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성강현 대동교구장, 『수운의 길을 걸어 동학을 만나다』 출간성강현 대동교구장이 신간 『수운의 길을 걸어 동학을 만나다』(선인출판사) 를 출간하며,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생애와 사상을 따라가는 새로운 연구서를 선보였다. 이번 저서는 수운대신사가 걸었던 길을 실제 답사하며 정리한 자료와 사료를 토대로 동학의 사상적 근원과 역사적 맥락을 입체적으로 조망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성강현 교구장은 책에서 수운대신사의 사상을 “한울님을 향한 깨달음과 세상을 향한 실천의 결합”으로 규정하고,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정신이 한국 근대정신의 핵심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경주·영남 지역 곳곳에 남아 있는 수운대신사 관련 유적과 동학의 흔적을 사진과 기록으로 생생하게 담아, 독자가 실제로 ‘수운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출판사는 서평을 통해 “이 책을 통해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인물인 수운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히며, “특히 천도교인에게는 신앙을 다지는 계기가 되고, 수운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유적을 편리하게 찾는 데 필요한 안내서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책에 담긴 수운의 삶이 녹아 있는 장소와 그가 걸었던 길을 걸으면서, 독자 각자가 자신의 문제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함께 성찰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이번 신간은 동학농민혁명 서훈 논의가 활발해지고 동학 정신이 사회적 관심을 받는 시점에 출간되어, 수운대신사의 사상과 동학의 원류를 현대적 시각에서 다시 해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학계와 종교계뿐 아니라 동학을 처음 접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길잡이가 될 전망이다. 저자 성강현 교구장은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 내 천도교인들의 활동 연구, 동학과 천도교사 연구를 비롯한 근현대사 전반에 대한 연구에 매진해왔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25일○ 1513년, 에스파냐 탐험가 발보아, 태평양 발견 에스파냐 탐험가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 1475~1519)가 파나마 지협을 넘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발견하였다. 발보아는 1510년 파나마에 상륙하여 무능한 총독을 쫓아낸 뒤 총독이 되었다. 초기에는 다른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원주민을 학살하고 고문했으나, 한 원주민 추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 학살을 멈추고 원주민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1513년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태평양에 도착했고, ‘남쪽 바다(Mar del Sur)’라고 이름 지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인도라고 생각한 것처럼 발보아 역시 태평양을 작은 만으로만 생각했다. 태평양 발견으로 본국인 에스파냐에서 발보아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신임 총독은 그의 인기를 우려해 발보아에게 협력한 원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발보아에게도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 1776년, 정조,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1752~1800)는 즉위 후인 음력 9월 25일, 창덕궁 금원 북쪽에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 직제학, 직각, 대표, 검서관 등의 관리를 두었다. 규장각은 왕실의 학문 연구 기관이며 도서관이자 국정 운영의 자문 기관으로서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의 학문 발전과 문화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정조의 개혁 의지와 학문 존중 정신이 집약된 상징적 제도라 할 수 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 산하로 재편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폐지되었다. 해방 이후 일부 남아 있는 도서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이관되었다. ○ 1881년, 중국의 사상가 루쉰이 태어나다 중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 루쉰(魯迅, 1881~1936)이 이날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이며, ‘루쉰’은 데뷔작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할 때 처음으로 사용한 필명이다. 『광인일기』는 신문화운동을 주도한 세력의 시선에서 본 봉건사회에 대한 최초의 도전서였으며, 사상혁명과 문학혁명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중요한 작품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아Q정전(阿Q正傳)』은 신해혁명 시기 중국 농촌의 생활상을 심각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봉건적 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루쉰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떨치게 했다. 루쉰의 사상과 문학은 이후 중국 현대문학의 초석이 되었고 루쉰이라는 이름은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로 자리매김했다. ○ 1950년, 시인 정지용이 사망하다 한국 현대시의 대표적 서정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이 세상을 떠났다. 충북 옥천 출신으로, 휘문고보와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휘문고보 교사를 거쳐 광복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향수」, 「유리창」 등의 작품으로 섬세한 언어와 서정적 감수성을 통해 한국어 시의 미학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
오늘의 소사(小史) ○ 9월 6일○ 1914년, 독일군, 연합군과 마른 전투를 개시하다. 1914년 걷잡을 수 없는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리 마른강 인근에서 독일군과 프랑스, 영국 연합군 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주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의 기세에 밀려 패배하였고 이는 독일의 항복을 촉진했다. ○ 1937년,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1908년 4월 1일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Rev. Eugene Bell) 목사가 설립한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고, 1937년 9월 6일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했다. 이후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동창회의 눈부신 활동으로 1945년 12월 5일 복교, 오늘에 이른다. ○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언. 광복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좌우익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미군 진주에 앞서 미리 정부 조직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이후 인민위원회가 지방의 치안을 담당했다. 대한민국의 독립에 크게 기여했으나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 1950년, 여군 창설. 6.25 전쟁 중 ‘여자 의용군 교육대’가 효시가 되어 간호, 홍보, 서무 등 행정 분야를 넘어 실제로 전투와 지원 업무에 참여하며 활약했다. 매년 기념행사가 열리며, 군 조직의 다양성과 전문성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군의 핵심 인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1952년, 세계 저작권 협약 성립. 이날 제네바에서 서명되고 1955년 9월 16일 발효된 세계 저작권 협약은 ‘문학, 예술적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베른 협약’과 함께 개정되고, 1971년 7월 24일 파리에서 또다시 개정된 협약이 작성되었다. 당사국은 91개국에 이르며, 우리나라는 이 조약에 가입하여 1987년 10월 1일부로 저작권 협약을 적용하였다. -
이도천 선도사 순도 47주기 추모, “통일의 불꽃” 다시 되새겨이도천 선도사 순도 47주기를 맞아, 천도교 교단과 시민들이 그의 뜻을 기리는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이도천 선도사는 1978년 8월 5일, 임진각 철조망 앞에서 “조국이여, 통일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분신 순도한 천도교 선도사다. 47년이 흐른 올해, 그날의 숭고한 뜻을 기억하고자 추모식을 봉행하였으며, 교단과 신앙인들은 생명으로 통일을 외쳤던 한 신앙인의 정신을 다시 되새겼다. 이날 추도식은 사단법인 동학민족통일회가 주최하고 천도교중앙총부,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의 후원으로 봉행하였으며 이문상 동학민족통일회 사무총장의 집례, 신혜원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의 경전봉독(성령출세설), 최용근 동학민족통일회 수석공동의장의 약력보고가 있었다.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이 대독한 박인준 교령의 추모사는 “오늘 통일열사 이도천 선도사의 분신 47주기를 맞아, 이 행사를 새롭게 되살리고 매년 이어가며, 선도사의 순도 정신을 잊지 않고 동학 이념의 사회적 구현을 이루어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주선원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은 위령문을 통해 “선도사님께서 천사님의 뜻을 받들어서 도를 닦고 불의와 싸우신 그 정신과 뜻을 저희들도 받들어서 수도와 포덕에 더욱 힘쓰고, 기어이 민족통일의 숙원을 완수하여 지상천국 건설의 대원을 달성하고야 말 것을 고인의 영전에 맹세합니다”라고 말했다. 임진각 철책 앞에서 외친 “통일하라” 1908년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송호리에서 출생한 이도천 선도사는 함흥농업학교와 수원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에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38년부터 함흥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교회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함흥청우당 선전부장에 선임된다. 1948년 청우당 남북연락책임자로 활약하던 중 내무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여 부산에 거주하여 1952년 부산시 좌천 동전교실을 창설하였다. 1976년 춘천교구장에 선임되어 교구발전에 헌신하다가 1978년 8월 5일 임진강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아래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순도하였다. 입암 이도천 선도사는 통일운동을 전개하며, 교단의 포덕정신에 입각해 민족의 하나 됨을 서원해오다가 순도 직전 유언을 통해 “내 죽음이 통일의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히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천주의 신앙과 인내천의 실천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이번 추모식에는 임진각 앞에 걸린 ‘평화통일’ 현수막과 함께 묵념, 헌화, 천덕송 합창 등 순도의 의미를 기리는 시간으로 이어졌으며 추모식에 참석한 참석자들은 이도천 선도사의 신앙과 결단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광복 80년, 분단 80년… 여전히 남은 과제 “한울님의 뜻 따라 민족 하나로” 이도천 선도사의 순도는 통일의 염원을 넘어 신앙적 실천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선생의 외침은 오늘날까지도 천도교인 모두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분단 80주년이 되는 해다. 이도천 선도사의 순도는 물리적 분단을 넘어, 신앙과 생명으로 시대를 깨우고자 한 울림이었다. 이번 추모식을 계기로, 교역자 및 교인들은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실천적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 ‘강윤진 차관 취임 축하’ 서한 보내국가보훈부(장관 강정애)는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가 신임 강윤진 국가보훈부 차관의 임명을 축하하는 서한을 보내왔다고 밝혔다. 지난 14일(월) 발송된 서한을 통해 파트릭 보두앙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장은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의 이름으로 차관님께 저희의 진심을 다해 축하의 뜻을 표한다”며 “한국전쟁 동안 한국의 많은 고지에 흐른 피로 맺어진 프랑스와 대한민국 양국의 우정을 위해 차관님과 더불어, 그리고 차관님의 뜻에 따라 계속 노력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 수년간 한국을 방문하여 차관님을 뵌 프랑스의 마지막 참전용사들은 차관님의 확약(의지를 담은 약속)과 행동을 기억하고, 차관님의 환대와 열정을 익히 알고 있다”면서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 회장으로서 한국전쟁 75주년 및 프랑스·한국 외교 수립 140주년의 일환으로 모든 공동 행동을 취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파트릭 보두앙 회장은 9월 한국 방문 때 강윤진 차관을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차관으로서 성공을 거두기를 바란다며 서한을 마무리했다. 강윤진 국가보훈부 차관은 “파트릭 보두앙 회장님과 프랑스 참전협회의 축하 서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국가보훈부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투혼을 발휘하셨던 유엔 참전영웅과 유가족분들을 위한 국제보훈사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출처 : 국가보훈부 -
천도교중앙총부, 한국전쟁 발발 75주년 맞아 평화 성명 발표천도교중앙총부는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한반도 및 전 세계의 평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의 비극을 상기시키며,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된 참상을 되새겼다. 이어 “우리는 깊은 고통과 분단의 상처를 안은 채 오늘날까지 살아왔다”며, 전쟁이 남긴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했다. 천도교는 인류 공동체가 직면한 또 다른 갈등 상황에도 주목했다. 우크라이나의 장기화된 전쟁, 중동 지역의 군사적 충돌 등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폭력과 무력행사를 언급하며,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바탕으로, 생명 존중과 평화 지향의 실천을 천명했다. 전쟁은 생명을 앗아가고 인간 존엄을 짓밟는 반생명적 행위라는 인식 아래, 천도교는 전쟁의 재발을 막고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갈 것을 촉구했다. 성명서에서 천도교는 “한국전쟁으로 순도·순국한 이들의 희생을 깊이 추모하고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기억한다. 남북이 갈등을 넘어 화해와 공존의 길로 나아가기를 촉구한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과 무력 충돌의 즉각적인 중단을 요구하고, 생명과 평화를 위한 인류 연대를 염원한다.”라고 입장을 발표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앞으로도 인내천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며, “다시는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번 성명은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넘어,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종교계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기를 기대한다. 아래는 이번에 발표한 성명서의 전문이다. ▪ 한국전쟁 발발 75주년 성명서 ▪ 전쟁의 비극을 넘어,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향하여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천도교는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전쟁으로 희생하신 모든 분들의 넋을 경건히 추모하며, 다시는 이 땅과 세계 곳곳에 전쟁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성명을 발표합니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동족 간의 총칼이 부딪히는 비극의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스러지고,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되었으며,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깊은 고통과 분단의 상처를 안은 채 오늘날까지 살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기억함과 동시에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군사적 충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장기화된 전쟁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중동에서는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이어지며 더 큰 재앙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전쟁은 생명을 앗아가고 인간의 존엄을 짓밟으며, 공동체의 미래를 파괴할 뿐입니다.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임을 선언합니다.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는 오늘, 천도교는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순도, 순국하신 모든 이들의 희생을 깊이 추모하며, 남겨진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기억합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라며 남과 북이 갈등과 대립을 넘어 화해와 공존의 길로 나아가기를 촉구합니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무력 충돌의 즉각적인 중단과 인류 공동체가 생명과 평화를 중심으로 연대할 것을 염원합니다. 천도교는 앞으로도 인내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이 존중받고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실천에 함께할 것입니다. 전쟁을 넘어서, 다시는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 166년(2025년) 6월 25일 천도교중앙총부 -
천도교, DMZ 생명평화순례 화석정 위령식 봉행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동학민족통일회가 주관한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2025 DMZ 생명평화순례’ 일정 중 천도교 구간 순례와 위령식이 지난 6월 5일(목), 파주시 화석정에서 봉행되었다. 이번 순례는 종교 간 연대를 바탕으로 분단의 상징인 DMZ 일대를 걷고, 각 종단의 전통 의식으로 생명과 평화를 기원하는 대장정이다. 천도교는 이날 순례 마지막 구간을 맡아 율곡습지공원에서 화석정까지 도보 순례를 진행한 후, 위령의식과 평화의 기도를 통해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천도교 참가자 30여 명은 아침 9시,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출발해 파주로 이동하였으며,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끝까지 도보 순례에 함께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위령식은 천도교의례에 따라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평화 선언문 낭독 순으로 엄숙하게 진행되었고, 참석자들은 일제히 묵념과 합장을 통해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염원했다. 이날 위령식에서 동학민족통일회는 위령문을 통해 “저희는 한울님이 우리 몸에 모셔져 있다는 侍天主·人乃天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남북 분단 80년의 세월, 그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희생당하신 선열들의 육신은 남과 북의 이름으로 산화했지만, 그 성령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다. 본래 한울님의 품 안에서 하나였던 모든 생명은 한국 종교인들의 평화 의지 속에 살아 숨쉬고 계십니다.” 라고 천도교의 평화 정신을 전했다. 이번 위령식은 DMZ를 따라 생명과 평화를 염원하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하나 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으며, 천도교는 앞으로도 민족 화해와 생명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종교 간 연대를 통해 평화의 길을 함께 걸어갈 계획이다. 아래는 이날 발표한 위령문의 전문이다. DMZ 생명평화 순례 위령문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남북이 분단된 이후의 좌우의 갈등과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그리고 휴전 이후까지도 끊이지 않은 남북 간 분쟁 현장에서 쓰러져 간 남북한 동포 성령들이시여! 감응하시오소서! 오늘 “천도교동학민족통일회” 회원과 한국의 7개 종교인들, 그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은 이곳 임진강변 화석정에서 천도교 위령 제전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우리들은 지난 5월 20일부터 16일 동안, 분단 80년의 한을 간직하고, DMZ 순례를 계속하면서 오직 통일을 염원하던 님들의 성령을 생각하였습니다. 이곳은 임진년에,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면서, 율곡 선생의 밀지에 따라 화석정을 불태워 임진강을 건넜고, 의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올 때는 이 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위국 충신들의 명복을 빌며 통곡을 하면서 ‘신지강’을 ‘임진강’으로 개명했던 장소입니다. 저희는 한울님이 우리 몸에 모셔져 있다는 侍天主.人乃天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남북 분단 80년의 세월, 그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희생당하신 선열들의 육신이, 남과 북의 이름으로 산화했지만, 그 성령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의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다. 본래 한울님의 품 안에서 하나였던 모든 생명은 한국 종교인들의 평화 의지 속에 살아 숨쉬고 계십니다. 오늘 저희들은 이 위령의 제전에서 전몰 선열들의 고통과 한(恨), 그 절규와 눈물, 그리고 민족통일과 번영의 꿈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여 선열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우리가 평화를 세우고, 민족 화해의 결실을 맺을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선열들의 성령과 우리 후손들의 성령은 둘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오늘 한국의 7대 종단 이웃 종교인들은 그 깨달음과 믿음으로 휴전선을 함께 걷고, 기도하면서 선열들의 넋을 위령합니다. 전몰 희생의 성령이시여! 님들의 성령이 이 땅의 평화와 한울님의 뜻이 되게 하시고 사람이 곧 한울임을 실천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게 하소서. 2025년 6월 5일 사)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 주선원 사진, 자료제공 동학민족통일회 -
주한 외국인 콘텐츠 창작자, 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세계에 전하다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이하 문체부)는 주한 외국인 콘텐츠 창작자들이 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탐방하고 이를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6월부터 11월까지 ‘2025 유네스코 문화유산 및 명소 탐방’ 행사를 총 5회 진행한다. 참가자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정읍과 부산, 경기도 광주·수원, 여수, 평창 등 다양한 지역을 방문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인류 전체가 보호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산으로, 현재 한국의 유산으로는 세계유산 16건, 인류무형문화유산 23건, 세계기록유산 20건 등이 등재되어 있다. 문체부는 우리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가치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누리소통망(SNS) 활동이 활발한 주한 외국인을 선발해 탐방 기회를 제공하고, 이들이 직접 제작한 콘텐츠를 전 세계로 확산할 예정이다. 6월 정읍과 부산을 시작으로 11월 평창까지 ‘한국의 보물을 열다’ 이번 탐방 행사에서는 ‘한국의 보물을 열다(Unlock Korea’s Treasures)’를 주제로 하여 6월 정읍과 부산을 시작으로, 9월 경기도 광주·수원, 10월 여수, 11월 평창까지 한국 곳곳에 숨겨진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찾아 떠난다. ▴정읍에서는 무성서원을 찾아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배우고,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민중의 저항정신을 기린다. ▴부산에서는 한국전쟁기 피란 수도의 역사적 장소들을 방문하고, 감천문화마을의 다채로운 풍경을 영상에 담는다. ▴광주와 수원에서는 남한산성과 화성을 탐방하며 유적지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여수에서는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이순신 장군의 삶과 조선 해전의 역사를 배우고, 여수 밤바다의 낭만적인 풍경과 갯벌 체험을 즐긴다. ▴평창에서는 김치 담그기 행사에 참여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김장 문화를 체험하고 조선왕조실록박물관과 광천선굴 등을 방문할 예정이다. 회차별 탐방 내용 기록 영상과 문화유산 기획 영상 제작해 확산 문체부는 회차별 탐방 내용을 기록한 영상을 ‘코리아넷’ 유튜브 채널(www.youtube.com/@GatewayToKorea)에 게재하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특별 기획 영상도 함께 제작해 우리 문화유산의 전 세계 확산에 나선다. 탐방 행사 일정과 참가자 모집 관련 내용은 공식 누리집(https://www.heritageinkorea.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체부 정책 담당자는 “한국에 오래 거주한 외국인들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배울 기회는 많지 않다.”라며, “이번 행사를 통해 그들이 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직접 경험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는 문화 홍보대사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
[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1)뜻깊었던 의암성사 행적 조사 뜬금없는 계엄 선포와 국회의 해제 의결 이후 국내 정치가 소란했던 지난해 12월 6일 총부 사회문화관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과 독립유적지 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평소 의암성사에 관한 논문과 글을 발표하는 입장에서 늘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조사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번 답사에 동행한 조사단은 교단을 대표해서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이 참여했고, 답사의 진행은 사회문화관의 최인경 관장과 최진영 차장이 맡았다. 연구자로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성현 큐레이터와 필자가 참여했고, 유적지 사진 기록으로 독립운동 유적 담기로 잘 알려진 김동우 작가와 민족운동 유적을 사진으로 알려주는 신춘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동영상 자료는 교단 동영상 자료를 정리하는 김정호 선도사가 맡았다. 원활한 답사를 위해 박동호 여행사 대표가 참여했다. 조사단은 12월 6일 아침 6시 인천국제공항에 집결하여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정을 시작했다. 고베(神戶)에서 이틀간 조사하고, 교토(京都)로 이동해 하루, 다시 오사카(大阪)로 이동해 이틀을 조사하고 12월 10일 오후 22시경에 인천국제공항으로 도착한 힘든 일정이었다. 돌아오면서 이번 조사단에 참가해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탐방하는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했지만, 이번 조사가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의 절반밖에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올해에 마무리 사업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이번 조사단의 활동을 간략하게 전한다. ‘외유’는 성사의 큰 그림 의암성사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신사를 보필해 강원도에서 도피 생활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괴멸된 교단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인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는 동학 교단을 이끌 후계자로 의암성사를 지명했다. 이듬해인 포덕 39년(1898) 4월 5일 해월신사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그해 6월 2일 순도하였다. 이후 의암성사는 김연국 등의 반발을 수습하고 포덕 41년(1900) ‘경자설법’을 통해 교단을 안정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교단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인이 체포되어 순도하거나 영어의 몸으로 고통받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손천민도 순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암성사의 처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의암성사는 위기에 처한 교단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 발상을 했다. 하나는 피난 방법의 변화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 대세의 파악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외유(外遊)’였다. 성사는 외유를 통해 교단의 개벽을 꿈꾸었다. 성사는 이전에도 외유의 의견을 내비쳤으나 교단 원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포덕 42년(1901)에 교단의 주요 간부를 모아 외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辛丑(신축, 1901년) 三月(삼월)에 聖師(성사)가 門弟(문제)와 相議(상의)하야 갈으되, “往年(왕년)에 내 孫天民(손천민) 金演局(김연국)으로 더부러 相議(상의)하고 美國(미국)을 遊覽(유람)코저하다가 金演局(김연국)이 쫓지 않음으로 未果(미과)하엿거니와 이제 다시금 생각하여 본즉 將來(장래) 吾道(오도)를 世界(세계)에 彰明(창명)코저 할진대 今日(금일) 文明(문명)의 大勢(대세)를 觀察(관찰)하지 않으면 不可(불가)하다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내 이제 十年(십년)을 限(한)하고 外遊(외유)하야 世界(세계)의 形便(형편)을 歷探(역탐)코저하노니 諸君(제군)의 뜻이 어떠하뇨.”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3편 제6장, 27쪽.- 위의 글을 보면 의암성사는 처음에는 미국으로 외유하고자 했다. 이는 동학에서 추구하는 시천주의 세상과 일맥상통하는 민주공화정 국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사는 미국을 돌아보고 민주공화정을 우리나라에 채택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포덕 37년(1896)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미국을 ‘문명개화를 이룩한 모범적인 선진국’으로 칭송한 매체였다. (오영섭, 「『독립신문』에 나타난 미국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67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6∼7쪽 참조) 이미 성사께서는 포덕 34년(1893) 보은교조신원운동에서 “민당(民黨)”과 “민회(民會)”를 경험하기도 했다. 시천주의 교의와 합치하는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정이었다는 점과 당시 미국을 모범국으로 소개한 사회적 분위기 등이 성사의 미국 외유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암성사는 포덕 42년(1901) 3월에 원산을 거쳐 미국을 가려 했지만, 원산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부산으로 내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 경유하는 동안 미국행 배표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에게 피해를 당해 경비 부족으로 부득이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機密 제85호, 「李祥憲ノ身元及擧動ニ關シ回申」, 『要視察韓國人擧動』3, 1904년 9월 7일자. “李祥憲始ノ各李圭完(或ハ元孫時秉)京畿道陰竹ノ人三四年前始メテ日本ニ遊フ其目的ハ世界漫遊ニあアリテ先ツ釜山ニ出ツルヤ二三日本人ノ欺ク所ト成リ汽船買入ノ約ヲ為シ代価貳萬餘圓ト定メ先ツじ若干手付金ヲ交付シ大阪ニ於テ現物受授ノ約ヲ結ヒ大阪ニ赴キタルニ現汽船ノ所在ヲ認メス全ク詐偽ノ行為ニ出タルヲ知リ空シク滞留中.” 참조) 당시 성사의 최우선 목표는 교단의 재건이었고 이를 위한 방법은 문명개화된 외국을 직접 보고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를 교단에 접목시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성사께서 일본에 머무른 이유는 당시의 일본도 미국 못지않게 근대문명을 접하고 배우기에 적합한 나라였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1901년 3월부터 1906년 1월까지였다.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1901년 3월부터 1903년 6월까지의 2년 4개월간이고, 1기는 1903년 6월부터 1906년 1월까지의 2년 8개월간이다. 중간에 중국 상하이 등을 방문하고, 일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대략 5년이다. 성사는 원래 10년을 목표로 외유를 하고자 했으나 그 연한을 채우지 못했다. 그 원인으로 성사의 명을 받아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이끌었던 이용구가 친일파인 송병준과 합동해 진보회를 일진회로 고치고 친일에 앞장서 동학 교단을 친일화하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성사는 이용구의 일진회와 단절하고,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어 근대적 종단으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교단은 일신하여 국내 제일의 종단으로 성장했다. 첫 방문지는 고베(神戶)교구 답사단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고베교구’였다. 고베교구는 일본에 있는 유일한 천도교 교구이다. 교베교구의 연원은 1944년 해방 직전 귀국하지 못한 고베의 독실한 강영태(姜永泰), 성사경(成仕卿), 김성오(金聖五), 하재술(河在述) 등 천도교인 4명이 중심이 되어 70여 명의 교인을 규합해 현재 고베교구가 있는 고베시 나가타구(長田區 背蜜峰)에 “천도교고베종리원(天道敎神戶宗理院)”을 설립하고 종교법인 등록을 마친 것에서 시작한다. 연원은 ‘동원포’이고, 현 교구장은 김태환(金泰煥)이다. 같은 시기 ‘오사카교구’와 ‘교토교구’도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일본에는 고베교구만 남았다. 특히 교토교구는 눌암 황태익의 4남인 황용수가 세워 교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음에도 없어져 안타깝다. 고베교구에 도착하니 사전에 조사단의 방문을 인지하고 있던 김 교구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강건한 인상의 김 교구장은 7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건강했다. 인사를 나누고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의 집례로 방문 참례식을 가졌다. 윤석산 전 교령은 인사말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고베교구와 김태환 교구장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일본어 경전을 준비해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답사에서 “고베교구에는 매 시일 20명 이상이 시일식을 보고 있으나 어려움이 있으며, 경전과 자료의 일본어 번역, 일본어가 가능한 교인이 와서 생활하면서 지도해줄 인사를 요청한다.”라며 해외 신앙의 어려움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서 윤석산 교령은 선물로 준비해 간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메달’과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아 간행한 『읽기 쉬운 천도교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을 기증했다. 또 윤석산 전 교령은 자신의 저서와 시집 등도 선물하였다. 김 교구장과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누고 조사단은 포덕 136년(1995) 1월 17일 고베대지진 유적이 있는 ‘고베항지진메모리얼파크’를 찾아 보존된 지진 흔적을 둘러보았다. 김태환 교구장은 고베교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충분해 교인 자제 중에 유학생이 있으면 교구에서 지원할 수 있고, 또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고베교구에서 신앙을 함께할 동덕이 있으면 숙식과 경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은 12월 8일의 시일식에 다시 고베교구를 방문해 시일식을 봉행하며 30여 교인들과 함께 천도교 종교행사인 시일 의식을 봉행하고 고베 교인들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동귀일체의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후등승장(後藤勝藏) 여관 터 2월 7일 오전에는 성사께서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을 찾아 나섰다. 기록에 따르면 후등승장 여관이 위치했던 곳은 고베시 중앙구 해안통 3정목(中央區 海岸通 3丁目)이었다. 이곳은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가 손병흠, 민기호와 같이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현재 주소는 고베시 추오구 사케마치도리 3정목 2-8이다. 기존의 자료에는 여관 자리에 미쓰비시 게스트하우스라고 되어있어 주위에 이런 이름의 건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주변에 미쓰비시 건물은 찾을 수 없었다. 해안통 3정목 일대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조사단이 확인한 결과 당시 성사가 흐등승장 여관은 현재 “더 레지던스 모코마치 카이간도리(The Residence Motomachi Kaigandori)”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사가 머물렀던 후등 여관은 고베항 바로 앞에 있는 숙박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유물로 옆 골목인 해안통 2정목에 있는 ‘고베항 평화의 탑’이 있었다.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고베항으로 들어왔고, 오자마자 이 여관에 투숙했다. 성사가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니시무라[西村]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은 1882년 8월 9일 박영효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여관이다. 박영효는 메이지마루(明治丸)을 타고 일본으로 오는 동안 배에서 태극기를 그렸고, 이를 게양한 곳이 니시무라 여관이다. 따라서 니시무라 여관은 해외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니시무라 여관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건축되었고 1층에 니시무라사진연구소가 있어 예전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시무라 여관의 주소는 고베시 중앙구 영정통 3정목(神戸市 中央区 栄町通 3丁目) 2-12이다.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노동자상 7일 오전의 후등승장 여관 답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고베의 유럽풍의 거리인 기타노이진칸을 둘러본 후 고베철도 부설 공사 중에 사망한 조선인노동자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조선인노동자상은 고베시 효고구 에게야마 공원 북쪽에 있다. 고베철도는 이곳 에게야먀[會下山] 공원 옆을 지나는데 고베 남쪽 바닷가와 그 반대쪽 아리마 온천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고베철도 공사는 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드는 난공사였다. 포덕 68년(1927)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 중에 희생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손과 관련 단체, 그리고 뜻있는 일본인들이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희생자를 조사하고 추모하는 모임)을 만들어 포덕 137년(1996) 11월 노동자상을 건립했다. 노동자상은 곡괭이를 어깨에 진 깡마른 작은 체구의 모자를 눌러쓴 채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조사단은 소주를 한잔 따르고 성령출세의 심고를 올렸다. 노동자상에 붙은 안내판에는 포덕 68년(1927) 8월 1일부터 포덕 77년(1936) 11월 25일까지 13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터널 작업 중에 희생되었다고 희생자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이 공사에 참가한 조선인 노동자는 1,500명에 달했으며, 확인된 13명 이외에도 더 많은 조선인이 부상당하거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노동자상 아래에는 이들이 만든 터널을 오가는 철마가 쌩쌩 달리고 있다. (박현국, 「고베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을 기억하는 동상 –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 동상」, 『오마이뉴스』, 2018.6.22. 참조) 윤동주와 정지용 8일 아침에 고베를 출발해 1시간 30분에 걸쳐 교토로 이동했다. 조사단은 교토로 와서 먼저 도시샤(同志社)대학을 찾았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와 정지상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있다. 필자가 포덕 134년(1993)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윤동주 시비만 있었는데 이후 포덕 146년(2005) 정지용의 시비도 건립되었다. 「서시」로 잘 알려진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로 들어와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연희 재학 중 『소년』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 포덕 83년(1942)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으로 유학 왔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고 교토의 도시샤대학 문학부에 전학해 수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포덕 46년(1945)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7세로 옥사했다. 사후 정지용 등이 그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향수」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해월신사의 외손주인 정순철도 옥천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거주해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보고를 거쳐 포덕 44년(1923)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휘문보고 시절부터 시를 발표했으며. 1929년 귀국 후 휘문보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영랑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켰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시비에는 그가 일본에서 생활했던 지역을 그린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다. 시비는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정지용기념사업회에서 힘을 모아 걸립했다. 조사단은 찾은 시비 옆에는 작은 태극기가 꽂혀있어 뭉클했다. 식민지 시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뇌하던 청년 시인 윤동주와 향토색 짙은 조국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시를 쓰던 정지용을 기리며 일행은 심고를 했다. 고노에중학교(近衛中學校) 아침부터 흐린 날씨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비를 맞으며 조사단은 성사께서 유학생을 입학시켰던 고노에 중학교를 찾았다. 고노에 중학교는 지금은 시립중학교인데 메이지정부가 수립된 후 ‘교토부립제1중학교(京都府立第一中學校)’로 설립되었다. 이 중학교는 의암성사가 교단의 발전과 나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보낸 학교이다. 1차로 포덕 43년(1902) 3월 1차로 교인 자제 24명을 선발해 보냈고, 포덕 45년(1904) 3~4월의 2차로 4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입학시켰다. 이때에는 교인 자제뿐만 아니라 교인이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인재도 선발했다. 성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총 64명의 유학생을 파견한 곳이다. 이때 파견된 유학생으로는 제2세 교조 해월신사의 아들 최동희를 비롯해 정광조, 이인숙 등의 동학교인 자제와 춘원 이광수 등 전국에서 선발된 인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노에 중학교는 교토대학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유학생들은 교토대학을 드나들며 청운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둘러보고 정문 옆 화단에서 이 학교가 교토부립제1중학교이었음을 알려주는 2개의 흔적이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헤이안[平安] 건도(建都) 1200년을 기념해 “각목백선선정수목(名木百選選定壽木)” 안내판에 “本校(본교)의 前身(전신)이었던 旧制京都一中(구경도일중, 明治(명치) 30年~昭和(소화) 4年)”이라는 구절과 다른 하나는 “소화 49년 9월 경일중낙북고교동창회건지(京一中洛北高校同窓會建之)”라고 세운 기념석이었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고 운동장도 살펴보면서 당시 유학생들의 심정에 느껴보고자 했다. 쇼고인마치(聖護院町) 8일 오후에는 교토에서 성사가 거주했던 쇼고인마치 일대를 찾아 나섰다. 쇼고인이 있는 쇼고인마치는 의암성사가 교토에서 거주했던 동네이다. 성사는 포덕 44년(1903) 6월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교토시 사쿄구 쇼고인나카마치에 있는 쇼고인은 현재 본산수험종(本山修験宗)의 총본산(総本山) 사원이다. 쇼고인의 문적사원(門跡寺院)은 헤이안 시대에 창건된 사원으로 일왕과 황족이 거주하였던 사원이다. 일본 왕실에 큰불이 났던 1788년과 1854년에는 일왕이 임시로 거쳐한 ‘임시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쇼고인은 메이지왕이 궁궐을 나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쇼고인마치에서 성사가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쇼고인마치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사는 이곳 쇼고인마치의 건물을 빌려 머무르면서 동시에 유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쇼고인마치에서 고노에중학교까지는 두세 블록 밖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사는 이곳에 거주지를 만들어 생활하면서 함께 유학생들이 지낼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사단은 쇼고인의 문적사원 앞에서 골목길을 따라 고노에중학교까지 걸어보니 시간은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필자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당시 수십명의 유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웃고 떠들면서 등하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조국과 교단의 앞날을 위해 준비하던 유학생들의 강렬한 눈빛이 떠올려 졌다. 당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성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성사는 이곳에서 유학생들을 지원하다 포덕 45년(1904) 6월에 도쿄로 이주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天ケ瀨橋]와 윤동주 시비 9일 아침은 화창했다. 조사단은 교토의 우지시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의 유적을 찾았다. 조사단의 김동우 작가는 이곳을 꼭 가보아야 한다고 건의해 일정에 포함되었다. 윤동주는 귀국을 결심하고 도시샤 대학 친우들과 송별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 윤동주는 이곳 강변에서 불을 지펴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당시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친구들이 찍은 사진이 친구의 앨범에서 발견되었다. 윤동주는 당시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자 ‘아리랑’을 불러 주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곳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포덕 84년(1943)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후쿠시마 형무소에서 포덕 86년(1945) 2월 16일 옥사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는 윤동주의 생의 마지막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다. 윤동주가 이곳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 비’이다. 이 비는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약 5분 걸으면 왼쪽 길가에서 서 있다. 이 기억과 화해의 비는 2004년 유엔에서 5월 8~9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추억과 화해의 時(시)”가 결의된 후, 일본에서 윤동주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시인 윤동주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포덕 158년(2017) 10월 18일에 결실을 맺었다. 이 비에는 “새로운 길”이 새겨져 있다. 새로운 길 - 尹東柱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유적을 보고 조사단은 마지막 조사를 위해 오사카로 향했다. (계속)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
수운 대신사 탄신 200주년, 스승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려야지난 5월 임시전국대의원대회를 거쳐 교령에 선출되신 지 한 달여가 지났습니다. 취임식 이후 바쁜 일정을 보내고 계신데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습니다. 교령이 된 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 한 반년 이상 지난 것 같아요. 현재 우리 교단이 당면한 문제들이 대단히 많잖아요.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우리 어렸을 때는 어머니들이 스웨터를 직접 집에서 짜서 입혔거든. 근데 그 실타래가 엉키면 실마리를 찾아 풀어야 풀리는데, 중간에 막 잡아당기면 더 엉켜서 풀지를 못해요. 근데 오늘날 우리 천도교는 그렇게 실타래가 엉켜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이를 풀어가느냐 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취임이후 그런 걸 찾아서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욕심부리지 말고 한 발 한 발 가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전임 교령의 잔여임기를 맡아서 교령 직을 수행하게 되셨는데, 취임사에서 임기가 짧은 만큼 선택과 집중의 전략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올해 수운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이하는데요, 교령님께서는 경전을 알기 쉽게 풀어쓰고 가르침을 펼치고자 하신다고 하셨지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연구하고 풀어쓰는 일은 내가 상주 선도사 할 때부터 많은 분들과 같이 만들어왔던 과정들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 중에 이 작업들을 함께할 사람들을 모았고 나까지 다섯 명인데, 그분들과 한 달에 두 번씩 모여서 한 구절, 한 구절 번역하는 일을 해왔지요. 그 2년의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과정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용담유사 연구』나 『주해 동경대전』을 펴내시기도 하셨지요. 굉장히 오랫동안 교령님께서 해오신 경전에 대한 해석과 번역 작업은 어떻게 보면 선생님께서 수행해오신 과업이었던 거잖아요. 올해 대신사님 탄신 200주년에 큰 결실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를 번역하는 과정은 200주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성경을 보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200년 동안 계속 번역이 되어 왔어요. 처음부터 100% 완전한 게 아니었습니다. 200년 동안 해온 일이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경전도 계속 번역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동경대전이 한글로 번역이 된 게 1956년이에요. 한국전쟁 이후 협정이 끝나자마자 우리 중앙정부에서 만들었어요. 그 이후 번역을 한 번도 새롭게 시도해 보지 못했어요. 70년 동안 그대로인 거야. 세월은 이렇게 흘렀는데.. 시대에 따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통하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경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점이 경전에 대한 어려움 때문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참 안타까우셨겠어요 그렇죠. 제가 경전 연구를 하면서 이건 좀 심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올해는 일반인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는 경전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령님께서는 우리 경전을 가로쓰기로 재편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경전 번역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접근하기 쉽고 읽기 쉬운 가로경전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예를 들어 신성사법설에서 하늘 천(天)자를 써놨는데 ‘한울님’이라고 번역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하늘’이라고 번역해야 할 때가 있고 ‘한울’이라고 번역해야 할 때가 있어요. 근데 한결같이 ‘한울’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더군요. 또 ‘해월신사법설’을 강의하다 보니까 너무 중요한 부분들이 많은데 거기에 대한 해명이 없어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경대전, 용담유사에 이은 스승님의 말씀들을 지금부터라도 위원회를 조직해서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조금 먼 이야기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교령님께서 돌아보셨을 때, 어린시절이나 청년기에도 천도교를 하셨잖아요. 그때는 교세가 어땠나요? 지금보다는 컸지만 그때도 열악했어요. 내가 젊을 때는 전국에 청년회 조직이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청년의 조직이 없어요. 청년회장이 전국을 다니면서 순회하고 지방의 청년들을 만나서 그리고 청년들끼리 모여서 축구 시합도 하고 용담에서 모여서 수련하고 그랬죠. 지금은 그 청년들이 전부 나 같은 할아버지가 돼버렸지. 청년시절의 교령님께서 수련하시면서 천도교의 깊은 마음으로 들어가셨을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교령님의 청년기에는 어떤 부분에서 천도교 신앙에 매진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청년이었을 때 수도원에 가서 수련을 하면서 경전연구를 주로 했지요. 수련과 경전공부를 함께 하며 천도교가 우리 인간이 현상 속에서 도달하지 못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어렴풋이 깨닫고, 수련을 하다 보니까 그런 매력이 생기는 거죠. 내가 이 현실에서 가보지 못하는 세계에 갈 수 있는 것, 그 길이 천도교에 있다고 믿었고 그 세계로 가고 싶었던 거예요. 수련을 하시면서 품었던 마음들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교령님의 마음에 와 닿았던 스승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런 마음들은 나이가 들면서 바뀌어요. 지금은 다른 사람과 화합하면서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죠. 내가 다른 분한테 베풀 수 있는 게 있으면 베풀고요. 그리고 갈등을 종식시키고 화합하며 살아가는 삶, 지금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사는 세상, 서로 돕는 데서 값진 행복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월신사 법설에 ‘부화부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끼리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조화를 이뤄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우리 천도교의 미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균형과 조화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균형을 잘 잡아서 그걸 통해서 조화를 이루는 거죠. 균형이 안 되면 조화를 이루지 못하잖아요. 균형이 깨지면 위기가 와요. 천도교에서는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울님’은 어떤 존재인가요? ‘한울’은 우리 천도 용어로서 우주예요. 근데 이것을 ‘한울’이라고 할 때는 생명 마음이 없는 겁니다. 생명이라는 마음이 그 안에 없어요. 논학문에 보면 ‘허령이 창창’하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허령’이 바로 마음이에요. 근데 이 우주인 ‘한울’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한울님’이 되는 거예요. 우주만 얘기할 때는 ‘한울’이겠지만 여기에 생명력과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한울님’이 되는 것입니다. 성사님 법설을 보면은 마음에 관한 것들이 나오는데, 마음이라는 게 참 기가 막히게 신령(神靈)스러운 거예요. 우리 마음에 신령스러움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허령(虛靈)이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그것을 우주인 한울이 갖고 있기 때문에 우주가 한울님이되는 거에요. 이 우주를 살아있는 생명으로 보는 거지요. 천도교 교세에 대해서도 아쉬운 점이 많으실 것 같아요. 천도교가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야 할까요? 천도교가 왜 존재합니까? 우리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공부해서 세상에 펼치려고 하는 건데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펼칩니까? 그러니까 교세가 늘어나려야 늘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자발적으로 우리 천도교는 이런 겁니다, 라고 밝힌 게 없어요. 그런 걸 위해서라도 경전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펼치는 것, 그리고 지금은 책만 가지고는 안 되는 시대예요. 인터넷 방송국 같은 걸 만들어서 정제된 것, 핵심을 뽑아서 천도교를 세상에 알리는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천도교가 과거에 동학혁명과 3.1운동을 일으켰다고 하는 접근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역사인데 우리가 남용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은 천도교의 어떤 가르침이 목숨을 희생해가면서 동학혁명으로, 3.1운동으로 표출되었는가를 사람들이 실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스승님들이 그냥 주문을 준 게 아니에요. 이 주문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동학군들이 깨달았기 때문에 하는 거지.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이 그 안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아주 훌륭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천도교인이야. 나도 천도교 한번 하고 싶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교령님께서 생각하시는 지금 우리가 천도교를 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실천으로서 종교 신앙을 해나간다는 것이지요. 말로 한다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천도교인은 믿는다가 아니라 ‘한다’고 합니다. 이는 실천한다는 뜻이니까. 교령님께서는 동학 천도교 연구자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천도교는 다른 종단과 달리 교육기관을 운영하지 못하고 있어서 많은 연구자들이 아쉬워하고 있는데 앞으로 방향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교육은 현 종학대학원을 어떻게 활용해서 잘 키우느냐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저도 대학에 오래 있었지만, 지금은 교육기관을 새롭게 설립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끝으로 천도교가 나아갈 길에 대해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천도교 신앙을 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맛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의 삶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우리 천도교인의 의무이고 신앙을 세상으로 펼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교인분들께는 개개인이 먼저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천도교인이라는 자각 하에 남을 대할 때도 천도교인이 이러면 안 되지, 그렇잖아요. 욕을 하려고 그러다가 천도교인이 욕을 하면 안 돼. 이웃하고도 잘 지내야지. 스스로 천도교인이라는 것을 늘 의식하고 천도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에 우리가 포덕이 됩니다. 천도교인답게 스스로 천도교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천도교인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는 거예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석산 신임 교령은 한양대 명예교수이며, 사회경력으로 한양대학교 국제문화대학 학장, 한양대학교도서관장, (사)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을 역임 하셨으며, 천도교회 경력으로는 천도교 서울교구장, 천도교 교수회 회장, 천도교연구소 소장,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천도교중앙총부 현기사 상주선도사, 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장을 하는 등 교단 안팎의 소임을 두루 역임했다. 인터뷰를 통해 천도교의 진리가 무엇이며 이 진리는 어떻게 이웃과 함께 서로 돕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로 향하였다. 각자가 서 있는 곳에서, 주어진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 그 길을 가고 있다. 마음 속 한울님께서 환히 길을 비추어 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