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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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5년 1월 21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티끌 속에서 천심으로(선도사 정암 박정연) -
포덕 165년 1월 14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지극함과 간절함이 실상을 낳는다(선구교구장 송암 박철) -
포덕 165년 1월 7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행복한 삶(혜원당 김춘성) -
포덕 164년 12월 31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한 나무에 꽃이 피면 온 세상이 봄이로다(인화당 이미애) -
포덕 164년 12월 17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신앙일기를 쓰자(원암 김창석) -
포덕 164년 12월 10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한울님의 실체(수인당 손윤자) -
포덕 164년 11월 26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신앙통일과 규모일치에 정성을 다합시다(수암 김산) -
윤석산 신임 천도교 교령 취임식 개최오는 5월 26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윤석산 신임 천도교 교령의 취임식이 개최된다. 취임식은 이날 오전 12시에 시작될 예정이다.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석산 신임 교령은 한양대 명예교수이며, 사회경력으로 한양대학교 국제문화대학 학장, 한양대학교도서관장, (사)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을 역임 하셨으며, 천도교회 경력으로는 천도교 서울교구장, 천도교 교수회 회장, 천도교연구소 소장,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천도교중앙총부 현기사 상주선도사, 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장을 하는 등 교단 안팎의 소임을 두루 역임했다. -
[칼럼] 이제는 갖추어야 할 천도교 박물관지난 겨울에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일본과 동남아 등지는 몇 차례 다녀왔지만 유럽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동해의 해돋이를 보면서 지내던 일상에서 벗어나 포르투갈의 ‘카보 다 로카(Cabo da Roca)’에서 대서양의 노을을 보며 느꼈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기 위해 몸을 실었던 범선도 보았고, 그 유명하다던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도 눈에 담고 왔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유럽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나라와 도시의 상징이었다. 유럽은 로마 시대 이후 가톨릭의 지배가 이어졌기 때문에 방문한 도시의 중심부에는 사람을 압도할 위용을 자랑하는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비야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 등 유럽을 대표하는 스페인의 성당은 유럽을 가히 ‘신국(神國)’이라고 불릴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밖에도 대항해 시대를 열어 유럽의 변방이었던 포르투갈을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이끌었던 리스본의 ‘발견기념비’ 등의 상징물들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레알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과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Thyssen Bornemisza)’이었다. 스페인의 국립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은 15세기 이후 스페인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 작품이 전시하는 유럽의 대표적인 미술관의 하나로 스페인의 3대 화가인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와 피가소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 3천 점 이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는 독일 귀족 티센 가문이 수집한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작품 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이 위에 언급한 스페인 작가 중심이라면, 티센 미술관은 마네, 모네 등 유럽 전역 작가의 작품과 현대 작가의 작품까지 볼 수 있었다. 두 미술관에서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도 여럿 만났다. 다음에는 넉넉한 기간 동안 마드리드의 미술관만을 보기 위해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시와 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 까다로운 입장 절차에도 끊임없이 입장하는 관람객의 모습을 보면서 유럽 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천도교로 눈을 돌려보면 어떠한가? 세상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천도교의 상징은 있는가? 경주의 용담정이 동학의 창도지로서 상징적인 장소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용담을 찾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천도교를 각인할만한 매력적인 상징을 마주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서울의 중앙대교당과 봉황각도 천도교의 상징적 기념물이지만 용담과 마찬가지로 미흡한 부분이 있다. 이들 장소가 상징으로서 미흡한 이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학의 창도부터 현대의 천도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와 기념물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 박물관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온전한 박물관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천도교가 후천 오만 년을 이끌어갈 진리라고 이야기한들 귀를 기울여줄 사람은 없다. 천도교단이 세상 사람들에게 후천의 새 진리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한탄하지만 말고 세상 사람들에게 천도교가 후천의 진리라고 알려줄 수 있는 상징과 해설이 필요한 이유이다. 용담정 아래 들어선 동학기념관 전시물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소리치지 말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전시된 영부가 동학 교단의 그것이 아니라고 떠들지만 말고, 제대로 된 박물관을 만들어 천도교의 역사와 전통을 잘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단의 박물관에서 동학의 역사와 유물을 분명히 알리면 다른 곳에서는 이를 보고 천도교를 제대로 알리게 되는 것이다. 박물관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시기가 늦은 감이 있다. 올해는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이다. 대신사 탄신 100주년에는 ‘출세백년기념관’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제공했다. 탄신 150주년을 맞아서는 용담정을 성역화했다. 올해 탄신 200주년을 맞아 천도교단은 행사를 위한 행사보다 내실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천도교 신앙을 회복하고, 대신사의 사적지를 정리하고, 경전의 해석을 현대화해 미래 세대에게 천도교를 알릴 수 있는 등이 요구된다. 그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이 정리된 천도교의 역사와 문화를 세상에 알려주는 박물관의 설립이다. 글.덕암 성강현(흥신포 직접도훈,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
손병희 성사 순도·순국 102주기 묘소 참례식 봉행천도교중앙총부는 5월 19일(일) 오전 11시 서울 우이동 봉황각 의암성사 묘소에서 의암 손병희 성사 순도·순국 102주기 묘소 참례식을 봉행하였다. 참례식은 이미애 교화관장의 집례로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 병송, 헌화, 심고(폐식) 순으로 진행되었다. 헌화는 윤석산 천도교 교령, 사단법인 33인 유족회 정유헌 회장, 나영의 고문 등 임원, 김성환 천도교 연원회의장, 진강현 서울북부 보훈지청장, 윤은석 강북구청 복지국장, 김재옥 수원상공회의소 회장 등 내빈, 천도교 기관 단체장, 이범창 천도교 종무원장 순으로 하였다. 식후 윤석산 천도교 교령은 “의암 손병희 성사는 천도교의 창시자인 최제우 대신사의 창도 목적인 보국안민을 실천하시다 순도하신 것이다. 성사께서 주도하신 3·1독립운동은 바로 보국안민의 실천이었다. 그러므로 의암성사께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순국이면서 천도교의 이념을 실천하시다 순도하신 것이 맞다. 오늘날 천도교의 사정이 어려워졌지만 의암 성사를 본받아 용시용활(用時用活)을 하면 잘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통암 서종환 의창수도원장이 의암성사 약력과 봉황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였다. 이날 윤석렬 대통령,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순희 강북구청장, 황정희 강북문화원장, 정유헌 (사)민족대표33인유족회 회장, 김재옥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이 화환을 보내왔다. 의암성사는 포덕 2년(1861) 4월 8일 청주에서 태어나 포덕 23년에 입도하였다. 성사는 해월신사의 명을 받아 교조 신원운동을 전개했고 광화문복합상소(1893)에도 참여했다. 동학혁명(1894) 때에는 북접 통령으로 이인전투, 우금티전투, 태인 성황산전투, 보은전투 등을 치루며 척왜 구국전선에 나섰다. 이후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았으며, 포덕 42년(1901)국제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체류 중 박인호·홍병기를 불러 민회를 설립케 지시하고 갑진개혁운동을 주도하였다. 포덕 46년(1905) 12월 1일 신문광고를 통해 “교당을 자유롭게 짓겠다(종교집회를 자유롭게 하겠다).”라고 천하에 크게 밝히고 이듬해 9월 일본 어용단체 일진회에 합류되어 친일행위를 하는 이용구 등 59명을 출교처분하여 친일행위자와 천도교를 엄격히 분리하였다. 포덕 53년(1912) 서울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여 3년 동안 483명의 교역자를 독공수련을 통해 독립운동 지도자로 양성하여 포덕 60년(1919)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성사는 3·1독립운동 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포덕 61년(1920) 10월 22일 병보석 되었으나 회복하시지 못하고 병상에 계시다가 포덕 63년(1922) 5월 19일 환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