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칼럼] 오늘의 대고천하-천지부모지난 11월 30일은 제가 전주교구에서 120주년 현도기념 특강을 한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대고천하 – 천지부모>라는 제목이었습니다. 120년 전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것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고민과 갈등과 혼란 속에서 선택한 비장한 결정이기에 오늘 2025년에 우리는 대중 앞에 뭘 선포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정한 제목입니다. 우리 천도교가 연례행사로 치르는 기념식이 수도 없이 많은데 그중 하나로 현도기념일을 안일하게 다뤄도 될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점 줄어드는 이름뿐인 교구들과 늘어가는 시일식 빈 의자들을 보면서 우리가 서둘러 선언해야 할 긴급한 과업이 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년여 만에 다시 전주교구로 와서 보니 참석자들이 많이 줄어있었습니다. 제가 고향 쪽인 경남 진주교구로 가기 전에만 해도 시일식에 20명 이상이 참석했고 지하에는 전용 식당도 있었는데 와서 보니 딱 8명이 참석했고 지하 식당은 없고 다른 단체가 입주해 있었습니다. 피아노 반주자도 없고 음향기기로 반주와 노래가 나왔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포덕일까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할 대고천하가 포덕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인 이 멋진 장소의 전주교구에 사람들이 가득 차는 것일까요? 아닙니다”라고도 했습니다. 120년 전 당시를 떠올리면 그렇습니다. 서기 1905년 11월은 대고천하 한 달 전입니다. 조선의 외교권이 빼앗기고 주한 외국 공사관도 모두 폐쇄된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습니다. 일본의 조선 지배 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고 있었는데 동학은 사도난적이니, 동학비적이니, 동학 것들, 동학당, 시천도, 활인도, 사술지무 등으로 불리며 탄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손병희 선생이 진보회를 만들어 근대화 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을 벌였으나 동학에서 뛰쳐나간 이들이 친일파와 손잡고 일진회를 만들어 노골적인 방해 활동을 벌이던 때입니다. 기가 막히지요. 더 심각한 것은 일진회가 “나 친일파요”라고 하지 않고 손병희가 벌이던 갑진개혁운동인 단발과 의복 개량 운동도 했다는 것입니다. 서양을 물리치기 위해 동양끼리 뭉치자면서 일본과 손잡자고 그럴듯하게 백성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혁과 근대화도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서 전광훈 등의 태극기부대가 “우리는 친일이고 미국 숭배주의자요”라고 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러니 손병희의 고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동학 지도부는 다 처형당해 없지, 몇 년 가서 살아 보니 눈이 돌아갈 정도로 일본은 발전하고 있지, 대한제국이라고 이름표는 달았지만 조선 조정은 꼴이 말이 아니지, 동학한다고 어디 내놓고 말할 수가 있나. 동학 내부는 사분오열 일보 직전이지.. “당시 상황은 피가 마르고 숨이 막히는 시절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가하게 요즘 식으로 세미나도 하고 포럼도 열면서 천도교로 개칭을 하니 마니 할 겨를이 없었고 마른침도 없어 입술이 터지고 눈에 핏발이 서는 순간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박정희나 전두환의 파쇼정권 때 수배되고 투옥되고 했던 사람들은 압니다. 야밤에 삐걱대는 대문 소리나 두런거리는 남정네 목소리만 들려도 맨발로 뒷담을 넘어 튀어야 했던 사람들은 압니다. 동지들은 의문사를 당해 시체도 못 찾고 날이면 날마다 투신과 분신이 일어나던 때를 숨죽여 살아 본 사람들은 압니다. 대고천하 당시 손병희의 처지와 심정이 어땠을지를. 당시에 사도난적으로 몰리는 거나 요즘 비정규직 문제나 보안법 폐지 또는 성소수자나 양심적 병역거부 주장을 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거나 똑같은 맥락입니다. 손병희는 동학을 부흥하자, 동학교도를 늘이자. 암자나 동학교도 집에서 만나지 말고 번듯한 건물을 하나 지어보자 등의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식 종교단체로 과감히 변신하면서 조직과 교리를 정비하고 수련과 민족운동을 새로이 펼쳐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정말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백척간두 진일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특강에서 지금 이 순간 ‘천지부모’를 선포하자고 말했습니다. ‘천지는 곧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니, 천지부모는 일체니라’를 떠올리며 “이종진은 곧 전주교구요 전주교구는 곧 이종진이다. 이재선도 그러하니 이종진은 곧 이재선이니라”라고 읊었습니다. 하나 됨의 천지부모 사상은 우리 천도교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라는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천지부모의 삶을 회복하자는 말은 무시무시한 선언입니다. 오늘날 개발과 발전과 효율과 편안함과 돈벌이에 중독된 세상 사람은 남을 경쟁 상대로 봅니다.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고 압니다. 남보다 앞서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두 내 편리를 위한 소모품입니다. 이런 마당에 모든 생물과 물건을 다 내 부모님처럼 여기고 산다는 것은 천지개벽 그 자체입니다. 동물권, 식물권, 자연기본권(Plant Rights) 흐름의 완결판이자 기후 위기 해결, 탄소발자국 제로 운동의 종결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준비해 간 <주식회사 에코샵홀씨>에서 산 고급 손수건을 참석자들에게 선물로 나눠드렸습니다. 전주교구로 돌아온 기념 선물이기도 합니다. 손수건은 화장실에서 일회용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식당에 가서 미세플라스틱으로 된 물티슈나 일회용 냅킨도 쓰지 말자는 것으로 천도교한울연대에서 하던 활동이기도 합니다. 저는 천지부모 개념을 웰다잉 운동으로 선포하자고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죽음은 정말 구질구질합니다. 그 어떤 포유류나 영장류, 고등동물들도 인간처럼 지저분하게 죽지 않습니다. 평생 의료비의 반을 죽기 몇 년에 따 쓰고 자기 팔다리 마음대로 못 움직이고 자기 배변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 앞에 가랑이 벌리고 기저귀 갈아 차는 인생의 말로는 천지부모의 삶을 살지 못한 인간들의 자업자득입니다. 치명적인 문명병입니다. 노인요양원과 치매와 알츠하이머는 인간 외 어떤 동물도 없습니다. 인간이 손대지 않으면 동물과 식물에 병은 없습니다. ‘삼매사(사마지마라니)’나 ‘살레카나’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락사나 조력사는 들어봤겠습니다. 그것이 합법화된 캐나다에서는 제법 고상하게 ‘죽음에 대한 의료지원 (Medical assistance in dying)’이라고 부릅니다. 자이나교의 ‘살레카나’는 우리의 ‘성령출세설’과 닮아있습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있으면서 맑은 정신 상태로 담담하게 (명상적)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껍데기인 몸을 벗고(성령출세) 본래의 영적 자리(잠겨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천지부모의 자연순환 이치에 고즈넉이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등바등 소리 지르고 링거줄 붙잡고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긴 여행을 마친 순례자가 지친 몸을 누일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저녁 노을빛 같은 모습입니다. 영이 적극적으로 드러나 형체 있는 삶을 살다가 영이 조용히 작용하는 섭리인 형체 없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두려움도 슬픔도 아쉬움도 아닙니다. 그런 임종을 우리 동덕님들이 맞을 수 있게 하는 방책과 수련을 마련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는 효과적인 포덕 활동이고 신앙심 확립이며 교구의 건실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호주의 원주민 아보리진족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스스로 깨닫는다고 합니다. 조용히 물병도 가지지 않고 사막 가운데로 가서 꼿꼿하게 앉아서 임종을 한다고 합니다.(좌탈입망). 천지부모의 삶을 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지지난달에 제가 아는 분도 스위스로 안락사하러 갔습니다. 가기 전에 조촐한 이별식을 했습니다. 4,5천 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대고천하 두 갑자를 맞는 오늘, 천도교에 신 대고천하 추진팀이라도 만들어야 할까요? 글, 목암 전희식(전주교구) -
동학이랑 천도교랑 같은 건가요?희암 성주현 상주선도사의 답변 : 동학과 천도교는 같습니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창명하였으며, 천도교는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를 제1세 교조로 받들고 있습니다. 동학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고 하였으며, 이를 ‘대고천하(大告天下)’라고 합니다. 천도교(天道敎)의 대고천하(大告天下) 의암성사께서는 드디어 동학(東學)의 현도(顯道)를 결심하고 이 해 (포덕46년1905) 12월 1일을 기하여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라 이름하고 천하(天下)에 광포(廣布)하였으니 이것이 곧 천도교(天道敎)의 대고천하(大告天下)이다. 동학을 천도교라 이름하게 된 것은 대신사께서 논학문(論學文)에서 ‘도즉천도 학즉동학 ( 道則天道 學則東學) 이라고 한 데서 연유한 것인데 이로써 40여 년 동안 염원하던 현도(縣道)가 획기적(劃期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현도에 대한 광고문(廣告文)은 광무9년(1905)12월 1일(금요일)자 제국(帝國)신문 제8권 제274호 첫머리에 게재(揭載) 된 것을 비롯해서 15회나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廣告(광고) (원문)-夫吾敎는 天道之大原일세 曰 天道라 吾敎之刱明이 及今四十六年에 信奉之人이 如是其廣하며 如是其多하되 敎堂之不遑建築은 其爲遺憾이 不容提設이요 現今人文이 천개하야 各敎之自由信仰이 爲萬國之公禮요 其敎堂之自由建築도 亦係成例니 吾敎會堂之翼然大立이 亦應天順人之一大表準也라 惟我同胞諸君은 亮悉함 敎會堂建築開工은 明年2월로 爲始事 天道敎大道主 孫秉熙 고백 (교서 ‘천도교백년약사(상)’에서 옮김) (원문해설) - 무릇 우리 교는 천도의 큰 근원일세. 그 이름을 천도라고 하니라. 우리 교가 창명된 지 이제 46년이 지나는 가운데 신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널리 있으며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이 많은데, 교당을 건축하지 못한 것은 유감 되기 다시 말할 것이 없고, 지금 세계는 인류 문화가 드러나고 열려서 각 종교의 자유로 신앙하는 것이 만국의 공예가 되었고 그 교당을 자유로 건축하는 것도 또한 전례가 되어 있으니, 우리 교회의 교당도 날아갈 듯이 크게 짓는 것도 또한 천시에 응하고 사람이 순히 따르는 일대 표준인 것이다. 우리 동포 모든 분들이여 이와 같이 믿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당 건축공사 시작은 명년 2월로 시작할 것입니다. 천도교대도주 손병희 고백 (원문해설: 경암 이영노) -
제1회 동학농민혁명 청산총기포령 기념 축제 개최제1회 동학농민혁명 청산총기포령 기념 가념축제가 오는 11월 1일(토) 충북 옥천군 청산면 일원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북 지역 최초의 봉기지로 알려진 청산총기포령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동학농민군의 자주·평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다. 오전, ‘총기포령 재현’으로 역사의 현장을 되살린다 1부 행사는 오전 9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청산면 문바위골(청산면 한국리 223-5)에서 열린다. 개막식을 시작으로 당시 봉기 상황을 재현하는 총기포령 재헌과 함께 진혼제(고사, 씻김굿)가 진행된다. 이어 도종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강연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오늘의 시대정신을 조명할 예정이다. 행사 마지막에는 참가자들이 함께하는 돌밥 나눔이 마련되어, 공동체 정신과 나눔의 가치를 되새긴다. 오후, 제131주년 기념 학술회의로 사상과 정신을 계승 2부 제131주년 동학 총기포령 기념 학술회의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청산면 다목적회관 2층 회의실(청산면 지전1길 5)에서 열린다. 주제 발표는 신영우 충북대학교 명예교수가 맡아 ‘충북 일대의 동학농민군 봉기와 항일투쟁’을 주제로 발표한다. 이후에는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의 사회로 성주현 경희대 평생교육원 교수, 이만재 옥천향토전시관 관장, 임기현 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정선원 공주 동학연구회 회장 등이 참여해 지정토론을 진행한다. 학술회의는 종합토론으로 마무리되며, 청산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양상과 현대적 계승 방안을 모색한다. 지역과 함께하는 역사문화축제 이번 행사는 옥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 충북연구원이 공동 주최하고, 옥천군과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가 후원한다. 문의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010-3644-9570)와 손병희계승사업회 (010-5530-2516)로 하면 된다. 이번 청산총기포령 가념축제는 충북 청산의 역사적 현장에서 ‘사람이 하늘이다(人是天)’라는 동학의 근본정신을 되새기며, 131년 전 민중이 외쳤던 평등과 자유의 외침을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잇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천도교와 3 · 1운동(22)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 성사에 의해 이루어졌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3.1운동의 정식명칭 3.1독립운동 90주년을 맞는 올해(2009년, 편집자)를 맞아 3.1운동의 이름이 제대로 되어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본교과서에 3.1운동을 폭동이라 기술하였다하여 그 시정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 요구를 받아들여 폭동이란 이름을 버리고 3.1독립운동이라 고쳤다. 그러나 우리 교과서에는 아직도 3.1운동이라 하면서 '독립' 두 글자를 넣지 않고 있다. 남들에게는 독립운동이라 부르라 해놓고 자기는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3.1운동은 우리 역사에 있어 무궁화 꽃이다. 3.1운동은 또 우리 민족사에 구심점으로서 그 어떤 다른 역사보다도 자랑스러운 거사로 믿고 있다. 우리 근대사에 3.1운동만큼 의미심장한 역사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역사에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않았다면 타고르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어떤 이는 3.1운동을 우리 역사의 여러 강줄기가 모여드는 커다란 호수라고 한다. 마치 백두산 천지 같은 깊은 물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의 결과 태어난 나라라고 명기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를 잘 읽어보면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모든 나라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 투쟁한 역사라 하겠다. 우리는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해 독립, 즉 자유를 외친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외친 것이다. 일본은 물론 중국 영국 미국 어떤 나라도 한국의 주권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는 날 세계평화는 깨지고 만다고 엄중히 선언한 것이다. 서울 종로 2가에는 3.1운동이 일어난 성지 탑골공원이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유적지는 사라지고 없다. 왜 서울시 당국은 길을 넓히고 빌딩을 짓는 데만 정신이 팔리고 동방의 등불을 밝히는 데는 관심이 없는가? 3.1운동 90주년을 맞이하면서 해가 갈수록 빛이 바래가고 있는 서울의 역사정신이 아쉽기만 하다. 3.1운동이 평양에서 1시간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3.1운동의 영광을 버리려하는가 잊지 말고 서서히 반성하라. 3. 맺는 말 3·1독립운동은 일제의 10년간의 가혹한 무단통치로 인한 압제와 경제적 착취는 물론 민족의 자존심마저 유린한 극한적인 상황에서 이천만 민족의 분노가 폭발한 일대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전국적인 강력한 조직망과 300만의 교인을 포용한 천도교가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청사에 빛나는 민족사를 창출하였다. 이 3·1독립운동은 시종일관 이 운동을 영도하신 의암손병희 선생이 중심에 계셨기에 가능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은 천도교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독립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의 역할은 이 운동을 결정짓는 절대적 계기가 되었다. 우선 운동의 3대 기본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일원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미 10년 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이 천도교요, 독립운동 자금의 공급처도 천도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비롯한 40여개소의 지방 교구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중요 교역자가 구속되고, 일백 수십만 원의 예금을 압수당하였다. 결국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포용력, 그리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대교당 건축을 추진한 것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위해 운동자금 지원을 결단한 것도,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해마다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유지해온 것도 의암손병희 선생의 결단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3·1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거나 심지어 천도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마저 있음을 보게 되면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생명과 재산을 바쳐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면서 깊이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연재를 마칩니다. 끝.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의암 손병희 성사 우수논문 장학생 선발… 청년 세대 연구 참여 독려(사)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는 중국정경문화원과 공동으로 「2025 의암 손병희 우수논문 장학생 선발」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번 사업은 전국의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의암 성사의 사상과 업적을 깊이 연구할 수 있도록 마련된 학문적 장이다. 응모 주제는 의암 손병희의 삶과 사상, 동학농민혁명에서의 역할, 3·1혁명 주도와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등 관련 전 분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참여 자격은 휴학생을 제외한 전국 대학(원)생이며, 참여 의향서와 논문 초록은 오는 10월 31일까지 이메일(sbh7802@daum.net )로 제출해야 한다. 논문 원고는 11월 30일까지 접수하면 된다. 논문은 A4 기준 10장 내외(원고지 70매)로 작성하며, 시상은 12월 중 진행된다. 시상 내역은 ▲ 최우수상 1편(200만 원) ▲ 우수상 1편(100만 원) ▲ 장려상 2편(각 50만 원)으로, 총 400만 원 규모다. 최종 선발된 논문은 충북학연구소 학술지에 게재될 예정이다. 이번 공모는 의암 손병희 성사를 다시 조명하고, 천도교 사상과 동학농민혁명, 3·1혁명을 깊이 탐구할 기회다. 전국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의 많은 참여가 기대된다. -
천도교와 3 · 1운동(15) "교인들은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을 위한 모금에 참여했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고주리의 학살사건 고주리의 보복만행은 4월 15일 제암리 집단학살 후에 자행되었다. 이날 오후 수비대는 조희창을 선두로 6명의 수비병과 함께 팔탄면 고주리로 향했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부락이다. 이때 고주리 주민 대부분은 제암리의 참변을 목격하고 거의 모두 산속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김흥열(전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 가족만은 ‘그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죄없는 사람들을 저희 마음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하는 생각에서 온 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안에 있었다. 조희창은 수비대들을 이끌고 김흥열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조희창은 수비대를 시켜 김흥열을 비롯한 김성열·김세열·김주업·김주나·김흥복 등 한 가족 6명을 방에서 끌어내어 포박을 지어 집 뒤 언덕으로 끌고 올라갔다. 이때 김성열 · 김세열 · 김주남 · 김흥복 등은 고문의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끌려갔다. 조희창은 칼을 뽑아들고 김흥열에게 백낙렬이 숨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으면 전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김흥열이 모른다고 하자 조희창은 이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동했으면서 모른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하면서 칼등으로 김흥열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김흥열은 “내가 안다 해도 네 놈에게 그 분이 계신 곳을 말할 수 없다. 조국과 민족을 파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네놈에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냐? 현상금 200원이 그리도 탐이 난단 말이냐! 삼괴지역과 발안 만세운동도 나와 이정근이 주동했다. 마음대로 하여라.” 하며 조희창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희창은 군도를 뽑아들고 사정없이 김흥열의 목을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수비대들이 일제히 군도를 휘둘러 차례차례 6인의 목을 치자 붉은 피를 뿜으며 목이 사방에서 펄펄 뛰었다. 그래도 모자랐던지 사방에 나딩구는 몸체에 난도질을 가해 여섯 토막을 냈다. 팔다리가 잘리어 사방에서 펄펄 뛰었고 언덕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수비대들은 6명의 시체를 걷어 모아놓고 짚가리의 짚을 날라다 쌓아 놓은 후 불을 질렀다. 당시 김주업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참살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때 김세열의 아들 김원기가 밖으로 뛰어나와 이 광경을 보고 “나만 살면 뭘 해, 같이 죽여라!”하며 수비대에게 덤벼들자 수비대들의 구둣발에 채여 울타리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김주업의 처 한씨는 이 집안이 유일한 혈손인 김원기를 끌어당겨 치마폭에 숨겨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한씨 부인은 너무나 잔인한 참살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그날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다가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하니 김흥열 일가는 한꺼번에 7명이 몰살되고 만 것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남양교구 관내의 3·1운동은 서울보다 한 달 정도 늦은 4월에 일어났으나 관내 전 교인과 주민들, 그리고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가장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화수리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인해 일본군에 의해 가장 잔학한 보복만행을 당했다. 특히 수촌리와 제암리·고주리의 집단학살은 가장 비참했다. 제암리와 고주리가 다른 마을보다 더 혹독하게 보복을 받게 된 것은 이 마을 주민들의 항일 의식이 다른 마을보다 더 높았던데 원인이 있다. 이 마을에는 거의 전부가 천도교인과 감리교 신자들이 살았다. 아시다시피 천도교는 보국안민을 표방, 당시 3·1운동의 주도적 핵심세력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내놓은 천도교개론 서문에 의하면 “일본은 천도교를 박멸하거나 조선을 내놓거나 그 어느 것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 하나만 보아도 당시 전국에서 성미실적 1등을 기록한 천도교 남양교구 산하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시각은 좋을 리가 없었다. 또한 천도교인과 함께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감리교 신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6. 양덕군교구의 3·1운동 머리말 양덕군은 평안남도 북동쪽 끝에 위치하여 함경남도 고원군·영흥군·문천군 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군 남동쪽으로는 황해도 곡산군과 접경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산간지대로 1907년 이후 의병활동이 유명했던 곳이다. 다행히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국도가 군 중앙을 통과하여 비교적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군민의 문화수준은 매우 높다. 특히 온천이 유명하여 외래 방문객도 많아 사상면에서도 다른 산간지역보다 훨씬 높다.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애국심이 강하고 민중들의 저항의식이 높음에 따라 어느 지역보다 민족의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로 말미암아 3·1독립운동도 격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은 일찍이 갑오동학혁명 후인 1895년부터 동학이 들어와 민중의식을 고취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진보회 운동을 통한 개혁운동이 있었고 뒤이어 의병운동을 거치면서 반제·반봉건적인 사상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격렬한 3·1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경무총감부와 헌병대사령관의 보고서(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인 ‘소요사건 경과 개람표’에 의하면 양덕군에서는 3월 5일 3백명이 3·1만세시위운동을 전개, 헌병대를 습격했으므로 일본군 16명이 출동하여 발포, 40명이 살상되었으며, 일본인도 1명 사망했다고 하였다. 양덕군민회가 펴낸 『양덕군지』에 의하면 사망자는 15명이었고 중경상자는 70여명이었으며 체포된 사람도 70여명이었으며 그 중 옥고를 치룬 분이 4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희생을 치룬 3·1운동 중의 하나였다. 이 운동은 누가 주도했으며 어떤 조직력이 동원되어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천도교도들이었으며 동학 이래 다져진 민중적인 조직력과 사상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양덕군의 천도교세 1938년 천도교의 총 교호 수는 8천 2백 5십 7호였다. 1919년 당시 양덕군의 천도교 호수는 약 7백호이다. 천도교가 양덕지방에 최초로 들어온 것은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포덕34년(1893)이었다. 당시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포덕 37년부터 점점 퍼지기 시작하여 하나의 연원을 갖게 되었다. 대구면(지금은 성천군이지만 그때는 양덕군이었음) 천동리에 있는 윤효순(1862년생)을 비롯하여 구룡면 봉계리의 손태룡(1873년생, 처음에는 유주(流呪)로 동학을 하다가 포덕 38년에 정식 입도함)은 포덕 34년 11월 23일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수덕리의 김성호는 포덕 38년에, 온천면 상신리의 이상화는 포덕 38년에, 상국리의 심성원(1870년생)은 포덕 36년에, 화촌면 평암리의 박봉상은 포덕 34년에, 상웅면 중리의 김기섭은 포덕 39년에, 같은 마을의 정추언도 포덕 39년에, 대륜면 통동리의 이양순은 포덕 39년에, 사기리의 손병서는 포덕 38년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손태룡은 김영석(어디 분인지 미상)어른으로부터 입도하였으며 그 후 김병술·박봉각과 같은 우수한 지도자에게 포교하여 많은 포덕을 내었다. 그리하여 양덕군에서는 유일한 대접주가 되었다. 당시 대접주가 되려면 적어도 천여호의 교호수를 가져야 한다. 포덕 69년(1828)에 작성된『손태룡 연원록』에 의하면 양덕군뿐만 아니라 강동·성천·곡산군까지 포덕하였음을 볼 수 있으므로 1천호는 넘었을 것이다, 양덕군 동학교단이 최초로 사회운동을 전개한 것은 포덕 55년(1904)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 8월 그믐을 기해 진보회 운동을 한 것이 시초다. 갑진개화운동이라 하는 진보회운동은 러일전쟁으로 우리나라는 그 승전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 확실해지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정부가 승자의 편에 들어 발언권을 얻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 정부를 개혁하여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진보회란 명칭을 내세운 것은 일반적으로 동학이라면 관의 탄압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를 피해보자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손태룡 대접주는 당시 의암손병희 성사의 지시에 따라 수백 명의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운동에 나섰다. 양력 9월 28일자 『대한매일신문』 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진보회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순천군수 이승주 씨의 내부로 한 보고를 보면 동학당 천여 명이 둔취하여 기에는 보국안민 넉자로 쓰고 회장은 문관일이라 하는데 경도회(京都會)의 지휘위를 기다린다 하며 맹산, 양덕, 등지의 각 인민 7~8백인이 보국안민한다 칭하고 소요 막심하므로 효유하여도 듣지 아니한다 하더라.” 또한 『황성신문』 11월 3일자에 보면 평남관찰사가 “근일 관하 각 군에 민중을 선동하여 칭하기를 진보회라고 읍읍 취회하기에 백방 효유하나 종불청종(終不聽從)하고 일익 회집하는데...” 라는 보고가 있었다. 양덕에서도 동학교도들이 몇 백 명씩 모여 진보회를 개최하고 머리(상투)를 자르며 검은 옷을 물들여 입는 일대 정치적 시위가 있었다. 『천도교창건사』에 의하면 양덕에서 집회하는데 그치지 않고 삼등으로 가서 여러 군의 동학교도와 더불어 일대 시위를 벌이는 한편 평양으로까지 진출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 개혁운동을 통해서 양덕의 동학 교세는 더울 늘어났다. 그러나 이용구 일파가 앞잡이가 되어 을사늑약을 지지하는 매국행위가 자행되자 크게 실망했다. 포덕 46년(1905) 12월 1일 일본에 망명 중이던 의암성사는 사태가 다급함을 알고 동학을 천도교라 선포하고 이듬해인 포덕 47년 2월에 서울 상다동에 천도교중앙총부 간판을 걸면서 일진회와 완전히 구별하게 되었다. 양덕군에서도 상부지시대로 재빨리 탈퇴하였다. 일진회의 이용구도 1907년에 이르자 정치단체가 해산되게 되자 12월 13일에 시천교라는 종교단체로 떨어져 나갔다. 이때 많은 교인들이 교단을 떠나 시천교로 갔다. 1907년 의병활동이 치열해지자 천도교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거나 일제의 동태를 살펴 알려주는 등 간접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천도교로 새 출발한 후 포덕 51년에 이르러 일본제국주의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하자 한때 교단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들어 교세는 포덕 52년 현재 5백호가 넘었다. 포덕사업과 교육사업 양덕군에 천도교 교구를 세운 것은 포덕 48년(1907)이었으며 초대 교구장은 김처성(金處聲, 대구면 신장리)이었다. 이 당시 포덕사업이 활발하여 포덕 51년 10월에 이영화와 오인규가 중앙총부로부터 ‘신포덕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전교사를 임명하였다. 포덕 52년 3월부터 손용호(하룡면 창리)가 새로 교구장이 되고 초대 교구장이었던 김처성은 공선원이란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6명의 전교사를 임명하는 한편 교세가 늘어나 이영화를 금융원으로 임명하였다. 포덕 53년에 접어들면서 전교실마다 초등교육을 위한 1년간의 강습소를 개설하여 교육에 열을 올렸다. 14개 강습소가 운영되었는데 제일 활발했던 곳은 제 262 강습소였다. 소장은 이병모였고, 소감은 최기훈·조정화가 맡았으며, 건물은 이명환이 제공, 희사했다. 졸업자 중에는 이학근·최두옥·이은조와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포덕 53년 1월에는 교구장에 지기철·전제원에 박종기를 선출했으며 포덕 54년 1월에는 교구장에 손태룡·공선원에 한충흡, 금융원에 이하경으로 바뀌고, 포덕 55년 1월에는 교구장에 한충흡·전제원에 손용점, 공선원에 이봉화, 금융원에 이하경으로 경질되었다. 포덕 55년 7월 1일에는 대교 구제가 창설되어 양덕군은 순천군과 성천군이 합쳐 하나의 대교구를 만들어 <성천대교구>라 부르게 되었다. 대교구장에는 성천교구장인 이돈하가 겸임하였다. 양덕교구장은 손태룡으로 바꾸고 전제원은 박만관이 잠시 맡았다가 8월 19일에는 교구장에 김택서가, 금융원에는 이봉화, 9월에는 공선원을 최정항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이해 10월에는 강도원과 전교사를 많이 임명하여 포덕교화에 힘썼다. 당시 교직자는 다음과 같다. 강도원: 이봉화·한충흡(2명) 전교사 : 손기현·조이균·이춘화·조경운·김홍화·신태성·최운화·양달화·조열화·유기화. 손권화·오경화·민석화·김용화·서윤화·김병술·우영화·이춘성·김윤실·손양모·이경근·민치선·한충빈·노병헌·김기운·박명두(26명) 포덕 57년 2월에는 손태룡을 다시 교구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전제원에 정명옥, 공선원에 신용주를 선출했다. 포덕 58년 2월에는 총부에서 육도사(나용환·오영창·홍기억·홍기조·나인협·임예환)를 순회케 하여 양덕군에는 나용환과 나인협 도사가 내려와 강연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한바 있다. 이 강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교인들에게 사기를 높여주었다. 이후 강연회의 필요성을 느끼어 양덕군 교구 내 순회교사를 더욱 늘리게 되었다. 즉, 김태섭·박윤겸·김태주 등 3명의 순회교사를 새로 임명, 강도회에 힘쓰게 하였다. 이듬해인 포덕 59년 6월에는 서기에 김병술을 임명하여 교구진영을 강화하였다. 포덕 59년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힘쓴 한해였다. 중앙대교당 신축성금 조성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게 되어 교구업무도 폭주했다. 양덕군 교구의 교당신축성금은 약 3백호가 각출에 참가, 2천원 정도를 마련하여 상납하였다. 이때 일반교인들은 이번 모금은 민족독립을 위한 것임을 알고 참여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5원 내지 10원씩을 각출했다고 한다. 포덕 60년이 되자 중앙에서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소원하는 49일기도를 봉행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에 걸쳐 각 면 전교실에서는 지방 핵심지도자들이 모여 특별기도를 봉행하였다. 이번 기도는 신앙적으로 어떤 중대사를 대비하여 다짐을 하는 기도였다. 1월에 교구임원을 개편하여 교구장에 이영화를 선출하였으며 공선원은 박명두, 전제원은 정명옥, 금융원은 이봉화, 서기는 김병술을 선출하였다. 이때의 교세는 약 8백호였다. 3·1운동의 전개과정 앞으로 전개될 독립운동에 대비하여 1912년 4월부터 실시한 봉황각 수련에 양덕교구에서도 4기에 손대용, 5기에 김봉섭, 6기에 박명두·한기원·김진선, 7기에 공달빈·신용주 등 7명이 참가했다. 이 지역의 3·1운동은 3월 5일에 이루어졌는데, 그 준비는 3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독립선언서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는 성천으로부터 보내졌다는 설과 평양에 교구장이 가서 직접 받아왔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병헌 편저 『3·1운동비사』에 의하면 “양덕군은 교통이 불편한 산간벽지인 관계로 당시 독립선언서가 양덕군 대구면에 거주하는 김병술 선생이 성천군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가지고 그때 천도교 교구장인 양덕군 온천면 이영화씨 댁에 3월 1일에야 도착하였다”고 했다. 또한 독립운동사편찬위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 제4장 제5절 양덕군란에는 “당시 천도교 양덕군 교구장이던 이영화는 온천면 상청리에 살고 있었는데, 1919년 2월 하순 평양에서 열린 대교구장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서울서 보내온 독립선언서 1백여 장을 받아가지고 3월 1일에 평양을 출발, 양덕군 대구면과 상룡면, 하룡면 등지에 들러 천도교 독신 교우들을 찾아 숙의했다”고 하였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볼 때 이병헌의 기록이 신빙성이 짙다. 왜냐하면 당시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배포되었으므로 회의를 통해 배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교구장회의는 지역별이나 도 별로 개최한 사실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당시 독립선언서는 김상열(선천)이 평안도를 책임지고 2천매를 할당받아 평양을 거쳐 선천으로 간 것은 사실이다. 김상열은 서울서 28일에 떠나 평양에 들렀다가 다음날 새벽 평양을 출발, 선천에 하오 1시에 도착했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가군으로 사람을 보내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는데 직접 보낼 인편이 없을 때에는 인근 교구로 보내 거기에서 다시 전달하도록 했다. 양덕군의 경우는 성천군교구로 보낸 독립선언서를 가장 가까운 대구면 광산리 김병술에게 보냈던 것이다. 깁병술은 다름 아닌 교구 서기를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병술은 곧 교구장이 살고 있던 온천면 상청리까지 가야 했으므로 빨라야 3월 2일 저녁에 도착했다고 보아야 한다. 독립선언서를 받은 이영화 교구장은 3월 3일 8십리 길을 달려가 양덕면 용계리에 있는 손태룡 어른을 찾아가 의논한 후 10여 명의 중진 교역자와 연락하여 협의한 결과 거사일을 3월 5일로 정하고 구읍인 동양 상석리 소목다리 교구실로 모이도록 했다. 한편 거사 방법과 전략을 짜기 위해 3월 4일 중진 간부들은 소목다리에 있는 교구에 모여 비밀회의를 진행하였고 여러 가지 인원 동원에 따르는 준비를 진행하였다. 태극기를 그린다든지, 식사 준비를 한다든지, 준비할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사전에 탐지되어 준비사업에 착수하기도 전에 헌병대가 출동하여 12시경에 10여 명을 예비 검속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검토하고 넘어갈 것은 거사일이 3월 4일이냐 아니면 3월 5일이냐 하는 점이다. 『3·1운동비사』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사『에는 분명 3월 4일 장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보고에 의하면 “양덕에서는 3월 5일과 6일 및 동 8일의 3일간 각기 당지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운동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록 중 어느 것을 취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조선총독부 보고가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현지 헌병대의 보고를 토대로 작성한 문헌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4일과 5일의 착각이 생겼는가. 증인들은 4일이라고 하며 그날이 장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양력 3월 5일은 바로 음력 2월 4일이며 장날이었다. 이 양력과 음력의 차이가 착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3월 4일은 장날이며 양력으로 치면 3월 5일이 된다. 따라서 양력으로 3월 5일에 거사한 것이 맞는 것 같다. 또한 『3·1운동비사』에는 “10여인은 3월 3일(4일)에 동군 천도교구실에서 회의하기로 하였는데 그날 12시경에 헌병대로부터 예비검속을 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다른 회의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므로 식사준비와 같은 사전준비를 하기 위해 모였던 것 같고 이를 의심스럽게 여겨 예비 검속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춘암 박인호 상사의 삶과 독립운동 조명하는 학술세미나 개최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 민족운동의 중심 인물인 춘암 박인호 상사의 순도 순국 85주기를 맞아, 상사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가 7월 11일 오후 2시 예산군청소년복지재단 1층 비전홀에서 열렸다. 이번 세미나는 충남역사문화원 주최, (사)춘암박인호선생기념사업회와 충남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 공동주관으로 개최되었으며, 천도교중앙총부, 예산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전국농민회충남도연맹 등이 후원하였다. 박인준 천도교 교령은 축사에서 “올해는 동학농민혁명과 3 · 1운동에 참여하신 천도교 지도자, 춘암 박인호 상사의 순국 85주기가 되는 해로, 뜻깊은 이 시기에 상사의 고향인 예산에서 그 정신을 기리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했다. 이어 춘암 상사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하며 “1855년 충남 덕산군 막동리에서 태어난 상사께서는 1884년 동학에 입도한 이래 1893년 교조신원운동,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9년 3 · 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1936년 무인멸왜운동까지 평생을 조국의 자주와 해방을 위해 헌신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상사의 민족운동은 곧 동학사상의 실천이었으며, 오늘 학술대회는 그 정신을 계승하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낙중 충남역사문화원 원장은 환영사에서 “춘암 선생은 50년에 걸쳐 동학농민혁명에서 무인멸왜기도운동까지 이어진 충남의 대표 독립운동가로, 이번 세미나가 춘암 선생의 역사적 의미와 사상을 재조명하고 관련 연구를 심화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학술대회는 총 4개의 주제 발표와 토론,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되었다. 박길수 대표(모시는사람들 출판사)가 「박인호 관련 연구 동향」을 발표하고, 이두영 상임이사(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임형진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는 「박인호의 동학 사상과 민족의식」을 발표했으며, 장수덕 소장(내포동학문제연구소)이 토론을 맡았다. 성주현 박사(단국대 한중관계연구소)는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춘암 박인호」를, 정을경 책임연구원(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박인호의 독립운동과 역사적 의미」를 각각 발표하였다. 이들 발표에는 박성묵 회장(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김학로 소장(당진역사문화연구소)이 각각 토론자로 참여했다. 참석자들은 춘암 박인호 상사의 동학사상과 실천, 민족정신을 되새기며, 상사의 삶이 지닌 현재적 의미를 되짚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번 학술대회는 박인호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지역과 학계의 연구 활성화를 도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진제공 노은정 -
의암 손병희, 다시 무대에 서다오는 8월, 창작 음악극 〈한울사람 손병희〉가 청주시 문화제조창 무대에 다시 오른다. 2025 메이드인청주 우수 공연콘텐츠로 선정된 이 작품은 동학농민혁명(1894)부터 3.1운동(1919)까지,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민족지도자 의암 손병희 성사의 삶과 사상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음악극이다. 작품은 동학 사상의 핵심인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정신을 바탕으로, 불평등과 억압에 맞서 싸운 민중들의 외침과 의암성사의 철학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특히 동학 북접의 통령이자 3.1운동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 의암성사의 생애를 중심으로, 그와 뜻을 함께한 이름 없는 민중들의 목소리도 함께 조명한다. 무대는 1922년, 병상에 누운 의암성사가 마지막 밤을 보낸 ‘상춘원(常春園)’에서 시작된다. 그 밤을 지나며 떠오르는 혁명의 기억과 사람들의 말, 그리고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가 움직임과 음악, 언어를 통해 관객 앞에 펼쳐진다. 연출을 맡은 한명일은 “이 작품은 한국적 감성과 움직임, 음악이 어우러진 K-뮤지컬이다. 손병희가 열고자 했던 ‘사람 사는 세상의 문, 혁명의 문, 독립의 문, 어린이의 문’—닫힌 문을 여는 그 뜻을 무대 위에 되살리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번 공연은 ‘자율 후원 관람제’ 방식으로 운영된다. 공연을 먼저 관람한 뒤, 감동한 만큼 자유롭게 후원하는 방식으로, 누구나 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시도다. 관객 스스로 공연의 가치를 판단하고 후원하는 방식은 지역 공연계에도 의미 있는 실험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편, 〈한울사람 손병희〉는 초연 당시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으며, 청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재공연 요청이 이어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재공연은 의암성사의 사상과 정신을 되새기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한울사람’의 메시지를 관객과 나누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본 공연은 청주시,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주최, 청주민예총, 온몸 주관, 온몸이 제작하였으며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 계승사업회가 후원하였다. 8월 15일~16일 청주 문화제조창 C공연장에서 선보인다. 대본 | 심수영 / 각색·연출 | 한명일 / 출연진 | 신태희(손병희 역), 이상범(해월 최시형), 홍정연, 이기복, 장재영, 이예은, 진성호, 최은성, 진항래, 한명일 특별출연 | 북이너울풍물단, 조애란 / 문의 | 0nmom@naver.com 자료 및 사진제공 온몸 -
춘암 박인호 상사 85주기 추모 학술대회 개최동학농민혁명과 항일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춘암 박인호 상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85주기 추모 학술대회가 열린다. 오는 2025년 7월 11일(금) 오후 2시, 충남 예산군청소년복지재단 1층 비전홀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사)춘암박인호선생기념사업회 창립 1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며, 천도교를 비롯한 민족·학술·지역사회의 각계 인사들이 함께 뜻을 모은 자리다. 이번 학술대회는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의 큰별, 박인호 선생의 삶과 사상’을 주제로 하여, 춘암 상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지역 항일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가 남긴 발자취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좌장은 이용길 (사)춘암박인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맡는다. 춘암 박인호 상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덕의대접주로서 승전곡전투와 신례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에는 의암성사의 지시로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족 근대화에 앞장섰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개명된 후 1908년 천도교의 제4대 대도주가 되어 전국에 교리강습소와 사범강습소를 설립하여 수천명의 교역자와 교육자를 양성하였스며, 일제하에서 파산을 면치 못하게 된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 등 전국 36여 개의 학교를 운영 및 재정지원하여 민족의 미래를 위해 교육사업이 계속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천도교가 3·1운동과 독립운동 주도 교단으로 박해를 받을 당시, 독립운동자금 모집혐의로 피검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신간회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1938년에는 멸왜기도운동(滅倭祈禱運動)을 전개하였다. 일제말까지 항일 독립투쟁의 의지를 불태우다 1940년 4월3일 향년 86세로 환원하였다. 천도교 교단에서는 신앙과 혁명을 일치시킨 실천적 지도자로 평가되며, 그 사상은 해월신사와 의암성사의 정신을 계승한 실천적 인내천 사상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박 상사의 삶은 교화와 항일운동을 함께 이끈 교역자의 모범적 상을 보여준다. 발표 및 토론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주제: 박인호 관련 연구 동향 - 발표: 박길수 (『모시는 사람들』 출판사 대표) / 토론: 이두영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상임이사) 2주제: 박인호의 동학 사상과 민족의식 - 발표: 임형진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토론: 장수현 (내포동학문화연구소 소장) 3주제: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춘암 박인호 - 발표: 성주현 (1923 제노사이드연구소 부소장) / 토론: 박성용 (예산역사연구소 소장) 4주제: 박인호의 독립운동과 역사적 의미 - 발표: 정용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 토론: 김학로 (동학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오후 4시 30분부터는 종합토론이 진행되며, 박 상사의 사상과 시대정신을 오늘날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사)춘암박인호선생기념사업회와 충남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가 공동 주최하고, 충남역사문화연구원과 예산군이 주관한다. 천도교 중앙총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전국농민회충남도연맹 등이 후원으로 참여한다. 동학과 독립운동의 길을 걸으며 민족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춘암 박인호 상사의 정신을 기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다시금 민족의 자주와 인간 존엄의 가치를 되새기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
의암 손병희 성사 기념관, 천도교 · 독립정신 계승의 성지로 거듭나야동학을 계승하여 천도교로 개칭하고 3·1운동을 총괄·기획한 민족의 스승 의암 손병희 성사를 기리는 기념관의 현대화와 확장 건립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시설 확장을 넘어, 성사의 사상과 천도교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지역의 역사 정체성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지난 19일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는 충북 청주시 도시재생허브센터에서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관 건립방안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성사의 순국 103주년을 맞아 유허지 참례와 함께, 현 기념관의 문제점과 새로운 기념관 조성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로 마련되었다. 의암 손병희 성사는 1861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통령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이후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하였으며, 동학의 사상을 널리 펴고, 3·1운동을 총괄·기획하여 민족대표 33인을 이끌며 독립만세운동을 선도하였다. 성사의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결정적 토대가 되었으며, 조국 광복의 정신적 원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현재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 위치한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관’은 이러한 역사적 위상에 걸맞지 않은 환경에 처해 있다. 2000년 개관 이후, 2020년 7월 국가보훈부와 LG하우시스의 지원으로 내부 설명 패널, 바닥재, 조명 등이 교체되며 재개관되었으나, 여전히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지역 내 낮은 인지도, 콘텐츠 현대화 부족, 예산 및 인력의 지속적 부족으로 인한 시설 노후화와 관리 어려움은 방문객 감소로 이어지고 있으며, 규모와 시설 면에서도 타 주요 독립운동가 기념관에 비해 뚜렷이 열악한 실정이다. 의암 손병희 성사는 3·1운동을 총괄하고 대한민국장 건국훈장을 수훈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유허지에 위치한 기념관은 단순한 유물전시관 수준에 그치고 있다. 타 독립 유공자의 기념관과 비교하면 명칭만 ‘기념관’일 뿐, 그 규모와 상징성, 시설 수준이 크게 뒤처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의암 성사의 사상과 업적에 걸맞는 국가 차원의 기념관 건립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은 “의암의 생애는 동학에서 천도교로, 천도교에서 3·1운동으로 이어진 민족의식의 큰 흐름이다. 이를 21세기적 상징으로 구현한 기념관은 교육과 문화가 함께 숨 쉬는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관, 세미나실, 체험관, 야외공원 등 복합기능을 갖춘 현대적인 기념관 조성의 필요성과 함께, ‘의암의 길은 곧 나라의 길’이라는 역사적 상징을 누구나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성강현 동의대학교 교수는 토론문을 통해 “의암 기념관은 무엇보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독립운동사적 공헌을 중심에 두고 그 비전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기념관 건립과 더불어 의암 사상의 체계적 연구 방안이 병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기념사업회를 어떻게 구성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지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좌장을 맡은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는 “충북권은 역사적 인물 기념사업이 부족한 편이다. 이번 기념관 건립이 충북의 정체성을 되살리고, 역사교육의 중심지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두영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 상임이사는 “3·1운동이 대중화 전략을 통해 성공했듯이, 이번 기념관 건립도 국민 참여형 모금운동을 통해 추진할 수 있다”며 “의암 선생의 평화, 자주, 인류공영 정신은 지금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밝혔다. 오택균 이사장은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여 천도교를 창건하고, 민족독립의 횃불을 밝혀준 지도자”라며 “기념관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정부와 민간의 지속적인 지원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계승회는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3주년을 맞아 기념관 건립에 대한 공론화를 본격화하고, 지역과 국민 모두의 힘으로 의암 선생의 위상에 걸맞는 기념관을 적극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다가오는 6.3 대선을 앞두고 충북지역 공약으로 ‘의암 손병희 기념관 건립’이 제안된 가운데, 향후 국가적 관심과 실질적 지원이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 및 자료 제공 :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계승사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