를 마련한 안성포 군이 전방과 측방의 방비는 튼튼히 했지만, 후방에서 접근하는 적을 예상치 못했다. 인근 야산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적병이 동학군이 피운 시초(柴草) 더미 불기운이 사그라드는 새벽 시간을 노려 일시에 총을 쏘며 달려든 것이었다. 선잠에서 깨어난 동학군 진영은 화승에 불붙일 새도 없이 혼비백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포진해둔 회선포의 방향을 돌려 응사하기도 전에 진지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불침번을 선 경비병이 화승총으로 응사했지만, 벌판을 건너온 새벽 된바람에 총은 불땀을 잃고 헛방을 놓기 일쑤였다. 전방에 나가 있던 안성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병이 후방 근거리에 매복해 있다가 일시에 달려드는 통에 병장기를 추슬러 구원하러 달려올 틈도 없이 한 식경 가량 이어진 전투에서 동학군은 궤산(潰散)에 궤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날이 희뿌옇게 밝아 주변 형상이 드러나면서부터 논바닥에 엎드려 있던 동학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섰다. 전방에 나가 있던 안성포 군이 도착하는 발소리가 요란해지자 적병은 홀연히 미명의 운무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매복과 기습으로 동학군을 타격하고는 귀신병처럼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날이 밝아 전장을 살펴본 결과 심대한 타격을 입은 전투였음이 드러났다. 관군과 일본군의 시체는 별로 없고, 무더기로 쓰러져 죽은 동학군 시신 사이로 부상자의 비명만이 낭자할 뿐이었다. 인원과 무기, 전량을 점고한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시신의 숫자는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였고, 함부로 쏘아댄 회선포 탄환은 초반에 동나버렸으며, 쌓아두었던 군량미에 불기운이 옮겨붙어 홧홧한 열기와 연기가 자욱하게 맴돌았다. 한순간의 방심이 부른 패전치고는 육단(肉袒)으로 옷을 벗고 땅을 칠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적군은 인근 야산으로 퇴각했다가 총탄을 보충해 재차 공격해 들어왔다. 반면에 동학군은 불땀이 일지 않는 화승총을 붙잡고 엎드려 헛헛한 입김만을 부싯깃에 불어넣고 있었다. 완벽한 무기의 열세였다. 적군의 공격은 해그림자가 짧아질 때가 되어서야 칠점사의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
[칼럼] 주문(呪文)에서 바라본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본뜻강령주문(降靈呪文)「지기금지원위대 강(至氣今至願爲大 降)」 본주문(本呪文)「시 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 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는 논학문(論學文) 즉 동학론(東學論)에서 "··· 내 또한 거의 한 해를 닦고 헤아려 본즉, 또한 자연의 이치가 없지 아니하므로 한편으로는 주문(呪文)을 짓고 한편으로는 강령(降靈)의 법을 짓고 한편으로는 잊지 않는 글(본주문)을 지으니, 절차와 도법이 오직 이십일 자로 될 따름이라.···"하여, 주문(呪文) 낱글자를 하나둘 해의하여 제자들과 후학들에게 털끝만치도 잘못 해석함을 경계하였다. 여기서는 주문 전체의 해석을 살펴보는 게 아니라, 본 주문 두 번째 「주(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父母)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수운 대신사의 주문(呪文)에서 사인여천(事人如天)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있다. 바로 ‘주(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이다. 동학 천도교에서 강조하는 실천윤리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이다. 수운 선생은 주문 풀이에서 주(主, 천주) 즉 한울님을 섬긴다는 것은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럼 사인여천(事人如天) 본뜻의 출발은 사람 섬기기를 부모님 섬기듯 하라는 의미로 본다. 수운 선생은 한울님을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어버이로 여겼으며, 사람 또한 한울님을 모신 한울님과 같은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은 단순한 존중과 평등에 입각한 서로 인사 잘하고 존댓말 사용하고 하는 형식적인 실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시 말씀드려 사람은 서로 간에 성경신(誠敬信) 즉 정성과 공경, 믿음에 바탕 한 실생활에 도덕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본다. 다시 강조하면, ‘사람을 부모님 공경하고 섬기듯, 한울님 공경하고 섬기듯 실천’하는 것이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본뜻이라고 생각한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은 단순한 예로 이웃이 굶고 있으면 부모님이 굶고 있는 것처럼 음식을 대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천하는 것은 예의범절과 도덕적인 의미도 있지만 실제로는 같이 공존하고 일하고 먹고 나누는 공동체적인 대동세상을 뜻한다고 본다. 그래서 사인여천(事人如天)은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도덕이자 나눔의 본질이니, 말과 글로 끝내는 그런 사상이 아니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세상이 온다면 그건 바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세상일 것이다.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지상천국의 세상은 요원한 것일까? 과연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과 같은 세상은 있는 것일까? 천도교에서 말하는 지상천국은 기독교적인 천상천국과 비교하면 답이 없다. 그럼 어디에 비교해야 하는 것일까. 수운 대신사님은 주문수행을 열심히 하고 동학사상을 실천하면 지상신선(地上神仙)과 같다고 말씀했다. 지상천국은 천도교 4대 목적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중 하나이다. 그러니까 천도교의 지상천국은 바로 지상신선의 세계와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지상신선(地上神仙)은 인간으로서 주문수행을 통해 신(神)과 같은 존재를 꿈꾸는 것이요, 지상천국(地上天國)은 지상신선과 같은 인간들이 사인여천을 실천하는 세상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다시 말씀드려 성경신(誠敬信) 즉 정성과 공경, 믿음에 의한 도덕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사람을 부모님 공경하고 섬기듯, 한울님 공경하고 섬기듯 실천’하는 것이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본뜻이라고 생각한다. 글 송암 이윤영(동학혁명기념관장/천도교연원회직접도훈) -
천도교 정신 되새기며 의미 있는 겨울 방학지난 12월 21일부터 22일까지 천도교 부산시교구와 대동교구에서 제70회 겨울 한울학교를 개최했다. 이번 한울학교는 방학을 앞두고 무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됐으며, 천도교 대동교구 성수당 김성희 동덕과 부산시교구 선진당 조희경 동덕이 공동으로 기획하고 진행하였다. 21일 오전, 부산시교구에서 개강식을 시작으로 한울학교의 막이 올랐다. 참가자들은 개강식과 기도식을 하고 대신사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을 관람하며 천도교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겼다. 이어서 주문 공부를 통해 주문의 뜻을 되새기며 수련하는 법을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이날 빙상장 체험 현장에서는 작은 화재가 발생해 모든 참가자가 안전하게 대피하는 등 아찔한 상황이 이어지기도 했으나,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모두 무사히 대피했으며 참가자들은 이를 통해 안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22일에는 인일기념식에 참석하며 의암성사의 도통전수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저학년과 고학년을 나누어 체험 활동이 진행되었다. 저학년 학생들은 미로 체험을 통해 협동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웠고, 고학년 학생들은 방탈출 체험을 통해 창의성과 사고력을 발휘했다. 다양한 활동 속에서 참가자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번 제70회 겨울 한울학교는 참가자들에게 천도교의 가르침을 몸소 체험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의미 있는 행사였다. 김성희 동덕은 “다들 바쁜 시간 속에서 함께 하려고 마음을 내어주시는 동덕들께 깊이 감사드리고 더 많은 인원이 함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조희경 동덕 또한 “참여해준 동덕님들,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해주시는 숙던 어르신들께 감사하고, 특별히 간섭해 주시는 한울님ㆍ스승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제70회를 맞이한 이번 한울학교는 참가자들에게 천도교 정신을 되새기며 의미 있는 겨울 방학의 시작을 선사했다. 앞으로도 천도교가 주최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많은 사람에게 영감과 배움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마음공부 - 일기쓰기한울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경외지심'(한울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수심정기'(한울님 마음과 기운을 내 마음과 기운으로 삼는 것)를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한 아주 좋은 방법으로, 마음공부(心學) 일기쓰기를 소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