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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판 천도교신문 개국 축하 한마디 -
동천고등학교 학생 18명 입교식 봉행동천고등학교 학생 18명 입교식 봉행 지난 7월 10일 오후 4시 30분 천도교 정신을 건학이념으로 설립한 동천고등학교의 동천교구에서는 18명의 학생이 천도교에 들어오는 입교식을 봉행하였다. 신원기 교화부장의 사회로 시작한 입교식에서 중암 김대석 동천교구장은 전교인인 배미화 원곡학원 이사장을 대신해 학생들에게 주문을 일일이 수여하였다. 이날 입교한 학생은 김성민(2학년), 김하진, 이재연, 이준혁, 최우혁, 홍준재, 강민재, 강준성, 이승모, 강석민, 서창석, 송승윤, 정세헌, 정시현, 이준용, 박정환, 이용민, 김규민(이상 1학년) 등 총 18명이다. 중암 김대석 동천교구장은 입교식 후 학생들에게 “천도교는 미래의 종교로 여러분이 미래의 주인공으로서 천도교에 입교한 것을 축하하며, 천도교를 바르게 신앙해 한울님을 모신 거룩한 존재임을 깨닫고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덕담을 주었다. 이어 종학실장을 맡고 있는 덕암 성강현 흥신포 직접도훈은 “천도교 입교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울님 모심을 찾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갈 개벽군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염원하는 심고를 드리겠다.”고 격려의 인사를 전했다. 입교식 후 인근의 못골시장에서 입교를 축하하는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이날 입교한 18명은 동천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자율적으로 동천교구에서 주관하는 월요 시일식에 참여해 감화를 받고 천도교의 정신에 공감하여 입교를 결정했다. 총부에서는 매년 400만원을 지원하여 학생들의 장학과 학생 포덕 활동에 지원하고 있다. 동천고등학교는 고 흥암 안관성 종법사가 천도교의 인내천 정신을 갖춘 새로운 인재를 배출하고자 1980년 개교하여 올해 44년을 맞은 부산의 명문 고등학교이다. 동천고등학교는 교직원과 학생들의 교화를 위해 종학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 교직원이 동천교구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동학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지도하고 있다.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세계시민’과목에서 세계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이 바로 동학의 시천주와 인내천 정신에 있음을 지도하고 있다. 또, ‘세계시민과 동학부(이전 종학부)’라는 자율동아리를 두어 희망학생을 모집해 월요시일식 참석, 정신문화유적지 탐방, 인근 교구 시일식 참석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영웅 최진립 장군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글을 남겼다. “우리 선조 험천 땅에 공덕비를 높이 세워 만고유전 하여보세. 송백 같은 이내 절개 금석으로 세울 줄을 세상 사람 뉘가 알꼬.”, “선조의 충의와 절개는 용산에 남아 있네. 해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우리 임금님 성덕을 다시 돌아보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언급한 ‘선조’는 잠와 최진립 장군으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7대조이다. ‘용산’은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용산서원을 말한다. 유림에서는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학문을 기려 용산서원을 창건하여 공을 제향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숙종 37년에 임금이 친히 ‘숭렬사우崇烈祠宇’로 글을 내린 사액 사당이다. 당시 무신으로 사액 사당을 받은 이는 이순신과 김시민 장군뿐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용산서원 입구에 공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최진립 장군은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의 17세 후손이며 사성공 최예의 6세 후손이다. 1568년 경주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참판공 최신보와 평해황씨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나 자랐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21일 경주성이 함락됐다. 당시 25세였던 장군은 아우 최계종, 당숙 최신린, 최봉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5월 27일 김호, 손엽, 권사악, 이눌 등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해 계연(김유신 장군 묘 아래 경주 서천 일원)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6월 2일에는 언양에서 경주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김기 의병장과 함께 열박재(충의당과 울주군 두서면의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7월 27일에는 경주 손엽, 권복시, 권사민 의병장들과 함께 영천성 수복 전투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 100여 명을 이끌고 울산 서생포에 주둔 중인 적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장군은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2등을 받았고, 훈련부정, 도총도부사, 마량진 첨사, 경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12월 13일,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군대는 며칠 지나지도 않은 12월 16일에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까지 포위했다. 최진립 장군은 69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군사를 일으켜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가 전장으로 달려가기 직전, 충청감사 정세규가 ‘늙어 전장에 나가기 마땅치 않다’고 만류했지만 최진립 장군은 “내가 늙어 싸워서 이길 수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637년 1월 2일,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양굴리)가 이끄는 적과 대치했다. 열세인 상황에서 최진립, 나성 현감 김홍익, 남포 현감 이경징, 금정 찰방 이상재 등은 포기하지 않았다.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력이 미약한 소수 부대지만 잘 통솔하여 적과 대등하게 싸웠고, 하루종일 10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아군은 탄약과 화살이 바닥나고 군사도 이미 반이나 잃었다. 최진립 장군은 공주영장으로 군사를 이끌고 용인 험천 전투에 참여하여 용전하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다음 해에 시체를 수습했는데 ‘그 모양이 살아 있는 듯하고 화살과 총알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름을 떨쳤던 장수 중 1636년 병자호란 때까지 생존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일본군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이 당시 63세의 고령으로 병자호란에 참전한 사실이 두드러지는 정도다. 그런 만큼 불과 25세의 나이로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했던 최진립 장군의 69세 병자호란 참전과 순절은 특별한 이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진립 장군 묘소는 나라에서 내린 명당 터에 장지를 마련하여 장례를 치르고,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청백리에 녹선하였다. 고향 내남면 이조리에 정려비각을 세워 충절을 만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최진립 장군 묘소 뒤편에는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던 셋째아들 현감공 최동량의 묘소가 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천하며,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고, 해방 후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경주 최부자의 현조이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99호인 충의당은 경주 최씨 종가로 최진립 장군이 살았던 집이다. 본래 당호는 흠흠당欽欽堂이었는데, 1760년 무렵 건물을 고쳐 지으면서 집 이름을 충의당으로 바꾸었다. 충의당 일대는 ‘충의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장군의 기마동상과 유물관인 충의관이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취재진이 충의당 종택을 방문한 날 종손을 만나 집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와 한씨 사모님 이야기도 있었다. 사당인 충렬사와 닫혀있던 최진립 장군 위패도 열어서 보여주셨다. 사당 들어가는 입구에 200년 된 매실나무가 세월의 인고를 견디며 잘 자라고 있다. 기나긴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꽃 활짝 피는 날 다시 방문하고 싶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탄신하신 비슷한 시기에 심어졌으리라 여겨진다. 동학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는 마지막 경주 최부자인 최준을 나이로는 22살이나 많았지만 늘 존중했다고 한다. 최준에게 수시로 “동학은 경주 최씨와 최부자 가문의 가르침”이라며 예우했다. 경주 최씨, 그중 최진립 장군으로 시작되는 가계도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했을 것이다. 최진립 장군 묘소 아래 사패지賜牌地에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건립되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최진립 장군의 7세손이니 공의 위대한 정신은 자손 대대로 이어졌다. 글 조성갑 사진 최인경 (탐방 팁) 용산서원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 충의당과 충의공원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충의당길 15 최진립 장군 정려비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513-1 최진립 장군 묘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 157 (울산과학기술원 교수아파트 입구)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
일본군 상대로 최초의 위대한 승리내포 동학, 하나의 세력으로 내포 지역의 동학은 1880년대 초에 전파되고 18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1894년 5월 홍주 목사 이승우李勝宇가 부임하면서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승우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고 관군을 동원하여 체포와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내포의 동학군들은 하나의 세력으로 거대화하려는 자구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는 지역적으로 포별 각개활동을 하기가 더 이상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전국적으로는 이른바 2차 봉기의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포의 동학군들도 그동안 위축되었던 활동을 회복하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목적에 동참하기 위하여 여미벌(餘美坪, 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총집결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여미벌에서는 ‘내포 동학군’이라는 하나의 거대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고, 내포 각지에서 활동하던 동학도들이 여미벌에 총집결하니 그 수가 1만 5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총봉기를 향한 서막-역사적 전투로 이들은 여미벌에서 창의의 뜻을 바로세우고 기세를 올리며, 대오를 엄중히 하고 식량과 무기를 준비하는 등 조직을 재편하면서 조만간 닥쳐올 전쟁에 대해서도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1894년 10월, 여미벌에서는 동학군의 총봉기에 동참하기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국왕을 능멸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일본군을 일거에 몰아내고, 반민족적 탐관오리들까지 축출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여미벌에서 박인호를 중심으로 한 총봉기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무렵, 내포 동학군들은 한양으로부터 진압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드디어 10월 24일, 내포 동학군들은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를 맞아 현재 충남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목(勝戰項, 승전곡勝戰谷, 승전우僧田隅)에서 역사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승전목 전투’이다. 승전목 전투에서 운명을 걸다 승전목은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 동쪽과 면천면 사기소리 서쪽에 걸쳐 약 3km 정도의 좁은 계곡을 이룬 곳이다. 계곡의 북쪽에는 이배산(離背山, 220m)이, 남쪽에는 웅산(雄山, 253m)이 솟아 있어 깊고 좁으며 꼬불꼬불하게 난 계곡 길을 굽어보고 있다. 내포 동학군들은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과 경군의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일본군과 경군이 면천을 출발해 여미로 향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용장천을 따라 도동에 도착해서는 이배산 서쪽의 험한 능선과 반대편 검암산 능선에 미리 매복하였다. 승전목은 완벽한 S자형 협곡으로 수십m 높이의 바위들이 양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험한 지형이다. 이 협곡을 따라 나있는 샛길이 바로 면천과 운산을 이어 주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내포 동학군들은 바로 이 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압군들은 삼웅리를 지나면서 동학군의 척후병과 맞닥뜨렸으나 간단하게 제압하였고, 승전목 입구에서도 400여 명의 동학군과 재차 교전을 치르고는 곧바로 승전목에 다다랐다. 기록에 남은 승전곡 전투 당시 치열했던 승전곡 전투 상황을 사료를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봉 척후가 관군이 행군해 옴을 보고하니 우리는 승전곡 양 산등으로 올라가 복병하고 있었소, 관군이 골짜기 속으로 몰려들어 왔소. 관군이 골짜기를 들어서자 우리는 곧 전단을 일으켜 교전 1시간여에 관군을 여지없이 대파하니…… 여미로 출병했던 병사들이 승전곡에 이르러 겨우 일진을 돌파하고 검암 후봉에 이르렀으나 수만명이 진을 친 것을 보고 기가 질려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퇴병했다고 한다.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의 도동에 이르러 처음으로 적과 부딪혀서 한 번 싸워 이기고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 경병과 일본군이 지세의 험준함을 알지 못하고 급히 험하고 막힌 곳에 들어가 적에게 포위를 당했는데 군사의 수효가 매우 차이가 나서 탈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혼자 도망쳐 와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적은 승전곡의 협애를 끼고 방어했으며 그 수가 400명, 500명 되지만 드디어 격파하고 여미의 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적은 사방의 고지를 점령하고 사력을 다해 이곳을 지켰다. 그 수가 각처에 5,000여 명씩 있었으며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이를 공격하려 해도 우리를 포위하고 급습하여 끝내 지탱할 수 없어서 홍주로 퇴각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당시 전투 상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군들은 미리 산 양쪽을 선점하고 매복하였으며 일본군과 경군이 진격해 오자 일차 교전하고 패전하는 척 가장하여 연합군을 골짜기 안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방어전을 펼친 내포 동학군의 숫자는 15,000여 명으로 추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과 경군은 자신들의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승전목 앞까지 다다랐다. 긴박한 순간들, 전투 하지만 이들도 승전목의 험한 지형에 매복한 동학군들을 보자 멈칫거렸고,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과감히 돌파하기로 작전을 변경하고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배산과 검암산의 양쪽 능선을 모두 선점한 동학군들은 열세한 무기와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면서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 시간이 길어지고 한 시간이 지났지만 동학군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일본군과 경군은 조금도 진격할 수가 없었다.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질 무렵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을 이용하여 동학군들이 화공을 시작하였다. 거센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앞을 가리자 검암산 쪽으로 진격하던 관군들이 먼저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의 기세마저 급격하게 꺾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도한 동학군들이 용기백배하여 한꺼번에 산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며 압박을 가하자, 일본군과 경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에 일본군들은 앞다퉈 쫓겨 가면서 개인의 군장까지 모두 팽개치고 달아났다. 그들이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승전목 전투에서 첫 승을 거머쥔 동학군들은 배낭 78개, 상하 겨울 내의 78벌, 휴대 식량 312인분, 일대 78개, 수첩 78개, 깡통과 소금 각각 78개, 쌀자루 78매, 반합 78개, 구두 78켤레 등 다량의 노획물도 획득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다 승전목 전투에서 동학군들의 승리는, 연합군을 지휘한 일본군들이 내포 동학군들을 너무 얕본 원인도 있겠지만, 이미 엄청난 수와 조직적인 움직임 그리고 전투력 측면에서 이미 이전의 동학군들과는 월등히 달라졌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승전목 전투는 내포 동학군들에게 첫 승리로, 일본군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낼 수 있는 대승이었다. 이날의 전투는 동학군들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한 단 두 곳 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군과 정면 전투에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전투로도 알려져 있다. 전승지로서의 승전곡-승전목 승전곡이라는 명칭은 동학 연구자들 사이에 불리는 명칭이고, 당진 지역민들 사이에는 승전곡보다는 승전목으로 불리고 있다. 내포문화숲길에서 ‘내포동학길 1코스’(9.4km, 약 3시간 30분 소요)가 동학군이 무혈입성한 면천읍성을 출발해 승전목 전투지까지 조성되어 있다. 현재 승전목 전승지는 당진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석산 개발과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파괴되어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승전목 전승지가 개발과 발전 논리에 계속 파괴되고 있다. 향토유적은 비지정 문화재의 범주이기에 온전한 문화재의 보존관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향토유적의 밑바탕에서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 당진시는 승전목 전승지를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노력하고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글 조성갑 (탐방 팁) 승전목(곡) 전투(승)지 : 충남 당진시 면천로 142 (참고문헌) 디지털당진문화대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양상과 승전목전투 당진지역 농민항쟁 관련 역사자원의 활용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실태와 보존 방안 동학농민혁명 시기 당진 동학농민군 활동과 문화콘텐츠 활용방안 [출처] 승전목 전투, 일본군 상대로 최초의 위대한 승리|작성자 동학집강소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
증약·문의 전투에 빛나는 동학혁명의 푸르른 정신경부고속도로 대전I·C에서 옥천 방향으로 난 첫 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으로 증약리가, 왼편으로 청남대가 있는 문의까지 펼쳐진 대청호수가 보인다. 이곳에 이르면 하늘과 물, 산이 뿜어내는 푸르름에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경부선 철도 세천역 부근이기도 한 이곳이 1894년 동학혁명 당시 격전지였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려면 현재 경부고속도로 대전터널이 놓인 마달령(馬達嶺)이라는 고갯마루 너머 증약역을 지나야 했다. 증약역은 전국 40개 주요 역을 거느리는 중심 역이었다. 특히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경로인 추풍령-옥천-증약-문의-청주로 이어지지는 율봉도, 상주-보은-옥천-증약-무주로 연결되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중심에 있던 증약역은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본군은 증약·문의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 전투를 다음과 같이 본부에 보고하였다. 본부와 제3중대, 조선 관군은 11월 23일 오전 1시 30분 청주를 출발, 문의를 향해 전진했다. 오전 11시 30분 지명강 북쪽 강기슭에 도착했을 때, 남쪽 강기슭에는 많은 적도(1만2,3천)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이때 사격을 시작하면서 전위 소대원을 첨병 왼쪽으로 증가시켰다. 그리고 1개 소대를 전위 첨병선으로 증가시켰다. 오전 12시, 왼쪽으로 2개 분대를 내보내 적도의 배후를 치게 했다. 적도는 회덕과 주안周安(주암舟巖) 방향으로 물러났다. 문의로 돌아와 숙박했다(대대장 보병소좌 南小四郞). 문의文義 부근 전투상보 1894년 11월 23일(음력 10월 26일) - 필자 요약 오전 11시 20분 북쪽으로 행군하는 1만명 이상의 적을 만났다. 적은 일본군을 향해 급히 공격해 왔다. 조선군과 함께 응사해, 110여 명을 쓰러뜨리고 적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그러나 적군의 우익은 산을 타고 문의 방면으로 진격하고, 적의 본군과 좌익은 우리 군대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해왔다. 조선군은 겁을 먹고 퇴각했다. 적은 이산 저산에서, “저놈들을 포위하라.”고 소리 지르며 돌격해 왔다. 그래서 일본군으로 이를 막게 했다. 적은 지명강 건너편을 점령했다. 주민의 태반이 적에 가담한 것 같았다. 지명에서 우리 군대와 조선 군대를 모아 문의로 철수했다(소위 宮本竹五郞). 증약增若 부근 전투상보 1894년 11월 26일(음력 10월 29일) - 필자 요약 이 전투들이 벌어질 당시, 내포 지역 동학혁명군은 홍주성을 공략하고 있었고, 공주성에서는 전봉준과 통령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혁명군이 일본군·조선관군에 맞서고 있었다. 따라서 공주성 전투와 홍주성 전투, 그리고 증약·문의 전투는 개별적으로 벌어진 산만한 전투가 아니라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전투들이었다. 1894년, 조선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쟁의 소용돌이에 참가하고 있는 주체들의 성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가장 약자였던 동학혁명군은 남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민족국가를 유지하며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염원하였다. 이들과 가장 가까운 세력이 조선 관군 세력(사실은 조선 왕실과 양반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동학혁명 초기에는 청나라에게 업혀 동학혁명군을 공격하였고, 1894년 7월 22일(양력) 이후에는 그 태도가 급변하더니 일본 세력을 빌려 조선 백성의 소망을 짓밟기 시작했다. 1592년 임진왜란의 공포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명나라, 무능한 조선 지배 세력이 남긴 고통은 동학의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를 통해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동학혁명은 가혹하기만 한 국내정치를 바로잡으려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이었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 세력이 조선의 충청도에서 벌이기 시작한 국제적 싸움이 청일전쟁이었다. 당연히 가장 큰 피해자는 충청도에 사는 조선 백성들이었다. 당시 증약과 같은 옥천군 관내인 청산면 문바위골에서는 동학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머무르며 동학을 이끌고 있었다. 문바위골은 동학의 이상을 만천하에 알리고 혁명의 문을 열었던 1893년의 보은 취회를 결정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미 이때부터 청산 문바위골은 동학의 '장안(長安, 수도)'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증약·문의 동학 전투는 일시적으로나마 옥천 문바위골을 중심지로 하는 동학의 근거지를 보호했다는 의미가 있다. 증약·문의 전투가 동학혁명에서 지니는 또 하나의 큰 의미는 공주에서 합류하려 했던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계획에 크게 타격을 입혀 실행을 지연시켰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미 대륙침략을 목표로 측량 및 설계 단계에 있었던 경부·경의선 철도 부설이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구체적 목표에 상당한 타격을 주며, 조선 백성의 주권 의식을 떨쳤다는 점에 의의가 크다. 동학혁명이 좌절되자마자 조선 왕실과 양반 세력들은 제 나라 땅을 일본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며, 공짜나 다름없는 저임금으로 제 백성들을 몰아붙여 경부철도 부설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증약·문의 동학 전투에서 이 지역 양반들이 동학혁명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왕권이 연합한 침략·지배 세력에 맞섰던 조선 백성들의 함성만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길 주변에 푸르게 남아 여전히 빛날 뿐이다. 글_남연호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
동학7일학교, 전라도지역 동학의 발자취를 찾다동학7일학교 2기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작년에 이어 2회째 개최되는 동학7일학교는 천도교와 동학소년회가 주최한다. 올해는 보국안민이라는 주제를 갖고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들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7일간 순례하며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장흥동학농민묘역 방문, 장흥 천도교당, 정읍 동학농민 기념관, 남원 은적암, 임실 등을 방문한다. 이번 동학7일학교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시간을 갖는다. 폭염과 태풍 등의 우려 속에서도 진행되고 있는 이번 동학7일학교는 비가 그치면서 선선해진 가운데 활동성이 높아졌다는 의견이다. 9일 수요일부터 개최된 이번 동학7일학교 2기는 오는 15일까지 열리며 동학국제학교 시범활동,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따라서, 전통무예익히기(택견) 등의 주요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참가한 청소년들의 안전과 위생을 철저히 관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이번 동학7일학교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기념의 의미를 갖으며 천도교중앙총부, 동학소년회의 주최, 마음치소년단, 평화소년단 주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진행된다. -
중앙 대책 본부장, 태풍 「카눈」 피해 및 대처 상황 긴급 점검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오늘(10일) 08시 교육부, 산업부, 해수부 등 18개 관계부처와 17개 시도가 참석한 가운데, 제6호 태풍 「카눈」 호우피해와 기관별 대처상황을 재차 점검했다. * 18개 부처(행안부, 교육부, 국방부, 농식품부, 산업부, 고용부, 환경부, 문체부, 중기부, 여가부, 국토부, 해수부, 경찰청, 소방청, 산림청, 기상청, 문화재청, 해경청) 및 17개 시도 기상청에 따르면, 태풍 「카눈」은 오늘 오전 남해안에 상륙하여 한반도를 관통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전국 대부분 지역에 많은 비와 매우 강한 바람이 전망된다. *예상 강수량(9~10일) : (수도권) 100~200mm, (강원도) 강원영동 200~400mm(많은 곳 600mm 이상) 강원영서 100~200mm, (충청권) 100~200mm, (전라권) 100~200mm(많은 곳 300mm 이상), (경상권)100~300mm(많은 곳 400mm 이상), (제주도) 100~200mm(많은 곳 300mm 이상) 이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태풍 북상에 따른 인명피해 최소화를 위해 모든 기관의 비상근무태세 확립을 지시하고, 특히 다음 사항에 중점을 두고 대응할 것을 관계기관에 요청하였다. ○ 대피취약세대와 사전에 매칭된 조력자의 연락처를 재정비하고, 작은 위험요인이라도 감지시 즉각 대피시키는 등 과할정도로 하며, 신속하고 철저한 대피를 위해 경찰과 협조하여 대피를 실시할 것 ○ 태풍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전 기관은 비상근무태세를 유지하고, 접수된 재난상황은 기관장에게 직보하여 기관장 중심으로 상황대응을 실시할 것 ○ 강풍·강우 집중시간대 야외활동을 자제하도록 재난문자, 마을방송, 재난예·경보체계 등 다양한 홍보수단을 활용하여 국민행동요령 홍보와 안내를 강화할 것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하천변 산책로, 해안가 저지대 도로, 지하차도 등에 대해 철저히 통제하고, 반지하주택, 산지 주변 주택 등 위험지역 내 거주자는 즉시 대피시킬 것”을 재차 강조하였으며, “국민께서도 다소 불편함이 있으시더라도 정부의 사전 통제와 대피조치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외출을 자제하는 한편, 안전한 실내에 머물러 주실 것”을 당부하였다. < 태풍시 국민행동요령> - 자주 물에 잠기는 지역, 산사태 위험지역 등의 위험한 곳은 피하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합니다. - 실내에서는 문과 창문을 닫고, 외출을 하지 않고 TV, 라디오, 인터넷 등을 통해 기상 상황을 확인합니다. - 개울가, 하천변, 해안가 등 침수 위험지역은 급류에 휩쓸릴 수 있으니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 산과 계곡의 등산객은 계곡이나 비탈면 가까이 가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합니다. - 공사자재가 넘어질 수 있으니 공사장 근처에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 농촌에서는 논둑이나 물꼬의 점검을 위해 나가지 않습니다. -
삼심관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대교당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시일식을 함께 보게 됨을 감사합니다. 그동안 안녕히 들 잘 지내셨지요? 어르신들 항상 건강하시길 심고 드립니다. 스승님께서는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 하였어라”라고 용담유사에 말씀을 해두셨습니다.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마음을 닦고 성품을 보는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는 의암성사님 『무체법경』 1 성심변, 2 성심신삼단, 3 신통고, 4 견성해, 5 삼성과, 6 삼심관, 7 극락설, 8 성범설, 9 진심불염) 중에서 6번째 단원인 삼심관(三心觀)편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려 볼까 합니다. 의암성사님께서는 삼심관 편에서 “도의 세 가지 마음의 계단이 있으니 마음을 닦고 성품을 보려는 사람은 만약 이 세 가지 계단의 묘법이 아니면 좋은 성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설법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 첫째가 허광(虛光)심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마음공부를 하는 첫 계단이 되겠습니다. ‘한울님 모심’(강령)을 체득하고 ‘한울님의 가르침’(강화)을 받기 시작하는 수련의 초보적 마음의 변화 과정으로써 세상 물욕에 젖어 있던 나 자신이 한울님 모심을 몸소 체득하고 나니 온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용담정 마당의 자갈들은 별같이 빛나고, 산천의 초목들은 기쁨으로 넘치고, 수도원에 오신 모든 분은 다 신선으로 변하고, 이전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니 실로 의암성사께서 「입진경」(675)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듯이 “필시 선경이요, 별세계”가 내 앞에 나타납니다. 이 자리는 나 자신의 마음이 회복하는 것 우선으로 시작합니다. 쉬지 않고 마음공부를 계속하게 되면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신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깨달아지고, 생각하면 알게 되고, 선 악 분별이 분명해지고,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도 하게 되고, 마음은 여리고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수련을 시작하기 전보다 다른 사람들과도 상충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가족에게도 더 많이 신경을 쓰다 보니 가족들은 간섭이라 생각하게 되고 본인의 생각대로 따르기를 강요하는 일도 생기면서 1년 365일이 화순(和順)해야만 하는 내 가정에 자칫하면 불화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마음 단속하기를 정말 지성으로 해야 하며 가족 모두가 수련을 같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때는 혼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같이하고, 수도원을 자주 다니면서 강의도 듣고 선배들의 조언도 구하고, 반드시 경전을 늘 살펴서 스승님의 가르침에 어김이 없는가를 스스로 점검하며 정진해야만 바르게 빠르게 공부가 되어질 겁니다. 이 자리는 공부하는데 지루함이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써 주문 한독 한독 하는 것만큼 지혜도 능력도 나오는 재미나는 자리입니다. 사람마다 공부하는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저는 공부를 시작하여 한 번도 한울님께 뭔가를 묻지 않았습니다. 한울님께서는 제 공부가 되는 정도에 따라 보여 주시고 일러 주시고 안내해 주시고 매매 사사를 간섭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공부한 방법이 옳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허광심의 자리는 힘이 나오는 자리이긴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리이기 때문에 능력을 함부로 쓴다던가. 스스로 알게 된 것을 그대로 발설하는 일은 삼가셔야 합니다. 어떤 능력을 얻었다고 그 능력을 오래도록 간직하고자 한다던가. 능력을 함부로 쓴다던가. 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며 능력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고 싶다 해도 시간과 비례하여 바래 지고 힘도 줄어들게 되는 것이 천도의 자연한 이치입니다. 의암성사님께서 이 자리에는 특별히 력(力) 자를 부쳐서 허광심력이라 말씀하시고 “여기에 멎어서 구하지 않으면 내 반드시 찬성하지 않을 것이니 스스로 힘써 분발하여 또 한 단계를 나아 가라”고 하셨습니다. 단 이것을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쉬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 수련을 시작하여 최소 3년은, 그래야만 스승님께서 말씀 해 놓으신 경전의 말씀들은 하나도 어김이 없는 것을 알게 되고 내 스스로도 도가 무엇인지 한울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믿음이 반석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어디서나 한결같이 감응하고 계시는 한울님 감응을 감지할 수 있는 내가 됩니다. 한울님의 감응하심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신앙을 하는 데 감사함이 동반되지 않고 나날이 새로운 나로 세상을 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둘째는 여여(如如)심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진성의 자리, 없는 것도 없는 자리, 불생불멸의 자리_(육신은 생사가 있으나 성령은 생사가 없음), 인연 없이 생함을 이룰 수 있는 자리, 본래의 나,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나, 무선무악의 자리_(세상 속에는 선악이 있는데 선악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기도 합니다.)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는 자리, 위도 아래도 없는 자리, 더 하는 것도 새는 것도 없는 자리, 성품과 마음의 본체는 비고 끊긴 자리입니다. (공단)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이 비고 끊긴 자리에서 본래 인연 없이 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형상이 없는 무형의 세계가 지금 형상을 갖추고 있는 이 세상의 근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형상이 없는 곳에서는 형상을 갖추고자 무한한 발전을 거듭하고 형상을 갖춘 곳에서는 형상을 없이 하고자 무한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는 유를 낳고 유는 무를 낳고 이것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 바로 천도의 이치입니다. 이 여여심의 자리는 내가 몸을 갖추고 이 세상에 나타나 있으면서 내가 형상을 갖추기 전의 세계를 체득하는 과정이 되겠습니다. 이 여여심의 경지에 나아 가게 되면 의심스러움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의 언행이나 사물이 나 그 어떤 일이라도 용납이 되고 이해가 되고 마음이 넉넉해지고 어떤 사람, 어떤 일도 다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자리입니다. 육신의 내가 아닌 본래의 나는 죽지 않는 불생불멸의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고 무한한 감사함과 희열을 맛보게 되고 마음의 조급함이 없어지고 편안할 수가 있습니다. 이 자리의 공부가 되신 분은 이제 천천히 쉬어 가면서 공부를 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포덕 125년 7월에 수련을 시작하여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오던바, 포덕 128년 7월 2일 우리 교당에서 월례 수련을 하는데 눈앞에, 위에는 없을 무 왼쪽에는 무선 무악 오른쪽에는 불생불멸 아래에는 본자리, 이렇게 마름모 모양의 그림이 그려지고 그 옆에는 큰 동그라미의 옥색 빛을 발하는 물체가 보이고 그 바로 밑에는 정말 작은 옥색 빛을 띤 점이 보였습니다. 그 형상을 본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저 큰 옥색 빛의 동그라미는 한울이고 점 같은 옥색 빛은 ‘나’구나, 그렇다면 나는 저 한울에 서 와서 형상을 갖추고 세상에 살다가 이 육신이 다하면 다시 저 한울로 가는구나. 그럼 본래의 나는 영원불멸의 존재로서 죽지 않는구나. 나는 죽지 않는 존재다. 라는 것을 깨닫고 한없이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제사 나를 돌아보니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3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세월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2달 동안은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아무것도 없는 비고 끊긴 이 자리가 도의 정점이라면 그토록 쉬지 않고 달려온 나 자신이 뭘 한 것인지 허탈감이 들었습니다. 그때 「삼심관」에서 본 단어가 있었으니……. 셋째는 자유(自由)심입니다. 유형한 내가 무형한 한울의 이치를 깨닫고 다시 유형한 세상 속에서 스승님의 도를 행하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공부의 계단입니다. 이 자리는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지 않는 자리. 무엇을 이루고자 애쓰지 않는 자리. 마음 없이 행(行)하고 거리낌 없이 행함이 나오는 자리.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때에 맞게 행(行)이 나오는 자리로 아무것도 없는 듯 하나 무엇이든지 있는 자리. 그래서, 좋으면 좋고, 착하면 착하고, 노하면 노하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모든 일과 모든 쓰임을 마음 없이 행하고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리입니다. “한울도 비지 아니하고 만물도 끊기지 아니하니 도가 어찌 빈 데 멎으며 만물이 어찌 끊긴 데 멎으리오.” “성품은 근본과 끝이 없고 이치는 처음과 나중이 없다.” 이르시고 “성품과 마음이 자유로우면 도가 반드시 끝이 없을 것이요, 세상이 반드시 자유로우면 세상이 또한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사람이 반드시 자유로우면 억만 사람이 마침내 이 자유를 깨달을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 또 뵙겠습니다. 포덕 164. 7. 30. 대교당 -
[속보] 태풍대비 행동요령 -
사람의 힘으로, 영성의 힘으로현대를 흔히 경제의 시대니 자본의 시대니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현대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들어낸 것으로서, 현대사회는 경제 질서에 의해서 운용되며, 이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라는 뜻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현대는 그야말로 황금만능 또는 물질 만능의 시대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풍조 때문에 하루도 끊이지 않고 금권과 얽힌 사건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여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모두가 그렇게 치달릴 때,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라도 올바른 가치판단으로, 쏠림현상으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이 현상적 사회를 제동하고 안정적으로 순항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회현상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이 중요하냐 하는 개개인의 생각이 모여서 그 시대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것에 따라서 시대사회의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생각은 개인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 교육, 정치적 방향 등이 개인의 생각을 만듭니다. 그 개인의 생각이 모이면 그 시대의 가치관이 되고, 그 가치관에 의해서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연결고리가 형성됩니다.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면 그걸 악순환이라고 하지요. 역사적으로 우리 천도교인들은 부조리하고 모순된 사회를 개혁하려 들었습니다. 그것을 스승님께서는 개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개벽을 또 하나의 사명으로 여기면서 신앙을 해왔습니다. 그러니 구조적으로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대사회에 소속된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그걸 간과할 리가 없습니다. 혁명으로 또는 운동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한 역사적 사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반란임에도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쿠데타라고 합니다. 성공한 자는 충신이 되고 실패한 자는 역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매우 결과론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변함이 없는 것은 성패라는 것은 당대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실패로 끝난 것일지라도 훗날 역사적으로 평가되어 운동 또는 혁명으로 명명되기도 합니다. 동학혁명이 그렇고, 3·1운동이 그렇습니다. 천도교의 교리는 교인들을 시대 사회현상에 대하여 직시하게 하였으며 행동하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거대하고 바위 같은 구조라도 그것이 부조리하고 모순된 것이라면 천도교인들은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그것을 변화시키려 하였습니다. 물론 방법적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큰 흐름에서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도의 두 흐름을 순수와 참여로 규정해 보기도 합니다. 순수 신앙의 흐름에서 보면 신앙의 자세는 오로지 경전과 주문을 통하여 공부하고 수련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자연히 따라와 모두가 군자 사람의 반열에 들어 이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참여 신앙의 흐름에서 보면 신앙의 자세는 보다 적극적입니다. 경전과 주문 공부를 통하여 성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물론 그러한 도력으로 세상을 개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시도 멈춤이 없이 부조리와 맞서 싸워서 세상을 개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진보해 가기 때문에 개벽하는 일이 교인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 신앙적 태도든 참여 신앙적 태도든 하나의 견해일 따름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큰 흐름에서는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줄기는 하나입니다. 단지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친 신앙의 태도는 절름발이 신앙이 되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그르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시 정명하고 균형 잡힌 신앙 자세로 세상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자본이 지배하고 권력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 천도교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천도교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천도교가 역사적으로 개척해온 일들이 너무나 숭고하고 위난이 닥칠 때마다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힘이 미약했더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도전하고 응전하였겠습니까? 절대적 우위는 아닐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혁명을 시작하고 운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이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바로잡고 새로운 질서로 개벽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자본이나 권력에서 나옵니까? 저는 그 힘이 설령 권력이나 자본에서 나온다고 해도 그걸 부정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생각으로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모두 사람입니다. 우리의 힘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곧 한울의 힘으로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한울의 힘이란 영성의 힘을 말합니다. 영성을 확신하는 사람은 한울을 믿습니다. 영성의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영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지요. 저 노래하는 새도 예쁜 꽃을 피우는 풀꽃도 한울이긴 하지만 사람과 같은 영성을 지닌 건 아닙니다. 자연물을 한울로 보는 건 사람이 자연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한울님과 같이 대한다는 뜻이지 자연물 자체가 영성을 지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 마리 새의 우는 소리를 한울님의 목소리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 새를 한울님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성을 지닌 건 우리 사람뿐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힘이 곧 영성의 힘이므로, 사람이 많아지면 영성의 힘도 커지는 것입니다. 천도교인이면 모두가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만, 과거에 비해서 천도교의 교세가 약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두 걱정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쇠락한 교세를 크게 중흥시킬 수 있을까? 큰 교당을 짓고, 그 건물의 힘으로? 저는 웅장한 건물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교회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당을 짓는 것도 사람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정치의 힘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려 합니다만 그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결합하면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가장 위험한 환경이 되고 맙니다. 정치의 힘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것이 아니라, 교회의 힘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편안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지 돈이 먼저가 아닙니다. 돈을 모으려 하지 말고 사람을 모으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사람들에게 친화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친화적인 사람이란 남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기피하지 않으며 곁에 있으면 언제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남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친화적인 사람입니다. 남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주장을 일삼아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처지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평가하려 하지 말고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친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쉬운 일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 바로 사람 모으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 천도교의 관점에서 말씀드리자면, 먼저 자기 자신을 진실한 천도교인으로 만들어야만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실한 천도교인이란 너무 교리로 무장된 경직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천도교인은 투철함을 내세우기보다는 아름다움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도교 신앙인의 참 모습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경쾌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삶이 진정 아름다운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남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견본과 같은 삶입니다.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마치 신념에 죽고 사는 이 마냥 신념 타령을 해대면서 남에게 부담을 안겨준다면 상대방이 따라오겠습니까? 기회를 보다가 피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신념이란 주장하고 내세운다고 해서 견고해지는 것은 아니며, 상대방 또한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 마을에 태암이라는 어른이 계셨습니다. 이 어른은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든지 이분이 가는 데는 언제나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지게를 지고 일하러 가는 길이어도 아이들이 “할아버지 노래 불러주세요” 하고 채근하면 지게 작대기로 지겟다리를 두드리고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아리랑과 같은 민요를 주로 불러주었지만, 끝에 가서는 꼭 천덕송을 불러주었습니다. 주문을 노래처럼 부르시거나 우리의 길, 안심가, 도수사 등을 어찌나 흥겹게 부르시던지… , 6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어른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하여 춤추고 노래 부르시던 모습이 아름답게 남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합니다. 우리 스승님께서 실천하신 도와 덕은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우리 가까이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변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극히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스승님의 도와 덕을 진실로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해서 가까이 가려고 할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실성미 제도가 사라지면서 성미상납이 부담스러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지방에 가보면 교당에 사람이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의 원인은 연로한 어르신들에게는 지금의 성미금액이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연체되다 보면 연체된 성미 금액이 10만 단위를 넘게 되고 아무런 수입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 금액을 낼 수 없게 되어 미안해서 교당에도 못 나오는 실정에 있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성미의 부담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지금 어려운 사람들이 성미 부담 때문에 교당에 나오지 않는 것은 돈 때문에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근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한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 하나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돈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필요한 수단이고 동력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우리 삶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켜서 살아갑니다. 사람이 재화를 만들고 관리하니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천도교인들은 돈의 소중함을 알지만 사람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끼고 아껴서 성미를 내고 특성금을 냅니다. 좋은 곳에 쓰이고 천덕사업에 꼭 필요하다고 여기면 아낌없이 성금을 냅니다. 함께 돈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면 우리 교인들이 스스로 돈을 마련할 것입니다. 성미든 특성금이든 필요한 만큼 모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돈으로 숭고한 천덕사업을 할 수 있지요. 그 일을 잘하면 사람과 재화가 선순환 구조가 되어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우리 교당에 사람이 많이 모이면 포덕을 위한 돈이 모입니다. 사람이 모여야 덕을 펼 수 있습니다. 포덕은 사람을 대상으로 사람이 펼쳐 나가는 일입니다. 사람이 기피하고 사람이 부담스러워하는 천도교가 되어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세상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지금 코로나19의 심술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올해도 코로나 괴질은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코로나가 극악하더라도, 우리 스승님들이, 그리고 우리 교도들이 당했던 은도시대의 그 압제와 수난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승님과 선도들이 그 암울한 시대를 극복해 내었듯이 지금 우리 또한 이 괴질의 시대를 훌륭히 극복해 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조용함 속에서 포덕 교화의 사명을 달성하고 천도교 중흥의 시대를 열어나갈 것입니다. 코로나19 괴질은 바로 이 시대의 부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코로나19 괴질이 우리 인간의 생명성을 농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온갖 질병을 달고 살며, 더 무서운 괴질과 끊임없이 맞닥뜨리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보다 적극적이고 참여적으로 행동해야 할 일은, 우리 교단 내의 잡다한 일로 인하여 서로 갈등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생명성을 농단하는 괴질 내지는 질병과 맞서 싸우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도교를 위하는 일을 우선하되, 교인 간에 각자위심을 버리고 잘못된 일에는 자기를 먼저 책하고 좋은 일은 서로 권하는 교단의 풍토를 조성하는 일입니다. 사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실천하더라도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선제적으로 괴질에 대응하고 신앙으로 극복하려 하며,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쉽게 정화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 천도교인을 좋아해서 친화감이 쉽게 조성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대신사께서도 포덕문에서 「賢者聞之하고 其或不然이 吾將慨歎이나 世則無奈라(어진 사람도 이를 듣고 그것이 혹 그렇지 않다고 여기니 내 못내 개탄하거니와 세상은 어찌할 수 없는지라)」 라고 하여 세상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스승님께서 구도 수행을 하셨고 결국 목숨까지 바치신 것 아닙니까? 정말 스승님 말씀대로 세상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있고 천도교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을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영성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보지 않겠습니까? 너무 큰 꿈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나부터 내 가정부터 내 이웃부터 아름답게 만듦으로써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도의 힘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지면 사람들이 우리 도를 좋아해서 우리의 교당에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가득 찬 천도의 길을 함께 걸으며 그 힘으로 세상을 더욱 아름다운 천국으로 바꾸어 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포덕162년 1월 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