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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국 청년 35명, 전 세계에 대한민국 바로 알린다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이하 문체부)는 8월 13일(화) 오후 2시, 코시스센터(한국프레스센터 10층)에서 ‘제17기 대한민국 바로알림단(이하 바로알림단)’ 발대식을 개최한다. ‘바로알림단’은 국내외 청년들이 해외 언론매체, 누리집 등 해외에서 유통되는 한국 관련 정보에서 오류를 찾아내고 바로 잡으며 전 세계에 한국을 바로 알리는 홍보단(서포터스)이다. 2013년 제1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이해와 함께 수준 높은 외국어 실력을 갖춘 국내외 청년 총 635명이 단원으로 활동해 왔다. 제16기 단원, 한국 관련 정보 오류 총 242건 발굴해 신고 올해부터는 인력을 확대해 연간 2회 단원을 선발함에 따라 지난 3월에 제16기 단원을 선발한 바 있다. 제16기 단원들은 태권도와 일본의 무술인 가라테의 혼동,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는 설명 등 해외에서 발생한 한국 관련 정보 오류 총 242건을 발굴해 신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 인도네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문체부가 운영하는 한국바로알림서비스(www.factsaboutkorea.go.kr)*를 알리고 한지·한옥 등 한국문화에 대한 전문 교육을 통해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한국을 홍보했다. * 내외국인이 한국 관련 오류를 신고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 이력도, 거주지도 다양한 9개국 청년 35명, 해외 한국 관련 정보 조사해 올바른 정보 확산 주도 올해 12월까지 활동하는 제17기 단원으로는 미국, 스페인, 프랑스, 인도네시아 등 9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외국인 총 35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교환학생, 한국어 강사, 통·번역가 등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 경험과 수준 높은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 세계 각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올해는 ‘위키피디아’ 등 세계적인 온라인 사전 등에서의 올바른 정보 확산에 주안점을 두고 한국에 대한 해외 인식과 시각, 기술된 정보의 정확성과 보완점 등을 조사해 한국과 관련된 다양하고 올바른 정보를 알리는 데 참여한다. ▴제17기 신규 단원 나이지리아 국적의 무이잿(Muizat Ayoola Abioye, 18세) 씨는 “한국의 문화와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써 진취적인 한국문화 홍보대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제16기에 이어 제17기 단원으로 선발된 한국 국적의 시지원(20세) 씨는 “바로알림단이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내는 의미 있는 역할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책임감을 갖고 활동에 임하겠다.”라고 말했다. 바로알림단 단장을 맡은 문체부 최보근 국제문화홍보정책실장은 ????지난 12년간 바로알림단 단원 635명이 한국에 대한 잘못된 정보 1만 1천여 건을 찾아내는 성과를 냈다.”라며 “문체부는 한국을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리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바로알림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라고 밝혔다. -
부산 동학의 힘, 힘차게 달려온 1년창립 1주년을 맞이한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의 허채봉 대표를 만났다. 허채봉 대표는 오랫동안 동학을 기반으로 활동해 왔으며, 동학을 주제로 학위과정을 마친 연구자이기도 하다. 열정적인 활동을 이어온 허채봉 대표에게 이 시대 동학, 천도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동학의 가르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허채봉 대표를 만나보자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 창립1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기념사업회를 어떻게 창립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2022년 2월에 동학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이 2023년 1월에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아카이브에 등재되면서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그때 우리 천도교단 활동과는 조금 결이 다른 동학을 주제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2021년부터 동학 서훈 운동을 했던 분들, 동학혁명 유족회, 그리고 전국의 기념사업회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제가 활동하는 부산에도 동학 기념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작년 6월이었고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을 한 이후 7월 8일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한 것입니다. 그 흐름에 이어 전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전국 워크샵이 열리기도 했고요.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뤄졌습니다. 첫 번째로 연구자로서 논문을 쓴 게 계기가 됐을 거고 동학 신진연구자 워크숍에서 다양한 분들을 가면서 활동의 폭이 넓어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 과정들에는 굉장히 깊은 고민과 또 오랜 성찰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동학을 하기 전에, 오랫동안 택견이라는 무예를 했어요. 택견은 우리 민족 무예로서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76호로 지정돼 있고, 2015년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세계 인류 무형의 유산이면서 수련종목인 택견을 하면서 새롭게 현대의 스포츠로 계승하는 일을 해왔고, 그런 과정들을 한 30년 정도 하다보니 동학을 알게 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내가 무엇을 할 건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모색해왔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동학의 역사를 찾고, 알아가는 과정이 삶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동학을 접하게 된 최초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천도교에 입교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2016년도 가을에 녹색당 농업특별위원회의 농업 먹거리 활동을 했는데 흔히 우리가 ‘녹색농부’라고 말해요. 이분들 중 저력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어느 날 녹색 농부 중 한 선생님께 여쭸어요. 혹시 종교가 있으시냐고요. 그냥 묻고 싶었어요. 그분 종교가 ‘천도교라’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어요. 천도교가 뭔가요? 천리교인가요? 천리교는 일본 종교잖아요. 그게 아니래요. ‘동학’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동학이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랬더니 맞대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동학농민혁명이 종교란 말이에요? 그렇게 또 물었어요. 그게 종교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거예요. 나는 민족무예 택견의 지도자로서 몇십 년을 살았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종교였다는 것을 몰랐어요. 뒤통수를 딱 맞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동학농민혁명이 그 순간에 있었던 이벤트나 사건이 아니었고 계속 어떤 흐름 속에서 일어난 건가, 그러면 왜 나는 그런 걸 몰랐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한 며칠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며칠 고민을 하다가 천도교중앙총부에 전화를 했어요. 입교 같은 걸 할 수 있냐고요. 전교인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지도 물었어요. 나는 천도교 안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전교인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선생님한테 가서 그랬어요. 천도교에 입교를 하겠다고요. 선생님, 전교인이 되어 주세요. 이렇게 얘기를 했죠. 그때 목암 전희식 선생님이 책 <소농은 혁명이다> 북콘서트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천도교중앙대교당’이라는 곳을 가 봤지요. 그날이 2017년 포덕 158년 4월 9일이었는데, 4월 5일 천일기념일이 있던 주의 시일, 4월 9일이었습니다. 그날 입교를 하게 된 거예요. 그때 입교를 하신 거군요. 그럼 그 전에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전혀 모르셨나봐요. 와보시니 어떻던가요? 압도적인 어떤 기운이 느껴지시던가요? 첫 느낌이 예수상이나 십자가, 부처상과 같은 우상이 없고 궁을기가 보였어요. 대교당 건물이 굉장히 아름다웠고요. 제가 20대 때 길 건너 원서동에 살았거든요. 그런데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몰랐어요. 처음 대교당에서의 모든 느낌이 다 좋았어요. 청수봉전을 보며, 여성이 청수를 봉전해야 그 의식이 시작된다는 게 좀 신기했고 우상이 없는 것도, 성직자 없이 일반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시일을 모시는 것도 참 놀라웠어요. 고정관념을 깨는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고 신선했어요. 입교를 한 이후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 대교당에서 전희식 선생님의 북 콘서트를 보러 갔는데, 일주일 뒤에 전주에서 또 북콘서트를 하신다고 하더군요.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에서요. 그 말씀을 듣는데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너무너무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당시 임형진 종학대학원장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해부터 종학대학원 전주 분원과 부산 분원이 만들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부산 분원 개원소식을 기다렸고, 이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종학대학원 부산분원이 열렸습니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천도교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활동하시는 교인분들 한분 한분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고 사회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이 시대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가 창립 후 1년 동안 바쁜 걸음으로 달려오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부산은 알다시피 동학의 유적지가 없잖아요.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놓고 보니까 갈 데가 없더군요. 창립을 했는데 기념사업회에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창립하자마자 기념재단에서 동학농민혁명 편람을 보내왔어요. 전국에 있는 동학 유적지를 다 모아놓은 거였어요. 경상도권 전라도권 경기권 충청권 등 전국에 있는 권역별로 쭉 있는데 등급이 A, B, C, D 이렇게 나뉘어 있는데 부산에 딱 두 곳이 있는 거예요. 그것도 B급이더라고요. 1893년, 부산성에 “척왜양창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때는 천도교인이 부산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붙어 있었는지 참 신기하다 이런 식으로 소개가 되어 있고 출처는 없었어요. 그리고 또 두 번째는 일본군 토벌대가 주둔을 했던 곳인데, 그곳이 재단의 자료에서는 '40계단'이라고 나오더군요. 부산 중앙동의 40계단은 유명한 곳이에요. 그곳은 6. 25 동란 때 피란민들이 살던 곳이에요. 그렇게 토벌군들이 있었던 부산 이사청, 그리고 국립강제동원역사관에 있는 나인협 흉상을 세 번째 유적지로 해서 세 군데가 생긴 거예요. 그게 너무 극적으로 느껴졌어요. 기념재단에 감사했어요. 내 논문을 아카이브에 등재해준 것도 감사했지만 부산 지역에 동학유적지를 밝혀준 것이 반가웠거든요. 그래서 우리 대학원에 자랑도 했어요. 동학농민혁명재단 아카이브에 논문 등재됐다고요. 축하도 많이 받았죠. 재단에서 보내왔던 동학농민혁명 편람이 기념사업회에 큰 도움이 됐지요. 동학혁명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부산지역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자리를 잡아가고 계시는데,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이렇게 1년을 돌이켜보면 꽤 많은 일을 했어요. 저 혼자 한 게 아니고 도와준 분들이 참 많더군요. 감사한 일이죠. 그때그때 나타나서 함께해준 사람들이 반드시 있었어요. 마침 제가 올해 부산시 택견 단체 부회장의 마지막 임기거든요. 올해를 끝으로 활동의 방향을 동학으로 전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버릴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30년 넘게 택견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또 이렇게 쓰이게 될 테니까요. 기쁜 점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동학혁명 서훈 운동을 하면서 천도교를 알려 나가고 천도교의 뿌리가 결국 동학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천도교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 귀를 열고 듣기 시작했다는 거죠. 최근 전국 동학혁명 연대가 봉황각에서 취회를 했어요. 저녁 9시 기도식도 하고 주문 수련을 함께 하시더군요. 대교당에 가서 시일식도 같이 참여했고요. 이럴 때 천도교인들이 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산이 동학의 역사나 유적에 대해서는 불모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까 유적지는 유적지대로 갇혀서 과거의 기억 운동에만 집중해서 하는데, 저는 부산이 조금 더 역동성을 가질 수 있는 민주시민교육 운동과 함께 동학과 궤를 같이 하면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아서 보람이 큽니다. 기념사업회가 생기기를 기다려준 것만 같아요. 이렇게 동학에 대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계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택견을 하면서 어떤 소명이라는 거를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은 각자의 소명이 있는데 나의 소명은 이제 오래된 전통의 부활 그러니까 “Rebirth”, 재탄생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낡은 것의 가치를 새롭게 이끌어 내면서 오늘에 맞는 정서나 감성으로 새롭게 콘텐츠로 부활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게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택견을 할 때에도 시나리오를 쓰고 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동학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어요. 부산기념사업회 1년, 그렇게 딱 한 걸음을 걷는 동안 같이 걷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그만큼 기대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궁금합니다. 부산기념사업회를 만들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연구소입니다. 말하자면 부산동학기념사업회를 잘하기 위해서 동학연구소가 있어야 되겠고, 궁극적인 목표는 동학혁명 서훈 국민운동이나 전동연(전국동학연대)을 통해서 동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보를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전동연에서 함께 하고 있는 장흥 무명동학군 묘역 성역화나 이런 게 다 맞물려 있잖아요. 이러한 전 국민적인 움직임과 함께 동학이 국민적 필수 인문 과목으로 자리 잡는 것, 그게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운동이 되겠네요. 부산기념사업회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통해서 하는 건데 이제 그런 뜻을 펼쳐나가면서 전 세계 인류의 교양 과목이 되는 게 동학의 포덕 사업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천도교를 해서 참 행복한 사람이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를 할래, 천도교를 할래?" 하면 난 천도교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범신론자였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우주적인 어떤 질서 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알 뿐이었어요. 그런데 천도교의 경전을 접하면서 내 마음속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대로 글로 적혀 있어서 참 놀라웠어요. 경전에 모든 게 다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더 천도교에 대해 알고 싶고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고 싶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기념사업회 일을 하면서 펼쳐 나가고 싶습니다. -
[칼럼] 동학기행-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동학·천도교 제1성지 용담정 순례(2)(지난 호에 이어) 2. 용담정, 그리고 와룡암과 용담서사 용담정은 동학·천도교 제1성지라 일컫는 곳이기에 용담정의 유래에 대해 교중 기록과 표영삼, 한태원 선생의 기록을 중심으로 연혁을 살펴보겠다. 근암문집(수운 대신사 부친 최옥)에 의하면, 구미산은 경주의 높은 산으로서 큰 바위가 솟아있는 것이 마치 거북이와 용이 서려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근암공은 ‘구미산은 경치가 매우 좋아 일찍이 26경을 읊은 바 있는데, 구미산 밑에 있는 와룡담臥龍潭은 그중의 빼어난 모습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1778년 복령이란 승려가 와룡담臥龍潭 북쪽에 암자를 짓고 원적암圓寂庵이라 하였다. 그 후 스님들이 흩어져 암자가 폐지되었으므로 처사공處士公 종하宗夏(수운 대신사 조부)가 그 집과 전답 수백평을 사들여 이곳에서 자제분 근암공으로 하여금 학업을 닦게 하였다. 원적암은 근암공의 스승이신 기와畸窩 이상원李象遠 선생이 정자의 이름을 와룡암臥龍庵이라 새롭게 지었다. 그 후 30여년을 지난 후 집이 쇠퇴하여 허물어져, 근암공이 그 자리(와룡암)에 다섯 칸의 집을 새로 짓고, 또한 북쪽에 네 칸을 지어 용담서사龍潭書社라고 이름 하였다. 수운 대신사께서 득도 이전에 이사 왔을 당시 와룡암터 집은 허물어져 방치되었던 것을 가족과 생활하는 집으로 수리하여 기거하였다. 그런데 현재 용담정이라 부르는 건물 이름이 수운 대신사 당시 부른 이름인지 훗날 제자들에 의해 불렀는지 정확하지 않다. 용담정이란 이름의 유래를 추적해보면 다음과 같은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용담정龍潭亭이란 건물 이름은 수운 대신사께서 지은 교훈가 ‘···구미용담龜尾龍潭 일정각一亭閣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용담정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운 대신사는 득도 원년(1860, 경신) 4월 5일 11시경 와룡암터 또는 용담서사터 집에서 득도하였다. 그런데 용담서사 터가 현재의 용담정 자리인지, 와룡암 터가 현재의 용담정 자리인지 정확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수운 대신사의 득도 장소인 현재의 용담정이 용담서사龍潭書社자리인지, 와룡암臥龍庵자리인지 지금으로서는 구분하기는 어렵다. 교중 동학·천도교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표영삼 선생과 윤석산 교수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영삼 선생의 의견은 수운 대신사의 득도 장소가 현재의 용담정 자리 즉 용담서사 자리가 아니고, 와룡암 자리에 무게를 둔다. 그 이유는 수운 대신사께서 용담서사 즉 학문을 공부했던 건물이 아니라, 가족과 생활했던 건물 즉 와룡암터에 근암공이 새로 집을 지었던 것을 수운 대신사가 수리하여 살던 장소라는 것이다. 이는 용담유사 여러 곳에 득도 당시 가족이 지켜보았다는 대신사의 기록에서 근거를 찾는다. 윤석산 교수의 의견은 와룡암과 용담서사 두 곳 모두 인정하고 있다. 수운 대신사의 득도 과정이 한 순간 이뤄진 것이 아니고, 수일을 경과하면서 지속되었던 것을 참고하면 가족과 생활했던 와룡암터 집과, 학문을 연구하고 경전을 쓰셨던 용담서사터 집, 두 곳에서 득도하였다는 추정이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두 장소인 와룡암터와 용담서사터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수운 대신사의 득도 장소인 역사적인 건물은 1863 12월 10일 대신사께서 관군에게 피체되어 이듬해 1864년 3월 10일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이라는‘도를 그릇되게 하고 바름을 어지럽게 하는 법률’ 즉 반역죄反逆罪로 대구 장대에서 순도殉道한 뒤, 살림집 다섯 칸인 와룡암터 집과 용담서사터 네 칸의 집은 돌보는 이가 없어 모두 무너지고 몰락되어 그 곳은 황폐한 터가 되었다. 그 후 조선왕조의 동학에 대한 가혹한 탄압에 50여년을 지나는 동안 관의 지목이 두려워 그 누구도 득도 장소이자 성지인 건물복구에 착수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4월 황해도 천도교 교역자 오응선과 교인 이계화 등이 21일 특별 기도를 마친 뒤에 한울님의 감응을 받아 경주 용담성지를 찾았으나, 건물은 흔적조차 없고 잡초만이 무성하여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오응선씨는 용담정자 재건을 결심하고 이계화씨와 함께 다시 백오일 기도를 단행하고, 용담정자를 착공하여 1914년 10월 15일에 준공을 하고 용담정龍潭亭이란 현판을 붙였다. 오늘날 용담정이란 건물의 이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 40여년이 지내는 동안 용담정은 다시 무너지고 몰락되니 인적마저 끊기게 되었다. 현재의 용담정 복원은 천도교 부인회 주최, 천도교 창도 1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서, 양이제와 권태화 두 할머니가 나서서 천도교인들의 성금을 모아 다시 용담정을 중창하고 1960년 6월 30일에 많은 교인들과 함께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3. 와룡암터에 유적표지판 하나라도 세우자 천도교단에서 현재까지 수운 대신사 득도터인 와룡암 자리에는 복원건물은 고사하고 아무런 유적표지판도 세우지 않고 있다. 그 연유는 현재 용담정 건물과 대비되어 득도 장소에 대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 역사이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고자 역사를 바르게 전하지 않는다면 천사天師님을 어찌 대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수운 대신사님의 제자로서 부끄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가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동학농민혁명130년이다. 천도교단은 중지를 모아 와룡암 터에 유적표지판을 세울 것을 논의해야 된다. 와룡암터는 와룡암터대로, 현재의 용담정은 용담정대로 그 역사와 가치가 있다. 지난 와룡암 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무슨 유적표지판이냐고 반대의 의견들도 많을 것이다. 더 나아가 현재의 용담정 자리가 지난 원적암과 와룡암 자리였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 용담정 연혁을 역사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현재의 용담정 자리는 지난 용담서사 자리였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용담서사 자리가 지난 원적암과 와룡암 자리였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담서사 자리와 원적암과 와룡암 자리는 분명 다른 장소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끝으로 필자는 와룡암 자리에 유적표지판이 세워지지 않더라도 이렇게 글을 써서 역사에 남길 생각이다. 와룡암 터와 용담서사 터는 현재 용담정으로 대변 되지만 두 성지는 후천 5만년 길이 전해질 다시개벽 즉 주문呪文과 영부靈符는 물론 시천주侍天主·인시천人是天·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압축되는 동학의 진리를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께 받으셨고, 또한 대각을 이루신 곳이다. 그만큼 현재 용담정과 과거 와룡암은 세계인류역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번 글이 ‘와룡암 터를 알리는 공개적인 두 번째 글이다.’는 것을 밝히면서 용담정 순례에 대한 글을 마친다. 4. 수운 최제우 대신사 십상도(일생을 열 개의 그림으로 묘사) <끝> 글 : 이윤영(천도교연원회 직접도훈,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 그림 : 박홍규 작 2015년, 송암 이윤영 저술 동학이야기 ‘만고풍상겪은손 삽화’ -
수운문화제, 천도교미술인회 한마당전 개막2024 수운문화제 개막식이 8월 7일 오후 3시 경인미술관에서 열렸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을 기념하는 제 34회 천도교미술인회 한마당전 개막식에는 윤태원 서울교구장이 집례를 맡았으며 개식-청수봉전-심고-주문 3회 병송-내빈소개-인사말-축사-시상식-심고-테이프컷팅-기념사진촬영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윤태원 서울교구장은 집례자로서 발성심고를 하며 심고문을 통해 "한울님 스승님 감응하옵소서! 뜻깊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이하여 개최한 2024 수운문화제 제34회 천도교 미술인회 한마당전과 제5회 인내천 서, 예 명인 모심전에 참석해주신 내외빈 여러분과 전국에서 천도문화창달에 노력하고 계신 천도교 미술인회원들과 서예 명인 모심 작가들과 미래세대인 어린이 학생 동덕들을 지도하여 참여케 해주신 교구활동에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노력에 하루속히 우리의 소원인 대도중흥과 평화통일을 이루고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만사여의하시길 심고합니다."라고 말했다. 남암 염정모 천도교미술인회 회장은 내빈소개에 이어 인사말을 통해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 포덕 165년 수운 문화제, 제34회 천도교미술인회 한마당전과 제20회 어린이학생 작품전을 축하합니다. 돌이켜보면, 천도교의 숙덕 어르신 위창 오세창 선생으로 흐르는 물이 춘곡 고희동 선생을 지나 간송 전형필 선생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이 이렇게 태동했습니다. 또한 서울대 교수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지낸 동양화가 겸 서화가인 심산 노수현 선생, 서화 수장가와 최초 전시기획자로 불렸던 우경 오봉빈 선생, 평전 발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동훈 화백도 역시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우리 천도교 출신 예술가들 입니다. 이러한 어르신들의 훌륭한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천도교미술인회 한마당 전시가 어느덧 34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어려운 여건과 상황 속에서 어느 종단에서도 이루지 못한 큰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훌륭한 전시회는 우리 종교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술활동은 모든 이의 참여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포덕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번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축사를 통해 "우리 교단의 대표적 예술단체인 천도교 미술인회 한마당전이 어느덧 34회째를 맞았습니다. 청년기를 기나 불혹을 바라보는 시점의 이번 미술인회전은 특히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의 출세 200년을 기념하는 행사라 그 의미가 더욱 뜻깊고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느라 삼복더위 속에서도 수고해주신 신의당 이순종 명예회장님과 염정모 미술인회 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미술인회 회원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제20회 전국 어린이 학생 작품전 수상자는 9개 교구에서 29명이 참가하여 학생부는 대상 없이 중등부 특별상 2명이 선정되었으며 어린이 초등부는 대상 1명, 금상 7명, 은상 14명, 동상 6명이 선정되었으며 유치부는 은상 2명이 심사 선정되었다. 대상인 교령상은 삼천포 교구 초등학교 3학년 이진욱 어린이의 <대신사님 출세하였으니>가 선정되었다. 이어 미술인회에서 제정한 '청년착가 대상'에는 올해 다섯 번째 수상자로 서울교구의 김은진 청년작가가 수상하였다. 김은진 작가는 현재 프랑스 유학 중이며 방학 중이라 잠시 한국에 귀국하여 있어 시상식에 참석하여 청년작가 대상을 수상하였다. 마치는 심고에 이어 행사를 마치고 윤석산 교령, 이범창 종무원장, 신의당 이순종 명예회장, 박징재 여성회장, 주선원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 조민환 교수, 염정모 미술인회장, 변종제 미술인회 부회장, 청년작가 대상 김은지 작가 등 주요 내, 외빈의 테이프 커팅식이 있었다. 기념사진 촬영 후 폐신 선언으로 모든 행사가 끝나고 원중 이관수 작가의 문화공연으로 천덕송 중 <제16장 오관가>와 <그리운 금강산> 등을 하모니카와 기타연주로 청해들었다. -
어린이 인권선언 100주년 기념 토론회 -
어린이인권선언 100주년 행사 -
폭염 취약계층 쉼터 현장점검 실시행정안전부(장관 이상민) 이한경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장마 이후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됨에 따라 8월 1일(목) 폭염 취약계층을 위한 쉼터를 긴급 점검했다. 먼저,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이동노동자 쉼터를 방문해 폭염 속에서 일하고 있는 이동노동자 지원 현황을 점검했다. 이동노동자 쉼터는 배달 라이더, 퀵서비스 기사, 대리운전 기사 등을 위한 휴게공간이다. 쉼터에는 이동노동자들이 휴식과 간단한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음료, 전신 안마기, 컴퓨터 등이 비치되어 있다. 이 본부장은 무더위에도 두꺼운 보호장구와 헬멧을 쓰고 일하는 이동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 홍보를 강화할 것을 당부했다. 이어서 이한경 본부장은 서울역 노숙인 무더위쉼터를 방문해 시설 현황과 노숙인 보호 대책을 점검했다. 노숙인 무더위쉼터는 사회복지시설 등을 활용해 노숙인들이 샤워시설을 이용하고 실내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이 본부장은 노숙인들을 직접 찾아가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생수 등 구호품을 전달하는 ‘노숙인 혹서기 응급구호반’ 반원들을 격려했다. 한편, 정부는 지난 7월 25일부터 2주간을 ‘폭염 피해 집중대응기간’으로 정하고 관계부처, 지자체와 협력해 폭염에 총력 대응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지자체에 특별교부세를 지원해 그늘막, 물안개 분사장치 등 폭염저감시설을 확충(3,487개소)하고, 전국 6만여 개 무더위쉼터를 운영하는 등 생활밀착형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전국 3만 4천여 명의 생활지원사를 활용해 독거노인 등 폭염 취약계층 안부를 확인하고, 예방 물품을 지원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현장근로자에 대한 온열질환 예방 가이드의 준수 여부를 지도·점검하고, 폭염이 심할 경우 작업시간 조정, 작업 중지 등 행정 지도한다. 농촌진흥청과 해양수산부는 농·어업인을 대상으로 폭염 대비 행동요령을 교육·홍보하고, 특보 시 예찰을 강화하는 등 농·어업인 보호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한경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정부는 관계기관과 함께 야외·이동노동자, 노숙인, 고령 농업인 등 폭염 취약계층이 안전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지원해 나가겠다”라고 밝혔다. -
‘꿈의 예술단’ 모두 모여라, ‘꿈의 페스티벌’로 화합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이하 문체부)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원장 박은실, 이하 진흥원)과 함께 8월 4일부터 9일까지 강릉과 정선, 평창 등 강원도 일대에서 전국 ‘꿈의 예술단’이 모여 화합하는 ‘꿈의 페스티벌’을 처음 개최한다. * 꿈의 예술단: 베네수엘라의 저소득층 아동‧청소년을 위한 무상 음악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를 한국형 문화예술교육 모델로 발전시킨 것 문체부는 아동‧청소년 대상 문화예술교육 대표 브랜드인 ‘꿈의 예술단’을 지원하고 있다. 2010년 ‘꿈의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2022년에는 ‘꿈의 무용단’, 올해는 ‘꿈의 극단’까지 그 지원을 확대했다. 유인촌 장관은 지난 7월 16일, ‘꿈의 극단’ 홍보대사 위촉식에서 “8월 초 ‘평창대관령음악제’ 직후 ‘꿈의 예술단 합동 캠프’를 열어 전국의 예술단원들이 교류하고, 세계적 예술가들에게 교육받으며, 서로 어우러져 공연하는 장을 마련하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번 ‘꿈의 페스티벌’에서는 ‘예술로 하나 되는 꿈의 여정’을 주제로 찾아가는 공연, 해외예술가 초청 연수회, 합동캠프, 합동공연 등을 진행한다. 찾아가는 공연(8. 4.)을 시작으로 해외예술가 초청 연수회(8. 5.~6.) 진행 먼저 8월 4일, 강릉의 주문진 해변에서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공연’을 펼친다. 꿈의 오케스트라 ‘평창’과 꿈의 무용단 ‘강릉’의 아동․청소년 단원, ‘평창대관령음악제’의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약한 청년 예술가 5명이 협업해 음악과 무용으로 구성된 다채로운 예술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8월 5일과 6일에는 무용 분야 유명 해외예술가(단체) 초청 연수회(워크숍)를 개최한다. ▴정선종합경기장 실내체육관에서는 독일의 모랄레스 컴퍼니(Morales company)가, ▴강릉의 꿈꾸는사임당예술터에서는 헝가리의 아코쉬 하기테(Ákos Hargitay)가 사전에 모집된 무용에 관심 있는 전국 아동·청소년 100여 명을 대상으로 무용 수업을 진행한다. 합동 캠프(8. 7.~9.)에 바이올린 연주자 대니구,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김보람, 예술감독으로 참여 8월 7일부터 9일까지는 평창 용평리조트에서 ‘꿈의 오케스트라’와 ‘꿈의 무용단’ 중 14개 거점기관의 단원과 관계자 450여 명이 모여 서로 교류하고 우정을 나눈다. 합동 캠프 발대식을 시작으로 화합을 위한 교류 연수회, 예술을 통한 몰입과 즐거움을 일깨우는 예술통합 프로그램 등을 거쳐 합동공연까지 함께한다. 아울러 다양한 분야와 협업하며 모험적인 예술 시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 대니구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김보람 감독이 각각 음악과 무용 감독으로서 이번 여정에 동참한다. ‘꿈의 페스티벌’의 마지막은 합동공연으로 장식한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꿈의 예술단’ 단원과 예술감독이 모두 주인공이 되어 평창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합동 캠프를 통해 배운 예술에 대한 몰입과 감각을 마음껏 표현할 예정이다. ‘꿈의 페스티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진흥원 누리집(www.arte.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체부 이해돈 문화정책관은 “이번 행사를 시작으로 전국 ‘꿈의 예술단’이 서로 교류하며 성장할 수 있는 자리를 더욱 확대해 아동․청소년이 다양한 예술 분야를 접하고 창의적인 생각과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뒷받침하겠다.”라고 밝혔다. -
‘2024 파리올림픽’에서 한복의 아름다움 알려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이하 문체부)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장동광, 이하 공진원)과 함께 8월 1일, 파리올림픽 코리아하우스(메종 드 라 쉬미) 내부정원에서 ‘한국의 날*’ 사전 행사로 한복 패션쇼를 열어 세계에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 ‘알레 라 코레(Play the K, Allez la Corée)’라는 주제로 한국을 홍보하는 국제스포츠 외교의 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등 국내외 스포츠 주요 관계자 참석 ‘한 여름날 어린 소녀의 나들이’라는 주제로 한복 패션쇼 기획, 대한민국 선수단 활약 축하하고 승리 기원 이번 한복 패션쇼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던 소녀가 ‘2024년 파리올림픽’ 코리아하우스를 방문한다는 상상을 담아 ‘한 여름날 어린 소녀의 나들이’를 주제로 기획했다. 이를 통해 과거부터 이어지는 파리와 한국의 연결고리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올림픽 선수단의 활약을 축하하고 승리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서영희* 스타일리스트가 예술감독을 맡아 연출을 총괄한 이번 한복 패션쇼에는 김영진, 김인자, 김지원, 김혜순, 송혜미, 유현화, 이혜순(가나다순) 등 국내 한복 디자이너 총 7인이 참여했다. 한복 디자이너들은 파리 현지에서 활동하는 모델 20인과 함께 관계, 계례(성년례), 혼례 등 한국 전통 의례에서의 예복 등을 주제로 한 다양한 한복을 야외무대에서 선보였다. * 2022-2023 한복상점 기획전시 예술감독, 2020 <반클리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2018 <루이비통> 함 트렁크 협업 등 각종 한복 패션쇼 감독으로 활동 이번 행사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공진원 누리집(www.kcdf.kr)과 공식 누리소통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파리올림픽 코리아하우스를 방문하려면 코리아하우스 누리집(www.teamkoreahouse.kr)에서 사전 예약을 하면 된다. 문체부 이해돈 문화정책관은 “케이-콘텐츠 종합 홍보의 장인 ‘코리아하우스’에서 이번 한복 패션쇼를 통해 한복 고유의 아름다움과 멋을 널리 알리고 대한민국 선수단의 선전을 기원했다.”라고 밝혔다. -
한울님의 은덕으로“나는 천도교를 안 한다고 했는데, 우리 고모부가 나를 포덕 시키기 위해 대구에서 부산까지 오셨어요. 저를 포덕 시켜야 집안이 다 포덕이 된다고요. 새벽에 5시 기도식을 하시는데, 가만히 혼자서 생각하니 아, 이거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고모부가 나 때문에 이렇게 오셨는데 안 되겠다. 벌떡 일어나서 고모부, 저 입교하겠습니다, 말씀드리고 입교를 했습니다.” 대동교구에서 만난 유재원 선도사는 입교 후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랜 신앙의 역사를 이어온 집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를 이어 지극한 정성으로 살아온 삶의 궤적이 느껴졌다. 천도교를 하시면서 어떤 점이 큰 힘이 되었는지 말씀해주세요. 한울님 잘 모시고 항상 우리가 수시로 뭔 일 있으면 아이고 한울님, 아이고 우리 스승님 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건강합니다. 크게 걱정 안 하고 사는 것, 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제 형제들이 7남매인데 거의 다 천도교를 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6.25가 끝나고 그 이후에 이북 평양사람인 우리 고모부가 거제 수용소에 계시다가 나오면서 우리 집 주소를 갖게 되셨죠. 거기 계시다가 나오시니 갈 곳이 없으니까 우리 집을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집이 고모부의 처갓집이죠. 우리 집에 계시게 되면서 우리 집안이 천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옛날부터 천도교를 신앙을 좀 하신 분이니, 고모부가 집에 오시면서 우리 집안이 전부 다 천도교 집안을 만드신 거죠. 저는 천도교를 젊을 때는 안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천도교를 하게 되었고요. 집안 어르신들이 천도교를 하셨으면, 어릴 때 어르신들이 어떻게 신앙생활 하셨는지 혹시 기억나시는 거 있으세요? 선대에서부터 천도교를 열심히 하셨어요. 내가 한 예닐곱 살 됐을 때 시골 동네에 자라면서 우리 외갓집 외할아버지가 저녁이 되면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밥 먹는 걸 좋아하셨어요. 외할아버지가 21자 주문을 자꾸 외우면 병도 안 오고 건강해지고 똑똑해진다고, 무서움도 없고 귀신도 없다고 하시면서 가르쳐주셔서 제가 팔을 흔들며, "지기금지 원위대강.."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면서 주문을 외웠던 기억이 나요.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면서, 외할아버님 말씀처럼 21자 주문이 두려움을 없애주기도 하던가요? 저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제가 교통사고도 세 번이나 크게 당했습니다. 차가 완전히 다 부서져 버렸는데 몸에는 조그만 털끝 하나 다친 곳이 없어요. 급발진 사고였는데, 한올님이 돌보지 않으셨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보고 대동교구 일 잘 하고 인재를 양성시키라고 살려준 것 같아요. 죽음의 고비를 세 번, 네 번 겪으면서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정말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요. 항상 한울님이 돌보고 계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님께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그 덕에 우리들이나 또 우리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고 또 그 덕에 다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홍암 나인협 선생의 흉상을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세우다 유재원 선도사는 현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조성된 나인협 선생의 흉상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과거 대연교구 시절 직접 화단을 정비하다가 비석을 발견하는데, 바로 나인협 선생의 묘비였던 것. 그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듯했다. 나인협 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업적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그 일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때부터 지자체와 협력하여 흉상을 세우는 일에 힘썼다. 그리고 부산시 남구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으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선생의 흉상이 조성된 것이다. 나라를 잃고 땅을 빼앗긴 식민지 시기, 천도교신앙이 보국안민의 실천으로 이어진 것처럼 유재원 선도사의 신앙이 실천으로 이어지기까지 한울님의 은덕이 모든 순간마다 운명처럼 펼쳐졌다고 말하며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인협 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서, 1872년 10월 8일 평남 성천에서 태어나 포덕 47년(1906) 11월 30일 의암성사로부터 홍암(泓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19세인 1892년 동학에 들어 동학혁명에도 참여하였다. 나인협은 의암성사를 비롯하여 권병덕, 나용환, 박준승, 이종훈, 임예한, 홍기조, 홍병기와 함께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동학혁명에도 참여한 9명 중 한 사람이다. 해방 후 평남 성천에 머무르면서 교회 원로로서 활동하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여 부산 피난민촌에서 살다가 포덕 93년(1952) 환원하였으며 빈소는 천도교부산시교구에 마련되었다. 부산 대연동 산 중턱에 안장되어 있던 선생의 유해는 포덕 114년(1973) 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