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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너머, 실천으로: 강원동학21 발대식”강원도 지역의 동학 및 농민혁명의 정신과 역사를 계승하여 미래를 향한 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강원동학21> 발대식이 포덕 166년(2025) 오후 4시 홍천(크리스탈 연회장)에서 “기억 너머, 실천으로”를 주제로 출범을 선언했다. 이날 출범식은 천도교중앙총부, 홍천양수건설사업소가 후원하였으며, 총부를 대표하여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이 참석하여 출범을 축하하였다. 행사는 1부 발대식, 2부 131주년 동학혁명군 추모음악회, 3부 만찬 순으로 진행되었다. 발대식에서는 권소영 대표는 강원도 <강원동학 21> 출범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홍성기 도의원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권소영 강원동학21 대표는 환영사에서 “강원도는 동학이 다시 시작하는 땅이었다. 동학은 존엄, 존중, 공존의 미래적 가치를 이미 160년 전에 선취하고 있으며, 1894년 동학혁명으로 실천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 정신을 되살려 오늘 이후 동학을 강원특별자치도의 정신적 정체성으로 확립하기 위하여 <강원동학21>을 출범하게 되었다. 앞으로 기념사업, 교육연구, 문화콘텐츠 개발, 공동체운동, 관광과 국제교류’까지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나가겠다.”고 비전을 밝혔다. 발대식에는 최인경 천도교중앙총부 사회문화관장을 비롯하여 홍성기 강원도 도의원, 신영재 홍천군수, 박영록 홍천군의회 의장, 최낙인 홍천동학농민혁명 유족회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와 지역 주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강원동학21>은 오랫동안 홍천군 서석면 위령탑 앞에서 위령제를 진행하는 외에 강원도의 다른 지역을 망라한 특별한 사업을 벌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확대 개편을 통해 강원 동학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기 위해 지역 유지들의 뜻을 모아 출범하게 된 것이다. 2부 추모음악회는 1섹션 “1894년 그날” 2섹션 “지금 여기” 3섹션 “미래를 향해”라는 주제로 오케스트라 연주와 <앙상블 누리>의 합창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최인경 관장은 “<강원동학21>이 출범하기까지 중앙총부는 물밑 지원을 계속해 왔다. 강원도는 물론이고,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각 권역별로 동학 관련 사업과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함으로써 동학-천도교의 저변을 확대하여 K-동학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목표로 앞으로도 지원과 연대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동학 정신을 우리 삶의 가치철학으로 가져가는 것, 그것이 제 꿈이자 바람”나이 마흔에, 서울살이를 끝내고 강원도 홍천 서석면에 새로 둥지를 튼 권소영 대표는 원래 동학과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프랑스 출장길, 관계자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친 프랑스혁명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존재의 존엄성을 인정한 동학사상에 대해 현지인들에게 설파한 뒤, 그다음 날 회의가 믿기지 않을 만큼 술술 풀렸던 경험이 동학과의 인연이라면 인연일 터였다. 한데 2007년, 그가 살러 온 홍천 서석면 풍암리가 동학혁명 전적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 인연이 오려는 길이었구나.” 하고 직감했다. 홍천에 내려온 뒤에는 마을 주민들 요청으로 4년 동안 아이들에게 동학과 동학혁명을 이야기했다. ‘시천주’ 사상에 담겨 있는 존엄과 평등, 공존과 존중을 가르쳤다. 홍천에 자리 잡을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코칭도 하고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를 키우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2017년, “동학 사업을 좀 키워보자”는 서석면 면장의 제안으로 국가유산청 공모사업에 나선 것이 본격적으로 ‘동학 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이후 홍천 서석면 풍암리 동학혁명군 전적지를 알리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기 시작해, 2024년까지 동학혁명 전적지 탐방, 휘호대회, 백일장, 보드게임, 메모리카드, 동학탑놀이, 동경대전·용담유사 목활자 퍼즐, 선양극과 추모음악회, 명상과 심리 치유 프로그램 등 수많은 콘텐츠를 탄생시켰다. 그 무수한 콘텐츠의 아이디어 창구이자 이를 실제 구현으로 이끈 장본인이며, 11월 6일 발대식을 갖는 '강원동학21'을 이끌어나갈 권소영 대표를 만나, 그의 삶과 동학, 앞으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 진행: 노은정 전 편집장) ▶ ‘강원동학21’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와 단체 설립 과정, 지금까지의 주요 활동을 소개해 주신다면? ‘강원동학21’이라는 이름에 세 가지 축을 담았습니다. 하나는 강원 지역 동학의 역사예요. 인제, 정선, 영월, 평창, 원주, 강릉, 고성, 홍천 등 곳곳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동경대전」이 발간되고 보국안민의 기포가 다시 일어난 지역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동학의 핵심 사상, 시천주와 삼경사상, 인내천과 사인여천 정신입니다. 셋째는 이 사상을 21세기 현재의 언어와 삶으로 풀어가겠다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강원동학’ 뒤에 ‘21’을 붙였습니다. 제가 홍천에 온 지 20년이 되어 갑니다. 2017년에 당시 서석면 면장님이 제가 기획·컨설팅하는 걸 알고 “서석면에 동학혁명 유적지가 있는데, 이걸 제대로 키우고 싶다”며 동학 관련 사업을 제안하셨어요. 당시 서석면동학혁명추모사업회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주축 어르신들만 남아서 사실상 활동이 거의 없던 상태였어요. 한데 공모사업을 하려면 단체에 소속돼야 하니, “단체 이름을 좀 빌려 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해서 2017년 국가유산청 지역유산활용사업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동학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017년부터 2024년까지 14개의 프로그램 개발은 거의 완성된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동학 정신을 서예로 표현하는 전국 휘호대회와 학생들이 동학농민혁명 과정을 공부하며 글을 쓰는 백일장, 역사 흐름과 인물을 게임으로 배우는 보드게임과 메모리카드, 시천주·존엄·존중·공경 같은 키워드를 몸으로 익히는 ‘동학탑놀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목활자본 퍼즐과 인쇄 체험, 지역주민이 만든 선양극과 추모음악회, 동학 아카데미, 초등학교 체험, 중학교 자유학기제 프로그램, 동학사상과 명상을 결합한 심리 치유 프로그램과 동학군 복장을 입어보고 행진하는 체험과 동학 관련 유튜브와 캐릭터, 이모티콘 대회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초등학생, 중·고생, 학부모, 마을 주민과 군인들까지 합치면 대략 5천 명 정도가 홍천 동학과 동학혁명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 기반을 바탕으로, 홍천을 넘어 강원 전역으로 확장하기 위해 ‘강원동학21’이라는 새 이름으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개발해 오신 프로그램이 매우 다양합니다. 휘호대회, 보드게임, 심리 치유 프로그램, 음악회 등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기획을 할 때 ‘한정된 틀’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산 1,000만 원이면 2,000만 원 이상의 효과를 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늘 고민합니다. 그래서 동학 프로그램들도 교육, 놀이, 예술, 심리를 한데 묶어 설계하고 있어요. 먼저 휘호대회는 강원도 교육감님께서도 칭찬하신 행사입니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을 공부하게 되거든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금 누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고, 글씨에 담긴 마음도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다섯 번 진행했습니다. 심리 치유 프로그램은 동학사상을 현대 심리학 기법과 결합한 것입니다. 참가자들이 시천주·삼경사상, 수심정기를 체험형으로 접하도록 설계해서, 프로그램이 끝나면 마음이 굉장히 차분해졌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습니다. 이건 제가 아이들 코칭과 부모 상담을 오랫동안 하면서 쌓은 경험과 동학 공부가 만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이 음악회입니다. 저는 어릴 때 클래식을 전공해볼까 고민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동학 스토리텔링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번 11월 6일 강원동학21 발대식에서도 음악과 동학 이야기를 엮으려 합니다. 이번 행사에서 첫 곡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시작합니다. 인트로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돌아보게 되는 자각의 느낌이 있거든요. 이어서 「나 하나 꽃 피어」라는 가곡이 불립니다. 나 혼자만 피어서는 숲이 되지 않지만,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꽃을 피울 때 어떤 세상이 열리는지를 동학 정신과 연결해 설명하지요. 또 영화 「미션」에 나오는 「가브리엘스 오보에」를 들려줍니다. 이 곡을 들으며 동학군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존엄과 평화의 가치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나눕니다. 이렇게 곡마다 스토리텔링 해설을 붙입니다. 음악적 분석만이 아니라 이 곡이 동학과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감응 매치하여 이야기하면, 관객들이 깊게 공감합니다. “난 동학은 어려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들으니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시죠.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비슷합니다. 밥을 먹을 때 “농부가 쌀을 안 만들었으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엄마가 밥을 해 줄 때와 안 해 줄 때의 차이, 그 사이의 정성과 마음을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면, 생각의 폭과 깊이가 확실히 달라집니다. 저는 그 과정을 ‘동학식 수심정기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 최근 홍천군의회 본회의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 조례안’이 부결되면서 지역사회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생각이 들었고, 이후 어떤 대응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말씀드린 대로 어이없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났습니다. 그동안 쌓아 온 기념사업과 주민들의 호응, 전국적인 평가를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었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학 정신을 이야기하는 내가, 동학이 말하는 수심정기와 시천주를 어느 만큼 실천했는가를 먼저 돌아보게 됐습니다. 일부에서는 군의회 내 갈등, 몇몇 기사에 따른 감정적 반향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동안 해 온 활동의 진정성과 필요성을 더 깊이 이해시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지금은 2026년 재발의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군의회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기념사업의 의미와 내용, 강원특별자치도 조례와의 연계, 홍천이 갖는 상징성을 차분히 설명할 예정입니다. 또 하나는 추모일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추모일이 양력 10월 23일로만 알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음력 10월 23일입니다. 올해부터는 이 부분도 바로잡고, 음력 추모일을 기준으로 강원동학21이 준비하는 추모·기념 행사를 체계화해 보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과 논쟁도 결국 조금 더 좋은 길로 가기 위한 성장통이라고 보고, 끝까지 책임 있게 풀어가려 합니다. ▶ 조례 제정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조례가 통과될 경우 지역사회와 동학 기념사업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시는지요? 조례는 결국 공공의 약속입니다. 강원특별자치도에는 이미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조례’가 있어서, 큰 틀에서 강원동학21 사업을 하는 데 제도적 장애는 없습니다. 하지만 홍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의 실제 무대는 홍천군입니다. 홍천군에 조례가 제정되면, 다른 시·군에 선도적인 모범 사례가 될 수 있고, 기초자치단체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과 동학 정신 계승을 법적 책무로 인식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민간의 열정과 자발적 재능기부에 의존한 측면이 크다면, 조례 제정 이후에는 예산·인력·교육·관광 정책과의 연계가 훨씬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동학 정신을 강원도 정체성의 한 축으로 삼겠다는 공적 선언이 되는 셈이지요. ▶ 강원동학21이 비영리 사단법인, 궁극적으로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재 추진 상황과 법인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지요? 현재는 비영리 사단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고, 최종 목표는 재단법인화입니다. 사단법인은 사람 중심의 조직이고, 재단법인은 재정과 자산을 기반으로 한 안정적인 플랫폼입니다. 강원동학21이 장기적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재단법인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은 강원도 곳곳에서 동학과 동학 정신에 공감하는 분들을 모아 ‘강원동학21 재단법인 추진위원회’를 꾸리고 있습니다. 이 법인을 통해, 재정적 안정화를 이루고, 동학 해설사, 강사, 프로그램 기획자 등 전문 인력을 양성하며, 학교·지자체·문화재단·시민단체·천도교 교구와의 협력 구조를 정비해, 동학 정신을 강원의 정체성과 공동체성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플랫폼을 만들고자 합니다. 특히 저는 천도교 입교 여부와 상관없이, 현대화된 동학 정신을 삶의 철학으로 전하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의 네트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동시에 천도교중앙총부와도 마인드 교육, 직무·인성 교육 등에서 협력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천도교도 함께 알려지고, 강원도의 정체성 확립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강원 지역의 동학 유적을 잇는 ‘동학길’ 사업과 2027년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준비 중인 계획이 궁금합니다. 강원동학21이 준비하는 큰 축 중 하나가 ‘강원 동학길’ 역사 투어예요. 원주–홍천–인제 권역, 홍천–평창–횡성 권역, 홍천–고성–강릉 권역, 홍천–영월–정선–원주 권역으로 나누어 1박 2일 또는 2박 3일 코스를 구상하고 있어요. 단순히 “여기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수준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과 시천주·삼경사상, 인내천·사인여천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는 여행이 되도록 설계 중입니다. 특히 2027년 해월 최시형 선생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해월 선생 평전을 쓴 분들의 책을 거의 다 구입해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해월 신사의 삶과 사상을 담은 선양극·뮤지컬 시나리오를 세 편 정도 써 두었고, 앞으로 검토를 받아 무대에 올려보려 합니다. 해월 선생이 걸었던 길을 실제로 따라가며, 공연과 강의, 명상과 음악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해월의 길을 따라서’라는 이름으로 강원도와 함께 개발하는 것이 목표예요. 이 과정에서 춘천교구, 원주교구, 강릉교구 등 강원 지역 천도교 교구들과의 네트워크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합니다. 각 교구가 지닌 역사와 인적 자원을 살리면, 교구 입장에서도 창조적인 선도 역할을 할 수 있고, 강원동학21은 종교색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동학·천도교의 가치를 넓게 알릴 수 있다고 봅니다. ▶ 여러 자리에서 “정치는 멈춰도 동학 정신은 멈출 수 없다”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동학 정신은 어떻게 되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창도하신 이후, 해월 최시형 선생, 의암 손병희 선생으로 이어지는 차원이 다른 생각의 가치혁명이었습니다. 희망이 거의 없던 시대에 ‘하늘이 사람 안에 있다(시천주·인내천)’는 말은 글자 그대로 빛이었죠. 지금 우리는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누리는 것 같지만, 자기 삶의 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자질은 오히려 부족해진 부분을 많이 보곤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면 환경과 타인 탓만 하고, 정치·사회적 문제도 내 마음과는 별개라고 생각하지요. 시천주 사상은 한울님을 모시기 위해 수심정기,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로 세우라고 가르칩니다. 삼경사상은 만물을 공경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걸 오늘의 언어로 정리하면 존엄, 존중, 공존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존엄한 한울님으로 여기며 수심정기를 실천하고, 타인과 다른 존재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고, 함께 어우러지는 공존을 목표로 삼는 것.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소통 이전에 존중이 없습니다. 만나서 각자 자기 말만 하고 돌아가면서 그걸 대화라고 부르기도 해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과 감정이 앞서다 보니 조율과 조화가 설 자리가 적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학 정신을 AI 시대, 포스트휴먼 시대의 K-철학, K-동학으로 정리하고 싶어요. 인간의 존엄과 마음의 평화, 타인과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동학 정신이 오늘의 사회 가치로 뿌리내린다면, 정치적 양극화와 혐오, 차별, 공동체 붕괴 같은 문제의 뿌리가 조금씩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 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어려움, 그리고 시민사회나 지방정부, 중앙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서석면동학혁명추모사업회는 1976년부터 있었지만, 오랫동안 일부 주축 인물 중심으로 돌아가며 조직의 임무와 기능, 목표와 가치가 거의 사장된 상태였어요. 2018년부터 제가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공모사업을 따오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예산을 끌어오며 조직의 틀을 새로 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서석면 원주민도 아니고, 여성, 그것도 아줌마라는 이유로 괜한 트집과 반발을 겪기도 했습니다. 서석면 안에만 동학을 가둬두고 싶어 하는 분들은 “왜 홍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느냐, 왜 강원 전체를 이야기하느냐”며 반대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같이 일하자”고 나서는 사람보다, 멀찍이 서서 지켜보거나 트집을 잡고 험담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참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시·군이나 도 단위에서 이 사업을 바라보는 분들은 ‘너무 필요한 일’이라고 평가해 주시더라고요. 사회 문제와 조직 문제로 고민하는 리더들은 동학 정신 계승 사업을 보면서 “우리 지역에도 이런 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가까이에서는 홀대받고, 멀리서는 부러움을 사는 모습이 종종 헛헛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앞으로는 강원동학21 발대식을 계기로, 강원 지역의 뜻있는 인재와 명망 있는 추진위원들을 적극적으로 모실 생각이에요. 시민사회에는 “이건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공동체의 가치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고, 지방정부에는 “정신문화의 토대가 튼튼해야 지방자치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중앙정부에는 동학 정신을 전국적 가치로 확산하는 데 꾸준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드리고 싶고요. ▶ ‘동학’과 ‘예술’을 결합한 문화기획이 권 대표님만의 강점인 듯합니다. 앞으로 꿈꾸는 음악·예술 프로젝트와 5년 안에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지요? 저는 동학을 책 속의 사상으로만 두고 싶지 않아요. 노래와 연극, 클래식과 국악, 뮤지컬, 영상과 유튜브 채널 등 사람들이 실제로 감동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형식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이미 홍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유튜브 채널을 통해 여러 공연과 강연, 프로그램을 올리고 있고, 이번 강원동학21 발대식에서도 클래식과 동학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문 음악인들이 “우리끼리만 좋다”고 만족하는 데 머무르면 확장이 안 된다고 늘 말합니다. 예술은 결국 남이 듣고 감동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5년 안에, 강원동학21을 재단법인으로 세우고, 해월 최시형 선생 탄신 200주년에 맞추어 해월 선생 선양극·뮤지컬을 무대에 올리고, 정치·사회·교육·문화·예술 전반에 동학 정신을 녹여낸 가치 프로젝트를 단계별로 수행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개인적으로 ‘21세기형 동학운동’을 거창한 혁명으로 보지 않습니다. 각자가 스스로를 존엄한 한울님으로 여기고, 그 눈으로 타인과 자연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이미 개벽은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명상도 결국은 ‘자기라는 한울이 자기 마음을 경계하는 과정’이니까요. 그렇게 보면 매일이, 지금 이 순간이 이미 동학운동의 현장입니다. 강원동학21이 그 현장에서 작은 촛불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강원도에는 동학으로 공동체를 다시 세우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느리지만 또 저 같은 분이 나오셔서 이어간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기억을 남기는 일도 있지만 누군가의 사명으로 넘겨주는게 제 마지막까지의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오늘도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
강원동학21, “기억 너머, 실천으로” — 11월 6일 발대식 개최강원동학21(대표 권소영)이 오는 11월 6일(수) 오후 4시, 홍천 크리스탈 웨딩홀 4층 연회장에서 ‘기억 너머, 실천으로’라는 주제로 강원동학21 발대식을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천도교중앙총부 후원으로 진행되며, 동학 정신을 현대 사회 속에서 실천적 가치로 되살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행사는 1부 발대식, 2부 음악회 ‘추모와 다짐 – 기억 너머 실천으로’, 3부 만찬 순으로 진행된다. 이번 발대식의 하이라이트인 음악회 ‘추모와 다짐 – 기억 너머 실천으로’는 앙상블 누리(Ensemble Nuri)의 연주로 진행된다. ‘1894년 그날 – 지금 여기 – 미래를 향해’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번 무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시작으로 모차르트의 「레퀴엠」,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9번」, 구스타프 말러의 「아다지에토」 등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곡들이 연주된다. 소프라노 최정빈, 바리톤 정준식, 오보이스트 서보영, 엘렉토니스트 한윤미 등이 출연하며, 지휘는 박슬기, 총기획은 권소영 대표가 맡았다. 공연의 주제 ‘추모와 다짐 - 기억 너머 실천으로’는 동학혁명의 희생과 정신을 오늘의 사회적 실천으로 잇는 문화 선언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강원동학21은 1894년 늦가을, 홍천동학혁명의 함성이 오늘의 시대를 향한 실천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범했다. 권소영 대표는 “매년 지속하는 형식적 추모만으로 역사를 지킬 수 없다. 우리는 그 정신을 실천으로 이어가고자 한다. 동학의 정신을 품은 강원도의 정체성을 되찾아 기념사업을 넘어 문화예술과 교육, 공동체 운동으로 확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강원동학21은 이후 사단법인 설립을 통해 위령제, 학술대회, 문화축제 등의 기념사업을 비롯해 공연, 전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역사교육・자료 발간, 해월의 길, 동학명상센터 등 관광사업, 서포터즈 및 후원 캠페인, 평등·공존의 가치를 세계화하기 위한 국제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
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4일○ 1895년, 울릉도에 도감 설치 조선은 울릉도에 ‘도감’을 두어 섬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초대 도감 배계주는 일본인의 불법 어로를 막고 주민들의 생활을 돌보았다. 이 제도는 울릉도의 행정적 지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1900년 고종의 칙령으로 울릉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 1935년,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 개봉 이명우 감독이 연출하고, 문예봉, 한일송, 김연실, 노재신이 주요 배역을 맡았다. 대사는 몇 마디 없었으나, 다듬이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는 신기함만으로 관객이 몰렸다.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했으며 무성영화보다 갑절이나 되는 입장료였지만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이 영화의 기술을 맡은 이필우는 두 차례나 일본에 건너가 최신 영화 기술을 배워왔다. ○ 1957년, 세계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며 인류의 우주 시대를 열었다. 스푸트니크 1호는 금속구 모양에 4개의 안테나를 달고 지구 궤도를 95분마다 한 바퀴 돌며 ‘삐’ 하는 소리로 전 세계에 신호를 보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소련 간 ‘우주 경쟁’을 촉발했고, 이후 인류의 우주 개발이 급속히 진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 1965년, 강재구 소령, 부하 살리기 위해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순직 1965년 8월 31일 파월 맹호부대에 지원한 강재구 중대장은 파월을 앞두고 중대원들과 함께 실전 훈련을 하는 도중 한 병사가 수류탄을 잘못 투척해 전 중대원이 위험에 처하자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부하들을 구하고 산화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수십 명을 구한 강재구 소령은 국립서울현충원 제51묘역 2번 묘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가 순직한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에 그의 이름을 딴 ‘강재구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1966년, 아프리카 레소토 왕국 독립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싸인 내륙국 레소토(The Kingdom of Lesotho)가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이루었다.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남부 아프리카의 지붕’이라 불리며, 소토족의 부족 왕국으로, 마사이족과 함께 가장 용맹스럽다는 줄루족의 침략도 굳건히 막아낸 바 있다. 전통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드문 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이다. ○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하다 유신체제에 맞서 강력한 민주화 운동을 펼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이날 국회의 표결을 통해 의원직에서 제명되었다. 제명 직후, 김영삼은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기며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꺾지 않았다. 김영삼을 지지하는 지역 사회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이는 부마민중항쟁으로 확산했다. 그리고 열흘 뒤, 10·26 사태가 벌어져 유신 체제는 종말을 맞았다. ○ 1991년, 「환경 보호에 관한 남극 조약 의정서」 통과 환경 보호를 위해 남극 대륙의 광물 개발을 금지하고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한 국제 조약이 채택되었다. 2048년까지 남극의 개발이 금지되며, 인류 공동의 자연유산으로서의 남극 보전을 명문화하였다. 우리나라는 1996년 비준했으며, 남극의 자원개발을 금지하고 동식물 보호, 폐기물 관리, 보호구역 지정 등을 규정하고 있다. -
가리산수도원 개원 43주년… 한울님의 가르침 되새기며 미래를 다짐하다지난 8월 20일, 강원도 홍천군 두천면 천현2리에 자리한 가리산수도원에서 개원 43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가 원장으로 있는 가리산수도원이 걸어온 43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수도원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하며 미래의 발전을 다짐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박인준 교령, 김명덕 여성회본부 회장, 명승철 연원회 부의장, 석영기 춘천교구장, 성충모 강남교구장, 서종환 의창수도원장, 임형진 동학학회장을 비롯한 40여 명의 교인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는 기념사에서 “모시고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기쁩니다. 저는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을 내 형제, 내 아들·딸, 내 손자라고 부릅니다. 여기 모이신 내 자식들이 항상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 제가 오늘까지 100살의 나이에도 죽지 않고 이 자리에 나와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내 나이 57세에 개원해서 지금 100세가 되었습니다. 작년 8월 20일에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한울님이 한 번 더 만나게 해 주셔서 오늘이 더욱 기쁩니다.”라며 후학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 “주문을 많이 외우시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셔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지 말고, 내 배가 고파도 더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허리를 졸라 그 사람을 먹이려는 덕을 피우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내년 8월 20일에 또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섭섭해하지 마시고, 정성과 공경으로 후학에게 잘 이어가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당부했다. 인사말과 함께 <탄 도유심급>, <내수도문> 등 스승님의 말씀을 품고 실천하는 삶을 강조했다. 박인준 교령은 축사에서 “오늘 가리산 수도원 개원 43주년을 맞아 이렇게 축사를 드리게 되어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방금 종법사님 말씀을 들으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경전의 구절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체화하고 실천하신 그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그 진심이 바로 종법사님의 정신이고, 또 가리산 수도원의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며, "저는 그 정신을 ‘인내천 아리랑가’에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시천주, 불사약, 남북통일, 그리고 세계 포덕의 꿈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천도교의 길이며, 민족이 하나 되는 동귀일체의 정신이라 느꼈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아 함께 애써주신 혁암 김혁태 종학대학원장님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천도교가 미래로 나아가려면 무엇보다 도력을 키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수련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고, 완성된 삶을 세상과 남을 위해 희생하며 쓰는 것이 도의 참된 길입니다. 그런 인물을 길러내는 곳이 바로 이 수도원이며, 천도교의 미래가 수도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돌아보면 의암 성사께서 3.1혁명을 준비하며 봉황각에서 수련으로 수많은 지도자를 길러내셨듯, 오늘의 수도원 역시 그 사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리산 수도원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종법사님의 피와 땀, 그리고 모든 수도 가족들의 정성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그 공덕이 차곡차곡 쌓여 더 큰 결실을 맺으리라 믿습니다."라고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종법사님과 혁암장님, 그리고 수도원 가족 여러분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리며, 늘 건강과 평안을 한울님께 간절히 심고드립니다. 오늘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도 행복과 기쁨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명승철 연원회 부의장은 이날 축사를 통해 "오늘 가리산 수도원 창립 43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은성당 종법사님의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개원기념일에 많은 분들께서 참석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실 거라고 우리는 믿고 또 힘들 때 어머님 품이 생각나듯 항상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은성당 종법사님께서 건강하셔서 우리들 마음의 고향으로 오래 남아 계시면 참 고맙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서종환 의창수도원장은 축사에서 “가리산수도원 개원 43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에게 이곳은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저 자신까지 수도와 수련을 통해 도를 닦아온 고향 같은 곳이며, 종법사님은 제 어머니 같은 분이라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수도원의 발길과 주문을 이어가 천도교의 도를 완성하고, 종법사님과 수도원이 오래도록 건강하고 발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김명덕 천도교여성회본부 회장은 “오늘은 원장님께서 피와 땀으로 여성들의 힘을 일깨워 주신 가리산수도원 개원 43주년 되는 날입니다. 해월신사님 말씀처럼 여성 수도의 길을 몸소 실천해 오신 종법사님은 100세를 맞으신 오늘까지 수많은 수도생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건강하시어 우리 여성들의 믿음과 정진에 큰 힘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리산수도원 43주년을 맞이하며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함께해주신 여러분들과 교단을 지켜 발전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가리산수도원이 개원 이래 43년 동안 걸어온 역사를 함께 되돌아보며, 교인들은 그 시간 속에 쌓인 정성과 신심을 마음 깊이 새기고, 무엇보다도 한울님의 가르침을 다시금 확인하고 실천을 다짐하는 매우 뜻깊고 감동적인 자리가 되었다. -
제4기 동학 7일 학교 <강원도편>, 해월의 여정 따라 인권·생태·평등 되새긴다오는 2025년 8월 9일(토)부터 15일(금)까지, 6박 7일간 진행되는 제4기 동학 7일 학교 <강원도편>이 강원도 인제, 홍천, 고성, 여주 등지에서 열린다. 이번 프로그램의 주제는 ‘해월 한울아이’로,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의 생애와 사상을 어린이와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체험하고 토론하는 교육 여정이다. 동학 7일 학교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전국 참가자 15명이 전 일정에 참여하며, 지도교사와 일부 학부모도 동행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강원도편은 해월신사의 역사적 여정을 따라 이동하며, 동학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강원도의 역사적 배경과 현장을 몸소 체험하는 데 중점을 둔다. 주최 측은 “사람을 한울처럼 섬긴다(事人如天)는 해월의 사상은 오늘날 인권, 평등, 생태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며 “아이들이 해월의 삶을 체험하고 함께 발표·토의함으로써 동학의 핵심정신을 오늘의 가치로 이어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정개요는 다음과 같다. 1일차(여주–인제): ‘해월의 꿈, 다시 일어나다’ 여주 해월 묘소를 참배한 후 인제로 이동하며 해월의 사상적 출발을 되새긴다. 2일차(인제): ‘스승을 지키다’ 인제 귀둔리의 동경대전 간행처와 비밀의 정원, 곤충박물관, 자동차 박물관 등을 방문하며 해월의 활동 무대를 탐방한다. 3일차(홍천): ‘여름 숲 도서관’ 갯골휴양림과 산촌박물관, 기적의 도서관을 방문해 생태와 지식의 의미를 되새긴다. 4일차(홍천): ‘우리는 동학소년회’ 아침가리 계곡에서 물놀이 활동을 통해 공동체성과 자연의 소중함을 체험한다. 5일차(고성):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전망대와 국립산악박물관 고산체험을 통해 분단과 평화의 가치를 교육한다. 6일차(고성): ‘바다와 나라를 지키는 자’ 낙산해수욕장 체험과 군부대 방문(섭외 중)을 통해 공동체와 국가의 의미를 탐색한다. 7일차(홍천–여주): ‘강원의 첫 횃불, 동학농민혁명’ 내촌면 물걸리, 동창 3·1운동 기념탑, 서석면 풍암리의 동학농민군 위령탑을 찾아, 동학의 항쟁 정신과 독립운동을 되새긴다. 이번 동학 7일 학교는 오늘의 사회 문제를 ‘동학’의 언어로 다시 질문하고 해석하는 창의적 인문교육 현장이다. 주최 측은 “해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 위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작은 한울님’으로 자라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
천도교와 동학혁명기념일동학혁명에 대한 교단의 인식 천도교의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은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였다. 동학혁명 직후에는 ‘반역’ 또는 ‘역적’이라는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고향을 등지거나 은신생활을 통해 목숨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동학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갑진개화운동과 3.1운동 등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주제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단에서는 동학혁명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동학혁명과 관련된 가장 앞선 기록은 『천도교회월보』 116호에 게재된 「천도교 61년 연보」의 ‘포덕 35년조’가 아닌가 한다. 당시 이 기록에는 ‘동학란’ 또는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포덕 36년조’에 의하면 ‘전봉준동란(全琫準動亂)’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란’이 가지는 의미는 “폭동, 반란, 전쟁 따위가 일어나 사회가 질서를 잃고 소란해지는 일”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최근까지도 우리의 익숙한 ‘6․25동란’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관리(官吏)의 학정(虐政)을 개혁(改革)하고 생민(生民)의 도탄(塗炭)을 구제(救濟)”로 규정하고 있다. (민영순, 「천도교 61년 연보」, 『천도교회월보』 116호, 1920.4, 28쪽.) 이와 같은 ‘동란’의 인식은 2년 뒤인 1922년 의암성사가 환원하였을 때는 ‘갑오(甲午)의 혁명(革命)’ 또는 ‘갑오혁명(甲午革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앞선 ‘동란’의 인식보다는 상당히 진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계곽청(政界廓淸) 민권옹호(民權擁護)의 기하(旗下)에서 혁명(革命)의 거화(炬火)를 거(擧)하다”라고 하여 혁명으로서의 인식을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성사일대기」, 『천도교회월보』 임시호, 1922년 5, 8-9쪽.) 특히 이때의 ‘갑오혁명’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이후 역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1924년 황의돈이 『개벽』에 기고한 글에서는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식 또한 ‘민중운동’ 또는 ‘혁명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1920년대 초기의 ‘동란’과 ‘혁명’의 용어는 이후에는 좀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즉 ‘동란(東亂)’, ‘동학란(東學亂)’, ‘혁명(革命)’, ‘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 ‘민중혁명(民衆革命)’, ‘갑오혁명운동(甲午革命運動)’, ‘갑오혁명란(甲午革命亂)’, ‘동학당란(東學黨亂)’ 등으로 다양하게 또 혼용되어 표기되고 있다. 그리고 『천도교창건사』에서는 ‘갑오동란(甲午東亂)’과 ‘갑오동란(甲午動亂)’으로 혼용되고 있다.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1934, 70쪽(제2편).) 이는 전통적 역사인식에서 종교적 의미의 혁명뿐만 아니라 정치투쟁과 계급투쟁이라는 의미에서도 ‘혁명’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동학혁명에 대한 용어는 다양하고 혼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나 인식에 대해서는 ‘혁명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으로 천도교청년당은 1926년 4월 7일 제32회 동학혁명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천도교청년당이 동학혁명 기념식을 갖기로 한 4월 7일은 ‘황토현전투에서 동학군이 승리한 날’이다. 「갑오동학난의 자초지종」에 의하면, 4월 7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4月 7日에 古阜 42里 되는 黃土峴에서 全琫準軍과 接戰하여 死傷 千餘를 남기고 餘地없이 敗退하니 이것이 東學革命運動의 첫 烽火이었다.(일기자, 「갑오동학란의 자치자종」, 『개벽』 68, 1926.4, 39쪽.) 즉 천도교청년당은 동학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처음으로 격파하고 대승한 날을 동학혁명 기념일로 보았고, 이날 기념식을 갖기로 한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교단에서 처음으로 동학혁명 기념식을 봉행하려고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기념식이 거행되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1926년 5월호 『개벽』에 동학혁명 기념식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이에 비해 4월 5일 천일기념식을 봉행하였다는 기록은 있다. 동학혁명 기념식도 거행되었다면 당연히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학혁명 기념식을 가지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은 두 번 다시 가져보지 못했다. 이는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천도교청년동맹은 원래 ‘동학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던 적이 있었다. 해방 후 첫 동학혁명 기념식 개최 일제강점기 동학혁명 기념식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였던 천도교단은 해방 후 1947년 2월 9일 첫 기념식을 봉행하였다. 당시의 동학혁명 기념식에 관한 언론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54년 전 민주건국을 위하여 빈천한 농민대중을 중심으로 봉건사회를 파타하고 궐기한 역사적 혁명전쟁을 일으킨 동학혁명운동을 기념하고자 천도교청우당중앙위원회에서는 오는 9일 하오 1시에 천도교 강당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다 한다.「동학혁명운동의 54주년 기념」, 『대한독립신문』 1947년 2월 7일자. 53년 전 우리 조선의 봉건사회를 타도하고 서민 부녀 하층계급을 타파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봉기한 동학혁명기념일을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기념행사위원회에서는 지난 9일 하오 1시경 시내 천도교당에서 회원 수백 명 참석 아래 거행되었는데, 먼저 이우영 씨 사회로 시작되었고 축사로 본사 사장 최동오 씨의 열변에 박수 열광으로 종막을 지은 다음 동학혁명 당시 당원이었던 오지영 씨의 동학운동 회고담이 있은 후 기념행사 위원이 오지영 씨에게 기념품 기증이 있은 다음 오후 4시 반경 폐회되었다.「조선민주혁명의 선구 동학투쟁 기념식 성대」, 『대동신문』, 1947년 2월 11일자. 이 두 기사에 의하면, 해방 후 첫 동학혁명 기념식은 2월 9일 중앙대교당에서 거행되었다. 기념식 행사를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장관을 역임하였고 대동일보 사장이었던 최동오의 축사와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던 오지영의 회고담이 있었다. 하지만 천도교청우당은 왜 2월 9일에 기념식을 가졌는 지에 대한 해명이 없다. 일반적으로 동학혁명하면 기념일로 고부기포(1월 10일), 백산기포일(3월 21일), 황토현전승일(4월 7일) 등이 연상되는데, 2월 9일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고부기포가 일어난 날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2월 9일경으로 추정된다. 이후 동학혁명과 관련된 기념식이 역시 거행되지 않았다. 다만 동학혁명 기념식에 앞서 1946년 10월 20일 천도교청우당 홍천지부의 주최로 홍천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정선 등지에서 희생된 동학혁명군을 위령제를 하였다. (「갑오운동 희생자 위령제 거행 준비」, 『대동신문』 1946년 10월 19일자.) 동학혁명 67주년에 사회적 합의로 ‘기념일’ 제정 해방 후 한 차례 동학혁명 기념식을 가진 교단은 1961년 4·19혁명을 계기로 동학혁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기념일 제정을 서둘렀다. 이는 그동안 교단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을 적정한 날을 정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방편적으로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제강점기에는 4월 7일 황토현전승일에, 해방 후에는 2월 9일에 각각 기념식을 거행한 바 있듯이 특정한 날로 기념일로 정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4·19혁명을 계기로 혁명정신이 사회적으로 고양되자 교단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하여 동학사상을 사회적으로 확산하고자 하였다. 즉 “동학사상은 우리 민족의 사상이요 인간평등의 사상이다. 동시에 동학혁명운동은 안으로 부패폭정을 혁신하고 밖으로 외세침략을 반거한 운동이다. 이 혁명사상은 세계혁명사상 어느 것에 비하여도 가장 새로운 것이었다. 이렇게 성스럽고 새로운 혁명운동이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에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으로부터 백만 대중이 의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혁명의 의의를 국민 전체의 사상으로 계속 거양하지 못하고 반세기 동안을 지하에 묻힌 옥석과 같이 민중의 머리에는 무관심 몰이해하고 지내왔다” (「동학혁명 67회 기념식」, 『신인간』(속간 19호), 1961.4, 14쪽.)라고 하여, 그동안 동학혁명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를 스스로 자인하였다. 이에 따라 교단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교단은 1961년 3월 동학혁명기념준비위원을 구성하여 혁명의 의의와 약사를 밝히는 한편 동혁혁명 기념일을 제정하여 혁명의 기념을 민중과 더불어 지키고 이를 계승키로 하였다. 이에 교단은 3월 19일 동학혁명기념준비위원을 대표하여 신숙(申肅, 동학당 대표위원), 장기운(張基云, 천도교 교무관장), 오익제(吳益濟) 등 3인과 사계(斯界)를 대표하는 김상기(金庠基, 서울대학교 교수), 장도빈(張道斌, 단국대학교 교수), 최인욱(崔仁旭, 작가), 신일철(申一徹, 고려대학교 강사)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에서 무려 4시간 동안 좌담회를 갖고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였다. 조선일보사는 좌담회를 갖게 된 동기를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에 의의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오늘 (3월) 21일은 민중운동의 전통으로 깊이 새겨야 할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68년 되는 날이다. 민중의 힘이 과시된 이 운동은 당시의 봉건제와 침략주의에 항거해서 봉기했던 것으로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데 그 정신이 있었다. 이를 즈음해서 천도교중앙총부와 본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인 동 기념행사의 하나로서 사계학자들을 모시고 동학혁명의 뜻을 살피는 좌담회를 다음과 같이 마련했다. 오늘날까지는 이 혁명을 기념할만한 일자 표증이 확실치 못하였던 바, 최근 여러 기록을 수집 분석해본 결과 격문을 발표하고 봉기한 날이 3월 21일이라는데 확인되어 처음으로 기념행사를 갖게 된 것이다. (「좌담회 갑오동학혁명의 의의-그 67주 기념일을 맞아」, 『조선일보』 1961년 3월 20일자.) 이 기사에 따르면, 그동안 동학혁명을 기념할 만한 일자가 제대로 없었는데, 역사적 사료를 분사해본 결과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로 제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명칭도 ‘동학혁명’이라고 확증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로 제정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오익제) : 기록에 보면 고부에서 처음 농민봉기가 자연발생적으로 갑오년 정월에 일어났다가 이용태가 탄압을 심하게 되자 3월에 만여 명의 동학군이 일제히 궐기된 것으로 되어있더군요. 그런데 최인욱 선생께서는 「草笛」을 쓰고 계신데, 거기에 3월 21일 날 동학혁명이 본격적으로 거사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혹시 고증자료라도.... 최인욱 : 저는 소설을 쓰면서 이 역사를 제 주견 하에서 다 쓸어보았는데요 정월의 고부의 봉기와 3월 동학기포는 단계를 짓는 것이 어떨까 해요. 물론 정월 고부의 봉기가 동학혁명의 전초적 조건 즉 전초전의 역할이 되었지만 정월 고부의 그것은 그 전년에 빈번했던 민란과 성격이 거의 같고 다만 규모가 크다 뿐이지요. 그래서 과거에는 단계를 짓지 않고 정월 고부의 봉기를 그대로 하나의 동학의 내용으로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보면 그 정월의 고부민란이 그대로 수습되지 않았는 데서 점점 그것이 확대되어 가지고 3월에 이르러 드디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 호남의 여려 동학접주들이 격문을 발하고 소위 의식적으로 기포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정월 고부의 봉기는 민란으로서의 성격이었고 동학혁명은 소위 기포형식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또 격문으로 보나 확실히 3월에 와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헌들을 고증해 볼 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3월 21일로 소설에 쓰게 된 것은 고부민란에서부터 경과를 시간적으로 따져서 추상적으로 인정했는데 지금 여러 군데 기록에서 3월 21일이라는 것이 고증적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것 같은데... 사회 : 기록에 보면 「동도문변」과 또 당시의 일본공사관기록에 3월 21일로 드러나더군요. 최인욱 : 그 시일 문제는 다른 문헌이 나오지 않는 한 대단히 유력시 되고 있습니다. 김상기 : 그런데 그대의 기록은 양력을 표준으로 한 것도 있고 음력을 표준으로 한 것도 있어요. 정월 고부봉기의 중심인물이 역시 전봉준으로 볼 수 있고 이것이 졸창간의 일이 아니라 그 전해 계사년 겨울부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소위 동학의 남접 중진들의 움직임이 있었고요. 그 1월설에 있어서는 저도 30여 년 전에 알아보았습니다만 기록에도 보고 또 그때 난을 겪은 고부지방의 부호들에게 물어보고 특히 전봉준의 처숙이 송희오(宋喜五)인데 그의 손주 손용호라는 분이 정월 14일로 얘기해요. 이렇게 정월에 일어나고 고부에서 조병갑을 쫓은 후 박원명이가 임명되었는데 아주 부드럽게 다스려서 모두 갈아왔다가 이용태가 안핵사로 와가지고 포악한 짓을 하니까 다시 3월에 일어났다고 알려지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좀 더 신중하게 일자를 고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일철 : 김 선생님이 쓰신 책 가운데 『동학과 동학란』을 보면, 1893년 겨울부터 표면화했는데 그 만석보를 파괴한 것이 봄에 하지 않았나요. 봄이면 1월과 3월 사이로 볼 수 있는데... 김상기 : 만석보 문제는 정월 14일로 저는 기억되는데요. 사회 : 그러면 만석보 파괴 일자 문제는 따로 기록에 볼 수 있으니까 별문제가 아닌가요. 정월에 고부에서 봉기한 것도 사실이고 3월에 또한 기포한 것이 사실이고 6월에 집강소 시대로 들어갔다가 9월에 재기포한 것이니까요. 이 기포일자 문제는 이 정도로 그치면 합니다. 최인욱 : 결국 정월에 봉기했다가 백성에게 심한 피해가 오는데서 다시 본격적인 계획적인 조직적인 하나의 기포가 거기서부터 발단된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역사적 관찰에 있어서 기포의 단계를 어디서부터 짖느냐 하는 것은 그 연구하는 분들의 하나의 견해차이가 될 수 있겠습니다. 장도빈 : 그런데 애초부터 고부의 봉기가 전봉준의 지도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봉준은 처음부터 고부봉기를 일으켜 가지고 혁명을 이끌어 나가려는 사상을 가진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조사해보면 이것은 전봉준의 계획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좌담회 갑오동학혁명의 의의-그 67주 기념일을 맞아」, 『조선일보』 1961년 3월 20일자.) 위 좌담회 내용에 의하면, 동학혁명기념일을 3월 21일로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논점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바로 동학혁명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점이다. 최인욱은 3월 기포, 김상기는 신중론, 장도빈은 고부기포에 각각 동학혁명의 기점을 두고 있다. 즉 최인욱은 고부기포를 동학혁명의 전 단계로 인식하였으며, 김상기는 고부기포와 3월기포의 연결과정에서 좀 더 역사적 고증을 통해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장도빈은 전봉준의 역할을 볼 때 고부기포를 동학혁명의 기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혁명기념일은 ‘3월 21일’로 정하는 데는 무난하게 합의를 도출하였다. 당시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천도교단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김상기와 장도빈, 그리고 문학계를 대표하는 최인욱, 신진학자인 신일철 등이 참여하여 확정하였고, 이를 언론계인 『조선일보』가 뒷받침하였다. 동학혁명기념일 제정 후 첫 기념식 이와 같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처음으로 정해졌다는 점에서 기념일 제정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고 가진 첫 기념식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민족저항운동 사상 빛나는 한 전통으로서 기리 새겨야 할 갑오동학혁명 제67주년 기념식이 지난 3월 21일 천도교당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천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상오 11시 장기운씨 사회로 식이 진행되고 이영복 씨의 개회사와 오익제 씨의 약사보고에 이어 신숙씨의 기념사가 있었으며, 곽상훈 민의원 의장과 조한상 씨(정계 대표) 그리고 장도빈(학계 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식이 끝난 후에 이항녕 선생과 최인욱 선생 및 신일철 선생 세 분을 모시고 기념강연회가 있었는데 모인 청중이 시종 감격하여 마지않았다. (「갑오동학혁명 기념-스냅」, 『신인간』(속간 19호), 1961.4, 표지 3쪽.) 기념일 제정 이후 첫 기념식은 1961년 3월 21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천도교인과 서울시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천도교단을 대표하여 좌담회에 참석하였던 장기운, 신숙, 오익제 등이 주도하였으며 외부 인사로는 민의원 의장 곽상훈, 정계를 대표한 정한상, 학계를 대표한 장도빈 등이 축사를 하였다. 그리고 기념식 후에는 최인욱, 이항녕, 신일철 등 제씨가 기념강연을 하였다. 첫 기념식은 사회적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계, 학계, 문학계 등에서 대표들이 참석하였던 것이다. 첫 기념식 이후에도 동학혁명 기념식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제정된 동학혁명기념일인 매년 3월 21일에 개최되었다. 제68주년 동학혁명 기념식은 3월 21일 12시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이지형 국민운동본부 차장이 축사를 하였다. (「동학혁명 68주년 21일 기념식 거행」, 『조선일보』 1962년 3월 21일자.) 69주년 기념식은 3월 21일 오후 1시 국민회당에서 열렸다. (「21일 기념식 동학혁명 69주년」, 『동아일보』 1963년 3월 21일자.) 69주년 동학혁명기념일을 맞아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동학혁명의 의의를 밝힌 바 있다. (3월) 21일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중혁명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의 불씨를 던졌던 동학혁명의 제69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조 봉건사회가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병든 내적 모순을 드러내자 뿌리 깊게 얽히었던 민중의 불만이 약 30년간의 ‘민란의 시대’를 연출,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새 질서,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회혁명으로 번져 갑오경장이란 역사의 새 물결을 가져온 것이 바로 동학혁명이다. 착취만을 당하던 힘없는 농민들이 동학당을 지도자로 벌떼처럼 일어났던 이 혁명은 하나의 농민전쟁이었고 계급전쟁이었으며 또한 무력적인 사회혁명임이 분명했다. 머리와 허리에 잡색포를 두르고 손에는 칼, 창과 총기를 든 채 황색 깃발을 나리며 전라도로 충청도로 삼남 일대를 장악하고 서울로 강원도로 달려 연 3백만 동학군이 한결같이 부르짖었던 외침은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자’는 것이었다. (「동학혁명 21일은 제69주년」, 『경향신문』 1963년 3월 20일자.) 이와 같은 동학혁명의 의의를 기념하는 동학혁명기념일은 3월 21일을 기해 매년 기념식을 갖고 혁명 정신을 기렸다. 다만 처음에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거국적인 기념식이 되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도교단의 기념식으로 축소되었다. 그렇게 진행되어 오던 동학혁명 기념식은 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 1994년 3월 21일 오전 11시 탑골공원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교단은 동학혁명 기념행사에 보다 적극 나서야 1994년 동학혁명 1백주년을 계기로 일부 동학혁명 관련 단체에서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사회적 합의에 따라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고 기념식을 가져오던 천도교단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또한 천도교단은 이러한 논의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혼란을 거듭하였고 관점에 따라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비롯하여 관련 단체의 추천을 받은 인사들로 ‘동학농민혁명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념일 제정을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견과 논란을 거듭하였다. 천도교단은 어느 동학혁명 관련 단체보다도 먼저 사회적 합의를 거쳐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동학혁명기념일을 사회적으로 확산하지 못함에 따라 오늘날 이와 같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의 논란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제 천도교단은 어느 누구보다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였던 그 역사성을 확고히 지켜내야 한다. 그것만이 동학혁명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선열들을 올바르게 기리는 것이며, 그 혁명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
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2)3.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과 그에 대한 인식 일본군의 개입과 경복궁 점령으로 재기포한 2차 동학혁명은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된 조일 연합군과 동학군의 직접적인 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일본군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후비보병 제19대대의 3개 중대를 중심으로 후비보병 제18대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의 제4중대와 제7중대의 일부 병력, 그리고 부산수비대의 1개 중대, 해군 츠쿠바함(筑波艦)과 죠코함(操江艦)이었다.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인 후비보병은 만 20세에 상비병으로 3년간 군복무를 하고 예비역으로 4년을 보낸 후 다시 5년의 복무를 한 군 경험이 많고 노련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라고 할 수 있는 후비보병 제19대대는 일본 에히메(愛媛) 지역 출신들이었다. 후비보병 제19대대는 11월 12일(음 10월 15일) 용산을 출발하였다. 출발에 앞서 전달된 훈령에 의하면, 첫째는 동학군의 근거지를 찾아내어 이를 초절(剿絶)할 것, 둘째 동학군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초멸(剿滅)함으로써 동학군이 재흥하는 후환을 남기지 말 것, 셋째 조선군의 진퇴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지휘 명령을 받을 것, 넷째 보병 1중대는 서로(수원-천안-공주-전주), 보병 1중대는 중로(용인-죽산-청주-성주), 보병 1중대는 동로(가흥-충주-문경-낙동-대구)로 행진할 것, 다섯째 동학군을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내몰도록 하며 가능하면 러시아 국경으로 향하지 않게 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이후 동학군은 조일연합군(朝日聯合軍)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당하였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천도교창건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학군이 일본군과의 첫 교전은 괴산이었다. 이에 괴산에 당도하니 괴산군수, 충주군 주차 일병을 청하여 영전함에 포환(砲丸)이 여우(如雨)라. 도중(道衆)이 사(死)를 서(誓)하고 교전하여 피차 살상이 상당하더니, 마침 일모(日暮)한지라. 다수 교도 일제히 눌함(吶喊) 전진하여 일군(日軍)을 습살(襲殺)하였다.(『천도교창건사』) 동학군과 일본군은 괴산에서 첫 교전이 있었는데, 이 괴산전투에서는 동학군이 비록 승리하였지만 많은 희생을 해야만 했다. 당시 동학군은 2만여 명에 달하였으며, 일본군은 2개 분대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하라다(原田) 소위 등 부상 4명, 병사 1명 즉사에 불과하였지만, 동학군은 2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외에 일본군과의 전투는 공주 우금치전투를 비롯하여 태인전투, 용산전투, 광양과 섬진강전투 등에 관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전략) 때에 마침 관군의 원병인 일군이 대거 합류한지라. 동군(東軍)이 공주 효포에서 혈전 7일에 전세 불리함을 보고 퇴각하여 태인에서 일군과 교전하고(『천도교창건사』) 동군(東軍)이 용산에 이름에 뒤로 일군의 추격이 심하고 앞으로는 관군이 영격포위(迎擊包圍)하여 진퇴유곡이 된 지라.(『천도교창건사』) 퇴각 중의 도인 수만은 광양 섬진강 안에 둔하였다가 관군과 일군의 피습한 바 되어 강수(江水)에 빠져 진멸(盡滅)하고(『천도교창건사』) 이라고 하여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교전을 한두 줄로 언급만 하였다. 하지만 이들 전투는 동학혁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금치전투는 동학혁명 기간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으며 동학군 역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동학군 전사자가 37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비해 『동학사』에서는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병은 세를 합하여 동학군의 앞을 막아들어 온다”라고 하여 일본군의 진압과정에 대해 축소하였다. 이후 동학군의 퇴로과정에서 적지 않은 일분군과의 교전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부 지역 교정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수원부를 점령하고 남군(南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바, 관병과 일병을 만나 여러 날을 두고 싸우다가 (동학군이) 마침내 패하였고, (중략) 황해 일도의 동학군 수만을 일으켜 장차 남군과 세를 합하여 경성을 치고자 해주감영을 점령하고 있었던 바, 또한 관병과 일병을 만나 수십 일 동안을 두고 서로 싸워 양방의 많은 사상을 내었고, 마침내 동학군은 관일병에게 패한 바 되었다”(『동학사』)라고 하여, 수원전투와 해주전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각지의 교전에서 “관병과 일병도 많이 죽고”라고 하여 일본군도 적지 않은 피해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동학혁명이 끝나가는 1894년 12월 이후부터는 “조선의 남쪽은 관병과 일본군의 천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일본군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을 포함한 관군, 수성군, 민보군 등의 동학군을 참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이었으며, 그 결과 3, 40만 명의 동학군이 피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천도교창건사』도 20만 이상의 동학군이 죽임을 당하는 대참(大慘)이었다고 하였다. 그럼 해방 후에는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먼저 『천도교백년약사』를 살펴보자. 우선 동학군이 재기포한 배경은 “범궐(犯闕)한 일군들이 국왕을 핍박하고 국권을 유린”과 일군이 각지에서 동학군을 마구 참살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반봉건에서 반침략으로 전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동학군이 재기포하자 일본군은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군 진압할 것을 제안하고 관군을 지휘하여 작전계획에 따라 동학군을 초멸코자 하였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안동을 비롯하여 괴산, 세성산, 홍성, 이인, 공주, 해주, 원평과 태인, 은률, 서흥, 홍천, 하동 등지에서 치열하게 교전을 하였으며, 수백 명의 동학군이 살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전봉준의 피체와 재판과정에 일본군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천도교백년약사』는 앞서 살펴본 『천도교창건사』와 『동학사』보다는 구체적으로 폭넓게 일본군의 동향을 다루고 있다. 특히 동학혁명이 끝날 무렵에는 “일본군의 수색이 극심해지자 전국적으로 전토(田土)가 황폐해지고 도시와 농촌이 모두 일군의 왕래를 꺼리어 수확을 포기하고 촌민(村民)들이 도망하여 마을이 모두 비었다”할 정도로 일본군의 폐해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천도교약사』에서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 즉 세성산전투에서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전멸당하였다”거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는 “일본군 연합군이 최신무기로 무장한 채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우금치전투 이후 “일본군과 정부 연합군은 계속 동학군을 추격 공격하였다”하고 하여, 동학군을 섬멸하고자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인전투와 종곡전투에서도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전하였음도 아울러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동학혁명 개입에 대해 “아시아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최초 대량학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간행된 교서에서는 동학군과 일분군과의 전투과정 뿐만 아니라 그 실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판단된다. 이로 볼 때 일본군에 대한 인식은 초기 동학교서에서는 가급적이면 필요 이상으로 학살 등에 대해 표현하지 않고 있지만 후기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학혁명에 관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연구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제에 대한 책임을 보다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선도사) -
중편소설 <하얀 혁명>(2)<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벼린 무기가 미흡하고 쌓인 전량이 부족하다 하여 천심을 회복하려는 한울님의 뜻을 저버리고 출진을 망설여서 되겠습니까? 철성(鐵聲) 소리만 듣고서도 떨쳐 일어서는 기백이 있어야 천지가 돕고 신명이 동할 것입니다. 이미 호남의 전봉준 장군이 일어섰다 하고, 해월선생께서도 기포를 명하셨는데 무얼 더 주저한단 말입니까? 내 안에 한울님이 모셔져 있음을 아직도 믿지 못한단 말입니까?” 이창진 접주의 절명(絶命)이라도 불사할 만한 토로가 있자 의기소침해 있던 좌중에 일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규석은 평소 이창진의 척왜양에 대한 소회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성심을 다해 동의했고, 다른 접주들도 우레 같은 박수로 격려를 보냈다. 특히나 호남동학군이 기포했다는 소식에 경기동학군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당위성이 더해져 회의장 분위기가 일변 출진하는 쪽으로 울흥하게 일었다. 수접주가 다시 나섰다. “이창진 접주의 고변(高辯)을 듣자니 묵우(默祐)의 기운이 출중하여 후천개벽이 멀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 우리 이천포도 기포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이제부터는 도소의 육임(六任)을 중심으로 서로 뜻이 맞는 접주들끼리 모여 출진을 위한 세부 사항을 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도소 회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일동 심고. 한울님 감사하옵니다. 한울님의 은덕으로 오늘 이천포 동덕이 일심으로 기포를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안위보다는 한울님의 섬김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오며, 광제창생한 나라에서 평등한 백성 되기를 간구하오니, 척왜양의 기치가 한울님께 닿아 사해 만민이 한울사람과 더불어 살게 해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이천포 접주들 모두 엎드려 기도드렸사옵니다.” 수접주의 심고가 끝나자 각 고을의 접주와 도소의 육임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향후의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무기와 전량의 확보였다. 이미 황산의 강용구 접주가 음죽과 안성의 관아를 깨뜨릴 방도를 제시하고 나선 터라 젊은 접주들은 자연스레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강용구 접주가 먼저 말머리를 잡았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음죽과 안성은 저의 세거지(世居地)인 황산과 지척이라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두 관아는 방비도 허술하고 제가 익히 알고 지내는 별감과 좌수가 여럿 있어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습니다. 더하여 향청(鄕廳)의 담이 높지 않아 월장(越墻)하기로 친다면 여반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군사의 숫자도 몇 안 되고 기강도 무뎌 동학군의 철성 소리만 들어도 삼십육계 줄행랑칠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안성은 신임군수가 부임하기 전이어서 가히 최적의 기회라 할 만합니다. 화승총이나 활을 든 인원 200인이면 능히 성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강용구의 말에 용기를 얻은 접주들이 자기 접에서 힘을 보탤 만한 인원수를 어림해 숫자를 내놓았다. 삽시간에 400인이 모여졌다. 강용구는 화선지를 꺼내 접별로 제시된 인원수를 적고 물건 실어 나를 달구지 숫자도 추렴해 함께 적었다. 화선지 가득 숫자가 적혀나가자 젊은 접주들은 일본군과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벌써 승리를 쟁취한 듯 흐뭇하게 양팔을 겹쳐 겨드랑이 밑에 고였다. 출진에 앞서 비축할 물건의 목록을 만들어두자는 건의가 나와 즉석에서 현물 없는 오일장이 열리기도 했다. 화선지를 따로 꺼내 쌀이나 콩, 동아줄, 푸른 대나무, 삼 줄기, 볏짚, 소금, 석유, 화약, 대동목(大同木) 등 비축해야 할 물품의 목록과 수량을 세세히 적어나갔다. 드디어 거사 날짜가 정해졌다. 정확히 닷새 후인 9월 25일, 오포가 울리는 정오. 민정(民丁)을 200인씩 둘로 나누어 음죽과 안성의 두 관아를 동시에 공격하며, 탈취한 무기와 전량은 즉각 광혜원으로 옮겨 본격적인 출진에 대비키로 했다. 공격은 의외로 쉽게 진행되었다. 어디서 비밀이 누설되었는지 막상 당일이 되자 동학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곡괭이와 쇠스랑, 거릿대를 든 농민들이 관아 앞에 구름처럼 몰려와 꽹과리를 치고 고함을 지르자 혼비백산한 관군들이 무기를 집어 던지고 삼십육계 줄행랑치기 바빴다. 동학군은 죽창 한번 휘두르지 않고 쉽사리 관아를 점령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마을 축제 같았다. 그만큼 동학군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기도 했고,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일이라면 농민들이 쌍수를 들어 소매를 걷고 나선 결과였다. 탈취한 물건은 달구지에 싣지 못할 만큼 많았다. 화승총이나 창, 장검 같은 무기류도 많았고, 곡식이나 피륙은 몰려든 백성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도 넘쳐났으며, 노비문서나 채무문서 등을 샅샅이 찾아내 불살라버림으로써 애초에 동학이 기치로 내걸었던 폐정 개혁안 12조를 실천했다. 이 정도 무기와 군량이면, 특히나 이렇게 들끓는 민심이면 출진을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관아 공격을 성공적으로 마친 각 접은 접주를 중심으로 바삐 움직여 무기와 전량을 싣고 애초에 모이기로 했던 광혜원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허연 옷을 입고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를 보자 이천 수접주는 일이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모일 사람은 관군이나 일본군을 상대로 싸울 젊은이들이어야 하거늘 막상 인원을 점고해보니 어린애까지 동반한 식솔 전체가 떨쳐나섰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는 유랑민 차림의 농부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무리를 이끌고 싸움을 벌인다는 건 숫자만 요란했지 오히려 방해꾼이 더 많다는 사실에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급히 몇몇 접주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가속(家屬)을 대동하고 나서면 어찌 총 든 일본군과 대적한단 말이오?” 수접주가 물고 있던 장죽을 뽑아 놋재떨이를 탕탕 치며 힐난하자 접주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답했다. “가장이 떠나고 나면 남은 식솔이 받을 핍박이 극심한지라 함께 나선 것이지요.” “작년 보은 취회 때도 온 식구가 따라나선 바 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하니 막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연초(年初)에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 이후 안핵사가 지역 인민을 동학패당이라 지칭하고 겁박하기를 부지기수,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를 붙잡아 대살(代殺)까지 행하였다 들었습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누가 남고자 하겠습니까?” “전장에 나가더라도 밥은 먹어야 할 터, 불 때고 밥 짓는 일을 어찌 허투루 보냐며 아녀자들이 팔 걷고 나서는 통에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보니 접주들의 말이 구구절절 옳은지라 수접주는 장죽에 담긴 담뱃가루가 줄줄 새는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다.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은 다시 없었다. 유탄이 날고 포환이 떨어지는 전쟁터에 사패지(賜牌地) 경작하러 떠나는 작인들처럼 가속을 대동하고 나섰으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무리를 이끌고는 전투는커녕 보은까지 행군해 갈 자신이 없었다. 가는 도중에 맞닥뜨리게 될 일본군과 관군과의 교전을 생각하면 머리칼이 쭈뼛 섰다. 동학군을 보면 굶주린 담비처럼 덤벼들 게 분명한데 이런 오합지졸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흘리게 될 피의 강이 눈앞에서 벙벙하게 흘렀다. “아무래도 아니 되겠소.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 식솔을 대동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 한 가지 제안하리다. 무기 없는 사람은 인원에서 제외합시다. 화승총이나 장창, 최소한 궁시를 든 자 이상만 추리자 이 말이오. 어떻소?” “그 말씀이 장히 타당합니다. 그렇게 합시다.” 즉석에서 동의가 나왔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는 접주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사코 고집을 꺾지 않는 자가 있을 것인즉.” 중구난방이 이어졌다. 더 듣자 해도 뻔한 말들이라 수접주가 단호하게 오금을 박았다. “군율로 그리 정했다 하면 필시 마음을 돌릴 것이오. 엄중한 군율로 말이오.” 손사래 치며 나서려던 자들이 세웠던 무릎을 도로 개고 주저앉았다. 수접주가 윽박지르던 기세를 몰아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일단 그 일은 그렇게 하십시다. 그보다 먼저, 이번에 관아에서 탈취한 병장기를 다룰 훈련이 필요할 텐데 말이오?” 수접주가 어디서 들은 말이 있었던 듯 군사 훈련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 일이라면 각 접에 포수 노릇하는 도인이 상당수 있을 것이니 이들에게 포술을 가르치게 함이 어떻겠소?” “좋소. 당장 내일부터 훈련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포수를 모이라 연통을 넣으시오.” 얘기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더 뭉개고 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회의를 마친 접주들이 본거지로 돌아가 결과를 알렸다. 무수한 반대가 일었으나 결사코 참여하겠다는 사람에 한해 죽창이라도 가졌다면 끼워주는 선에서 무마하고 포수 교관을 선발하여 화승총 사격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나 말이 훈련이지 심지에 불을 붙이다가 손가락을 태워 먹기 일쑤였고, 화약 쟁이는 손놀림이 허술해 쏟는 게 태반이었으며, 총알 튀어나가는 시간을 가늠하지 못해 헛방을 놓기 일쑤였다. 한나절 씨름한 끝에 겨우 탄환 장전 기술은 익혔으나 과녁 맞추는 일은 또 다른 연찬이 필요한지라 능숙해지기까지는 하세월이었다. 사격훈련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그것은 군사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총기 탓이었다. 총이 많으면 한꺼번에 여러 명을 훈련시킬 수 있지만, 워낙에 숫자가 부족한지라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게다가 화승총은 명중률이 떨어져 조준 사격이 쉽지 않았고, 재장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일제사격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총은 칼이나 창과 달리 직접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아니어서 관아나 적병에게 탈취하지 않고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기왕에 지니고 있던 것과 음죽과 안성에서 빼앗은 화승총을 합친다 해도 일본군이나 경군(京軍)이 지닌 신식무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게 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있는 다른 관아를 습격하여 탈취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창진 접주가 진천(鎭川) 관아를 기습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사격훈련을 마친 동학도를 중심으로 특공부대를 편성해 야습하자는 계획이었다. 그의 계획에 찬동하는 도인이 대거 몰려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많은 인원이었다. 엄선을 거친 후 1개의 주공 부대와 2개의 협공 부대를 편성해 맹훈련에 돌입했다. 습격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무기는 빈약할지라도 워낙 많은 숫자가 야음을 틈타 일시에 달려드니 진천 관아의 관군은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줄행랑치고 말았으며, 현감과 아전을 포박해 꿇리고, 군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다수의 무기와 탄환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음죽과 안성에 이어 진천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자 동학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제는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천포가 진천 관아 습격에 성공한 직후 경기포 본진으로부터 광혜원에서 황산으로 이동하라는 군령이 내려왔다. 이천 수접주의 지휘 아래 큰 짐은 소달구지에 싣고, 멜 수 있는 짐은 등에 지고 길을 나섰다. 만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다. 황산에 도착하니 원주, 횡성, 홍천 지역의 강원도 군과 충청도 북부에서 기포한 동학군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족히 1만은 넘어 보였다. 의암 손병희 대접주가 경기동학군의 수장으로 나선 것도 큰 힘이 되었다. 한울님의 옹위와 보살피심이 황산에 모인 동학도의 신심을 부추겨 주문 외우는 소리가 낭자하게 울려 퍼졌다. 다시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황산은 지세가 협소해 사소한 움직임에도 목화송이 휩쓸리는 형국이라 인근의 무극 장터까지 주둔지를 확장하여 북새통을 이룬 후 드디어 동학군은 보은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연도에 구경 나왔다가 빗겨 깎은 죽창이나마 꼬나들고 끼어드는 인원이 늘어나는 통에 대열은 열두 발 상모 끈처럼 장사진을 이루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열은 크게 선봉군과 중앙군, 후위군의 셋으로 나누고, 중앙군은 다시 손병희 대접주가 이끄는 중군과 좌, 우군의 셋으로 공격대형을 갖추었다. 진천 관아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천포는 후위군의 주력으로 편성되었다. 경기동학군은 소걸음으로 꾸준히 움직여 증평을 거쳐 괴산을 향해 짓쳐 나아갔다. 괴산은 동학군이 섬멸해야 할 1차 목표 지점이기도 했다. 괴산을 공격 목표로 삼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부족한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괴산 관아에서 이 지역의 동학 접주 2명을 붙잡아 처형한 것을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괴산 일대는 삽시간에 몰려드는 동학군으로 북적였고, 공격 정보를 입수한 관아의 수성군(守城軍) 역시 횃불을 치켜들고 여장(女牆)을 두텁게 덧쌓아 방비하고 있었다. 한편 괴산은 일본군이 동학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는 지역이기도 했다. 일주일 전, 경기동학군 선발대의 습격으로 괴산과 지척에 있는 안보(安堡) 병참부가 공격을 당해 군용전신이 끊기는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군용전신은 일본군이 보호 1순위에 놓는 군사 장비로서, 만약 괴산이 점령되면 인근에 위치한 가흥(可興) 병참부 역시 위협받을 처지에 놓이기에 일본군은 이미 이 일대에 정찰병까지 내보내 첩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전투는 뜻밖에도 일본군의 기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경기동학군의 선봉이 괴산 못미처의 작은 고개를 넘기 위해 접근하는 도중 이곳에서 정찰 활동을 벌이던 일본군 정찰병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 2개 분대 30명의 정찰대가 2개 조로 나뉘어 1개 조는 선봉군의 정면을 파고들었고, 다른 1개 조는 측면으로 우회하여 중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과의 첫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습 공격을 받은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고, 고작 2개 분대의 공격으로 선봉군과 중앙군이 속수무책 당하고 만 것이었다. 이번에도 전세를 유리하게 이끈 이는 이창진 접주였다. 일본군 숫자가 많지 않은 걸 알아차린 그가 후위군 화승총 부대를 지휘해 일제사격을 가한 결과 실탄이 바닥난 일본군이 퇴각하기 시작했고,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용품까지 버린 채 충주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괴산 초입에서 치른 일본군과의 첫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동학군은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기쁨에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경기동학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청산에서 북상하여 올라온 동학군과 세를 합쳐 괴산 관아로 쳐들어갔다. 동학군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성벽에 운제(雲梯)를 걸치고 불화살을 날리며 통나무수레로 성문을 깨뜨렸다. 이를 본 관군이 대군의 숫자에 놀라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내고 도망쳐버렸고, 관군과 함께 저항하던 부락민 삼십여 명을 붙잡아 도륙 내자 괴산 일대는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화염과 함성으로 뒤덮여 동학군 세상이 되고 말았다. 중앙군 손병희 대접주의 행렬이 성문을 지나 관아에 도착하는 것을 끝으로 괴산전투는 막을 내렸다. 한규석은 이창진과 함께 관아로 들어가 손병희 대접주에게 승리 축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대접주께서 무척 기뻐하셨어. 이번 전투에서 자네의 공로가 지대하다는 걸 잘 알고 계시더군.” 한규석은 이창진의 무공을 추켜세우며 진중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 칭찬이나 듣자고 한 일이겠나?” “아무튼 장한 일을 했어. 그런데 말일세. 우리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죽거나 다친 자가 무수하다 들었네. 그 수가 얼마나 된다던가?” “아직 다 수습된 건 아니지만 죽은 자가 족히 백 명은 넘는다 들었네. 자세한 것은 곧 알게 되겠지.” “관군과 일본군은 몇이나 죽었다던가?” “관군의 숫자는 지금 파악 중이고, 일본군은 한 명이 죽고 네 명이 부상당했다 들었네.” “어허, 낭패로고.” “낭패라니?” “관군의 사상자는 빼더라도 일본군 한 명을 죽이는 동안 동학군 백 명이 죽었다면 이 어찌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진 무기가 열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네. 이 어찌 제대로 된 전투라 할 수 있겠나? 그리고 앞으로가 더 문젤세. 고작 일본군 정찰병 삼십 명이 우리 동학군 일만 명을 업신여기고 달려들 정도인데 장차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파견했다는 후비보병(後備步兵) 19대대를 만나면 어찌 되겠나? 게다가 죽산 부사 이두황(李斗璜)의 장위영(壯衛營) 군과 안성 군수 성하영(成夏泳)의 경리청(經理廳) 군이 지난번 우리가 지나왔던 광혜원과 안성에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나? 일본군과 관군이 우리 동학군만 보면 진멸하러 달려들 것이 불 보듯 뻔한데 항차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래서 괴산 관아를 공격한 게 아니었나? 노획한 무기도 상당하고 환곡 사백 석에 공전(公錢)도 팔천 금이나 확보했다네.” “앞으로 날은 더 추워질 테니 입성도 두툼히 갖추어야 하고, 많은 인원에 먹성 대기도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걱정이 하나 더 생겼네. 자네도 괴산 읍내 불타는 것 보지 않았는가? 탐관오리들이 끼친 패악을 참지 못해 당장 개벽 세상을 만들 것처럼 날뛰는 사람들 말일세. 이들이 관가나 민가 지붕에 불쏘시개를 찔러 넣어 소실된 가옥만도 오백 채가 넘는다네.” “나도 기실은 그게 걱정일세.” 둘은 전화(戰火)의 참상이 채 가시지 않은 읍내를 둘러보며 품었던 소회를 풀어냈다. 외적의 침탈과 모리배의 악행을 징치하기 위해 기포한 동학군이건만 이 중에는 시정잡배, 협잡꾼까지 묻어 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이가 있으나 이들을 추려낼 방도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로 인해 화란(禍亂)이 더욱 극심해질 게 염려스러웠다. 이창진은 가던 길을 멈추고 행전을 조여 매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이제부터라도 군율로 더욱 엄히 다스리고 전량을 철저히 단속함은 물론, 무리 중에서 동학교에 입도하지 않은 자들을 솎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화적 떼와 다를 것이 무언가? 우리 이천접이 먼저 솔선하여 경기포의 모범을 보이세.” 한규석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전투 결과를 세밀히 분석하고 기록해 차기 전투에 대비하는 일도 생각해봐야겠어. 허투루 병력을 낭비하여 1대 100으로 동학군이 죽어서야 쓰겠는가? 전황의 유불리와 진퇴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전투상보(戰鬪詳報)를 꼼꼼히 기록하는 것도 엄중한 일일 걸세. 내가 이 일을 자청해서 맡아 할 터이니 그리 알게나.” 한규석은 이천접 진중으로 돌아오는 즉시 한지 두루마리를 한 채 사서 마름질하여 지니고 다니며 난중 세사(亂中細事)를 꼼꼼히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
주민등록증, 56년 만에모바일 발급 제도기반 갖추다앞으로는 실물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휴대전화에 주민등록증을 저장해 편리하게 본인확인이 가능해진다. 행정안전부(장관 이상민)는 모바일 주민등록증 발급 근거를 담은 「주민등록법」 개정안 시행(12.27.)을 앞두고 발급절차, 보안대책 등 법에서 위임한 세부사항을 규정한「주민등록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이 11월 26일(화)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다. 법령 개정에 따라 12월 27일(시범운영)부터는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17세 이상의 국민은 희망하는 경우 모바일 주민등록증을 추가로 신청할 수 있으며, 모바일 주민등록증과 함께 실물 주민등록증도 유효하게 사용 가능하다. 모바일 주민등록증은 다음 2가지 방법으로 신청할 수 있다. 첫째, 읍·면·동 주민센터를 방문하여 모바일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해 생성되는 1회용 QR코드를 촬영하여 발급받을 수 있다. 이 경우 신청 즉시 발급받을 수 있으나 휴대전화를 바꿀 경우 주민센터를 다시 방문하여 모바일 주민등록증을 재발급받아야 한다. 둘째, 실물 주민등록증을 IC칩이 내장된 주민등록증으로 교체하면 읍·면·동 주민센터를 방문하지 않고도 모바일 주민등록증을 직접 발급받을 수 있다. IC칩이 내장된 주민등록증은 발급 편의를 위해 새로 도입된 실물 주민등록증이며, 주민등록증 발급 신청 시 IC(집적회로)칩을 포함하여 발급받을 수 있다. IC칩 내장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사람은 주민등록증을 휴대전화에 접촉해 모바일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수 있으며, 휴대전화를 바꿔도 IC칩 내장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주민센터를 찾지 않고도 모바일 주민등록증 재발급이 가능하다. 특히, 17세가 되어 주민등록증을 최초로 발급받는 사람*은 IC칩이 내장된 주민등록증을 무료로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해 2025년 주민등록증을 처음으로 발급받는 대상자*부터 IC칩 내장 주민등록증을 무료로 발급받게 된다. * 2025년 주민등록증 최초 발급 대상자인 2008년 출생자는 468,773명 이에 더해, 개인정보 유출, 부정사용 등에 대비하여 모바일 주민등록증에 블록체인, 암호화 등 다양한 보안기술을 적용하고, 보안대책을 마련했다. 모바일 주민등록증은 본인명의 휴대전화 1대에서만 발급 가능하며, 최신 보안기술 적용을 위해 3년마다 재발급받아야 한다. 휴대전화를 분실*한 경우 모바일 주민등록증의 효력을 정지하여 도용 및 개인정보 유출을 방지할 계획이다. * 가까운 주민센터를 방문하거나, ‘모바일 신분증 누리집’(www.mobileid.go.kr) 또는 전용 콜센터(1688-0990)에 분실 신고 행정안전부는 모바일 주민등록증의 안정적 도입을 위해 9개 지자체*를 선정하여 12월 27일부터 약 2개월간 시범 발급 기간을 운영한 후 전국에서 모바일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 (광역) 세종, (기초) 강원 홍천군, 경기 고양시, 경남 거창군, 대전 서구, 대구 군위군, 울산 울주군, 전남 여수시, 전남 영암군 시범기간에는 시범발급 대상 지역에 주민등록된 주민이 관할 읍·면·동 주민센터를 방문해야만 모바일 주민등록증을 신청할 수 있다. 이상민 장관은 “지난 1968년 11월 21일 실물 주민등록증을 최초로 발급한 이후 꾸준히 개선된 주민등록증이 약 56년 만에 처음으로 실물 형태를 벗어나 ‘모바일 주민등록증’으로 혁신됐다”라며, “최선을 다해 준비한 만큼, 시범 발급에서 개선 필요사항을 찾아 보완하여 모든 국민이 모바일 주민등록증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