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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 106주년 기획전 ‘1919.4.15, 빛을 향한 시간들’ 개막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11월 5일(수) 오후 3시 30분,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의 기억과 추모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 〈1919.4.15, 빛을 향한 시간들〉의 개막식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일제의 잔혹한 학살로 희생된 제암리·고주리 주민 29명의 넋을 기리고, 유족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비극을 넘어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마련되었다. 학살의 현장에서 피어난 기억과 빛 1919년 4월 15일,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군은 제암리와 고주리 주민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29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고, 참혹한 현장은 전 세계에 알려져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번 전시는 ▲‘그해 봄, 그 기억들’ ▲‘어둠을 넘어 빛으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삼일운동비사』, 《천도교월보》, 상해판 《독립신문》, 학살 현장 사진 등 역사 자료와 함께, 생존자 김금화의 증언과 영상 기록을 통해 그날의 비극을 되살린다. 2부는 1945년 이후 유족들의 추모와 복원 노력, 제암교회 재건, 기념비 건립 등 평화와 화해를 향한 행보를 담았다. “김금화의 눈으로 본 비극의 현장” 한동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은 “이번 전시는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의 최대 피해자 김금화의 눈으로 본 참혹한 순간을 조명하고, 진실 규명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유족들의 노력을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어 “유족들의 증언, 영상, 사진 등을 통해 우리는 함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며 “특히 이번 전시를 위해 자리를 제공해주신 천도교 강병로 종무원장, 제암교회 최영훈 목사, 자료를 제공한 김덕룡 순국소년의 후손 김명기 님, 안경순·안상용 순국사 후손 안용욱 님, 유영수 님, 그리고 ‘1945년 제암동 학살 희생자 추도의 제’를 최초로 전시 공개한 박현철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 미래를 여는 길 이날 개막식에 참석한 천도교 중앙총부 강병로 종무원장은 축사에서 “화성시는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한 독립운동의 현장이며, 이곳에서 벌어진 제암리·고주리 학살은 민족의 아픔이자 정의의 불씨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씀하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구처럼, 역사의 기록보다 기억이 더 중요하다”며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인내천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다음 세대에 계승하기 위한 이번 전시의 의미가 매우 깊다”고 말했다. 또한 “특히 3·1운동 당시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흥열 선도사님의 후학으로서, 선도사 일가의 희생을 추모하며 그 나라사랑 정신을 잇는 이 전시가 매우 뜻깊다”며, “이 땅에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전시의 메시지가 시민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는 비극의 어둠을 넘어 평화의 빛으로 나아가는 시간여행이다. 제암리와 고주리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이번 전시는 우리 모두에게 기억의 책임과 평화의 다짐을 일깨운다. ■ 전시 개요 전시명: 〈1919.4.15, 빛을 향한 시간들〉 기간: 2025년 11월 5일(수)부터 상설전시실 특별전시관 장소: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관람시간: 10:00~18:00 (입장마감 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당일 문의: 031-5189-1950 주소: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고주로 34 -
천도교와 3 · 1운동(22)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 성사에 의해 이루어졌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3.1운동의 정식명칭 3.1독립운동 90주년을 맞는 올해(2009년, 편집자)를 맞아 3.1운동의 이름이 제대로 되어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본교과서에 3.1운동을 폭동이라 기술하였다하여 그 시정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 요구를 받아들여 폭동이란 이름을 버리고 3.1독립운동이라 고쳤다. 그러나 우리 교과서에는 아직도 3.1운동이라 하면서 '독립' 두 글자를 넣지 않고 있다. 남들에게는 독립운동이라 부르라 해놓고 자기는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3.1운동은 우리 역사에 있어 무궁화 꽃이다. 3.1운동은 또 우리 민족사에 구심점으로서 그 어떤 다른 역사보다도 자랑스러운 거사로 믿고 있다. 우리 근대사에 3.1운동만큼 의미심장한 역사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역사에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않았다면 타고르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어떤 이는 3.1운동을 우리 역사의 여러 강줄기가 모여드는 커다란 호수라고 한다. 마치 백두산 천지 같은 깊은 물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의 결과 태어난 나라라고 명기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를 잘 읽어보면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모든 나라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 투쟁한 역사라 하겠다. 우리는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해 독립, 즉 자유를 외친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외친 것이다. 일본은 물론 중국 영국 미국 어떤 나라도 한국의 주권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는 날 세계평화는 깨지고 만다고 엄중히 선언한 것이다. 서울 종로 2가에는 3.1운동이 일어난 성지 탑골공원이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유적지는 사라지고 없다. 왜 서울시 당국은 길을 넓히고 빌딩을 짓는 데만 정신이 팔리고 동방의 등불을 밝히는 데는 관심이 없는가? 3.1운동 90주년을 맞이하면서 해가 갈수록 빛이 바래가고 있는 서울의 역사정신이 아쉽기만 하다. 3.1운동이 평양에서 1시간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3.1운동의 영광을 버리려하는가 잊지 말고 서서히 반성하라. 3. 맺는 말 3·1독립운동은 일제의 10년간의 가혹한 무단통치로 인한 압제와 경제적 착취는 물론 민족의 자존심마저 유린한 극한적인 상황에서 이천만 민족의 분노가 폭발한 일대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전국적인 강력한 조직망과 300만의 교인을 포용한 천도교가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청사에 빛나는 민족사를 창출하였다. 이 3·1독립운동은 시종일관 이 운동을 영도하신 의암손병희 선생이 중심에 계셨기에 가능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은 천도교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독립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의 역할은 이 운동을 결정짓는 절대적 계기가 되었다. 우선 운동의 3대 기본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일원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미 10년 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이 천도교요, 독립운동 자금의 공급처도 천도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비롯한 40여개소의 지방 교구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중요 교역자가 구속되고, 일백 수십만 원의 예금을 압수당하였다. 결국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포용력, 그리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대교당 건축을 추진한 것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위해 운동자금 지원을 결단한 것도,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해마다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유지해온 것도 의암손병희 선생의 결단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3·1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거나 심지어 천도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마저 있음을 보게 되면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생명과 재산을 바쳐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면서 깊이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연재를 마칩니다. 끝.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19)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2.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된 설(說)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하나는 3・1운동 당시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만해 한용운이 낭독하였다는 설이다. 그런데 이 역시 두 가지 설이 모두 와전된 것이며 진실이 아님을 밝혀둔다. 우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왜 모였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3・1운동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된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민족대표들은 결코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러한 주장은 민족대표들의 심문조서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언급이 없는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맹점을 이용해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만해가 낭독하였다고 무책임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는 주장보다 한술 더 뜬 진실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왜곡 사실에 대한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묵암비망록(黙菴備忘錄)『에 확연히 그 진실이 드러나 있다. 『묵암비망록』은 천도교 측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묵암 이종일(黙菴 李鍾一)이 작성한 것이다. 묵암은 어느 누구보다 독립의지가 강하고 성격이 매우 강직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된 당일의 『묵암비망록』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 “12시 전까지 집에 남겨두었던 선언서는 거의 다 배포하였다. 식사도 거의 못하고 서둘러 태화관(泰和館)으로 갔다. 4명이 불참한 가운데 오후 2시경 긴장 속에 독립선언서를 다시 (민족대표들에게-필자 주) 배포해주었다. 의암(義菴)이 나에게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하였으니 크게 낭독하라기에 오자(誤字)를 고치고 그렇게 따랐다.”(묵암비망록, 1919년 3월 1일자) 이것이 위의 두 낭설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다. 민족대표들은 전날 독립선언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장소를 바꾼 것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흥분된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로 인해 일본경찰에게 무자비한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래서 태화관에서는 오후 2시 기독교 측 민족대표 4명이 불참한 가운데 묵암이 참석한 민족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의암성사의 지시에 따라 선언서를 낭독했던 것이다. 다만 그 자리에서 만해는 일동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다고 『묵암비망록』은 밝히고 있다. 사실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특정인물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불경(不敬)이 될 뿐 아니라 민족대표 전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유관순과 3・1운동 3・1운동에서의 유관순의 활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논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3・1운동이 마치 유관순의 주도로 이루진 것과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광경이지마는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을 누가 했는가” 하고 물으면 열 사람에 7, 8명은 “유관순이 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청소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지성인라는 사람조차 맹목적으로 그렇게 추종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작년 3・1절에 MBC TV는 ‘아우내 장터의 3・1운동’ 재현행사를 중계하면서 “1919년 3월 1일 유관순 열사가 이끌며 전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운운하면서 마치 기미년 3・1운동이 유관순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처럼 방송했다. 그래서 올해 3・1절에도 이런 잘못된 방송이 나갈 우려가 있어서 지난 2월 9일 중앙총부의 종무원장과 교화관장, 그리고 33인유족회 라영의 회장이 MBC를 방문하여 작년의 왜곡보도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이에 대한 정정보도와 함께 재발방지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가장 정확하고 공정해야 할 방송에서조차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니 일반 민중들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물론 MBC가 고의로 그런 방송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조차도 유관순의 만세운동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얻어들은 풍월을 가지고 방송에 임한데서 이런 착오가 빚어졌다고 생각된다. 바로 여기에서 3・1운동에 대한 국민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유관순의 유관단체에서 의도적으로 과대 선전하는데도 하나의 원인이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참고적으로 3・1운동 당시 유관순의 역할에 대해 간략히 기술해보기로 하겠다. 유관순은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는데,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에 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도 참여했다가 유관순과 학생들이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요구로 학생들은 풀려났다. 그 후 3월 10일을 기해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유관순은 병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니며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거사일 하루 전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리는 것을 신호로 인근 여러 산에서 불길이 솟아올랐고, 드디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쳐 총격을 가해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결국 유관순은 재판에 회부되어 3년 징역 언도를 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 된 후에도 계속 항거하자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악화되어 1920년 1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유관순이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4월 1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유관순이 처음부터 3・1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와전됨으로써 특히 청소년들에게 3・1운동의 진실이 왜곡 전파되어 잘못 인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청소년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한 객관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3・1운동과 관련하여 와전・왜곡・과장・날조 등으로 인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이 허다하다. 이러한 일은 3・1운동이 극비리에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도 일단의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자파이기주의에 치우쳐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곡필(曲筆)에 더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사초(史草)를 기술함에 있어서 선열과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는 집필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천도교와 3 · 1운동(18) "독립선언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시위과정과 천도교 만세시위는 3월 11일에 영남 쪽 상업소도시 남시(南市)에서 최초로 일어났고 다음은 3월 18일에 영북 쪽 소도시시인 신시(新市)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1차 봉기라고 할 수 있으며 3백 명 정도의 소규모 운동이었다. 그러나 3월 31일과 4월 1일의 운동은 영남북이 같이 일어났으며 읍내와 신시에서는 4월 1일까지 연속적으로 과격한 시위를 벌였다. 이것은 2차 봉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1차 봉기는 3백 명 정도로 그치고 2차 봉기는 수천여명이 모여 시위를 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다. 필자는 1차 봉기의 주체는 기독교 계통이고 2차 봉기의 주체는 천도교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는 ‘3월 11일 오후 2시경에 천도교 주동으로 남시에서 약 4백 명이 회합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이 운동은 천도교가 주동이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주동으로 보인다. 이 남시에는 교회당이 있었으며 기독교인이 어느 정도 있었다. 1919년 6월에 조선헌병대사령부가 경무부장 회의 석상에서 보고한 ‘조선소요사건상황’에 의하면 “구성에 있어서는 3월 31일 이전의 소요는 주로 기독교의 선동으로 배태되었고, 그 후는 천도교도의 선동에 의한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3월 18일에 신시의 시위운동은 분명 기독교가 주동이 되었다. 이 신시에도 선천과 가깝기 때문에 기독교가 일찍 들어와 있었다. 3월 11일의 남시 시위운동과 3월 18일의 신시 시위운동은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1차 시위운동은 기독교의 주도라 단정된다. 2차 시위운동은 물론 천도교가 주도했다. 3월 31일과 4월 1일의 시위운동은 연속적인 시위운동이다. 당시 천도교에서는 3월 3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구성면·서산면·동산면·노봉면 일부 등 4개면에서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영북 신시에는 사기면·천마면·관서면 등 3개면 교도들이 모이게 했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31일의 시위 때는 남시에 5천명이 모였고, 읍에는 3천 명이 모였으며 신시에는 8백 명이 모였다(3·1운동 재판기록). 이 두 곳의 시위운동에는 일본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다. 우석 전의찬 선생이 1928년 기록에 의하면 천도교인으로서 이때 순도한 사람과 일반인의 순국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崔順瑞 張巖翰 吳尙涉 金贊株 全文行 許龍雲 朴聖瑞 高仲日 등 諸氏, 平人死者는 張德彬 宋行範 白洛水 許佃 尹洛斗 등 諸氏 또한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약사』에는 순국자가 다음과 같다. 許佃 金洛龜 高斗一 白義景 張鳳宙 張鳳奎 金燦斗 吳尙涉 宋連根 崔聖世 崔順世 朴監察 宋信興의 아들 등 10여명 이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 빠진 사람은 고두일·백의경·장봉주·장봉규·김찬두·박감찰·송신흥 등 7명이다. 결국 총순국자는 21명인 셈이다. 그리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분도 많았다.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옥고를 치룬 사람은 다음과 같다. 金景贊 朴元植 政贊祚 許堵 金應道 金應典 元利尙 朴永化 孫熙雲 獨孤雲 金仁國 元賢天 金洛勇 許尙玉 張海達 張萬永 張義壽 金泰用 金贊極 李時興 金有聲 등 21인 그리고 최덕화 등의 판결문(대정 8년 형상 제431호)에 의하면 신시에서 시위하다 체포되어 복역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최덕화(37세), 손희운(40), 원이상(58), 박문구(28), 허상옥(25), 강익홍((21), 박영화(47), 김응주(55), 독고실(40), 김응전(40), 이영근(28), 이시흥(66), 김군직(39) 등 13명 전의찬 선생의 기록에서 누락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최덕화·박문구·강익홍·김응주·독고실·이영근·김군직 등 7명 옥살이를 하다 나온 사람은 모두 28명인 셈이다.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에는 구성군내 총동원 연인원수를 6천 5백 명이라고 했다. 일본기록과 재판기록을 합치면 총동원 연인원은 무려 1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순국자가 21명이요, 옥살이를 치룬 사람이 28명에 이른다. 이밖에 부상자는 2~30명이 넘을 것이다. 이상으로 보아 구성군의 3·1만세운동은 매우 격렬했음을 말해준다. 맺음말 구성군의 대표적인 도회지라 할 수 있는 읍내와 남시, 신시에서 1만 명에 달하는 민중들이 함성을 올리자 이에 놀란 일제와 그 앞잡이들은 4월 1일에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보복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임시보고서에 의하면 구성에서 자경단을 조직하여 탄압 보복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성군내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하고 소요단 또는 만세를 고창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원이 일제히 이를 저지하고 퇴를 협박함과 동시에 천도교도 등에 접근함을 혐기(嫌忌)하며 그 사이에 상호 소격(疏隔)을 생(生)케 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주로 천도교도들과 민중을 이간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총독부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평안북도 구성군 지방에서는 먼저 천도교도의 선동에 의하여 소요를 야기한 결과 귀중한 인명이 살상되고 산업 상에 있어서도 또한 다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으므로 군민들이 천도교에 대한 반감을 품은 자가 점차 많아 군민은 천도교를 절멸하고 교도도 살해할 것이라고 칭하여 동교도와 교제하는 자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운운…” 이것으로 미루어 일제가 평화적인 시위자들에게 발포 살상하고 그것을 천도교에 뒤집어씌우려 얼마나 광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민중을 천도교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온갖 발악을 총동원했음을 입증해주기도 한다. 천도교도들이 얼마나 열렬했기에 이처럼 그들은 천도교를 말살하기 위해 광분했을까. 재판기록에도 천도교인들이 굽힐 줄 모르는 애국심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 대표적인 항변의 사례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919년 8월19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 판결문 중에서) * 김군직(관서면 대우동)·박영화(천마면 정관동) : “조선민족으로서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되며, 이번 사건에 조선 민족인 2천만을 모두 벌 줄 수 있을까. 또 이와 같이 일시적인 고역을 당한다 하여도 결코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반감만이 증가하고 장래 피차간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탄식이 생겨서 동양평화에 큰 불행을 초래할 것은 명백하므로 재판장은 통촉한 다음 타당하게 처결하여 장래 서청(筮晴)의 탄이 없게 하기를 바란다.” * 허상옥(천마면 신음동) : “궁곡에서 생활하는 우부우부와 어린 아이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른데 관해서 본인도 양심에 분발심이 생겨서 천여 명 군중 가운데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일 죄가 있다면 파리강화회의에 있다고 생각 키우며, 가령 보안법위반이라고 한다면 온 민족이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누구에게 죄가 있다고 한 것인가.…” 구성군 서산면 염잠동에 사는 뇌암 김태용도 일제에 대한 독립정신이 투철했다. 3월 31일 구성군 읍내에 들어가 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분이다. 49세의 나이로 재판을 받을 때 “내 나라를 찾겠다는 만세운동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 일본사람은 우리들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항변했다. 이현면 원창동에 사는 진암 전경찬도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는데 재판장에서 당당히 항변했다. 신문과정에서 석방하면 다시 만세를 부르겠는가 라고 묻자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계속 만세를 부르겠다”고 하였다. 22세의 혈기로 항변하자 신문관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정정당당하고 굽힐 줄 모르는 애국심인가. 산간에서 겨우 옥수수나 조농사를 지으며 사는 천도교인들이지만 보국안민 정신은 이처럼 투철하여 구성군의 3·1운동을 피 끓게 했다. 제4장 3·1운동에 대한 사회적 통념의 오류 … <참고 : 김응조 자료> 어느덧 3・1운동 90주년을 맞이했다. 3・1운동은 우리 국민이라면 예외 없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민족사의 정화(精華)요 청사에 빛나는 민족혼의 표상(表象)이라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랑스러운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했다는데 대해 교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한편 이 성스러운 3・1운동에 대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사례가 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3・1운동 당시 국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며, 더욱이 후세들의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3・1운동에 대한 철저한 국민적 교육이 절실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3・1운동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 몇 가지를 들어 그 진위(眞僞)를 밝혀보려 한다. 1. 독립선언서 공약3장에 대한 진실 3・1운동 당시의 독립선언서 말미에는 공약3장이 명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公 約 三 章 ㅡ.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이니, 오직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ㅡ. 最後의 一人,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ㅡ.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여,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이 공약 3장에 대해서 사회 일각에서는 당시 불교 측 민족대표인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이 기초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그 진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만해의 기초설은 명백한 오류다. 이에 대해 지면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그 진실을 간략하게나마 밝혀보기로 한다. 만해의 공약3장 기초설(起草說) 내지 윤문설(潤文說)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만해의 제자인 김법린(金法麟)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신천지(新天地)」 1946년 3월호에 ‘3・1운동과 불교’라는 글을 게재하고 만해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이라면서 이렇게 썼다. “…宣言書의 作成에 관한 것인데 起草委員으로 崔麟, 崔南善 및 나 三人이었는데, 崔南善씨는 宣言書에 서명치 않고 草案만을 執筆하고 나는 그것을 수정키로 하고 崔麟씨는 起草責任者로 정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초위원’이란 용어와 만해가 독립선언서를 수정했다는 내용은 다른 자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위의 글이 나왔던 1946년은 해방 다음해로서 최남선처럼 친일행위를 한 변절자에게 혹독한 비판이 가해지던 시기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만해와 같은 지조 있는 독립투사에게는 역사적 진실과 관계없이 과장하거나 찬양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처럼 만해의 윤문설이 검증되지 않은 채 사실로 굳어져가는 상황에서 1960년 박노준(朴魯埻)・인권환(印權煥)의 공저(共著)로 저술된 『한용운연구(韓龍雲硏究)』(通文館 발행)에서 근거 없이 공약 3장을 만해가 수정하고 기초했다고 기술함으로써 결정적인 오류를 제공하는 단초가 되었다. 여기서 그 저술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일단 성안(成案)된 선언서를 보매 반드시 수정을 가하여야 될 곳이 몇 군데 있어서 그는 이를 고쳐서 인쇄에 부치기로 하였다는 사실은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의 공약3장은 순전히 그가 창안 첨기(添記)하였던 것으로 이것도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숨은 사실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아무런 근거 제시도 없이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라든가 ‘이것도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숨은 사실’이라는 소설 같은 표현을 함으로써 이를 와전(訛傳)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이와 관련된 민족대표의 심문조서를 살펴보기로 한다. 만해는 공소공판에서 “그 서류를 보고 독립에 찬성하였나?”라는 판사의 질문에 “그것을 보고 찬성한 것이 아니라 다소 나의 의견과 다른 부분이 있어 내가 개정한 일까지 있소”라고 답했다. 아마도 이 부분이 만해가 수정했다는 윤문설의 근원이 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개정한 초고는 독립선언서의 초고가 아니라 그 이외의 초고임을 다음 최린의 심문조서(1919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확인된다. 판사가 최린에게 “한용운은 이제 보인 세통의 원고를 가지고 있었을 뿐 선언서의 원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최린은 “그 선언서 초고는 인쇄하기 위하여 최남선에게 돌리고 한용운에게는 맡기지 않았다”고 하여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맡기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만해 자신도 3월 11일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의 검사 취조에서 이런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이때 검사가 압수한 증거물 6, 7, 8호를 보이면서 “이것은 피고가 가지고 있던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만해는 “그것 중 6호는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이고, 7호는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어 독립승인을 얻으려는 서면이며, 8호는 일본정부와 동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통고문의 안(案)이다. 또 그 외에 독립선언서의 안문(案文) 1통이 있는데 그것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여기서 만해가 갖고 있던 것이 독립선언서가 아닌 미국대통령, 각국 대표, 일본 정부와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초안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당시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서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정부와 의회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청원서를 초안 작성하였는데, 3・1운동 전날 최린은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제외한 다른 문건을 내어주면서 정서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해는 바빠서 정서하지 못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였다. 이상으로 만해가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접하지도 못하였을 뿐더러 더구나 개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독립선언서의 작성과정을 보면 의암성사가 3・1운동을 결심한 후 최린・권동진・오세창 3인을 참모로 하여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을 먼저 정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는 이종일이 쓰겠다고 자청했으나 그의 성격상 과격한 표현으로 선언서가 작성될 가능성이 있어 최남선에게 선언서 작성을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의암성사와 참모 3인이 독립선언서에 들어갈 대의(大義)를 협의한 후 이를 최남선이 최린의 부탁을 받고 그 대의에 준해서 독립선언서를 작성케 되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사회 일각에서 유포되고 있는 독립선언서에 대한 만해 한용운의 윤문설과 공약3장 기초설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거니와, 만해의 윤문설과 기초설 모두가 근거 없는 낭설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황당한 것은 박노준・인권환의 『한용운연구』에 의암성사를 직설적으로 모욕하는 근거 없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 내용부터 보기로 한다. “최린의 소개로 천도교의 성사 손병희와 대면한 그는 사태의 중대함을 소상히 설명하고 우리 민족이 독립선언을 하고 자주민임을 전 세계에 공포하기에는 이때처럼 좋은 시기는 없다고 갈파, 천도교 측의 호응을 요구한즉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즉석에서 거부함에 만해는 재차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여전히 응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는 그 이상 간청하여보았자 별무신통할 것을 인지하고 의암을 향하여 ‘이미 사건의 비밀은 타인의 귀에 들어갔으니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운동이 사전에 탄로가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목숨이 살아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의암도 그의 열렬한 민족주의사상과 투철한 민족의식에 감탄하여 조건부로 응낙하니, 그 조건이라 함은 의암 자신이 독립운동의 대표자로 되고 또 선언서에도 두서(頭書)하여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논평할 가치조차 없지만, 경술국치 이후 조국독립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계속 준비해온 의암성사에 대해 이런 허무맹랑한 날조를 하는 것은 소위 대학 강단에 서 있는 지성인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몰지각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 만해의 협박에 못 이겨 의암성사가 3・1운동을 마지못해 그것도 조건부로 응낙하였다니 앙천대소(仰天大笑)를 금할 수 없다. 이 기사는 전후가 맞지도 않을 뿐더러 만해 자신이 최린의 권유로 민족대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이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극치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날조로 인해서 3・1운동의 전개과정을 모르는 일반 대중들이 현혹되어 날조가 더욱 증폭되고, 심지어 3・1운동의 역사적 진실까지 왜곡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계속)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이 상은 남해천도교봉사회에 드리는 상입니다”선구교구 최진심 선도사는 수년간 남해 지역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선도하며 천도교의 위상을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이번 지일기념식에서 박인준 교령으로부터 공로패를 수상했다. 수상 소감을 묻자 최 선도사는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로 답했다. “이 상은 남해천도교봉사회에 주시는 상이라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상인 것 같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봉사하라는 뜻으로 알고 열과 성을 다하여 봉사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며 함께 봉사해온 동덕들에게 공로를 돌렸다. 최진심 선도사가 활동해온 남해천도교봉사회는 포덕 137(1996)년에 창립되었다. 남해교구, 선구교구, 포상교구, 고현교구의 여성 동덕 23명으로 시작해 현재는 17명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환경 정화 활동, 남해군 주관 행사 지원, 독거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봉사 등 지역 사회 곳곳에서 손길을 보태왔다. 최 선도사는 “환경 정화 활동부터 각종 행사 안내까지 맡아왔으며, 무엇보다 생활이 어려운 분들을 찾아가 청소, 반찬 제공, 말벗이 되어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30여 년간의 봉사 활동 중 기억에 남는 순간들도 많다. “남해천도교봉사회가 창립되기 전인 포덕 133(1992)년 처음 봉사를 시작했을 때 만난 할아버지가 기억납니다. 설암으로 일반식은 전혀 드시지 못하고 음료만 드시다가 4년 뒤 환원하셨습니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또 청각장애인 할머니와의 인연도 오래도록 남아 있다. “20여 년간 목욕과 반찬 제공, 청소 등을 하며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셨지만 우리가 찾아가면 반갑게 소리 지르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올해 5월 환원하셨을 때는 제 가족을 잃은 듯한 슬픔이었습니다.” 그에게 봉사는 단순히 도움이 아닌 인생의 한 부분이었다. 봉사 현장에서의 마음가짐에 대해 최 선도사는 특별한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는 천도교인다운 철학이 배어 있었다. “교인으로서 특별한 마 음가짐보다는 인내천 정신과 진실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봉사가 곧 신앙이 되고, 신앙이 곧 삶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담긴 대답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모든 분을 가족처럼 생각하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금처럼 봉사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쉼 없는 봉사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중요한 것은 화려한 성과가 아니라 일상의 꾸준함이었다. “우리 천도교봉사회는 이제 정착되었습니다. 함께 봉사한 회원들과 교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인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봉사할 수 있도록 중앙총부나 여성회본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당부했다. 이어 “30여 년 동안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묵묵히 응원해준 남편과 딸에게, 그리고 작은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키워주신 부모님께 고맙습니다”라며 가족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최진심 선도사의 땀과 눈물로 쌓인 나눔의 시간들은 천도교가 지향하는 인내천 정신을 삶으로 드러낸 길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한 울림은 교단과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
청소년 역사소설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 출판기념회 성황동두천교구 신동명 교무부장이 집필한 청소년 역사소설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 출판기념회가 포덕 166(2025)년 8월 16일, 수운회관 807호에서 열렸다. 이 책은 의암 손병희 성사의 신심(信心)과 결단, 3·1혁명의 진실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풀어낸 역사소설이다. 행사에는 교인과 지인 등 70여 명이 참석해 의암성사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 책이 갖는 의미를 공유했다. 축사와 덕담이 이어진 제1부 행사에서는 중앙총부 강병로 종무원장, 김춘성 선도사, 서종환 의창수도원장, 서은용 경원포 도정, 강정환 동두천교구장 등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신동명 작가의 집필 의지와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남연호 천도교도서관장은 의암성사가 봉황각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며 교재로 사용했던 『동경연의』 등을 언급하며 이번 책의 역사적 맥락을 강조했다. 제2부는 저자와의 만남으로 꾸려졌다. 신동명 작가는 집필 동기와 과정을 설명하며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을 낭독했고, 참석자들과 함께 「상록수」를 합창하며 출판의 의미를 나눴다. 신 작가는 “민족정신의 뿌리를 탐구하다 천도교에 입교했고, 청소년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전하고자 이번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시인이자 교육학 박사로서 청소년 교육과 토론문화 연구에 헌신해온 신동명 작가는 포덕 164(2023)년 천도교에 입교한 바 있으며, 차기작으로 해월 최시형 신사를 주제로 한 소설을 준비 중이다.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에 관한 자세한 책 소개는 아래 기사를 참고하면 된다.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881 -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 청소년에게 전하는 민족정신의 뿌리지은이: 신동명 장르: 청소년 역사소설 출판사: 도서출판 혜민기획 쪽수: 156쪽 발행일: 2025년 8월 15일 의암 손병희 성사의 삶을 다룬 청소년 역사소설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가 출간됐다. 이번 책은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어진 신앙의 길과 3·1만세운동의 민족사적 의미를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게 담아낸 역사소설로, 의암성사의 신앙과 결단을 생생히 되살린다. 이 책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천도교중앙총부 조회에서 의암성사가 “앞으로 10년 안에 반드시 독립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선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후 1919년 3월 1일, 의암성사는 마침내 그 약속을 실천하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을 울려 퍼지게 했다. 이 작품은 의암성사가 300만 명에 이르는 천도교인들을 이끌며, 기독교·불교 세력과 손잡아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한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낸다. 특히 3·1혁명의 배후에서 천도교가 그 기획과 준비를 주도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며, 그간 축소·왜곡되어온 역사 서술을 바로잡는다. 저자는 책에서 일제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폐해를 비판한다. 오늘날 3·1혁명이 한 인물, 특히 유관순이라는 개인의 이야기로만 좁혀지는 현실 역시 그 연장선으로 지적한다. 저자는 의암성사와 천도교, 종교 간 연대가 만들어낸 거족적 민족운동의 본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는 총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0년의 약속과 자주독립의 시작, 독립자금 모금 프로젝트, 종령 제120호 반포, 1919년 고종 황제의 서거, 불교·기독교·유림계와의 연대, 독립선언문 등은 3·1혁명의 주요 장면을 생생히 되살린다. 이 가운데 ‘민족운동의 제물엔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더 좋다’는 장은 청년과 학생들의 희생을 앞세운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며, 오늘날 역사적 성찰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저자 신동명은 시인이자 교육학 박사로, 청소년 교육과 토론문화 연구에 평생을 헌신해왔다. 현재 서정대학 청소년상담복지과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청소년문화진흥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년에는 천도교에 입교하여 동학과 천도교 정신을 연구하고 있으며, 이번 책은 그의 두 번째 청소년 역사소설이다.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3·1혁명의 진실을 청소년들에게 전달하고, 나아가 동학과 천도교의 평등·해방 사상을 미래 세대와 공유하려 한다. 또한 다음 작품으로 해월 최시형 신사에 관한 청소년 소설을 집필 중이다. 『3.1만세운동의 연출자 손병희』는 천도교인에게는 의암성사의 삶을 성찰하는 신앙의 길잡이가, 일반 독자에게는 한국 근대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창이 된다.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나라란 무엇으로 세워지는가? 신앙은 어떻게 삶을 지탱하는가?” 이 물음은 100년 전 의암 손병희 성사의 결단에서 비롯되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를 중심으로 본 천도교의 3·1운동 준비과정(1)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를 중심으로 본 천도교의 3·1운동 준비과정 1. 머리말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전개되었지만, 그 준비 과정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직접적인 요인은 고종의 승하와 일본에서 전개된 2·8독립운동이었지만, 멀리 그 연원을 본다면 일제 강점 이후 각 계층에서 꾸준히 준비한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천도교는 강점 직후 일제의 침탈을 반대하였고, (『황성신문』 1910년 9월 3일자.) 천도구국단의 비밀결사를 민중운동을 기획하였다. (권대웅,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218~221쪽.) 이 과정에서 천도교는 우이동 봉황각에서 49일 특별기도를 가졌으며, 3·1운동 직전 전교인들에게 역시 49일 특별기도를 갖도록 하였다. (성주현, 「우이동 봉황각과 3·1우동」, 『일제하 민족운동 시선의 확대-3.1운동과 항일독립운동가의 삶-』, 도서출판 아라, 2014.) 삼각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우이동 봉황각은 1912년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천도교단에서는 ‘의창수도원’으로 수련도장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등록되어 있다. 그 배경에는 천도교 제3세 교조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인 의암 손병희가 1912년 보국안민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봉황각에 대해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가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동이었던 이곳 27,900여평을 매입하여,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1912년에 세운 건물이다. (인터넷 다음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302425.) 또한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2호로 등록 (봉황각이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2호로 등록된 것은 1969년 9월 18일이다.)된 봉황각에 대해 서울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다. 1912년 의암 손병희 선생이 세운 것이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킨 곳으로 의창수도원이라고도 부른다. 봉황각이란 이름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남긴 시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다. 현재 걸려있는 현판은 오세창이 썼다. 손병희 선생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심어주는 한편,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이 집을 지었다. 1919년 3·1운동의 구상도 이곳에서 했으며, 이곳을 거쳐 간 지도자들이 3·1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0020000,11.) 앞의 인터넷 백과사전과 안내문에 의하면, 우이동 봉황각은 3․1운동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민족지도자를 양성한 수도원’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사실은 그동안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못하였다. 이에 본고는 우이동 봉황각과 3·1운동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우이동 봉황각이 건립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이어 우이동 봉황각에서 민족지도자를 어떻게 양성했는가를 49일 특별기도틀 통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끝으로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지를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일제 강점과 봉황각의 건립과정 봉황각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건립되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지 불과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른바 ‘무단통치’라는 일제의 지배정책으로 한민족을 강압과 억압으로 통치하였다. 그중에서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겪은 일제는 천도교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미 통감부 시기부터 “종교는 국가의 기축”이라고 하여 천황제 국가이념을 요구하였던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이후 종교정책은 자율적 활동보다는 국가의 철저한 통제를 근간으로 삼고자 하였다. (성주현, 「일제의 동화정택과 종교계 동향」, 『식민지 조선과 『매일신보』-1910년대』, 신서원, 2003, 174쪽.) 더욱이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종교활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천도교에 대해 “순연히 종교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 ‘취체’가 불가피하다고 하였다.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시정연보』, 1911, 77쪽.) 이와 같은 식민지 상황에서 천도교의 동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의 강점을 발표하자, 천도교에서는 곧바로 일제 강점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당시 천도교는 일제 강점 직전인 1910년 8월 15일 기관지 『천도교회월보』를 창간하였다. 이 『천도교회월보』를 창간한 천도교회월보사는 일제강점을 반대하는 서한을 각국 영사에게 발송하였다. 이로 인해 『천도교회월보』발행의 주무를 맡고 있던 김완규를 비롯하여 오상준, 이종린, 이교홍, 김건식 등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천도교대종사일기』;「何事被捉」, 『매일신보』 1910년 9월 3일자. ) 그리고 20여 일 만에 석방되었다. (「天道敎員의 蒙放」, 『매일신보』 1910년 9월 18일자.) 이처럼 천도교가 일제 강점의 부당성을 지적하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천도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미제의 폐지였다. ‘성미’는 교인들이 교단에 기부하는 성력으로 교단 운영의 근간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총독부는 천도교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성미제를 강압적으로 폐지토록 하였다. 당시 상황을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성 제2 헌병분대장 村田多忠씨가 천도교주 손병희 씨를 초치하여 일반교인에게 誠米收捧하는 事에 관하여 엄절히 설유함은 已報하였거니와 손병희 씨는 지방 교인에게 통지하고 收捧하던 誠米는 從今 이후로 일체 폐지하라 하였다더라. (「天道敎의 誠米廢止」, 『매일신보』 1911년 4월 23일자.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조선총독부의 압력이 있었지만, 천도교는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상황에서 내적 결집력을 강화해 나갔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의 강점 직전인 1910년 8월 중앙총부 임직원과 서울 시내 주요 교역자들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곧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당시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의 형편은 마치 머리 없는 사람 같이 되었다. 나라의 세 가지 요소는 주권과 토지와 인민이며, 이 세 가지를 합해서 나라이라 하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주권이 없는 나라이니 머리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야. 일본이 몇 해를 두고 우리 나라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보호한 것이 무엇이냐. 토지를 보호하였단 말인가. 재산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주권은 司法이요 사법은 주체인데, 사법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사농공상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중략) 내가 일본 사람에게 보호 사실을 질문한다면 한국의 토지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토지를 보호한 것이요, 한국의 주권과 인민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주권과 인민을 보호한 것이요, 한국의 농상공업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농상공업을 보호한 것이라 하리라. 조기주, 『동학의 원류』, 보성사, 1979, 296-297쪽. 즉 의암 손병희는 당시를 ‘한국은 주권이 없는 나라’임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또한 그동안 일본은 한국을 보호한다고 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일본만을 위한 것으로 분명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의 흑심 즉 ‘침략’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의암 손병희의 예지력은 이미 1900년대 초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인식하였다. 그래서 1904년 갑진개화운동을 통해 민회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무능한 정부와 일제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1904년 ‘黑衣斷髮’로 상징되는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용창, 『동학·천도교단의 민회설립운동과 정치세력화 연구(1896~1906』,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4를 참조할 것.)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의암 손병희는 천도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이 시대를 담당할 것인가. 우리는 다 같이 천부의 고유한 성품을 받아 天權을 소유하였으니 천도교로 天賦의 성품을 삼고 천도교로 天權行使의 목적을 삼아 만분지일이라도 천권행사에 해이한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계 통유의 보호국은 반독립국이라 하나 오늘 우리 나라는 일본의 領地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세계와 국가와 내 몸뚱이는 나의 腦髓에 달려 있는 것이니, 내 몸을 위하는 마음이 뇌수를 떠나지 않으면 몸이 반드시 윤택할 것이요, 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뇌수를 떠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흥왕할 것이요, 세계를 위하는 마음이 뇌수를 떠나지 않으면 세계가 반드시 평화할 것이다. 뇌수는 곧 사람의 요소이다. (조기주, 『동학의 원류』, 297쪽.) 즉 지금은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이 없지만, 교인 개개인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종교적 감화’를 통해 천도교가 가야 할 길을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천도교는 두 가지 방안을 통해 독립을 준비하였다. 하나는 강습소 설립을 통한 교리교육의 강화이었고, (의암 손병희는 교리강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가 교리강습을 하는 것은 교리에 대한 지식을 넓히어 장래의 교역자가 되어 교회를 확장할 준비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만도 않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세 가지의 큰 희망이 있으니 첫째는 자기를 위한 행복이요, 둘째는 국가 민족을 위한 경륜이요, 셋째는 교회와 인류사회를 위한 공헌이니, 자기 개인의 행복은 결국 국가사회를 위하는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니라. (중략)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첫째로 마음이 굳어야 하다. 교리를 연구하여 그대로 실행하면 현인군자는 될 수 있으나 성인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하라. 대신사 말씀과 같이 요순공맹이 다시 살아와도 어절 수 없는 이 시대 이 세상에 우리들이 우선 요순공맹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5만년 大道事業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먼저 굳은 신념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이라.”) 다른 하나는 종교적 심성을 강화하는 수련이었다. 전자는 1910년대 교리강습소 설립과 운영으로, 후자는 우이동 봉황각 건립으로 각각 구현되었다. 천도교는 무엇보다도 ‘종교의 감화’를 받기 위해 수련을 강조하였다. 즉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무슨 큰일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감화를 받아야 만사가 무위이화의 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이라고 다 감화를 받는 것이 아니요 감화를 받지 못하면 그만큼 수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난 체하는 사람이라도 한울님의 감화를 받지 못하면 사람의 능력만 가지고는 도저히 큰일을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니라”고 하여, 큰일을 성공시키려면 수련을 통한 종교적 감화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천도교는 수련할 만한 공간 즉 수도원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의 강점 이후 천도교인의 독립 의지를 다지기 위해 수련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이에 의암 손병희는 1911년 8월 중앙총부 임직원을 대동하고 우이동을 답사하였다. 당시 우이동은 깊은 계곡으로 원족회나 탁족회 등으로 유명하였다. 의암 손병희는 우이동을 들러본 후 금융관장 윤구영에게 우이동 일대의 밭과 임야 등 3만평을 가격이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말고 무조건 매입하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함께 같던 임직원들은 이런 심산유곡의 토지를 매입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하면서 그 영문을 잘 몰라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의암 손병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우이동 일대 밭과 임야 등 27,946평을 매입하였다. (조기주, 『동학의 원류』, 307-308쪽.) 의암 손병희가 삼각산의 정기가 살아있는 우이동 일대를 매입한 것은 앞서 강조하였던 ‘종교적 감화’를 위한 수련 도장을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장차 천도교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방략이었던 것이다. 우이동 일대를 매입한 천도교는 이듬해 1912년 3월 7일 이곳에 연원 두목과 지방 교역자의 수련을 위한 도장으로 봉황각을 기공하여 6월 19일 준공하였다. 봉황각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본전 木造 瓦葺平家 건평 28평 2합 내실 木造 瓦葺平家 건평 18평 2합 부속 건물 洋瓦葺 건평 8평 3합 (조기주, 『동학의 원류』, 309쪽.) 그리고 봉황각의 현판의 ‘鳳’자는 중국의 명필 안진경, ‘皇’자는 역시 중국인 회소, ‘閣’자 역시 중국인 미불의 필적을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분인 오세창이 모사한 것이다. 3.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와 독립의식의 강화 우이동에 수련 도장으로 봉황각을 건립한 의암 손병희는 전국 각 지방의 주요 두목급 지도자를 불러 49일 특별기도를 실시하면서 매 수련 때마다 민족과 교회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다지는 법설을 남겼다. 본절에서는 49일 특별기도 과정과 의암 손병희의 법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의암 손병희는 1910년 8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할 때부터 ‘국권회복’을 그 지향점으로 삼았다. 그러기 때문에 3․1운동의 목적은 ‘국권회복과 한국의 독립’이었던 것이다. (이병헌, 『3․1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73쪽.) 따라서 의암 손병희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그 순간부터 국권회복과 한국의 독립은 천도교가 그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폭력적 수단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고자 하였다. (이병헌, 『3․1운동비사』, 81쪽.) 이에 대해 의암 손병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문 ; 피고는 장래나 또는 미래에도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가. 답 ;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려는 나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폭력으로 수행할 생각은 조금도 없고 평화리에 해결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는 일제의 폭력에 대한 간접적 비판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소극적 행동’이라고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종교지도자로서의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의암 손병희는 앞서 강조하였던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과 종교적 수양을 통한 수련으로 정신적 무장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천도교에서 행한 49일 특별기도는 독립의지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였다. 의암 손병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문 ; 천도교는 본년(1919년, 필자)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회를 열 것을 각 교도에게 시달하고 실행한 일이 있는가. 답 ; 나는 해마다 기도를 올리는데, 천도교에서는 협의상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 ; 그 일을 각 교구에 문서로 배포 전달하였는가, 교구장을 모아서 시달하였는가. 답 ; 그것은 교주가 문서로 발표하였다. 문 ; 그 기도는 어느 때부터 조선독립을 성취할 시기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이병헌, 『3․1운동비사』, 86쪽.) 즉 의암 손병희는 49일 특별기도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의암 손병희는 일제 강점 직후 수련도장을 건립할 곳을 물색하였고, 그 장소로 우이동을 답사한 것이다. 그리고 우이동에 3만여 평을 매입한 후 곧바로 49일 특별기도를 시행할 수련 도장으로 봉황각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봉황각 건축과 동시에 우이동에서 49일 특별기도를 모두 일곱 차례 진행되었다. 일곱 차례의 49일 특별기도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 실시 현황 (『천도교회월보』 (30호에 의하면, 49일 특별기도를 제1회는 도선암, 제2회는 도선암과 봉황각, 제3회 역시 도선암과 봉황각에서 각각 진행하였다.(67쪽))) 흔히 봉황각 49일 특별수련은 일곱 차례로 알려져 있지만, <표 1>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실제로는 여섯 차례 실시되었다. 그렇지만 도선암에서 실시한 1회는 봉황각 건립과 동시에 실시되었기 때문에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포함하여도 무방할 것으로 판단된다. 봉황각 특별수련은 49명에서 105명까지 참가하였기 때문에 1회 특별수련을 하였던 도선암을 활용하였다. 의암 손병희는 전국 지방의 핵심 교역자를 불러 도선암과 봉황각에서 49일 특별기도를 실시하면서 매번 법설을 하였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이신환성’이었다. 법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회 및 제2회 연성의 묘법은 以身換性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有形한 ‘나’이니 이 유형한 나를 無形한 나로 바꿀 것이요, 身邊世事의 나를 性中天事의 나로 바꿀 것이다. 그대들이 만일 육신의 나로부터 생기는 모든 인연을 끊는다면 본연한 性靈의 나는 자연히 나올 것이다. 사람은 평소에 견실한 수양을 쌓지 않으면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마음이 흔들리나니 이것은 그대들로 하여금 반드시 꼭 수련을 해야겠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시적인 결심은 쉬우나 평생을 통한 결심으로 수양하기는 어려우니라. ◆ 제3회 (의암 손병희와 참여자 간의 대화) 지동섭 : 대신사께서 다시 출세하신다 하니 사실입니까? 손병희 : 성령으로 출세하실는지 육신으로 출세할는지는 말할 수 없으나 다시 출세하실 것만은 분명하니라. 지동섭 : 그러면 누구나 뵐 수 있습니까? 손병희 : 정성이 지극하면 뵈올 수 있느니라. 지동섭 : 그때가 언제쯤 되겠습니까? 손병희 : 이번 49일 기도를 마치는 날쯤이면 출세하실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육신으로 다시 출세하는 것은 천하에 없는 일이니 육신 출세야 바랄 수 있겠느냐마는 설사 육신으로 출세할지라도 그대의 수련이 부족하면 대신사를 뵈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대신사의 출세 여부는 그대들의 수련 독실 여부에 있는 것이니라. ◆ 제4회 道는 家道和順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先師께서 역설하신 것이니, 수도의 극치는 夫和婦順이다. 天下大事는 다툴지언정 가정에서야 다툴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사람은 아무리 聖人이라도 죽기 전에는 그 인격과 명예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요, 큰 성인은 큰일을 당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생활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니, 첫째는 思想生活이요, 둘째는 學問生活이요, 셋째는 勞動生活이다. 그 중에서 사상생활 하는 사람은 능히 학문생활 하는 사람과 노동생활 하는 사람을 부릴 수 있으나, 노동생활 하는 사람은 학문생활 하는 사람과 사상생활 하는 사람을 부릴 수 없는 것이다. 난세에는 이것이 바뀌기 때문에 민생이 도탄에 드는 것이니라. ◆ 제5회 내가 以身換性에 대하여 말하였거니와 성령은 不生不滅하므로 氣數가 능히 制御하지 못하나니 진실로 오는 禍를 免하고자 하면 성령과 육신을 바꾸어 믿는데 있느니라. 성령과 육신을 바꾸어 믿는 방법은 육신관념을 끊어야 하나 육신관념을 끊으려면 더욱 어려울 것이니, 육신관념을 끊으려고만 생각지 말고 일거일동에 누가 능히 나로 하여금 말을 하고 생각을 하게하고 움직이게 하는가 하고 이것을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면서 적극적인 공부를 계속하면 자연히 성령이 주체가 되고 육신이 객체가 되어 위로는 대신사와 같이 대각이 될 것이요, 아래로는 가히 육신의 화를 면할 것이니라. (중략) 오늘의 일은 국가의 일이거나 교회의 일이거나, 오늘에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사람은 큰일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수련이 있어야 하나니, 종교적 수련이 없으면 한울의 감응을 받기 어려운 것이니라. 한울님의 감응을 받으면 萬理萬事가 無爲而化로 되는 것이요 한울님의 감응을 받지 못하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니라. 지금 세상은 힘센 사람의 제일인데, 완력도 힘이나 개인과 개인 사이에 힘을 겨루는 것으로 이러한 완력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권력과 재력과 지력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나, 앞날의 세상은 도력으로써 많은 사람을 감화케 해야 할 것인데, 그것이 포덕이다. 우리 교회에서 포덕을 많이 한 사람이 가장 힘이 센 사람이니, 포덕은 하면 할수록 힘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니라. 조기주, (『동학의 원류』, 310-316쪽 참조.) 이상의 법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신환성’이다. ‘이신환성’이란 “몸을 성령으로 바꾸라”는 것인데, (『천도교경전』, 천도교중앙총부, 1991, 646쪽.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몸을 성령으로 바꾸라는 것은 대신사의 본뜻이니라. 육신은 백년 사는 한 물체요, 성경은 천지가 시판하기 전에도 본래부터 있는 것이니라. 성령의 본체는 원원충충하여 나지도 아니하며 멸하지도 아니하며 더하지도 아니하며 덜하지도 않는 것이니라. 성령은 곧 사람의 영원한 주체요 육신은 곧 사람의 한 때 객체니라. 만약 주체로써 주장을 삼으면 영원히 복록을 받을 것이요 객체로써 주장을 삼으면 모든 일에 災禍에 가까우리라. (중략) 무릇 안락의 말은 듣기에는 비록 좋으나 실은 안락이 하니라 도리어 險固하고, 험고의 말은 듣기에는 비록 싫으나 실은 험고가 아니라 곧 안락이니, 우리 교의 대신사는 성령으로 주체를 삼으신지라. (중략) 그러므로 육신을 성령으로 바꾸는 사람은 먼저 괴로움을 낙으로 알아야 가하니라.”) 이는 곧 자신을 희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제1회 및 제2회에서 언급한 “사람은 평소에 견실한 수양을 쌓지 않으면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마음이 흔들리나니 이것은 그대들로 하여금 반드시 꼭 수련을 해야겠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시적인 결심은 쉬우나 평생을 통한 결심으로 수양하기는 어려우니라”와 “사람은 아무리 聖人이라도 죽기 전에는 그 인격과 명예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요, 큰 성인은 큰일을 당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것과 제5회 법설의 “사람은 큰일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수련이 있어야 하나니, 종교적 수련이 없으면 한울의 감응을 받기 어려운 것이니라. 한울님의 감응을 받으면 萬理萬事가 無爲而化로 되는 것이요 한울님의 감응을 받지 못하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니라” 등은 ‘자신의 희생’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식민지 상황이지만, 이신환성된 자신을 희생하여 민족 독립의 길에 두려움 없이 참여할 것을 은연 중 각인시켰던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의 강점 직후부터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인 이신환성을 직접 몸으로 체험케 하여 ‘큰일’ 즉 3․1운동을 준비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지방에서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하였던 주요 교역자는 이신환성을 통해 민족 독립에 기여할 것을 마음 깊이 다짐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49일 특별기도는 천도교인에게 있어서 민족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천도교를 탄압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교를 통한 천도교 교세의 확장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의 하나였던 것이다. 더욱이 49일 특별기도가 끝날 무렵에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그 결과 승전국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는 이신환성으로 무장한 천도교인에게는 희망의 메시지, 즉 독립의 기회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천도교는 이와 같은 특별기도를 통한 민족의식을 강화하면서 대규모의 민중운동을 준비하였다.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를 끝낸 이후 즉 1914년 8월 천도교 내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민족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비밀결사인 천도구국단을 조직하였다. 이종일은 천도구국단 조직에 앞서 기독교 또는 불교와 연합하여 민중운동 형태의 대중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1917년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에 가까워지자, 이종일은 다시 민중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암 손병희에게 제안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919년 3월 1일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원칙으로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성주현,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의 비밀결사와 독립운동자금모금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5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8, 150-152쪽.) 이러한 의미에서 1919년 들어 3·1운동을 앞두고 천도교는 앞에서 인용한 의암 손병희의 신문과정에서 답변한 바와 같이, 이해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 특별기도를 봉행하면서 3·1운동에 대한 정신적 무장과 마음의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종령 제120호」, 1918년 12월 6일자; 『천도교회월보』 100호, 1918.12, 83-84쪽; 이동초, 『천도교회종령존안』, 219-220쪽. 당시 천도교에서 발송한 종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吾敎의 主愛-必爲世오. 大願이 亦爲世라. 故로 我信者-愛를 發함에 爲身爲世의 差異가 無하며 願을 發함에 亦爲身爲世의 區別이 無함이 卽吾敎의 原理를 體行함이오. 吾師이 明訓을 服膺함이라. 今此 世族前途의 享福을 爲하여 慧眼의 所到와 願力의 所發이 自有不己라. 故로 特히 祈禱의 節次를 定하여 左記 佈明하노니, 惟我宗徒는 廣濟蒼生의 大願으로 天主와 兩位 神師께 至誠奉祈할지어다. 左記 一. 기도기간은 49일로 정하되 明年 1월 5일부터 仝 2월 22일까지 함. 一. 기도시간은 매일 하오 9시로 함. 단 侍日에는 先히 侍日祈禱를 終하고 仍續 奉行함. 一. 기도의식 一, 淸水 一器를 奉奠함. 一, 白米 5合을 奉奠함. 단 白米는 기도기간 종료 후에 自家食料에 供하되 청결히 소비함을 주의함(예컨대 밥알이라도 땅에 함부로 버리지 못할 일). 一, 燭火 3個를 淸水卓前에 點함. 一. 기도심고는 畢히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大願으로써 함. 一. 기도심고를 필한 후 呪文(神師靈氣我心定無窮造化今日至)을 12회씩 細音으로 誦함. 一. 기도기간 내에 酒草를 금하며 家內 淨潔을 특히 주의함. 一. 敎區 及 傳敎室에 상주한 임원은 該敎區室에서 奉行함.”) 4. 특별기도 참여자와 지방 3·1운동의 확산 앞서 살펴보았듯이 도선암의 두 차례 기도를 포함하여 우이동 봉황각에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49일 특별기도를 봉행하였다. 앞의 <표 1>에 의하면,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지방의 주요 인물은 1차 21명을 비롯하여 모두 483명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천도교 지방조직인 지방 교구의 핵심적인 지도자였으며, 3·1운동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많은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경우이다. 1차에 참여한 홍기조, 임예환, 나인협, 박준승 등이 있다. 이들은 지방에서 활동한 중요 교역자였다. 홍기조는 평남 용강 출신으로 당시 道師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홍기조는 민족대표로 참가한 후 일경에 피체된 후 신문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게 하면 일본 제국은 반드시 세계의 대세를 비추어 쉽게 조선의 독립을 허락해 줄 것”으로 답변한 바 있다. (「홍기조 신문조서」.) 이는 3․1독립선언은 ‘선언’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된 민족운동의 ‘점화’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홍기조뿐만 아니라 함께 민족대표에 참여한 평양의 임예환과 나인협, 임실의 박준승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임예환 신문조서 」; 「나인협 신문조서」; 「박준승 신문조서」.) 다음으로 3·1운동 ‘3대 항쟁’으로 널리 알려진 황해도 수안군과 평남 맹산군, 그리고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수안군의 경우, 5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안봉하와 6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김영만이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수안교구장이었던 안봉하는 3월 1일 곡산교구장 이경섭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안봉하는 김영만 등과 함께 3월 3일 만세운동을 전개키로 하고 관내 교인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3월 3일 오전 6시경 수안교구에 집결한 교인들은 안봉하, 김영만, 한청일, 이영철 등이 태극기와 궁을기를 들고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군중을 이끌던 이영철은 금용조합 앞에서 “우리들은 오늘부터 일제의 통치를 벗어나서 자유민이 되고, 조선국의 목적인 독립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호응하였다. 이어 헌병대 앞에서도 만세시위를 하였는데, 헌병들의 발포로 9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하였다. 맹산군의 경우, 2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방기창을 비롯하여 3차의 이관국, 5차의 방진원, 6차의 김치송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덕천교구 공성원 현성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맹산교구는 교구장 문병로 외에 길응철, 방기창, 정덕화, 김치송, 이관국, 방진원 등이 주오하여 3월 6일 천도교인 6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3월 10일 일제 경찰이 만세시위 주동자를 검거 고문한 것을 항의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천도교인 다수가 희생되었다. 그리고 수원군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은 7차 특별기도에 참가하였던 김흥렬, 3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한세교와 이성구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수원교구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일경의 급습으로 수원에서는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팔탄면의 백낙렬 등과 협의한 후 기독교, 유교와 연합하여 3월 31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이때 우정면주재소 가와바다(川端) 순사가 살해되었는데, 이를 핑계로 일제는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대학살극을 자행하였는데, 당시 천도교인 3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성주현, 「수원지역의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재조명」, 『수원문화사연구』 4, 수원문화사연구회, 2001을 참조할 것.) 이외에도 우이동 봉황각 특별기도에 참여하였던 교역자들이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지방의 3·1운동을 확산하는 데 기여하였다. 2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황학도, 김수옥, 유계선과 3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이초옥은 평양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평양교구장 우기주는 김수옥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받아오게 한 후 황학도의 집에서 김수옥, 유계선, 이초옥, 송영율, 김형국, 이기열, 이성삼 등과 함께 협의한 후 독립선언서를 관내 전교실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양의 천도교인들은 3월 1일부터 8일까지 기독교인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성천군의 만세운동 역시 49일 특별기도에 참가하였던 이돈하(2차), 나종선(3차), 한병순(5차), 김택서(5차), 김문홍(6차)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4일 천도교인과 군중 4천여 명을 이끌고 성천읍 상부리 헌병대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20여 명이 사망하였다. 용강군에서는 1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홍기억이 중심이 되어 3월 2일부터 6일까지 교구를 비롯하여 면전교실이 있는 곳마다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평남 안주군은 2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김안실과 3차에 참가한 김명준이 3·1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안실 교구장은 당시 교회 간부였던 김광호, 김춘택 등과 의논하는 한편 보통학교 교사이며 천도교인 차신정을 평양교구로 파견하여 3·1운동의 실정을 파악케 하였다. 이어 3월 3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기독교측과 연대를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3월 3일 오전 11시경 율산공원에서 5천여 명의 군중을 동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인 연성운, 이의범 등이 현장에서 일제의 총격에 희생되었고, 김춘택 연성도 유봉수 등이 검거되었다. 평북 의주의 만세운동 역시 특별기도에 참가한 최석련(2차), 최안국(5차), 안국진(3차), 김처길(3차), 김국언(4차)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선천교구의 김상렬(6차 특별기도에 참가)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후 최동오 등과 함께 3월 2일 남문 앞 광장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리더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계속)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
천도교부산시교구, UN군 전몰장병 합동 위령의식 참석 “평화와 생명 위한 기도”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천도교부산시교구는 6월 23일 부산 UN기념공원에서 열린 ‘2025 UN군 전몰장병 및 호국영령 합동위령의식’에 참여하여, 나라와 민족, 인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추모하고 천도교의 생명존중과 평화사상을 다시금 다짐하였다. 이날 위령의식은 부산종교인평화회의(BCRP, 대표회장 정산 스님) 주관으로 유엔기념공원 내 유엔추모관과 위령탑 앞에서 엄숙하게 봉행되었다. 천도교에서는 박차귀 부산시교구장이 참석해 헌화와 묵념, 종교별 추도식에 함께했다. 이 자리에는 불교, 천주교, 개신교(NCCB), 원불교, 유교 등 부산지역 6대 종단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함께하여, 국경을 넘어 이 땅에 생명을 바친 전몰장병 11개국 2,300여 명의 넋을 기렸다. 합동 위령의식은 헌화와 참배를 시작으로, 국민의례, 묵념, 내빈소개, 추도사, 종교별 추도식, 추모의 노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각 종단은 각자의 방식으로 평화의 뜻을 기원했다. 부산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 정산 스님은 추도사에서 “UN군 전몰용사들의 용기와 투혼을 기억하며, 우리 후손들이 보다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밝혔다. 천도교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은 “한울님의 도를 따르는 천도교인들은 언제나 생명과 평화, 인류 보편의 진리를 지향해왔다”며 “동학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의 이 자리가 하늘과 사람을 하나로 잇는 진실한 추모와 다짐의 자리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부산종교인평화회의는 종교 간의 교류와 협력을 바탕으로 부산 지역사회의 화합과 발전, 나아가 지구촌의 평화와 인권, 생태와 복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천도교부산시교구는 이러한 노력에 함께하며, 생명과 평화의 종교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 자료제공 천도교부산시교구 -
천도교여성회 금요강좌, "해월신사의 꿈" 제2부 공개지난 5월 30일 천도교여성회가 진행한 금요강좌, 혁암 김혁태 종학대학원 원장의 “해월신사의 꿈” 제2부가 공개되어 천도교의 창도 정신과 해월신사의 깊은 가르침을 조명했다. 이번 강좌는 동학과 천도교의 핵심 사상인 *“사람은 하늘이다”*라는 평등 이념을 중심으로, 차별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천도교의 근본 목적을 심도 있게 풀어냈다. 강의에서 김 원장은 천도교 경전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이를 일상의 삶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임을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교리 이해를 넘어 실천적 삶의 자세를 요구하는 천도교의 특징을 드러낸 부분이다. 또한 그는 지도자의 역할과 신앙심의 중요성을 함께 짚으며, 천도교인이 가져야 할 가치관과 사회적 책임을 일깨웠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진실에 기반한 신앙을 통해 현실과 호흡하는 종교로서의 천도교를 재조명하며, 신앙과 사회 참여의 조화를 강조했다. 김혁태 원장의 강좌는 종교가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해월신사의 사상과 오늘날 천도교인의 자세에 대해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고 있다.
