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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9일○ 1446년(세종 28년), 조선의 세종, 「훈민정음」을 반포하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였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서문은 백성을 향한 애민 정신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 한글은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10월 9일 한글날은 이러한 한글의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과 공로를 기리는 날이다. ○ 1835년, 프랑스의 작곡가 생상스 태어나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는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 음악가로, 「동물의 사육제」, 「삼손과 데릴라」, 「제3교향곡」(오르간 교향곡) 등으로 널리 알려졌다. 천재적 음악성과 뛰어난 지적 감수성으로 프랑스 음악의 품격을 한층 높인 인물로 평가된다. ○ 1947년, 한글학회, 『조선말 큰사전』 발간하다 일제강점기부터 오랜 세월 동안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한글학회가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헌신의 결실이었으며, 이는 한글 보급과 국어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 1967년,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처형당하다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된 지 하루 만에 총살당했다. 그는 제국주의에 맞선 혁명가의 상징으로, 사회 정의와 평등을 위해 싸운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 1983년,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 발생하다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저지른 폭탄 테러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던 한국 정부 관계자 17명이 희생되었다. 대통령은 행사 참석이 지연되어 목숨을 건졌으나, 이 사건은 한반도 긴장을 극도로 높인 국제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 1997년, 이탈리아 극작가 다리오 포,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다 이탈리아의 풍자극 작가 다리오 포(Dario Fo, 1926~2016)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권력과 부패, 사회적 불의에 대한 통렬한 풍자극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대표작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를 통해 억압적인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인간의 자유 정신을 그려냈다. ○ 2006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으로 확정되다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 반기문이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확정되었다. 그는 2007년 1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해 전 세계 평화와 인권 증진에 이바지하며 한국 외교의 위상을 높였다. -
천도교 경전이 궁금해요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1860년 동학을 창명한 이후 교도들에게 가르칠 자신의 종교적 교의를 담은 글을 지어요. 이 글들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어요. 첫째는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 등 동학의 본체를 밝힌, 한문으로 쓰인 글들이에요. 둘째는 「용담가」, 「교훈가」, 「안심가」, 「도수사」, 「권학가」, 「몽중노소문답가」, 「도덕가」, 「흥비가」 등 한글 가사체 작품과 단가 형태의 「검결」 등 교리를 노래로 표현한 것들이지요. 셋째는 한문으로 된 「시문」들과 「결」, 「주문」, 「팔절」, 「필법」, 「축문」, 「탄도유심급」, 「좌잠」 등 수행에 필요한 글들이에요. 이 글들이 쓰인 연대는 우선 1860년에 「검결」, 1860년 후반기 「용담가」, 「안심가」, 1861년 봄에 「포덕문」, 1861년 11월 「교훈가」, 1861년 12월 「도수사」, 「권학가」, 1861년 12월에서 1862년 2월 사이 「논학문」, 1862년 6월 「수덕문」, 「몽중노소문답가」, 1862년 11월 「필법」, 1863년 1월 「탄도유심급」, 1863년 4월 「좌잠」, 1863년 7월 「도덕가」, 1863년 8월 「흥비가」, 1863년 11월 「불연기연」, 「팔절」 등이에요. 「시문」들과 「결」 등은 이 사이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여요. 이와 같은 수운 대신사의 저술들은 후대에 해월 신사가 주도해서, 한문으로 된 글[文]과 한시들, 「결」, 「주문」 등을 합해 『동경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출간해요. ‘동경(東經)’은 ‘동학 경전’을 줄인 말이고 ‘대전(大全)’은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뜻이에요. 이때가 1880년(庚辰年)이고 펴낸 장소는 강원도 인제 갑둔리에 있는 제자 김현수의 집이에요. 또 가사 8편을 합해 수운 대신사가 도를 받은 ‘용담정’ 이름을 빌려 ‘용담 선생이 남긴 글’이라는 뜻의 『용담유사』를 1881년(辛巳年)에 충북 단양 샘골 제자 여규덕의 집에서 목판으로 출간한답니다. 하지만 「검결」은 수운 대신사가 대구 감영에서 국문(鞫問)을 당할 때 문제가 된 노래여서 처음에는 제외되었다가 후에 다시 『용담유사』에 편입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어요. 현재 해월 신사가 주도해서 최초로 간행한 경진판(庚辰版) 『동경대전』이나 신사판(辛巳版) 『용담유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어요.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계미판(癸未版, 1883년)과 계사판(癸巳版, 1893)이 전해지고 있지요. 이 같은 경전이 판본으로 정착한 과정에서, 해월 신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영기(靈氣)로 외워 구송(口誦)한 것을 제자가 받아썼다는 구송설(口誦說)과, 해월 신사가 관의 지목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늘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녔다는 것, 그리고 목판본 후기(後記) 등을 분석해 구송설이 아닌 원본설(原本說)이 제기되기도 해요. 천도교 교령을 역임한 윤석산 전 한양대 교수는 구송설과 원본설을 통합한 절충설을 제기하고 있지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모두 동학의 교의(敎義)와 사상을 전달하고 표현한 중요한 경전들임에도 그 표현 양상은 매우 달라요. 그에 담긴 세계관의 차이 때문이지요. 『동경대전』은 당시 지배 계층의 사상이었던 유교적인 인식과 방법이 문장 진술이나 전개, 표현에 많이 원용되었어요. 반면 『용담유사』에서는 당시 기층문화를 이룬 민간 사상, 즉 풍수지리나 도참설, 역(易)사상 등이 많이 원용되었지요. 수운 대신사는 『용담유사』에 민중의 꿈과 이상이 담긴 사상을 담고, 이를 통해 보다 쉽게 자신의 사상을 펴고 고취하려 했어요. 『동경대전』이 한문 문장을 통해 지식층에게 교의와 사상을 전달하고자 한 ‘의미 중심의 경전’이라면, 『용담유사』는 민중들의 꿈과 소망을 담아내며 이들을 감화시키고 한울님이라는 존재를 깨닫게 하는 경전이지요. 이처럼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서로 다른 언어와 형식으로 표현되었지만, 결국은 하나의 진리, 곧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깨달음으로 귀결돼요. 수운 대신사가 밝힌 진리는 지식인에게는 사유의 혁명이었고, 민중에게는 구원의 희망이었지요. 『동경대전』이 동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운 기둥이라면, 『용담유사』는 그 사상을 노래와 언어로 풀어 민중의 삶 속에 스며들게 한 강물이라 할 수 있답니다. 두 경전은 서로의 결을 이루며,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되는 길을 제시한 동학의 근본 정신을 오늘까지 이어오게 한 생명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참고한 자료: 윤석산 지음,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04. -
천도교와 3 · 1운동(22)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 성사에 의해 이루어졌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3.1운동의 정식명칭 3.1독립운동 90주년을 맞는 올해(2009년, 편집자)를 맞아 3.1운동의 이름이 제대로 되어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본교과서에 3.1운동을 폭동이라 기술하였다하여 그 시정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 요구를 받아들여 폭동이란 이름을 버리고 3.1독립운동이라 고쳤다. 그러나 우리 교과서에는 아직도 3.1운동이라 하면서 '독립' 두 글자를 넣지 않고 있다. 남들에게는 독립운동이라 부르라 해놓고 자기는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3.1운동은 우리 역사에 있어 무궁화 꽃이다. 3.1운동은 또 우리 민족사에 구심점으로서 그 어떤 다른 역사보다도 자랑스러운 거사로 믿고 있다. 우리 근대사에 3.1운동만큼 의미심장한 역사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역사에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않았다면 타고르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어떤 이는 3.1운동을 우리 역사의 여러 강줄기가 모여드는 커다란 호수라고 한다. 마치 백두산 천지 같은 깊은 물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의 결과 태어난 나라라고 명기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를 잘 읽어보면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모든 나라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 투쟁한 역사라 하겠다. 우리는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해 독립, 즉 자유를 외친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외친 것이다. 일본은 물론 중국 영국 미국 어떤 나라도 한국의 주권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는 날 세계평화는 깨지고 만다고 엄중히 선언한 것이다. 서울 종로 2가에는 3.1운동이 일어난 성지 탑골공원이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유적지는 사라지고 없다. 왜 서울시 당국은 길을 넓히고 빌딩을 짓는 데만 정신이 팔리고 동방의 등불을 밝히는 데는 관심이 없는가? 3.1운동 90주년을 맞이하면서 해가 갈수록 빛이 바래가고 있는 서울의 역사정신이 아쉽기만 하다. 3.1운동이 평양에서 1시간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3.1운동의 영광을 버리려하는가 잊지 말고 서서히 반성하라. 3. 맺는 말 3·1독립운동은 일제의 10년간의 가혹한 무단통치로 인한 압제와 경제적 착취는 물론 민족의 자존심마저 유린한 극한적인 상황에서 이천만 민족의 분노가 폭발한 일대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전국적인 강력한 조직망과 300만의 교인을 포용한 천도교가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청사에 빛나는 민족사를 창출하였다. 이 3·1독립운동은 시종일관 이 운동을 영도하신 의암손병희 선생이 중심에 계셨기에 가능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은 천도교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독립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의 역할은 이 운동을 결정짓는 절대적 계기가 되었다. 우선 운동의 3대 기본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일원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미 10년 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이 천도교요, 독립운동 자금의 공급처도 천도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비롯한 40여개소의 지방 교구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중요 교역자가 구속되고, 일백 수십만 원의 예금을 압수당하였다. 결국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포용력, 그리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대교당 건축을 추진한 것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위해 운동자금 지원을 결단한 것도,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해마다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유지해온 것도 의암손병희 선생의 결단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3·1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거나 심지어 천도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마저 있음을 보게 되면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생명과 재산을 바쳐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면서 깊이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연재를 마칩니다. 끝.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칼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그리스·로마신화 속에 나오는 아리아드네의 이야기이다. 강대국이었던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대단한 정복 군주였다. 그의 위세에 많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고개 숙여야 했다. 아테네 역시 굴복한 국가 중 하나였다. 미노스 왕의 아내는 매우 음탕한 여인이었다. 남편 몰래 바람을 피다가 어느 날 잘생긴 황소를 보고 반했다. 욕정을 참을 수 없는 그녀는 암소의 탈을 쓰고 그 황소와 만났다. 신화 속 이야기이니까 상상하고 들어 보자. 왕비가 임신을 하자 미노스는 매우 기뻐했지만 10달 뒤 태어난 아기는 몸은 사람인데 얼굴은 황소의 모습이었다. 충격을 받은 왕은 왕자를 ‘미노타우로스’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숨겨서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성한 왕자 주변의 신하들이 한 명씩 사라져 갔다. 살펴보니 왕자가 식인의 습성이 있어서 신하들을 잡아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괴물을 키우고 있는 왕은 왕자를 깊숙한 미궁 속에 가두어 두기로 결정했다. 뛰어난 장인인 다이달로스가 동원되어 들어갈 수는 있지만 아무도 빠져나올 수는 없는 미로의 궁을 만들게 했다. 미궁이 완성되고 왕은 미노타우로스를 그 안에 넣고는 약소국가인 아테네에 해마다 선남선녀 7명씩을 바치게 해 아들의 먹이가 되도록 했다. 아테네는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인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아테네의 왕자인 테세우스는 분개해 평민 복장을 하고 7명의 남자 속에 숨어 들었다. 크레타에 도착한 인간 먹이들 속의 테세우스를 발견한 아리아드네 공주는 한눈에 반했다. 그러나 내일이면 그는 괴물의 먹이가 되기 위해 미궁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밤새 고민에 빠진 공주는 다음 날 미궁으로 들어가는 테세우스에게 한 뭉치의 얇은 끈을 쥐여주었다. 만약에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이 끈을 되짚고 미궁을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밖에서 실타래를 풀어주고 있겠다고 했다. 신화는 용감한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실 끈을 되짚어 나옴으로써 미궁을 탈출한다는 이야기이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오늘도 나는 주변에 수없이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살고 있다. 특별히 나를 이끌어 주는 천도교의 진리는 그 깊은 맛을 알면 알수록 감사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 도의 진리에 대한 해석과 설명의 차이 때문이다. 경전 해석에서부터 주문 수련법까지, 저마다 자신의 해법과 해석만이 진리라 하고 이런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설명에는 귀를 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천도교 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진정한 진리의 깨달음을 인도해 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아닐까? 필자는 50대의 왕성할 때 6년간을 천도교종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재직하는 동안에 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부끄럽게도 2년 과정의 커리큘럼 하나 완비한 것 말고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어느덧 60대가 되어 다시 종학대학원에 돌아와 보니 그나마 행했던 나의 보잘것없는 성과에 더욱 고개 숙이게 된다.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지금껏 교단 밖의 학문의 세계에서만 보내왔던 삶이 여전히 부족하고 특별히 천도의 진리 앞에는 무지한 모습에 초라해지기까지 하다. 그래도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교단에 작은 기여라도 한다면 교육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변함없이 교계에는 여전히 완강한 난법들이 난무하고 고답적인 논리들이 무성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이 올바른지 그릇된 것인지에 대한 평가는 고사하고 그저 앞세우기 일쑤인 모습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어쩌다 우리 도는 이토록 깨달음을 얻은 선생님들이 많은 것인가. 진정한 선생님이라면 더욱더 겸손하게 고개 숙이고 차분히 동덕들을 대할 텐데. 분명한 사실은 우리 도는 교육의 역할이 부족했고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단의 유일한 교육기관이 천도교종학대학원에서 일익을 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더욱 어깨가 무거워지고 있다. 마침 준암 박인준 교령 체제하에서 천도교종학대학원은 실질적이고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명실상부한 교육의 중심 역할을 하기로 했다. 이를 이끌 혁암 김혁태 원장은 새로운 개혁 방안을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교단의 진리를 제대로 전수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년부터 원·주직 등 교역자들을 위한 특별 전문가 과정이 신설된다. 교역자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 도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어야 하거늘 아쉽게도 그동안 등한시해 왔던 점을 고려할 때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실시할 수 있게 되다니 천만다행이다. 이를 위한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 역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상태이기에 본격적인 미로를 벗어날 수 있는 실타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교역자들을 전문 교역자 교육과 함께 기존의 일반 교인 또는 시민들을 상대로 해 오던 교육 과정도 그대로 진행된다. 이전부터 실시되었던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해서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전문 교역자 과정이나 일반 과정 모두 교단의 지원으로 진행되므로 한동안 유지되었던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사라지고 전액 무료 교육으로 실시된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함으로써 영웅으로 등장해 헤라클레스에 버금가는 모험과 영웅담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가 미로 속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였다고 해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없었다면 그는 미궁에 갇혀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고 영웅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 역시 미궁을 벗어가 위해서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필요하다. 진리 앞에는 누구도 오만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비록 나의 수준이 높고 오랜 수련 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겸허하게 교육의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대신사님께서는 영남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결코 자신을 과시하거나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경신년 4월 5일 무극대도를 받으셨지만 내세우지 않고 다시 정진하기를 1년 2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들 누구도 대신사님보다 뛰어나지 않음을 알기에 공부와 수련을 하루도 거스를 수는 없다. 천도교종학대학원이 모든 천도교인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되기를 바란다. 년암 임형진 경희대 교수 천도교종학대학원 부원장 -
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8일○ 1856년, 애로호 사건이 발생하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의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중국 광저우(廣州)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영국 상선 애로호(Arrow)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와 중국인 선원 13명을 체포하고, 영국 국기를 바다에 던졌다는 이유로, 영국이 청나라에 배상금과 사과문을 요구한 사건이다. 청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영국은 전쟁을 선언했으며, 덩달아 프랑스가 자국 선교사 피살 등을 이유로 이에 동참하면서 청나라는 두 강대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서구 열강의 무력 개입으로 청나라는 다시 한번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며,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더욱 촉진되었다. ○ 1895년, 명성황후,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다 고종의 비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비였던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잔혹하게 시해되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내정 간섭과 침략에 맞서 러시아 등 서구 열강과 손을 잡으려 했고, 일본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군인 출신인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이 사건을 기도하였다.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사건 관련자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석방했다. 이 사건은 조선이 외세에 의해 무력하게 유린당한 상징적 사건으로, 국가의 자주권과 국민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 1906년, 기계를 이용한 파마가 시작되다 독일의 미용사 카를 네슬러(Karl Nessler)가 세계 최초로 전기식 기계 파마기를 발명해 런던에서 시연하였다. 그는 무려 10년의 연구 끝에 머리카락을 가열한 롤에 감고 화학 용액을 발라 파마를 완성했으며, 이후 ‘네슬러 파마’로 불리며 전 세계 미용 산업의 혁신을 이끌었다. ○ 1911년, 중국의 혁명가 쑨원, 제2차 봉기를 일으키다 광저우에서 일어난 쑨원의 제2차 봉기는 청 왕조 타도를 위한 혁명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계기로 각지의 혁명 세력이 결집하였고, 그해 10월 10일 우창((武昌, 지금의 우한) 봉기로 이어져 신해혁명의 불길을 본격적으로 일으켰다. 중국 공산당과 타이완 국민당 사이에 이루어진 ‘3차 국공회담’을 이끈 주인공이기도 한 쑨원은 중국과 타이완의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중국 정치지도자의 아버지’로 불린다. ○ 1997년, 북한, 김정일을 노동당 총비서로 공식 추대하다 김일성 사망 이후 3년간의 권력 공백기를 거쳐 김정일이 노동당 총비서로 공식 추대되었다. 이는 ‘김일성 유훈 통치’를 내세운 김정일 체제의 완전한 출범을 의미했다. 이후 그는 국방위원장직을 겸임하며 군 중심의 ‘선군정치’를 강화해 나갔다. -
[부고] 서울교구 권호성 동덕 모친 차정희 여사 환원서울교구 권호성 동덕의 모친 차정희 여사가 환원하였다. 유족으로는 아들 권문성, 권호성, 며느리 김학순, 손 권희주, 권현준 씨가 있다. 빈소는 노원을지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10월 9일(목),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이다. 현 수원시립공연단 예술감독인 권호성 동덕은 포덕 165(2024)년 10월 26~27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막을 올린 창작 뮤지컬 <용담 가는 길>의 각본과 연출을 맡아 성공적인 공연을 이끈 것은 물론 교단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 사업을 주도한 바 있다. 또 권문성 동덕은 청년 시절 천도교대학생단과 서울교구 청년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교단의 여러 동덕들은 고인의 성령출세를 심고하며 유가족께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하고 있다. 부고 안내는 아래와 같다. https://wooribugo.com/funeral/view?urlsincode=eyJpZHgiOiIyNzUyNDciLCJuZ3QiOjEsIm5hYyI6IiIsIm1uX2lkeCI6IjIyNjIzNzEiLCJnX3BoIjoiIn0= -
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7일○ 1571년, 신성동맹 함대, 레판토 해전에서 투르크 함대를 격파하다 스페인과 베네치아, 교황청이 주축이 된 신성동맹 함대가 그리스 서부 해안의 레판토만에서 오스만투르크 함대를 무찔렀다. 이 전투는 지중해 제해권을 둘러싼 유럽과 오스만 간의 세기적 격돌로, 서구 기독교 세계가 투르크 세력의 팽창을 저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돈키호테』의 저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도 이 해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789년, 정조,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이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성으로 옮겼다. 이후 그곳에 새로 조성된 현릉원은 오늘날 융릉으로 불린다. 정조는 이장을 계기로 수원 화성을 축성하고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는 효심의 정치, 개혁의 정치로 평가받는 정조 통치의 상징적 사건으로 남았다. ○ 1913년, 미국 포드 자동차, 컨베이어 시스템 전면 도입 헨리 포드가 이끄는 포드 자동차 회사는 이날 조립라인에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생산 방식을 혁신했다. 이 시스템은 부품을 이동식 벨트로 옮기며 조립하는 방식으로, 자동차 생산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대량생산과 가격 인하가 가능해지면서 자동차는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닌 대중의 이동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1949년,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서방 3국의 지원으로 서독이 수립되자, 이에 대응해 소련은 동부 점령 지역에 사회주의 국가인 독일민주공화국(GDR)을 수립하였다. 초대 국가원수는 빌헬름 피크(Friedrich Wilhelm Reinhold Pick, 1876~1960)였다. 이후 독일은 냉전의 상징으로 동서로 갈라져 약 40년 동안 분단의 시대를 겪게 된다. ○ 1979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파리에서 실종되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1925~1979)은 1969년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실각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정권의 비자금 폭로 등으로 주목받던 그는 이날 프랑스 파리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정치적 배후가 얽힌 의문사로 남아 있으며,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기록된다. -
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6일○ 1927년, 세계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 상영 미국 뉴욕에서 세계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The Jazz Singer)」가 상영되었다. 기존의 무성영화에 음성을 입힌 이 작품은 주인공 알 졸슨(Al Jolson)의 대사 “레이디스 앤 젠틀맨!”으로 영화사의 새 장을 열었다. 이후 유성영화 시대가 본격화되며 영화 예술은 전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 1946년, 『경향신문』 창간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언론의 자유를 표방하며 『경향신문』이 창간되었다. 당시 천주교 서울교구가 모태가 되어 설립된 『경향신문』은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를 사시로 내걸고 사회 정의와 인권 보도에 앞장서왔다. 이후 군사정권 시절 폐간과 복간을 거치며 한국 언론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 1973년, 이스라엘-아랍 간 제4차 중동 전쟁 시작 이날, 이집트와 시리아가 중심이 된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며 제4차 중동 전쟁, 즉 욤키푸르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의 주요 명절인 ‘욤키푸르(Yom Kippur, 대속죄일)’에 맞춰 전격적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중동 지역의 군사·정치 구도를 뒤흔들었고, 이후 석유 금수 조치로 인한 세계적 ‘오일 쇼크’로 이어졌다. ○ 1976년, 중국 문화대혁명 주동자 사인방 체포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을 주도했던 이른바 ‘사인방(四人幇)’, 즉 장칭(江靑, 마오쩌둥의 부인), 장춘차오, 요원위안, 왕훙원을 체포했다. 이 사건은 마오쩌둥 사망 직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문화대혁명의 종식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덩샤오핑 체제가 들어서면서 중국은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섰다. ○ 1981년,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피살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 중,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 대통령이 이슬람 급진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다트는 1978년 이스라엘과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하여 중동 평화의 전기를 마련했으나, 이를 ‘배신’으로 여긴 세력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그의 죽음은 중동 평화 프로세스의 큰 변곡점으로 남았다. -
포덕 166년 9월 28일 중앙대교당 시일설교 "실천하는 천도교인이 되자"혜원당 김춘성 선도사, “밥 한 그릇의 이치 속에 깃든 진리를 보라” 혜원당 김춘성 선도사는 지난 9월 28일 시일식 설교에서 ‘실천하는 천도교인’의 자세를 주제로 깊이 있는 설교를 전했다. 이번 설교는 신앙 지식의 축적을 넘어, 한울님을 생활 속에서 모시고 매 순간 감응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김춘성 선도사는 “한울님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밥 한 그릇을 먹는 그 이치 속에서도 한울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고 전하며, 일상 속 모든 만사에 깃든 진리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천도교인의 참된 길임을 설파했다. 또한 젊은 세대와의 소통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현대적 언어로 진리를 풀어내고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인이 될 것을 당부했다. 이어 “지식으로만 머무는 신앙은 오래가지 못한다. 삶 속에서 체험하고, 서로 감응하며 변화시킬 때 비로소 천도교의 길이 세상 속으로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설교는 지식과 삶이 하나 되는 실천의 신앙, 그리고 각자의 삶과 공동체를 천국으로 만들어가는 영적 지혜를 일깨워 주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
견제와 균형을 넘어, 소통과 협력으로 교단의 신뢰를 세울 터지난 8월, 중앙총부 감사원장대행(이하 대행)을 맡게 된 박돈서 선도사는 45년의 교회 경력과 오랜 교구장 경력, 40년의 교육공무원 경력을 지닌 지도자다. 그럼에도 박 대행이 느끼는 취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맡게 된 중책”이라며 깊은 책임감을 토로했지만, 동시에 “주어진 천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박돈서 대행에게 가장 먼저 취임 소감을 물었다. “수운 대신사님이 4월을 ‘불의(不意)의 달’이라 하셨는데, 제게는 이번이 ‘불의(不意) 8월’이었습니다. 도력이 부족한 제가 중책을 맡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하지만 한울님께서 정하신 직임이라 여기며 받아들입니다. ‘중정대도(中正大道)’를 가슴에 새기고, 공암(公菴)이라는 제 도호처럼 공정하게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짧지 않은 교회 생활 동안 여러 직책을 경험했지만 이번만큼은 각오가 남다르다고 했다. “앞으로 교단 발전의 길이 무엇인지, 한울님께 가르침을 구하며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처리해 나가겠다”는 다짐 속에서 무거운 책임감과 동시에 차분한 평정심이 읽혔다. 균형과 신뢰, 디지털 전환이라는 과제 감사원의 존재 이유를 묻자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사원은 단순히 감찰 기구가 아닙니다. 교단의 신뢰를 세우는 핵심 기관입니다. 회계 감사와 규율 집행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넘어, 예방 감사와 컨설팅 감사로 교단 발전을 뒷받침해야 합니다. 징계 문제에서는 공정하게 처결하여 신망을 얻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이어 ‘견제와 균형’의 기능을 강조하며 구체적 구상을 밝혔다. “중요 문서는 시행 전에 공람하도록 규정돼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전 검토가 가능하고, 정기 감사에서는 철저한 준비로 실효성 있는 감사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균형이 핵심입니다. 종무원, 종의원, 감사원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해야 비로소 균형이 이뤄집니다. 감사원은 그 과정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국가의 삼권분립을 비유로 든 설명도 덧붙였다. “입법, 행정, 사법이 분립해 균형을 이루듯, 교단에서도 각 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견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소통과 협력이 함께할 때 진정한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감사 활동에서 체감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전산화의 미비였다. 40여 년간 교회 현장을 지켜본 박 대행은 사회 경험에서도 차이를 느꼈다고 한다. “교육공무원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공무원 세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산화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단은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행정 체계를 갖춰야 모든 일이 투명해지고, 감사도 제대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최근 도입된 ‘이카운트’ 시스템에 대해서는 긍정과 아쉬움을 동시에 전했다. “아직은 중앙총부 직원 간에도 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교구와는 연결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교무관장님이 비전을 가지고 추진하는 만큼 점차 개선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입니다.” 동료 감사들과의 협력, 신앙에서 얻는 활력 앞으로 함께할 동료 감사들과의 협력 분위기를 묻자,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중앙감사 구성은 해월 신사님의 육임제 조직을 떠올리게 합니다. 연령대도 5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고, 회계, 규정, 총부 경험 등 각자의 전문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 정기 감사에서도 서로의 특성을 이해하며 좋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취임 과정에서 나눈 결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우리는 오로지 용담연원만을 앞세우고, 각 포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교단 발전을 향해 나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이미 협력의 토대는 마련됐다고 생각합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 어떻게 힘을 얻는지 묻자, 대답은 주저 없이 ‘수행’이었다. “저는 수행을 통해 활력을 얻습니다. 천도교인은 문제 해결을 천도교식으로 해야 합니다. 수심정기를 통해 한울님께 답을 구하는 것이지요.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맑게 하면 천명이 드러납니다. 결국 마음 공부가 핵심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의 뿌리 또한 주문 공부였다. “제가 천도교에 발을 들인 것도 수행 때문이었습니다. 꾸준한 주문 공부와 수심정기를 통해 문제의 답을 찾고, 천명에 맡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단 구성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부탁하자,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각각 당부의 말을 남겼다. “교역자들께서는 교헌과 규정에 따라 맡은 임무에 충실해 주시길 바랍니다. 의암 성사님의 ‘기관도통설’처럼 상호 존중과 협력 속에서 시너지를 내야 합니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각 기관이 소통하며 유기적으로 협조해 교단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어 교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오관 실행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기본입니다. 교단을 신뢰하고 교령님 중심으로 화합하며 작은 힘이라도 보태 주신다면, 우리 모두가 동귀일체가 되어 교단 중흥의 염원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박돈서 대행이 다시 한번 강조한 단어는 ‘천명’이었다. “부지어천명(付之於天命), 모든 것을 천명에 맡긴다는 말이지요. 감사원장대행으로서의 직임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공암의 뜻처럼 공정하게 처리해 나가겠습니다.” 뜻밖의 시기에 맡게 된 중책이지만, 박 대행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이 없었다. 한울님께서 내린 직임을 받아들이고, 신뢰받는 감사원을 세우겠다는 다짐은 인터뷰 내내 일관되게 이어졌다. 천명에 맡긴 길 위에서, 박돈서 대행은 이미 감사원의 새로운 방향을 그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