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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준 교령 포덕으로 김성군 해운대구의회 부의장 동천교구에 입교포덕 166년(2025) 11월 3일(월), 부산 해운대구의회 김성군 부의장이 흥신포 동천교구에 입교하였다. 동천교구는 월요시일식을 봉행하는 관계로 이날 오후 5시 성화실에서 시일식을 봉행한 뒤 입교식을 봉행하였다. 입교식에는 흥신포 도정 박인준 교령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였으며, 서천문과 주문을 전수하였다. 또한 김대석 교구장, 유석운 동천고등학교 교장, 박효 교감, 신원기, 김용휘, 최민국, 안길중 부장 등 교구 간부와 학생 동덕들이 함께하여 새 동덕의 탄생을 축하했다. 집례는 신원기 교화부장이 맡았다. 남해가 고향인 김성군 부의장은 “할아버지 때부터 천도교를 해온 집안이었지만,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며 신앙을 잊고 있었다”며 “준암 교령님을 만나 다시 천도교를 할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매우 기쁘다”고 입교 소감을 밝혔다. 한편 교구에서는 김 부의장이 동천고등학교의 현안 사업과 관련하여 교육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입교는 박인준 교령이 직접 포덕하여 이뤄진 뜻깊은 사례로, 지역사회와 교단 안팎에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우리 음악’의 길 개척하며 천도교 음악의 새 지평을 연 늦깎이 국악 작곡가 정수당(正守堂) 김정희 동덕지난 8월 14일 제162주년 지일기념식. 의례를 마친 뒤 무대에 오른 문화공연은 많은 교인에게 오래 남는 감동을 주었다. 판소리 〈흥보가〉의 흥에 이어, 『해월신사 법설』을 가사로 삼은 창작곡 〈수심정기〉, 천덕송 가운데 민족적 선율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영부의 노래〉가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온 장내가 함께 부른 〈진도아리랑〉이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이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한 이는 북한 토속민요 연구와 천덕송 창작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 정수당(正守堂) 김정희 동덕(영등포교구)이다. 어려운 가정형편과 뒤늦은 음악 공부, 육아와 생계를 모두 감당해야 했던 삶의 조건 속에서도, “언젠가는 작곡가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북한 민요 연구와 동학 천도교 음악 연구, 천덕송에 대한 고민과 창작은 그에게 단순한 직업을 넘어 ‘천도교인으로서의 삶’ 그 자체였다. 김정희 동덕이 작곡가로서 젊은 세대의 천도교인에게 전하는 메시지, 그리고 천덕송의 내일에 관해 그의 인생사와 함께 들어본다.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 되는 동귀일체, 그것이 천도교 음악” 문. 제162주년 지일기념식 후 문화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하셨습니다. 의례 이후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문화적 장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기획 단계에서 가장 고민하신 부분은 무엇이었으며, 천도교 정신을 무대 위에 어떻게 담아내고자 하셨는지요? 답. 천도교가 ‘민족종교’라면 음악 문화에서도 그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첫 곡은 우리 전통 성악의 대표 장르인 판소리, 그 가운데서도 가장 흥겹고 재미있는 〈흥보가〉의 ‘박타령’을 골랐습니다. 두 번째는 지일기념일의 의미를 살려 『해월신사 법설』 〈수심정기〉 일부를 가사로 삼고, 중모리장단에 창부타령조 선율을 입혀 제가 작곡한 곡 〈수심정기〉를 올렸고요, 마지막 곡은 천덕송 중에서 전통 선율을 가장 잘 구현했다고 보는 〈영부의 노래〉를 선택했습니다. 앵콜곡은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는 〈진도아리랑〉으로 마무리했고요. 무대를 만들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동귀일체(同歸一體)’였습니다. 연주자는 연주만 하고 관객은 듣기만 하는 구조가 아니라, 추임새도 넣고 같이 따라 부르면서 연주자와 청중이 한마음이 되는 공연 말입니다. 우리 전통음악은 본래 그런 문화였고, 저는 그 전통이야말로 천도교의 시천주, 사인여천, 동귀일체 정신과도 잘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좋은 엄마와 작곡가, 어린 시절 두 가지 꿈이 끝내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죠” 문. 선생님은 흔히 말하는 정규 코스를 밟은 음악인이라기보다, 여러모로 우회로를 걷다가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음악과의 인연을 간단히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답. 제가 기억하기로는 열 살 무렵 제 인생 목표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 두 번째는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어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에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 『세광 애창 700곡집』이라는 노래책을 사 오셨고, 제게 악보 읽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그 책에 수록된 세계 각국의 동요·민요·가곡 악보를 보며 하루 종일 부르고 또 부르며 놀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 언어의 발음도 익히게 되었고, 악보를 보고 부르거나, 들은 멜로디를 악보로 옮기는 일이 제게 즐거운 놀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 음악 인생의 첫 출발점이었고, 이후 어머니께서는 어려운 형편에도 1년 동안 피아노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피아노 외의 음악 공부는 모두 독학이었지요. 그러나 음악은 저에게 늘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멈출 수 없는 재미’였습니다. IMF, 해고, 재취업 실패… 그렇다면 지금은 공부할 시간! 문. 스무 살에는 공대를 선택하셨다가, IMF 시기에는 음악학원 교사로 일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음악 전공을 결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답. 삶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더군요. 대학에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이후에는 공장에도 다녔습니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뒤에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정시에 출퇴근을 해야 하는 맞벌이를 하기가 어렵게 되어, 음악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격증이 없어 감사에 걸려 해고됐고, IMF가 겹치면서 남편의 직장도 불안정해졌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지금은 일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때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공부에 쓰자.” 마침 정년퇴직하신 친정어머니께서 연금 일부를 일시불로 받아 제게 보태주셨고, 그 돈으로 부산예술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작곡을 전공하려면 작곡과 피아노를 둘 다 배워야 했고, 작곡 레슨비가 너무 비쌌기에, 아는 언니에게 한 달에 일정액을 드리며 1년 반 정도 피아노 레슨을 받아서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한 학기 지난 후에 작곡 전공으로 바꾸었지요. 그때까지 화성법, 대위법, 음악사 등은 모두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에는 육아와 살림, 공부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기에 참 고단했습니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도 못 말린다”는 말처럼, 자발적으로 선택한 공부였기에 버틸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제가 나중에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자발성’의 힘을 몸으로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토속민요에서 발견한, 난생처음 들어본 독창적인 아름다움 문. 선생님의 대표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북한 토속민요입니다. 이 분야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답. 국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던 시기에 황해도 토속민요인 <풍구소리>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 선율이 너무 좋아서 “이 곡으로 작품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북한 토속민요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석사 논문이 단 두 편뿐이더군요. 황해도 한 편, 함경도 한 편. 평안도 토속민요에 대한 논문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때 ‘이건 보물창고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토속민요는 한 집단의 음악적 모국어이자 삶의 기록인데, 분단과 세월 탓에 절반이 통째로 공백 상태로 남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북한 토속민요부터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한국민요대전』을 집대성하신 최상일 PD님을 만난 일이었습니다. 특강 자리에서 인사를 드리며 제가 “북한 토속민요를 석‧박사 과정에서 연구하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께서 “음원은 어디서 구할 건데?” 하고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이주민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모아보겠다”고 하니, “MBC에 이미 수천 곡이 들어와 있는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구하신 북한 현지 음원을 정리하고 계셨던 겁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기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엮은『북한 민요 작품집』 문. 그렇게 연구하신 북한 민요와 창작이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였지요? 답. 북한 민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2002년입니다. 그 이후로 논문을 쓰는 한편, 북한 토속민요 선율을 바탕으로 곡도 꾸준히 써왔습니다. 그러던 중 2018년에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쏠리는 걸 보며 ‘이제까지 써온 곡들을 모아 한반도의 평화와 상생을 기원하는 첫 작품집을 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까지 북한 토속민요를 바탕으로 한 곡이 일곱 곡 있었는데, 정상회담을 기념하는 의미로 한 곡을 더 만들어 여덟 곡짜리 작품집을 완성했습니다. 연주 시간으로 환산하면 65분이 조금 넘는 분량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첫 작품집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작품집입니다. 북한 민요에는 정말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어느 나라 노래와도 다른, 우리만의 음조직과 장단, 정서가 살아 있습니다. 그 음악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불러내는 작업은 남과 북을 잇는 다리이자, 동학 천도교가 지향해온 만민평등과 평화의 이상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연기연>을 읽고 변증법이 떠올라 무척 놀라웠습니다” 문. 천도교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답. 부산예술대학에 다닐 때 <인간과 종교>라는 교양 과목이 있었습니다. 첫 수업 시간에 김용휘 교수님께서 “종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라고 물으셨고, 제가 유일하게 손을 들었습니다. “종교가 없어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성인들이 남긴 책도 있고, 양심에 비추어도 도리를 알 수 있는데 왜 꼭 종교가 필요한가”라는 것이 제 생각이었지요. 그런 제가 동학 천도교 교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건 바로 그 수업을 맡으셨던 김용휘 선생님, 그리고 같은 학교 교수님이셨던 김춘성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입니다. 『동경대전』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을 처음 공부하게 되었을 때 무척 놀랐습니다. “이게 변증법 아닌가? 헤겔 철학이 들어오기 훨씬 전인 19세기 중엽 조선에 이미 이런 사유가 있었다니.” 하는 놀라움이었지요. 이어서 해월 신사의 삼경(三敬) 사상,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같은 가르침을 읽으면서, 제가 평소에 중요하게 여겨온 좌우명들이 이 교리 안에 다 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경물(敬物)’ 사상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물티슈나 일회용 기저귀를 거의 쓰지 않았고, 화악산수도원에서 화장실 쓰레기를 태우는 일을 하면서 일회용품이 남기는 잔해와 독성의 문제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만물을 공경하라’는 삼경 사상과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용담정 수련이었습니다. 당시 제 삶은 여러모로 바닥을 치고 있었고,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수련을 하면 마음에 힘이 생긴다”고 권유하셔서 겨울방학 기간에 2박 3일 용담정 수련에 참여했습니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 시간 동안 비록 특별한 체험은 없었지만 ‘이 길을 계속 가면 내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련 둘째 날 “입교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고, 마침 제 생일 바로 다음 날이 제 입교일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천도교인으로서의 삶’을 저의 중심에 두게 되었습니다. <불연기연> 등 네 곡의 천덕송으로 은사님 환갑을 축하하다 문. 천덕송 창작 역시 선생님의 작업 가운데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특히 포덕 157년(2016) 은사이자 전교인이신 김춘성 선생님의 회갑을 맞아 네 곡의 천덕송을 작곡해 선물하셨는데요, 그 사연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답.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나니 “전교인이 김춘성 선생님이신데, 나는 아직 선생님께 밥 한 끼 제대로 대접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의 환갑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선생님께 가장 기쁜 선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천덕송’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한울님께 마음속으로 “김춘성 선생님께 드릴 천덕송을 만들고자 하니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경전을 펼쳤더니, 맨 먼저 <불연기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첫 곡을 『동경대전』의 <불연기연>으로 정했고, 두 번째 곡은 힘든 시기에 제가 가장 많이 읽었던 대신사님의 <시문>, 세 번째 곡은 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이 집약된 〈수심정기〉, 네 번째 곡은 『의암성사 법설』 가운데 〈진심불염〉으로 정했습니다. 집에서는 집중하기가 어려워 노트북과 경전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작곡을 했습니다. 한 달 동안 네 곡을 작곡하고, 국악기 편성으로 반주를 붙인 후 연주자를 섭외하고, 녹음과 편집, 믹싱, 마스터링까지 마쳤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너무 촉박한 일정이라 아쉬움도 남지만, 한울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추석 전날, 인사동에서 선생님과 단둘이 식사를 한 뒤 찻집에서 “선생님, 환갑 선물입니다.” 하고 그 음원을 들려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무척 기뻐하셨고, 그 순간 저 역시 “천덕송과 천도교 음악 문화에 내 삶을 더 깊이 바쳐야겠다”는 마음을 다시금 다지게 되었습니다. 네 곡 가운데 특히 〈시문〉과 〈진심불염〉은 지금도 제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입니다. "천덕송은 동귀일체를 이루는 노래이자, 평등·평화·생명을 담아내는 노래" 문. 음악 연구자이자 작곡가의 시선에서 볼 때 천덕송이 지닌 정신적·예술적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답.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말이나 글처럼 논리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혼의 문을 두드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느 집단이든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공동체 의식을 다져왔습니다. 학교에는 교가가 있고, 군대에는 군가가 있고, 국가에는 국가(國歌)가 있듯이 말입니다. 오래전부터 농부들은 들노래를 부르며 함께 땅을 갈았고, 어부들은 뱃노래를 부르며 고기를 잡았습니다. 다투던 사람들도 같이 노래하며 일하는 동안에는 한마음이 되었지요. 천덕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천덕송을 부르는 것은 결국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이루고자 함입니다. 천덕송은 천덕사은을 노래하고, 동귀일체를 추구하며, 신심을 돈독히 하고, 깨달음의 기쁨을 표현하는 종교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약자와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평등과 평화에 기여하고, 어렵게 이룩한 민주주의의 열매를 더욱 공고히 하는 사회·역사적 역할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냉전과 분단을 넘어 평화로 나아가는 길에 힘을 보태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외되고 메마른 현대인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따뜻한 감성과 영성을 일깨우는 문화・예술적 역할 역시 중요합니다. 저는 이런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것이 천덕송의 정신적·예술적 본질이라고 봅니다. 일본 노래에서 온 곡들은 이제 보내줄 때… 21세기 가치로 새 천덕송 지어야 문. 오늘날 교단 내부에서도 “천덕송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시대와 호흡하는 새 천덕송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답. 포덕 159년(2018), 『신인간』에 〈천덕송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현재 부르고 있는 천덕송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짚고,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점은 몇몇 곡의 선율이 일본 노래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목적풀이〉는 일본의 〈철도창가〉에 노랫말만 바꾼 곡이고, 〈검가(기 2)〉와 〈배 떠나간다〉는 일본 특유의 ‘요나누키’ 단음계로 된 일본풍 노래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을 침탈하고 동학군을 학살했던 역사가 분명한데, 그런 노래들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오래 불러왔으니까 계속 부른다”는 태도로 유지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측면에서도 교리·교사와 어긋나는 표현, 어법에 맞지 않거나 뜻이 모호한 구절, 품위가 떨어지는 내용, 현재 맞춤법, 띄어쓰기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 정리가 필요합니다. 운율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 전통 시가의 기본 운율은 대체로 3·4조, 4·4조에 2음보인데, 7·5조에 3음보라는 형식은 일본 전통 시가에서 온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우리 고유의 리듬과 말맛을 살릴 수 있도록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천덕송은 21세기 인류가 함께 고민하는 가치들―생태·문화다양성, 상생, 인권, 연대, 복지, 평등, 평화 등―을 적극 반영해야 합니다. 이런 가치들은 수운 대신사, 해월 신사, 의암 성사가 가르쳐주신 바와도 직결됩니다. 동시에 전통 양식과 민족적 요소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도교 음악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면서도 다양성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방향에서 ‘내일의 천덕송’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 천도교의 서사와 민요의 서정을 만나게 하는 것이 제 작업" 문. 선생님은 북한 민요뿐 아니라 경기·서도·남도 등 다양한 민요를 연구하고 창작에 활용해오셨습니다. 민요 속에서 천도교 정신을 어떻게 발견하고 재현해내고 계신지,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주신다면요? 답. 제가 2016년에 작곡한 네 곡의 천덕송 가운데, 『의암성사 법설』을 가사로 삼은 〈진심불염〉은 전남 영광군 논매는소리 〈문여가〉의 선율을 주제로 삼아 만든 곡입니다. 두레 공동체가 함께 논을 매면서 부르던 그 노래에는 꿋꿋하고 유장한 선율, 서로를 북돋는 공동체 정서가 잘 녹아 있습니다. 저는 그 선율에서 의암 성사의 기상을 떠올렸고, 그래서 그 음형을 〈진심불염〉의 주제 선율로 삼았습니다. 민요를 바탕으로 새 천덕송을 짓는 작업이 제 첫 번째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연구 작업입니다. 포덕 162년(2021)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음악 양상과 문화콘텐츠로서의 잠재성’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한국민요대전』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새야 새야〉 외에도 여섯 가지 다른 선율의 〈새야 새야〉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천도교와 관련된 노래는 그 수가 많지 않지만, 넓은 지역에 퍼져 있고, 비슷한 가사가 <논매는 소리>, <무덤 다지는 소리>, <정월 대보름 새 쫓는 소리>, <둥당애타령> 등 여러 갈래 민요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사례들을 찾아내고 분석해 논문으로 공유하는 것이 제 두 번째 작업입니다. 동학 천도교의 주체도 백성이고, 민요의 주체도 백성입니다. 저는 동학 천도교의 서사와 민요의 서정을 만나게 하고, 여기에 ‘지금 이곳’의 지향과 정서를 담아 예술적 숨결을 불어넣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민요는 역사성과 지역성, 시대성과 정체성을 모두 갖춘 새로운 천도교 음악 문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겁니다. 장구·단소와 함께 부르는 천덕송, 어린이에게는 ‘진짜 전래동요’를! 문. 앞으로 교단의 주요 의례나 행사에 민요적 요소와 국악을 더 깊이 접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구상을 하고 계실 줄 압니다. 민요의 서정성과 공동체성이 교단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요? 답. 우선 우리 어린이들에게 ‘진짜 전래동요’를 돌려주고 싶습니다. 널리 알려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두껍아 두껍아〉, 〈쎄쎄쎄〉, 〈여우야 여우야〉 같은 노래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일본 와라베우타(동요)입니다. 와라베우타는 대부분 2분박, 2/4나 4/4 박자가 많고, 특정 음으로 종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반면 한국 전래동요는 3분박이 많고, 12/8 박자가 가장 흔합니다. 이런 차이를 바로잡기 위해 포덕 162년(2021) 서울우리소리박물관에서 『전래동요 자료집』과 음원을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진짜 전래동요’를 천도교 어린이들이 널리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천덕송 가운데 〈영부의 노래〉, 〈지일기념가〉처럼 민요풍으로 작곡된 곡들은 피아노 대신 장구와 단소로 반주하면 훨씬 흥겹습니다. 장구와 단소는 이미 초등 교과 과정에도 들어가 있으니, 역량이 되는 교구에서는 유소년부를 활성화해 ‘장구·단소로 천덕송 연주하기’ 프로그램을 운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민요라는 보물창고를 잘 활용해 새 천덕송을 작곡하는 작업도 병행할 수 있겠지요. 이번 지일기념식에서처럼 교단의 각종 의식과 행사에 국악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중앙총부와 각 교구의 음악 문화도 점차 뚜렷한 정체성을 갖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제대로 된 우리 문화를 만드는 일이 곧 ‘천도교인의 길’ 문. 안익태 애국가 문제 제기, 북한 민요 연구, 천도교 음악 연구 등 선생님이 다뤄온 주제들은 기존 음악계가 쉽게 손대지 않는 어려운 분야였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결국 천도교 음악과 문화적 자산으로 어떻게 연결될지요? 답. 한국 근대사에서 천도교는 3‧1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뿐 아니라 『천도교회월보』, 『개벽』, 『농민』, 『신여성』, 『어린이』 등 다양한 잡지를 통해 대중의 의식과 문화를 선도한 주역이었습니다. 천일기념식, 어린이날 행사 등도 온 나라가 주목하는 문화행사였지요. 스승님들은 우리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하는 작업들은 제가 속한 영역에서 잘못된 것들을 하나씩 바로잡으면서, 앞으로의 우리 문화를 ‘제대로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색이 짙은 곡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우리 정서와 양식에 기반한 새로운 천덕송을 짓고, 한국적 색채와 천도교 정신이 어우러진 공연을 기획해 무대에 올리고, 동학·천도교와 관련된 음악 문화를 학문적으로 정리해나가는 일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결국 이 모든 작업은 ‘천도교인으로서의 행위’입니다. 제가 걸어온 길과 그 결과물들이 조금이라도 천도교의 문화자산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노래만큼 우리 노래도, 남의 학문만큼 우리 자신도 연구합시다” 문. 오늘날의 천도교인, 특히 젊은 세대 교인들에게 음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요? 답. 세 가지 정도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남의 노래를 듣고 부르는 만큼 우리 자신의 노래도 듣고 부르자는 것입니다. K-팝이 세계를 누비는 시대지만, 그 바탕에는 우리의 민요와 전통음악, 그리고 동학 천도교의 노래들이 있습니다. 천덕송과 우리 민요를 사랑하는 마음이 곧 천도교 음악의 미래를 여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둘째, 남의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 만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연구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동・서양 철학과 음악을 두루 섭렵하면서도, 결국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지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준 것이 동학 교리와 우리 음악이라고 느꼈습니다. 『동경대전』의 불연기연, 삼경 사상, 특히 경물 사상은 오늘날 생태위기와 인류 문명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큰 자산입니다. 셋째,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천도교인의 것이라는 점을 항상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제 삶을 돌아볼 때, 특별한 재능이라기보다 물욕이 적고, 의지가 강하고,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붙드는 성향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성향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준 것이 바로 천도교 신앙과 수련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남북한 민요 연구를 더 깊게 이어가고, 새로운 천덕송을 작곡하고, 제자들을 길러내며, 천도교 음악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남의 노래만큼 우리 노래를, 남의 학문만큼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연구할 때 천도교의 노래와 문화도 다시 한번 꽃피울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인터뷰 진행 노은정 전 편집장)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불연기연>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75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시문>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76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수심정기>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77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진심불염>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78 -
신숙 선생 58주기 추도식 봉행지난 11월 22일 서울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 인근 묘역에서 독립운동가 신숙(申淑, 1888~1966) 선생 58주기 추도식이 봉행됐다. 이날 추도식에는 유족과 천도교 관계자, 광복회 및 독립운동 관련 단체 후손 등 2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순국정신을 기렸다. 지난 해보다 조화가 늘어난 모습은 오랜 세월 잊혀져온 독립운동가의 삶을 사회가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참석자들은 한 사람의 이름 앞에서 묵상하며, 소리 없이 시대를 건너온 신념의 무게를 되새겼다. 독립운동 전선의 거의 모든 길을 걸은 투사 신숙 선생의 생애는 한 문장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치열한 여정이었다. 1903년 동학(천도교)에 입교한 뒤, 교육·조직활동·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의 전선 곳곳에 몸을 던졌다. 서울 문창학교 설립으로 민족교육의 불씨를 지폈고,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인쇄 및 배포에 참여했다. 이후 만주와 상해로 이어지는 망명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고, 한국독립당 창립에 동참했다. 특히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독립전쟁 전략 수립의 중추 역할을 맡았으며, 해방 직전에는 재만동지회를 조직해 한인 교포 보호와 귀국 지원에 힘썼다. 선생의 독립운동은 내내 '사람을 위한 독립’이라는 분명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그 공로를 국가가 뒤늦게 증명한 것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이다. “스스로 등불이 되고자 했던 영혼” 추도식은 선생의 증손녀이자 서울교육대학교 재학 중인 신민재 씨의 생애 소개로 시작됐다. 이어 이희정 북부보훈지청장은 추모사에서 “신숙 선생의 독립은 사상이나 전략 이전에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기렸다. 또한 천도교를 대표해 참석한 광복회 전 이사 이승봉 선생은 “선생의 걸음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자 했던 한 영혼의 기록” 이라며 숭고한 뜻을 되새겼다. 유족대표 신현종 선생은 “후손들의 삶이 선친의 길을 잇는 작은 답례가 되길 바란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역사 앞에 선 현재의 발걸음 이날 추도식에는 천도교 측에서 노태구 전 동민회 상임의장, 박남문 종의원, 이재선 종무위원 등이 함께했으며, 광복회 관계자 및 여러 지회장들도 자리했다. 참석자들의 단단한 연대는 독립운동의 정신이 오늘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증언했다. 추도식이 끝난 뒤에도 묘역에는 한동안 발걸음이 이어졌다. “선생의 삶은 오늘 우리의 자유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라는 한 참석자의 말처럼, 그 가르침은 오늘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잊지 않는 일, 그것이 추모의 시작 독립운동을 기억한다는 것은 거창한 행위가 아닐지 모른다.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그 삶을 통해 오늘을 성찰하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최대의 책임이다. 11월의 찬 공기 속에서 신숙 선생의 이름은 다시금 우리에게 말했다. “자유는 누군가의 삶을 건 발걸음 위에 서 있다.” -
[칼럼] 세계화를 위한 천도교 문화예술 만들기(2)지난 10월 칼럼에서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포덕168(2027)년에는 천도교 세계화를 선언하자고 제안했다. 앞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갖기 위해서는 문화예술로 포덕 교화방향을 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교단 차원에서 준비해야 할 내용들로 11월 칼럼을 대신하겠다. 1. 천도교 글로벌 TFT 조직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열광하는 전 세계 젊은이들을 향해 K-donghak이 대한민국의 정신(K-spirit)이라는 것을 전세계에 알릴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단차원의 천도교 글로벌 TFT를 조직하여 분야별로 준비를 해 나가야 한다. 먼저 10여개의 TFT를 조직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능력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고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책임을 맡기자. 교인과 일반 전문가를 섞어서 TFT를 만들면 더 효과적이다. 아래에는 천도교 세계화를 위한 나름대로 필요한 조직들을 제안해 본다. <TFT분야> ① 경전 외국어 번역분야 :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교리와 외국어,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들로 구성, 번역은 전문 번역사에게 의뢰 ② 교리연구분야 : 동학 천도교 교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세계와 사회, 전 지구적 문제와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교리를 전달할 수 있는 연구진들로 구성 ③ AI 분야 : 젊은이들은 AI를 많이 활용한다. AI에게 동학 천도교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잘못된 내용을 교정해 주고 새로운 내용을 업데이트해 줄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 외국어 업데이트 필수 ④ 예술분야 (그림) : 동학 천도교를 알릴 수 있는 역사화, 기록화 또는 경전 내용의 상상화, 창작화 등이 필요, 전문 작가를 섭외하여 회화, 조각, 공예, 서예 등의 미술작품을 제작하여 용담정, 봉황각, 중앙대교당, 울산여시바윗골, 대신사생가 등에 전시하여 방문객들에게 작품으로 울림을 줄 수 있도록 전시 ⑤ 예술분야 (음악) :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오케스트라, 앙상블 연주 가능한 곡으로 천덕송, 송가 편곡 및 창작, 음악제를 개최하여 편곡, 창작곡 발표, 발표시 홍보에 적합한 전문 성악가, 가수 초청 ⑥ 예술분야 (뮤지컬, 연극) : 뮤지컬에 관심 있는 교인과 전문가들로 구성, 창작극, 혹은 기존의 뮤지컬 연장, 순회공연 방법도 좋음. ⑦ 예술분야 (영화,드라마,다큐) : 영상제작 기술 전문가와 교리 교사에 해박한 교인들로 구성 ⑧ 홍보분야(SNS, 유튜브, 홈페이지 등) : 동학 천도교를 알리기 위한 어린이, 학생, 대학생층과 성인층으로 나누어 구성, 신인간사가 주도적으로 홍보 역할 담당 ⑨ 문화분야 : 천도교 인사, 제례, 상례, 혼례, 기도식, 수련 문화 등을 정리하고, 천도교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과 관심있는 사람들로 구성 ⑩ 대외협력 : 기업, 정부, 지자체 등에서 기부금을 모을 수 있는 대외관계가 원만하고 발이 넓은 사람들로 구성 ⑪ 국제부 : 국제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조직 2. 홍보와 국제네트워크 구축 아무리 좋은 보석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동학 천도교의 보석같은 진리를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홍보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오늘날은 대한민국의 소식을 3초 이내에 전 세계에서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IT강국이다. 우리는 IT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동학 천도교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젊은이들은 인스타그램을 많이 이용한다. 그리고 중년층은 페이스북, 트위스터 등을 많이 활용하며 유튜브는 어린아이부터 장년층까지 두루두루 사용하고 있다. 너튜브로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네트워크 시스템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얼마 전에 결혼해서 프랑스에 거주하는 젊은 한국인이 천도교를 찾아와서 입교하고 젊은 층을 향해서 천도교를 알리겠다는 포부를 말하였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현재는 프랑스에서 유튜브를 통해서 천덕송 등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편곡한 천덕송과 함께 유튜브에 소개하였다. 우리의 천덕송이 편곡되어 외국어로 노래되는 것을 들으니 그 얼마나 장엄한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요즈음은 음악을 편곡해 주는 앱뿐만 아니라 AI를 통해서 작사 작곡까지 해주는 세상이니 컴퓨터를 조금만 더 잘 알고 다루게 된다면 그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해외에 있는 천도교 교당은 일본이 유일하다. 미국에는 오랫동안 매년 기념일이면 교포신문에 축하광고를 내었던 원로교인이 한분 계셨는데 그 분이 환원하셨다. 그 뒤를 이어 누가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의 또 다른 곳으로 젊은 층의 교인 한 분이 이민 가서 살고 있다. 호주에도 가족이 모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교인이 있다. 프랑스에도 앞에서 언급했던 젊은 교인이 활동중이다. 쿠바에는 독립운동하셨던 임천택 교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벌써 일본, 미국, 프랑스, 쿠바 등에는 우리가 조금만 더 정성을 드린다면 연결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교인 외에도 전국에 있는 교인들 대상으로 해외에 있는 친, 인척, 지인들의 근황을 조사한다면 해외에 거주하는 교인들이 더 나올 수도 있다. 이참에 해외 거주 교인 조사를 실시하여 그분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자. 그분들이 주축이 되어 국내의 우리와 손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 나간다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으로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환경단체, 평화단체, 인권단체, 생명단체 등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네트워크를 구축하자. 우리에게는 스승님들께서 가르쳐 주신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있지 아니한가! 그들과 국제학술심포지엄을 통해서 연결되어도 좋고, 온라인을 통한 학술모임을 하여도 좋다. 우리의 진리가 담긴 책들을 해외에 보내는 작업을 하여도 좋다. 특히, 국제 환경실천모임과 연결지으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바야흐로 포덕 교화는 문화예술과 인터넷망을 통하여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대세는 흐르고 있다. 2027년(포덕168년)에는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천도교 세계화를 위해서 큰 항해가 시작되기를 두손 모아 간절히 심고 드린다. “꿈은 꾸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 글, 정정숙(종의원 의장) -
시원포 연원 2025 워크숍, ‘소통과 화합’의 장으로 열려천도교 시원포(도정 명암 김성환)는 ‘소통과 화합을 위한 시원포 연원 조직 활성화’라는 슬로건 아래 ‘시원포 연원 2025 워크숍’을 11월 8일(토)~9일(일) 이틀간 경주 용담 동학교육수련원에서 개최하였다. 이번 워크숍에는 시원포 연원 70여 명을 비롯해 타 연원 5명, 비교인 3명 등 약 80여 명이 참석했으며, 입교식(6명)과 복교식(1명)이 함께 열려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마음을 여는 소통의 시간, 접별 토의와 퀴즈로 하나 된 열기 첫날 행사는 용담 교구에서 마련한 점심식사 후 교육수련원 대강당에서 시작되었다. 용암 주용덕 도훈의 집례로 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의 기본 예식을 봉행한 뒤, 명암 김성환 도정은 인사말에서 “시원포는 용담을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로서 교단 개혁의 선두에 서고, 깊고 단단한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연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어 주용덕 도훈이 ‘시원포의 발자취’를 슬라이드로 상영하며 선배들의 헌신과 역사를 되새겼다. 원암 이승민 도훈의 진행으로 이어진 ‘나는 누구인가요?’ 시간에서는 참석자들이 자신의 입교 동기와 삶의 여정을 솔직히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이해하는 자리가 되었다. 또한 ‘천도교’, ‘시원포’, ‘용담정’을 주제로 한 3행시 짓기 대회에서는 짧은 시간에도 수준 높은 작품이 쏟아졌으며, 이동교 선도사(용담교구)가 ‘용담정’을 주제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저녁 식사 후 열린 둘째 마당에서는 접별로 나뉘어 주제 토의와 퀴즈 대항전이 펼쳐졌다. 각 접의 주제는 ▲1접: 천도교의 미래 ▲2접: 나의 진짜 모습 찾기 ▲3접: 행복한 신앙생활 ▲4접: 신앙체계(시일·수련) 개선 및 포덕방안 등으로, 각 접 대표의 발표가 이어졌다. 토론 결과 1접이 주제토의 1등을 차지했으나, 퀴즈 및 행운권 추첨 점수를 합산한 결과 최종 우승은 4접에게 돌아갔다. 이어 개인전 넌센스 퀴즈와 행운권 추첨으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으며, 홍삼세트·고급 샴푸 등 푸짐한 상품이 전달되었다. 합동수련·입교식·간담회로 결속 다져 둘째 날 새벽 5시, 참가자들은 대강당에서 합동수련과 기도식을 봉행한 뒤 용담정을 참례하였다.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룬 용담정에서 대신사 영정 앞에 모여 천도교와 시원포의 발전을 심고한 참석자들은 자연 속에서 깊은 평화를 느끼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후 용담수도원(진성관)에서 화암 최상락 수도원장의 진행으로 시원포 간담회 및 입교·복교식, 공로패 수여식이 열렸다. 간담회에서는 ▲용담수도원 활성화 ▲동학교육수련원 관리 방안 등이 논의되었으며, 덕화당 최귀조 선도사(용담교구)와 경순당 민순기 선도사(서울교구)가 공로패를 받았다. 입교·복교자는 박미자, 조민아, 조윤겸, 김교영, 신지환, 신지아, 유일형(복교) 등 총 7명이었다. 11월 9일 시일식 봉행 워크숍의 마지막 일정으로 11월 9일 오전 시일식이 용담수도원 대강당에서 봉행되었다. 일암 최중환 교훈이 집례를 맡았고, 중암 최석문 교훈이 음향을 담당하였다. 예식은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병송으로 시작되었으며, 각암 안병준 교훈(울산교구)이 『탄 도유심급』을 봉독하였다. 이어 용담교구 합창단의 천덕송 ‘용담가’(1~2절)와 함께 분위기가 숙연해졌고, 화암 최상락 도훈의 설교가 이어졌다. 최 도훈은 “시원포가 용담의 뜻을 잇는 중심 신앙공동체로서 서로의 한울님을 모시는 ‘모심의 길’을 실천하자”고 강조하였다. 이어 천덕송 ‘우리의 길’(1~2절)을 합창하며 신앙의 결의를 다졌고, 명암 김성환 도정의 석별인사와 용암 주용덕 도훈의 경과보고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번 시원포 연원 2025 워크숍은 “소통과 화합”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연원 간의 결속과 신앙적 교류를 더욱 깊게 다지는 시간이 되었다. 참석자들은 “용담의 정신 속에서 시원포의 새로운 비전을 확인한 뜻깊은 자리였다”고 소감을 전했다. 기사 및 사진 제공 시원포 연원회 -
서운포, 해월 신사의 숨결 따라 정선 동학 유적지 순례서운포(도훈 윤석산)는 지난 10월 17일부터 18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정선 일대의 동학 유적지를 순례했다. 이번 답사에는 서울교구 교인을 중심으로 여주교구와 인근 교구 교인 30여 명이 함께했다. 첫날 정오 무렵, 정선 현지에 도착한 답사단은 고종호 전 정선문화원 사무국장의 안내로 황기족발과 정선의 향토 음식인 콧등치기국수로 점심 식사를 했다. 이후 5일장이 열리는 정선아리랑시장을 방문해 활기 넘치는 재래시장을 구경하는 한편, 현지 농가에서 재배한 농산물 등을 구매하기도 했다. 또 아리랑센터에서 매주 토요일 상설 공연하는 「뗏꾼」을 단체로 관람한 후 가리왕산 케이블카를 타고 정선의 가을 절경을 감상했다. 한편, 서운포 답사단이 정선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선 도접주 유시헌의 증손자 유돈생 어르신이 답사단을 찾았다. 올해 90세인 유돈생 어르신은 정식으로 입교는 하지 않았으나 평소 주문과 수련 등 수행을 계속해왔으며, 윤석산 도훈은 이 자리를 빌려 유돈생 어르신의 복교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첫날 저녁에는 숙소인 파인포레스트 정선알파인리조트 구내식당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일부 참가자들의 소감 발표와 함께 윤석산 도훈이 서운포의 유래를 강의하는 등 깊은 교감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번 답사 진행에 큰 도움을 준 고종호 선생은 윤석산 도훈과의 특별한 인연을 언급하면서 정선문화원 사무국장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동학을 향한 열정이 식지 않았음을 열띤 발언으로써 증명했다. 둘째 날 아침,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은 맨먼저 정선군 화암면 미천리에 자리한 싸내(米川) 유적지를 방문했다. 이곳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부인 박씨 사모님이 해월 최시형 신사의 도움으로 피신해 살다가 환원하신 곳으로, 정선 지역 동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은 “싸내는 동학의 여성사와 신앙공동체의 뿌리를 함께 보여주는 성지”라며 그 유래를 설명했다. 그다음으로 찾은 곳은 정선 남면 무공리 무은담터였다. 무은담은 해월 신사가 포덕 16년(1875) 설법제와 포덕 17년(1876) 구성제 등 주요 의식을 거행했던 장소로, 동학 교단의 재건이 시작된 역사적 현장이다.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은 “이곳에서 해월 신사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가르침을 실천적 신앙으로 확장했다”며 “무은담은 동학 교단이 다시 일어선 출발점이자 ‘시천주’의 뜻이 생활 속에서 구현된 자리”라고 전했다. 특히 무은담은 정선 도접주 유시헌이 해월 신사를 직접 모시며 동학 교문을 재건한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유시헌은 포덕 19년(1878)년 이곳에서 『도원기서』 편찬과 『동경대전』 간행에 참여했으며, 그의 집은 정선 교단의 비밀 포교처로 쓰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윤석산 도훈이 집필한 『도원기서 역주』와 포덕 163년(2022) 동학역사문화선양회에서 설치한 유시헌 부자 안내판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해월 신사가 포덕 13년(1872) 가을, 49일간 특별기도를 올린 적조암이었다. 이곳은 해월 신사가 영월에서 정선으로 피신한 뒤 교단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시천주’의 참뜻을 체득한 곳이다. 이번 순례를 준비한 윤석산 도훈은 “정선은 수운 대신사, 해월 신사, 의암 성사의 사상이 맞닿은 생명 신앙의 고장”이라며 “앞으로도 교단 차원의 정기 순례를 통해 동학의 생명력을 이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
[칼럼] 태안 동학혁명을 기억하는 길지난 10월 29일 『태안동학농민혁명사』가 간행되어 출판기념식이 열렸다. 집필자의 한 사람으로 지난 여름 땡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태안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답사한 결실을 보게 되어 기쁘다. 둘러보니 태안(泰安)은 글자의 뜻 그대로 ‘태평하고 안락한’ 곳이었다. 높고 거친 산이 없이 백화산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모습에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해안과 내륙을 겸비한 태안은 전통적으로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태안은 삼한 시대 신소도국(臣蘇塗國)이었다. 삼한은 지금의 직산에 근거한 목지국(目支國)이 통괄했는데, 신소도국은 목지국의 제천행사인 소도를 주관했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태안은 신성하고 종교적인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태안으로 이름을 고친 이후 일제강점기 한때 서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에 태안군으로 회복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이 거세게 일어났던 곳으로 격하했기 때문이었다. 충청도 서부의 동학은 1880년 공주를 시작으로, 1883년에는 내포의 동학을 이끌었던 삽교의 박인호와 아산의 안교선 등이 입교해 포덕의 발판을 마련했다. 은밀하게 교세를 유지하던 태안을 포함한 내포 일대의 동학은 1890년 들어 급성장했다. 이때 서산의 최형순은 교주 해월이 서산을 방문했을 때 입도해 서산과 태안 일대에 동학을 전했다. 특히 교조신원운동이 한창이던 1893년 2월 박희인 대접주가 그릇 장수로 변장해 방갈리 가시내에서 조운삼을 입도시켰고, 이어 방갈리 갈머리 마을의 문장준, 문장로, 문구석 등을 입도시켜 태인 동학의 중심인물로 키웠다. 물산이 풍부한 태안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고 동학의 시천주와 유무상자의 정신은 태안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태안의 동학은 원북면 방갈리, 근흥면 수룡리, 이원면 포지리가 특히 강했다. 그 이유는 지리적 조건과 신망있는 지도자 등이 갖추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박희인은 방갈리 문구석, 가시내 조문필, 수룡리 문동하의 집에서 동학 교리를 가르쳤다. 태안의 동학도는 보은 장내리의 신원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성장했다. 1892~3년 교조신원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박인호는 덕의대접주, 박희인은 예산대접주로 임명되어 내포 일대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동학 세력이 커지자 태안부사 신백희는 충청감사 조병식과 공모해 태안 관내의 동학도로부터 속전(贖錢,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 6만6천 냥을 강제징수하는 횡포를 부렸다. 조석헌과 문장준을 중심으로 태안의 동학은 2~3년 만에 급성장했다. 태안을 포함한 내포의 동학도들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시천주를 가까이 했다. 1894년 1월 고부에서 전봉준이 기포(起包)하자 내포의 동학도는 2월 6일 전직 고관 출신 이정규의 팀힉과 수탈에 저항하는 덕산기포를 감행했다. 내포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인 덕산기포는 4월 농민을 괴롭히던 토호 이진사의 응징을 위한 원벌기포로 이어졌다. 태안은 내포 동학의 핵심으로 전라도의 동학농민혁명과 호응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전주화약으로 타협한 후 내포의 동학도는 시세를 관망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과 청일전쟁으로 상황이 급변하였고, 평양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조선 정부에 동학군 탄압을 승인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어 전봉준을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했고, 교주 해월은 9월 18일 총기포령을 내렸다. 태안의 동학도는 해월의 총기포령을 기다려 분연히 일어났다. 10월 1일 내포의 동학군은 서산 관아를 점령해 군수 박정기를 처단했다. 이튿날인 2일에는 태안 관아를 공격해 부사 신백희와 안무사 김경재, 이방 송봉훈을 처단하고 사전에 붙잡힌 동학접주 30여 명을 구출했다. 이후 내포 동학군은 대흥군 관아를 점령하고 홍주성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홍주 목사 이승우는 예포 대도소를 습격해 어려움을 겪었다. 흩어졌던 태안의 동학군은 10월 15일 태안 경이정에서 재집결했다. 승기를 잡은 관군과 일본군은 내포 동학군을 추격했고, 동학군은 이들을 승전곡으로 유인해 크게 무찔렀다. 승전곡 전투 승리는 일본군에 대한 최초의 승전이었다. 이어 내포 동학군은 관작리 전투에서 승리하고 홍주성으로 향했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무기와 전술로 인해 패배했다. 이후 동학군은 해미성, 매현에서 거듭 패했다. 태안의 동학군은 매현 전투 이후 백화산에서 최후의 항전에 돌입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백화산을 포위해 동학군을 고립시켜 몰살시키려 했다. 백화산의 동학군은 동짓달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을 견디며 11월 11일부터 16일까지 치열하게 조・일 연합군과 항전했으나 끝내 새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산화했다. 백화산 동학군들은 비록 역부족이지만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태안에서는 대대적인 동학군 체포와 참혹한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지금의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있는 백화산의 교장(絞扙) 바위에서는 동학군 수백 명을 붙잡아 10여 명씩 포승으로 묶어 목을 조르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백화산 북쪽의 모래기재, 태안여고 개울, 샘골 마을, 남문리 냇가, 정주내 등 여러 곳에서 동학군이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근흥면 토성산에 숨어든 동학군은 총개머리로 잔인하게 때려죽였고, 작두로 머리를 잘랐다. 산 아래로 던져진 머리는 집 추녀에 매달았다. 산 사람을 집에 가두고 방화하는 만행도 저질러 토성산은 도살장을 방불케했다. 다소 장황하게 태안을 포함한 내포의 동학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에 대해 아는 이가 적고 한편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동학혁명에서 충청도의 서부 태안에서 전개된 동학혁명은 그에 못지않게 크게 전개되었다. 태안을 포함한 내포 지역에서만 대접주(大接主)가 박인호, 박희인, 최형순, 장세헌, 한영교 등 5명일 정도로 내포의 동학군 조직은 탄탄했다. 태안군에 한정해서 보면 수접주(首接主)가 11명, 차접주(次接主)가 1명, 접주(接主)가 55명, 접사(接司)가 28명, 접장(接長)이 1명이었고, 육임(六任)의 직책으로 도집(都執) 14명, 집강(執綱) 2명, 대정(大正) 3명, 중정(中正) 3명, 이밖에 다른 호칭의 직책 등 동학군을 이끌었던 지휘부만 121명에 달했다. 이처럼 태안의 동학혁명은 장엄했다. 태안의 동학혁명에 관한 내용이 잘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 동학군의 기록과 이를 이은 후예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안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조석헌은 『조석헌역사』, 문장준은 『문장준역사』를 남겨 동학군의 시각으로 바라본 동학혁명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태안은 해방 후 전국에서 대표적으로 동학혁명에 관한 기록을 정리한 곳이다. 1965년 천도교 태안교구 문원덕 교구장은 『갑오동학혁명 당시 순도한 순도자 명단』를 작성했다. 문 교구장과 교인들은 동학혁명 참여자의 후손을 일일이 찾아 당시의 기록을 정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학정신선양회’를 조직해 태안의 동학혁명을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일에 앞장섰다. 태안의 동학군 후예들은 힘을 모아 1977년 교장바위에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을 건립했다. 문 교구장은 토성산에서 동학군의 목을 자르던 작두를 발굴해 천안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이 작두는 동학군 학살의 유일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동학농민혁명태안유족회’를 이끌었던 문영식 등의 노력으로 2015년에는 태안 동학의 중심지인 원북면 방갈리 태안 화력발전소 내에 “동학농민혁명기포지” 비를 건립했다. 60여 년간 꾸준하게 태안의 동학혁명 선양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21년 10월 22일 전국 지자체로는 3번째로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동학군이 순절한 백화산 아래 건립되었다. 그러나 태안의 동학혁명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여름 답사를 다녀보니 아직 태안 동학혁명 유적 가운데 제대로 정리된 곳은 교장바위와 방갈리, 태안 관아 정도 밖에는 없었다. 동학군이 학살된 토성산, 태안 동학군이 집결한 진벌, 동학군이 학살된 모래기재와 개구랑, 통개, 목네미샘, 정주내 등에는 이곳이 동학혁명의 유적임을 알리는 표식이 하나도 없다. 통개에는 고사리손으로 만든 작은 나무 팻말이 하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직 태안의 동학혁명은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태안이 동학혁명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태안은 그 어느 곳보다 동학혁명의 역사를 지키려고 애쓴 곳이다. 이제 이에 대한 답을 우리들이 해야 하겠다. 태안 동학혁명 유적지를 연결하는 태안 동학길도 만들고, 백화산 항쟁이 벌어졌던 날 가운데 하루를 택해 “태안동학혁명 기억일”을 만들어 동학군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추모제도 이어 나가자. 다행히 이번에 『태안동학농민혁명사』가 간행되어 그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번 기회에 태안의 동학혁명을 알리고 기리는 일에 나서자. 태안 동학혁명을 기억하는 일에 나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던 동학군의 마음과 하나 되자. 그 힘으로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강사) -
“동학 정신을 우리 삶의 가치철학으로 가져가는 것, 그것이 제 꿈이자 바람”나이 마흔에, 서울살이를 끝내고 강원도 홍천 서석면에 새로 둥지를 튼 권소영 대표는 원래 동학과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프랑스 출장길, 관계자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친 프랑스혁명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존재의 존엄성을 인정한 동학사상에 대해 현지인들에게 설파한 뒤, 그다음 날 회의가 믿기지 않을 만큼 술술 풀렸던 경험이 동학과의 인연이라면 인연일 터였다. 한데 2007년, 그가 살러 온 홍천 서석면 풍암리가 동학혁명 전적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 인연이 오려는 길이었구나.” 하고 직감했다. 홍천에 내려온 뒤에는 마을 주민들 요청으로 4년 동안 아이들에게 동학과 동학혁명을 이야기했다. ‘시천주’ 사상에 담겨 있는 존엄과 평등, 공존과 존중을 가르쳤다. 홍천에 자리 잡을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코칭도 하고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를 키우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2017년, “동학 사업을 좀 키워보자”는 서석면 면장의 제안으로 국가유산청 공모사업에 나선 것이 본격적으로 ‘동학 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이후 홍천 서석면 풍암리 동학혁명군 전적지를 알리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기 시작해, 2024년까지 동학혁명 전적지 탐방, 휘호대회, 백일장, 보드게임, 메모리카드, 동학탑놀이, 동경대전·용담유사 목활자 퍼즐, 선양극과 추모음악회, 명상과 심리 치유 프로그램 등 수많은 콘텐츠를 탄생시켰다. 그 무수한 콘텐츠의 아이디어 창구이자 이를 실제 구현으로 이끈 장본인이며, 11월 6일 발대식을 갖는 '강원동학21'을 이끌어나갈 권소영 대표를 만나, 그의 삶과 동학, 앞으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 진행: 노은정 전 편집장) ▶ ‘강원동학21’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와 단체 설립 과정, 지금까지의 주요 활동을 소개해 주신다면? ‘강원동학21’이라는 이름에 세 가지 축을 담았습니다. 하나는 강원 지역 동학의 역사예요. 인제, 정선, 영월, 평창, 원주, 강릉, 고성, 홍천 등 곳곳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동경대전」이 발간되고 보국안민의 기포가 다시 일어난 지역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동학의 핵심 사상, 시천주와 삼경사상, 인내천과 사인여천 정신입니다. 셋째는 이 사상을 21세기 현재의 언어와 삶으로 풀어가겠다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강원동학’ 뒤에 ‘21’을 붙였습니다. 제가 홍천에 온 지 20년이 되어 갑니다. 2017년에 당시 서석면 면장님이 제가 기획·컨설팅하는 걸 알고 “서석면에 동학혁명 유적지가 있는데, 이걸 제대로 키우고 싶다”며 동학 관련 사업을 제안하셨어요. 당시 서석면동학혁명추모사업회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주축 어르신들만 남아서 사실상 활동이 거의 없던 상태였어요. 한데 공모사업을 하려면 단체에 소속돼야 하니, “단체 이름을 좀 빌려 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해서 2017년 국가유산청 지역유산활용사업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동학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017년부터 2024년까지 14개의 프로그램 개발은 거의 완성된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동학 정신을 서예로 표현하는 전국 휘호대회와 학생들이 동학농민혁명 과정을 공부하며 글을 쓰는 백일장, 역사 흐름과 인물을 게임으로 배우는 보드게임과 메모리카드, 시천주·존엄·존중·공경 같은 키워드를 몸으로 익히는 ‘동학탑놀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목활자본 퍼즐과 인쇄 체험, 지역주민이 만든 선양극과 추모음악회, 동학 아카데미, 초등학교 체험, 중학교 자유학기제 프로그램, 동학사상과 명상을 결합한 심리 치유 프로그램과 동학군 복장을 입어보고 행진하는 체험과 동학 관련 유튜브와 캐릭터, 이모티콘 대회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초등학생, 중·고생, 학부모, 마을 주민과 군인들까지 합치면 대략 5천 명 정도가 홍천 동학과 동학혁명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 기반을 바탕으로, 홍천을 넘어 강원 전역으로 확장하기 위해 ‘강원동학21’이라는 새 이름으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개발해 오신 프로그램이 매우 다양합니다. 휘호대회, 보드게임, 심리 치유 프로그램, 음악회 등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기획을 할 때 ‘한정된 틀’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산 1,000만 원이면 2,000만 원 이상의 효과를 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늘 고민합니다. 그래서 동학 프로그램들도 교육, 놀이, 예술, 심리를 한데 묶어 설계하고 있어요. 먼저 휘호대회는 강원도 교육감님께서도 칭찬하신 행사입니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을 공부하게 되거든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금 누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고, 글씨에 담긴 마음도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다섯 번 진행했습니다. 심리 치유 프로그램은 동학사상을 현대 심리학 기법과 결합한 것입니다. 참가자들이 시천주·삼경사상, 수심정기를 체험형으로 접하도록 설계해서, 프로그램이 끝나면 마음이 굉장히 차분해졌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습니다. 이건 제가 아이들 코칭과 부모 상담을 오랫동안 하면서 쌓은 경험과 동학 공부가 만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이 음악회입니다. 저는 어릴 때 클래식을 전공해볼까 고민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동학 스토리텔링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번 11월 6일 강원동학21 발대식에서도 음악과 동학 이야기를 엮으려 합니다. 이번 행사에서 첫 곡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시작합니다. 인트로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돌아보게 되는 자각의 느낌이 있거든요. 이어서 「나 하나 꽃 피어」라는 가곡이 불립니다. 나 혼자만 피어서는 숲이 되지 않지만,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꽃을 피울 때 어떤 세상이 열리는지를 동학 정신과 연결해 설명하지요. 또 영화 「미션」에 나오는 「가브리엘스 오보에」를 들려줍니다. 이 곡을 들으며 동학군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존엄과 평화의 가치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나눕니다. 이렇게 곡마다 스토리텔링 해설을 붙입니다. 음악적 분석만이 아니라 이 곡이 동학과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감응 매치하여 이야기하면, 관객들이 깊게 공감합니다. “난 동학은 어려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들으니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시죠.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비슷합니다. 밥을 먹을 때 “농부가 쌀을 안 만들었으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엄마가 밥을 해 줄 때와 안 해 줄 때의 차이, 그 사이의 정성과 마음을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면, 생각의 폭과 깊이가 확실히 달라집니다. 저는 그 과정을 ‘동학식 수심정기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 최근 홍천군의회 본회의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 조례안’이 부결되면서 지역사회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생각이 들었고, 이후 어떤 대응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말씀드린 대로 어이없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났습니다. 그동안 쌓아 온 기념사업과 주민들의 호응, 전국적인 평가를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었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학 정신을 이야기하는 내가, 동학이 말하는 수심정기와 시천주를 어느 만큼 실천했는가를 먼저 돌아보게 됐습니다. 일부에서는 군의회 내 갈등, 몇몇 기사에 따른 감정적 반향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동안 해 온 활동의 진정성과 필요성을 더 깊이 이해시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지금은 2026년 재발의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군의회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기념사업의 의미와 내용, 강원특별자치도 조례와의 연계, 홍천이 갖는 상징성을 차분히 설명할 예정입니다. 또 하나는 추모일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추모일이 양력 10월 23일로만 알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음력 10월 23일입니다. 올해부터는 이 부분도 바로잡고, 음력 추모일을 기준으로 강원동학21이 준비하는 추모·기념 행사를 체계화해 보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과 논쟁도 결국 조금 더 좋은 길로 가기 위한 성장통이라고 보고, 끝까지 책임 있게 풀어가려 합니다. ▶ 조례 제정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조례가 통과될 경우 지역사회와 동학 기념사업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시는지요? 조례는 결국 공공의 약속입니다. 강원특별자치도에는 이미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조례’가 있어서, 큰 틀에서 강원동학21 사업을 하는 데 제도적 장애는 없습니다. 하지만 홍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의 실제 무대는 홍천군입니다. 홍천군에 조례가 제정되면, 다른 시·군에 선도적인 모범 사례가 될 수 있고, 기초자치단체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과 동학 정신 계승을 법적 책무로 인식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민간의 열정과 자발적 재능기부에 의존한 측면이 크다면, 조례 제정 이후에는 예산·인력·교육·관광 정책과의 연계가 훨씬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동학 정신을 강원도 정체성의 한 축으로 삼겠다는 공적 선언이 되는 셈이지요. ▶ 강원동학21이 비영리 사단법인, 궁극적으로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재 추진 상황과 법인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지요? 현재는 비영리 사단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고, 최종 목표는 재단법인화입니다. 사단법인은 사람 중심의 조직이고, 재단법인은 재정과 자산을 기반으로 한 안정적인 플랫폼입니다. 강원동학21이 장기적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재단법인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은 강원도 곳곳에서 동학과 동학 정신에 공감하는 분들을 모아 ‘강원동학21 재단법인 추진위원회’를 꾸리고 있습니다. 이 법인을 통해, 재정적 안정화를 이루고, 동학 해설사, 강사, 프로그램 기획자 등 전문 인력을 양성하며, 학교·지자체·문화재단·시민단체·천도교 교구와의 협력 구조를 정비해, 동학 정신을 강원의 정체성과 공동체성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플랫폼을 만들고자 합니다. 특히 저는 천도교 입교 여부와 상관없이, 현대화된 동학 정신을 삶의 철학으로 전하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의 네트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동시에 천도교중앙총부와도 마인드 교육, 직무·인성 교육 등에서 협력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천도교도 함께 알려지고, 강원도의 정체성 확립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강원 지역의 동학 유적을 잇는 ‘동학길’ 사업과 2027년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준비 중인 계획이 궁금합니다. 강원동학21이 준비하는 큰 축 중 하나가 ‘강원 동학길’ 역사 투어예요. 원주–홍천–인제 권역, 홍천–평창–횡성 권역, 홍천–고성–강릉 권역, 홍천–영월–정선–원주 권역으로 나누어 1박 2일 또는 2박 3일 코스를 구상하고 있어요. 단순히 “여기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수준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과 시천주·삼경사상, 인내천·사인여천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는 여행이 되도록 설계 중입니다. 특히 2027년 해월 최시형 선생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해월 선생 평전을 쓴 분들의 책을 거의 다 구입해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해월 신사의 삶과 사상을 담은 선양극·뮤지컬 시나리오를 세 편 정도 써 두었고, 앞으로 검토를 받아 무대에 올려보려 합니다. 해월 선생이 걸었던 길을 실제로 따라가며, 공연과 강의, 명상과 음악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해월의 길을 따라서’라는 이름으로 강원도와 함께 개발하는 것이 목표예요. 이 과정에서 춘천교구, 원주교구, 강릉교구 등 강원 지역 천도교 교구들과의 네트워크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합니다. 각 교구가 지닌 역사와 인적 자원을 살리면, 교구 입장에서도 창조적인 선도 역할을 할 수 있고, 강원동학21은 종교색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동학·천도교의 가치를 넓게 알릴 수 있다고 봅니다. ▶ 여러 자리에서 “정치는 멈춰도 동학 정신은 멈출 수 없다”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동학 정신은 어떻게 되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창도하신 이후, 해월 최시형 선생, 의암 손병희 선생으로 이어지는 차원이 다른 생각의 가치혁명이었습니다. 희망이 거의 없던 시대에 ‘하늘이 사람 안에 있다(시천주·인내천)’는 말은 글자 그대로 빛이었죠. 지금 우리는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누리는 것 같지만, 자기 삶의 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자질은 오히려 부족해진 부분을 많이 보곤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면 환경과 타인 탓만 하고, 정치·사회적 문제도 내 마음과는 별개라고 생각하지요. 시천주 사상은 한울님을 모시기 위해 수심정기,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로 세우라고 가르칩니다. 삼경사상은 만물을 공경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걸 오늘의 언어로 정리하면 존엄, 존중, 공존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존엄한 한울님으로 여기며 수심정기를 실천하고, 타인과 다른 존재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고, 함께 어우러지는 공존을 목표로 삼는 것.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소통 이전에 존중이 없습니다. 만나서 각자 자기 말만 하고 돌아가면서 그걸 대화라고 부르기도 해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과 감정이 앞서다 보니 조율과 조화가 설 자리가 적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학 정신을 AI 시대, 포스트휴먼 시대의 K-철학, K-동학으로 정리하고 싶어요. 인간의 존엄과 마음의 평화, 타인과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동학 정신이 오늘의 사회 가치로 뿌리내린다면, 정치적 양극화와 혐오, 차별, 공동체 붕괴 같은 문제의 뿌리가 조금씩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 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어려움, 그리고 시민사회나 지방정부, 중앙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서석면동학혁명추모사업회는 1976년부터 있었지만, 오랫동안 일부 주축 인물 중심으로 돌아가며 조직의 임무와 기능, 목표와 가치가 거의 사장된 상태였어요. 2018년부터 제가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공모사업을 따오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예산을 끌어오며 조직의 틀을 새로 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서석면 원주민도 아니고, 여성, 그것도 아줌마라는 이유로 괜한 트집과 반발을 겪기도 했습니다. 서석면 안에만 동학을 가둬두고 싶어 하는 분들은 “왜 홍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느냐, 왜 강원 전체를 이야기하느냐”며 반대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같이 일하자”고 나서는 사람보다, 멀찍이 서서 지켜보거나 트집을 잡고 험담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참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시·군이나 도 단위에서 이 사업을 바라보는 분들은 ‘너무 필요한 일’이라고 평가해 주시더라고요. 사회 문제와 조직 문제로 고민하는 리더들은 동학 정신 계승 사업을 보면서 “우리 지역에도 이런 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가까이에서는 홀대받고, 멀리서는 부러움을 사는 모습이 종종 헛헛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앞으로는 강원동학21 발대식을 계기로, 강원 지역의 뜻있는 인재와 명망 있는 추진위원들을 적극적으로 모실 생각이에요. 시민사회에는 “이건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공동체의 가치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고, 지방정부에는 “정신문화의 토대가 튼튼해야 지방자치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중앙정부에는 동학 정신을 전국적 가치로 확산하는 데 꾸준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드리고 싶고요. ▶ ‘동학’과 ‘예술’을 결합한 문화기획이 권 대표님만의 강점인 듯합니다. 앞으로 꿈꾸는 음악·예술 프로젝트와 5년 안에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지요? 저는 동학을 책 속의 사상으로만 두고 싶지 않아요. 노래와 연극, 클래식과 국악, 뮤지컬, 영상과 유튜브 채널 등 사람들이 실제로 감동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형식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이미 홍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유튜브 채널을 통해 여러 공연과 강연, 프로그램을 올리고 있고, 이번 강원동학21 발대식에서도 클래식과 동학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문 음악인들이 “우리끼리만 좋다”고 만족하는 데 머무르면 확장이 안 된다고 늘 말합니다. 예술은 결국 남이 듣고 감동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5년 안에, 강원동학21을 재단법인으로 세우고, 해월 최시형 선생 탄신 200주년에 맞추어 해월 선생 선양극·뮤지컬을 무대에 올리고, 정치·사회·교육·문화·예술 전반에 동학 정신을 녹여낸 가치 프로젝트를 단계별로 수행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개인적으로 ‘21세기형 동학운동’을 거창한 혁명으로 보지 않습니다. 각자가 스스로를 존엄한 한울님으로 여기고, 그 눈으로 타인과 자연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이미 개벽은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명상도 결국은 ‘자기라는 한울이 자기 마음을 경계하는 과정’이니까요. 그렇게 보면 매일이, 지금 이 순간이 이미 동학운동의 현장입니다. 강원동학21이 그 현장에서 작은 촛불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강원도에는 동학으로 공동체를 다시 세우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느리지만 또 저 같은 분이 나오셔서 이어간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기억을 남기는 일도 있지만 누군가의 사명으로 넘겨주는게 제 마지막까지의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오늘도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
[칼럼] 세계화를 위한 천도교 문화예술 만들기(1)전 세계적으로 K-POP, K-FOOD, K-DRAMA, K-MOVIE, K-BEAUTY가 세계인들에게 환호를 받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글 배우기가 붐을 타고 있다. 우리 민족의 감성과 놀이문화가 세계화가 되고 있는 21세기이다. 또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계엄을 해제시킨 시민들에 의한 K-민주주의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한 K-민주주의의 뿌리에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있으며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후세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그 가치를 인정받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2023년 5월 18일 유네스코 세계기록물에 등재되었다. 이것은 동학정신이 세계화를 이루는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손병희 의암성사께서는 법설 「천도교와 신종교」편에서 “천도교는 천도교인의 사유물이 아니요, 세계인류의 공유물이니라. 천도교는 문호적 종교가 아니요 개방적 종교이니라,~~천도교는 구역적 종교가 아니요 세계적 종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천도교가 세계인류의 공유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들이 있으며 또 이것은 우리 후학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천도교 세계화를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희노애락의 연속이다. 즐겁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일은 바로 인간의 생활에서 비롯된 인간의 감정이다. 그 감정에 다가가서 공감대를 형성할 때 인간은 비로소 감정이 표출되며 공감이 형성된다. 인간의 감성과 소통하는 천도교 동학문화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K-컬처처럼 K-동학컬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만들어 가야 할까? 문화<CULTURE>는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 체계를 말한다. 다시 말을 하자면 천도교 문화란 종교행사, 의절, 일상생할에서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문화에 포함된다. 예를 들자면 밥 먹을 때의 식고, 나가고 들어갈 때, 무슨 일을 할 때 하는 심고,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인사말 등과 제례, 상례, 입교식, 시일식 등 종교에 관련된 모든 것이 문화속에 포함된다. 따라서 문화란 너무 광범위하므로 하나하나 나누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본고에서는 예술분야 특히 천도교의 음악, 뮤지컬, 무용, 미술, 영화분야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자 한다. 음악을 먼저 알아 보자, 노래는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기가 참 좋다. 조용필 가수가 북한에서 노래를 하니까 공연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흐리고 공감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본 적이 있다. 이처럼 노래는 사람을 울리고 웃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천도교 음악에는 천덕송과 송가가 있다. 천덕송 32편, 송가 26편, 합 58편의 노래가 있다. 그렇다면 천도교 세계화를 위하여 이 곡들이 사람들의 정서와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곡들인지 생각해 보자. 또한 케네디홀에서 연주 혹은 공연할 수 있는 곡들인지, 오케스트라, 앙상블 연주가 가능한 곡들인지, 아니면 K-POP처럼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대중화 할 수 있는 곡들인지 생각해 보자. 부족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전문 작곡가에게 의뢰하여 다양한 곡들이 탄생해야 한다고 본다. 클래식과 대중성 있는 음악, 때로는 장엄하면서도 함께 부를 수 있는 곡, 음악으로 감동받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곡들이 필요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권호성 감독의 ‘들풀’, ‘만고풍상 겪은 손’ 등 몇 편의 뮤지컬이 제작되어 국내에서 공연되었다. 이러한 공연은 국내에서만 공연되어질 것이 아니라 해외로 진출하도록 교단차원에서도 지원과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1994년도에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연극, 뮤지컬, 무용계에도 동학바람이 크게 불었다. 서울시립무용단이 선보인 <녹두꽃이 떨어지면>은 출연진이 110여명, 1시간 10분짜리 대작이었다. (안무: 한상근, 주옥녀, 홍경희, 연출: 황두진) 그리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주최로 민족춤제전에서 동학관련 작품이 2개나 선보였다. 춤누리, 춤세상, 한두레 등이 공동 창작한 <검결-칼노래 칼춤> 과 춤사랑 해오름 무용단의 현대무용 <백년전 백년후> 역시 동학혁명을 통해 암울한 시대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농민들의 의지를 간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현대에 올수록 동학관련 무용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연극 등에서 동학을 주제로 무용이 제작되기를 바라며 그 공연을 지원하고 장려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미술 분야를 한번 살펴보자. 천도교 미술인회가 올해까지 35회째 활동하고 있다. 어린이, 대학생, 성인들을 포함한 그림, 조각, 서예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여 전시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작품 내용과 전시 분야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어야 할 것이다. 천도교인 작가뿐만 아니라 천도교 동학 작품에 관심 있는 전업 작가들을 초청 또는 섭외하여 천도교미술계가 더 전문화되고 깊이 있게 확장되면 좋겠다. 아마츄어와 전문가를 분리하여 외연 확대와 깊이 있는 활동을 나누어서 한편으로는 대중화와 또 한편으로는 깊이 있는 그림, 조각 작품 등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로마의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의 건축물에 그려진 성화작품에서 받는 감동을 천도교 성지인 용담정, 봉황각, 중앙대교당에서도 받았으면 좋겠다. 그림, 조각, 서예, 공예 등 미술작품을 통해서 천도교를 찾는 방문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를 원한다. 동학 관련 영화를 살펴보자. 이현정 감독의 “삼례(2015)”, 박영철 감독의 “동학, 수운 최제우(2011)”, 임권택 감독의 “개벽(1991)”, 최훈 감독의 “동학난(1962)” 이 있다. 총 4편의 영화, 그것도 교단이 주최가 되어 만든 작품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잘 만든 영화 한편으로 국내외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영화를 우리는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예산이 문제라면 영화를 만들기 위한 성금 모금과 클라우딩 펀드 등 방법을 모색하면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작가, 감독, 주인공 등 최고의 전문가를 섭외하여 영화가 흥행하면 투자금을 회수하고도 수익이 발생한다. 예를 들자면 170억 투자로 2시간 20여분 상영시간인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 없다” 영화는 2025년 9월 24일 개봉하여 3주차 관객 수 2,206,429명, 누적 매출액 21,663,542,930원으로 대한민국 박스 오피스 영화 1위를 차지하였다. 물론 주연배우로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등 걸출한 배우들이 나온 것도 한몫했지만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베니스 국제영화제, 토론토 국제영화제, 부산 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되어 상영되었다. 미국작가인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작가의 소설 액스 (The Ax)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해고된 한 남성이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이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를 제거하면서 벌어지는 과정을 블랙코미디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21세기 현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사회에서의 취업난, 극도의 이기주의, 인간성 상실, 무너져 가는 도덕성, 상위10%의 부의 향유, 로봇이 대신하는 AI시대, 방향을 잘못 잡는 수사력 등등... 박찬욱 감독이 시사해주는 질문은 영화가 끝나도 관객들이 자리를 떠날 줄 모르게 하였다. 이처럼 영화가 주는 힘은 대단하다. 이 영화에서 던지는 문제를 동학으로 풀어내면 풀릴지 않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동학이라는 엄청난 원석을 가지고 있다. 인간존엄, 생명, 평화, 생태, 우주, 자연, 어린이, 여성, 노동자, 평등 등 우리가 갈고 닦아서 보석으로 만들 원석들이 거대한 산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원석들을 잘 갈고 닦아서 문화 예술로 꽃 피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후학들의 책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2027년은 해월신사 탄신200년이 되는 해이다. 해월신사 탄신200년을 기해 천도교의 세계화를 선포하고 음악, 미술, 뮤지컬, 무용, 영화가 동학 주제로 제작되어 세계인들에게 선보인다면 이 또한 얼마나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글, 정정숙 (종의원 의장) -
대동교구, 신입 교인 허 용 입교식대동교구는 포덕 166년(2025) 8월 31일, 신입 교인 허 용 동덕의 입교식을 봉행했다. 이날 입교식은 김성수 교무차장의 전교로 진행되었으며, 교인들은 함께 축하와 환영의 마음을 전했다. 허 용 동덕은 입교를 통해 천도교 신앙의 길에 새롭게 들어서며, 한울님을 모시고 인내천(人乃天)의 정신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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