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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태안 동학농민혁명 추모문화제 열려동학농민혁명 131주년을 기리는 제35회 태안 동학농민혁명 추모문화제가 10월 29일 태안 백화산 동학농민혁명 위령탑 앞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가세로 태안군수, 전재옥 태안군의회 의장, 지재규 교육장, 박인준 천도교 교령, 문영식 유족회장 등 지역 기관 및 단체 인사와 군민들이 참석해 순국선열의 넋을 추모했다. 행사는 김도윤 학생의 시 「함성, 들불이 되자」 낭송으로 시작되어, 홍주성 전투와 태안 방갈리 봉기 등 동학농민군의 치열했던 항전을 되새겼다. 이어 고종남 태안문화원장이 위령문을 낭독하며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중 항쟁이며 항일 투쟁의 시원으로, 민주정신의 근간이 되었다”고 밝혔다. 추모탑에서 청수봉전과 헌화로 시작된 본 행사는 추모 기념식과 함께 식전공연으로 풍물, 위령퍼포먼스(행위예술가 서승희)가 이어졌으며 학생 백일장 시상식, 위령문 낭독, 기념사, 추모사가 이어졌다. 박인준 천도교 교령은 추모사를 통해 “태안 방갈리에서 울려 퍼진 기포의 함성은 단순한 봉기가 아니라, 시천주와 다시개벽의 신앙으로 타올랐던 민중의 외침이었다”며 “그 뜻은 오늘의 민주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문태식 태안군기념사업회 회장은 기념사에서 “동학농민군의 구호인 ‘보국안민, 제폭구민, 다시개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시대정신”이라며, “인내천의 뜻을 이어 모든 이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세로 군수는 추모사에서 “태안은 북접의 기포지로서 자유와 평등, 자주와 민주를 향한 불굴의 정신이 깃든 고장”이라며 “사람이 하늘 되는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겠다”고 말했다. 전재옥 의장은 “동학의 정신은 오늘날 지역 발전과 국민 화합의 밑거름”이라며 통합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재규 교육장은 “동학농민혁명이 보여준 ‘사람이 곧 하늘’의 가르침은 오늘날 교육의 핵심 가치와 맞닿아 있다”며, “학생들이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로 성장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문영식 유족회장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도 항일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로서 정당한 서훈을 받아야 한다”며 “국가가 이들의 명예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추모제는 국회의원 성일종의 추모 메시지 낭독과 함께 분향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참가자들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정신을 되새기며, 평등과 자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새로운 개벽의 세상을 향한 의지를 다졌다. -
제131주년 제35회 태안동학농민혁명군 추모문화제오는 10월 29일(수) 오전 10시 20분, 충남 태안군 태안백화산 추모탑과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제131주년 제35회 태안동학농민혁명군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이번 행사는 박인준 교령이 참석하여 추모사를 할 예정이며, 동학농민혁명 태안군유족회(회장 문영식)와 동학농민혁명 태안군기념사업회(회장 문태식)가 공동으로 주최한다. 행사는 1894년 10월 29일, 일제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봉기한 태안 동학농민군의 항일무장투쟁정신을 기리고, 자유와 평등, 인간 존엄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한 뜻깊은 자리로 마련된다. 특히 올해는 태안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정신을 집대성한 『태안동학농민혁명사』 출판기념 행사가 함께 진행되어,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자주·평등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예정이다. 문영식 회장은 "돌아보니 우리 태안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일은 없었습니다. 동학의 종지 인내천 사인여천 정신을 바탕으로 싸우고 싸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태안인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태안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가 소중합니다."라고 말하며, “동학농민혁명은 자유와 평등, 인간 존엄을 위한 투쟁이자, 평화적 삶을 향한 민중의 역사적 외침이었다”며 “131년이 지난 오늘, 그 정신을 다시 일깨워 미래세대에게 계승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행사 일정은 다음과 같다. 일시: 2025년 10월 29일(수) 오전 10시 20분~12시 30분 장소: 태안백화산 추모탑 및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버스운행* 10월 29일(수) 출발시간 07시 30분 / 천도교중앙총부 수운회관 (10시 30분 태안동학기념관 도착) 문의 : 010-6432-5228 (문영식 동학농민혁명태안군유족회장) 이번 행사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지역사회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다지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관동대지진 속 천도교의 구호와 진상 규명, 민족운동의 한 축을 이루다(지난 호에 이어) 천도교 도쿄종리원 박사직이 귀국할 때 동료의 송사에서 “대지진! 대지진!! 일본 수도의 대지진 당시에 말도 모르는 백의동포가 좌로도 우로도 피할 곳이 없이 가진 발광을 다부림녀서 혀를 빼어 물고 눈알이 꿰어지는 뭇(衆) 죽음을 당할 때에 선생의 환장된 가슴에 쓸쓸한 암흑 속에서 희미한 등불을 손에 들고 동포의 뼈를 한 토막, 두 토막 주워 모으며 돌아가던 그때가 이제에 생각하면 눈물이시겠지요”라고 한 바 있다. 이는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에 참여한 바 있는 박사직의 반응이 아닐까 한다. - 동학지광 8호(1928.8)에 수록된 내용 (해설 성주현 상주선도사)- 동경당부는 포덕 68년 11월 1일에 기관지 「동학지광 (東學之光)」을 창간하여 포덕 74년 11월호까지 모두 18호를 발행하였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은 순식간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재난이었다. 그러나 이 재난은 자연재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청년들과 동포들은 극심한 공포 속에 흩어졌고, 이들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천도교의 조직적 대응이 본격화되었다. 도쿄(東京)종리원의 보존과 위문반 임시 사무소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東京) 대부분의 건물이 붕괴와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 건물은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했다. 이 건물은 이후 조선인 구호와 학살 피해 조사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재조선동포위문반(罹災朝鮮同胞慰問班)’의 임시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위문반은 이곳에서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구호 활동을 전개했으며, 희생자들의 장례와 위령 의식을 주관했다.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결성과 활동 지진 직후 일본 전역에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며, 조선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이에 맞서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과 종리원장 박사직을 중심으로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 결성되었다. 천도교 청년회원 이근무,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YMCA 등도 함께하며 범동포적 연대가 형성되었다. 1970년에 발간된 『극웅필경』에는 당시 YMCA 총무 최승만의 회고가 실려 있다. 그는 천도교 청년회 박사직 등과 함께 ‘이재동포위문반’을 조직하고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음을 기록했다. 이 조사는 1970년 3월 『신동아』에 「일본 관동진재시 우리 동포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이후 『극웅필경』에는 재수록되었다. 위문반은 일본 당국의 방해와 탄압 속에서도 두 달간 피해 조사를 진행하며 진상 규명에 매진했다. 1923년 12월 25일 열린 ‘재동경조선인대회’에서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으며, 보고에 따르면 학살 희생자는 총 6,661명에 달했다. 또한 해외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虐殺(학살)’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했다. 1924년 9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관동대지진 1주기 추도식을 개최하여 희생자들을 기렸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모 행사를 이어왔다. 2023년에는 100주기를 맞아 추모문화제를 열어 당시 사건과 천도교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조선 내 추모 활동과 일제의 통제 식민지 조선에서는 총독부의 언론 통제와 유학생에 대한 감시로 학살 소식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4년 전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족운동이 재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대규모 운동이 어려웠지만,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구제활동과 추도회가 이어졌다. 특히 포덕 65년(1924) 9월 1일, 신흥청년동맹과 서울청년회가 주도하여 중앙대교당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주기 추도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공식적으로 열린 유일한 대규모 추도회였다. 한편, 도쿄청년회는 일본 내에서 해마다 추도회를 열어 학살의 기억을 이어갔다. 포덕 65년(1924) 9월 13일, 흑우회·기독교청년회·조선노동동맹회 등과 연합으로 1주기 추도회를 열었고, 포덕 66년(1925)에는 도쿄종리원에서 2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며 조난동포들을 기렸다.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계승 관동대지진 속에서 천도교가 보여준 활동은 단순한 구호를 넘어 민족운동의 한 축이었다. 천도교는 재난 속에서 조선인의 생명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행동했으며, 일본 내 조선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일본 내 조선인 인권운동과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천도교의 이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재난과 인권 문제에 대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천도교가 보여준 연대와 실천의 정신은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세대를 넘어 계승되어야 할 소중한 자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
일본 치바현 관음사 ‘보화종루’와 위령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의 기억을 잇다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은 수많은 희생을 남기고 조선인 학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 동경에는 천도교 해외 거점인 동경종리원이 있었는데, 지진과 화재에도 무사히 보존되어 이재동포위문반의 임시사무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희생자 조사와 피해 동포 구호 활동이 이루어졌다. 1924년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1주기 추도식이 열렸고, 지난 2023년에는 100주기 추모문화제까지 개최했다. 본 연재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가진 상징적 기억의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일본 치바현에 위치한 관음사에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보화종루(普化鐘樓)’가 자리하고 있다. ‘보화(普化)’라는 이름에는 ‘넓을 보(普)’, ‘될 화(化)’, 그리고 ‘쇠북 종(鐘)’, ‘세울 루(樓)’의 뜻이 담겨 있다. 1982년부터 일본시민사회를 통해 전개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시민운동과 함께 국내에서는 이 '보화종루'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펼쳐졌으며, 1985년에 이르러 이 종루가 완공됐다. 이어 1998년 9월 24일, 나기노하라에서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발굴되었고, 이 유해는 1999년 세운 위령비 아래에 안치되었다. 보화종루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역사의 아픔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상징적인 공간으로, 한국 전통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어 두 나라의 화합과 기억을 함께 담고 있다. 보화종루, 다시 울리다 20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아 한일 양국 시민들의 모금으로 보화종루의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지난 2025년 8월 26일, 보화종루는 새롭게 단장되어 완공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조선인 희생자 위령 종루 보화종루 개수완공기념식’이 관음사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한 가운데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1부는 세키 타쿠마(関琢磨) 관음사 주지의 개안공양(開眼供養)으로 시작해, 살풀이춤 공연이 이어졌다. 이후 야치요시 시장과 다카츠 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의 일본 측 인사와,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한 유라시아문화연대 신이영 이사장의 축사가 있었다. 또한 개보수된 보화종루 안의 종을 직접 울리는 타종식과 함께, 개보수에 힘쓴 양국 인사들과 한국의 단청 장인들에게 감사장이 전달됐다. 2부는 본당으로 자리를 옮겨, 치바현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추도 조사실행위원회 와타나베 아키라 대표와 도쿄 한국상공회의소 김순차 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이후 1983년부터 현재까지 40여 년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사건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오충공 감독이 제작한 사진 슬라이드를 통해 보화종루의 40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마지막 순서에서는 재일동포 탄고단의 사물놀이 공연과 함께 저녁 만찬이 진행되어, 한일 양국의 우정을 다지는 자리가 되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1923년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동 지역에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 직후 민심이 혼란해지자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부녀자를 강간했다’, ‘방화와 약탈을 했다’와 같은 허위 소문이 확산됐다. 이를 빌미로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와 경찰, 소방대,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가세해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6천여 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천도교는 당시부터 사건의 진상규명과 추모사업에 앞장서 왔다. (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이어가겠다.) 이동초 천도교 교서편찬위원이 저술한 『천도교중앙대교당 50년 이야기』에 따르면, 1924년 사건 1주기 추모식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고 전한다. 이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희생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조선 청년들의 숭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기억을 이어가는 현재 이번 보화종루 개수완공기념식은 과거의 비극을 되새기며, 한일 양국이 함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 세대가 기억을 이어가야 한다는 과제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1923년의 아픔을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기억하고, 이를 통해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계속) -
평화로 가는 길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 추모문화제가 지난 9월 10일(일) 저녁 6시30분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당시 천도교동경종리원은 희생자조사를 했던 이재동포위문반의 임시사무소로써, 희생자 조사와 발표를 주도적으로 실행하였다. 현재 공식집계 6,661명의 희생자는 이재동포위문반이 독립신문에 발표한 기록으로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 1924년 1주기 추도회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은 천도교가 그 당시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자 했던 실천의 방법이었다 안타깝고 처절한 역사이지만, 천도교는 포기하지 않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울님의 은덕을 사회적 실천으로 베풀었던 것은 모두 스승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